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삶의 흔적

신의 지문 1,2

설레임의 하루 2011. 11. 25. 04:46

*출처:다음카페-카톨릭 예술 글쓴이- dreams of rio     http://blog.daum.net/catholicmusic2/12327182

 
미스트리 세상 2007/06/28 14:45 약수
초고대문명은 존재했는가?

남극 대륙이 얼음으로 뒤 덮이기 전인 기원전 1만 년 전에 작성된 남극 대륙 지도의 발견(남극 대륙이 지금의 인류에게 발견된

시기는 19세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페루 남부 나스카 고원에 있는 거대한 지상 그림과 잉카 문명, 그리고 세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홍수 신화, 신화 속에 은폐되어 있는 세차 운동에 대한 암시, 지각 이동설 등…….

현대의 과학으로는 도저히 그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고대 문명의 흔적과 신화들은 지금도 신비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현대 과학보다 훨씬 앞선 그 문명은 도대체 누가 세운 것이며, 그 문명의 주인공들은 왜 한순간에 사라졌는가? 어디로 사라졌는가?
또한 이러한 유적들이 현재의 지구와 인류에게 전해주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이 책 『신의 지문 Fimgerprimts of the Gods』의 저자인 그레이엄 핸콕은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지의 동아프리카

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런던 『선데이 타임스 Sunday Times』의 기자였다.
성서에 나오는 “계약의 궤”에 대한 진지한 탐색의 면면 을 기록해 놓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였던 『암호와 봉인 The Sign and the

Seal』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매혹적인 사라진 초 고대 문명의 그림 조각을 맞추기 위해서 세계 곳곳을 탐사하고 있으며 고고천문학, 지질학, 고대 신화의

컴퓨터 분석 등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하여 태고 문명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핸콕은 그 문명의 진실을 밝혀내고 과거에 고대 인류가 멸망한 원인과 그들이 경고한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미래의 길흉을 말하는 예언서는 아니다.

방대한 자료와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태고에 고도로 발달한 인류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우주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생명체와 문명들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해 왔다.

지구도 그 흐름속에서 많은 변화의 과정을 밟아왔다.

아직 신비로 남아 있는 숱한 고대 문명의 흔적들은 오늘의 인류에게 우리 문명의 뿌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지도의 불가사리


1. 숨겨진 장소의 지도

1960년 햅굿교수는 1513년에 피리레이스라는 오스만 투르크의 제독이 그린 지도가 실제로 현재 남극대륙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는

미국 공군의 답신을 받는다.

지금 현재 1.6킬로미터 두께의 얼음으로 덮인 이 지역을 어떻게 16세기 사람이 정확히 그릴 수 있었을까? 행콕은 그 비밀을 찾아간다.

이 지도는 알고보면 조작이나 창작과는 관계가 멀다.

아프리카 서해안, 남아프리카 동해안, 남극대륙의 북해안을 망라한 이 지도는 이미 있던 고대지도를 베낀 것이다.

아마도 남극대륙이 얼기 전인 기원전 1만3천년에서 기원전 4천년 사이에 남극 연안을 조사할 능력이 있던 사람들이 그린 고대지도를

베낀 것이다.

이 지도를 본 햅굿은 그의 추리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① 남극대륙은 한때 얼음으로 덮여 있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② 당시 남극이 얼음이 아니었던 것은 지금보다 3200킬로미터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③ 대륙이 이동한 것은 지각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각이동은 대륙이동과는 다른 것이며 오렌지 껍질과 알멩이가 따로 놀듯

내부의 부드러운 부분은 그대로 두고 표층부가 옮겨진 현상이다.

④ 남극대륙이 이동하는 동안 얼음으로 덮여 현재상태에 다다랐다.


2. 남쪽 대륙에 있는 강

워싱턴 D.C.의 의회도서관에서 햅굿이 발견한 중세 지도와 해도는 다른 도법으로 그린 그 전의 지도를 모사한 것으로 남극대륙을

선명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 지형과 강은 지진파측정결과 나타난 얼음 아래의 대륙과 일치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지도가 하나 뿐이라면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16세기  네덜란드 사람인 메르카토르의 지도,

18세기 프랑스 사람인 부아슈의 지도, 오스만투르크 하지 메이드의 지도 역시 얼음 아래의 남극을 그려놓고 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남극이 얼음이 아니었던 적은 수백만년전이라고 말하지만 이 지도들은 햅굿의 주장을 지지하는 듯하다.

적어도 기원전 4천년전, 신석기인들이 이 지도를 그린 것일까?

이 지도들은 남아메리카의 상세한 지형과 양대륙을 연결한 베링해협의 땅을 그리고 있다.

1만년전 북구의 빙하가 녹아 해면이 높아지면서 사라진 베링해협의 육로가 여기에는 있는 셈이다.

3. 사라진 과학의 지문



1569년에 작성한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는 얼음이 없는 남극대륙의 지도를 상세히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해안의 정밀도는 오히려 떨어진다. 이 부분은 스페인 탐험가의 관찰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직 경도측정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경도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남북의 위도는 태양과 별의 각도를 이용하면 간단히 잴 수 있지만 경도를 재는 것은 위치와 시간을 모두 측정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그런데 이 고지도들은 정확한 경도를 나타내고 있다.

1339년의 둘체르트 포르톨라노라는 해도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그리고 있는데 흑해와 지중해의 경도가 0.5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이런 결과를 미루어볼 때 이 지도들은 이미 사라진 고대의 정확한 지도를 모사한 것이다.

특히 이 지도들은 현대에 와서나 사용한 고도의 수학을 사용하고 있다.

구형 삼각법, 평사도법 등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이런 지도는 중국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유산을 인류가 계승했고 이용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바다의 거품

4. 콘도르의 비상



저자는 세스나기를 타고 페루 남부에 있는 나스카를 날아간다.

고래, 원숭이, 벌새, 알카트라즈라는 왜가리, 물고기, 삼각형, 펠리컨, 콘도르. 반신반인의 비라코차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이 거대한

지상조형물은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나스카고원의 320평방킬로미터 대지 위에 있다.

높이서 보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알수도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1400년전 에 그렸다는 것 뿐이다.

나스카의 그림은 2단계에 걸쳐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데, 먼저 만든 것이 더 높은 수준을 지니고 있다.

이 간격도 도무지 알 수 없다.

거미그림을 조사한 피틀루거 박사는 별자리와 비교해 조사한 결과 거대한 오리온자리를 지상에 그린 것이고, 그 그림에 연결된

화살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오리온 벨트의 별 세 개가 변천한 것을 그린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것은 암호문자가 아닐까? 종이 위에 그렸대도 상당한 역작인 한 줄로 그린 원숭이의 길이는 122미터, 폭은 91미터이다.

5. 과거로 인도하는 잉카

공예품이나 기념비, 마을, 사원보다 종교적 전승이 훨씬 오래 남는 법이다.

전승은  변형되기는 해도 없애기가 가장 어려운 인류의 문화유산일 것이다.

스페인이 절멸시킨 잉카의 전승은 그나마 가녀린 흔적이 남아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의 창시자는 비라코차들이며 이 신비로운 존재들이 나스카의 그림도 그렸다고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태평양연안에서 안데스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던 잉카제국의 광대한 도로망을 이용해 쉽사리 그들을 정복했다.

해안을 따라 3600킬로미터, 산맥을 따라 비슷한 길이로 난 도로는 많은 지선과 연결되어 스페인군대의 무자비한 진군을 도왔다.  

잉카족은 태양신 인티를 최고신으로 숭배했고 인티는 나스카에 있는 그림을 그린 비라코차이며 이름의 뜻은 ‘바다의 거품’이라는

의미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의 단단한 신전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그 위에 식민지풍의 사원을 지었다.

700장 이상의 순금이 덮였던 그곳을 스페인 사람들이 없애지 못한 것은 정교하게 짜맞추어 놓은 돌블록 시스템 덕분이었다.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돌들이 기묘하게 맞추어진 도로와 구조물. 접합부로는 종이한장 들어가지 않는다.

스페인이 들어오기 전, 여기는 예수의 제자 바돌로메와 닮은 턱수염을 기른 백인의 신전이었다.

비라코차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했고 스페인 군대는 잉카군을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잉카인은 돌아온 비라코차를 보았던 것일까?

6. 혼란의 시대에 나타난 남자

안데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고대전설에는 키가 크고 턱수염을 길렀으며 피부색이 하얗고 외투를 입은 불가사의한 인물이 등장한다.

다른 장소에서 여러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동일한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비라코차, 바다의 거품이라는 이 사내는 과학과 마술에 능통하고 무서운 병기를 다루며 혼란의 시대에 나타나서 세계질서를

바로잡았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안데스 전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지구가 홍수로 물에 잠기고 태양이 사라져서 암흑으로 변한 무서운 시대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위대한 힘을 가진 이 존재는 지나가는 모든 지역에 기적을 베풀고 모든 언어로 말할 수 있었다.

턱수염, 키 큰 하얀 남자. 하얀 외투에 허리띠의 이 사람은 문명화라는 사명을 마친후 바다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다의 거품’이라는 이름, 비라코차라고 부른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사였다.

무질서한 사람들,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들, 식량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문명의 황금시대를 구축했다.

의학, 야금학, 농업학,가축학, 문장학, 공학과 건축학의 세련된 원리와 기술을 전해주었다.

그가 수행원을 데리고 다녔다는 기록도 있고, 비라코차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크샤우만의 고대성채는 돌들로 이루어져있고 돌 중 하나의 높이는 8.53미터, 무게는 361톤이다.

소형자동차 500대의 무게인 셈이다. 바퀴의 존재조차 알지못한 잉카에서 이런 건축물은 누가 만든 것일까?

전설에 따르면 이런 고대건축물은 턱수염을기른 하얀 이방인들, 빛나는 사람들인 비라코차가 건설했다고 전한다.

7. 그렇다면 거인이 있었단 말인가

저자는 쿠스코를 등지고 마추픽추라는 잉카의 도시로 가는 길에 인디오들의 전설을 되짚어본다.

대홍수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사하고 티티카카 호수에 한 명의 비라코차가 나타난다.

그는 태양과 달을 만들고 인류를 증식시킨다.

또다른 전승에는 최초에 창조의 신 비라코차가 거인들을 바위에 새기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거인들이 태어난 것이다. 거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싸우고 일하기를 싫어했다. 창조신은 홍수로 그들을 멸망시켜버렸다.

마치 구약성경에 나타난 거인들의 이야기같다.

비라코차는 그의 제자를 산과 들과 바다로 보내 사명을 수행한 다음 다시 합류한다.  

그는 사람들을 남겨놓은채 제자들과 함께 물 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파도 위를 걸어 태평양 저쪽으로 사라졌다.

마추픽추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던 나머지 유럽 침략자들의 파괴를 면할 수 있었던 기이한 유적이다.

마추픽추의 유적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불멸의 조각이다.

산 정상에서 맞은 편 우아나 픽추를 마주보며 건설된 이 신성한 구조물은 다각형돌을 완벽하게 서로 맞물려 쌓아올렸으며, 자연석도

군대군대 전체의 도안 속에 포함되어있다.

포츠담대학의 천문학교수인 롤프물러는 마추픽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천체의 위치에 맞추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 수천년의 별자리 위치를 계산한 결과 기원전 4천년에서 2천년 사이에 완성한 구조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추픽추는 티티카카 호수에 남쪽으로 떨어진 볼리비아의 콜라오라지방에 있다.

8. 세계의 지붕에 있는 호수

볼리비아의 수도 라 파스는 거대한 분지에 있는 도시이며 해발 3킬로미터 높이에 있다.

라 파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티티카카 호수가 있다.

티티카카 호수는 해발 3810미터의 높이 있고 볼리비아와 페루의 국경선이 여기를 지나간다.

길이는 222킬로미터, 폭은 112킬로미터다. 곳에 따라서는 깊이가 300미터인 곳도 있어 지질학상으로도 수수께끼인 호수다.

조개껍질 화석이나 살고있는 생물을 보면 여기는 예전에 바다였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드는 생물 중에는 해마도 있고 주위에는 태고의 해안선 흔적이 남아있다.

해안선에서 상당히 떨어진 티아우아나코에는 선착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가 티티카카 호수에 맞닿아 있었던 항구도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선착장은 지금의 수면에서 30미터나 높은 곳에 있다.

호수 수면이 급격이 낮아졌거나 이 선착장의 땅이 솟아오른 것이다.

티아우아나코라는 선착장을 건설하고 나서야 어떤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셈이다.

이 선착장을 건설한 시기는 도대체 언제일까? 추정해보건데 기원전 1만5천년경이다.

갑작스러운 자연의 대변동은 기원전 1만1천년경에 닥쳐왔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

9. 과거 그리고 미래의 왕

티티카카 호수 부근인 콜라오라 지역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난 전승이 전해온다.

문명을 전파한 투누파라는 영웅이 신처럼 숭배되었다.

그는 위엄이 넘치는 백인으로 턱수염과 파란눈을 하고 있었고 냉정하고 금욕적이며 술에 취하는 일과 일부다처제, 그리고 전쟁을

하지 말도록 설교했다. 그는 평화로운 왕국을 세우고 문명과 기술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그를 질투하던 공모자들의 습격을 받고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들은 투누파를 풀로 만든 배에 실어 호수로 띠워보냈다.

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그들은 놀랐다. 배는 강으로 흘러 해안선에 다다랐다.

이 전승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전승과 거의 흡사하다.

오시리스는 플루타르크가 상세한 전승을 남긴 이집트의 문화영웅으로 그의 의형제인 세트의 음모로 연회에 초대된 후 나무상자에

갇혀 나일강에 버려졌다.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가 이 상자를 감추자 세트는 상자를 찾아내어 신성한 사체를 14등분으로 토막냈다.

이시스는 시체의 파편을 찾아 하나로 모아 복원시키고 별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 저승의 왕이 되었다.

문명전파자, 음모에 빠져 죽고, 배와 같은 것에 넣어 띄어보내고, 강을 표류하고 바다에 도착하는 이야기의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

행콕 아저씨는 티티카카에 있는 수리키 섬으로 가서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배, 토토라라고 부르는 배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것은 이집트의 파피루스 배와 엄청나게 닮아있었던 것이다.

만드는 방법과 만든 모습이 똑같은 이 배를 보며 이집트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10. 태양의 문이 있는 도시

스페인 정복 직후 볼리비아의 티아우아나코 유적을 찾아온 초기 스페인 여행자들은 건축물의 크기와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감명을

받았다.

원주민들은 이것들이 잉카시대보다 훨씬 전에 지은 것이라고 했다.

전승에 따르면 하루 아침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트럼펫 소리와 함게 큰 돌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는 전설을 그들은 전한다.

모든 것이 너무나 큰, 16세기 스페인 사람이 보기에는 경이로운 건축물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20세기에도 그 건축물들이 주는 당혹감은 변하지 않는다.




붉은 바위기둥에 조각되어 있는 비라코차는 평화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이마는 높고 크며 눈은 둥글다. 코는 곧바르고 콧마루는 콧구멍 쪽으로 가면서 넓어진다. 입술은 두텁다.

그러나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은 위엄을 느끼게 하는 턱수염이다. 턱수염 때문에 이마보다 턱이 넓어보인다.

귀의 위아래 그리고 머리 옆에는 동물의 묘한 그림을 조각해놓았다.

거대하고 꼴이 흉한 태고의 포유동물인 듯한 그 동물은 굵은 꼬리와 곤봉처럼 생긴 다리를 갖고 있다.

비라코차 석상의 양쪽 팔은 길게  흘러내리는 긴 옷을, 한 쪽은 위로 다른 한쪽은 아래로 감고있다.

이 긴 옷의 양쪽에 새긴, 몸을 비비꼬는 뱀은 바닥 근처에서 어깨까지 나선을 그리며 기어오르고 있다.

2미터 높이의 이 석상은 티티카카 호수를 등지고 남쪽을 향해있다.

중앙에 있는 석상 뒤편으로 두개의 작은 석상이 서있는데 아마도 비라코차의 제자일 것이다.

남쪽에 있는 인공언덕은 높이가 15미터이고 사원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눈 앞에 솟아있다.

이 언덕은 아카파나 피라미드로 알려져있고 동서남북의 방위를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와는 달리 토대가 불규칙적이지만 대건축물이다. 그 위의 언덕은 원래 안산암 블록으로 뒤덮힌 계단식 피라미드였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은 이곳을 채석장으로 만들었다.

무언가 역할을 하는 기계일지도 몰랐을 피라미드의 이름 아카파나는 사람들과 멸망을 뜻하는 말이다.

아카파나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곳이다.

피라미드 서쪽 벽에서 남서쪽 끝에 있는 칼라사사야 광장으로 가면 두꺼운 사다리꼴 블럭으로 만든 벽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거대한

단검처럼 생긴 바위가 줄지어 서 있다.

여기는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 등의 다채로운 계절변화를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산출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지의 서북쪽에 있는 유명한 ‘태양의 문’에는 정밀하고 정확한 달력이 조각된 예술품이다.


11. 태고의 암시

아르투르 포스난스키라는 교수는 「티아우아나코 : 아메리카 사람들의 요람」이라는 책에서 칼라사사야를 건설한 때와 현재의

황도경사 차이를 이용해 티아우아나코의 기원에 대한 정설을 뒤엎었다.

