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한국고대역사문화

추모왕과 고구려 역사

설레임의 하루 2011. 10. 12. 05:18

*출처:한국고대역사문화지도

 한국고대역사문화지도의 홈페이지입니다.http://daangoon.pe.kr/

 

 

 

 

 

천오백년만에 다시 찾은 고구려 산하

명나라 초기 압록강 그림...

 

위에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가 보이는데 이는 [신당서지리지]<도리기>에 나오는 압록강앞의 섬들이다.
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 鴨綠江唐恩浦口

章潢(1527一1608年),圖書編 권 57.
沙門島解宋寨界 單山縣界 桑島馬停寨界 龜島昌邑縣界 歆末島光界
都里鎭蒲臺界 靑島利津界 黃島州界 直沽口寶低縣界 塔山盧龍衛寨界
南半洋山爲昌黎 縣界 計一千二百里,

抵遼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 蔬萊島中前所界  牛車島中後所界 孤山中右所界 向陽島羅兒島 金州衛界
石灘島左所界東雲島 黃駝島蓋州衛界 屛風山復州衛界 鳳凰山中左所界 女兒河中屯衛屯衛界
遼河渡古寺島爲廣寧衛界 麻田島平島爲海州衛界
湯站堡鎭遼所界 臨江義州界計一千三百餘里鴨綠朝鮮界

여아하는 중둔위와 우둔위의 경계이고
요하도와 고사도는 우둔위와 광녕위 경계이고
(우둔위는 대릉하와 고릉하 사이에 있었다. 고릉하는 대릉하와 압록강이 만나던 곳이다.

즉 요동군 방현의 위치)
즉 요하도는 대릉하에 있는 것이다. 수양제의 도요진도 그러했다.
마전도는 광녕위와 해주위계가 되는 것이다.


 

 

 

클릭하면 원글를 보실수 잇습니다.

 

1.추모왕 홀본성시대  

  

2.유리왕 국내성시대 

   

3.대무신왕시대  

  

4.태조대왕시대  

  

5.차대왕 현도성시대  

 

6.산상왕 환도성시대

    

7.중천왕 평양성시대 

   

8.고국원 왕황성시대

    

9.광개토왕시대  

  

10.장수왕시대 

   

11.평원왕 장안성시대 

  

12.보장왕 대당전시대

  

13.보장왕2

 

 

1. 추모왕 고주몽 홀본성 시대bc58~ad14

 

추모왕鄒牟王 고주몽 高朱蒙은 북부여단군 해모수의 둘째아들인 고리군왕 고진의 손자인 옥저후 불리지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柳花夫人 사이에서 bc79년에 낳은 아들이라고도 한다.

동부여왕 해부루는 bc79년경에 옥저를 쳐서 옥저후 불리지 고모수의 부인인 유화부인을 뺏아간 것이다.

불리지 고모수는 한무제의 침략으로 관직을 받아 한대산 환도성에서 불리지(弗離支), 또는 불리한지弗離汗支 라고 하였을

것이다.

뒷날 환도성을 불내성이라 부른 연원이 된다.

또한 한나라가 처음 세운 현도군의 위치가 낙랑군 옥저성인데 바로 이 환도산으로 고려된다.

 

 

또한 동부여왕 해부루는 bc77년 곤연鯤淵에서 제사 지내고 금와왕을 얻었다.

곤연은 천지天池의 다른 말로서 환인시대 천산이었던 사이한산에 제사지낸 것이다.

금와는 피부색이 밝고 눈이 개구리처럼 큰 서양인의 모습을 하였고 이는 금와왕의 모후가 중앙아시아로부터 곤연鯤淵에

들어와 살던 서양 여자였다고 추정하게 한다.

유화부인은 부여에서 태후太后의 예로서 장사를 지내고 신묘를 세웠으므로 금와왕의 모후일 것이다.

유화부인은 본래 하백녀의 딸이라고 하였는데, 하백이 서요하 서쪽 달라이 호수 부근에 있던 호족으로서, 하백이

중앙아시아에서 얻은 부인이 서양계 여인이어서 하백의 딸 유화부인도 역시 서양인 모습의 혼혈이었을 수 있으며 키가

커서 유화부인이라고 했을 수 있다.

동부여에서 죽은 유화부인의 신묘가 통유현通楡縣의 전장포氈匠鋪에 있는 한묘漢墓로 추정된다.

각종 금은 장신구와 3명의 시비, 그리고 동물을 순장하였다.

유화부인은 먼저 고주몽을 낳았으니 이는 불리지의 아들이고, 다시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을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주몽도 활을  잘 쏘아서 주몽이 아니라 얼굴이 남달리 붉은 피부색이라서 주몽일 수 있다.

 

<한단고기>에서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bc58년에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천 졸본부여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가 22살이다. 

bc 59년 고두막한 동명왕의 사후에 태자 고무서高無胥가 졸본부여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bc58년 고무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순시하고 죽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영고탑으로

졸본부여를 천도한 것이다.

고무서라는 이름 자체가 [사위 없음]이라는 뜻의 무서無壻였다. 즉 사위가 되어 단군 제위를 계승한 일이 없었다.

 

<후한서/부여전>에서 색리국에서 시비의 아들이 부여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은 고주몽이 금와왕의 동부여에서 

도망쳐서 처음 도착한 곳이 졸본부여였다는 방증이다.  

금와왕의 동부여가 색리국으로 기록된 것인데 이는 동부여의 당시 위치로서 실위 지역을 의미한다.

색리는 이두로서 우리말 쇠(鐵)를 의미하니, 즉 금왕金王이다.

그러나 <광개토왕 비문>에는 이 졸본부여 기록이 없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추모왕은 오로지 비류수 홀본서성에서 왕이 되고, 홀본동강에서 승천한다.

즉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이 된 것은 홀본성으로 보아야 옳다.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홀본성은 비류수에 있다.
<요사지리지>에서 고구려고국 졸본성인 압록부 신주에서 380리 서북에 비류왕고지 비류군沸流郡이 있었다.

이는 내몽고內蒙古 통료시通遼市 과얼심좌익후기현科爾沁左翼後旗縣 치소인 감기하甘旗下가 된다.  

 

그 아래에 비류수가 발원하는 것인데 오늘날의 양식목하로 고려된다.

거류하진이 있어서 예전에는 압록수와 마찬가지로 구려하라고 불렀던 것이 된다.

또한 비류수는 현도군 압록강의 동쪽이면서 환도성의 서쪽에 위치하게 된다.

 

 

 

 

bc37년 고주몽은 비류수 홀본에서 산성을 지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bc36년 비류국 송양을 쳐서 다물도로 삼았다.

bc34년 궁성을 지었다.

bc32년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 이때 궁성이 완공되고 신작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던지 뒤에 홀본성의

앞뒤로 전신추, 후신추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겨울 10월에 대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고주몽이 빼앗은 행인국은 요원시
遼源市 남부다.

석역진石驛鎭 채람산彩嵐山에서 고구려 초기의 화려한 황금장식, 금동장식 유물이 나왔다. 

