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한국고대역사문화

대조영-발해역사

설레임의 하루 2011. 10. 12. 05:24

 *출처:한국고대문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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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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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과남경

서경과장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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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와안변

솔빈과동평

철리와회원

안원과독주 

 

                                발해 역사

 

1. 태조고황제 대조영 천통(698~719)

 

고구려 말에 송화강에 살던 말갈인들이 요서의 전쟁지로 많이 이주해 들어왔다. 
영양왕이 말갈 군대로 당나라 요서군을 쳤고, 안시성 전투에 말갈병이 동원되고 연남생의 국내성에도 말갈병들이 있었다.

668년, 고구려가 망국한 후에 또 말갈인들이 요서로 들어왔다.


이때 숙신 말갈지역의 발해 구국에서 태어난 걸걸중상이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고구려 망국을 당하여 동모산에 대진국을

세웠다.
698년 거란의 이진충이 조양시(영주)에서 난을 일으켜 북경을 점령하니 이 때 대조영은 영주에 들어가서 거란을 도왔다.
그러나 거란이 패퇴하고 대조영과 걸사비우는 영주에 있던 고구려, 말갈인들과 함께 요수를 건너 피한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전사하고

대조영은 고려, 말갈인들을 모아서 추격해오는 당나라 장수를 천문령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여기서 천문령天門嶺은 발해 신주神州 검문현 儉門縣으로 고려된다.

창도현에서 천두진( 泉頭鎭) 졸본성(발해 신주성)으로 올라가는 고갯길이다.
졸본부는 고구려 때부터 천부(天府)라고 하였고 발해 때에도 신주였으므로 그 길목을 천문령이라고 했을 것이다.

 

 

[구당서] 渤海靺鞨大祚榮者,本高麗別種也。高麗既滅,祚榮率家屬徙居營州。
萬歲通天年,契丹李盡忠反叛,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保阻以自固。盡忠既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余黨,先破斬乞四比羽,又度天門嶺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眾以拒楷固;王師大敗,楷固脫身而還。屬契丹及奚盡降突厥,道路阻絕,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眾東保
桂婁之故地,據東牟山築城以居之
祚榮驍勇善用兵,靺鞨之眾及高麗余燼,稍稍歸之。聖歷中,自立為振國王,遣使通於突厥。
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南與新羅相接。越熹 靺鞨 東北至黑水靺鞨,地方二千里,編戶十余萬,勝兵數萬人。

[신당서]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高麗滅,率眾保挹婁之東牟山,地直營州東二千里,南比新羅,以泥河為境,

東窮海,西契丹。築城郭以居,高麗逋殘稍歸之。 萬歲通天中,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捨利乞乞仲象者,

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
武後封乞四比羽為許國公,乞乞仲象為震國公,赦其罪。比羽不受命,後詔玉鈐衛大將軍李楷固、中郎將索仇擊斬之。
是時仲像已死,其子祚榮引殘痍遁去,楷固窮躡,度天門嶺。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楷固敗還。於是契丹附突厥,

王師道絕,不克討。祚榮即並比羽之眾,恃荒遠,乃建國,自號震國王,遣使交突厥,地方五千里,戶十餘萬,勝兵數萬。

頗知書契,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中宗時,使侍御史張行岌招慰,祚榮遣子入侍。睿宗先天中,

遣使拜祚榮為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以所統為忽汗州,領忽汗州都督。自是始去靺鞨號,專稱渤海。

 

당나라는 거란, 돌궐 등이 유주, 영주를 노력하니 더 이상 발해를 어쩌지 못하였고, 천문령 전투후에 대조영은 태백산 동북

계루고지 동모산에서 대진국(발해)를 건국하였다. 대조영은 천통(天統)이라고 개원하였다.


고구려사에서 태백산 동남쪽에 행인국이 있었고 이는 요원시(遼源市) 남부였다.
태백산 동북은 요원시 북쪽이 되고, 이통현의 대고산자 등의 화산지대가 태백산으로 고려된다.
또한 동모산이 계루고지이므로 이는 고구려 중부에 해당하니 졸본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통현의 동첨산향에 있는 동첨산 산성이 바로 동모산 위치에 해당한다. 우리말 "모"가 한자로 첨으로 바뀐 것으로 고려된다.
태백산동북이면서 또 오루하 변이라고 했는데 장춘시를 지나는 송화강을 청나라 때에도 오라하라고 불렀다.

즉 송화강이 오루하이자 훗날의 홀한강이었다.
 


이통현 동모산성의 위용

 


북쪽에서 본 동모산성

 

동모산성으로부터 장춘시로 내려가는 곳에 있는 전가둔 고성.

 

대조영은 동모산에서 건국했지만 천보 때 발해왕도는 현주로서 홀한주라고도 했다.

이는 당나라 현종의 사자 최흔이 713년에 요동반도 대련을 거쳐 발해 수도를 찾아가서 대조영을 만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玄宗遣郎將崔訢冊王為渤海郡王授左驍衞員外大將軍以所統州為忽汗州領忽汗州都督

 

당나라 정원 때인 고탐의 <도리기>에서 현주顯州는 당나라 천보 때의 발해 왕도이며 중경현덕부라고도 했다.

[신당서-도리기]에 의하면 발해 상경으로부터 서남방으로 600리고

발해 서경 압록부로부터는 육로로 400리였다.

神州 又 陸行 四百里 至顯州 天寶中 王所都,

顯州 天寶中 王 所都 又 正北如東 六百里 至 渤海王城

 

현주는 첫 번째 홀한성이다. 그 위치는 청나라 강희제의 기록에 나오는데 장춘시 농안에서 가까운 곳이다. 

강희제 때의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 의하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영강주寧江州에서 파자간산婆刺赶山을 지나

달로고성達魯古城을 지나 요나라 황룡부黃龍府(즉, 장춘시長春市 농안현성農安縣城)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주를 차지했다遂克顯州”고 말했다.
즉 현주가 농안과 가까운 곳이다.


 

명나라 때 전여성田汝成이 지은 [요기遼紀]에서는 개원시 동북방의 평정산平頂山에 있다고 하였다.
정통正統 13년조에
개원開原市 기반산棋盤山에서 평정산平頂山으로 가는 도중에 현주폐성顯州廢城, 요나라 때 중경中京이

있다고 하였다.
開原.... 東北 平頂山中 有 顯州廢城者 遼時中京也..肥饒之地 不下萬頃...

 

뒤에 이어지는 비요지지,불하만경은 요하투 평야를 가리킨다.
청나라 양빈楊賓이 지은 [유변기략柳邊紀略 卷1]에서도 개원의 서북에 요하투가 있고 요하투는 구현주의 남쪽이라고 

하였다.

遼河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 라고 하였다.
[청사고]에서 동요하를 찾아보면 요하투가 기록되어 있다.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기 전의 동요하로 둘러싸인 평원이다.

東遼河,

自吉林伊通州赫爾蘇邊門入,北流,屈西南入遼河.環縣境東、北、西三面,稱遼河套.其右岸為懷德境.舊設舖司二:

東北小城子入懷德;東南四平街入府.

요하투套는 요하遼河의 만곡부彎曲部를 의미한다.

투套가 본래 강이나 산이 만곡하는 지방을 가리키며 하투河套는 황하黃河 만곡부,

즉 음산산맥 아래를 가리킨다. 따라서 요하투套는 지금 동요하가 이수현梨水縣을 통과하는 만곡부다.

이 부위를 개원의 서북이라 한 것이 맞는데, 동시에 구현주舊顯州의 남쪽이라 한 것이다.

 

역시 청나라 때의 [전요비고全遼備考]에도 요하투에 관한 같은 글이 있다.

요하투는 개원 서북에 있고 구 현주성 아래에 있으며 물은 달고 흙은 후덕하고 평야가 바다보다 작지 않다.

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 水甘土厚 平地 不下萬頃...

 

따라서 대조영의 첫 번째 홀한성 현주는 동요하의 유역이고 동요하를 장악하는 평정산에 있고 장춘시 농안현 황룡부성과

가깝다.
농안현과 공주령시 사이에 쌍성보진이 있는데 그 동쪽은 송화강 수계이고 서쪽은 대청산이면서 그 산너머 서남쪽은 요하투 

평원이다.

쌍성보진 서북에 대조양보(大朝陽堡)가 있는데 본래 대조영보(大祚榮堡)가 이닌지 의심된다.

아니더라도 수도를 의미하는 것이 조양朝陽이다.

서남쪽 대청산유지에서는 청동시대 청동검이 발굴되었다. 

대조양보에서 요하투로 넘어오는 도중에 나권구가 있는데 외라성에 해당한다.

발해 현주성의 위치

 

발해 현주성의 구획도

 

북쪽에서 본 발해 현주성

 

2. 광종무황제 대무예 인안(720~738)

 

대무예황제는 개마, 구다, 흑수를 복속시켰다. 당나라가 그를 일찍이 계루군왕이라고 호칭한 것은 그가 발해 황태자로서

서경에서 주로 있었기 때문으로 고려된다.

즉위 첫해에 태자인 대도리행이 당나라로부터 계루군왕으로 책봉되었다. 八月唐冊王嫡男大都利行為桂婁郡王
이무렵 대창발가는 양평현 개국남이라고 작위를 받았는데 지금 대릉하가 확실하게 발해 소유였다. 大昌勃價襄平縣開國男
청나라 흥경(지금의 무순시 신빈현)에 출현했던 무황제 고분 벽돌 하나에 그가 서경(西京)에 묻혔다고 기록되었다.
요양시 석성에 발해 태자가 거처했다는 기록도 내려오는데 이는 후고구려를 멸망시킨 819년 이후로 고려된다.

 
복속했던 흑수말갈과 당나라가 교통하자 흑수부를 쳤다. 훗날에 후고구려도 당나라와 교통하자 없애버렸다.
이때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대무예황제는 산동반도에 장문휴를 보내어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요서의 대산 남쪽에서 당나라군을 격파하였다. 지금의 산해관 앞 구려하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것이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다시 당과 발해는 화친하였다. 

735년 송막 12성을 쌓고 요서 6성을 쌓았다. 구다에 송막 12성을 쌓은 것이다. 구다는 영고탑이 있던 적봉시 지역이다.