황도경사란 무엇인가? 지구의 자전축은 태양의 주위를 궤도와 수직이 아니라 약간 경사져있다.

따라서 지구의 적도와 천구의 적도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궤도 사이에 약간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 각도의 오차가 황도경사다.

지구라는 배는 항해중이라 약간씩 흔들린다. 그래서 경사각은 주기적으로 바뀐다.  

22도 1분에서 24도 5분 을 왔다갔다 하는데 그 주기가 4만 1천년이다.

포스난스키는  태양의 표준방위각과 차이가 나는 몇 개의 건축물을 조사해서 칼라사사야가 건축된 때의 황도경사가 23도8분48초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 각도를 이용하면 건설시기는 기원전 1만 5천년이다.


칼라사사야 내부에는 두 개의 커다란 석상이 있다.

그중 하나는 엘 프라일레(수도사)라는 별명이 붙어있고, 하나는 동쪽 끝 중앙에 있는 거인인데 지하신전에서 본 석상이다.

엘 프라일레는 엄숙한 큰 눈과 입을 가진 2미터 높이의 석상인데 오른 손에는 칼과 같은 것을 잡고있다.

왼손에는 양장본 책과 같은 것을 들고있다. 허리 아래로 물고기 비늘이 덮힌 올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늘 하나하나는 고도로 양식화한 물고기 머리 형태를 묘사하고 있다. 인어일까?

갑각류 모습이 조각된 허리띠는 이런 추정이 옳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물고기 꼬리를 가진 출루아와 우만투아라는 호수의 신이다.

수륙양생하면서 문명을 전파했다는 수메르의 오안네스와 흡사하다.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 부조를 보면 오안네스는 물고기 복장을 한 인간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상도 양손에 기묘한 것을 들고 있다.

칼라사사야 서북쪽에 있는 태양의 문은 회색이 섞인 녹색 안산암 덩어리로 폭이 3.8미터 높이 3미터 두께 45센티미터에 무게는

10톤정도로 파리의 개선문보다 조금 작다.

아메리카 고고학의 불가사의인 이 문의 동쪽 정면에는 달력이 조각해놓았다.

중앙상부의 높은 곳에는 비라코차가 틀림없는 상이 작은 벽을 압도하고 있다.

이상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는 무서운 면을 표현하고 있지만 뺨에는 동정의 눈물이 흐르는,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표정이다.

세개의 단에 여덟개씩 모두 스물네개의 인물상을 그려놓았는데 마치 만화와 같은 독특한 표정이다.

모든 인물상들은 높은 자리에 있는 신이 가지고있는 것과 같은 도구를 들고있다.  

아래쪽은 기하학적인 계단모양의 피라미드가 연속적으로 새겨져있다.

오른쪽에서 세번째 피라미드에는 코끼리의 머리와 귀, 상아, 코가 분명하다.

그런데, 아메리카 대륙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는다.

아메리카 대륙에 코끼리가 존재한 것은 기원전 1만년전이다.

이미 멸종한 동물상을 여기에 조각했는데, 발가락이 세 개인 하마와 비슷한 톡소돈도 그중 하나다.

이 동물은 홍적세에 멸종했다. 1만2천년 전의 일이다. 티아우아나코가 그 시기에 건설한 것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12. 비라코차의 최후

티아우아나코는 티티카카 호수의 항구도시였고 현재보다 호수면이 더 높았을 때 건설한 것이다.

부두와 항만을 산 위에 지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 규모는 수백척의 배가 무거운 화물을 동시에 내릴 수 있는 정도였다.

제방을 만든데 사용한 블록 하나의 무게가 440톤이고 100톤이 넘는 돌들이 굴러다닌다.

많은 바위들은 연결용 금속으로 고정했던 흔적이 분명히 남아있고 십자모양도 새겨져있는데 보수적인 사학자들도 1500년이 넘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1500년전에 여기에는 예수교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공허만이 남았을까?

포스난스키 교수는 기원전 1만1천년에서 1만년 사이에 있었던 자연의 대재해 흔적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블록의 잔해나 출토된 화석유적을 살펴보면 이 대재해홍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홍수를 일으킨 것은 지진이나 화산분출일 수도 있다.

이 부근을 2미터만 파면 다양한 동물과 사람의 뼈와 도기, 보석, 도구, 농기구가 뒤섞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충적토와 티티카카 호수의 조개가 섞인 해저의 모래와 파괴된 큰 돌과 화산재를 볼 수 있다.

호수의 물이 줄어들면서 이 항구도시와 멀어지고 주변의 기온이 내리면서 농작물을 재배하기 힘들어졌다.

비라코차 사람들이라고 전해지는 티아우아나코 거주민들은 악전고투를 거듭하다가 여기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고지대에서 성장하는 식물과 감자같은 농작물이 지닌 독의 특성을 분석하여 해독기술을 개발하고 이 식물들을 무해하게 먹을

수 있도록 했다는 발견이 있으면서, 누군가 물이 빠진 호수바닥에 대단한 공을 들여 근대농업보다 기술이 앞선 복잡한 농업관개로를

일군 흔적을 발견하면서 그들의 이런 노력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들은 물 위를 걸어 기적처럼 사라졌다. 어디로 간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디자인된, 컴퓨터에나 적합한 구문을 가진 인공언어의 흔적을 이 지역 인디오들에게 남겨놓고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깃털달린 뱀

13. 인류 생존을 위한 피와 인류 종말의 날

저자는 멕시코의 유카탄에 있는 치첸 이트사에서 쿠쿨칸의 신전을 찾는다.

30미터 높이의 이 지구라트는 전체계단 수가 365이다.

춘분과 추분에 시계처럼 정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삼각형의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서 북쪽 계단에서 거대한 뱀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이 보이게 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스페인이 정복하기 전에 이 지방 일대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희생자를 돌 위에 눕히고 네 명이 팔과 다리를 벌리게 하고 위에서 누르면 손에 칼을 든 집행자가 나타나 뛰어난 기술로 젖꼭지 아래

늑골 사이로 칼을 집어넣는다. 그 자리에 손을 넣어 심장을 움켜쥐고 접시 위에 얹었다.

멕시코에서 번성한 위대한 토착문명 모두가 인간학살의 의식에 열렬했다.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올멕문명이 이미 정착시킨 이 학살극은 스페인 점령 당시의 아즈텍인들이 이어받아 광적으로

거행했다. 8대황제 아위소틀은 우이칠로포크틀리 신전을 세울 때 8만명의 죄수들을 죽여 제물로 바쳤다.  

아즈텍인들은 죽인 제물의 가죽을 벗겨 몸에 걸치기를 좋아했다. 피와 기름을 흘리면서 도시를 뛰어다니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신전에는 피가 흘러넘치고 계단아래까지 흘려내려 얼어붙었고 공포에 떨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16세기 초반에는 매년 25만명을 죽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랬을까? 그들은 제물을 바쳐 세계의 종말이 오는 것을 늦추려고 했다.

우주의 대 주기가 흘러 스페인 점령시에는 제 5태양의 시기였다고 한다.

4008년동안 계속된 제1태양시기에는 거인이 살았는데 물로 멸망당했다.

제2태양시기는 4010년 동안이었으며 바람의 뱀 때문에 멸망당했다. 제3태양은 4081년 동안이었는데 불로 멸망했다.

제4태양은 5026년동안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피와 불의 홍수 속에서 기아로 죽어갔다.

여섯번째 황제 악사야카틀이 만든 태양의 돌은 무게가 24.5톤으로 동심원 모양을 연속적으로 조각했는데 네 개의 태양이 끝났음을

적어놓았다.

제5태양신의 혀는 입밖으로 나와있고 얼굴에는 주름이 많다. 혀를 내밀어 인간의 심장과 피에 굶주린 얼굴을 하고 있다.

제5태양은 운동의 태양이며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그들은 제5태양이 마지막에 와있다고 믿었다.

종말의 시기를 계산하는 방법은 아즈텍시기에 잊혀졌고 이 필수적인 정보가 사라지고 나자 빈번하게 제물을 바쳐서 불가피한 파국을

늦추려고 했다.

신들이 선택한 아즈텍인들은 성스러운 사명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포로의 피를 토나티우 태양신에게 바쳐 종말을 연장해온 것이다.

올멕이나 아즈텍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위대한 문명인 마야문명이 남긴비문을 현재의 양력에 대입하면, 제5태양이 끝나는

날은 2012년 12월23일이다.



14. 뱀의 사람들

저자는 안데스의 비라코차와 고대 멕시코의 주신 케찰코아틀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케찰코아틀은 피부가 희고 붉은 색이 감도는 얼굴이며 긴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전한다. 백인이고 키가 크며 긴 속눈썹, 큰 눈,

긴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턱수염이라는 기록도 있다.

과일과 꽃 이외의 제물을 비난했던 평화의 신이라는 전승도 있고, 노를 젓지 않아도 달리는 배를 타고 왔으며 사람들에게 불과 요리,

집과 일부일처제와 평화를 가르쳤다는 전승도 있다.

비라코차가 많은 이름으로 불리우듯 케찰코아틀도마찬가지였다. 구쿠마츠, 쿠쿨칸 등의 이름은 모두 깃털(날개)달린 뱀이라는 뜻이다. 이름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 마야의 신 보탄이나 이참나의 상징도 뱀이며 하얀피부와 턱수염과 긴 겉옷이 그 특징이다.          

모든 전설은 이 신인이 먼 동쪽바다에서 왔고 사람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왔던 방향으로 다시 배를 타고 오겠다면서 떠났다.

멕시코에서는 바다 위를 걸어서가 아니라 뱀의 뗏목을 타고서다.

이 외국인들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었던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많은 전승 속에서 조수를 거느리고 있다.

이 뱀의 사람들의 손에 닿기만해도 병이 나았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었다고 전한다.

문자를 전하고 역법을 개발하며 건축의 비술을 가르치고 지구를 계측하며 옥수수를 보급하고 법률을 제정하며 예술을

향유한 이 케찰코아틀의 시대를 제물에 미쳤던 아즈텍인들조차 흠모했다고 한다.

케찰코아틀은 살아있는 것을 다치게 해서는 안되며, 정 하려거든 새나 나비를 쓰라고 가르쳤다. 이들은 무엇이 잘못되어 여기를

떠났을까?

멕시코의 전설이다. 깃털 달린 뱀의 지배는 암흑의 신 테스카틸포, 즉 연기를 내뿜는 거울이 득세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 싸움의 무대는 툴라라는 곳으로 천년역사보다 더 오래된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현재 발굴중인 툴라의 피라미드 오른쪽에 있는 긴 운동장에서는 고무공을 갖고 빼앗는 경기를 하다가 지면 목이 잘리는 공이었다.

뒤로 서있는 우상은 무언가 들고있는데 자세히 보면서 상상해보면 어떤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암흑과 탐욕과 사악을 대표하는 테스카틸포카는 케찰코아틀과 매우 오랜동안 전쟁을 계혹했다고 전설은 말한다.

때로는 이쪽이 때로는 저쪽이 우세했고 결국 최종적으로 악이 선을 이겨 케찰코아틀은 도망한다.

꽃을 제물로 받는 시대의 막을 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15. 멕시코의 바벨탑

저자는 인공산인 틀라치우알테페틀로 향한다. 케찰코아틀을 숭배하는 종파의 성지였던 여기에는 현재 카톨릭교회를 세워놓았다.

토대의 크기는 45헥타르며 높이는 64미터이다.

이집트 대 피라미드의 세 배나 되는 크기이며 토대의 한 변은 500미터고 허물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퇴보하고 있던 원주민을 확실히 정복하기 위해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 인공산 위에 있던 신전을 깨부수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턱수염을 기르고 하얀 피부를 빛내는 이 사람들을, 원주민들은 상냥하게 신전으로 안내한다.

숭배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호화로운 음식을 내오고 춤과 노래로 그들을 대접하던 원주민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이 선사한 것은

다름아닌 ‘학살’이었다.

문을 잠그고 보초를 세운 다음 죽인 원주민의 수는 6000명으로 아즈텍의 학살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페루와 멕시코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이 지니고 있던 전설 덕분에 칙사대접을 받으면서 마음대로 난장판을 만들 수 있었다.

비라코차나 케찰코아틀과는 달리 안데스의 피사로와 중미의 코르테스는 이리처럼 날뛰며 땅과 사람과 문화를 먹어치웠고 대부분을

파괴했다.

그들은 무지와 편견과 탐욕으로 가득찬 더러운 손을 흔들어대며 인류의 귀중한 유산을 싹쓸이했다.

칼을 든 군인과 성경을 든 신부들은 상징을 파괴하고 보석을 갈아버리고 세공품을 녹여버리고 그림과 글자가 들어있는 수만점의

사본과 사슴가죽을 태워버렸다. (이 시점에서 초고대방 사람들은 잠시 눈물을 머금어야 마땅하다)

거대한 불기둥을 이루며 이 대륙의 역사기록이 연기로 날아갔다.

남은 것은 “스페인사람들 덕분에” 아직까지 전해지는 20여개의 사본과 두루마리다.

몇 명의 우리 초고방사람 같은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하고 수집했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받아적고 유적을 조사해 기록했다.

그 중 하나가 바벨탑의 전설을 전한다. 디에고 데 두란이라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는 1585년 촐롤라에서 100살이 넘은

노인에게 

“암흑 가운데서 태양이 떠올라 햇살을 비추자 거인들이 나타나 땅을 지배했으며 이들은 태양의 빛과 아름다움에 빠져 하늘까지

이르는 높은 탑을 지어올렸는데, 천국의 신이 분노하여 하늘의 주민들을 내려보내 탑을 파괴하고 건축가들을 지구 구석구석으로

내쫓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출롤라의 피라미드는 많은 서로 다른 문화가 다른 시대에 공동의 노력을 들여 짓고 고치고 한 것이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피라미드 위에 피라미드를 얹고 다시 올리고 한 식이다. 크기로만 본다면 지구 최대의 건축물이다.

누구를 위해 이 거대한 신전을 지었는지, 스페인 야만인들 덕분에 거의 알 수 없지만, 태초에 나타난 거대한 남자들이라는 희미한

흔적은 남아있다.

16. 뱀의 성지

저자는 올멕문명의 중심지인 베라크루스로 향한다.

기원전 2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올멕문화는 아즈텍보다 1500년 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고무산지에 살았던 이 사람들의 이름은 올멕의 말뜻대로 ‘고무사람들’이다.

아즈텍인들은 올멕인이 만든 도구를 신성하게 여겨 신전에 보물로 두었다.

코아트사코알코스라는 지역에서는 현재 석유가 쏟아져나오는 바람에 고고학상으로 중요한 유적이 많이 파괴되고 있다.

코아트사코알코스라는 말의 뜻은 ‘뱀의 성지’다. 케찰코아틀이 처음으로 상륙한 곳이라고 전해온다.  

역시 올멕문화 지역인 산티아고 툭스툴라에는 3미터가 넘는 조각상이 있는데, 헬멧을 쓴 아프리카인이다.

확실히 흑인의 풍모이며 빙하시대 후반인 기원전 1만5천년 경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 중에 흑인들도 있다는 증거다.





사포테스라는 곳에서는 스털링이라는 사람이 역법비석을 발견했는데 이것을 자세하게 조사해보자 마야보다 더 빨랐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야에서 발견한 가장 오래된 연대가 228년이었는데 여기서 발견한 비석에는 같은 마야와 같은 표기법으로 기원전 32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히려 올멕이 마야의 어머니문명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도 흑인이 헬멧을 꽉 끼게 쓴 높이 2미터, 둘게 6미터, 무게 10톤의 조각을 발견했다.

거대한 현무암 덩어리는 세밀하고 명확했으며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하나의 충격적인 발견은 작은 바퀴가 달린 장난감이었다.

스페인이 들어올 때까지 바퀴를 몰랐다는 아메리카 문명에서 바퀴달린 장난감을 출토한 것이다. 바퀴를 장난감에만 쓰지는 않았겠지...  

17. 올멕의 수수께끼

산 로렌소는 올멕의 땅인 동시에 케찰코아틀의 전설에 나오는 뱀의 성지이기도 하다.

고고학자들은 올멕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올멕은 중요한 문명을 건설하고 거창한 공사를 시행했으며 거대한 바위를 조각해서 운반했다.

그런데 산 로렌소에서 올멕문화가 발전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산 로렌소만이 아니라 신대륙 어디에서도 올멕의 문화가 발전하는 단계를 보여주는 유품은 찾을 수 없었다.

흑인의 머리를 조각한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를 전혀 알수 없다.

여기에는 스무개가 넘는 저수지가 있고 이것들을 현무암으로 만든 수로로 연결해 놓았다.

이 정교한 수문과 수로망의 목적을 고고학자들은 모르겠다고 말한다.

특수하게 배치한 무덤에서는 60개 이상의 귀중한 조각상과 공예품을 발견했는데 비취로 만든 악기와 자은 조각상도 있다.

조각상이 묻혀있는 상황도 수수께끼고 조각상의 연대를 추정하는 것도 곤란하다.

최소한 기원전 1200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이 작품들은 신비한 힘은 느끼게 한다.

