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중원이 정말로 문명의 발상지일까?

설레임의 하루 2011. 11. 2. 06:15

 *출처:다음 블로그-하나가라 우리나라  글쓴이-대수맥   2009.02.01  http://blog.daum.net/nero1003/62

  

 

 

중원(中原)은 우리 문명이 전파된 변두리로 고고학 시기로 보면 문명의 발상지가 아니다 .

□  유소씨(有巢氏)와 수인씨(燧因氏) 부족의 묘저구(廟底溝)문화


최근까지 고고학적 발굴로 [앙소문화]의 중심이라는 [묘저구문화]가 위치한 곳.

즉 고대로부터 지나인들이 문명의 발상지이며 중심이라 여겨온 중원(中原)은 실상은 문명이 발생한 곳이 아니라 고대문명이

최후로 전파된 문명의 마지막 오지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신석기 후기와 동석병용기의 고대 시원문명들은 모두 북방의 초원지대에 접한 몽골 동부지역의 산악지역과 대륙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처음 등장하였고 점차 현재의 대륙안쪽으로 문화가 전파되어 들어갔다는 것이 좀 더 확실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B.C 7,000년경으로 소급되는 [선홍산문명]인 '소하서문화'로부터 '흥륭와문화'와 '사해문화'와 '부하문화'와 '조보구문화'를

거쳐 '홍산문화'로 이어지는 [고대시원문명]보다 시기는 약간 늦지만 역시 [시원문화]라 할 만큼 연대가 올라가는 산동(山東)

지역의 후리문화(后李文化)-북신문화(北辛文化)-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 장강하류의 여러 문화들이 지금까지의 잘못된

역사인식과는 반대로 B.C 4,000년경에나등장하는 내륙의 중원(中原)이라는 지역에 있었던 묘저구(廟底溝)문화로 그보다 앞선

선진문화를 전파하였다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더구나, 묘저구(廟底溝)문화와 그들이 융적(戎狄)이라 하던 이들의 <마가요문화>와 반파(半坡)문화를 [앙소문화]라는

개념으로 함께 묶어버려 자신들의 문명등장의 연대를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자 무임승차했던 것과 달리 하남(河南)과

산서(山西)의 경계인접지역들인 '중원(中原)'이라는 지역의 최대로 올라갈 수 있는 연대의 상한선이 바로 <묘저구문화>의

등장시기인 BC 4000년경인 것이다. 


물론, 묘저구(廟底溝)문화의 주인공들도 아직 탄생하지도 않은 화하족(華夏族)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나인들이 무리하여 임의로

묶어버린 [앙소문화]라는 개념보다 원래대로 각기 나누어 구분하는 것이 각 문화의 성격과 주체 그리고 각 문화들의 후예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홍산문화]는 배달국이 세워지기 전인 B.C 4,500년경부터 그 문화가 번성하였으며 사서(史書)로는 BC 3900년경으로

언급하는 북방의 환웅(桓雄)의 세력이 유입된 이후에 급속히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서 B.C 3,500년경에 해당하는

홍산문화 후기(B.C 3,500~B.C 3,000)의 <우하량 유적지>에서 보여주듯이 원방각의 거대한 제단과 여신묘와 적석총 등을

골고루 갖추어 늦어도 이 시기에는 학자들이 초기 국가단계라고도 언급되는 시기로 진입하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최근의 계속적인 발굴로 2006년 6월에는 <적봉시 오한기 사가자 초모산 유적지>에서는 BC 5500년경의 적석총군

발견되어 어디까지 연대가 올라갈지 모를 정도이니 <태백일사>등의 사서(史書)에서 말하는 환웅(桓雄)이B.C 3,896년에 신시

(=배달국=구리)를 세웠다는 기록에 대해서 강단에서도 이제 긍정의 시각으로 다시 해석해볼 여지가 충분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중원]이라는 지역의 최초의 문화인 <묘저구문화>는 B.C 4,000 ~ B.C 3,000년간 지속된 문화로 그

문화의 출발을 이룬 세력은 삼성기나 태백일사의 기록에 따르면 桓雄이 동으로 이동할 때 무리에서 나뉘어져 같은 시기 서쪽의

감숙*청해 일대에 정착한 반고(반고가한)이라 한다.