5경 60주 1군 38현을 두었으니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玄宗開元七年,祚榮死,其國私謚為高王。子武藝立,斥大土宇,東北諸夷畏臣之,私改年曰仁安。帝賜典冊襲王並所領。

未幾,墨水靺鞨使者入朝,帝以其地建黑水州,置長史臨總。武藝召其下謀曰:「黑水始假道於我與唐通,異時請吐屯於突厥,

皆先告我,今請唐官不吾告,是必與唐腹背攻我也。」乃遣弟門藝及舅任雅相發兵擊黑水。門藝嘗質京師,知利害,謂武藝曰:

「黑水請吏而我擊之,是背唐也。唐,大國,兵萬倍我,與之產怨,我且亡。昔高麗盛時,士三十萬,抗唐為敵,可謂雄強,

唐兵一臨,掃地盡矣。今我眾比高麗三之一,王將違之,不可。」武藝不從。兵至境,又以書固諫。武藝怒,遣從兄壹夏代將,

召門藝,將殺之。門藝懼,儳路自歸,詔拜左驍衛將軍。武藝使使暴門藝罪惡,請誅之。有詔處之安西,好報曰:「門藝窮來歸我,誼不可殺,已投之惡地。」並留使者不遣,別詔鴻臚少卿李道邃、源復諭旨。武藝知之,上書斥言:「陛下不當以妄示天下」,意必殺門藝。帝怒道邃、復漏言國事,皆左除,而陽斥門藝以報。 後十年,武藝遣大將張文休率海賊攻登州,帝馳遣門藝發幽州兵擊之。使太僕卿金思蘭使新羅,督兵攻其南。會大寒,雪袤丈,士凍死過半,無功而還。武藝望其弟不已,募客入東都狙刺於道。門藝格之,得不死。河南捕刺客,悉殺之。 武藝死,其國私謚武王。

 

 

3. 세종문황제 대흠무 대흥,보력(738~794)

 

대흠무황제 연호는 대흥이었다. 대흠무황제의 두 공주 묘비에서 그가 다시 보력으로 개원한 것이 밝혀졌다.

두 공주 묘비로 인해 발해 수도가 그 부근으로 알려졌으나 그렇지 않다.

대흠무황제는 천보말에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숙신고지 구국舊國으로부터 300리라고 하였다. 
고탐의 <도리기>에 의하면 현주로부터 600리 정북동이다. 

한편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의 글을 보면 발해 상경성은 혼동강 유역에 있었다. 혼동강이란 홀한강의 의역(意譯)이다.

혼동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북으로 흘러 “발해 건주” 서쪽 오십리에서 여러 물을 만나 “동북”으로 흐르고 발해의

상경을 지난다.

아래로 흘러 오국두성의 북쪽을 지나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混同江 拔源 長白山  北流經 渤海 建州 西五十里 會諸水

東北流 經 上京 下達 五國頭城北 又 東北注 于海

 

상경고성은 본래 숙신고성이고 발해 대씨가 상경이라 하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 발해 상경에 도읍하고 훗날 회녕부라고 하였다.

上京 古城은 본래 肅愼氏地이고 渤海大氏가 改爲 上京하였다

金旣滅遼 卽 上京 建邦設都 後改 會寧府

 

이제까지 원나라 기록에 의하면 금나라 상경은 발해 상경이고,

발해 상경은 장백산에서 발원하는 송화강 주변에 있었으며

결코 장백산에서 발원하지도 않는 지금의 모란강 주변에 발해 상경을 둔 것이 아니었다.

 

[신당서-발해전]에 상경 천도 대목이 있다.

대흠무가 구국으로부터 300리 되는 홀한하 동편의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欽茂 徒 上京 直舊國 三百里, 忽汗河之東.

 

다음은 [구당서]다. 오환국의 설명을 보면 후륜바얼 호에서부터 나오는 흑룡강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홀한강이 등장한다.
오환국의 북쪽은 대산을 넘어서 대실위부락이 있다. 그 부락은 망건하(흑룡강 최상류) 주위에 있다.

今亦自稱烏丸國。武德、貞觀中,亦遣使來朝貢。其北大山之北有大室韋部落,其部落傍望建河居。

그 흑룡강은 후륜바얼호에서 나온다.

꺽여서 동쪽으로 흐르고 실위의 서쪽 경계를 지나, 동쪽으로 대실위(러시아 영토) 경계를 지나 동쪽으로 몽올실위 북쪽을

지나 낙조실위 남쪽을 지나 또 동으로 흘러 나하를 만나고(지금 흑하시에서 러시아로부터 내려온 나하가 합류한다.)

그리고 홀한하와 합쳐서 동쪽으로 남흑수말갈의 북쪽과 북흑수말갈의 남쪽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其河源出突厥東北界俱輪泊,屈曲東流,經西室韋界,又東經大室韋界,又東經蒙兀室韋之北,落俎室韋之南,又東流與那河、

忽汗河合,又東經南黑水靺鞨之北, 北黑水靺鞨之南,東流注於海
윗글에서 홀한하는 송화강, 눈강이 합친 송화강을 의미한다. 물론 목단강도 합류하지만 작은 가지일 뿐인다. 

즉 송화강을 홀한강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발해 상경은 금나라 상경과 같다.

 

이제까지 금나라 상경으로 알려졌던 아성시 고성은 본래 발해 상경이었다.

하얼빈 아래 아성시 금나라 상경터 발굴 평면도를 보면 [ㄴ] 자인데 이것은 두 개의 성터가 겹친 것이다.


   

  금나라 상경의 남성이 발해 상경 궁성이었다.

 

금나라 상경 기록에 의하면 아골타가 산채를 짓고 살다가, 서남방에 아골타 묘지도중 금태조묘를 만들고 후에 남북 쌍성을

세워 아골타묘를 멀리 이장했다가 도로 원위치했다. 즉 북성이 처음부터 황성이었다.

북성과 남성을 나누는 중앙 성벽을 보면 옹성문이 남쪽으로 향했다.

옹성문의 방향을 보면 남북 쌍성이 되고도 북성이 여전히 금나라 황성이다.

그런데 남쪽성에 분명한 황궁터가 또 있으니, 이는 금나라 황궁이 아니라 먼저 지어진 발해 황궁일 수밖에 없다.

즉 가로로 직방형인 발해 상경성이 허물어지고서 그 북방에 금나라 아골타가 와서 성채를 짓고 살다가, 발해 상경성을

포함하는 남성을 다시 만들어서 남북 쌍성으로 다시 만들었다.


이를 발해 상경인 남성만 분리해 보면 위 오른쪽 그림과 같다.
발해 상경성의 규모는 동변이 1500m이고 남변이 2200m이니 성둘레 7400m의 대성이다. 금나라 상경의 규모는 

합쳐서 11000m가 된다. 

게다가 이 발해 상경, 즉 남성 내에서 황궁터만 다시 유심히 살펴보면 이는 발해 동경성의 내성 황궁터와 매우 흡사하다.

이런 내성의 모습은 요나라나 금나라가 아닌 발해 식이다.

이는 화룡化龍의 서고성西古城, 혼춘琿春의 팔련성八連城을 보아도 금나라 상경의 남성은 역시 발해성이라는 느낌이 온다.

또한 상경성 서남쪽에는 숙신 고성이 남아있다. 발해 때에도 수도의 남산성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한편 300리 남쪽의 발해 구국(舊國)은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가르쳐준다.
[금사-태조기金史-太祖紀]의 건국기를 보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처음 거병을 하였을 때, 요나라 영강주寧江州는 대대로

발해 대씨大氏 소유였는데,

영강주 사람 발해대가노渤海大家奴가 달로고부로부터 아골타를 찾아와서 보고 말하기를 “요나라를 치려고 아골타가

거병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우리(=발해인)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물으니, 태조가 대답하기를 “나의 군사가 비록

적지만 발해 구국 땅의 너희 발해족과 여진족은 이웃이었다. 마땅히 나를 따르라.

만일 요나라를 따르면 내가 가서 영강주를 치겠다.”고 말했다.

寧江州渤海大家奴 於是達魯古部實裡館來告曰 聞舉兵伐遼,我部誰從? 太祖曰 吾兵雖少 舊國也. 與汝鄰境 固當從我.

若畏遼人 自往就之.

이 직후에 발해대가노는 아골타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나 영강주를 지키던 성주 발해인 대약사노大藥師奴는 항복하지 않았다.

아골타는 한달만에 영강주를 쳐서 성주인 방어사防禦使 발해 대약사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금태조 아골타는 대약사노를 용서하고 풀어주면서 “발해와 여진은 본동일가本同一家”라며 회유하고 여타의

발해인들도 회유하고 우대하였다.

금나라 4대 황제인 해릉왕의 모후가 발해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아골타가 영강주寧江州를 놓고서 발해 구국舊國을 말한 것이다.

대파고성은 성둘레 3150m이며 호성하(참호)로 둘러 싸여 있다.


영강주는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서 길림시吉林市 오라고성烏拉古城에서 80리 물길인데 바로 장춘시 유수현楡樹縣

대파고성大坡古城이다.

숙신고지肅愼故地가 본래 장춘이다.
발해 구국이었던 장춘시 유수현 대파고성은 동변이 1050m, 서변이 840m 남북이 각각 630m로서 총 3150m의 둘레를 가졌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4문이 있었고 발굴 결과 포문布文기와와 녹유綠釉기와, 연주수면連珠獸面 기와, 꽃무늬 와당 등이

나왔다. 왕성의 화려함이다.

성내에서는 대형 조각 벽돌, 청색 벽돌, 동경, 철솥, 옥기, 석기, 돌공石球 등이 나왔다.
성 외곽에서도 6개의 건축지와 1개의 야철지冶鐵地가 나왔다. 석각 호랑이와 용운문龍雲紋 옥패식玉佩飾이 아름답고,

칼, 창, 검, 화살, 불상 등 청동류와 각종 동패식이 출현하며 쌍룡문, 쌍어문 동경 등 여러 동경도 나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파고성 남쪽의 노하침향老河沈鄕에서는 발해 최초의 고분군古墳群이 발굴되었다.

발해 묘장이 139좌이며 석관묘와 목관묘도 있고 철갑편, 철검 등 철기와 구리장식, 은장식 등이 있었다.

게다가 발해 고분으로 유명한 돈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 고분군보다 훨씬 이른 발해 조기 고분 양식으로 발표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돈화현 육정산이 발해 구국이라고 주장한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까지 발굴된 발해 고분과 노하심의 숙신족肅愼族 고분 때문에 발해 구국으로서 대파고성은 확실한 것이다.


발해 불상

발해 자기


정효공주 묘실 벽화


정효공주묘비


정혜공주묘 사자석등


쌍용문 동경


쌍어문 동경

또한 우리의 역사적 관심이 집중되야 할 곳은 노하침에서 발굴된 동한시대東漢時代 묘장 129좌다.

발해 초기 묘장보다 훨씬 화려하고 정교한 구리장식, 금은 장식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동한시대의 숙신족 고분이다.


대파고성 앞 노하침 고분의 숙신 유물, 허리띠 장식

 

발해 상경은 바로 이 숙신고지에 세워졌다.

그리하여 중국 장춘시長春市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숙신肅愼의 후예를 자처하여왔다.

단, 얼마전부터는 부여라고 주장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가 단군 도읍지 완달산으로 고려했던 곳이 바로 이 발해 상경인 아성이다.

그러나 이곳은 단군 시대 청동기 문물의 변방으로서 단군 도읍지가 될 수 없다.

 

요나라는 대파고성에 영강주 혼동군寧江州 混同軍을 두었다.
혼동混同은 홀한忽汗과 같은 말로서 홀한강이 혼동강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다.

고대 백제 한강이 지금의 대동강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다.

 

금나라 태조 아골타보다 발해 역사지리를 더 잘 아는 현세 역사학자는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돈화현 육정산 발해 고분보다 훨씬 더 빠른 초기 발해 고분까지도 충분히 많이 대파고성 인근에서 발굴되었다.