산 로렌소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타바스코 주의 비야에르모사로 가는 길에는 트레스 사포테스가 있는데 올멕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100년 사이에 이곳에 정착해서 기원전 400년까지 산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400년경에 갑자기 도시건설을 중단하고 건축물은 파괴되며 머리 조각상이 특이한 무덤에 매장당한다.

라벤타의 무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엄밀하게 만든 것으로 어떤 장소에서는 약 5000세제곱미터의 흙을 파네고 구덩이를

만들었다. 바닥에는 뱀 무늬의 블록을 깔고 다시 흙을 덮기도 했다.

라벤타의 중요한 유적인 피라미드는 남쪽 끝에 있는데 하늘에서 보면 원형이지만 실제로는 원추형이고 벽 면에 10개의 수직고랑이

있다. 높이는 30미터이고 지름은 60미터 정도로 체적은 거의 9만 세제곱 미터다.

나머지 유적은 북쪽에서 서쪽으로 8도 만큼 기울어진 방향의 직선상에 위치하고 있고 이 축을 중심으로 몇 개의 작은 피라미드, 광장,

대지, 언덕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전체 넓이는 4.8미터이다.

사회조직, 의식, 신앙, 인종 등 그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은 올멕족은 멕시코 연안의 습도가 높아 뼈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다.

머리 조각상은 올멕의 것이겠지만 이 건축물들은 올멕이 아니라 그 전에 만든 것을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다.

일종의 문화로 전승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올멕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석유채굴시 발굴한 부조는 ‘뱀속의 남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머리에 장식을 하고 향낭을 손에 들고 깃털 달린 뱀에 둘러싸인 올멕인의 모습이라고 한다.

남자는 오른 손에 작은 양동이 모양의 물건을 들고있고 왼손은 레버를 당기는 듯하다.

머리 장식은 기묘한데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머리 장식 위에는 조작판과 같은것에 두개의 X형 십자가를 새겨놓았다.

깃털달린 뱀은 케찰코아틀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굉장히 개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경직되고 구조적이어서 기계의 일부로 보일 정도다.

어떤 조각상은 넓은 코와 두꺼운 입술을 가지고 있고 입술은 약간 열려있어서 마치 이집트 스핑크스를 연상하게 한다.

여러 인종의 다른 특징을 종합해서 창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런 조각상은 한 인물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올멕의 조각상은 흑인계에 속하는 인종을 묘사한 것이다.

이 아프리카인든 3000년전에 중앙아메리카에 있었을 것이다. 기계속에 있는 인간, 흑인머리 조각상...



18. 눈길을 끄는 이방인

라 벤타에서 발견한 또다른 비석에는 키가 큰 두 사람이 대면하는 장면을 조각했는데 한 사람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한 사람의

얼굴은 온전하다. 분명히 백인 남자이며 높은 코에 길고 풍부한 수염을 가지고 있다.

올멕인이 중요시 했던 이 두사람의 만남은 무엇일까?

이 비석을 넣기 위해 만든 엄청나게 큰 방호 울타리기둥을 보면 보통 일은 아니다.

고고학자들의 말대로 이 백인은 페니키아인들이고 흑인조각상은 그들이 서아프리카에서 붙잡은 노예였을까?

그러나 세계 곳곳에 수공작품이라는 독특한 족적을 남긴 페니키아인이 올멕 유적에는 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올멕에는 뿌리가 없다.

  제 3자 가설이 맞는 것일까? 보통 인류사회는 무슨 일이든 시간에 따라 진보해가는데 고대 이집트 문명이나 올멕 문명은 갑자기

모든 사회형태를 지니고 출현했다.

원시에서 고도로 발전한 사회로의 이행기간이 너무 짧아서 역사라고 볼수가 없다. 수백 수천년이 걸려야할 기술적 진화가 거의

하룻밤만에 일어나고 그 사이의 과정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이들은 문명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신석기에서 갑자기 조직화된 왕조시대로 돌입하고, 문자가 등장하고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예술과 공예가 믿기 힘든 수준에

다다르는, 이 사건의 배경은 없다. 발전의 토대가 없는 것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가 같은 신을 섬기는 것을 보면 일리가 있다.

그들에게 문명을 전해준 사람들이 아메리카에는 오지 않았을까?

이집트와 수메르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들이 멕시코나 페루에서는 심각한 좌절을 맞아 급격하게 몰락한 것은 아닐까?

이 조각상들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전의 것들이 아닐까?

신들의 도시

19. 저승으로의 모험, 별로의 여행

제3자 가설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두 문명이 태고에 살았던 선조들로부터 동일한 두 문명의 유산을 계승했다고 가정한다.

두 문명이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차이가 나는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이 이론은 도대체 태고의 문명이 어디에 있었고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멕시코의 문명도 이 태고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멕시코도 이집트나 슈메르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집트와 슈메르는 역사적으로 계속 교류가 있었으므로 단절된 멕시코는 좀더 고립성향이 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것이 나타난다면?

이집트인들은 이상하게도 난쟁이를 특별히 좋아하고 숭배했다. 이것은 올멕도 마찬가지다.

이집트인과 올멕인들은 난쟁이가 신들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집트 초기왕조의 헬리오폴리스에서는 전지전능한 아홉 신이 숭배를 받았다.

아즈텍마야인들은 전능한 아홉 명의 신을 믿고 있었다.

별로 환생하는 케찰코아틀의 신앙은 죽은 왕이 별로 다시 태어난다는 이집트의 종교관과 비슷하다.

‘사자의 서’는 어떤가?

중앙 아메리카인들은 저승이 9층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죽은 사람은 4년동안 저승의 9층을 여행하면서 곤란과 위험을 극복한다고

믿었다. 야수가 심장을 먹어버리는 저승의 7층과 이집트인들이 믿었던,

심장과 깃털을 저울에 올려놓고 균형이 깨지면 그 심장을 야수가 먹어버리는 심판의 장소는 다른 것일까?


이집트의 파라오는 저승세계를 거치지 않고 막바로 별로 태어날 수 있는 의식을 거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 “입을 연다”는

의식이다. 고대 중미의 “제물”이라는 말은 “입을 연다”는 의미다.

슈메르에 오안네스가 있다면 마야에는 우아나라는 “물 속에 집을 가진 자”가 등장한다.

창조신과 거대한 괴물의 대결, 탐욕스러운 여신, 이 비슷한 전승과 폭력의 형태는 과연 우연일까?

몬테알반의 유적에는 수십 개에 달하는 비속에 백인과 흑인의 모습을 함께 조각했다.

다른 조각과 비석에 보았던 강렬한 자부심과는 달리, 여기서 그들은 모두 벌거벗고 웅크리며, 거세당하고, 손발을 뻗고 누워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된 죄수들의 시체? 전쟁의 희생자에 인디오는 하나도 없고 백인과 흑인만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된 상형문자를 가졌던 몬테알반 사람들은 트레스 사포테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선과 점으로 계산하는

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경이로운 역법도 사용했는데 이것을 올멕이 도입하고 마야가 계승했다.

이 역법이 나타내는 세계 종말일은 2012년 12월 23일이다.

20. 최초의 인간들의 아이들

치아파스 주의 팔렝케에서 행콕 아저씨는 마야의 비명이 있는 신전 북동쪽 아래에 앉아 정글이 암흑 속으로 잠겨들고 있는 북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전은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있고 높이 30미터의 9단 건축물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위에 서있다.

오른 쪽으로는 궁전이 보이는데 피라미드 형식의 넓은 직사각형 토대가 있고 주위에 4층 탑이 서있다.



신전 중앙에 있는 방에는 괴물과 인간의 얼굴, 그림문자들을 조각해놓았는데 그림문자와 음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혼합적으로 구성된

비명은 아직 완전하게 해독하지 못했다. 가파른 내부 계단을 내려가면 둥근 천장의 좁은 방이 있다.

벽에는 저승세계 아홉 지배자들의 모습을 부조해놓았고 석관 안에는 20개의 비취로 만들어진 가면이 두개골 전면에 덮여 있었다.

발판이 넓은 이 석관은 이집트의 것과 닮았는데, 이집트의 것이 나무로 만들어 세워두는 것이었다면, 세울 수도 없는 이석관의 발쪽을

이렇게 넓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석관의 뚜껑에는 지금껏 단정히 깎은 머리에 꽉끼는 커프스를 손발목에 달고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레버와 조종장치를 조작하고

있는 남자가 나타난다.

의자옆의 판자에 대갈 못과 튜브, 기계부품처럼 보이는 것이 있어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석관 속에서 발견한 작은 비취 조각상은 긴 외투를 걸치고 턱수염을 기른 늙은 백인상이다.

팔렝케에서 북쪽으로 700킬로미터 떨어진 욱스말의 피라미드는 옛부터 마술사의 피라미드나 난장이의 피라미드라고 불러왔다.

난쟁이들이 하룻만에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마야의 전설에 따른 것이다.

피리만 불면 돌이 움직였다는 이 전승은 안데스“트럼펫과 허공으로 날아다니는 돌” 전승과 거의 같다.

돌을 공중으로 띄워 옮기는 전승은 이집트에도 있다. 여기에 새겨지 모자이크 모양에는 십자가 모양이 자주 나타난다.

십자군 병사들이 즐겨 사용한 끝이 넓은 십자가와 성 안드레이 십자가 형태도 있다.

라벤타의 올멕조각 ‘뱀속의 남자’에도 두 개의 안드레 십자가가 있었다. 턱수염을 기른 남자, 뱀, 십자가...


21. 세계의 종말을 계산하는 컴퓨터

마야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었다.

케찰코아틀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천리안을 가지고 축지법을 쓰며 하늘의 천장 네 모서리와 지구의 둥근 표면도 조사했다는 이 ‘재규어’들이다.

이 종족을 질투한 다른 힘 센 신은 “우리의 창조물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좋지 않다. 다 알고 다 본다면 그들도 신이 되지 않겠는가?”

 며 그들이 지구의 일부분만 보도록, 눈에 안개를 불어넣어 시야를 가렸다.

최초의 인간들은 지혜와 지식을 빼앗겼다.

에덴동산의 이야기와 흡사한 이 이야기는 물론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간직해온 전승이다.

지구를 조사하고 하늘을 조사했다는 최초의 인간들과 아담은 다른 존재일까? 치밀하고 창의적이며 세련되고 정확한 역법

바탕으로 고도의 수학적 계산을 이용한 마야의 위대한 천체관측도 그냥 우연일까?

우스운 것은 이런 천체도를 그릴 능력이 있었던 마야인들이 바퀴하나 발명하지 못했을까,

영원한 세월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려는 업적을 남기면서 물려쌓는 천장대신 아치형 천장의 원리는 발견하지 못했을까,

백만단위는 헤아리면서 옥수수 한자루 계량하는 방법은 몰랐을까 하는 점이다.

이 모순은 뛰어난 문명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들은 올멕에게서 역법체계를 가져왔다.

그러나 올멕은 누구로부터?




마야력에 따르면 1태양년은 365.2420일0.0002일의 오차만 난다.

달의 공전주기도 29.528395일로 29.530588로 계산한 최신과학에 뒤지지 않는다.

월식과 일식을 계산하는 표, 0의 개념, 자릿수를 이용한 수의 표현방식 등 근대 수학의 발견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처럼 마야인도 금성이 새벽별이자 저녁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구에서 보았을 때 금성이 같은 장소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584일을 근사치로 계산하고 있었다.

이 샛별의 회합주기를 성년(촐킨)이라고 불렀는데, 오차수정방법까지 있었으며 6000년 동안 단 하루가 차이나는 역법이었다.

왜 이런 정밀도가 필요했을까?

그들은 긴 기간을 계산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고  대주기에 따라 세상이 파멸과 재창조를 거듭한다는 믿음을 표현했다.

그들에 따르면 현재의 대우주는 기원전 3114년 8월 13일에 해당하는 4아하우 8쿰쿠의 암흑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대주기는 2012년 12월 23일인 4아하우 3칸킨에서 끝난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그들은, 시간은 사람들의 생명과 문명에 관계없이 주기와 함께 영속한다고 믿었다.

서구인들의 대부분이 세계가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다는 어셔 대주교의 견해를 파기한 것이 200년전의 일이다.

마야는 몇 백만년이라는 숫자를 가볍게 다르면서 벌써 오래전에 이런 믿음을 숫자로 나타내고 있었다.

도대체 실용적이지 않은 이 숫자는 무엇에 필요했던 것일까?

22. 신들의 도시

중앙 아메리카 대부분의 전설은 세계의 제 4시대가 겪은 비참한 최후를 전한다.

대홍수가 일어난 후에 하늘에서는 태양이 사라지고 불길한 암흑이 뒤덮혔다.

누군가가 성스러운 불꽃 속으로 몸을 던져야 태양이 생길 것이라고 신들이 외치자 두 명의 신이 뛰어들었다.

한 명은 불꽃의 중앙에 타올랐고 다른 신은 불꽃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타올랐다. 그러자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이 케찰코아틀, 비라코차와 쌍둥이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턱수염을 기른 백인형상이다.

안데스에서 비라코차의 도시가 티아우아나코였다면 중앙 아메리카에서 케찰코아틀의 도시는 제 5의 태양이 생긴 신들의 도시

테오티우아칸이었다.

중앙 아메리카 대부분의 전설은 세계의 제 4시대가 겪은 비참한 최후를 전한다.

대홍수가 일어난 후에 하늘에서는 태양이 사라지고 불길한 암흑이 뒤덮혔다.

누군가가 성스러운 불꽃 속으로 몸을 던져야 태양이 생길 것이라고 신들이 외치자 두 명의 신이 뛰어들었다.

한 명은 불꽃의 중앙에 타올랐고 다른 신은 불꽃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타올랐다. 그러자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이 케찰코아틀, 비라코차와 쌍둥이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 턱수염을 기른 백인형상이다.

안데스에서 비라코차의 도시가 티아우아나코였다면 중앙 아메리카에서 케찰코아틀의 도시는 제 5의 태양이 생긴 신들의 도시

테오티우아칸이었다.



케찰코아틀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가 죽은 자의 길을 따라 나란히 서있다.

이 길은 동북쪽으로 기울져 15도 30분 정도로 향하고 있는데,

천문학자들 중에는 이 각도가 이 길을 건설할 당시의 플레이아데스 성단의 방향을 맞춘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이 길이 은하수라는 주장도 있다.

발굴당시 태고의 신전을 파고 들어가자 6단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피라미드가  나왔는데 높이 22미터, 토대는 2만5천 제곱미터였다.

거대한 뱀의 머리 조각이 케찰코아틀을 상징한다. 죽은 자의 길 주위에 서있는 주요 건축물 사이에는 복잡한 연관이 있다고 판단된다.

마치 태양계를 정확히 축소한 듯하다.

케찰코아틀 신전을 태양으로 치면 죽은 자의 길을 따라 서 있는 건축물들은 정확히 생성과 소행성의 궤도를 반영하고 있다.

과연 우연일까?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가 오리온자리를 그려놓았다는 주장과 비교해보면 여기의 천체도도 마찬가지로 불가사의다.

왕이 죽어 신이 된다는 이 신전은 기자 피라미드의 종교적 역할과 거의 비슷하다.

기자와 마찬가지로 세 개의 피라미드가 서 있고 길을 따라 배치했다.

세번째 피라미드는  의식적으로 어긋나게 배치한 것도 기자와 같다.

아즈텍인들이 지은 이름인 ‘죽은 자의 길’은 지진 전문학자가 이 길이 걷는 길이 아니라 물 웅덩이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면서

잘못지은 이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높은 벽이 가로막은 이 길에 물이 찼다면 타지마할보다 더 장대했을 것이다.

운하와 수로시스템이 현재는 16킬로 떨어졌지만 고대에는 가까웠을 텍스코 호수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엇을 위해 만든 것일까? 지진학자들 말대로 지진을 예측하기 위한거라면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은 틀림없다.

23. 태양과 달과 죽은 자의 길

1906년 태양의 피라미드를 조사했을 때 피라미드 상부에서 운모로 이루어진 두꺼운 층을 발견했다.

운모는 시장가치가 있어서 발견되자마자 매각한 것이다.

최근에 테오티우아칸의 다른 장소에서도 운모를 발견했는데 이 운모의 신전은 태양의 피라미드 서면에서 남쪽으로 3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는 파티오 건축물 중의 하나다.

27제곱미터의 넓이에 2층으로 이루어져 바싹 붙은 운모층의 성분은 브라질에서만 생산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바닥재로 쓰지 않는 운모를 바닥 아래 숨긴 것도 괴이하다.

현대과학에서 운모는 축전기나 전기의 절연체, 내화물로 쓴다.

고속 중성자에 대해 부전도성이 있어서 핵반응을 감속시키는 감속재로 사용한다.

춘분과 추분에 태양광선이 피라미드 북쪽에서 내리쬐면 한낮에 완벽한 직선 그림자가 서면 아랫단에 생긴다.

완벽한 그림자가 사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66.6초다.

이 피라미드를 만든 이후로, 그리고 앞으로도 무너질 때까지 피라미드는 정확한 시계기능을 계속할 것이다.

부패한 독재자와 그 하수인이 피라미드의 겉을 파괴하고 조각상을 파괴했다.