 

이를 따른 제(諸) 부족들의 후예로 바로 그 부족들 중의 일부인 <유소씨有巢氏>와 수인씨(燧因氏-有燧氏) 부족이 동쪽으로

진출하여 마지막 오지(奧地)인 중원지역에서 나타난 첫 문화인 <묘저구문화>의 주인이 된 것이라 하였다.


고고학 발굴에 따른 연대로 보면 <반고-반고가한>의 제 부족들이 이룬 세 문화의 시기 중 [묘저구문화]만 유독 늦다.  

반파(半坡)문화와 <마가요문화>는 그 시기가 B.C 4,800 ~ B.C 4,200년인데 반하여  [묘저구(廟底溝)문화]는 B.C 4,000 ~

B.C 3,000년이니 고고학적으로도 상당히 뒤늦게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감숙-청해 일대와 섬서 일대에서 번성하였고 마지막으로 하남-산서접경지역에 진출한 <반고>가 이끈 세력은

후대에는 서융(西戎)*강융(羌戎)이라 칭해졌지만 원래는 桓雄의 부족이 동진하여 이동할 때 무리에서 나뉘어 중도에서 따로

정착한 집단이라 보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한다.  

같은 배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으로 환웅이 세운 [배달국]과 연결되면서 다시 환국(桓國)의 일원이 되었다고 보이며 연맹하거나 혹은

자립하여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였다고 생각된다.



□  복희씨(伏羲氏)의 진(陳) 진출과 [용산문화]로의 편입


중국의 시조인 3皇 5帝의 첫째로 꼽히는 태호복희(太昊伏羲)는 배달국 5代 [태우의환]웅의 막내아들이라고 한다.  

황제(黃帝) 헌원과 염제(炎帝) 신농도 그 근본을 따지면 동이(東夷)의 후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지나족]들은 동이에서 갈라져 나간 일개 가지에 불과하다.


B.C 4,000년 경에 동진(東進)해 온 <유소씨>와 <수인씨> 부족이 일으킨 '묘저구(廟底溝)문화'의 지역 안인 진(陳)은

<태백일사>에서 인용한 <삼한비기>기록에 따르면 점차로 <수인씨>가 이를 다스리게 되었다.


배달국(=구리)의 세력이 내륙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B.C 3,500년경에 새로운 세력인 <복희伏羲>가 [청구]와 [낙랑]을

거쳐 이 일대에 봉토를 받고 들어와 관직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하여 무기를 쓰지 않고 감화시켜 <수인씨>의 수장(首長)을

대신하여 진(陳)과 그 인근까지 세(勢)를 넓히어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묘저구(廟底溝)문화]는 그 땅인 진(陳)일대가 처음에는 <수인씨>였으나 <복희>로 바뀌었으니 [마가요문화]나

혹은 [반파半坡문화]와는 묶어서 볼 수 없고 별도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이다.


<삼한비기>에서는 <복희>의 기록에 뒤이어 말하길 B.C 3,070년경 "뒤에 갈고 桓雄이 있었는데 신농(神農)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확정하여 [공상]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고 하였다.


[神農의 나라]라는 것은 바로 섬서(陝西)일대의 '반파(半坡)문화'의 이어지는 후속문화로 이 기록은 <복희>가 직(職)을

충실히 수행해 '묘저구(廟底溝)문화' 일대를 교화하자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배달국에 하남북변지역인'묘저구(廟底溝)문명'

일대가 귀속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농의 나라]인 '반파(半坡)문화' 지역과  배달국에 완전히 편입된 하남 북변일대의 '묘저구(廟底溝)문화'

일대가 [공상]을 경계로 삼아 배달국과 확실히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음을 알게 된다.


사서(史書)에서 말하는 신농(神農)이 등장하는 B.C 3,070년은 고고학적으로 대문구(大汶口) 문화[B.C4,300~B.C 2,600]

의 후기에 함께 공존하며 등장한 용산문화(龍山文化)[B.C 3,000~B.C 2,000]가 출발한 시기이다.

