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천산역사연구원 天山歷史硏究院 (Cheonsan History R. I.)) -
한(桓)문화재단 (Han Culture Foundation) 부설
[첨수도와 명도전을 아직도 연나라 화폐라 하며 그냥 둘 것인가?]
첨수도와 연명도와 관련한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실려있는 자료를 풀어보면, 첨수도와 연명도가 단군조선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바, 그 내용중에서 중요부분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연나라 영역내에서 첨수도(포괄적으로 "침수도")가 출현되었다. 연나라에서 출현되는 도폐의 형식은 응당 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연 소왕은 인재를 모았으며 재위 시기에 강토를 개척하였고, 상곡, 어양, 요서, 요동의 여러 군을 세웠다. 연나라가 주조한 것에는 침수도, 첨수도, 명도 등등이 있다. 첨수도(칼의 머리가 뽀족하여 가시 모양임)의 몸체는 침수도와 비슷하며, 단지 칼의 끝부분이 뽀족하고 길고 손잡이에는 직선이 있는데, 앞면에는 두개, 뒷면에는 한개가 있고, 구리의 품질은 정교하지 못하게 제작되어 매우 조잡하며, 문자도 간단하거나 없고, 주로 장성의 안팎에서 유통된 까닭으로 "흉노도"라고도 부른다.
"흉노도"는 일제시기에 승덕, 장자구 일대에서 일찌기 출토되었는데, 일본인이 얻은 바 되어 현재 일본에 많이 보관되고 있다. "첨수도"는 최종적으로 개편변형된 형태로, 칼이 뽀족하게 줄어들고 경사진 모양이며, 앞면에 주조된 글자에 “ㅇD”라는 한개의 문자가 있는데, 이로 인하여 "첨수도"가 연나라 정부에서 주조한 "법화"가 아니며, 연나라 영역 내의 여러 지방 민족이 상업적 수요로 주조한 화폐가 됨을 알 수 있다. 말기에 "첨수도"상에 나타나는 "명(明)"자는 명도전의 선도가 된다. 변화가 매우 크고, 학자들의 해석이 제각각이며, 명(明)、이(易)、연(燕)、소(召) 등이 있어 "이도", "연도", 명도"라 부른다. "명도"의 뒷면에는 보통 주조된 문자 혹은 부호가 있고, 현재 이미 수백종 이상이 되며, 일반적으로 모두 주조한 지역이나 주조된 화로의 표식이다. 그 중에는 뒷면에 "제(齊)"자가 있는 것은 통상적으로 제나라에서 주조된 것으로 인식되고, "제명도"라고 불리며, 기타 종류는 "연명도"로 많이 불린다. "명도"는 연나라 건국보다 이른 시기일 수 있으며, 연나라 사람들이 주조한 화폐는 응당 공수포 또는 패이며, "명도"의 주조를 시작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나라 사람들이 관중 시대에 사용한 포, 패가 연나라 땅에 이르게 된 후, 연 소왕이 나라를 복구시킨 뒤에 다시 명도를 주조하였던 것이다.....일찌기 하북의 이현(易懸)의 연나라 하도(下都) 유적지와 하간, 보정, 요령성 능원 등지에서 출토된 것이 연나라 명도의 초기형식인 것이다.
*이상 첨수도와 연명도 원문 출처 http://big5.sc001.com.cn/news.sc001.com.cn/dictionary/04/04/20070519/084839.shtml
명도에 이르러 곧바로 인식되는 것은 첨수도의 뒤를 이어 나온 것이며, 또는 근본적으로 첨수도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국제교류의 인연으로 나중에 독특하게 되어 연나라의 주요화폐가 되었다. 연나라의 건국초기에, 주조되어 사용된 화폐는 관중이 사용하게 한 포, 패폐와 같은 모양이다. 당시에 형성된 주나라 이주민들은 포, 패폐와 연 토착민들이 사용하던 도화를 사용하였다. 전국시기에 들어가서는 연왕 희쾌가 요순임금을 모방하여 대신 희지에게 선양하려 하였는데, 이에 연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서기전311년) 소왕이 나라를 찾은 후 제나라의 방식을 모방하였다. 화폐제작에 있어 정부가 화폐를 주조함이 이익이 있다는 의도하에 관에서 주조한 명도를 내놓고 포폐와 병행하여 통용케 했다........ 다행히 민심이 연나라를 잊지 않고 각읍이 제나라에 항복하는 것이 분분하여 제나라를 배반하고 연나라로 돌아가서 태자 희평을 군주로 받드니 이가 소왕이다. 3. 첨수도의 국적 문제 "흉노도"는 일제시기에 승덕, 장자구 일대에서 일찌기 출토되었는데...... "첨수도"가 연나라 정부에서 주조한 "법화"가 아니며......연나라 영역 내의 여러 지방 민족이 상업적 수요로 주조한 화폐..... 말기에 "첨수도"상에 나타나는 "명(明)"자는 명도전의 선도가 된다."라고 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침수도를 흉노도라고 명명함으로써 단군조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화폐라고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흉노는 주로 만리장성의 안팎에서 할동하던 족속으로 대략적으로 서기전7세기경부터 태원 서북의 오르도스 지역에서 영정하 중상류 지역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도 나타나며, 승덕이나 장자구 일대는 흉노는 물론 산융과도 관련있는 지역이 된다.