엄청난 훼손에도 불구하고 건설자들이 계획했던 기능은 아직 그대로인 셈이다.

피라미드의 중요한 기하학적 요소는 지상에서 정상까지의 높이와 밑면 둘레다.

기자와 태양의 피라미드 모두가 파이값을 적용해 설계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수학적으로 정밀한 이 값을 우연히 사용했을 리는 없다.

고도의 수학지식을 사용했을 뿐만아니라 이집트와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같은 목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3차원의 피라미드를 이용해 구체라는 개념을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태양의 피라미드에서는 훼손되지 않은 지하도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배수로였다.

복잡한 배수시스템으로 보아 물이 매우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데스의 아카파나 피라미드 역시 물에 둘러싸여 있다.

테오티우아칸을 건설한 문명은 의식적으로 복잡한 정보를 부호화해서 내구성이 강한 유적에 수학적 언어로 남겨두었다는 강한

인상을 받는다. 수학적 언어라...

신화의 불가사의

24. 꿈의 메아리

태고로부터 전승되어온 몇 개의 위대한 신화는 인류가 세계적인 대변동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서로 관계가 없을 듯한 문명들의 신화가 이렇게 비슷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메르의 길가메시는 거대하고 끔찍한 대홍수로 사라진 시대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그는 대홍수때 살아남아 인류를 존속시킨 대가로 불사의 몸을 얻은 우투나피시팀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신들도 땅에 살았단다,

공기의 신 아누, 하늘의 주신 엔릴, 전쟁과 사랑의 신 이슈타르, 인류의 친구이며 보호자인 에아...
신들은 엄청나게 늘어난 사람들과 그들의 싸움질을 보기 싫어 인류를 멸망시키려한다.

에아는 우투나피시팀을 가엽게 여겨 배를 만들고 살아있는 종자를 배에 실으라고 한다. 홍수가 일어났다.

바람과 물과 어두움, 신들조차 무서워했다. 그 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거의 같다.

중요한 것은 마치 본 듯이 생생히 이 파멸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이야기를 멕시코에서도 볼 수 있다. 4태양의 종말이 바로 그것이다. 아즈텍인들은 두 사람만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거대한 배를 만들어 산꼭대기에 도착한 그들은 땅으로 내려와 많은 아이들을 낳았는데, 아이들은 비둘기가 나무 위에 앉아서 말을

알려줄 때까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은 각각 달라서 아이들은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중앙 아메리카의 메초아카네섹스 족의 전승은 창세기와 메소포타미아의 그것과 너무나 같다.

테스카틸포카라는 신은 테스피의 가족을 큰 배에 태워 살려주며 동물과 종자를 배에 실었고 배는 산의 정상에 도달한다.

테스피는 상륙해도 좋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콘도르를 날려보낸다.

콘도르는 돌아오지 않고 다른 새를 날려보냈는데 오직 벌새만 잎 달린 가지를 물고 돌아왔다. 다시 인구가 번성하고 땅위에 넘쳤다.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의 마야족도 위대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남아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그 형태가 비슷하다. 북 아메리카도 마찬가지다.

신화 속에 남아있는 인류의 대홍수 기억은 어디까지 퍼져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500편 이상의 홍수전설이 있고 86편을 조사한 리처드 안드레 박사는 62편이 메소포타미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단한다. 중국과 말레이, 라오스와 태국, 버마의 카렌족, 베트남, 오세아니아에도 홍수의 전설은 있다.

그리스 신화는 시대별로 종족을 설명한다.

황금종족은 신처럼 살았다, 잠을 너무 많이 잤기 때문에 죽었고 제우스의 명령으로 지구바닥에 가라앉았다.

은의 종족과 동의 종족, 영웅의 종족에 이어 철의 종족이 나타나는데 바로 현생인류다.

흥미있는 것은 동의 종족인데, 그들은 거인의 힘과 강한 다리에 강한 손을 가졌고 프로메테우스라는 거인족이 인간에게 불을 주는

잘못을 저질러 제우스가 사멸시켰다. 신들이 지상을 단 한 번에 휩쓸어버린 방법은 홍수였다.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인 데우칼리온은 피라를 아내로 맞이했고 피라는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딸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데우칼리온에게 나무 상자를 만들어 그 속에 필요한 것을 모두 넣고 피신하라고 이른다.

홍수가 끝나고 이들이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자 제우스는 돌을 던지라고 한다.

데우칼리온이 던진 돌은 남자가 피라가 던진 돌은 여자가 된다.

인도에도 비슈누신이 마누에게 비슷한 일을 한다.
이집트에서는 세티 1세의 묘에서 사나운 홍수로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멸망시킨 달의 신 토트의 이야기가 나온다.
호피족의 신화는 매우 명쾌하다.
“최초의 세계는 인류의 잘못으로 하늘과 지하에서 나온 불이 모든 것을 태워서 파괴되었다.

두번째 세계는 지구의 축이 뒤집혀서 모두가 얼음으로 뒤덮였다. 세번째는 세계적인 홍수로 끝났다.

현재는 네번째 세계다.  이 시대의 운명은 사람들이 창조주의 계획대로 행동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된다

25. 종말론의 다양한 가면

이슬람교에 귀의하기 전의 이란에 살았던 아베스타 계 아리안 인도 호피족과 비슷한 것을 믿고 있다.

최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순수하고 죄가 없었으며 키가 컸고 장수를 누렸다.

그 시대가 끝날 무렵 악마가 성스러운 신 아후라 마즈다에게 싸움을 걸어 재난이 잇따른다. 제 2시대는 악마가 실패한다.

제 3시대는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었다. 제 4시대, 현재는 악이 승리하기 시작했다.

흥미있는 것은, 제 1시대의 종말에 있었던 재난이 홍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악마인 안그라 마이뉴가 습격해오자 겨울이 열 달로 늘어나고 여름이 두 달로 줄었다. 모든 것이 얼음에 파묻혔다.

아후라마즈다는 이마라는 사람에게 지하저장소를 지어 짐승과 불꽃을 들고 들어가라고 한다.

물을 흐르게 하고 푸른풀을 자라게 하고 여기서 살아남으라고 한다.

하늘의 1/3이 악마의 지배에 들어가고 얼음이 지표를 뒤덮은 재해였다.

신의 경고와 함께 세상이 무너지고 소수의 사람이 구제되는 이야기는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

혹독한 추위와 깊은 암흑, 인류를 줄이기 위한 방편, 배고픔과 고통, 식인, 죽음... 또는 홍수와 구름, 어둠과 함께 사라진 해와 달...

행성은 궤도를 바꾸고 태양과 달과 별은 움직임을 바꾼다. 땅은 갈라지고 풀은 마르며 나무는 연기를 내뿜고 바위는 가루로 변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다양한 형태의 설화와 전승과 상징적 이야기들로 전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며 남아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튜튼족은 다른 문화보다 태고의 기억이 신화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고대의 음유시인과 현인들의 노래들에 실린 이야기들은 학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 있는 먼 삼림에서 나이를 먹은 거인이 어린 이리를 불러들였다.

이리들 중 한 마리가 태양을 쫓아가 손에 넣으려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매년 이리는 강해지고 마침내 태양에 도달했다.

태양은 줄어들어 피로 물든 것처럼 붉어졌다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끔찍한 겨울이 닥쳤다.

전쟁이 일어나고 인간은 이리처럼 변해 서로를 죽였다. 세계는 공허한 나락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던 중 신들이 묶어놓았던 큰 괴물이리가 쇠사슬을 끊고 도망쳤다. 이 괴물 펜리르가 몸부림을 치자 세계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산들은 무너져내리고 정상에서 기슭까지 갈라졌다.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은 땅 위에서 한꺼번에 사라졌다.

별은 하늘에서 표류하다가 땅 사이로 떨어졌다. 갈라진 틈에서 불이 나오고 증기로 가득찼다. 모든 생물과 생명이 사라졌다.

그 다음에는 모든 강과 바닷물이 넘쳐 홍수가 일어났다. 파도와 파도가 맞부딪치고 육지는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런 재해 속에서도 물푸레 나무 이그드라실 안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죽음을 면하고 다시 시작하는 시대의 시조가 되었다.

서서히 육지가 파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26. 지구의 긴 겨울에 태어난 인류

역사라는 것은 인류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시대를 의미하며 그 기간동안 인류전체가 한꺼번에 파멸의 위기에 직면한 적은 없다.

그러나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그랬을까? 우리 선조들은 절멸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종말론적인 신화의 무대는 바로 그런 시대가 아닐까?
40만년 전에는 이야기를 만들거나 신화를 만들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확실히, 원시적인 종족은 40만년전에서 10만년 전 사이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인류와 유인원이 구분되는 시기다.

우리와 똑같은 인류는 11만  5천년이거나 5만년 전에 출현했을 것이다.

대재해를 인류가 경험했다면 지각 대변동은 적어도 11만 5천년 전에, 더 가능성이 높게는 5만년 전에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지질학과 인류학이 부합된다.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된 시기와 진전된 시기가 문명화된 인류가 발생하고 급격하게 증가한 시기와 중첩되기 때문이다.

서로를 잘 모르는 이 두 학문이 그 사실을 미리 짰을리도 없다.

마지막 빙하기가 11만 5천년 전에 나타나고 그 이후로 만년설은 확대와 축소를 되풀이 했다.

만년설이 가장 빠르게 퍼진 것은 6만년 전에서 1만 7천년 사이다.

빙하의 전성기가 1만 5천년경이며 1만 3천년부터는 불투명한 이유로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기원전 8천년경에 위스콘신 빙하기는 완전히 끝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대두한 것은 지질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길고 거친 시기였다.

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앞서서, 우리는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우리와

완전히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들은 거칠고 황량한 시대에 몇 번이나 절멸의 위기에 처했을까?

27. 지표는 암흑으로 뒤덮이고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빙하시대에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게 무서운 힘이 덮쳐왔다.

그 힘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당시의 다른 큰 동물들이 받은 피해의 증거로 알수 있다.

빙하시대에 아메리카에 살던 많은 포유동물들이 멸종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빙하시기의 마지막 7000년 기간인 기원전 1만5천년에서 기원전 8천년 사이에 멸종했다.

이유나 원인은 뒤로 하고 이 시기에 멸종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찰스 다윈이 혼란이 지구의 구조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대륙에서는 70여종의 대형 포유동물이 멸종했다. 코끼리, 맘모스도 여기에 속한다. 약 4000만마리 이상의 동물이 죽었다.

그런데 집중적으로 죽은 것은 기원전 1만 1천년에서 기원전 9천년 사이다.

이 전의 30만년동안 20여종만 멸종했다는 사실을 보면, 기원전 1만5천년에서 기원전 8천년 사이에 떼죽음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북방은 기원전 1만3천년부터 기원전 1만1천년 사이에 대혼란에 빠진 듯하다.

북극권의 가장자리는 대규모 천재지변의 흔적이 남아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물들의 유체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맘모스는 상아가 완벽하고 살이 붙어있어서, 지금도 개들의 먹이로 쓸 수 있다.

알래스카의 페어뱅크스의 레스토랑에서는 맘모스 스테이크를 메뉴로 내놓고 있다.

엄청난 힘이 이런 파국을 초래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동물이 알래스카에 살았을까?

송곳니가 발달한 호랑이, 낙타, 말, 코뿔소, 당나귀, 사슴, 사자, 족제비 등의 동물이 발견되었다.

이 정도면 동물의 왕국 수준이다. 아마 지금과는 완전히 환경이 달랐을 것이다.

다양한 층에서 당시의 상태로 얼어있는 석기가 나왔다. 동물상도 있었다. 인류는 알래스카에 살고 있었다.

몇 톤씩이나 되는 동물들은 누가 그런 흔적도 없는데, 찢어지고 끊어진 채 한 곳으로 날려와 뒤엉켜 여기에 쌓였고 검은 진흙이

덮이고 얼어붙었다. 시베리아도 마찬가지다.

로마시대부터 지금까지 10년마다 4만개의 상아를 파냈다.

코뿔소와 영양, 말, 들소, 호랑이 등이 발견되는데 온난한 기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동물의 유체가 더 증가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동물들의 뱃 속에서 발견된 식물들, 풀, 초롱꽃, 미나리아재비, 사초, 야생콩은 이 추운지방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동물들이 원래 얼음이 뒤덮힌 땅에 살았던 것이 아니고 죽었을 때 얼음으로 뒤덮였다는 설명이 유일하게 논리적이다.

그런데 세계의 다른 지역이 마지막 빙하시기를 끝내려고 했던 시기에 왜 낙원이었던 죽음의 겨울을 맞이한 것일까?

끔찍한 규모의 화산폭발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거의 모든 진흙 속에 화산재가 퇴적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스콘신 빙하기가 쇠퇴하는 중에 화산분화가 다발한 증거로,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 오리건, 콜로라도, 더 나아가서는 중앙 아메리카, 남 아메리카, 북대서양, 아시아, 일본에서도 있었다.

1883년의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화산은 3만6천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4827킬로미터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진원지에서는 해일이 발생해 파도가 30미터를 넘었고 증기선은 수 킬로 내륙으로 파도를 타고 날아갔다.

18세제곱 킬로미터의 바위와 재, 먼지가 날려 지구의 하늘은 2년동안 눈에 보일 정도로 어두웠으며 석양은 매우 붉었다.

지구의 평균기온은 크게 떨어졌다. 연속된 폭발이었다면 신화에 나온대로 하늘이 검어지고 태양과 달이 사라질만 한 것이다.

대격변이 있고난 세계 각 지역은 빙하에서 벗어났지만, 그 전까지 전혀 얼음이 없던 알래스카, 시베리아는 지금과 같은 기후로 변했다. 당시의 해면은 지금보다 121미터 정도 낮았다. 그런데 엄청난 분량의 만년설이 갑자기 녹기 시작했다.

해면은 상승하고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던 섬들이 사라졌다. 산꼭대기와 동굴로 도망가던 동물과 사람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이 대홍수는 세계 전역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몇 백년 후에 완전히 물이 빠졌다.

이 세계적인 사건들은 곳곳에 신화와 전승으로 남아 지질학적 발견을 증언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상상력이 기발한 생각을 만들어낸 것일까?

28. 하늘의 기계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훌륭한 야금기술을 남긴 이 고대의 지성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일상적인 언어로 남기기보다는 신화의

뒷편에 남기려하지 않았을까? 만약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행성이 일렬로 늘어설때, 이유없이 단파 무선 주파수가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이미 기원전 3세기의 칼데아의 역사가가 설명한 것이다. 오는 2000년 5월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  

마야문명이 예언한 제 5태양의 종말일에는 행성이 특이한 구조를 이룬다. 4만5천2백년동안 단 한 번 일어나는 구조다.

이렇게 일렬로 늘어서서 잡아당기면 안그래도 원심력 때문에 적도부근이 불룩한 타원형인 지구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팽이를 돌려본 적이 있는가? 팽이가 방해를 받지 않고 돌아가는 동안 팽이는 똑바로 서있다.

팽이의 축이 수직에서 벗어나는 순간 원래의 방향과는 거꾸로 천천히 움직이는 회전이 발생한다.

이 회전이 세차운동이며 축이 향하는 방향을 바꾼다. 이렇게 세차운동은 영원히 계속된다.

이 운동은 매우 정확해서 기원전 3000년의 북극성이 용자리의 알파별이었고 그리스 시대에는 작은곰자리의

베타별이었으며 1만4천년에는 직녀성이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

- 지구는 수직에서 23.5도 기울어져있으면서 4만1천년에 걸쳐 1.5도의 가감이 생긴다
- 지축의 세차운동 1주기를 끝내는데에 2만5천7백7십6년이 걸린다
- 계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공전궤도상의 여러 지점이 태양광선에 닿는 각도이다

29. 고대 암호 속의 첫번째 실마리




지구 공전궤도를 바깥쪽으로 확대해서 천구상에 커다란 원을 그린 것을 황도라고 부른다.

황도를 둘러싸고 남북으로 약 7도의 폭으로 확대된 별띠가 있는데 이것이 황도대의 12별자리다.

양, 황소, 쌍둥이, 게, 사자, 처녀, 천칭, 전갈, 궁수, 염소, 물병, 물고기자리가 그것이고 황도를 감싸는 이 별자리들의

간격은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지구가 공전을 하면 12성좌 중 하나를 밤에 볼 수 있다.

1년내내 태양은 지구의 관찰자와 황도대 12성좌 중 하나 사이에 존재한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태양이 뜨는 동쪽 하늘을 살펴보면 별자리가 반드시 보인다.

고대인들은 1년동안 네 개의 방위점(춘분, 하지, 추분, 동지)을 정했고, 방위점과 황도대의 별자리와의 연관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춘분날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 그곳에 보이는 별자리는 지축의 세차운동 때문에 변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이들은 매우 천천히 도는 주기에 따라 황도대의 각 별자리가 순서대로 여기에 온다는 것도 알고있었다.

이 주기는 거의 2200년 정도다. 2000년동안 매년 춘분이면 태양이 물고기자리에 떠올랐다.

“히파르코스는 그리스의 천문학자, 수학자로 세차운동을 발견했다.