 

금나라가 아성시에 상경을 세운 이유는 아성시 북쪽 철鐵産地 때문이다.

여진족은 금만 있고 철이 없어서 무기 제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발해문황제 대흠무 역시 같은 이유로서 이곳에 도읍을 정했을 것이다.

 

대흠무황제는 정원 때에 다시 한번 천도하였는데 동경이다.
지금 영안현의 동경성이다. 만주에서 가장 큰 성이다. 동서로 4580m, 남북 3300m다.

 

 

 

발해 동경성은 그 이름이 지금도 동경성이다.

 

                     

                                     발해 호주가 된 영안현 동경성 내 동경성 평면도와 동경성의 황궁도

 

子欽茂立,改年大興,有詔嗣王及所領,欽茂因是赦境內。天寶末,欽茂徙上京,直舊國三百里忽汗河之東。

訖帝世,朝獻者二十九。寶應元年,詔以渤海為國,欽茂王之,進檢校太尉。大歷中,二十五來,以日本舞女十一獻諸朝。

貞元時,東南徙東京。欽茂死,私謚文王。

 

대원의(794~794)가 즉위했으나 살해당하고, 대흠무 문황제의 손자인 인종성황제 대화여가 즉위하여 중흥(794~795)

이라고 개원했으며 이때 상경으로 재천도하였다. 즉 하얼빈 아성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러나 대화여황제도 1년만에 서거하고, 대흠무황제의 막내인 목종강황제 대숭린이 즉위하여 정력(795~809)이라 

개원하였다.

그후 의종정황제 대원유의 영덕(810~812), 강종희황제 대언의의 주작(813~817), 철종간황제 대명충의 태시(818)을 지나 

성종선황제 대인수의 건흥(819~830)에 이르렀다.

子宏臨早死,族弟元義立一歲,猜虐,國人殺之。推宏臨子華璵為王,復還上京,改年中興。死,謚曰成王。

欽茂少子嵩鄰立,改年正歷,有詔授右驍衛大將軍,嗣王。建中、貞元間凡四來。死,謚康王。子元瑜立,改年永德。

死,謚定王。弟言義立,改年硃雀,並襲王如故事。死,謚僖王。弟明忠立,改年太始,立一歲死,謚簡王。

 

 

4. 성종선황제 대흠무 건흥(819~830)

 

대인수황제는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후손으로서 후고구려를 병합하고 국경을 서와 남으로 더욱 넓혔다.

여기서  대인수황제가 새로 홀한성을 지어서 남천한 것으로 고려된다.

장춘시에서 관성자라는 대성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동서로 3500m 남북으로 2000m인 이 관성자는 그 규모가 아성의 상경성(2200m x 1500M)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장춘시 관성자는 상경성보다 더 큰 중경성이 아니라, 발해선황제 대인수 때에 새로 만들어진 발해 용천부

홀한성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하고, 발해국이 요나라 태조에게 멸망당한 홀한성이 된다.

 

<대원일통지> 개원로(開元路)에서 상경고성上京故城 항목을 보면 상경고성이 본래 숙신씨지이고 발해 대씨가 상경이라

고쳤으며 上京故城 古肅愼氏地 渤海大氏 改爲 上京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즉시 상경에 나라와 도읍을 세웠는데 

후에 회녕부라 하였고(금나라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갔다.) 
상경성
의 남쪽에는 건주가 있으며, 상경성 서쪽에는 빈주가 있고, 또 그 서쪽은 황룡부인데 황룡부(장춘시 농안현)는 본래

발해 홀한군인데 뒤에 용천부, 즉 상경이 되었다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黃龍府 卽 渤海之 忽汗郡 後爲 龍泉府

발해의 상경이 본래 금나라 상경터(아성시)에 있었지만, 또 요나라 황룡부 부근에 발해 후기 상경용천부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래서 금나라가 도읍한 상경을 <금사/지리지>에서는 발해 상경이라는 말 대신에 해고지지(上京路,即 海古之地)라고도

하였다. 해고지지는 결국 발해의 옛도읍이라는 뜻이다.

 

[신당서]에서 정원 때에 발해 수도 상경은 숙신고지라고 하였는데, 대이진 황제 때에 발해를 직접 방문한 북경인

<장건장 묘비문> 에서는 발해 도읍 홀한성이 읍루고지라고 하였다.

癸丑秋(833년) 方舟而東 海濤萬里 明年秋初 達 忽汗州, 州卽 邑婁故地

발해 상경이 바뀐 것이다.

 

대인수 황제 때에 불열말갈국도 요동성으로 이주하였고, 정리부는 심양으로 이주하였고, 남해부는 요양으로 이주하였으며,
중경 현덕부는 고구려 안시성터인 북진시로 이주하였고 장령부도 현재의 장령현 위치에서 만리장성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대이동이 일어났다. 남해부는 본래 두만강 남쪽이었으므로 777년 남해부 토호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가 떠났는데,

이 대인수 황제 때에 무순시의 옥저고지 사비성으로 옮겨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발해 망국 직후에 만주 복판에 자리잡은 정리부와 남해부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다.

從父仁秀立,改年建興,其四世祖野勃,祚榮弟也。仁秀頗能討伐海北諸部,開大境宇,有功,詔檢校司空、襲王。

元和中,凡十六朝獻,長慶四,寶歷凡再。大和四年,仁秀死,謚宣王。

 

5. 애제 대연선 청태(819~830)

 

장종 대이진황제의 함화(831~857), 순종 대호광황제의 대정(858~871),  명종 대현석황제의 천복(872~893)

대위해황제(894~906)의 태평성대를 지나 발해는 애제 대연선황제의 청태(907~926)에 이르렀는데 거란이 발호하였다.

결국 요서로부터 요양을 뺏기고, 심양을 뺏기고, 장춘 홀한성을 뺏겨서 멸망하였다.

子新德蚤死,孫彝震立,改年咸和。明年,詔襲爵。終文宗世來朝十二,會昌凡四。彝震死,弟虔晃立。死,玄錫立。

咸通時,三朝獻。 初,其王數遣諸生詣京師太學,習識古今制度,至是遂為海東盛國,

 

발해 망국 당시 <요사/태조기>를 보면

아보기는 872년생인데, 31세인 902년 거란군 40만을 동원하여 산서성 북부를 정벌하고 9만5천명을 끌어다가 용화주를

세워 건국 기초로 삼았다. 용화주는 옹우특기현과 나만기 경계로서 서요하와 적봉시 노로아호하가 합쳐지는 곳이다.
다음해 여진을 치고 그 다음해에는 실위를 쳤는데 이는 요서로 진출했던 부족들이다.
그후 태조는 당나라를 아우로 삼고 36세인 907년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해 7월 산해관 동쪽의 평로성에 투항한 당나라 장수를 안치한다. 본래 발해의 서쪽 경계였다.
909년 아보기는 요동으로 나간다. 대릉하 동쪽이다.  三年春正春月,幸遼東

911년 해족과 습족(조양시)을 쳐서 동해 바다를 경계로 삼는다.
이 동해 바다는 지금의 대릉하구 정도를 의미한다.
당시 요의 국경이 서쪽으로는 송막(적봉시) 남쪽으로는 백단(난하 중류), 북쪽으로는 서요하, 동쪽으로는 바다였다.

911년 3월 난하 하류로 내려가서 계주(옛 유주)를 차지한다.

912년 3월 유주(북경)를 공격한다. 뒤이어서 7월에 평주를 공략하여 10월에 평주(난하 하류 노룡)를 차지한다.

913년 1월에는 마침내 유주를 함락시킨다.
그런데 이때 아보기 동생 나갈이 도읍에서 반란하여 큰 타격을 받고 평정한다.
915년 10월 압록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신라, 고려 등에서 사자를 보냈다.

冬十月戊申,鉤魚於鴨淥江。新羅遣使貢方物,高麗遣使進寶劍,吳越王錢鏐遣滕彥休來貢。

이 압록강은 고구려 국내성 아래 유하의 하류인 신민시다. 

현재 심양시로부터 현재의 요하를 건너 있는 곳으로서 현재의 요서다.
916년 연호를 신책으로 처음 세우고 7월에 친정하여 서쪽의 돌궐 등을 평정한다.

秋七月壬申,親征突闕、吐渾、黨項、小蕃、沙陀諸部,皆平之
10월에는 승승장구하여 중국 진나라(石晉)의 삭주, 울주, 신주, 무주, 위주 등을 차지한다.

즉 산서성의 대북(代北)에서 음산까지 차지한다.
917년 신주에서 유주연합군을 무찌르지만 유주성을 공략하는데 실패한다.
918년 3월 임황부에 황성을 짓는데 발해 등이 사자를 보낸다.

二月,達旦國來聘。癸亥,城皇都,以禮部尚書康默記充版築使。梁遣使來聘。晉、吳越、渤海、高麗、回鶻、阻卜、

黨項及幽、鎮、定、魏、潞等州各遣使來貢。
918년 12월에 요양고성으로 행차한다. 

冬十二月庚子朔,幸遼陽故城
이때 비로소 태자하의 요양시 고구려 장안성이 요나라 차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919년 4월 요양고성에 한인들과 발해인들로서 요양성을 고치고修遼陽故城 그곳에 동평군東平郡을 세운다.
즉, 4개월간 공격하고 차지한 것이다.
921년 중국을 공략하다가 12월에 난하의 단주檀州 백성과 북경 부근 순주順州의 백성을 각각 요양시 동평군과 심양시

심주로 이주시킨다.
詔徙檀、順民於東平、瀋州. 요양 공략 때에 심양이 같이 함락된 것인지, 동평군 설치후 2년 동안 차차 함락된 것인지

애매하다.

923년, 난하의 노룡현에 있던 평주를 차지하여 요나라의 평주를 설치한다.
924년 발해가 대릉하의 요주遼州를 약탈하였다. 요양, 심양을 빼앗겼던 발해가 대규모 반격을 해온 것이다.
발해가 요나라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백성들을 끌어갔으므로 계주민능 옮겨서 요주를 채우도록 하였다.

是月,徙薊州民實遼州地。渤海殺其刺史張秀實而掠其民。

 

그후 924년 9월 요나라 태조는 회홀성(신강성)에 가서 각석기공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겨울에 발해를 치러 나선다.
두가지 사안 중에 하나는 완성되었는데 하나가 남았다...면서 발해를 친정하기로 한다.
十二月乙亥,詔曰 :「所謂兩事,一事已畢,惟渤海世急未雪,豈宜安駐.」乃舉兵親征渤海大諲譔。皇后、皇太子、

大元帥堯骨皆從。

윤12월 임진에 목엽산(아로과이심기 천산)에 제사하고 10일후인 임인에 오산烏山에서 제사하고 7일후인 기유에 살갈산

撒葛山에 이르고 8일후인 정사에 상령商嶺(지금 장령현)에 이르고 그날밤 부여부를 포위한다.