요원시는 청동모와 비파형 청동검 등이 발굴되었던 곳이다.

석역진의 주요 유적지인 彩嵐山은 행인산의 행荇이 채菜로 변한 것이다. 행채荇菜가 흔한 말이다. 

이 채람산 북쪽에 북행산北杏山이 있는데 그곳에는 성인둔城仁屯에 성인둔 고성이 남아있다.  

따라서 채람산이 본래 남행산南杏山, 또는 남행인산南荇人山이었을 것이다.

행인국이 대백산 동남쪽이라 하였으므로 대백산은 지금의 오룡산(烏龍山, 620m)이 된다. 


bc28년 겨울 11월에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북옥저는 동천왕 때에 길림성 매하구시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고주몽이 밀어낸 본래 북옥저 위치는 무순시 청원현으로 고려된다.

청원현 안에 남산성이 있는데 이는 송화강 수계다. 청원현은 마리홍산에서 혼하도 발원한다.

마리홍산의 마리는 고주몽의 신하 이름에도 있다.

 

bc19년 여름 4월에 유리왕(類利)이 부여로부터 쳐들어와서 고주몽은 홀본성을 빼앗기고 동쪽 졸본성으로 후퇴하여

이후로 황룡국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리왕은 고주몽의 아들이 아니라 영고탑으로 옮겨간 졸본부여왕인 고모수로 비롯되는 구려계 후손으로 고려된다.

 

 

한편 홀본성에서 상장군 연타발延佗潑의 딸 소서노와 고주몽은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얻었다. 

bc30년경에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요녕성 해성시로 옮겨가서 어하라국을 세웠다.

이후 온조가 다시 분가하여 bc18년 온조가 대동강에 옮겨가서 백제를 건국하였다.

비류의 후손은 광무제의 침입으로 파저강의 환인현으로 옮겨갔고 다시 고구려 태조대왕의 정벌로 대동강으로 북쪽

미추홀로 옮겨갔다.

졸본성에 옮겨온 고주몽의 도읍은 후에 그의 아들 대무신왕이 이어받았다.  
졸본성 시대의 고구려 유물은 서풍현西豊縣 낙선향樂善鄕 서분구西岔溝에서 발굴된 철검 70여개의 고분군이며 대부분

고구려 초기 고분이다.

처음 낙선향 서분구 고분군이 발견되었을 때 중국학계는 흉노 고분이라고 발표했다.

흉노의 자랑인 금속예술 스키타이 청동 장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신라까지도 스키타이 문화가 전해지는 중간 지점 고구려 수도였다.

스키타이 양식 문화는 그리스가 아니라 내몽고 서요하西遼河 상류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묘제는 토갱수혈묘였다.

 

 

 

                                     

철령시 서풍현 낙선향의 고구려 초기 고분에서 나오는 70개의 철검 일부

 


고구려 초기 스키타이 양식 동패식

 

<참고>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고주몽의 도읍 눌현訥見은 상춘常春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전해왔다.

[대변경大邊經]에서 대부여조선의 수도 장당경藏唐京을 지금의 개원開原이라고 하며 “평양”이라고도 부른다고도 하였다.

[번한세가 하]에서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를 상춘常春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에 나타난 고주몽기는 아래와 같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이다.

앞서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蛙 <개구리는 또는 달팽이蝸라고도

한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에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鴨水)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습니다.”

부여왕 해부루는 동염왕 고두막한을 피하여 북방을 유목하다가 금와와 아란불을 만나 흡수당하고 금와의 세력이 동진한 

것이다. 태백산은 흥안령산맥 환인산 천지다.

부여왕 해부루를 이은 금와왕이나 아란불은 쇠의 색인 검은 피부를 가진 서남아시아 계 (스키타이족 유형) 민족일 것이다. 

주몽은 붉은 피부를 가진 북방족이다. 박혁거세도 부여계인데 눈강으로부터 동해로 피하여 신라에 이른 것이다.

곤연은 환인의 천지일 것이니 흥안령 산맥에 있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에 비취어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금와왕은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고 꾀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이것을 눈치채고 [주몽에게] 일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새로운 정복족 백인에 가까운 피부의 금와족은 금와족의 후손으로 왕을 이을 것인데 부여족의 후손인 붉은 피부의

고주몽이 달가울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갔다.

엄시수(水)<또는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압록강(鴨江) 동북쪽에 있다.>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족의 후손인 고주몽은 부여족의 도움으로 도망할 수 있었다.

당시 하백이 별주부와 같은 관직을 가졌을 수 있다.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
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비류수 홀승골 성이 광개토왕 비문의 비류곡 홀본서성이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靺鞨) 부락에 붙어 있어 침략과 도적질의 해를 당할 것을 염려해서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말갈의 본토가 지금의 요하 서쪽 유하 柳河변인 것이다.
왕은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 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사냥하며 찾아가서 비류국

(沸流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는 말하였다.

“과인(寡人)이 바다의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주몽은]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송양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노릇하였다. 땅이 좁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에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의 부하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왕은 그 말을 [듣고] 분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말다툼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재능을 겨루었는데, 송양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2년(서기전 36)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비류수 다물도는 통료시 과이심좌익후기 치소인 감기하다.

3년(서기전 35) 봄 3월에 황룡(黃龍)이 골령(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4년(서기전 34)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졸본부로 진입하여 졸본성을 세운 것이다.

6년(서기전 32)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행인국은 요원시 남부 석역진 채람산이다.

10년(서기전 28) 가을 9월에 난새[鸞]가 왕대(王臺)에 모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북옥저는 무순시撫順市 청원현淸原縣으로 고려된다.

14년(서기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유화부인의 신묘가 통유현通楡縣의 전장포氈匠鋪에 있는 한묘漢墓로 추정된다.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昇遐].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유리왕의 침입으로 홀본성을 빼앗기고, 고주몽은 동쪽으로 물러나 졸본성만 가지게 되었는데 황룡국이라고도 불렀다.

 

 

 

 

2. 유리왕 국내 위나암성 시대bc19~ad18

 

 

 

 

 

유리왕은 부여의 예씨부인 아들이다.

유리왕은 <광개토왕비문>에서 유류왕(儒留王)이라고 하였는데, 유儒는 [설문說文]에서 술사術士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유류왕孺留王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유자孺子는 적장자適長子를 의미하지만 <광개토왕비문>에서는

유儒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도흥치以道興治라고 하였으니, 유리왕은 도술道術을 알았던 것이다.
북부여의 마지막 단제인 고무서는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는 호풍환우呼風喚雨를 하였다.

따라서 유리왕은 고무서의 아들일 수도 있다.

<동천왕 묘지 벽비문>에 의하면 이 도술은 고구려 동천왕에게 이어진다.

동천왕의 모후가 주통촌(酒桶村)의 여인인데 주술呪術과 통通하는 무당 마을(呪通村)의 여인이고, 군사들도 못잡는 사나운

돼지를 여자 몸으로 앞서서 잡고, 군사들이 죽이러 쫓아와도 잡히지 않고 도망치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삼국사기>는 곳곳에서 부여와 동부여를 구분하였는데, 유리왕의 출신지 부여는 동부여가 아니라 졸본부여일 가능성이

높다.