끈기있는 관측의 결과이며 예리한 이성으로 이룩한 일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있는 이 주목할만한 발견은 오히려 더 오래전에 발견한 정보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토록 오래된 신화들은 공통적인 이야기와 수치를 제시하는데,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108, 9×13같은 수치들은 베다와 앙코르와트, 바빌론, 북구의 발할라, 헤라클레이토스의 불길한 발언 속에 나타난다.

신들의 죽음과 재생, 지구와 하늘이 그 둘레를 도는 거대한 나무들, 소용돌이, 우유와 크림을 휘저어서 버터를 만는 기계,

송곳 들. 이런 이야기들은 천체의 움직임과 관계가 깊은 비유들이며 토속신앙이나 숭배와는 무관한 것들이다.

그리스인들이 문명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이미 몇 세기 분량의 먼지가 위대한 고대의 유적에 얹혀있었다.

유적가운데 몇 개는 이미 해독 불가능한 전통적인 의식과 신화와 옛날 이야기에 남아있었다.

암호화된 과학의 흔적이 그 이야기에 묻혀있다면?

30. 우주의 나무와 신의 맷돌
산티나 교수와 폰 테헨드 교수는 “햄릿의 맷돌”이라는 책 속에서 많은 증거를 제시하며 고대신화 가운데 몇개가 세차운동의

복잡한 기술적 자료를 전달할 수단으로 준비되었다고 말한다.

1969년에 출판한 이 책에 대해 아무런 반향이 없었던 것은 전문가들도 알기 어렵고 일반인들은 더더욱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광범위한 고대신화 속에서 세차운동의 메세지를 되풀이해서 전하고 있는데, 이 신화들 속에 드러나는 중요한 이미지와 상징의 하나인 “하늘의 혼란”이 세계적인 대변동을 다룬 고대 전승 속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이런 대변동은 자연스럽게 생길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속에 그것과는 거리가 먼 세차운동의 주제가 삽입되어 있다.

북구의 신화에는 “500개의 문과 40개의 문이 발할라의 벽에 있을 것이다.

800명의 전사가 각각의 문에서 나와서 이리와의 싸움에 나선다.”라고 말한다. 이 숫자를 그대로 세어보자. 540×800=432,000이다. 이런 숫자는 우연히 들어간 것이 아니다.

산티나와 데헨트가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메세지의 기본적인 이미지는 빛나는 돔인 천구를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로 바꾸면

쉽게 드러난다.

그 다음에는 물레방아 바퀴와 휘저어 섞는 기구, 소용돌이, 손으로 돌리는 맷돌처럼 이 기계를 영원히 계속 돌리는

이미지가 나타난다.

12성좌가 바뀔 때마다 하늘의 거대한 매카니즘이 거대한 기어를 움직이는 듯하다.

고대의 과학적 언어에서 이그드라실은 물레방아의 굴대처럼 세계의 축을 표현하고 있다.

이 축은 바깥으로 뻗어나가 천구의 북반구 북극에 다다른다.

축에 매달려 있는 두개의 교차하는 큰 원이 테두리를 이루고 있다는 견해는 고대인의 우주에 대한 구상이라기 보다

암호이며, 천문학적 사실인 세차운동을 비유한 것이다. 이런 증거는 여러 전승과 신화에서 나타난다.

중앙 아메리카의 전승에서 하늘을 받치는 네 기둥 역할을 한 바카브라는 신은 춘분, 추분, 하지, 동지 때 떠오르는 네 개의

별자리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들은 대홍수가 일어나자 자리를 버리고 도망가버렸다고 전한다.

맷돌이라는 비유도 그 중 하나다.

이런 비유들에서 쇠로 만든 버팀대는 천구의 좌표를 나타내고 세계의 햇수의 틀을 표현한다.

거대한 소용돌이도 고대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오딧세이나 인도양과 태평양의 다른 문화에서도 나타난다.

맷돌과 소용돌이는 그만큼 전세계 공통적이다.

개가 등장하는 경향도 의도적인 것이다. 체로키족의 개가 달리는 길(은하수), 핀란드 신화의 쿨레르보가 데리고 다닌 검은

개 무스티, 오딧세이가 돌아올 때 처음 그를 알아본 개, 삼손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우 등은 길을 여는 개를 형상화한다.

오리온이 개를 기르는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리온이 기르던 개가 바로 시리우스 별자리다.

고대 이집트에서 시리우스를 개로 여겼고 오리온 자리를 오시리스신과 연관시켰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오시리스의 강력한 신화와 친숙한 틀에 휩싸인다.


31. 오시리스 숫자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세차운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고대신화와 신, 신전의 배치에 관한 결론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햄릿의 맷돌”의 저자들은 말한다.

한편 셀러스라는 학자는 최근 오시리스 신화에서 몇 개의 중요한 암호화 숫자를 발견했다.

- 지축의 세차운동에 따라 춘분의 일출위치가 황도의 별자리를 따라 1도 이동하는데 필요한 시간

- 태양이 황도대의 별자리 한 개(합계 30도)를 지나는데 필요한 시간

- 태양이 황도대의 별자리 두 개(합계 60도)를 지나는데 필요한 시간

- 대복귀가 일어나는데 필요한 시간. 즉 세차운동의 1주기 (합계 360도)

셀러스가 제시한 숫자는 360,72,30,12다. 이 숫자들은 대부분이 여러 등장인물의 삶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온다.

곳곳에서 간단한 암산을 하게 만들거나 숫자에 주의를 갖게 만드는 말을 썼다.

- 12 : 황도대에 있는 별자리수

- 30 : 황도대의 각각의 별자리가 황도를 따라 점유하고 있는 각도

- 72 : 태양이 세차운동에 의해 황도를 따라 1도 이동하는데 필요한 햇수

- 360 : 황도 전체 각도

- 72×30=2160 : 태양이 황도를 따라 30도 이동하는데 필요한 햇수. 즉 12 별자리 가운데 하나를 통과하는데 필요한 햇수

- 2160×12(또는 360×72)=25920 : 세차운동의 1주기에 걸리는 햇수. 대복귀, 그레이트 이어(Great year)의 햇수.

- 36 : 태양이 세차운동에 의해 황도를 따라 0.5도 이동하는데 필요한 햇수.

- 4320 : 태양이 세차운동에 따라 60도(황도대의 별자리 둘)를 이동하는데 필요한 햇수

이 숫자들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계속 나타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숫자는 72이다. 72는 36을 더해서 108이 된다.

또 108에 100을 곱해서 1만800이 되거나 108을 2로 나누어 54가 되기도 하고 54에 10을 곱해서 540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숫자는 2160이다.

때때로 10을 곱하기도 하고 2를 곱해 4320, 43200, 4320000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무한히 계속된다.


이 숫자를 신화에 의도적으로 삽입해서 썼을까? 황도를 따라 1도를 움직이는 시간은 현대과학이 측정하기에 71.6년이다.

기원전 2세기의 히파르코스는 78.26년으로 계산했다. 오시리스 신화의 72년이 더 정확한 셈이다.

2160이라는 숫자도 히파르코스는 2400년이나 2347.8년으로 계산했다. 오늘날의 계산으로 2148년이다.

황도대를 일주하는 대주기도 오시리스의 계산으로 하면 144년의 차이 밖에 생기지 않는다.

이야기에 소숫점을 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정수라면 정말 정확한 수자를 넣은 셈이다.


북구 신화에 나오는 이리와 싸우는 전사의 수는 43만 2천명이다. 대변동을 기록한 중국의 장서 숫자는 4320권이다.

홍수가 일어나기 전 수메르를 지배한 왕이 43만2천년동안 군림하고 있었고 창조에서 대 재해가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이

216만년이다.

마야족과 아메리카 인디오의 신화에도 4320은 수없이 등장한다.

인도의 불의 제단에는 1만800개의 벽돌이 있다. 비시누신이 꿈을 꾸는 시간은 432000년이다.

싱가포르에서 삼합회에 가입하려면 1.80달러의 배수를 단계별로 지불해야한다.

10836, 72는 끊임없이 중국의 설화에 출현한다. 인도의 푸라나에는 네 개의 땅의 시대, “유가”가 존재한다.

네 유가를 합하면 1만2천년의 성년의 길이에 해당한다. 인간의 1년은 신의 하루와 같고 신의 1년은 인간의 260년이다.

그래서 신의 칼리유가 1200년은 인간의 기간으로 432000년이다.

이 숫자들과 신화에 등장하는 유사한 이야기들은 과연 그저 이야기일뿐일까?

아니면 세차운동과 관계있는 고도의 비유와 상징일까? 항상 등장하는 개의 모습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검은개 무스티의 이야기는 신화로 남아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이야기들에 숨은 정교한 연관과 디자인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32.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하는 말

고대의 많은 신화들이 대재해를 눈 앞에서 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인류는 마지막 빙하시대에서 살아남았다.

홍수와 혹독한 추위, 대규모의 화산활동과 파괴적인 지진은 기원전 1만5천년부터 기원전8000년 사이에 일어난 급격한

빙하의 용해와 대변동에 뿌리를 두는 듯하다. 그

러나 이런 대홍수의 신화 속에서 지성을 가진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은 매우 기묘한 일이다.

불가사의한 신과 초인들은 인류를 구하고 문명을 전한다.

피부색이 하얗고 수염을 기른 사람,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안데스의 비라코차, 멕시코의 케찰코아틀은 신화를 매개로

우리에게 무언가 교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메세지를 남기려고 했다면 그것을 문서로 남기진 않았을까? 만약 문서가 파괴된다면 어쩔 것인가? 언어를 망각해버린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신화는 문서보다 불리하지만 더 오랜 기간을 전승시킬 수 있다. 그 속에 보편적인 언어를 담는다면?

그 영원의 언어는 바로 수학이다. 지구의 형태와 크기, 지리적인 위치는 앞으로 몇 만년이 지나도 유효할 것이다.

또다른 수학언어는 시간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1만년 후에도 72,2160,4320,25920과 같은 세차운동의 숫자들은 변하지 않는다.

별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준이면 이 숫자를 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 우리가 그들의 숫자를 풀고있지 않은가!

세차운동의 주기는 빙하시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수와 불과 얼음의 대재해가 황도에 커다란 원을 그리는 하늘의 육중한 움직임과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것들은 황도경사와 공전궤도의 이심률, 지축의 세차운동과 연관이 있고 이것을 이용하면 빙하시대의 시작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빙하시대를 맞으려면,

① 지구가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상태, 즉 최대의 이심률인 상태여야 한다.

이때 지구는 평소보다 몇 백만 킬로미터 정도 태양에서멀어진다.

② 지축과 북극, 남극의 위치가 평소보다 수직에 가까운 최소의 황도경사 상태여야 한다.

③ 세차운동의 긴 주기가 계속되는 동안 지구가 태양에서 가장 먼 지점에 이르면 비교적 추운 여름이 된다.

이때는 겨울에 형성된 얼음이 다음 여름동안 녹지 않는 조건이 갖추어진다.

공전궤도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지구가 태양에너지를 받는 양과 강도는 시대와 경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것이

빙하시대를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다.

고대신화의 작성자들은 이 무서운 위험을 경고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은 세계적인 대재해의 고통을 천천히 회전하는 하늘의 맷돌과 복잡하게 연관짓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지 어떨지는 우리의 몫이다.

기자로의 초대

33. 방위

저자는 기자 대피라미드를 올라간다. 시간은 새벽, 경비원들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야 가능했다.

피라미드는 동서남북이 거의 완벽하게 정동정남정북정서를 향하고 있다. 0.015%라는 이 오차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1% 정도는 육안으로 식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동서남북 변의 길이도 거의 같은데 오차가 1% 이하이다.

아마도 건설자들은 동서남북 방위를 정확히 해야했던 강렬한 의지를 가졌을 것이다.

이것은 모서리의 각도 90%에 이르면 대단한 정밀도를 자랑한다. 현대의 최고수준과 동일한 건축기술이다.

어떤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 건축의 금자탑이다.




남면에는 배를 넣을 수 있는 듯한 갱이 뚫려있다.

여기에는 광학조사 결과 길이 30미터의 대형 목조선을 넣을 수 있는 크기이다.

다른 갱에서는 1950년에 43미터 정도의 큰 배를 발견했다.

삼나무로 만든 이 배는 4500년이 지났다는 지금도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배가 원양항해에 적합하도록 설계했고 나일강의 잔물결에는 별 소용이 없는 높은 뱃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34. 불멸의 저택

저자는 203단을 쌓인, 한단의 평균높이가 68센티미터인 기자 대피라미드를 올라간다.

단의 높이는 차이가 커서 이 평균은 의미가 없다. 무릎만한 것에서 가슴높이까지,

또 발판의 높이도 매우 차이가 나서 바위산을 오르는 듯하다. 어떤 돌은 무게가 10톤에서 15톤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런 거대한 돌들을 채석장에서 다듬어 절단하고, 공중으로 30미터 이상 들어올려 짜맞추어야 했다.

이집트 학자들은 20년동안 10만명이 투입되었다고 하지만, 이걸 그대로 인정한다면, 1시간에 31개의 돌을 배치해야한다.

만약 농사짓는 시간을 빼고 1년에 3개월만 일해야한다면 1분에 4개, 1시간에 240개를 쌓아야하는 분량이다.  

이런 프로젝트라면 면밀한 계획과 기민한 연락수송체계, 전기간 무사고 작업이어야한다.

경사각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죄다 글러 버린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 가설로는 축대를 쌓아 돌을 굴러올렸다는 설이 있는데 만약 돌을 굴릴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피라미드

본체의 3배여야만 했을 것이다. 이걸 벽돌과 흙으로 만들 수는 없다.

경사로에 사용한 돌과 흙의 무게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또다른 주장은 나선형 경사로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돌을 끌어올렸다는 것인데, 이건 정말 불가능하다.

네모난 돌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147미터 꼭대기로 운반한다는 건..

그럼에도 피라미드 건축자들은 수평과 좌우대칭, 방위의 정밀성을 유지한다.

거기에 원주율 2π를 적용해 길이를 계산한 것이다.

230만개의 석회암과 화강암으로 만든, 예전에는 8만 9000제곱미터에 걸쳐 반사경과 같은 외벽이 입혀있던 피라미드.

301년의 대지진으로 이 외피를 모두 벗겨가 버렸지만, 남아있던 석회암 외피는 그 접합부위가 너무 정교해서 돌과

돌사이에 면도날 하나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시멘트로 붙여놓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 피라미드의 건축자에 대해 이집트학의 시조인 샹폴리옹은 키가 30미터정도는 되는 거인일

것이라고 말했다던가...

35. 단순히 왕의 무덤에 지나지 않을까?


대피라미드를 내려온 저자는 의기양양하게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로 향한다.

물론 뇌물을 안주었던 서면 경비원에게 50불을 주고서다.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이 세명의 왕이 기자의 피라미드를 지었다고 알려져있다.

이건 피라미드가 지어졌다는 시기로부터 2000년이 지난 후 헤로도토스가 적어놓은 문헌에 따른 사실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유럽의 탐험대가 1818년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내부를 발견했을 때, 그 방은 텅 비어있었다.



화강암 석관이 있었지만 그 속도 비어있었다. 학자들은 이미 도굴당한 뒤라고 말한다. 멘카우레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뼈도 발견되었지만, 초기 기독교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만든지 2500년 후의 일인 셈이다.

누군가 시신과 유물을 훔쳐갔다는 설명이지만, 최초에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내실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했을 때, 그곳은 현무암으로

견고하게 막혀있었다. 하는 수 없이 우회로를 만들어 들어가야했다.

도굴은 불가능했다. 들어가보니 보물은 커녕이고 석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말고도 물론 통로는 있다.
수갱이 있는데 이것은 이미 로마시대에 발견한 흔적이 있다.

 이곳은 지하의 방과 통하고 있지만 위쪽에 위치한 왕의 방은 꽉 막혀있었던 셈이다.

이 수갱으로 도굴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겠지만, 그것도 간단하지 않다.

45미터 정도 내려가면 자갈로 꽉 막혀있어 전진할 수 없고 어떤 곳은 수직인 지점도 있어서 목숨을 걸고 들어가더라도 아주 조그만

보물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는 투탕카멘의 왕들의 무덤과는 달리 왕의 무덤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비문하나 없고, 장식하나 없으며, 새겨진

글자하나 없다. 글자가 있긴 있는데, 뒤에 누군가가 새겨넣은 흔적이 있는 문법에 맞지 않는 조잡한 글자가 아주 구석진,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곳에 있다.



이게 말이나 될 소린가.

학자들은 쿠푸왕이 이 피라미드를 짓지 않았다는 인벤토리 비석의 글씨는 용케 무시하면서 이 글자를 이유로 여기가 쿠푸왕의

무덤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대피라미드 동쪽에 있는 보조건물중 하나라고 이 비문은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36. 변칙성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의 남서쪽 모서리와 북동쪽 모서리를 연결하는 선을 연장하면 대피라미드 남서쪽 모서리와 북동쪽 모서리를

연결하는 선이 된다.

그러나 같은 선을 남서쪽으로 연장해도 제3피라미드에 닿지는 않는다.

학자들은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가 그냥 왕의 개성에 따라 다른 쪽을 향하고 있다지만 행콕 아저씨는 이것을 변칙성이라고 본다.