이틀후 춘정월 기미(1월1일 추정)일에 백기가 태양을 통과하더니 다음날 경신일에 부여성을 함락하여 그 장수를 죽인다. 

1월 8일 병인일에 선봉대가 떠나서 대연선의 노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날밤에 홀한성으로 포위한다.
閏月壬辰,祠木葉山. 壬寅以青牛白馬祭天地於烏山. 己酉,次撒葛山,射鬼箭. 丁巳,次商嶺,夜圍扶余府.

天顯元年春正月己未,白氣貫日. 庚申,拔扶余城,誅其守將. 丙寅,命惕隱安端、前北府宰相蕭阿古只等將萬騎為先鋒,

遇諲譔老相兵,破之. 皇太子、大元帥堯骨、南府宰相蘇、北院夷離堇斜涅赤,南院夷離堇迭裡是夜圍忽汗城. 己巳,諲譔請降.

 

한편 <요사/지리지> 동경도 황룡부를 보면  현재 장춘시 농안(農安)현성이었던 요나라 용주龍州는 원래 발해 부여부였고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죽었다.

황룡을 보아서 황룡부라고 했는데, 보령 7년(975년)에 발해인 연파가 반란하여 폐지했다가 개태9년(1020)에 성을 동북방

(현재의 농안)으로 옮기고 종주와 단주 백성으로 채웠다고 하였다.

龍州,黃龍府。本渤海扶余府。太祖平渤海還,至此崩,有黃龍見,更名。保寧七年,軍將燕頗叛,府廢。開泰九年,

遷城於東北,以宗州、檀州漢戶一千復置

따라서 발해 부여부는 농안시 서남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홀한성은 장춘시인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통주의 설명을 보면 본래 통주는 부여국왕성이었고 발해 부여성이었으나 태조가 용주로 고쳤다가 성종때 통주로 

고쳤는데 보령7년

(975년)에 반란으로 인하여 연파를 따르던 천여인을 옮겨서 만든 것이다.

通州,安遠軍,節度。本扶余國王城,渤海號扶余城。太祖改龍州,聖宗更今名。保寧七年,以黃龍府叛人燕頗餘黨千余戶置,

升節度。
즉 통주는 부여성 사람들, 즉 용주 사람들이지만 장소는 반란으로 인하여 옮겨진 것이고 본래 부여국 왕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위치를 보면 <대무신왕기>에서 안개가 자욱한 곳으로 묘사된 대소가 망한 부여 왕성으로 고려된다.

 

 

파라호를 중심으로 그 동편에 본래 부여왕성이 있고, 발해 부여성이었고 파라호 서남 복룡진(伏龍鎭)이 바로 상령이자

요나라 태조가 물다가 황룡을 보았다고 하다가 죽은 곳으로서 요나라가 세운 1차 황룡부성으로 고려된다.
(방위적으로 부여왕성은 동북으로 옮겨간 농안 2차 황룡부성의 서북이고, 복룡진은 서남이다.
따라서 발해 부여성은 동북에, 요나라 황룡부성은 서남에 있어야 한다.
또 그 서남 상령이 바로 거란을 막기 위해 발해군이 항시 둔을 만들어 강군常屯勁兵扞契丹을 안치해 두었던 곳이 된다.

 

발해는 거란의 침략으로 926년 1월 멸망하였다.

 

                              발해 지리 1

 

740년대 대무예 황제시대 발해는 5경 15부 62주 37현이었다.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엉터리로 알려진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요나라 기록에 발해 주현의 위치가 보이는데, 이는 820년대 대인수황제시대에 바뀐 것이 많다.

명나라 초기 지도.

위에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가 보이는데 이는 [신당서지리지]<도리기>에 나오는 압록강앞의 섬들이다.
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 鴨綠江唐恩浦口

章潢(1527一1608年),圖書編 권 57.
沙門島解宋寨界 單山黃縣界 桑島馬停寨界 龜島昌邑縣界 歆末島壽光界
都里鎭蒲臺界 靑島利津界 黃島賓州界 直沽口寶低縣界 塔山盧龍衛寨界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

抵遼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 蔬萊島中前所界  牛車島中後所界 孤山中右所界 向陽島羅兒島金州衛界
石灘島左所界東雲島 黃駝島蓋州衛界 屛風山復州衛界 鳳凰山中左所界 女兒河中屯衛右屯衛界
遼河渡古寺島爲廣寧衛界
麻田島
平島爲海州衛界
湯站堡鎭遼所界
臨江義州界計一千三百餘里鴨綠朝鮮界

여아하는 중둔위와 우둔위의 경계이고
요하도와 고사도는 우둔위와 광녕위 경계이고
(우둔위는 대릉하와 고릉하 사이에 있었다. 고릉하는 대릉하와 압록강이 만나던 곳이다. 즉 요동군 방현의 위치)
즉 요하도는 대릉하에 있는 것이다. 수양제의 도요진도 그러했다.
마전도는 광녕위와 해주위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당서지리지]의 압록강이 요하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요하구로부터 600리에 고구려 구도현성 발해 환주가 있었고 200리 위에 발해 신주가 있었고 거기서 400리에, 

즉 장춘에 발해 중경 현덕부가 있었다. 거기서 정북 여동으로 600리에 발해 상경홀한성이 있었으니 아래와 같다.
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
得物島,千里至鴨淥江唐恩浦口.乃東南陸行,七百里至新羅王城.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又泝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
又東北泝流二百里,至神州.又陸行四百里,至顯州,天寶中王所都.又正北如東六百里,至渤海王城.

                                

 

상경용천부와 중경현덕부

 

740년대 대무예 황제시대 발해는 5경 15부 62주 37현이었다.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엉터리로 알려진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요나라 기록에 발해 주현의 위치가 보이는데, 이는 820년대 대인수황제시대에 바뀐 것이 많다.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용주龍州

먼저 <신당서>에서 숙신고지 상경 용천부는 용주, 호주, 발주가 있었다.

以肅慎故地為上京,曰龍泉府,領龍、湖、渤三州。

또한 중경현덕부가 그 남쪽에 있으므로 이 상경용천부는 흑룡강성 하얼빈의 아성이다.

자세한 것은 앞에 있다. 호성하로 둘러 싸였고 남북이 1500m, 동서가 2200m이고 서쪽에 황궁이 들어있다.

한편 서남쪽에는 숙신고성이 있다. 신채호선생이 말한 완달산으로 고려된다.

 

다시 대인수황제 때에 장춘시로 옮겼다. 동서가 3500m. 남북이 2000m 이다.
 

 

 

호주湖州

호주는 뒤에 대흠무가 천도했던 영안현 동경성이며 겨울 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동경성에서는 “물한주도독勿汗州都督”이라는 관인 도장이 나왔는데

물길, 말갈의 물한강, 지금의 모란강木丹江에 세워진 것이다.

반면에 발해 홀한강忽汗江은 같은 말뜻의 혼동강混同江으로 바뀌고 훗날 송화강으로 바뀐다.

 

 

발주渤州

발주渤州는 장춘시長春市 유수현楡樹縣 대파고성이다.  

발주에는 공진현貢珍縣이 있었는데 이곳 주변에서 발굴되는 숙신肅愼의 금속 예술품들은 과연 공진현이라고 생각되게 한다.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현주顯州

중경현덕부는 본래 상경의 남쪽이었다.

其南為中京,曰顯德府,領 廬、顯、鐵、湯、榮、興六州
현덕부라 하였고 그 위치는 농안현 서남쪽의 대조양보와 연화산진의 사이다.

 

현주 주위로 주요 고성들은 흥성성지(흥주). 진가둔고성, 오가자고성, 쌍성보 황화성, 양대성자(탕주?) 등이 있다.

 

 

2-1. 중경 현덕부2

 

820년경 대인수황제 때에 2차 현주는 안시성터인 북진시에 옮겨서 설치되었다.

안시성 안에 현주가 들어있다.


요사지리지 동경도에서 노주, 철주, 흥주, 탕주 등의 설명을 보면 확실하다.

 

노주盧州
노주는 동경의 동쪽 130리라고 했는데 안시성의 제2 중경 현주를 기준으로 보면 유리왕의 여달성이 있던 노하토
(老河土)의 

위치이고, 본래 대인수황제 전에는 발해 삼로군이었는데 훗날 발해 노주가 옮겨들어온 것이고, 그 서쪽에 백암성

(백암성도를 보면 가까이 있다.)이 있다. 

이 노주를 요나라는 요동반도 개주시로 옮겼으며 요나라 동경 동쪽 130리는 아무 관계 없다. 

盧州,玄德軍,刺史。本渤海杉盧郡,故縣五:山陽、杉盧、漢陽、白巖、霜巖,皆廢。戶三百。

在東京一百三十里。兵事屬南女直湯河司。統縣一: 熊岳縣。西至海一十五里,傍海有熊岳山。


보라색이 발해 후기 현덕부 6주

 

철주鐵州
둘째 철주는 한나라 안시현이라고 했으며, 동경의 남쪽 60리라고 했는데, 요나라가 옮긴 곳은 대석교시 동쪽 탕지현이며 

이는 요나라 동경 남쪽 60리가 아니다.

대신 북진시 제2현주 중경성으로부터 남쪽 60리로 보면 구방자진이 있다.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即此。渤海置州,故縣四:位城、河端、

蒼山、龍珍,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統縣一: 湯池縣。

 

 

흥주興州

셋째 흥주가 가장 중요하다. 

이는 지금도 흥성현으로 남아있는데 역시 발해 제2 현주인 북진시에서 서남으로 300리다. 

興州,中興軍,節度。本漢海冥縣地。渤海置州,故縣三: 盛吉、蒜山、鐵山,皆廢。戶二百。在京西南三百里。

발해 중경 6주가 요서로 이주했다는 또다른 증거는 바로 이 흥주와 관련하여 <요사지리지> 중경도 엄주에 나온다.
엄주는 중경도에 속하였고 바로 지금의 흥성시에 있었는데, 요나라 태조가 918년에 발해를 공격하여 요서 해안의 발해

흥주와 요동반도를 차지할 때에는, 중국인들을 흥주경에 옮겨다가 대신 살게 하였는데, 요나라 성종(재위; 982~1031)이

중국인들을 위해 엄주를 만들었고 발해 흥주터를 흥성현으로 바꾸어 다스리게 하였던 것이다.

발해 흥주인들은 안시성의 현주인들과 함께 요양고성, 즉 요양시 평양성 아래에 동평군을 건설하도록 쫓겨났다.

물론 발해 철주, 탕주,  숭주도 똑같이 강제로 이주 당했다. 이때 남소성은 요동반도 남쪽 복주진으로 이주당했다.
즉 요나라 태조가 발해를 칠 때, 918년에는 발해 중경의 흥주가 지금의 흥성시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엄주 흥성현으로 전락하였고 지금까지 흥성시로 전해오고 있다. 巖州,保肅軍,下,刺史。本漢海陽縣地。

太祖平渤海,遷漢戶雜居興州境,聖宗於此建城焉。隸弘義宮,來屬。統縣一: 興城縣。

 

 

탕주湯州

넷째 탕주는 서북 100리인데 이는 북진시 서북이며 청하문시의 요동신성 고성터로서 한나라 양평현 관내다.