그중에서도 졸본부여 고무서 단군이 영고탑에 옮겨간 뒤에, 영고탑 부여로부터 독자적인 출발을 한 것이 유리왕으로

생각된다. 그후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서  bc19년경에 고주몽의 홀본성을 탈취한 것이다.

이는 <후한서/동이전>에서 고구려와 구려가 각각 다른 나라처럼 기록된 이유가 된다.

또한 <후한서>에서는 고구려보다 구려로 역사 서술의 중심이 이동을 한다.

 

유리왕에 대한 <북위서北魏書>의 기록이 의미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처가 잉태하여 주몽이 도주한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자는 시려해始閭諧이다.

커서 주몽이 왕이 된 것을 알고 어미와 함께 도망왔다.

그후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고치고 국사를 맡았고 그해 주몽 사후에 여달이 대를 이었다.
朱蒙在夫餘時,妻懷孕,朱蒙逃後生一子,字始閭諧.及長,知朱蒙為國主,即與母亡而歸之,名之曰閭達,委之國事.

朱蒙死,閭達代立.閭達死,子如栗代立.如栗死,子莫來代立

 

<광개토왕 비문>에서 유류왕을 고명세자라고 하였다.

顧命世子 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乘基業

그러나 고대 역사에서는 아들 승계가 아닌 것을 아들 승계로 위장하는 일이 많이 있다.

왕권은 하늘이 내린 순수 혈통(=天孫)이라는 것을 내세워 민간의 왕권 도전을 막으려고 혈통을 위조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만세일계를 내세운 <일본서기>이다.
고주몽 말년에 칼을 가지고 찾아온 유리왕이 그즉시 국사를 맡아보고 고주몽이 곧 죽었다고 하는데 이는 고주몽의 아들일

수 없다.
또한 유리왕기에 나오는 황룡국왕이 바로 고주몽으로 보이므로 이는 더욱 확실하다.

그러나 유리왕을 고구려 주몽왕의 찬탈자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후손이 고구려 태조대왕이기 때문이고,

또한 고주몽을 말년의 실패자로 기억되지 않게 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유리왕의 자字 시려해始閭諧, 이름 여달閭達에서 그의 땅을 알 수 있다. 이는 여달閭達땅을 개척해서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

고대 지명으로는 여주閭州이다. <요사지리지>에서 여주閭州는 의무려산 부근에 있고 요주遼州 서쪽 130리다.

또한 서북으로 상경까지 950리다.
한편 순주
順州는 서북으로 상경까지 90리로서 여주보다 50리 서쪽이다.
閭州
.羅古王牧地,近醫巫閭山.在遼州西一百三十里,西北至上京九百五十里
順州
.本遼隊縣地.橫帳南王府俘掠燕、薊、順州
之民,建城居之.在顯州東北一百二十里,西北至上京九百里.

현주顯州는 요녕성 북진시北鎭市이고 요주遼州는 공주둔公州屯 요빈탑이므로 이를 근거로 두 성을 추적할 수 있다.

 

순주順州는 대략 부신시 창토진(蒼土鎭)이 된다. 고구려 창암성蒼岩城의 위치로 고려돤다.

한편 대파진(大巴鎭) 서쪽 반재탑촌에서 요나라 환주州 비석이 발굴되었다.
(이 환주는 요동군 동부도위치소였던 무차(武次)와 관련된다. 왕망은 환차(桓次)라고 하였다.)

려(閭)는 큰 고을의 입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중국으로부터 의무려산을 넘어오는 사잇 문이 된다.

 

 

요나라 환주 동쪽이며 려주의 서쪽 사이에 고대 성터가 보이는데 이곳이 여달(閭達)로 추정된다.
여달왕은 여달 출신이거나 여달을 개척한 왕을 의미한다.
분명한 것은 여달이 그의 초기 이름이므로, 고주몽의 비류수 홀본성을 탈취하기 전에 이미 의무려산 동쪽을 장악한

여달왕이었다.
유리왕은 고주몽의 사당을 세우지 않았다.
반면에 대무신왕이 즉위하자마자 고주몽의 사당을 세웠다.
이는 고주몽왕이 유리왕 생전에 살아있었다는 것이고, 유리왕과 여율왕은 고주몽의 후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대신에 고주몽 사당을 즉위 첫해에 세운 대무신왕이 고주몽의 진짜 아들인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주몽- 유리왕- 대무신왕으로 승계되는데 , <북위서>에서는 이와 다르다.
1)고주몽 2)여달왕(유리왕) 3)여율왕如栗 4)막래왕(대무신왕)으로 왕위 승계가 된다.

한편 <삼국사기>유리왕기와 대무신왕기에는 다음 기록이 의미가 있다.
유리왕 37년(서기 18)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은 애통해 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건지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찾아서 알리니,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頃)을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은 두곡으로 행차하였다. 겨울 10월에 두곡의 별궁에서 죽었다.

왕을 두곡의 동원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
<대무신왕기> 9년(서기 26) 겨울 10월에 왕은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으나,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땅을 점차 넓게 개척하였다.
즉, 대무신왕이 유리왕의 왕자 여진을 먼저 비류수에서 죽였고, 몇 년 뒤에 두곡의 유리왕까지 죽였는데 이를

개마국왕이라고 고쳐서 기록하였고, 유리왕의 뒤를 이은 구다국왕(구려국왕) 여율왕이 대무신왕에게 항복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한서>에서 개마에 대하여 현도군의 땅이고 평양성 서쪽이라고 주해하였다.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즉 백두산 일대가 아니다. 후한시대 평양은 지금의 법고시 동남쪽 조병산시다.

즉, 처음 현도군을 설치한 옥저현, 훗날의 낙랑군 동부도위 치소가 환도산이고, 그 서쪽이 개마대산이었던 것이다.

지금 무환지(務歡池=鶩歡池)라는 곳에 명나라 때에 웅산참熊山站이 설치되어 있었다. 

유리왕의 두곡(=콩곡)이자 곰산, 개마대산이 있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구다천국은 나만기 서쪽의 노합하老哈河 중류에 위치한 오한기敖漢旗 고로판호古魯板蒿 부근에서 “구택도狗澤都”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므로 이곳으로 고려된다.

교래하敎來河가 구다천국의 중심물이고 동쪽으로는 유하 상류, 서쪽으로는 노합하까지가 옛 구려 영역일 수 있다.

대무신왕이 죽인 개마국왕은 바로 두곡의 별궁에 있던 유리왕이다.
그후 여율왕자가 구려왕이 되었으나 두달 만에 대무신왕에게 항복한 것이다.

이 항복한 구려왕을 구다왕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유리왕 시대 삼국사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bc3년(서기전 17) 가을 7월에 양곡(凉谷)에 동·서 2궁을 지어 화희와 치희를 각각 살게 하였다.
이는 홀본성 남쪽의 양쪽 곡일 것으로 고려된다.

bc9년 유리왕은 선비를 정벌하였다.
bc6년 부여왕이 태자 도절을 인질로 요구하다가 부여왕 대소가 군사 5만으로 쳐들어왔으나 고구려가 막아냈다.
ad1년 태자 도절이 죽었다.
ad2년 국내 위나암으로 돼지가 도망하였다.
ad3년 국내 위나암으로 천도하였다.
위나암은 국내성 남쪽의 나한토那漢土로 고려된다. 이곳은 마자수 압록강과 당시 요수의 사이에 위치한다.