첨수도가 연나라의 공식화폐가 아닌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연나라의 화폐가 아님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 된다.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민족의 일례로는 위 연명도에 관한 글에 나오는 산융부족을 들 수 있다.
산융부족이 주조한 것에서 연유한다. 명도에 이르러 곧바로 인식되는 것은 첨수도의 뒤를 이어 나온 것이며, 또는 근본적으로 첨수도의 일종이다. 평정한 공이 컸던 소공 희석을 연에 봉한 때가 되므로, 주나라 초기라는 것이 되며, 이 시기보다 더 이른 시기라 하여, 첨수도에 대한 글에서 침수도와 첨수도의 제작이 연나라 건국시에 북방의 산융부족이 주조한 것이라는 내용과 상통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연명도는 첨수도의 뒤를 어어 나온 것이며 첨수도의 일종이라고 밝히고 있어, 첨수도와 연명도는 같은 주체가 주조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것이라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영지국과 고죽국을 정벌하였다 하고, 또 서기전 651년에 산융(山戎), 이지(離支), 고죽(孤竹)을 정벌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번한세가에서 적고 있는 요중12성의 하나였던 영지(永支)를 다른 글자로 적은 것이 틀림없게 되는데, 영지성을 일명 영지국으로 적은 것이 된다. 포기하였으며, 사막지대가 있었던 지금의 내몽골 지역이나 그 남쪽 지역으로 추정되는 나라가 된다. 이 지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구려국(句麗國)이 위치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포함하는 현도군의 위치는 성덕과 장자구 일대와 근접하거나 이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된다. 고죽성이 위치한 것이 되고, 대요수의 서남쪽에 흐르는 유수라는 강의 상류에 고죽과 관련된 영지가 위치한 것으로 되는데, 이 영지와 고죽과 소위 고죽성의 북쪽 지역이 산융지역으로 되는 것이다. 수경에서 적은 대요수는 그 위치상 지금의 영정하가 되고 소요수는 지금의 청수하가 된다. 지역이 되어, 소위 한사군 중 현도군과 관련되는데, 현도군 중에 고구려현이 있는 것이 되고, 고구려는 구려, 하구려라는 용어와도 관련되며, 이러한 단어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구려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이 된다. 나라가 되며, 그 위치상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구려국이라고 추정되는 바, 첨수도와 연명도라는 도폐는 실상 연나라의 화폐가 아니라, 결국 단군조선에서 주조된 화폐임을 드러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소위 연명도라 불리는 도폐는 일단 연나라라는 국명을 빼고 그냥 명도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게 된다.