탕두하가 후른다. 湯州。本漢襄平縣地。渤海置州,故縣五:靈峰、常豐、白石、均谷、嘉利,皆廢。戶五百。在京西北一百里。

 

 

숭주崇州

숙신고지의 현덕부 영주榮州는 대조영大祚榮의 영주榮州로서 개국지이니 발해가 옮기지 않고, 그대로 장춘시 서북

대조양자보에 둔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숭주를 만들어 중경 6주를 채웠는데 북진시 동북 150리에 한나라 장잠현(長岑縣)으로 보면, 신민시 대홍기진

(大洪旗鎭)이 된다. 대홍기진 동북에 고성이 있고, 대홍기진 동남쪽 장강자, 금오대자 지역이 한나라 장잠의 흔적으로

고려된다.


숭주는 앞뒤로 압록수와 위수가 흘러서 위수현과 녹성현이 있었을 것이며 숭산현은 양산진으로 고려된다.

崇州,隆安軍,刺史。本漢長岑縣地。渤海置州,故縣三: 崇山、溈水、綠城,皆廢。戶五百。在京東北一百五十里。

統縣一崇信縣:

 

중경의 6주에 대한  <요사/지리지> 설명은 현재 전해지는 요나라 여러 고성 위치와 전혀 맞지 않은데, 이는 안시성으로

옮겨온 발해 후기 현주 중경성을 기준으로 설명한 기록을 그대로 요나라 동경 6주의 설명으로 잘못 옮겼기 때문이다.

또한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 서문의 홀한주의 설명에서, 홀한주 즉 평양성, 중경현덕부라고 쓴 기록은 요나라 태종이

장춘시의 홀한주를 고구려 평양성(요양시)으로 옮긴 사실과, 홀한주를 옮기기 수년 전에 요나라 태조가 요양고성(평양성)

에 동평군을 만들기 위해 서쪽에서 옮겨온 발해인들이 본래 안시성의 현덕부인들이었다는 사실로 인해서 여러 기록이

혼재되어 버린 것으로 이해된다.


위에 기록된 숭주 장잠현 기록에서 우리는 마침내 한사군 중 처음 대방군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장잠현이 바로 대방군의 현이기 때문이다. 
대방군은 최초의 낙랑군 대방현과는 상관 없고 요동국 공손탁이 만든 대방군은 바로 요동군 망평현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고지 백제 구이왕이 있던 곳, 또 고이왕이 침탈한 낙랑서현, 개마대령의 동남에 있던 한예의 영동 7현이 모두 의무려산 

동남이 된다.  

 

               

                                    동경용원부와 남경남해부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경주慶州

따라서 발해초기 동경성 경주는 함경북도 경원(慶源) 지방으로 추정된다.
경원에서 두만강 건너에 바로 팔련성이 바로 발해 책성부 경주성이다.

성둘레는 2894m다. 남벽이 701m~북벽이 712m 서벽이 735m, 동벽이 746m다.

濊貊故地為東京,曰龍原府,亦曰柵城府,領慶、鹽、穆、賀四州。龍原東南瀕海,日本道也。

 

 

염주鹽州

염주는 해안성으로 고려된다.

파사특만 암저하巖杵河로 중국에서 비정했다. 크라스키노 서쪽 6Km에 염주성이 보인다. 1200m X 1000m 규모다.

 

 

목주穆州

목주 회농현이 본래 회룡현이 화룡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고려된다.
지금 화룡현에서 내려오는 해란강이 고대에 회룡강이었다고 가정하면 용정시, 도문시 일대가 발해 목주 회룡현이었을

것이다.

도문시 장안진의 위자구 부근으로 추정된다.

 

 

하주賀州

하주賀州는 홍하현등으로 보아 두만강 하구를 포함한다. 

서남쪽 함경북도 웅기진에 고성이 보이는데 육로로는 북쪽으로 경주와 통한다.

賀州,刺史。本渤海吉理郡,故縣四:洪賀、送減、吉理、 石山

 

 

동경 용원부2

 

경주慶州2

그런데 발해 동경용원부도 대인수황제 때에 현재의 압록강으로 옮겼다.
<요사/지리지>의 개주, 염주, 목주, 하주의 설명은 발해 후기에 옮겨온 동경용원부 위치 기록이다. 

또한 동경용원부가 예맥고지라고 기록한 <신당서/발해전>의 기록도 역시 현재의 압록강 지역을 의미한다.  처

음 동경이 세워진 곳은 역시 숙신고지, 혹은 읍루고지라고 해야 하고 나중에 옮겨진 단동시 일대가 예맥고지다.
옮겨온 경주는 봉성현에 있었다. 봉황산성이 그 아래에 있는데 고덕무의 후고구려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봉황산성 북쪽 봉성현에 경주성을 지었다. 당시 발해성은 평지성이고 해자로서 보호한다.

 

 

염주鹽州2

발해 염주는 북한의 용천군 아래에 있다.

현재 염주는 철로변에 세웠는데 산악 지대이며 본래 염주는 발해 용하군에 지었는데 해양현과 용하현이 있다.

이 용하현이 현재 용천읍 구읍성이며 해양현 위치의 염주성은 용암포로 추정된다. 봉성 개주와의 거리 140리에 해당한다.

鹽州。本渤海龍河郡,故縣四:海陽、接海、格川、龍河,皆廢。戶三百。隸開州。相去一百四十里。

 

 

목주穆州2

옮겨온 목주는 발해 회농군이었고 회농현을 중심으로 한다. 이는 거리상으로 지금의 단동시 용왕묘진이다.

穆州,保和軍,刺史。本渤海會農郡,故縣四:會農、水歧、順化、美縣,皆廢。戶三百。

隸開州。東北至開州一百二十里。統縣一:會農縣。

 

 

하주賀州2

옮겨온 하주는 홍하현을 중심으로 하며 본래 발해 길리군이었다고 하는 바, 현재 초산현이 고대 이산군이었으므로 

길리군지에 해당한다. 

홍하현은 길리군 길리현과 별개이므로 그 서남으로 고려된다. 하주 송성현은 의주 동쪽 송산으로 고려된다. 

 

하주는 지금의 단동시 구련성에 해당한다. 


賀州,刺史。本渤海吉理郡,故縣四:洪賀、送減、吉理、 石山,皆廢。戶三百。隸開州。

 

발해 길리군은 초산성 서쪽으로서 압록강에서 혼강이 갈라지는 입구로 추정된다.

 

                                       

남경 남해부 南京南海府

 

옥주沃州

남해부성은 신라로 가는 길로서 함흥으로 고려된다.
777년 남해부 토호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신이 배를 타고 떠났다. 이는 한반도 동해안이다.

沃沮故地為南京,曰南海府,領沃、睛、椒三州。

북청이 고대에 청주, 청해였다. 발해의 남해부로 고려된다.

옥주에는 옥저현, 취암현, 용산현, 해빈현, 승평현, 영천현 등 6현이 있었다. :沃沮、鷲巖、龍山、海濱、升平、靈泉,

 

발해성은 대부분 평지성이고 토성이며 성주위로는 해자를 팠다.

 

요나라는 옥주 현이름을 임명현 하나로 통일했는데 함경북도 길주에 임명천이 있었다. 그 위치는 지금의 성진(成津)이다.
따라서 성진이 남해부 옥주였을 가능성도 높다.  혹은 요나라로부터 귀환한 해주인들이 살았던 곳일 수도 있다.

 

정주晴州

정평(定平)도호부의 옛이름 중에 천정(千丁)이 있다.
따라서 발해 정주(晴州
) 천정(天晴)현은 함흥시 남쪽이며 정평도호부가 발해 정주가 된다.

<요사/지리지> 嬪州,柔遠軍,刺史。本渤海晴州,故縣五:天晴、神陽、蓮池、狼山、仙巖,皆廢。戶五百。隸海州。

 

 

초주椒州

발해 초주현은 황초령에서 비롯된 이름으로본다. 함흥 북쪽 100리에 황초령이 있다. 

맥령현 등은 고구려와 백제 경계에 붙여지던 이름이다.
耀州,刺史。本渤海椒州;故縣五,椒山,貉嶺、澌泉、尖山、巖淵,皆廢。戶七百。隸海州。

 

천정군泉井郡

천정군은 덕원에 있었다.

남경 남해부2

 

옥주沃州2

후기 발해에 옮겨진 새로운 남해부성은 고구려 사비성이며 무순시 고려산성이다.
海州,南海軍,節度。本沃沮國地。高麗為沙卑城,唐李世徠嘗攻焉。渤海號南京南海府。疊石為城,幅員九里

 

 

 

초주椒州2

옮겨진 초주는 현재 요양성 안 정료전위, 우위에 있던 당나라 시대 발해성이다.

요나라 태종이 처음에 동평군을 두었다가 이를 확장한 것이 지금 요양성이다.

발해 초주성은 동경성이 건설될 때에 사라진 것이 된다.

요양성 동북우에 있던 발해성 750m x 1000m. 함흥에서 옮겨온 초주성으로 고려된다.

서쪽에 고구려 비사성이 있다.


요양시 사령 비사성

 

정주晴州2

옮겨온 정주는 해주 서북 120리다. 철령시 서남쪽 오각호 호수 부근에 강희루가 있는데 거리상으로 발해 정주에 해당한다. 

 

     

            

                                   

                                서경압록부와 장령부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

 

신주神州

신주는 압록부 서경성이며 고려고국이다. 광륜 이십리의 석성이라고 하였다. 

<신당서>高麗故地為西京,曰鴨淥府,領神、桓、豐、正四州...

<요사/지리지>淥州,鴨淥軍,節度。本高麗故國,渤海號西京鴨淥府。城高三丈,廣輪二十里,都督神、桓、豐、五四州事。

故縣三: 神鹿、神化、劍門,皆廢。大延琳叛,遷餘黨於上京,置易俗縣居之。在者戶二千。隸東京留守詞。

統州四、縣二: 弘聞縣。神鄉縣。

이미 앞에서 밝힌대로 신주성은 졸본성이며 황성이고 창도현 천주진으로서 졸본성 편에 자세하다.
압록이 조공도라는 것은 발해 후기 해도를 의미한다. 鴨淥,朝貢道也。

 

 

옛신주神州

압록부성은 처음에 임황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뒤에 거란이 발호하여 고려고국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 때에 화룡和龍, 분주汾州, 환주桓州, 풍성豊城, 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때의 임황성이 발해 초기 압록성이다.

풍성은 고구려 풍성이고 풍주는 요나라가 세운 것인데 발해 풍주 위치로 고려된다.

 



압록부성이 임황성이었을 것이다. 요나라 임황부성이 지어지기 전에 발해 임황성은 개로현 남쪽 굉성(宏城)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풍성은 노합하 연안에 있었다.