 


위나암성과 국내성 여달성 위치도

 


위나암성/ 중앙부 고지대가 내성이다.

 


위나암성은 나한토라는 마을 남쪽에 있다.

ad4년 해명을 태자로 삼았다.
ad8년 옛도읍의 해명이 황룡국왕과의 분쟁으로 죽었다.
창원槍原은 공주령시 이수현梨樹縣의 대창홀아하 大槍忽兒河로서 몽왕蒙王의 왕자가 죽은 전설이 현지에 남아있다.

이수현의 편검성이 대창홀 성이 된다. 해명의 후손이 고구려 4대 민중왕이 된 해우루일 것으로 추정된다.
ad10년 두곡豆谷에 별궁을 지었다.
위나암성 동쪽의 쌍성자雙城子로 고려된다. 동쪽의 집중集中이라는 곳이 두곡의 동원 유리왕릉으로 고려된다.

ad12년 한漢나라의 왕망王莽이 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구려인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였다.
왕망이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구려의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베었다고 하였다.

ad13년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ad14년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황룡국의 고주몽의 아들 대무신왕이 황룡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고주몽의 유신인 오이, 마리가 고주몽의 아들 대무신왕을 따라서 비류수 서쪽 양맥梁貊(柳河 서쪽 梁山)으로 진군하여

유리왕의 영토를 침범한 것이다.

고구려 현도군까지 차지한 것은 유리왕의 위나암성에 입성한 것이다.

ad18년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은 애통해 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찾아서 알리니,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頃)을 주었다.
비류수의 장수인 제수가 저항하는 유리왕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가을 7월에 왕은 두곡으로 행차하였다. 겨울 10월에 두곡의 별궁에서 죽었다.

[왕을] 두곡의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
유리왕이 위나암성에서 끌려나와 별궁에 있다가 죽은 것이다.

ad13년에 고주몽의 아들 대무신왕이 졸본에서 황룡국왕으로 즉위하여서 북쪽의 부여를 물리치고 ad14년에 유리왕을 치고

홀본성을 뺏은 것으로 보인다.
대무신왕은 고주몽의 유신인 오이, 마리 등과 함께 양맥을 쳤는데 이는 유리왕의 홀본성을 다시 빼앗은 것이 된다.
또한 대무신왕이 한나라 고구려현을 되찾은 것은 유리왕의 국내위나암성을 빼앗은 것과 같다.
이후 유리왕의 아들 여진과 유리왕이 차례로 죽고, 유리왕의 뒤를 이었던 구려왕 여율이 대무신왕에게 항복한 것이다.

 

<참고>

<수성왕의 천도교서 팔릉갈석>에는 유리왕이 비류에 정도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유리왕이 비류수 홀본성에 살았던 기록이 된다.

 

[수성왕 천도 교서 팔릉갈석 / 遂成王 遷都敎書 八稜碣石]

시조지손 일월지자 부여고읍의 계승자, 수성왕 10년, 동서남북수는, 현도를 다스리는 가영동백수로서 비류에 도읍했던

유리명제 축다(수성왕의 조부)를 계승하고, 안구태장세의 예악으로서 백제, 고구려왕은 민태국안하려던 천부의 시조

추모왕의 뜻을 대신한다.

백수(수성왕)는 수년 공을 들여 현도군에 국도를 세운다.

始祖之孫日月之子 承故夫余故邑 遂成王十年 東西南北殊

明帝 逐多 假寧東百殊司吏玄菟 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殊 代天府 繼祖 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年功 建國都 玄菟郡 紒継...
<삼국사기>에서 유리왕을 유리명왕이라고 하였으니 명제는 유리왕이다.

 

                                  

 

 

3. 대무신왕 홀본성 시대ad18~ad44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서기 14)에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유리왕이 재위 37년에 죽자 이 때에 이르러 태자가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송(松)씨로서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대무신왕의 이름인 주류왕朱留王은 곧 주몽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서기 14년경에 고주몽이 황룡성에서 죽어 그 뒤를 이어서 고구려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서기 18년에 유리왕을 물리치고 

구려의 왕까지 된 것이다.
유리왕 3년만에 죽은 송비의 아들 대무신왕이, 유리왕 33년에 겨우 11살로 태자가 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기록

자체가 모순이다.

3년(서기 20) 봄 3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가을 9월에 왕은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 거루라고 이름하였다.
비류수에서 전사하여 죽은 유리왕의 아들 여진 왕자를 묻은 곳이 왕골령인데, 이는 비류수 홀본성과 관련된다.
골구천은 지금의 거류하巨流河(신민시 유하, 고대 마자수 압록강 하류)로 고려되므로, 이 기사의 골구천 사냥이 대무신왕에

의한 유리왕의 홀본성 비류수 하류 습격이다.

4년(서기 21)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어 일군(一軍)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였다.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께서 찾았으니 솥을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요!” 왕은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리므로,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여,

금도장과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은 “하늘이 준 것이다.” 하고 절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9척쯤이고 얼굴은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에게 절하며 말하였다.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은밀히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 하니, 신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기를 청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으로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왕은 또 허락하였다.

5년(서기 22) 봄 2월에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은 이때 괴유에게 지시하였다.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지르며 공격하니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하늘을 향하여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사잇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빠져 나왔다.

이때 골구천의 신비로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먹을 것을 주었다.

왕은 서울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위 기록에서 대무신왕이 고주몽의 졸본성으로부터 비류수를 지나 부여국을 치러가는데, 이는 서쪽으로가는 서정이며

북쪽에 있는 대소의 부여를 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태조대왕 때 이 부여가 그대로 있으니 대소의 부여가 과연 멸망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대무신왕은 유리왕의 아들 여진如津진이 지키던 부여를 친 것으로 고려된다. 

[유리왕기]에서 여진의 시체는 비류수에서 찾았다. 이는 비류수 중류와 북쪽에 대한 전투인 것으로 보인다.

9년(서기 26) 겨울 10월에 왕은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으나,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땅을 점차 넓게 개척하였다.

대무신왕은 비류수 서쪽의 개마국을 쳐서 유리왕을 죽인 것이 된다. 

그후 구다국왕 여율도 항복한 것으로 고려된다.  이는 앞장에 자세하다.

 

 

11년(서기 28) 가을 7월에 한나라의 요동(遼東) 태수(太守)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거나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였다.

“신이 듣기를,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벌같이 일어나는데 명분없이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이것은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려 멋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므로 그 군대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험한 곳을 의지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깰 수 있습니다.” 좌보 을두지가 말하였다.

“작은 적은 강해도,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신은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의 군사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꾀로는 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은 “꾀로 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지금 한나라의 군사들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나가서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왕은 그렇게 여기고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다.

