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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 黃金의 遊牧文化 스키타이

설레임의 하루 2012. 1. 20. 18:22

스키타이와 페르시아,그리고 동로마제국을 유린하고 유럽인들에게 黃禍論(Yellow Peril)으로

유럽을 공포에 전율케한 <훈족>을 그대로 흉노족으로 볼 수 없다는것이 운영자의 소견입니다.

당시 흉노의 위치나 흉노의 대추장 선우씨는 고조선의 일파로 보아야, 왜냐하면 지나사학계의

고대역사지도에도 나타나 있듯이 흉노=예맥= 東鮮(퉁셴)=고조선의 별칭이고 또한 흉노족은 있어도

흉노국은 없다고 주장하는 이면엔 古朝鮮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底意가 있어.(운영자 주)

 

스키타이는 인류 최초의 유목민족, 페르시아도 굴복
기원전 7~6세기경 출현, 흑해 북안·이집트·시리아 휩쓸며 황금강국 건설…

왕족·유목·농경 스키타이 부족으로 구성돼

 

▲ 스키타이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빗 상부의 전투장면 장식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구약시대에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예레미아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서 활동했던 그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극심한 종교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신의 계시를 통해 거듭해서 경고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쓴 ‘예레미아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같이 다 항오(行伍)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6장 22~23절) 여기서 그가 마치 환상을 본 듯 서술하고 있는 활과 창을 잡고 말을 타고 줄을 지어 엄습하는 전사들은 아시리아인도 바빌론인도 아니었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목민족이라 칭해지는 스키타이였다.


스키타이인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민족이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의하면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아마 큰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던 그들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은 다른 민족들이 붙여준 이름일 것이다. 스키타이라는 명칭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데,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우리 문화의 원류 가운데 하나로 ‘스키타이’ 혹은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라는 것이 소개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볼가강)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마사게태라는 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도망쳐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예레미아는 바로 그때 내려온 스키타이를 목격한 것이었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당시 근동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전투를 하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근동 지역에는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여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출현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와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 의해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의 국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국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한다.


▲ 스키타이 시대의 중앙유라시아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현지의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복종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할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현지 주민과의 민족적 혼합도 동시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건설된 스키타이 국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왕족 스키타이’라는 집단인데 최고의 지배층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일반 유목민으로 구성된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피정복민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구조는 스키타이 국가가 결코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다양한 부족들의 결합체였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리우스 대제는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기 위해서 초원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고갈된 페르시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원에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파지리크 고분에서 발견된 미라의 피부에 새겨진 동물양식의 문신.

외부의 위협을 극복하고 성취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된 그리스와의 교역은 스키타이 국가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의 발전과 번영은 그들이 남긴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물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 ‘쿠르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들은 흙과 돌로 쌓여진 작은 언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높이 20m에 이르며 그 아래에는 목곽분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들 스키타이 고분들은 특히 쿠반 반도(켈레르메스, 코스트롬스카야)와 크리미야 반도(쿨 오바, 체르톰리크, 솔로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곳이 스키타이 국가의 핵심적인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유물 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히 많아서 스키타이 귀족들의 재화와 부의 규모를 추측케 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특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스키타이 문화의 3대 요소로 마구, 무기, 동물양식을 드는데, 이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동물양식이다. 이같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대립되어 왔다. 하나는 남러시아 자생설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 기원설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의 유물들을 보면 남러시아나 서아시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전반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아르잔이라는 곳에서 직경 12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결정적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동물양식의 유물들보다 시기가 빠른 기원전 9세기 중후반으로 판명된 이 고분에서 후일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국가의 중심지는 흑해 북안이었다. 그러나 동물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유목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다. 1940년대 후반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지녔다. 적석총의 특징을 지닌 신라시대 고분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파지리크 고분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묘실 안팎으로 스며든 이슬과 빗물이 결빙되어 고분 전체가 일종의 냉장고가 되어버려, 그 속에 있던 시신과 많은 부장품들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미라 처리되어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 시신의 피부에는 동물양식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면 피부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순장된 말들과 거기에 씌웠던 말가면이 나왔고, 목제품·펠트·직물 등에도 스키타이 특유의 양식들이 보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대마초를 흡입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그대로 발견되어,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직조된 카펫,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도 발견되어 광범위한 교역의 존재도 짐작케 한다.


그 뒤 1969~1970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서 멀지않은 이식쿨 호수 부근에서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다수의 고분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소위 ‘황금인간’으로 알려진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장 165㎝로 추정되는 청년이 입고 있던 황금으로 된 의상 때문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4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장식을 한 모자이다. 고대 페르시아 자료에는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라는 종족이 언급되어 있는데, ‘티그라’는 화살을, ‘하우다’는 모자를 뜻하며, ‘사카’는 ‘스키타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종족명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살 같은 모자를 쓴 사카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니, ‘황금인간’은 바로 이 종족에 속한 귀족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더 서쪽의 몽골리아 초원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 울란바토르 북방 80㎞에 위치한 노인 울라 고분은 동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나온 다량의 부장품 가운데 그리핀이 순록을 공격하는 모양이 수놓인 카펫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직물이나 칠기 등이 다수 있고 그 중에는 전한 건평5년(기원전 2년)의 명문(銘文)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흉노가 한나라와 조공 관계를 통해서 상당량의 물품들을 입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은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서도 강하게 발견되고 있다. 흔히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초원 청동기 제품들 중에는 맹수가 초식동물을 덮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초의 유목민 스키타이가 출현했을 때부터 중앙 유라시아는 대륙의 주변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흑해 북안에서부터 내몽골 초원에 이르기까지 중앙 유라시아 전역을 관통하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고립된 문명이 아니었다. 크리미아 반도에서, 알타이 산중에서, 또 몽골고원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미 3000년 전부터 중앙 유라시아의 주민들이 주변의 그리스, 페르시아, 중국 등과 밀접한 접촉과 교류를 해왔음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지역은 유라시아 문명권의 공통된 접점으로서 주변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흡수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요소들을 수용하고 변화시킨 뒤 다시 주변지역으로 방출함으로써, 수동적 전달자가 아니라 적극적 참가자로서 유라시아 역사를 움직여갔던 것이다. ▒


동물양식(animal style)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후 2~3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초원지역에 광범위하게 나타난 예술적 표현양식이다. 스키타이인들의 고분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에서 전형적인 형식이 보이기 때문에 ‘스키타이 동물양식’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나무·쇠·청동·금·은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였고, 사슴·양·말·표범·매·그리핀과 같은 동물들의 모양을 양식화(stylize)하여 표현하였다. 특히 황금으로 만들어진 항아리·머리핀·목걸이·버클·장식판 등은 매우 정교하고 풍부한 예술적 표현을 담고 있다. 항상 이동하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작고 가벼운 물건들을 휴대했고 따라서 장식물의 작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동물의 몸이 둥글게 말려 있는 모습, 무릎을 완전히 꺾어서 구부린 상태, 맹수의 공격에 저항하면서 목이 180도 젖혀진 모습 등이 묘사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또한 맹수가 공격하는 모습이 표현된 장식품을 의복과 무기에 부착한 것은 그러한 장면이 지니는 상징적 주술성과 공격성이 그것을 부착한 용사에게 전이되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됩니다.

 

서울대 김호동 교수 집필.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도불원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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