 

옛환주桓州

본래 환주는 화룡이었던 조양시와 나만기진 사이로 고려된다. 
고구려 영양왕 때에 화룡和龍, 분주汾州, 환주桓州, 풍성豊城, 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풍성은 풍주 부근이었으므로 분주와 환주는 조양시와 나만기(발해 풍주) 사이가 되는데 그 중간에 오한기진이 있다.

오한기 敖漢旗의 살리파향 산성자산성이 고구려 환나부(桓那部) 위치다.


 

 

환주 아래 조양으로 가는 사가자진에 분주(汾州) 고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는 네 강의 수계가 갈라지는 곳이다.
사가자진에는 서쪽에는 대형 적석총 고분들이 있다. 신석기 시대 제사 유적도 있다.

 

사가자진 서남쪽 노호산에는 장성 유적이 있다. 고구려 천리장성이 오한기진부터 여기까지 이어져 있다.

즉 부여성이었던 천산진에서 서요하를 건너오한기진을 지나서 사가자를 지나 조양을 지나 금주시 해북을 지나는

천리장성이 있었다.


 

 

 

환주桓州

거란족의 발호로 동쪽 내지로 옮겨온 환주는 고려중기 도성이고 환도성이다.
산상왕이 짓고 묻혔으나 고국원왕 때에 불탔다. 한 대산에 자리잡은 동성이 주성이다.
 

桓州。高麗中都城,故縣三:桓都、神鄉、洪水,皆廢。高麗王於此創立宮闕,國人謂之新國。

五世孫釗,晉康帝建元初為慕容皝所敗,宮室焚蕩。戶七百。隸淥州。在西南二百里。
이는 산상왕의 환도성편에 자세하다.

 

 

옛풍주豊州

풍주는 요나라 기록에 의하면 나만기진(奈曼旗鎭) 부근에 있었다.

나만기진에서 구려하로 고려되는 교래하를 건너 발해 풍주가 있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豐州。本遼澤大部落,遙輦氏僧隱牧地。北至上京三百五十里。戶五百。
[한단고기]에서 풍성豊城으로 나오는 곳에서는 동남으로 생겨났다.

고구려 영양왕 때에 화룡和龍, 분주汾州, 환주桓州, 풍성豊城, 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풍성이 풍주였으므로 분주와 환주는 화룡이었던 조양시와 나만기진 사이로 고려된다. 


 

풍주豊州

한편 풍주는 발해 반안군에 옮겼다. 

豐州。渤海置盤安郡,故縣四:安豐、渤恪、隰壤、硤石,皆廢。戶三百。隸淥州。在東北二百一十里。
신주 동북 210리가 되는 새로운 풍주 위치는 이통현이며 동모산성 아래다.  
반안군 동모산은 본래 대야발이 반안군왕으로서 책봉받아서 지키던 곳이고(단기고사 서문), 대야발의 4세손인 대인수

황제가 즉위하면서 선조의 땅 반안군을 일개 군에서 주로 승격시킨 것으로 고려된다.


 

 

 

옛정주正州

정주는 [한단고기桓檀古記-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에서 발해 정주正州는 의려국依慮國 고지라고 하였다.

의려국은 선비국과 고구려국 사이로 추정되는데 공손탁의 요동국 북쪽일 것이다.

고륜기진庫倫旗鎭 서쪽에 육가자향은 의하依河와 가까이 있다. 육가자는 부여 도성 영고탑과 같은 의미다. 

그 육가자향 옆에 구가자 고성이 있는데 바로 의려국도이고 발해 정주다

 

 

 

정주正州

정주가 발해 후기에 비류고지로 옮겨졌는데 거리로 추정하면 내몽과 과이심좌익후기현 소재지인 감기하(甘旗下)이다.

正州。本沸流王故地,國為公孫康所並。渤海置沸流都。有沸流水。戶五百。隸淥州。在西北三百八十里。統縣一: 東那縣。

本漢東耐縣地。在州西七十里。

 

 

장령부長嶺府

 

하주瑕州

장령부성은 고탐의 <도리기>에서 영주로부터 고개모신성을 지나서 상경으로 가는 1500리길 도중에 있었다.

현재 장령현이 홀한성과 부여성 이전이다. 따라서 장령성의 원래 위치로 비정된다.

曰長嶺府,領瑕、河 二州。長嶺,營州道也。

 

하주瑕州2

대인수황제 때에 장령부는 난하의 동쪽으로 옮겨갔다.

중국과의 국경에서 장령부를 둘 곳은 조양시밖에 적절한 곳이 없다.

조양시가 하주瑕州였을 것이다. 임금왕(王)이 들어간 하瑕주의 의미는 왕도라는 뜻으로 고려되고 화룡성은 본래 연나라의

수도였다.

 

하주(河州)2

하주(河州)는 북표시 흑성자(黑城子)다. 

고구려 하성(河城), 발해 하주(河州), 요나라 천주(川州)를 거쳐 본래 하성河城과 중국에서 발음이 비슷한 흑성으로

바뀐 것이다.

처음 하주河州는 알 수 없다.

 

                      

                                            부여부와 막힐부

 

부여부扶餘府

 

부주(扶州)

부여부 왕성 부주는 파라호 동편이다. 1장에 자세하다.

扶餘故地為扶餘府,常屯勁兵扞契丹,領扶、仙二州.    扶餘,契丹道也。


 

요나라 태조가 이곳에서 죽어서 천전을 지었다.

太祖所崩行宮在扶餘城西南兩河之間,後建昇天殿于此,而以扶餘為黃龍府云.

 

 

선주仙州

부여부 선주는 현재 부여현의 백도성으로 고려된다.

백도성이 부여와 관련 없으면 현재 부여현, 부여시(송원시로 바꿈)의 근거가 없을 것이다.

 

 

 

막힐부莫詰府

 

막힐부 막주와 고주는 각각 한가와 고가 위치다. 鄚頡府領鄚、高二州。

막힐부는 한주 유하현을 두었고 고주에는 요나라가 수주를 두었기 때문이다.

수주, 즉 막힐부 고주는 단주의 서쪽 200로서 그 위치가 확정된다.

遂州.本高州地,南王府五帳放牧於此.在檀州西二百里,西北至上京一千里.戶五百.
또한 막힐부 치소인 유하현에 요나라는 한주를 두었다가 뒤에 세 번 이주하여서 결국 이수현으로 옮겨갔다.

韓州 東平軍下刺史 本 槀離國 舊治 柳河縣 高麗置 鄚頡府 都督 鄚頡二州 渤海因之。今廢。太宗置 三河、榆河二州。

聖宗 幷二州置。隸延昌宫,兵事属 北女直兵馬司。統縣一: 柳河縣。本渤海粤喜縣地,幷萬安縣置。

 

 

막주(莫州)

막힐부 막주성은 한가타에 위치하여 있다.

 

 

고주(高州)

막힐부 고주성은 고가에 위치하여 있다.

 

     

 

                                정리부와 안변부

 

 

정리부定理府

 

정주定州

정리부는 읍루고지로서 오루하奧婁河변에 있었고 오루하는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다. 挹婁故地為定理府,領定、潘二州

정주定州는 길림시 용담산성龍譚山城으로 추정한다.

 

 

반주潘州

반주潘州는 길림시 북쪽 오라고성烏拉古城으로 추정한다.

 

정리부도 대인수황제 때에 서쪽으로 옮겨졌다.

[대원일통지]에는 심양에 설치된 정리부 정주, 반주의 9현이 기록되었다.

정리현定理縣, 평구현平邱縣, 암성현巖城縣, 모미현慕美縣, 안이현安夷縣, 심수현瀋水縣, 안정현安定縣, 보산현保山縣,

능리현能利縣 등이었다.

 

요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정리부자사를 쫓아내서 신빈현에 두었다고도 한다.
심양시瀋陽市 북쪽 철령시와 경계인 의로고성懿路古城은 지금까지 역사책에 읍루고성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발해 후기에 새로 만든 정주는 심양시 신대자진 의로고성이다.

 

 

심주(瀋州)

발해 후기에 새로 만든 심주는 심양이다. 심양시 청나라 고궁의 동북에 낙교현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성곽을 없애

버렸다.
만주국 시대 지도를 참조하면 
아래와 같다.

 

 

안변부安邊府

 

경주瓊州

안변부安邊府는 안주安州, 경주瓊州 단 두 주가 있었다. 安邊府領安、瓊二州。

[한단고기-대진국본기]에서 발해 안변부安邊府는 장백長白의 동쪽이라 했다.

신라의 발해 공격 때에 천정군을 지나서 책성부, 즉 동경용원부로 닿았으므로 안변부는 한반도에 없다.

또한 안변부가 신라도新羅道나 일본도日本道가 아닌 것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백두산의 동북방에 안도현(安圖縣)이 있는데 그 동쪽에 경성鏡城 유적지가 있다.
따라서 안도현은 안변부의 경주성瓊州城으로 해서 생긴 이름이다.

길림성吉林省 안도현安圖縣 오호산산성五虎山山城이 경주성의 배경이 된다.

 

 

 

안주安州

안주安州는 그 남쪽 화룡현和龍縣 서고성西古城으로 추정한다.

화룡현 등에서 발해 왕실 고분이 나오는 것은 고구려의 집안처럼 안전한 산곡에 왕릉을 안치했기 때문으로 고려된다. 


 

   

                        

          

                                            솔빈부와 동평부

 

솔빈부率賓府

 

화주華州

먼저 위치가 알려진 요나라 빈주를 보면 <송막기문>에서  상경으로부터 260리 서쪽이고 제주였던 농안으로부터 140리다.

특히 제주 동포(東浦)로부터 120리다. 오가자진 서쪽에 발해 고성으로 추정되는 빈주 터가 보인다.



제주동포로부터 항공거리가 57Km이고 상경 아성으로부터 항공거리가 123Km이다. 

길의 굴곡을 고려하면 거의 틀림없는 발해 빈주 위치다.

<신원사>에서 상경의 서쪽에 빈주가 있고, 또 서쪽에 황룡부가 있으며, 상경의 남쪽에는 건주가 있다.

(上京之南曰 建州, 西曰 濱州, 又西曰 黃龍府)

 

이 빈주는 본래 발해성이라고 하였는데 솔빈부성에서 솔자가 탈락한 것이다.

따라서 솔빈부성 위치가 발해 화주 위치가 된다.

賓州,懷化軍,節度.本渤海城.統和十七年,遷兀惹戶,置刺史于鴨子、混同二水之間

 

 

건주建州

상경 서쪽의 빈주가 오가점 부근일 때 남쪽으로 기록된 건주는 빈주보다 동쪽이 되는데 여러 물이 모이는 곳으로부터 50리

동쪽이므로 부여현성 동쪽이 된다.

[대원일통지]混同江 拔源 長白山  北流經 渤海 建州 西五十里 會諸水 東北流 經 上京 下達 五國頭城北 又 東北注 于海

부여현성 동쪽에 석두성자가 있는데 성지는 성둘레 약 1922m다. (413m X 548m) 이는 발해 건주의 일부로 고려된다.

 

 

익주益州

오가자진 서쪽에 증성增城이 있는데 증增성이나 익益성이나 같은 뜻이므로 발해 익주益州가 된다.