13년(서기 30) 가을 7월에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가 그 동생 위수(尉須) 및 사촌 동생 우도(于刀)와 함께 항복해

왔다.
대무신왕 때에 길림성의 매하구시에 있던 매구여가 항복해 온 것이다. 

뒤에 동천왕이 도망가는 북옥저의 매구여와 같은 곳이다. 

15년(서기 32)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냐?”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은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말하였다.

“만약 너의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으므로 명령을 내려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최씨 딸이 날 선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가죽면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찢고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치게 하였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았으므로 대비하지 않다가, 우리 군사가 갑자기 성 밑에 다다른 연후에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고 마침내 딸을 죽이고는 나와서 항복하였다.

여기서 옥저 지방 낙랑국은 대릉하의 조양시朝陽市로 고려된다. 조양시를 최씨가 대대로 다스렸다. 

또한 북위 때 만들어진 의주시義州市 만불당 석굴에 옥려의 서쪽이라고 쓰여져 있으므로 최리의 낙랑은 대릉하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월에 왕자 해우(解憂)를 태자로 삼았다. 사신을 한(漢)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 때가 건무(建武) 8년이었다.(서기 32년)
20년(서기 37) 왕은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이미 항복한 낙랑을 5년만에 다시 없애는 데, 이는 조양 지역에 고구려가 진출하여 성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리장성 안쪽 하북성 노룡현에 낙랑군이 설치되었고 이때 낙랑군 수성현은 장성이 시작되는 유관 부근에 있었다.

유관은 산해관보다 서쪽이다.

즉 최리의 낙랑국과 중국 후한의 낙랑군은 별개 위치고, 전한의 낙랑은 고구려 내지였다.

 

 

(그림 설명. 전국시대 연나라 요동군은 대릉하 하구, 한무제의 요동군은 양평, 그러나 이후 양평은 하북성 노룡현, 

공손탁의 요동국은 대릉하 북쪽으로 각각 고려됨...

대무신왕부터 신대왕까지 요동군은 하북성 노룡에 위치한 양평성에 있었으며, 공손탁 요동국 시대에 요동국이 확장되고,

당시에 위나라 요동군은 하북성 양평. 요동국 토벌 후에 서진의 요동군은 대릉하까지 왔으나 곧바로 선비족 전연국의

영토가 되어 요동군은 하북성으로 후퇴됨.) 

 

27년(서기 44) 가을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
후한의 광무제가 새로 빼앗은 낙랑의 위치는 살수 남쪽인데 이 살수는 산해관의 급수하急水河로 고려된다.  

이때 고구려가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모본왕의 북평 태원 공략은 불가능 할 것이다.

 

 

 

3 -2. 민중왕과 모본왕ad44~53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아우라 하였다.
민중왕(閔中王)은 이름이 해색주(解色朱)이고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대무신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어려서 정사를 맡아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겨울 11월에 크게 사면하였다.

4년(서기 47) 여름 4월에 왕은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7월에 또 사냥하다가 석굴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낼 것이며, 절대로 새로 능묘(陵墓)를 짓지 말라.”

 9월에 동해 사람 고주리(高朱利)가 고래를 바쳤는데 고래의 눈이 밤에 빛이 났다.
겨울 10월에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구(口)라고 하였다.>
5년(서기 48)에 왕이 죽었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유명(遺命)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민중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 환도성이 요나라 요하, 다른 말로 안민강또는 압록강 변에 있다.

이 안민강이 민중원과 관련될 것이다.
또한 요나라 안주, 금나라 영안현이 이 안민강과 관련될 것으로 고려하면  그 위차는 지금의 심양시 서북쪽 강평현

康平縣이다.(위 그림 참조)

민중원의 민이 물을 의미하므로 요하로 둘러싸인 육지 섬으로 고려한다.

따라서 강평현  북사가자향北四家子鄕 서북의 산악 사이 분지로 고려된다.

양쪽으로 요하의 물길이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고대 요하의 해주海州라는 지명과도 관련되는데 [요동지]에서 개원 서북 250리에 있던 요해遼海 부근이다. 

요해에 대한 설명은  애하와 접했다고 하였고 애하는 요원에서 흘러온 동요하를 가리킨다.

즉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는 곳 부근이 요해였다. 이 요해라는 지명 때문에 명나라는 개원시에 요해위를 두었었다.

모본왕(慕本王)은 이름이 해우<또는 해애루(解愛婁)라고도 하였다>이고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다.

민중왕이 죽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사람 됨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며 국사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북평, 어양, 상곡과 산서성의 태원 공격은 고구려의 서북지방에서 선비족 루트로 남하한 것이다.

이때 중국의 요동군은 만리장성 안으로 후퇴하고 만리장성 바로 바깥에 있는 수중현의 구려하(육주하와 산해관의 중간에

있음)까지 고구려가 진출했을 것으로 고려된다.

태조대왕 때 요서 10성을 쌓는데 이 구려하로부터 대릉하까지가 된다.

 

 

6년(서기 53) 겨울 11월에 두로(杜魯)가 임금을 죽였다.

두로는 모본 사람으로 왕의 좌우에서 시중하였는데 죽임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우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대장부가 왜 우느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쓰다듬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로다.’고 하였다.

지금 왕의 행함이 잔학하여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다. 네가 그를 죽여라.”

두로가 칼을 품고 왕 앞으로 나아가니 왕이 그를 눌러 끌어다 앉자, 이에 칼을 뽑아 왕을 죽였다.

마침내 모본원(慕本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모본왕이라고 하였다.

모본원의 본은 한으로 읽으면 물한이다. 현재 우리가 쓰는 말 모래네(몰안에-물한성)와 같은 말이다.

발해 동경이었던 영한현 동경성에서 물한주勿汗州 자사 관인이 나온 적이 있다.

물한주에서 모란강, 목단강시 이름이 유래되었다. 평양의 모란봉도 마찬가지다. 즉 홀본은 홀한, 모본은 물한의 어원이다.
발해 안원부 모주慕州와도 관련될 것으로 보이는데 발해 안원부에는 영주寧州,  미주, 상주, 모주 등이 있었고 모주는 

압록부 서북 200리였다.

즉 졸본성이었던 창도현 천주진泉州鎭에서 서북 200리 거리인 것이다.
안원부 위치는 영주寧州로서 금나라 영안현 위치로 고려하니 앞에서 본 민중원 부근이 된다.
한편 모주慕州는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는 쌍료현雙遼縣 서남 나목사那木斯로 고려된다.

목라木羅, 모본慕本에서 나목사가 유래되었을 것이다.
미주眉州는 호탄소목의 반월성으로 고려된다. 

상주常州는 과이심좌익후기 서남에 있는 상승진常勝鎭으로 고려된다. 

상주성常州城에서 상성진, 상승진이 유래되었을 것이다. (위 그림 참조)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4. 태조대왕 구려국 시대ad54~ad146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이름은 궁宮이다. 혹은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하였다.
태조대왕의 연호는 융무融武라고 알려졌다.

태조대왕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어머니 태후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사직을 주관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궁을 맞이하여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은 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남보다 뛰어났다.