 

그 영역은  용산(龍山) 흑도(黑陶)가 분포하는 하남성[河南省]북부-안휘성[安徽省]-동북부의 산동[山東]지역까지

분포되어 이전의 '묘저구(廟底溝)문화'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어 B.C 3,000년 이후에는 묘저구문화지역이 용산문화(龍山文化)

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보아 <복희>가 교화하여 진(陳)의 안팎과 [묘저구문화지역]을 B.C 3,070년 이후에는 완전히 배달국의 영토로 귀속시켜 [공상]

을 국경으로 하였다는 <태백일사>의 기록과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추가로, 용산문화(龍山文化) 유적이 발굴된 산동성내 위치는 제남시(濟南市) 용산진(龍山鎮) 성자애(城子崖) 유적지

태산의 남쪽 태안산맥의 남쪽인 태안이 중심인 [대문구문화]와 달리 태안산맥 북쪽 평원지대라는 점도 두 문화가 공존한 시기를

감안할 때 참조할 만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용산문화(龍山文化)는 전기(B.C 3,000~B.C 2,600)와 후기(B.C 2,600~2,000)로 구분되면서 섬서성 지역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크게 아래와 같이 하남*섬서*산동으로 구분한다. 


[참고]


“龍山文化は、중원中原 龍山文化(하남河南 龍山文化と섬서陝西 龍山文化)および 산동山東 龍山文化に分かれている。

 (위키피디아, 일본어)”


시기적으로 중간쯤인 B.C 2,600년 무렵에 섬서(陝西)지역까지 용산문화(龍山文化)가 확장되었음을 아래 책에서 알 수 있다. 

이는 B.C 2,706년에 즉위한 치우천왕이 섬서(陝西)일대의 '반파(半坡)문명'의 후신(後身)인 염제(炎帝)신농 나라의 ‘유망’ 정권이

쇠약해지자 그 땅(섬서(陝西) 용산문화지역)을 정복하고 서쪽의 <헌원>과 [마가요문명]의 후신(後身)을굴복시켰다는 <태백일사>의

<신시본기>기록과도 고고학적 년대 측정의 편차를 감안하고 새로운 문화의 정착시간을 고려할 때 시기가 거의 일치하여 일맥상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 


“For example middle reaches of the Jing River and Wei River(渭河) evince settlement known as the

Shaanxi Longshan(陝西龍山).”


(Kwang-chih Chang, "The Formation of Chinese Civilization: An Archaeological Perspective",

2005, Yale University Press, 384 pages ISBN 0300093829: 위키피디아 영어)



□  치우(蚩尤)천왕의 패권전쟁과 배달국 편입


이와 같이 [공상]을 경계로 한 무렵인 BC 3,000년경부터는 남쪽의 산동(山東)일대로 배달국의 백성들이 많이 내려와

정착하여 [용산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배달국의 중심을 완전히 <청구>로 옮긴 용산문화의 본격적인 주인공 [치우천왕]의 치세까지도 지나가 말하는 '화하족華夏族'은

등장은 커녕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BC 2,700년경 이후에 등장하여 동이(東夷)의 치우천왕과 대립한 [헌원]세력도 옛 대 이동시에 환웅(桓雄)에게서 갈라져 나온

<반고>세력의 후예가 세운 [마가요문화]의 후속 문화 중 한 세력으로 굳이 구분하자면 후대에 서융(西戎)이나 융적(戎狄)

으로 칭해지는 세력으로 흡수되었다고 분류하여야 하며 후대의 '華夏族'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된다.


[치우천왕]과 [유망세력]이 지니고 있던 땅인 섬서(陝西)지역을 둘러싼 패권전쟁에서 [마가요문화]를 기반으로 한 [헌원]측이

패전하면서 陝西지역은 [반고]세력의 후예가 아닌 배달국으로 편입됨에 따라 용산문화가 전파* 귀속되어 B.C 2,600년경이후

로는 [섬서용산문화] 지역으로 불리게 된다.


결론적으로 [화하족華夏族]은 용산문화 만기(B.C 2,600 ~ 2,000)의 후반에 이르러서 등장한다.  

[단군조선]의 치세에 옛 묘저구(廟底溝)문화 지역에서 인근의 수장(首長)이던 <요堯>가 등장하여 ‘오교’를 제창하여 단군의

‘신교’와 대립하면서 동이(東夷)의 백성 중 ‘오교’를 따르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요>를 임금으로 받들어 분립하면서 종교적 정체성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갈라져 나오게 된 동이(東夷)의 방계

(傍系)로 옛 묘저구(廟底溝)문화의 후예(後裔)들이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첨부화일이 있습니다]

중원과 동북아문명 발상지.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