방공전 등의 화폐주조에 관한 역사가 기록되고 있는데, 특히 대진국(발해) 초기에 대야발이 지었다는 단기고사에 의하면, 서기전 1620년에 자모전(子母錢)을 주조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화폐의 모양으로 보아 또한 첨수도와 명도가 주조된 시기가 주나라 초기 이전일 수 있다는 것으로도 보아, 이 자모전이 곧 첨수도와 명도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刀幣進入了春秋戰國之際,擴大了?的范圍。首先在燕國境內出現了“尖首刀” (包括“針首刀”)。燕出現刀幣形式應是受齊國的影響。燕昭王頗能接納人才, 在位時開拓疆土,建立了上谷、漁陽、遼西、遼東諸郡。燕國鑄有“針首刀”、 “尖首刀”和“明刀”等等。針首刀(刀首呈尖刺狀)刀身與尖首刀相似,但刀首尖端更長, 刀柄有直紋,正面兩條、背面一條,銅質不精,制作也?粗?,文字也簡單或無文, 主要流通于長城內外,故又稱“匈奴刀”。“匈奴刀”在日?時期曾出土于承德、張家口一帶, 被日本人所得,現在多藏于日本。 “尖首刀”(刀首呈銳角)刀身通長15-18厘米, 寬約1.8-2.6厘米,重約15-16克。其形制與齊刀相似,弧背凹刃,刀身極薄,刀背極厚, 但都因刀刃上端顯得尖首而得名,刀柄面背有二直紋,一端有刀環。先是兩面都無字, 后來多數僅單面有字,以單字?多。“尖首刀”過去知道多出于河間、保定及聊城等地, 建國以來,1974年遼寧省凌源縣小城子公社修技大隊出土了完整的“尖首刀”943枚, 幣銘文有一、六、日、七、八、九、已、亥、行、玉、丘、工、示、矢、 年等等;1975年山東臨淄原齊國之故城西東石橋村出土一批“尖首刀”,現存完整的80枚 ;1978年河北燕下都軍營出土一批“尖首刀”計1845枚,最寬1.8-2.2厘米, 銘文有:大、吉、陽、日、行、丙、上、古、矢等130余枚;1979年戰國中山靈壽城遺址 勘?,在早于城址的春秋至戰國早期遺址的文化層內出土的“尖首刀”,刀身外緣隆起, 斷于柄處,柄有兩道脊線,個別?一道脊線,不伸入刀面柄首?圓環形,其銘文有一、 三、五、八、工、壬、化以、以化、一化、上化、非、云等,其背平素, 刀長約16.2-17.4厘米,刀首寬2.2-2.8厘米,重11-15克。“尖首刀”最終改變了形制, 刀尖縮成斜坡狀,面文鑄有一個“0D”字,由此可知“尖首刀”不是燕國政府鑄行的“法化”, 而是燕國境內一些地方民族?商業需要而鑄行的貨幣。?期“尖首刀”上出現明字, 是明刀的先導 . 燕明刀 燕國的主要刀幣是“明刀”,由于在這種幣面上鑄有一個“0D”字符號,此字的形態變化?大, 對于?的解釋,諸家各異,有明、易、燕、召等,故而又稱“易刀”、“燕刀”、“明刀”。 “明刀”背面常鑄有文字或符號,現已有幾百種以上,一般都是鑄地或鑄造爐次的標識。 其中背文?“齊”者通常被認?是齊國鑄造,而稱之?“齊明刀”,其?種類的則多稱?“燕明刀 “明刀”可能早于燕之建國,而燕人鑄幣應該鑄空首布或貝,也不會剛開始就鑄“明刀”。 因?燕人在關中時使用布、貝,到燕地后,燕昭王復國后才鑄行“明刀”。其刀首較窄, 刀尖較鈍,刀背弧度小,中斷,因文字以一個“明”字而著稱,長約14-17厘米, 寬約1.3-2.2厘米,重15-18克。曾在河北易縣燕下都遺址及河間、保定、 遼寧省凌源等地出土,是燕明刀的早期形式 *이상 원문 출처: http://big5.sc001.com.cn/news.sc001.com.cn/dictionary/04/04/20070519/084839.shtml 燕明刀 自武王伐紂,建立了周王朝之後,便開始大封姬姓宗室及功勳官員.姬昌之子姬奭(召公奭) 受封於?(北平),燕國就是在這種封邑情形下建立的.而針首刀與尖首刀之作, 應該早於燕之建國,由北方山戎部族所鑄.至於明刀一直被認?是繼尖首刀之後而出的, 或者根本就是尖首刀的一種.因緣際會之下,後來一枝獨秀,成?燕國的主要貨幣.燕之建國初期, 所鑄用的貨幣,應該是與關中行用的布,貝幣一樣的.在當時形成周移民用布, 貝幣,而燕土著流行刀貨.直到戰國時期,燕王姬?欲倣效堯舜禪位于大臣姬之, 因而引發燕國內亂.齊?王田?疆?機,派遣大將匡章出兵襲燕.於是燕地三千餘里, 大半?齊所竊?.幸得民心思燕,各邑降齊者,紛紛叛齊而歸燕,奉太子姬平?君,是?昭王. (公元前三一一年)昭王復國後,?精圖治,倣照齊國模式.在作價上,政府鑄幣有利可圖之下 ,而出官鑄的明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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