이것은, 하늘의 별자리를 모델로 하고 있다.



제3피라미드는 대피라미드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크기지만 매우 당당하다. 돌들은 밀착되어 짜맞추어 놓아서 조각그림처럼 보인다.

들어가는 통로는 매우 좁기까지 하다.

경사로를 따라 들어가면 방이 나오고 천장이 열여덟장의 동일한 색깔로 만든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든 방도 있는데 마치 대성당의

지하실같다. 땅 속의 이 좁은 통로에서 엄청난 무게를 가진 화강암판을 이리저리 배치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공사다.

때로는 60센티미터에 달하는 공간밖에 되지않는 곳도 있다. 불가능한 공학을 사용한 증거다.

제2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

건설자의 이름이 없는 이 피라미드에도 동서가 14미터, 남북이 5미터인 휑한 이 방은 견실한 맞배천장으로 이루어져있고 4

000년동안 2500만톤의 돌을 지탱해왔다.


37. 신이 만들었다

마문의 동굴이라고 현재 대 피라미드로 들어가는 주요입구는 일부러 만든 것이다.

난폭하게 두드려 부셔서 만든 인공동굴인 셈이다.
이렇게 어려운 난폭을 저지를 정도로 피라미드는 인간을 유혹한다. 저자는 이것을 “유인”이라고 부른다.

정말 왕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무덤이 세세토록 보존되길 원한다면, 비밀스러운 곳에 보존하지,
이렇게 거대한 걸 만들고 사람들을 멀리서부터 오라고 광고를 한단 말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매료시키는 것이 건축자들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마문이 만난 통로는 26도의 각도로 놓여진 통로였는데 화강암 마개로 막아놓아서 기필코 여길 뚫고 가게 유인하고 있다.

26도는 피라미드 경사각인 52도의 절반이다.

대피라미드의 원래높이인 146.73미터와 밑면 둘레인 921.46미터는 각각 지구의 반지름과 둘레에 비율이 일치한다. 바로 2π다.

이 숫자를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경사각을 52도로 한 것이다. 이 각도 말고는 높이와 밑면 둘레의 비율이 2π가 안된다.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에 있는 태양의 피라미드도 높이와 밑면 둘레의 비율이 4π다. 의도적으로 원주율을 사용한 것이다.






통로를 오르자 천장의 높이가 60센티미터가 안되는 곳이 나타난다. 이 거대한 건축물에 이런 통로는 무슨 이유일까.

이것은 두뇌게임이 아닐까? 통로를 다 올라가자 대회랑에 도달한다. 여기서 아래로 가면 여왕의 방이고 위로 가면 왕의 방이다.

여왕의 방에서는 미닫이 문이 설치된, 외부와 통하는 조그마한 환기구멍이 발견되었다.

환기구멍이라면 왜 닫아두었을까? 퀴즈가 아닐까? 저자는 계속 이렇게 생각한다.

대회랑도 수수께끼로 가득찬 곳이긴 마찬가지다.

지구상에 건설된 돌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무거운 건축물의 상부 2/3의 중량을 지금도 지탱하고 있다.

평평한 곳에서 올리기 힘든 것을 26도 각도로 46미터 길이로 지어놓는다.

완벽하게 잘라서 촘촘하게 붙여놓아 도저히 접합부분을 확인할 수 없다.

대칭성과 비율, 거대한 장치의 내부에 다다른듯한 느낌, 하늘의 문을 크게 열고 길을 만들어 파라오가 신의 친구가 되도록 했다는

전승은 이렇게 엄청난 장치를 만들 이유로는 불충분하다. 거기다 여기는 얼마나 오래된 곳인가.

신석기를 방금 통과한 사람들이 이곳을 지었단 말인가!

38. 대화식 3차원 게임

대회랑의 꼭대기에 도착하자 일부러 벽을 뚫어놓은 첫번째 방이 보인다. 왕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1.06미터다.

대기실에 들어가면 갑자기 천장은 3.65미터다.

여기에 내리닫이 문이 있었다고 추정하지만 이렇게 좁은 장소에 석판을 끼우는 일은 힘들다.

이 좁은 통로에서 3,40명이 해야할 일을 몇 명이 할 수는 없다. 왕의 방 중앙에 오면 직육면체의 방이 느껴진다.

바닥에는 열 다섯장의 두터운 화강암판이 깔려있고 벽은 거대한 100개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돌 하나는 70톤이며 5단으로 쌓았다. 그 안에 놓여진 석관의 용적에 비해 바깥쪽 용적은 정확히 두배이다.

이것도 일종의 수학게임이다. 이 석관을 만들려면 다이아몬드를 사용했을 거라는 추정이 든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다이아몬드는 희귀했다. 석관 속을 어떻게 파냈는지는 더욱 의문이다.

엄청난 압력의 드릴과 다이아몬드의 강도여야만 가능한 가공기술의 결정판이다.



더군다나 돌을 파서 만든 꽃병과 항아리, 쟁반에 새긴 글자에 이르면, 이건 불가능하다.

 이런 기술은 현재까지 우리 인류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최고급 텅스텐 카바이드 용구를 사용해도 불가능하다.

행콕아저씨는 허탈한지 석관 속에 누워서 소리를 질러본다 공명이 울리며 석관을 진동시킨다.

일본인 관광객이 그를 발견하고 놀란 듯 쳐다본다.

이 방은 피라미드를 절반으로 나누는 단에 만들어놓았고 이 지점에서 수평으로 자르면 수평면은 그 면적이 피라미드 밑변면적의 꼭

절반이다. 이 위치에서는 각에서 각으로의 대각선 길이가 피라미드의 밑변 길이와 같다.

수평면의 폭은 피라미드 밑변의 대각선 길이의 절반이다.

그들은 600만개의 돌을 이용해 방과 환기구멍과 통로를 원하는대로 만들어놓았다. 그 대칭과 방위와 각도는 완벽하다.

뿐만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장치를 할 여유조차 가지고 있었다.  

39. 시작되는 곳

대 피라미드의 남동쪽 모서리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 바위를 깎아 우묵해진 거기에 스핑크스가 있다.

높이 20미터, 길이 73미터, 머리의 폭이 4미터가 넘는 스핑크스는 세계 최대의 그리고 가장 유명한 석상일 것이다.

스핑크스로부터 남쪽으로 15미터 떨어진 곳에  카프레 왕의 밸리신전이라고 부르는 신전이 있다.

아마 카프레왕의 시기보다 훨씬 전에 지었을 이 신전에서 카프레왕의 비문이 나오자 카프레왕이 건설했다고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집트에서는 선대에 지어진 건축물을 도용한 사례가 매우 흔하다.

밸리신전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구석구석까지 예외없이 거대한 석회암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돌의 대부분은 길이가 5.4미터, 폭이 3미터, 높이가 2.4미터인데 큰 것은 길이가 9미터, 폭이 3.6미터 높이가 3미터가 되는 200톤짜리

도 있다. 70톤의 무게가 나가는 돌을 대피라미드에 있는 왕의 방까지 운반했는데, 70톤은 소형차 100대분량의 무게다.

이상하지 않은가?

돌들은 마추픽추나 샤크샤우아만의 건축물처럼 다양한 각도로 조각그림처럼 짜맞추어 놓았다.

또, 이 신전은 2단계에 걸쳐 지었는데, 첫번째 단계에 지은 것은 대부분 현존하고 있고 200톤의 거대한 석회암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돌의 표면에는 다듬은 화강암을 접합했는데 석회암이 매우 닳아있어서 거기에 맞추어 화강암을 덧씌운 것을 볼 수 있다.

석회암이 매우 오래되고 풍진에 시달린 탓이다.



카프레 왕이 이 신전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이집트학자들은 이 건물이 파라오의 장례에 필요한 세정과 신생의식의 장소로 설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비문은 남아있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문은 오히려 카프레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벤토리 비석에 따르면 이 신전은 훨씬 오래전의 것이고 스핑크스도 무척이나 오래된 태고의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밸리신전은 오시리스의 집이다.

6층건물 정도의 높이인 스핑크스는 완전히 정동을 향하고 있다.

머리는 인간이고 몸은 사자인 이 조각상은 그래서, 춘분과 추분에는 떠오르는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본다.

몸은 석회암을 깎아 만들었는데 스핑크스의 머리와 목은 단단한 바위 산을 깎아 만든 것이다.

주위에 폭 5미터, 깊이 7.6미터의 가늘고 긴 홈이 있어서 독립된 석상으로 건설했음을 알려준다.

스핑크스는 현재도, 방치해두면 모래에 파묻힌다. 과거에도 계속 그래왔다.

1929년에도 목까지 모래에 파묻힌 것을 이집트 고고학청이 복원시켰다.

이렇게 모래에 쉽게 묻힐 것을 왜 여기다 만들었을까? 스핑크스를 만들 당시의 기후과 현재의 기후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닐까?

사하라사막은 1만년∼1만5천년 전에는 매우 습기가 많은, 풍요로운 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혹시 케냐나 탄자니아의 푸른 초원같은 곳에 이런 석상을 지었던 것은 아닐까?

불멸의 지배자

40. 이집트에 아직 비밀이 남아있을까

영국의 고고학자 두 사람이 18왕조의 젊은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갔다. 왕의 무덤에 있는 보물창고가 파괴되었다.

거대한 황금사당이었던 이 방에는 많은 공예품이 있었지만 문이 없었다.

방의 입구에는 살이있는 듯한 아누비스, 자칼의 머리를 한 죽은 자의 신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현재는 박물관 유리안에 있는 이 자칼의 신은 은으로 만든 눈이 반짝이는 매우 강렬한 존재이다.

세차운동과 관련된 전설에 등장하는 개의 이미지, 개나 이리,자칼 등의 상징을 만든 자들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오시리스가 있다.

벨기에의 건축기사인 로버트 보발은 아무런 비밀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던 이집트의 기자가 하늘과 지상을 연결시켰다.

오리온 자리의 세 별이 일직선이 아닌것처럼, 기자의 세 피라미드도 그 배치가 동일하다.

오리온 자리의 세 별을 지상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위치뿐만 아니라 상호위치와 빛나는 강도까지 표시해놓았다.

큰 피라미드와 작은 피라미드는 오리온 자리의 별들의 빛나는 순서와 위치를 그대로 표현한다.



웨스트라는 학자는 비에 맞아 침식을 겪은 스핑크스와 밸리신전을 말한다. 돌을 마모시킨 것은 분명 “”다.

이 사막에 왠 비? 기원전 1만1천년에서 1만년 사이에 있었던 마지막 빙하기에 대량의 비가 내렸다.

아무리 공박을 하려해도 거기에 그렇게 새겨진 흔적을 어쩌겠는가?

최소한 1만년전에 이 건물들이 여기에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41. 태양의 도시, 자칼의 방

헬리오폴리스, 태양의 도시는 성서 속에 온(On)이라고 불렀고 이집트 언어로는 이누, 이누 메레트라고 불렀는데 “기둥”, “북쪽의

기둥”을 의미한다.

매우 신성한 장소이며 기이한 9명의 태양과 별들의 신들과 관계가 있다.

센우스레트 1세가 오벨리스크를 세웠을 때 이미 오래된 역사를 가진 땅이었다.

최초의 때에 우주는 어둡고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태양신 라는 자신의 화신으로 아툼을 창조했다.

이 불멸의 신은 신성한 자손을 창조했는데 공기와 건조의 남신 슈와 습기의 여신 테프누트였다.

이들이 성인이 되어 자손을 만드니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였다.

게브와 누트는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를 만들었고 헬리오폴리스의 9신이 탄생했다.


태초로부터 전해온 강력한 힘을 가진 신성한 물체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벤벤이라고 했다.

이 물체는 거칠게 잘라낸 돌 기둥 위에 얹혀있었다.

 벤벤은 피라미드처럼 생겼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잃어버렸고, 오벨리스크의 원형에 영향을 미쳤다.

이 불가사의한 돌은 신화에 나오는 성스러운 새 베누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베누가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우주의 큰 주기,

세계의 붕괴나 재생과 관계있다고 믿었다.



아툼과 비라코차, 지상을 멸망시킨 홍수가 끝난 뒤에 처음 얼굴을 내민 이 신들, 케찰코아틀, 오시리스, 이 비슷한 이미지들은 단순한

우연일까?

대 피라미드에서 남쪽 16킬로미터 지점에 조세르왕의 6단짜리 계단식 피라미드가 사막의 끝에 우뚝 솟은 채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 위압적인 피라미드는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거대한 석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 곁에 있는 우나스왕의 피라미드 벽에는 바닥에서 천장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 텍스트가 새겨져있다.

 이곳을 발견했던 이집트인 현장감독이 호박색 눈빛을 가진 자칼 한 마리가 인도한대로 따라가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이 상형문자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와 이미 잊혀진 아주 오래된 과거를 연결하는 마지막으로 남겨진 길이다.




주문같은 말들과 함께 적혀있는, “태고의 인류가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압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인상을 풍기는

이 문자들...

42. 시대착오와 수수께끼

우나스 왕의 방에 있는 회색벽, 여기에 적힌 글씨를 피라미드 텍스트라고 부른다.

이미 언어가 사라진 이 글들에서는 영원의 생명을 몇 번씩 되풀이해 강조한다.

“왕이시여, 위대한 별이 되고 위대한 오리온과 동료가 되어 오리온과 함께 여행하소서...

동쪽 하늘에서 떠올라 예정된 계절에 신생하시고 예정된 시간에 젊음을 되찾으소서...”

그런데 여기에 기묘한 장치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파라오가 영원한 장소를 찾아서 별 속으로 여행을 떠날 때 사용하는 이상한 도구와 부속품 같은 것들이다.

하늘에 있는 철판으로부터 아래로 늘어진 줄 사닥다리, 왕을 싣고 불꽃을 뿜으며 날아가도록 해주는 무엇, 날고 착륙할 수 있는 나룻배...

몇 번이고 철이라는 금속이 나오는데 이집트에서 철은 휘귀한 금속이었다. 피라미드 시대에는 운석 이외의 형태를 알지 못했다.

하늘의 철판이나 철 왕좌, 철 지팡이, 철 뼈에 쓴 철이라는 말은 고대 이집트어로 브자, 즉 하늘의 금속, 신성한 금속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또 여기에는 세차운동과 대격변을 암시하는 신화가 있다.

태양신 라가 그의 지배에 반항하는 인류를 사자의 머리를 한 여신 세크메트를 이용해 멸절시킨다.

무서운 파괴 중에 라는 몇 몇 인류를 구했다. 라는 인류에게서 손을 떼기로 하고 암소로 변한 하늘의 여신 누트의 등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암소가 현기증을 일으키며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들인 슈를 누트의 밑으로 보내 하늘의 기둥을 지키도록 한다.

암소의 네 다리는 세차운동에 따른 연대의 단락을 표시하며 극축분지경선, 춘분/추분/하지/동지를 나타낸다.

여신 세크메트가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기원전 1만970년부터 기원전 8810년의 사자자리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시리우스에 관계된 것이다. 이집트인은 이 별을 이시스와 연관시키고 있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여동생이며 아내이고 호루스의 어머니다.

피라미드 텍스트가 말하는 이중의 존재가 바로 두개의 별로 구성된 시리우스 별이다.

그런데 작은 별은 크기가 작아 육안으로 볼 수 없다. 천체망원경이 있어야 시리우스 B가 시리우스 A를 돌고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양신은 어둡고 공기도 없는 우주공간을 몇 백만년의 배를 타고 여행한다. 몇 천만년의 세월도 나온다.

시리우스가 태양과 동일한 곳에서 떠오르는 주기를 시리우스 주기라고 하며 365.25인데 이를 피라미드 텍스트에서는 시리우스를

새해의 이름”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왜 이런 문장들을 5왕조에서 갑자기 사용하다가, 6왕조 후기에서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까? 베낀 것은 아닐까?

43. 최초의 때를 찾아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들이 통치하고 있었던 최초의 때인 제프테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황금시대이며 혼돈스러운 세계를 덮고있던 물이 빠지고 원시의 암흑이 사라졌으며 인류가 햇살을 받으면서 문명의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또 신과 인간을 중개한 우르슈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파수꾼이라는 의미였다.

네테루라고 불리운 신들은 인간과 함께 지상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헬리오폴리스와 나일강 유역의 성지에서 인류를 통치했다.

그들은 초능력을 가진 존재들이었지만, 인간의 감정을 느꼈고 죽거나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현대인들이 보기에 단순한 신화인 이 기록을 중요한 신전에 보관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모든 왕조의 파라오의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 있었다.

학자들은 뛰어난 사관이었던 기원전 3세기의 신관 마네토의 기록중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들에 대해 지지를 보내면서도 같은

마네토가 기록한 이 최초의 이야기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다 합치면 최초의 때부터 약 2만4천9백2십5년이 흘렀다.

이것은 성서의 천지창조(기원전 5천∼4천년)보다 훨씬 오랜 것이어서 마네토를 인용했던 아르메니아의 에우세비오스는 이집트의

 1년은 아마도 1달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축소해 2만5천년을 2천년으로 축소하니 아담의 탄생에서 대홍수까지의 2242년과 맞아떨어졌다.