즉위할 때 나이가 7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서기 53년 모본왕이 죽고 태조왕이 7세에 즉위하였다.

당시 부왕인 재사가 살아있었으나 왕위를 사양한 것으로 80년조에 나와있다.
初 慕本之薨也 太子不肖 群寮欲立王子再思 再思以老讓子者

태조대왕이나 국조대왕은 나라의 건국자를 가리킨다. 태조대왕 때에 고구려가 영토를 많이 넓혔다.

<후한서/동이전>에는 고구려 뿐아니라 구려국도 별개의 나라로서 소개되며 태조대왕은 바로 구려의 왕이었다.
 
<후한서/고구려전>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多大山深谷,

人隨而為居.少田業,力作不足以自資,故其俗節於飲食,而好修宮室.東夷相傳以為夫餘別種,故言語法則多同,而跪拜曳一腳,行步皆走.凡有五族,有消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一]本消奴部為王,稍微弱,後桂婁部代之.其置官,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二]主簿、優台、使者、帛衣先人.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三]使屬玄菟,賜鼓吹伎人.其俗淫,皆絜淨自,暮夜輒男女聚為倡樂.好祠鬼神、社稷、零星,[四]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大穴,

號禭神,亦以十月迎而祭之.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皆著幘,如冠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形如弁.

無牢獄,有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為奴婢.其昏姻皆就婦家,生子長大,然後將還,便稍營送終之具.金銀財幣盡於厚

葬,積石為封,亦種松柏.其人性凶急,有氣力,習戰,好寇鈔,沃沮、東濊皆屬焉.

<후한서/ 구려전>에 의하면 구려의 위치는 요동군 서안평현 북쪽이므로 소수가 소요수를 의미한다.
또한 현도군이 구려 서북에 설치되었으므로 현도군의 동남방이 된다.

이 구려는 환웅시대 사해문화의 후손인 구려-예맥족과 관련된다. 유리왕의 여달성이나 개마국 위치와도 관련된다.
<후한서/구려전>句驪一名貊(耳).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王莽初,發句驪兵以伐匈奴,其人不欲行,彊迫遣之,皆亡出塞為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戰死.莽令其將嚴尤擊之,

句驪侯騶入塞,斬之,傳首長安.莽大說,更名高句驪王為下句驪侯,於是貊人寇邊愈甚.建武八年,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塞.
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國人懷之,及長勇壯,數犯邊境.和帝元興元年春,復入遼東,寇略六縣,太守耿夔擊破之,斬其渠帥.安帝永初五年,宮遣使貢獻,求屬玄菟.元初五年,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城.建光元年春,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捕斬濊貊渠帥,獲兵馬財物.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遣使詐降;光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焚城郭,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夏,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沒於陳,死者百餘人.秋,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與州郡力討破之,斬首五百餘級.
是歲宮死,子遂成立
.姚光上言欲因其喪發兵擊之,議者皆以為可許.尚書陳忠曰:「宮前桀黠,光不能討,死而擊之,

非義也.宜遣弔問,因責讓前罪,赦不加誅,取其後善.」安帝從之.明年,遂成還漢生口,詣玄菟降.詔曰:「遂成等桀逆無狀,當斬斷葅醢,以示百姓,幸會赦令,乞罪請降.鮮卑、濊貊連年寇鈔,驅略小民,動以千數,而裁送數十百人,非向化之心也.自今已後,不與縣官戰而自以親附送生口者,皆與贖直,縑人四十匹,小口半之.
 
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置玄菟郡屯田六部.質、桓之閒,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一]掠得樂浪太守妻子.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數百級,伯固降服,乞屬玄菟云.

 

<후한서/ 부여전>은 고주몽신화를 적고 있다.

고주몽이 부여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졸본천의 졸본성을 차지한 것이다.
한편, 고주몽이 비류수의 최초 현도군 고구려 지방을 공략해서 다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세웠다. 

홀본성이라고도 했다.
<후한서>의 현도군 고구려라는 이름은 본래 해모수의 차자였던 고구려후 고진에서 비롯된다.

고우루 단군 때에 고진을 발탁하여 bc120년에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았는데, 이 고리군 위치는 서압록하(지금의 柳河)로서 창무시였다.
중국의 1차 현도군이 고두막한 동명왕의 공략으로 구려 서북으로 물러간 뒤에, 처음 현도군이 세워진 옥저현 자리는

환도성이 되었고, 현도군 고구려현 자리는 홀본성이었다. 홀본성은 바로 단군 왕검이 개국했던 곳이기도 하다.

<후한서>에서 구려왕추(鄒)가 처음으로 구려의 왕으로 소개되는데 <유리왕기>에는 연비(延飛)라고 하였다. 
왕망 때에 구려후 연비가 엄우에게 죽고 대신 유리왕의 아들 재사再思가 구려성을 지킨 것이 된다. 

대무신왕, 해우루왕, 모본왕 때에도 그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그후 재사의 아들 태조가 구려성의 북쪽인 국내위나암성으로 들어가서 고구려왕이 된 것이다.    

3년(서기 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에 나라의 남쪽에서 누리蝗가 곡식을 해쳤다.
여기서 요서 10성은 요서군이 있던 의주시 부근에서 산해관까지로 고려된다.

산해관과 수중현 육주하 사이에 구려하가 있었다. 이 구려하까지 구려가 진출했을 것이다.

4년(서기 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 살수까지 이르렀다.

<후한서>동옥저편에서 동옥저는 개마대산 동쪽에 있고 개마대산은 평양왕검성 서쪽이라고 하였다.
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 / 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후한서가 기록된 당시에 평양왕검성은 철령시 서쪽 조병산시에 있었고, 동옥저는 한반도 동해안이 될 수 없다.
대략 의무려산 동쪽 해안에 동옥저가 있었다고 고려된다.

동옥저의 창해는 의무려산 동쪽일 것이다. 

중국의 창해군은 천진시 남쪽에 있으니 황해바다가 창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의무려산 서쪽 의주시 만불당의 북위시대 석굴에서 옥려지서 沃黎之西라는 지명 설명이 남아있다. 

의무려산이 본래 옥려산이고 그 동쪽이 동옥저였을 것이다.

옥저에서 조기를 생산하여 중국 황실에 진상하였는데 조기가 발해만에서 알을 낳고 회귀한다.
뒤에 아리모려 묘지에서 보면 70년에 현재 압록강 지류인 파저강의 비류소국을 친다.

따라서 한반도 동해안 진출은 아직 생각할 수 없다.

태조대왕의 살수는 수중현 강녀분姜女墳 동쪽의 급수하急水河였을 것이다.

7년(서기 59) 여름 4월에 왕은 고안연孤岸淵에 가서 물고기를 구경하다가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낚아 잡았다.

가을 7월에 서울에 큰 물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다.
10년(서기 62) 가을 8월에 동쪽으로 사냥나가 흰 사슴을 잡았다. 나라의 남쪽에 누리가 날아 곡식을 해쳤다.

16년(서기 68) 가을 8월에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천둥이 쳤다.

