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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몽골은 단군의 후손으로 우리와 형제

설레임의 하루 2012. 1. 4. 23:49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원문) 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했다. 혹자들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무자 5년(B.C2133) 둥근 모양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貝錢)을 만들었다. 가을 하(夏)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야별기(朝野別記)를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 (B.C2131) 배 만드는 곳을 살수(薩水)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 (B.C2119) 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에게 명하여 람(藍).진(眞).변(弁)의 3부(部)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B.C2100)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 구을이 즉위하였다. 

(해설)
조선의 4대 오사구단군은 동생인 오사달(烏斯達)을 몽골의 한(汗=왕)으로 봉해 지금의 몽고족의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몽골족은 우리와 조상이 같은 형제족(兄弟族)이라는 것이다. 몽골이 원나라를 세워 중국을 통치할 때, 원나라 황제들은 고려의 여인들을 황후나 후궁으로 삼고 고려왕에게 공주를 보내 사위로 삼기도 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원 순제의 황후였던 기(奇)황후와 고려 공민왕의 노국공주이다. 또한 얼마 전에는 몽골 대통령이 한국과 국가연합을 하자고 제안한 적도 있다. 만일 몽골족이 우리와 민족의 동질성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런 정치적 행위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조개 모양의 돈을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이 시장경제 체제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야별기>를 민족사학자 고 임승국교수는 조정과 백성을 구별하는 기록으로 해설했다.
조선소가 세워진 살수는 수양제의 100만 대군이 침공했을 때 을지문덕장군이 우문술의 30만 선봉대를 몰살시킨 장소이다. 그러한 살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제목) 수나라 30만 대군을 몰살시킨 살수는 어디인가?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693&section=sc7&section2
 

▲ 수양제의 1차 고구리 침공도. 살수는 산서성 남부 임분(평양성) 앞을 지나는 분하의 남북 흐름이다.


하나라 왕위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조선

위 임인년 기사는 북애자노인이 쓴 <규원사화 단군기>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 하나라 왕이 덕을 잃어 그 신하 중에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었다. 이에 식달로 하여금 람국(藍國)과 진.번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게 하니 나라의 위상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여기서의 상(相)은 하나라 5대왕을 말하는 것이다. 백부인 3대왕 태강(太康)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유희와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자, 동이족 예에게 피살되고 아버지 중강이 4대 왕이 된다. 이를 <후한서 동이전>과 <서강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자 동이들이 반란하기 시작했다 (주: 예에게 쫓겨났다) (夏后氏太康失德 夷人始畔 註-爲羿所逐也)”
<서강전> “왕의 정치가 올바르면 손님들이 따르지만 덕의 가르침을 잃으면 난을 일으킨다. 옛날에 하후 태강이 나라를 잃었는데 이는 사이들이 배반했기 때문이다.
(王政脩則賓服德失則寇亂 昔夏后太康失國 四夷背叛) 

위 두 사서는 하후 태강에 대한 기록이고, 아래는 상(相)에 대한 중국자료이다.
(번역) 태강이 죽을 때 동이족 유궁씨의 수령인 예가 하 왕조의 내부왕권투쟁에 뛰어들어 왕위를 탈취했다. 아우인 중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도읍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타 제후국에서 기거했다. 중강 사후 그 아들 상이 왕위를 승계했으나 도읍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같은 성씨의 제후국에서 기거했다. 하후 상은 역량을 모아 군대를 조련해 도읍으로 돌아가 복수할 준비를 했다. 한착이 두 아들을 파견하여 하후 상을 같이 죽이려고 공격하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하후 상은 잉태한 처자 민을 유잉국으로 도주시켜 소강을 낳았다. (소강이 나중에 하 왕조를 부흥시킨다.)
(원문) 太康死后,这时东夷族有穷氏首领后羿趁夏朝内部王权之争,夺取了王位。他的弟弟仲康继承王位,但回不去国都,寄居在其他诸侯国。仲康死后,其子夏后相继位。寄居在同姓诸侯国。后相聚集力量,操练军队,准备杀回国都。寒浞派两个儿子进攻并杀掉夏后相,夏后相在遭到围攻危机万分时,让怀孕的妻子后缗逃走。后缗逃到有仍国(娘家)后生少康。 

즉 하나라 왕이 정치를 제대로 못하자 동이족인 조선이 상국(上國)으로서 응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후 태강뿐만이 아니라 중강과 상도 마찬가지로 동이족 예와 한착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는데, 예와 한착은 단군의 신하 또는 제후로 보인다. 또한 <서강전>에 하나라 동서남북 사방에 있던 이(夷)라는 뜻인 사이(四夷)로 표시한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이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라는 중앙(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작은 제후국에 불과했던 것이다.
 