마네토의 글에서는 신들로부터 마지막 제30왕조까지 3만6천5백2십5년이라는 주장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시리우스주기인 365.25일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시리우스 년에서 1460년 주기의 25주기째에 해당한다.

어쨌거나 마네토는 우리가 배운 역사와 상관없이 기원전 3100년경에 제1왕조가 탄생하기 전의 유구한 태고에 문명인들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헤로도토스는 헬리오폴리스의 신관에게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적고있다.

“그들에 의하면 이 기간에 태양이 다른 장소에서 뜨는 것이 네 번 있었다고 한다.

두 번은 현재 지고있는 곳에서 떴고 두 번은 현재 뜨고있는 곳에서 졌다”
이것은 헤로도토스도 모른 채 전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세차운동을 알면 이 수수께끼같은 말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시간의 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주기는 춘분의 일출이 별자리를 배경으로 황도대를 한 바귀 반 정도 도는 기간이다.

 어떤 별자리에서 태양이 뜨던 것이 그 자리와 완전히 반대되는 별자리에서 태양이 뜨는 주기, 바로 1만3천년의 주기다.

이렇게 계산하면 이 이야기에 나온 것은 2만6천년 전의 이야기다.

두번 뜨고 지려면 3만9천년으로 거슬러가야하며, 이 이야기는 3만9천년 전부터있던 세차운동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44. 최초의 때의 신들

헬리오폴리스의 신학에 따르면 이집트 최초의 때에 나타난 9신은 라, 슈, 테프누트, 게브, 누트, 오시리스, 이시스, 네프티스, 세트이다.

이 신들에게서 난 자손에는 호루스와 아누비스가 있다. 최초의 때에 신들은 모두 창조신이었다. 성스러운 의지를 가지고 혼돈 속에서

성스러운 땅 이집트를 만들었고, 인간사회를 만들었으며 수천년동안 인간들 사이에서 파라오로 군림했다.

 그런데 혼돈이란 무엇일까? 헬리오폴리스의 신관은 기원전 1세기의 그리스 역사가인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게 깊은 암시를 했다.

디오도로스는 이 홍수를 데우칼리온 시대에 지구를 멸망시킨 홍수와 동일시했는데 이는 그리스판 노아의 신화다.

 많은 인간들이 죽었는데 이집트 남부에 살았던 사람들은 많이 살아남았다.

마지막 빙하시대가 끝날 무렵 북유럽의 몇 백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빙하가 녹아 세계의 해수면이 높아져 홍수가 일어나고 다량의

수증기가 비가 되어 내리는 동안 이집트는 이례적인 습기와 좋은 기후의 혜택을 누렸다.

디오도로스의 정보가 이런 기후정보와 비슷한 것은 왜일까?

 라는 최초의 왕이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자 늙었고 주름투성이의 노인이 되어 침을 흘렸다고 한다.

라에 이어 슈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병이 들어 난폭해진 후 아들 게브에게 왕위를 물렸다. 게브도 난항을 거듭했다.

라가 많은 물건을 넣어놓았던 황금상자는 그 안에 든 기묘한 물건과 함께 라가 하늘로 사라진 후에 오랜동안 이집트 동쪽 끝에 있는

요새에 보관했다. 이 상자를 가져와 여는 순간 게브는 큰 화상을 입었다.

 이 황금상자는 히브리인들의 계약의 궤와도 비슷하다. 뱀지팡이와 황금장식도 비슷하다.

문제는 이집트 최초의 신들에게 느끼는 기묘한 분위기는 매우 지적이며 기계와 가까운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시스는 지식과 언어에 강했고 말만으로도 현실을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토트는 하늘에 관한 계산과 해석의 책임자였고 문자를 발명했다. 오시리스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고난을 헤쳐나가는 지도자였다.

 오시리스의 거처는 물 위였고 살아있는 뱀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비라코차나 케찰코아틀의 묘사와도 비슷하다.

그는 치수와 농업과 양조, 예술과 식인풍습의 금지 등 문화영웅의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이들 신들은 동료가 있었으며 치열한 투쟁도 벌였다.

다른 것이라면, 비라코차와 케찰코아틀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오시리스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트에게 살해된 후 오리온자리에 재생해 저승의 왕이 된다.

45. 사람과 신의 일

고대의 도시 아도비스에 건축연대를 추정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이 있다.

이집트 신전유적 가운데 천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훌륭한 부조가 남아있는 유적이다.

이 유적은 세티1세의 것으로 그는 출애굽기의 파라오인 람세스2세의 아버지다.

그는 몇 개의 훌륭한 건축물을 지었고 훌륭한 기존 건축물을 양심적으로 복원했는데, 아도비스의 이 신전도 몇 백만년의 집이라고

부르며 오시리스에게 바친 것이다.

 기둥이 여러개 있는 이 신전에는 주위의 벽에 여러 모습의 오시리스를 새겨놓았다.

여러 종류의 발견되지 않은 왕관을 쓴 오시리스의 모습중 하나는 코브라를 새겨놓았는데 멕시코에서는 방울뱀이었다.

이 왕관은 라가 오시리스에게 준 것인데, 왕관을 쓴 첫날 왕관에서 열이 나 오시리스의 머리가 부어올랐고 라가 고름을 뺐다고 한다.

 여기에는 아도비스의 왕명표라고 부르는 왕의 목록이 있다.

기원전 3000년 경 제 1왕조의 첫번째 파라오인 메네스에서 기원전 1300년의 세티1세와 그의 어린 아들 람세스 2세가 마지막으로

새겨져있다.

신전 뒤편으로는 오시레이온이라는 독특한 건축물이 있는데 물을 끌어들이면 외호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섬이 된다.

왕의 신전 뒤에 통로가 있고 그것이 오시레이온으로 연결된다.

이 건물은 세티 1세의 신전바닥보다 15미터나 아래에 있어 지하수면과 거의 같은 높이다.



오시레이온은 방위가 약간 어긋나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시레이온을 먼저 짓고 세티1세의 신전을 거기에 맞춰지은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오시레이온의 돌은 기자의 밸리신전과 유사점이 많고 아직 죽지 않았던 세티1세가 이렇게 죽은자의 기념비를

지을리도 없다.

오히려 오시리스의 비밀스러운 행적을 축하하기 위해 지은 것이 분명한데, 여기에는 조금더 연구해야할 수수께끼가 있다.

 오시레이온 북서쪽으로 1킬로미터에는 어지럽게 널린 고대의 무덤이 있는데 왕조시대 초기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12척의 거대한 목선들이 묻혀있었다.

가디언이라는 잡지가 왕의 함대라고 표현한 이 배들은 그냥 버린 것이 아니고 질서정연하게 정박중이었다.

적어도 기원전 3000년 전에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배를 만들었던 그들이 파라오의 영혼을 옮기기 위해 여기에 심어놓은 놓은 것일까? 

지구의 계측

46. 기원전 1만 1000년에서 기원전 1만 년 사이

오시리스의 신화가 없었다면 기원전 1만3천년에서 1만년에 걸쳐 다른 곳보다 훨씬 일찍 농업을 발전시킨 흔적이 있었다해도

사람들은 모른채 했을 것이다.

기원전 1만1천년에서 1만년이 이집트의 선사시대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고 학자들이 발견했는데 이 시기에 나일강 유역에는

몇 번의 파괴적인 홍수가 대규모로 일어났고 초기의 농업실험도 중단된 듯하다.
① 기원전 1만3천년경의 돌맷돌은 야채요리를 준비한 듯하다

 ② 동일한 시기에 물고기가 식량에서 사라졌다. 아마 보리꽃가루의 흔적이 정착민보다 전에 나타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③ 왜 기원전 1만5천년경에 있었던 호미날과 돌 맷돌이 사라지고 수렵과 어로에 필요한 석기가 나타났을까?

 당시의 기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사하라 사막은 기원전 1만년에서 기원전 9천년 사이에 녹색의 사바나였다.  

기후는 지금보다 상당히 시원하고 비가 많이 내렸다. 기원전 1만5백년을 기준으로 2000년전과 1000년후까지 매일처럼 비가 내렸다.

홍수가 끝나자 이번에는 건조해졌고 기원전 7000년까지 계속 그랬다.

그후 1000년에 걸쳐서 신석기시대의 다우기가 있었고 계속해서 3000년동안 적당한 비가 계속 내려서 농사짓기에 이상적인 환경이

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0년경에 이집트 왕조시대가 탄생할 무렵 다시 기후가 변해서 건조해지기 시작하면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기원전 1만3천년에서 기원전 1만5백년까지의 황금시대는 다른 지역에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기후가 극적으로 변해서 해면이 상승하고 지면이 움직이며 홍수와 화산이 빈번했고 검은 비가 내리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볼리비아의 알티플라노 고원과 이집트 양쪽에서 기원전 1만1천년∼기원전 1만년 경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47. 스핑크스

지질학자 존 웨스트는 지질학적 발표를 했을 뿐이지만 이것은 이집트학자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증거였다.

웨스트의 표현을 빌자면, 너무 이상하다.

조잡한 잡동사니 같은 피라미드를 건설한 후 갑자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구조가 뛰어난 피라미드가 등장한다.

그러다가 다시 형편없는 피라미드가 등장한다.

구루마를 만들다가 갑자기 벤츠가 나타나고 그러다가 갑자기 리어카가 등장한다. 문명의 변화가 뭐 이런 식인가!



어쨌거나 웨스트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증거를 제시한다.

스핑크스는 엄청나게 오래전에 만들었다는 것을 지질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핑크스의 머리를 제외한 사자모습의 몸에 물에 의한 침식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집트학자들의 말대로 스핑크스가 기원전 2500년에 카프레왕이 만들었다면, 기원전 3000년경의 왕조시대 시작부터 기자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바위에 물의 침식흔적이 있다면 엄청난 강우여야 가능하다. 그런 강우는 기원전 1만년 전의 이집트에 있었다!

바람과 모래? 스핑크스는 그곳에 있는 바위를 파내서 만들었기 때문에 방치하면 몇 십년만에 모래에 묻히고 만다.

스핑크스가 노출된 시기는 많이 쳐봐도 1200년이다.

그것도 그렇다치고 만약 바람 때문에 그렇게 침식된다면 석회암으로 만든 다른 건물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러나 고왕국 시대의 유적들에게서 바람과 모래의 침식흔적은 없다.

스핑크스의 침식흔적은 비를 맞아 생긴 침식의 흔적이며 바람과 모래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스핑크스 위에 떨어진 물은 옆구리를 타고 흘러 강한 바윗돌을 파고들었다.

 가장 보수적인 결론은 기원전 5천년에서 기원전 7천년이다. 이 때도 비는 왔다.

그렇다고 해도 이 시기의 다른 유물들이 스핑크스에 비하면 너무나 치졸하고, 합리적으로 이 침식을 설명하려면 최소한 기원전

1만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고 웨스트는 생각한다.

그런데 왜 머리에 왕조시대의 장식과 뱀 휘장이 있을까?

 심각하게 연구해본 결과 몸과 머리의 비율로 보아 머리는 왕조시대에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맨 처음 스핑크스의 머리에는 지금과 같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 그 무엇이 있었을 수도 있다.

웨스트는 카프레왕의 피라밋 아래쪽이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것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스핑크스와 같은 연대이고 그 위쪽은

중간연결자들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스핑크스와 같은 오래된 건물로는 오시레이온을 들고 있다.

 거기다 밸리신전의 돌이 스핑크스에서 잘려나간, 지질학적으로 동일한 층에서 잘라낸 돌이라는 것이다.

스핑크스와 밸리신전의 중심부는 동일한 사람들이 지은 것인 셈이다.

돌을 잘라내고 분리하고 운반해 밸리신전을 건설하는 기술은, 아직 우리 인류에게는 없다.

웨스트는 문명의 발전이 결코 직선적이지 않았으며, 우리가 몇 만년전에 우리보다 세련된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뿐이라고 말한다.

48. 지구의 계측




옛부터 많은 수학자와 지리학자들이 대피라미드가 측지지점을 나타내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말해왔다.

측지학이란 지구의 정확한 크기와 형태를 계측하는 학문인데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왔을 때 이런 방향에서 검토해보고 피라미드가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결과 피라미드는 삼각측량에 매우 편리한 거점이 되었고 피라미드의 정점을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계측했다.

 잘 보면, 대피라미드의 자오선이 나일강의 델타지대의 중앙을 통과하며 반으로 분할하고 있다.

그리고 대피라미드의 정점에서 북서와 북동으로 향하는 선을 그리면 지중해에 도달하며 이 삼각형은 나일강의 델타지대를 그대로

덮어버린다. 동쪽 자오선은 동경 32。38′이고 서쪽 자오선은 동경 29。50′인데 고대 이집트 왕조시대의 공식적인 국경선이었다.

중앙의 자오선은 31。14′에 있어 양 직선의 거의 중앙에 있다. 이렇게 지구표면에 2。48′의 폭을 가진 긴 땅을 그릴 수 있다.

남쪽국경인 북위 24。6′와 북쪽 국경선인 31。6′이므로 이 땅은 약 7도의 길이를 가진 직사각형 모양의 땅이다.

대피라미드가 델타 정점에 위치하지 않고 약간 어긋난 것은 순전히 그 땅이 이 튼튼한 건물을 짓기에 적당했던 때문인 듯하다.

이 직사각형은 그들이 위도와 경도를 알고 있었던 것을 의미하진 않을까? 그럴리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봐도 이 간격과 위치는...

 인공위성으로 계측한 적도의 둘레는 40068.04킬로미터이고 북극으로부터의 반지름은 6355.42킬로미터이다.

한편 피라미드 밑변의 둘레가 921.46미터, 높이가 146.73미터이다.

이 비율을 계산해서 지구의 적도가 조금 불룩 튀어나온 타원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1/43200 이라는 축척에 매우 가까워진다.

 ① 적도길이인 40068.04를 43200으로 나누면 927.5미터 ≒ 921.46미터(밑변)

 ② 지구반지름 6335.42킬로미터를 43200으로 나누면 147.11미터 ≒146.73미터(높이)  각각 0.75%와 0.2%의 오차다.

이 정도라면 대피라미드의 밑면의 둘레는 적도둘레의 1/43200 이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 밑변의 둘레, 높이를 알고 43200 이라는 축척을 알면 지구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그냥 우연일까? 43200 이라는 이 기묘한 숫자를 선택한 것도 우연일까?

 대피라미드는 지구 북반구을 투영한 것이 분명하다. 고대의 지도들을 연결시켜 생각하면 더욱더 이 심증을 굳힐 수 있다.

피라미드의 ㅣ편평한 각 면은 북반구의 1/4곡면이고 구형에서 90도의 1/4원을 나타낸다. 피리레이스 제독의 지도가 어디를

기점으로 하고 있을까? 이집트의 아스완이었다.

아스완에서는 중요한 천체관측소가 고대이집트 남쪽 국경선 위에 서있다. 이래도 우연이란 말인가?

 위대한 토트신의 기하학과 측량과 의학, 식물학, 수학과 문학을 물려받은 이집트 고대인들은 토트의 가르침을 42권의 형태로 보관해

계승했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인들이 태양년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열 두 부분으로 구분했고 이것은 별의 움직임을 관측한 결과였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이집트인들이 1만년동안 계속해서 별을 관측했다고 말한다. 무슨 필요에서 이런 오랜 항해를 계속한 것일까?

49.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힘

1/43200의 축척으로 만들어진 대피라미드가 북반구의 모형이며 투영도라는 것은 43200이라는 세차운동의 숫자가 증명한다.

로버트 보발은 대피라미드의 건축계획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 말고도 더 다양한 의도가 있었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것은 2피라미드와 3피라미드를 포함한 대규모 계획으로 특별히 세차운동에 집착했던 고대의 건설자들이 계획한 일종의 암호다.




1960년대에 왕의 방 남쪽 환기구멍이 피라미드 시대(기원전2600년에서 기원전2400경)에 오리온 자리의 세 별에 정확히 조준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로버트 보발은 이 방 말고 여왕의 방의 남쪽 환기구멍을 조사했는데 이 환기구멍은 시리우스 별을 향해 있었다.

보발이 왕의 방의 환기구멍을 재조사한 결과 오리온 세 별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알 니탁별에 정확하게 조준되어 있었다.

기원전 2475년 경의 일이다. 피라미드를 기원전 2520년 경에 지었다고 하니, 더 이후의 일인 셈이다.

자, 세차운동을 생각해보자. 춘분점에 태양이 떠오를 때 보이는 별자리가 황도대에 있는 12성좌 사이에서 차례로 변한다.

이 현상은 모든 별과 마찬가지로, 오리온 자리에서도 아주 서서히 위도를 변화시킨다.

알니탁별이 가장 높은 위도에서 가장 낮은 위도(11°8′)로 내려오는 기간은 1만3천년이다.

다시 서서히 올라가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까지 1만3천년이 걸린다. 기자와 오리온의 가장 완벽한 일치는 기원전 1만450년이었다.



그러나 환기구멍은 기원전 2450년에 맞추고 별의 위치를 나타내는 땅의 배치는 기원전 1만450년을 가리키고 있다는 행콕의 질문에

대해 보발은 이렇게 말한다.