여기서 <아리모려 묘지>를 본다.

先祖 隨王錚 於鴨綠水之上源 戰 於[爲]野 
선조는 왕을 따라 압록수 상원의 들에서 싸워 깨트리고
而破 人臣服 王威大赫 衆來賀[軗]王
인신이 왕에게 복종하여 무리가 왕의 수레를 끌어 사면받았다.
압록수 상원 전투는 마자수압록강(현재 유하柳河)와 달리 서요하로 고려되고 그중 신개하(新開河)라는 북쪽 가지와

관련되어 보인다.

<삼국사기>에서 갈사국 도두왕의 항복 기록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이므로 그 위치는 통료시 북쪽이 될 것이다.

서요하 과이심좌익중기현의 육가자향의 금은 유물이 갈사국 유물일 수도 있는데 이는 <해모수웅심산문화>에 그 유물이

있다.

赦 又庚午 盖馬國東 彈弩攻城 賊見大敗
경오년(서기 70년)에 개마국 동쪽에서 쇠활을 쏘아 공성하며 적을 만나 대패시켰다.
개마국은 현도군 서개마에서 쫓겨나서 다시 세운 개마국으로 고려되며 이는 적봉시 오한기진敖漢旗鎭의 살리파향

薩力把鄕에 위치한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으로 고려된다. 오한기에는 환나부가 있었다.

환나우태의 이름이 설유薛儒인데 오한기진 북쪽 살리파향에 성자산산성이 있다. 설유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 환나부 살리파향 성자산산성내 거북조각 거석

 

 

先祖 隨王 又戰 婆猪江上 沸流小國 再伐 荇人
선조는 왕을 따라 파저강상의 비류소국과 싸우고, 행인국을 다시 정벌하고 돌아왔다.
파저강은 압록강의 동북 가지로서 환인현을 지나는 강이다.

비류소국은 백제 온조왕의 형인 비류왕의 후손이 만든 소국으로 고려된다.
파저강의 서북 가지인 부이르강의 어원이다. 행인국은 요원시 남부에 있었다. 

파저강에서 귀환하는 길에 행인국을 정벌한 것이다.
 
國 來之 遣 貫那沛者 達賈 伐 藻那

관나패자 달가를 보내어 조나를 쳤다.(72년) 
田 自給 智慮淵深 傳至 十世子孫 承繼
스스로 갈고닦아 지혜가 깊고 십세손에 전해졌다.

위에 소개한 아리모려 비문을 보면 태조대왕의 정벌 과정을 알 수가 있는데 68년 서요하 상류 갈사국을 정복하고, 다시 

교려하의 개마국을 정벌하였다. 

개마국은 현도군 서개마에서 후퇴한 유리왕의 아들 여율의 후손이 항복해서 이어간 구택도로 고려한다. 

2차 개마국이다.
뒤이어서 70년에 압록강 상류의 파저강변 백제 비류소국을 깨트린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비류소국은 고구려 홀본성의 비류국과 구별하여 백제 비류왕자의 후손들을 비류소국이라고 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초기에 패대강 사이에 흉년으로 백제인이 고구려로 망명해 가는데 바로 이 지역으로부터 망명해간 것이다.

 

 

20년(서기 72) 봄 2월에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2년(서기 74) 겨울 10월에 왕은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주나는 온조 백제의 초기 동쪽 경계였던 주양朱壤과 관련되며, 지금의 압록강 강계군江界郡이다. 

고구려 고분 도시인 집안集安의 동편이다. 
강계에는 설렬한령薛列罕嶺이 남아있는데 고구려 환나부패자 설유薛儒의 흔적이거나 그의 후손이 남아서 강계를 다스린 

흔적이다.   
따라서 조나
藻那는 주나 이전이며 현재의 집안集安으로 고려된다.

25년(서기 77) 겨울 10월에 부여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은 상서로운 물건으로 여기고 크게 사면하였다. 11월에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46년(서기 98) 봄 3월에 왕은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는데, 책성의 서쪽 계산(~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와 더불어 잔치를 베풀어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왕은 책성으로부터 돌아왔다. 
50년(102)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책성 백성을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책성은 발해 용원부의 다른 이름이었으므로, 훈춘시琿春市로 고려되고 계산은 백두산일 것이다.

53년(105) 봄 정월에 부여의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 두 자나 되었고 털 색깔이 매우 밝았으나

꼬리가 없었다.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내어 막으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에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하였다.
여기서 부여는 유리왕의 출신지인 서쪽 부여다. 맥인貊人은 선비족, 부여족, 구려족 모두를 이르는 말이다.

소수맥에 옮겨와서 살던 유리왕의 후손인 구려인도 맥인이다.
태조왕의 모후나 유리왕의 모후인 예씨부인이 다 부여인인데, 서쪽 부여로서 노합하 부근의 구택이나 영고탑으로 고려된다. 

55년(107) 가을 9월에 왕은 질산質山 남쪽에서 사냥하여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동해곡東海谷의 관리가 붉은 표범을 바쳤는데 꼬리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다.
56년(108) 봄에 크게 가물었고, 여름이 되자 땅이 벌거숭이가 되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왕은 사신을 보내 진휼하였다.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을 축하하였다.
59년(111)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兎)에 복속하기를 구하였다.
통감(通鑑) 111년, 春 夫餘王 寇 樂浪。 高句驪王 宮與 濊貊 寇 玄菟。
111년 <삼국사기> 기록에 문제가 있다. 부여왕이 낙랑을 치고 고구려왕은 예맥을 거느리고 현도를 쳤다.
낙랑은 이때 만리장성 안쪽인 하북성 노룡 지역으로 후퇴해 있었을 것이고 부여가 그 동북쪽에서 공략한 것이 된다.
고구려는 동쪽에서 산해관에 후퇴해 있던 현도군을 공략한 것이다.
이때 현도군을 노룡-유성 지간이라고 하였는데, 유성은 산해관 동쪽 영주 유성이고 노룡은 하북성 노룡현이며 현도군은

대략 하북성 무녕현撫寧縣 위치가 된다.

 

 

62년(114) 봄 3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가을 8월에 왕은 남해를 순수하였다. 겨울 10월에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64년(116) 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고구려 최초의 일식 기록이다. 고구려에 사관史官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천문기록을 남긴 것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는 날자를 기록하지 않고 일식이 일어난 월만 기록했던 것으로 보이고 김부식이 중국 기록과 합치하면 

그 날자를 맞춘 것으로 본다.  
미국의 나사(NASA)의 계산에 의하면 일식의 실현은 아래와 같다.
0114 May 22 00:55 T 78 -0.266 1.075 4.7N 166.5E 75 253 07m05s.
114년 양력 5월22일 한국시간 9시55분에 개기일식이 동경166.5도에서 7분간 있었다.
0116 Mar 31 22:10 A 60 0.863 0.983 59.1N 177.7E 30 119 01m19s.  
116년 양력 3월 31일 한국시간 7시 10분에 금환일식이 동경 177.7도를 중심으로 1분간 있었다.

위 기록은 중국 기록과 차이가 있다. 당시 중국 기록은 아래와 같다.

