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3부-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하)

설레임의 하루 2011. 12. 16. 05:40

*출처:역사복원신문

                                                 

 

 

 

 

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하)
동부여의 건국과 멸망과 쿠데타
 
성훈 컬럼리스트 기사입력  2011/05/14 
동부여의 건국과 쿠데타와 멸망

참고로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의 동생인 해부루는 고두막단군에 의해 b.c 86년 동쪽으로 옮겨와 가섭원(동)부여를 세워 39년간

 

통치한다.

 

<한단고기>에는 이어 2세 금와(41년)--> 3세 대소(28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대소왕은 a.d 22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구려의 장수 괴유(怪由)에게 죽음을 당한다.  


대소의 죽음에 대한 이 기록은 <삼국사기>와도 내용과 년도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대소왕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동부여는 당시 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단고기>는 동부여의 멸망에 대해 자세한 언급이 없고, <삼국사기>는 동부여가 대소가 전사한 해와 같은 해 결국 항복한

 

것으로 적어 놓았으나 그 이후에도 부여 관련 기록이 몇 개 있어 그 기록이 이상해 보인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명대제 33년 (a.d 14년) 대불이 ‘대소’를 죽이고 보위에 섰다. 즉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것으로 봐야 한다.

 

대불은 a.d 32년 전쟁 중에 전사하고 이어 여왕 고야가  통치하다, a.d 51년 고구려 대무신왕 때 평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부루-->금와-->대소-->고야를 거치면서 4대 110년을 이어오다가 나라의 문이 닫혔으며, 중간에 대불이 19년간 보위를 훔친 적이

 

있다고 적어 놓았다. 대소왕의 동생은 “갈사(曷思)‘라는 나라를 세우나 3세 47년 만에 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갈사라는 나라는 동부여에서 갈라져 나간 지류(支流)로 봐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에 동부여 정벌에 대해 상세히 나오고 왕대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동부여의 가지인 갈사까지 언급하면서도, 북부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단고기>의 내용대로 “b.c 58년 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꿨다.”는 기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  kbs 사극 '바람의 나라'에서 동부여의 3대 대소왕으로 분한 한진희

삼국사기에는 북부여를 한번 언급하고 있다.

 

“유리명왕 29년(a.d 10년)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더불어 떼지어 싸워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빛이니 북부여(北夫餘)가 파멸될 징조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는 같은 년도에 같은 기록이 있으면서 “오지인이 대소(동부여)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부여라고 언급하면서 북부여 이야기는 전혀 없고 동부여 이야기만 적고 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북부여가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 기록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기록은 사관(史官)들이 분명 북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그리고 북부여와 고구려가 전쟁을 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유리왕 29년의 <삼국사기> 기록은 누군가가 확실히 조작한

 

기록으로 보인다. 또는 부여(동부여)의 북쪽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북부여라는 나라는 있었으나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않은 이유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가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즉 고구려와 북부여는 같은 나라로 서로 공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따라서 <한단고기>의 b.c 58년 고구려 건국 기록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한단고기 북부여기>는 위서인가?

일제의 식민사학을 고수하는 강단사학계는 우리 민족의 성서인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까지 그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지 두고 보기로 한다. 본 글은 북부여와 관계된 글이기에 <한단고기>의 일부인 <북부여기>가

 

과연 위서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정본 한단고기에 포함되어 있는 북부여기 상, 하, 가섭원 부여기의 저자는 휴애거사 범세동장(休崖居士 范世東)선생으로 일명 범장

 

(范樟)이라고도 한다.

 

범세동선생은 금성 범씨 대동보에 의하여 실존인물임이 증빙되었고, 대동보에 “북부여기 약초(略抄)”가 기록되어 있어 북부여기

 

실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 휴애거사 범장(休崖居士 范樟)
휘(諱) 세동(世東), 호(號) 휴애(休崖) 또는 복애(伏崖), 자는 여명(汝明)이다. 선조가 금성인(錦城人)으로 본관은 금성이다.

 

통찬(通贊) 후춘(後春)의 아들이며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 말기의 대학자이다.

 

<한단고기>에 합본된 <북부여기 상, 하>와 <가섭원부여기>를 편찬하였고,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편집화해사전(編輯華海師

 

全)을 편찬하였다.


일찌기 공민왕 18년인 1369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郎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義大夫)를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

 

(文忠)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표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광주직할시 광산구 덕림동에 묘소가 있으며, 북구 생룡동에 사우(祠宇, 龍湖齊)가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국가만세에 마땅히 범세동 선생과 운곡 선생의 말을 쫓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당대의 대석학이었다.


<한단고기 태백일사>에 이르기를, 행촌(杏村) 이암선생(단군세기 저자)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 가서 태소암(太素庵)에

 

기거할 즈음에 한 거사가 있었는데 이름이 소전(素佺)이었다.

 

그는 많은 기이한 옛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더불어 같이 신서(神書)를 얻게 되었는데 모두 옛

 

한단시대(桓檀時代)로부터 전수된 진결(眞訣)이다.  


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이여!
이렇듯 엄연한 실존 인물이었고, 범세동선생이 <북부여기>를 저술했다고 금성 범씨 대동보에 명확히 실려 있거늘 어떻게 <한단고기>

 

를 함부로 위서라고  말하는가!!!  

 

금성 범씨 대종회에 가서 이 사실을 확인해 보고, 만일 그 앞에서 <한단고기> 위서 운운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군세기>를 저술하신 이암선생과 <태백일사>를 편찬하신 이맥선생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고성 이씨 문중에 가서

 

<한단고기> 위서 운운하면 거기서도 몰매 맞아 죽을 것이다. 


▲  금성 범씨 4세인 범세동(장)선생의 기록. 이런 분이 가공의 인물일 수는 없다.

▲  금성 범씨 대동보에 실려 있는 <북부여기>에 관련 내용.

오른쪽에 퇴계 이황의 말이 실려 있다.

 


기사입력: 2011/05/14 [12:21]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