 

 

동평부 東平府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40만대군을 일으키고도 발해쪽으로 쉽게 오지 못한 것은 장령부, 동평부, 현덕부, 부여부가

강건하게 막아낸 때문이니 동평부는 본래 불열고지에 있었지만 대인수 황제 때에는 부신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불열고지는 본래 속말부의 북쪽 백출부의 동쪽이었다. 속말부가 길림이므로 백출부는 나림하 유역이 된다,

그 북쪽 아시하 부근이 아골타의 안차골부이다. 따라서 나림하 동쪽 목단강시 부근이 불열고지가 된다.

그 동쪽 우수리강 부근은 호실부가 된다. 백두산에 백산부가 있었고 흑수부는 하얼빈 서북이다. 

靺鞨,在高麗之北,邑落俱有酋長,不相總一。凡有七種:其一號粟末部,與高麗相接,勝兵數千,多驍武,每寇高麗中。

其二曰伯咄部,在粟末之北,勝兵七千。其三曰安車骨部,在伯咄東北。其四曰拂涅部,在伯咄東。其五曰號室部,在拂涅東。

其六曰黑水部,在安車骨西北。其七曰白山部,在粟末東南。勝兵並不過三千,而黑水部尤為勁健。自拂涅以東,矢皆石鏃,

即古之肅慎氏也

 

불열부拂涅府

불열고지에는 이주, 몽주, 타주, 흑주, 비주 등이 있었다. 拂涅故地為東平府,領伊、蒙、沱、黑、比五州。

불열부성은 발리현(勃利縣)으로 추정된다.

 

 

몽주蒙州

몽주는 흑룡강성 목릉시穆稜市로 추정된다.

 

 

타주陀州

타주는 미타호와 관련하여서 흥기호 북쪽의 밀산시密山市로 고려된다. 湄沱湖之鯽

 

 

북주北州

북주는 계서시(鷄西市) 북전(北甸)의 성산(城山)으로 추정한다.

 

 

흑주黑州

흑주는 호림현(虎林縣)으로 비정한다. 부근에 흑하가 있다.

 

 

발해 불열부의 배치는 아래와 같다.

 

 

 

동평부2

 

이주伊州2

요나라 요주 설명을 보면 요주는 시평군이다 당태종이 함락한 요동성이다.

요나라 태조가 915년에 발해를 치기 전에 먼저 깨트린 곳이 동평부이다. 이,몽,타.흑,북 5주와 18현가 있었다.

태조가 요주로 만들고 동평군이라고 했다가(915년) 이들을 918년에 요양으로 옮겨서 요양고성(요양시)으로 나가게 한

뒤에 요양시를 다시 동평군이라고 했고(918년),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에 본래 요주 자리에는 태종이 요주시평군을 두었다. 
요하와 양장하, 추자하, 사산, 랑산, 한산, 건자산 등이 있고 요주에는 요빈현과 안정현이 있다.

遼州,始平軍,下,節度。本拂涅國城,渤海為東平府。
唐太宗親征高麗,李世積拔遼城;高宗詔程振、蘇定方討高麗,至新城,大破之;皆此地也。
太祖伐渤海,先破東平府,遷民實之。故東平府都督伊、蒙、陀、黑、北五州,共領縣十八,皆廢。
太祖改為州,軍日東平,太宗更為始平軍。有遼河、羊腸河、錐子河、蛇山、狼山、黑山、巾子山。隸長寧宮,

兵事屬北女直兵司馬。統州一、縣二:遼濱縣。安定縣。

요주의 현인 안정현은 대릉하 동쪽에서 발견되었다.

요나라 때 요주遼州 안정현安定縣은 의현義縣 동쪽 대유수보진大楡樹堡鎭이었던 것이 [양원부인장씨묘비梁援夫人張氏墓碑]로 증명되었다.

이는 고구려 요동성 편에 자세하며 아래 거란지리도에 그 위치가 대략적으로 나타난다.


 

이주 위치는 부신시 이마도성이다. 구려왕 이이모가 지키던 성이다.

 

이마도 북쪽 이마도산이 고대 동평부 이리산, 즉 랑산狼山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이주伊州3

몽주 자몽현 기록과 관련된다. 본래 한 루방현이라고 했는데 루방현은 한사군 낙랑군의 패수가 나오는 곳이다. 

지금  조병산시다.
紫蒙縣。本漢鏤芳縣地。後拂涅國置東平府,領蒙州紫蒙縣。後徙遼城,並入黃嶺縣。渤海後為紫蒙縣。戶一千。
위 기록중에 보면 발해가 뒤에 자몽현이라고 부르기 전에 요성이 옮겨왔다고 하였다. 
즉 발해 후기 915년에 요동성이 요 태조에게 함락되어서 동평부가 신민시 요빈현으로 옮겨와서 요빈현이 된 것이다.
즉 발해 이주는 의무려산 서북쪽의 이마도에서 신민시 요빈현으로 915년에 후퇴하였다.


 

 

몽주蒙州3

몽주는 요나라가 기주를 두었다. 단주라고 하다가 기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단웅곡이 있던 구도평양성 위치다.
祺州,
聖軍,下,刺史。本渤海蒙州地。太祖以檀州俘於此建檀州,後更名。隸弘義宮,兵事屬北女直兵馬司。

統縣一: 慶雲縣。太祖俘密雲民,於此建密雲縣;後更名。

요나라 몽주 자몽현과도 관련된다. 본래 한 루방현이라고 했는데 루방현은 한사군 낙랑군의 패수가 나오는 곳이다. 
紫蒙縣。本漢鏤芳縣地。後拂涅國置東平府,領蒙州紫蒙縣。後徙遼城,並入黃嶺縣。渤海後為紫蒙縣。戶一千。
따라서 몽주는 동천왕의 구도 평양성 위치인 것이니 조병산시 북쪽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몽주성은 915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후퇴한 몽주다. 막힐부 뒤쪽이면서 서경 압록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몽주蒙州2

본래 발해 후기에 배치된 몽주는 자몽현으로 찾을 수 있다. 수나라 영주 12술에 자몽술이 있었다. 

또 선비족 모용외가 자몽지야에 살아왔었다.
慕容廆字弈洛,昌黎棘城鮮卑人也.其先有熊氏之苗裔,世居北夷,邑于紫蒙之野

따라서 본래 몽주 자몽현 위치는 부신서 서북쪽 자도대(紫都臺)가 된다. 그곳이 모란강에서 옮겨온 동평부 몽주 위치다.

 

타주陀州2
타주는 부신시 서북 경계인 내몽고 나만기 청룡산진의 동쪽성로 고려된다. 청룡산이 고대에 동평부 사산(蛇山)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흑주黑州

흑주黑州는 흑산(黑山)의 흑산구(黑山溝)로 고려된다. 부신시 서북이며 자도대 동북이다.


 

 

북주北州
북주는 부신시 서북의 부흥지로 고려된다.

 

 

동평부가 불열말갈지역에서 옮겨들어온 요서 지역 전체 지도는 아래와 같다.

 

             

              

  

                                철리부와 회원부

 

 

철리부鐵利府

 

철리부는 흑수말갈 지역이므로 흑룡강 북쪽이다.

흑수말갈의 서쪽에 있던 실위국의 위치 기록에 따르면 흑수말갈은 동강과 하바로프스크 지역이다.
광주, 분주, 포주, 해주, 의주(의란), 귀주 등 6주를 두었다.

鐵利故地為鐵利府,領 廣、汾、蒲、海、義、歸六州。

渤海王城 其北經 德理鎭 至 南黑水靺鞨 千里

발해 상경으로부터 1000리 거리는 바로 동강시 무원현(撫遠縣)인데 남흑수말갈이다.

[위서]에 의하면 곽린하를 지나 눈간을 지나 흑룡강에 실위국이 있다.
<위서> 失韋國,在勿吉北千里,去洛六千里。路出和龍北千餘里,入契丹國,又北行十日至啜水,又北行三日有蓋水,

又北行三日有犢了山,其山高大,周回三百餘里,又北行三日有大水名屈利(곽린하),又北行三日至刃水(눈강),

又北行五日到其國。有大水從北而來,廣四里余,

名穄水(흑룡강)。國土下濕。

 

 

다음은 [구당서]다. 오환국의 설명을 보면 후륜바얼 호에서부터 나오는 흑룡강에 대한 설명이 있다.

今亦自稱烏丸國。武德、貞觀中,亦遣使來朝貢。其北大山之北有大室韋部落,其部落傍望建河居。

그 흑룡강은 후륜바얼호에서 나온다.

꺽여서 동쪽으로 흐르고 실위의 서쪽 경계를 지나, 동쪽으로 대실위 경계를 지나 낙조실위의 남쪽을 지나 나하와 함게

동쪽으로 흐르고 홀한하와 합치고 동쪽으로 남흑수말갈의 북쪽과 북흑수말갈의 남쪽으로 지나 동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其河源出突厥東北界俱輪泊,屈曲東流,經西室韋界,又東經大室韋界,又東經蒙兀室韋之北,落俎室韋之南,又東流與那河、

忽汗河合,又東經南黑水靺鞨之北, 北黑水靺鞨之南,東流注於海

윗글에서 나하那河는 흑룡강의 동북쪽 가지이고 홀한하忽汗河는 송화강이다. 작은 목단강이 아니다.

나하를 송화강으로 보고 목단강을 홀한강으로 보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니 송화강을 나하라고 부른 적이 없다.

 

광주廣州

철리부 광주廣州는 고구려때 당산현(當山縣)이었다. 이는 지금의 탕원현(湯源縣)을 의미한다.

 

거란군이 올락국(兀諾國)을 칠 때 왔다가 여러달 머물다가 마침내 올약국까지 갔으나 실패하고 돌아간 곳이 철리성이다.
올락국은 오사성국이라고도 하고, 부유부 발해왕으로서 거란과 싸우다가 밀려나 981년 정안국에 망명했다.

그후, 철려와 함께 금나라로 속했다.

 

 

분주汾州

분주는 분노리국(盆奴里國)과 관련되는데 오국두성(발해 의주, 현재 의란현)에 속해 있던 오국 부족중의 일국인 박락국

(博諾國)의 별칭이다.

포노리국이라고도 한다. 포노리국 추장이 잡혀가서 망하여, 분노리국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분노는 고구려말이고 분나, 분의 땅을 의미하는데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곳이 바로 분주로 보여진다.
분주로부터 수빈현(綏賓縣)이 비롯되었다고 추정된다. 

분주의 동쪽은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곳인데 고려성이 남아 있다. 고려성하라고 하는 물도 있다.

고구려의 동북쪽 끝이 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수빈현 동쪽에 3220m의 고성이 있다. 분주성으로 고려된다. 동북쪽의 고려성 등 고성들이 분노리국으로 추정된다.
奥里米城址平面略呈圆角长方形,周长约3220米.

北墙保存最完整,南墙、西墙、东墙保存状况较差。古城坐北朝南,城内地表起伏,

陶瓷残片遍布。在古城西北部已被考古人员挖掘出金代墓群,并出土了大量珍贵文物
중국에서는 동강시 동북쪽에서 발견된 근득리 고성을 올약고성으로 추정하
고 있다. 성둘레 1928m다.