“피라미드가 2450년과 기원전 1만450년을 가리키는 「별의 시계」라면, 세차운동에 따라 오고가는 별의 위치를 가리키는 진자의

흔적이라면, 이 건축물을 언제 만들었는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니라면 “기원전 1만450년에 짓기 시작해 기원전 2450년에 완성했던, 아주 끈질긴 종파가 이것을 이룩했다고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자연의 시계를 설계한 이들은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틀림없다.

이것은 결코 무덤이 아니며 자신들의 생각과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로 피라미드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진리를 파헤치도록 끌어당기는 엄청난 힘을 지닌 이 건축물들을 통해 그들은 “진실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스핑크스는 항상 정동을 쳐다보며 이 위대한 계획의 일부를 거든다. 춘분과 추분을 알려주는 이 거대한 표식이 왜 사자모습일까?

만약 지금 누군가 이런 것을 만든다면 물고기형태가 맞을 것이다. 물고기자리는 그리스도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표식이 물고기였다. 그 이전은 양자리였다. 구약의 종교적 상징, 이집트에서 크게 번성한 아몬신은 양이었다.

양자리 이전은 황소자리였다. 미노아문명은 황소를 숭배하는 종교를 가졌다.

 만약 카프레왕이 이것을 만들었다면 황소가 적당했을 것이다. 그

러나 태양이 춘분에 사자자리를 배경으로 떠오른 시기는 기원전 1만970년부터 기원전 8810년까지다.

그로부터 2만6천년이 지나지 않으면 다시 사자자리가 오지 않는다.

 ① 태양이 춘분에 사자자리로 떠오른다. 기원전 1만970년 ∼ 기원전 8810년

 ② 오리온자리의 세 별이 가장 낮은 위치에 뜬 시기. 기원전 1만450년

 이 시기가 왜 그리 중요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알리려고 했을까?

지구의 미래는?

50.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니다

저자가 이 글들을 쓰기 위해 조사를 하던 중에, 조수로 일하던 사람이 사표를 썼다. 사표를 쓴 이유는
“만약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알려지지 않은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한 사람들이 있다면, 적어도 3000킬로미터 이상의 폭을 지닌

광대한 땅이 일단 있어야합니다.

멕시코만이나 마다카스카르의 두 배정도는 되어야하고 큰 산맥이나 수계가 있고, 기후는 지중해성이나 아열대며 비교적 평온한

기후가 1만년 이상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아무런 물질적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살고있던 땅도 없어졌습니다. 당신은 헛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똑똑한 조수는 저자의 생각이 일단 가정부터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사라진 고도의 문명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문명을 지탱하는 육지는 너무 커서 결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아틀란티스처럼 있었다는 논란은 분분하지만, 그래 어디로 사라졌을까? 바다라고 했다, 그래서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바다는 바다일뿐 거기에 대륙은 없었다.

 만약에 사라졌다면, 언제, 왜, 어떻게 사라졌을까? 도대체 어떻게 대륙이 사라진단 말인가? 대재해라고 치자.

그러나 거대한 문명의 흔적을 형태도 없이 소멸시킬 대재해에 대해 그 아무런 기록도 없단 말인가? 아니면 존재하고 있을까?

 이 행성위에서 인류가 겪은 것 중에 이만한 것에 어울리는 대재해의 시기가 딱 한번 있었다.

기원전 15000년에서 기원전 8000년 사이인 마지막 빙하시대에 도래한 파괴적 해빙이었다.

이 파괴적인 혼란과 더불어 발생한 고대문명에 대한 전승과 무언가를 전달하고자한 “신들의 지문”사이에 강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 “남극대륙”이 나타났다.

남극빙원 아래의 지형을 정확하게 묘사한 지도, 그 지도는 지금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남극대륙에 27미터짜리 과일나무가 묻혀있는

이유를, 불과 몇 천년전에는 얼음으로 덮여있지 않았던 남극대륙을 웅변해주고 있다.

바로 햅굿의 지각이동설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갑작스런 동결과 함께 설명할 수 있는 극적인 대규모의 재난이었다.

지각이동에 따른 지진과 홍수, 화산과 해일, 갑작스런 해빙과 동결. 만약 이런 끔찍한 지각이동이 일어난다면 오늘날 지구상에

건설된 수천년에 걸친 문명은 순식간에 산산조각나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산꼭대기로 피신한 몇 몇 사람들이 이 흔적을 전하겠지만 말이다.

 저자에게 “남극이라는 대륙”을 발견하도록 도와준 사람들은 캐나다의 플럼-애스 부부였다.

그들은 행콕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또 하나의 가설을 제시한다.

지각이동 뿐만아니라 “인력”의 영향이 지각이동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빙하시대의 시작과 쇠퇴에 일정한 영향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지구의 자전이 불균형하게 덮여있는 얼음덩어리에 작용해서 원심력을 일으키고 이것이 단단한 지각에 전달된다.

이렇게 계속 증가하는 원심력이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지구의 내부구조 위를  덮고 있는 지각을 이동시키고, 그 결과 극지대는

적도지방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주장이다.



북극과 남극이었던 지각이 갑자기 온난한 위도로 이동해 얼음이 급속도로 녹는다.  

그 반대로 따스한 땅이었던 땅은 극지대로 이동해 갑자기 덮쳐드는 만년설에 묻혀 사라졌다.

북유럽과 북 아메리카의 대부분이 얼음에 덮혀있었던 것은 서서히 찾아온 빙하시대가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빙하시대가 끝난 것은, 그 땅이 북극에 있다가 아래쪽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도 빙하시대는 진행중이다.

북극권과 남극대륙에서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초고대문명의 유적은 남극의 3킬로미터가 넘는 얼음 밑에 잠자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거대한 산맥과 큰 강이 있었다. 적어도 3000킬로미터의 영역을 가진 광대한 육지가 있었다.

문명이 발달하는데 필요한 1만년간의 쾌적한 기후가 있었다. 

미국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이 대륙이 만약 지금보다 3200킬로미터 북쪽, 위도로 30도 윗쪽에 있었다면 지중해성, 아열대 기후였을

것이다. 정말일까?

51. 해머와 진자

지각이동설은 대륙이동설과 다르며 찰스 햅굿이 제창해 아인슈타인의 지지를 받았다.

간단히 설명해, 지구의 58킬로미터 두께의 지각이 1만2900킬로미터 정도의 두께를 가진 중심핵 위를 미끄러져 서반구의 대부분이

적도를 향해 남쪽으로, 남극권을 향해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자오선을 따라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미국 중앙평원을 축으로 선회했다고 보고있다.

그 결과 북미의 북동부(허드슨만)는 북극권에서 남쪽으로 밀려와 온난한 위치로 이동했는데 북서부(알래스카)는 북시베리아의

대부분과 함께 북으로 선회하면서 북극권으로 들어갔다.

 남반구에서는 현재 남극대륙이라고 부르는 육지가 대부분 온대, 아열대에 있다가 전체가 남극권으로 들어가버렸다.

이 변동은 기원전 1만4500년부터 기원전 1만2500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일어났으며 행성규모의 거대한 여파와 함께 기원전

9500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대해일, 허리케인, 폭풍, 뇌우, 화산, 지진, 단층, 검은 하늘, 만년설. 이 끔찍한 말들이 1천년만 휩쓴다면 도시, 건축물, 문서, 기계,

생명체 등 모든 것은 완전히 파괴되어 저 두꺼운 얼음 아래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만약 지각이동설이 옳다면, 세계 각지에 남아있는 것은 얼마되지 않는 신의지문 뿐이라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문명의 본체는 3킬로미터 이상의 두께를 가진 얼음 속에 묻혀있다. 3킬로미터, 엄청나게 높은 산의 높이다.

고고학? 아무런 소용이 없다.

대륙이동과 지각이동은 크게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극대륙과 관계있는 사실은 급격한 대변동을 도입하지 않으면 설명하기가 힘들다.

가장 따스한 곳이 영하 60도정도인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식물은 이끼류가 고작이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① 2억6천만년 정도 전의 시대에 낙엽수가 무성했다 - 사이언스 매거진

 ② 신생대 이전에 남극대륙에는 빙하가 없었다 - 지질학자

 ③ 남극점에서 322킬로미터인 위버 산에서 아열대기후였던 땅을 발견했다 - 버드제독

 ④ 신생대 초기의 열대식물의 흔적을 남극 그래이엄 랜드에서 발견했다 - 소련과학자

 ⑤ 남극점 400킬로미터 해발 1830미터에서 낙엽수화석을 발견했다 - 지질학자

 ⑥ 남극의 일부는 10만년전에도 얼음으로 덮여있지 않았다 - 지질학자

 ⑦ 고운입자를 하류로 옮기는 큰 강이 기원전 4000년에 있었다 - 남극탐험대

 ⑧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의 세계지도는 얼음없는 로스해를 그리고 있다

 ⑨ 부아슈의 지도도 남극대륙의 얼음 아래 지형을 정확히 그리고 있다

 ⑩ 반대점인 북극해 섬들이 과거에는 매우 온난한 기후였다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지각이동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걱정은 남극 만년설의 크기와 무게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총중량 1경9000조톤의 이 얼음은 해마다 471세제곱킬로미터씩 증가하고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 호수와 동일한 용적의 얼음이 해마다 덧씌워진다.

남극대륙에 덧씌워지는 이 얼음의 무게는 세차운동과 황도경사, 공전궤도의 이심률, 자전 원심률, 태양과 달과 다른 행성들의

인력이 동시에 영향을 미칠 경우 지각의 대규모 이동을 일으키는 최후의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

빙글빙글 도는 팽이의 한쪽 끝에 붙어있는 얼음이 자꾸자꾸 커진다.

똑바르지도 않고 기울어져 돌고있는 지구라는 팽이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천천히 진행하는 시계의 진자, 대륙이동. 모았던 힘을 일거에 쏟아내는 종소리, 지각이동. 지각이동의 흔적이 화성에도 남아있는

것을 보면 결코 지구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현재의 두 극지대에는 마지막 빙하시대에 만년설이 없었다. 그런데 빙하의 흔적을 가진 땅은 세계 각처에 있다.

특히 적도 근처의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에 만년설의 흔적을 찾았다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지각이동 말고 또 있을까?

 빙하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대륙이 남극과 북극에 위치했을 때가 바로 그 대륙의 빙하시대였다.

그러므로 지금도 빙하시대다. 남극과 북극은 말이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다.

 인도의 마하바라타는 신들의 땅인 메루 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메루에서는 태양과 달이 매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고 별도 마찬가지다. 메루산은 빛이 나며 어두운 암흑을 압도하기 때문에 밤과

낮은 거의 구분할 수 없다.

낮과 밤을 합하면 여기서 사는 사람의 1년과 비슷한 길이다.”수르타 시단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신들은 태양이 한 번 뜨면 반년간 그것을 본다.”

 지구의 자기극성도 과거 8천만년동안 170번 이상 반전했다.

현재도 정북과 자북극은 같지 않다. 자장은 지구의 자전과 연관이 있다. 지구의 자전도 변해왔다.  

지구는 지리상의 극의 위치를 바꾸면서 회전해온 것이다.

마지막 자장의 반전은 기원전 1만1천년에서 기원전 1만년 사이에 있었다.

과학자들의 예측으로는 2030년 경에 자장의 반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⑪ 현대의 지진계는 매우 미세한 것까지 감지한다.

그런데 아무 원인에도 해당되지 않는 소리가 지구 속에서 불꽃 터지는 파도소리처럼 계속 일어나고 있다 - 파리대 이브로카로 교수

 ⑫ 북극은 1900년부터 1960년까지 서경 45도 자오선을 따라 해마다 6센티미터씩 그린랜드 방향으로 3미터 정도 이동했는데,

60년에서 68년사이에 해마다 10센티미터씩 3미터를 이동했다. 이 움직임은 더 빨라지고 있다

 ⑬ 지리상의 남극의 위치를 나타내는 구리로 만든 표식은 해마다 빙원이 이동하기 때문에 수정해야한다. 빙원만 움직이는 것일까?

 ⑭ 95년 고베지진 당시 어떤 사람의 체험담이다.

“ 아무 경고도 없이 그곳은 구토를 느낄 것 같은 롤러코스터로 변했고” “가장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소리...” 진도7.2의 이 진동은 20초동안이었지만 5000명 이상이 죽었다.

52. 밤의 도둑처럼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건물과 생각, 지적인 재산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류는 인간의 손으로 많은 부분을 편집한 “역사”만을 생각하고 있다.

이 역사에 따르면 인류의 문명은 기껏해야 5000년일 뿐이며 그 이전의 생각과 기록은 허무맹랑한 망상이자 상상일 뿐이며, 그런

것을 “신화”라고 부른다.

만약 무서운 대재해가 덮쳐 우리 문명을 말살했다고 치자.

모든 기록이 사라지고 모든 문명이 사라진 상태에서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의 원폭, 그 경험과 기억을 후대에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브라흐마스트라의 명령을 받은 미사일의 불꽃은 서로 뒤섞였고 불화살에 에워싸였으며 지구와 하늘과 그 사이의 공간을 뒤덮었다.

불꽃은 강해졌고 세계종말의 태양처럼 되었다.”
하늘을 나는 차, 하늘을 나는 거대한 기계, 하늘의 도시, 하늘의 전차. 이런 전승은 결코 불가능한, 신화이고 상상이고 망상일 뿐인

 것일까?

 하늘을 나는 이 이미지는 인도문헌 뿐만이 아니라 이집트으 피라미드 텍스트에도 가득하다.

신화와 전승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대답을 찾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영화나 찍고 말것인가?

 예를 들어보자.

 정확한 증거에 기초해서, 우리 문명이 곧 멸망할 것을 예측했다고 치자. 지각이동일지도 모르고, 작은 혜성과의 정면충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전에 충분한 경고가 있다면, 엄청난 공포와 절망 속에서도 인류의 일부는 생존을 위한 방향을 모색할 것이고, 고도로 발달한

 과학적 지식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을 미래세대에 남기려 할 것이다.

 정말 그랬다. 유대인 역사가 유세푸스는 대홍수 이전에 아무런 재난도 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고대인들을 말한다.
“세상은 불로 한 번 망했는데, 물로 파괴된다는 아담의 예언을 들은 그들은 두 개의 기둥을 지었다.

하나는 벽돌로, 하나는 바위로 만들어 자신들의 발견을 두 기둥에 새겼다. 다음 세대에 알리기 위하여...”

옥스포드 대학의 존 그리브스가 17세기에 이집트를 방문하여 수집한 피라미드 전승도 바로 그렇다.

별이 떨어지고 세상이 뒤집히는 꿈을 꾼 왕은 잠에서 깨어나 대홍수의 예언을 신관에게 듣는다.

왕은 현자가 알린 모든 지식과 과학을 피라미드에 새겼고 문자와 언어를 아는 사람이 해독할 것이다.

 최초의 인간들이 지구의 둥근 표면을 측정하고 하늘에 아치를 그리고 있는 네점을 조사했다는 포폴 부의 전승은 무엇인가?

인간들의 급속한 발전을 신들이 질투했다는 이 전승은 무엇인가?  미래세대를 위해 기록을 보존하려한 초고대인들의 전승지식을

태양의 도시에 묻고 그것을 지키는 이 전승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다시 처음의 예로 돌아가자.

우리 인류가 멸망하고 우리 문명이 철저하게 파괴된다. 우리는 최고의 지성과 기술을 이용해 이 지식을 남기고 싶다.

이 작은 가능성을 실현시켜 1만년, 또는 1만2천년 뒤에 있을 우리와 비슷한 문명에게 서기 2000년을 알리려면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할까?

 우리는 지혜를 짜내서 황도주기의 어떤 물고기자리에 언제 살았는지를 남겨놓지 않을까?

세차운동의 1주기 전인지 2주기 전인지 머리를 써야하지 않을까? 아니, 이런 여유조차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지식을 전달할 사람을 뽑아 조직화시키고 그들을 이용하지 않을까?

그들은 이러한 사명을 띤 준 종교집단의 모습으로 동일한 상징과 형상을 사용하지 않을까?

긴 턱수염이나 깎은 머리, 십자나 뱀의 이미지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렇게 문명을 전파하지만 대다수가 실패하고 한정된 성공만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대재해의 여파가 밀어닥쳐 이렇게 힘들게 구축한 발판마저 소멸한다면, 아마 이들은 이 집단의 핵심적인 것만 보존하여

계승하려 할 것이다.

마치 구세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처럼 그 문명의 정체가 드러나 자신들이 전하고자 했던 것이 밝혀지기까지 몇 천년, 몇 만년을

기다려야할지도 모른다.

 마야인들이 말한다. 그날은 2012년 12월23일이다. 에드가 케이시는 말한다.  

2000년경에 극이 이동하고 남극과 북극에서는 대변동이, 열대에는 화산이 분화한다,  

유럽은 순식간에 변화하며 지구는 미국서부에서 분열하고 일본은 가라앉는다.

 2000년이라는 시기는 오리온자리의 세 별이 상승하는 긴 주기의 마지막 때와 일치한다.  

다섯 행성의 연합은 인력의 영향을 강하게 불러일으킬 것이다.

 2000년 5월에 해왕성, 천왕성, 금성, 수성, 화성이 태양의 반대쪽에 지구와 일렬로 서서 잡아당길 것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그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휩쓸려갔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으며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흔들릴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