▲ 하나라는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에 있던 나라. 람국은 산서성 동남부 장치 일대, 조선은 어디에 있엇을까?

 
하나라와 람국의 위치로 본 조선의 위치는? 

맹자는 공손축장구(公孫丑章句)에서 “하후와 은,주의 전성기에도 땅이 천리를 넘은 적이 없었다.(夏后殷周之盛 地未有過千里者也)”라고 말해 당시 하나라의 크기를 알 수 있다. 당시 하나라의 도읍인 안읍(安邑)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다음과 같다.
(번역) 안읍현 : 하나라 우가 도읍한 곳. 전국시대 때 위나라의 도읍이었고, 후위 때 안읍을 남안.읍북.안읍의 3개현으로 나누었다. 지금의 산서성 하현으로 청나라 때 해주, 민국 때 염지가 있는 운성시로 바뀌었고 하동도에 속한다.
(원문) 安邑县 : 夏禹所都,春秋时魏绛自魏徙此,战国为魏都,汉置县,今夏县安邑县之地,后魏分安邑为南安、邑北、安邑三县,旋改北安邑为夏县,故城在今山西夏县北,即后魏分置之县也,清属山西解州,民国移治运城,寻复故,属山西河东道,县境有盐池,为山西省惟一产盐之区,左传谓郇瑕氏之地,沃饶而近盐,即指此地而言,池水不流,凝成固粒,朝取夕复,终无灭损,其利甚溥。 

즉 산서성 남부 운성지 염지 일대의 직경 천리만이 하나라 땅이었고, 나머지 사방에는 조선을 의미하는 사이(四夷)가 있었다는 말이다. 위 무자년 기록의 “하(夏)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 갔다”라는 기록도 서로 가깝게 있었기에 성립되는 것이다. 하나라와 조선이 얼마나 가깝게 있었는지는 8세 우서한단군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신해 4년(B.C1990) 임금께서 미복을 입고 몰래 국경을 벗어나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관제를 크게 고쳤다.” 이 말은 조선과 하나라가 무척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 직경 천리에 있었던 하나라를 단군이 미복으로 시찰할 정도면 조선은 어디에 있었겠는가?  

람국의 위치에 대한 자료로는 ‘중국통사 참고자료 고대부분(中國通史參考資料古代部分)-4’에 따르면, “람수는 산서성 둔류현 서남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장으로 들어간다(蓝水,源出於山西屯留县西南,东流入漳。)”라는 문구가 있으며, 보다 상세한 자료로는 아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나오는 “강수(絳水)는 산서성 동남부 둔류현을 흐르는 강”이라는 설명이다. 둔유현은 낙랑군에 속한 일개 현으로 자금의 장치시 일대이고, 유주에 속해 있는 낙랑군은 황하북부 하남성과 산서 최남부이다.  

(번역) 강수 : 산서성 둔류현 서남 80리 반수산 남쪽에서 나와 동으로 로성현 경계와 만나는 장촌까지 흘러 장수로 들어간다. <수경주>에서는 진수라 한다, <청일통지> ‘수경주’에 강수라고 있는데 무람수라 하는데 그 물길이 모두 같다. 다른 이름으로 진수라 한다. ‘위서지형지’에는 강수와 람수가 있는데 물길이 같은 것이다. 즉 강수 = 람수이다.
(원문) 绛水 : 源出山西屯留县西南八十里盘秀山之阴,八泉涌出如珠,合而东流,至潞城县界交漳村入漳,水经注谓之陈水,《清一统志》水经注有绛水而无蓝水,其绛水所行之道,皆今蓝水也,而别有陈水,则今绛水所行之道也,与今府县诸志不合,惟魏书地形志有绛水,又有蓝水,与今水道相同。 

위 기록들을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라가 산서성 남부 운성시에 있던 나라이기 때문에,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에 있던 제후국 람국의 병사를 동원해 하나라를 응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연방대제국이었던 조선의 단군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읍을 두고 아시아대륙을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하나라 도읍은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 일대. 람국은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일대. 단군이 미복으로 하나라를 시찰했다면 조선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산서성 성도 태원으로 비정하고 싶다.        © 역사복원신문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성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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