 

 

포주浦州

포주는 포노리국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나라에게 정벌 당하고 망하여 분노리국(수빈현)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포노리국은 위치는 통하현으로 추정된다.
통하연 서쪽 분림하(차림하)가 본래 보림하였다. 따라서 그 위치상 포노리국이 있던 포주성으로 고려된다.

서쪽에도 부라온하가 있다.

 

 

해주海州

해주는 하바로프스크로 고려된다.

 

 

의주義州

의주는 의란현이다 후에 오국두성이 생겼다.

오국두성은 부아리국,분노리국, 오리미국, 월리독국, 월리길국 등 5국이다. 의란현은 월리길국지였다.

부아리국은 발해 포주로 고려되고 분노리국은 발해 빈주로 고려되며 오리미국은 정안국으로 고려된다. 

五國頭城亦稱五國城,屬遼代五國部之一--越裡吉治所。位於依蘭縣城北門外,松花江南岸,西瀕牡丹江,東傍倭肯河,

東(倭肯哈達山)西(拉哈福山)兩山夾峙,素有"松花江門戶"之稱。公元10世紀,

分布在依蘭以下松花江和黑龍江沿岸的"生女真人"形成著名的五大部族(即剖阿裡、盆奴裡、奧裡米、越裡篤、越裡吉),

通稱五國部。

越裡吉部駐地為今依蘭縣城,又為五國部盟城,故稱五國頭城。五國頭城為遼代軍事重鎮。古城原為長方形,東西牆長850米,

南北牆長450米。經過近千年變化,僅殘存部分殘垣斷壁,城門、馬面已蕩然無存。

金天會五年(1127)金軍攻佔北宋都城汴梁(今開封市),徽、欽二帝被擄,與皇親國戚470餘人曾囚禁於此。

 

 

 

귀주歸州

귀주는 혼동강과 우수리강이 만나는 무원현(撫遠縣)으로 추정된다.

올라국이 눈강으로부터 정안국에 옮겨 들어와서 존재했을 때의 2차 올라국으로 고려되는 곳이다.
귀주는 발해가 망하자 요나라가 접수해서 관찰사를 두었다가 곧 폐지했을 만큼 요나라와 먼 곳이다.

훗날 오사국이 정안국에 들어와서 자리잡은 곳이고 그로 인하여 우수리강이라는 이름을 만들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정안국(928~1004)

발해가 멸망한 뒤에 일어난 후속국으로서 열만화가 970년에 연호를 쓰면서 송나라와 교섭하고 거란을 치려고 하였다.  

뒤에는 오현명이라는 왕이 있었다. 모두 황제를 칭한 것이다. 뒷날에는 오리미국이라는 이름으로 거란에 공물을 보냈다.

그 위치는 필자가 최초로 쌍압산(雙鴨山)으로 밝힌다.

오리미는 우리말로 오리산이고 이것이 압산이 된 것이다. 남쪽에 정국산은 정안국산이라는 뜻이다.

 

 

 

오사성 발해부유국(934~1004)

오사성 발해부유국은 올락국이라고도 한다.

송나라와 외교하며 거란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정안국 동북쪽으로 이주했으며 뒤에 금나라에 투항했다.

그위치는 우수리강 근처로 고려된다.

발해 회원부 부주성(금나라 포여로)에서 건국하여서 우수리강가 발해 귀주로 옮겨간 것이다.

 

 

 

회원부懷遠府

 

회원부는 월희고지라 하였다. 달주, 월주, 회주, 기주, 부주, 미주, 복주, 사주, 지주 등 9주가 있었다.

越喜故地為懷遠府,領達、越、懷、紀、富、美、福、邪、芝九州

 

 

월희의 어원은 위나라 때 오락후다. 동쪽에는 말갈, 서쪽에는 돌궐, 남쪽으로는 거란, 북쪽으로는 오환이 있었다.
烏羅渾國,蓋後魏之烏洛侯也,今亦謂之烏羅護,其國在京師東北六千三百裡,東與靺鞨,西與突厥,南與契丹,北與烏丸接。

風俗與靺鞨同。貞觀六年,其君長遣使獻貂皮焉

 

달주達州

월량포(月亮泡)는 월희 땅을 의미하는데 그 동남쪽에 대안시(大安市) 달라이진(大賚鎭)이 있고 그 동남쪽 팔랑진

(八郞鎭)에 타호성(塔虎城)이 있다.
바로 월희고지 회원부의 달주다. 1300m x 1300m 규모로서 성둘레가 5200다. 요나라 출하점(出河占)으로 고려된다.

 

 

월주越州

월주는 대안시 북쪽, 월량포 동쪽의 오란얼기(烏蘭爾基)로 추정한다.

월량포가 월라(月羅)를 의미하고, 월의 ㄹ 받침 발음이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주懷州

회주는 하얼빈시 북쪽 난서현(蘭西縣)의 하오지성(郝家城)으로 추정한다.

 

 

기주紀州

기주는 금나라 조주 동쪽 팔리성으로 추정된다. 한변이 1000m로서 성둘레가 4000m다.

 

 

지주芝州

지주는 제제하얼齊齊哈爾로 고려된다. 동쪽 장구(長溝) 성이 있다.

 

 

부주富州

부주는 포여로浦與路 고성으로 추정된다.

[포여로 관인]이 보천진(寶泉鎭) 서남 토성에서 발굴되었고 약 3000m둘레의 토성이다.

그러나 발해 부주는 보천시로 고려된다. 서북에 산성이 있다.

발해 유민이 세운 오사성 부유부 발해국이 세운 최초의 올약성으로 고려된다.

 


복주福州

복주는 조남시 성사가자고성으로 고려한다.

고주몽이 도망친 금와왕의 부여다. 금와왕의 아들 대소의 부여성은 발해 부여부성으로 고려된다. 

성사가자 고성은 성둘레가 5748m이다.(1175 x 1340)

 

 

미주美州

미주는 태뢰현 탑자성진 탑자성으로 추정한다.

다른 여타 성들과 달리 강과 떨어진 산 중에 있다. 성둘레는 5000m이다.

 

 

사주邪州

사주는 안달시 용산 아래로 추정한다. 명나라 때 안달진이 있었다.

 

                         

  

                                        안원부와 독주주

 

안원부安遠府

 

안원부는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가 있었다. 安遠府領 寧、郿、慕、常四州

 

영주寧州  

영고탑은 발해 안원부安遠府 부주府州인 영주寧州였다.

해모수 북부여시대에 영주가 북막 추장에게 약탈당한 적이 있다.

마지막 단제 고열가는 영품리왕寧稟離王(단기고사에서는 고열가 단군의 시호였다.)으로 격하되었다.
영품리왕의 시비가 동명왕을 낳았다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있다.

또한 졸본부여의 고두막한 동명왕은 고열가의 후손이라는 설이 [한단고기]에 있다.
<후한서> 부여전에서는 색리왕의 시비가 낳은 아들이 동명왕인데 도망쳐서 부여에 가서 왕이 되었다.

 

모주慕州

모주는 송막도독부로 고려된다. 모화현, 숭평현 등이 있었는데 이는 송막도독부의 흔적으로 고려된다.

적봉시 서남쪽에 있었다.

 

 

모주慕州 2

모주는 영주보다 더 성장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뒤에 해족과 거란족의 발호로 안원부가 오래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였는데 <요사지리지>에 녹주 서북 200리로 기록되었다. 

이는 거리상으로 쌍료현 쌍산진 위치다.
안원부가 거란에 넘어간 뒤에 동쪽으로 옮겨온 안원부 모주만이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慕州 淥州 西北 200里, 慕化縣 崇平縣

 

 

상주常州
상주는 적봉시 동쪽 청구성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청구성 동부인 건창진(建昌鎭)으로 고려한다.

 

미주郿州

미주는 옹우특기현 동북으로서 시라무렌강과 노로아호하가 만나는 지점의 삼각 지대 마련타영자馬蓮營子에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그 위에는 오주목하가 흘러내려오는데 대무예황제 때에 오주목에서 제사하였다고 하였다.   

 

 

독주주獨奏州

독주주는 왕실의 식읍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영,동,속 삼주가 있었는데 속주는 속말강에 있다고 하였다.

又郢、銅、涑三州為獨奏州。涑州以其近涑沫江,蓋所謂粟末水也。


속주涑州

속주는 길림시 남쪽 화전현華甸縣 소밀성이다. 속말이 소밀로 변한 것이다.

 

 

영주郢州

영주는 <요사>에서 북여직병마사에 속하였다. 郢州,彰聖軍,刺史。渤海置。兵事隸北女直兵馬司。統縣一: 延慶縣。

위치는 연경현延慶縣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산상왕 연우의 수도 환도성(법고시 자은사)이 연경현으로 고려된다.
발해 환주는 노로아호하에 있다가 나중에 들어왔고, 본래 조병산시 구도 평양성이 영주郢州였던 것으로 고려되며, 

그리하여 요나라 안주를 거쳐서 금나라 영안현(榮安縣)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고려된다.  즉 발해 영주는 구도 평양성이다.

이는 중천왕편에 자세하다.

 

 

동주銅州

동주는 본래 발해가 설치한 것이다.
銅州,廣利軍,刺史。渤海置。兵事隸北兵馬司。統縣一: 析木縣。本漢望平縣地,渤海為花山縣。初隸東京,後來屬。

요나라가 발해 동주를 현재의 석목현 자리로 옮긴 것이다. 옮겨온 동주는 지금 대석교시 진미산성이다.

본래 발해 동주銅州는 [송막기문]에서 함주 남쪽 40리에 있으니 현재의 중고진中固鎭이다. 

그래서 북여직병마사에 속한 것이다.
발해 동주를 대석교시로 옮기고서 그 자리에 요나라는 다시 동주(同州)를 설치했다.

뒤에 요나라 태종 때에 장춘시 홀한성을 요양시로 옮겨오면서 발해 동주를 대석교시로 옮겼지만, 옮겨간 후에도 그 자리를

계속 동주라고 불렀으므로 금나라 때 기록인 [송막기문]에 본래 동주 위치가 전해진 것이다.

중고진 동북에 대백묘자가 있다. 발해 왕묘일 수 있다. 대무예황제는 서경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데백묘자 부근에 발해 동주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경우에는 표시된 고성터가 요나라 동주(同州)가 된다.

 

요나라는 발해 동주를 대석교시로 옮기고, 동시에 그 자리에 또 한나라 망평현이자 발해 화산현 사람들을 옮겨서 석목현을

설치해 놓았다. 

 

본래 한나라 망평현은 압록강이 서남쪽으로 굴절되는 곳에 있었고, 바로 현재 북진시北鎭市 흑산현黑山縣 위치다.
현재 흑산현이라는 이름은 발해 화산현에서 유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한나라 망평현 위치에 요나라가 설치한 것은 현주의 산동현(山東縣)이다. 山東縣。本漢望平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