元初元年(114년) 十月戊子朔,日有蝕之 在尾十度  

0114 Nov 15  06:04   A   83   0.572  0.915  16.1N  91.6E  55  394  11m53s
二年(115년)九月壬午晦,日有蝕之 在心四度
 0115 Nov 04  06:22   P   93   1.229  0.569  70.3N 122.0E   0 
三年(116년)三月二日辛亥,日有蝕之,在婁五度.史官不見,
遼東以聞

 0116 Mar 31  22:10   A   60   0.863  0.983  59.1N 177.7E  30  119  01m19s

四年(117년)二月乙巳朔,日有蝕之,在奎九度.史官不見,七郡以聞
 0117 Mar 21  02:24   A   70   0.129  0.945   6.7N 143.7E  83  205  06m58s
五年(118년)八月丙申朔,日有蝕之,在翼十八度.史官不見,張掖以聞
0118 Sep 03 09:25 T 85 0.528 1.037 38.8N 49.7E 58 145 03m02s

 

따라서 114년 봄 고구려 일식 기록이 중국에 없다.

또한 현재 천문학 지식으로는 당시의 일식이 마샬군도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에서 관찰할 수가 없다.

일단은 고구려 당시에 사관이 일식을 추산한 것으로 본다.
특이한 것은 116년 기록이 중국 대부분 지방에서는 관찰되지 않고 요동에서만 관측되었다는 것이다.
이 중국 기록에서 在婁五度라고 한 것은 루성婁星의 방위인 동쪽 지역에서 관측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한단고기 오성취루 기록도 단군시대 관측지에서 볼 때에 동방 하늘에 오성이 모였다가 아니라, 단군시대

기록지에서 볼 때에 동방 땅에 오성취루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전해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4년 일식은 고구려, 요동에서만 관측되고 증국에는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고구려 일식 기록의 의미는 수성왕의 혁명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남겨진 것이 된다.
그전의 일식이나 그후의 일식 기록이 매우 적은데, 이때는 수성왕의 혁명을 정당화 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66년(118)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6월에 왕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의 현도를 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후한서] 元初五年,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
[통감] 夏,六月,高句驪與濊貊寇玄菟。

예맥
은 맹우하의 소밀랑아사달과 교려하의 개마국 부근의 부족일 것이다.

가을 7월에 누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어질고 착한 사람과 효성이 있어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자 및 늙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69년(121) 봄에 한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왕은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은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것을 믿었다.

수성은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대현遼隊縣을 쳤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 용단龍端,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하여 막았으나 모두 진영에서 죽었으며, 이때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隋書/地理志》北平郡卢龍縣下云;“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卢龍

즉, 하북성 노룡이 본래 요동군 신창新昌이었다.
 <후한서> 建光元年春,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捕斬濊貊渠帥,獲兵馬財物.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遣使詐降;光等信之,遂成因據險以遮大軍,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焚城郭,

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夏,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

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沒於陳,死者百餘人

 

겨울 10월에 왕은 부여로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지내고, 백성으로 곤궁한 자들을 위문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숙신肅愼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과 흰 매, 흰 말을 바쳤다. 왕은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11월에 왕은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왕은 수성이 군무와 정사를 통괄하게 하였다.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수성왕은 121년 11월에 태조대왕의 정사를 모두 도맡았다.
그러나 이는 수성왕의 반란이었고 반란은 성공하였다. 

태조대왕의 고구려 절반을 갈라서 고구려 서부의 구려국을 장악한 것이다.   
이는 태조대왕의 출신 고향인 부여국과 수성왕 구려의 반목을 일으켰고, 
수성왕이 다음달 중국을 칠 때에 부여군대가 수성왕에 대적하여 가로막게 된다.

12월에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통감>에 의하면 선비군이 먼저 현도군을 치고 12월에 수성의 구려군이 마한, 예맥과 더불어 요동군을 쳤으나 부여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태조대왕이 쫓겨나고 수성왕이 즉위했다고 중국에서 기록하였다.

마한은 태조대왕이 정벌한 조나, 주나, 비류소국인들이었을 것이다.
[통감 121년] 冬,十一月,
鮮卑寇玄菟。十二月,高句驪王宮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

夫餘王遣子 尉仇台 將二萬餘人與州郡並力討破之。是歲,宮死,子遂成立。
[통감 122년] 秋,七月,
高句驪王遂成
還漢生口,詣玄菟降,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
70년(122)에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
여기서 고구려와 중국의 달력에서 한달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독자적인 책력을 사용한 것이다.

고구려는 태조대왕의 고구려와 수성왕의 구려 둘로 갈라졌다.
121년에 태조대왕은 국내성에서 고구려 졸본성으로 물러났다가, 고구려 왕위마저도 146년에 수성왕에게 다시 내주었다.
이때, 146년에 수성왕은 고구려왕위에 오르면서 대신에 구려왕위는 동생인 신대왕 백고에게 내주었다.

중국은 국경에서 구려왕만 상대하게 되므로 구려왕의 교체를 고구려왕의 교체로 잘못 알았을 것이다.
146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살대방령殺帶方領 기사는 중국 <후한서>나 <위지동이전>에서 모두 고구려 백고왕 때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는 태조대왕 94년 때의 일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보면 121년에 수성왕이 나라를 갈라

구려국을 세웠고, 146년에 수성왕이 고구려왕까지 되면서 재통일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132) 가을 7월에 수성은 왜산倭山에서 사냥하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
이때 관나우태 미유彌儒·, 환나우태 어지류, 비류나조의 양신陽神 등이 은밀히 수성에게 말하였다.
“이전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를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고 하여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가 잇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는데도 양보할 뜻이 없으니 당신은 헤아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성은 말하였다. “뒤를 잇는 것은 반드시 맏아들이 하는 것이 천하의 떳떳한 도리이다.

왕이 지금 비록 늙었으나 적자가 있으니 어찌 감히 엿보겠느냐?” 미유가 말하였다.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이 옛적에도 있었으니 당신은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로써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칭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86년(138) 봄 3월에 수성은 질양質陽에서 사냥하면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놀고 즐기는데 헤아림이 없었다.

가을 7월에 또 기구箕丘에서 사냥하고 5일 만에 돌아왔다. 그 아우 백고伯固가 간하였다.
“화복禍福에는 문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왕의 아우의 몸으로 모든 벼슬아치의 으뜸이 되어, 지위가 이미 지극하며 공로도 역시 큽니다.

마땅히 충의로써 마음을 지키고, 예절로써 사양하며 자신의 욕심을 이기고, 위로는 왕덕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부귀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재난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즐거움을 탐하여 근심거리를 잊고 있으니, 나는 은밀히 당신을 위하여 위험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수성은 대답하였다. “무릇 사람의 심정으로 누가 부귀하고도 환락하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것을 얻는 자는 만에

하나도 없다.

지금 내가 즐길 수 있는 형편에 있는데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 수성은 마침내 듣지 않았다.

90년(142) 가을 9월에 환도丸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왕이 밤에 꿈을 꾸는데 한 표범이 호랑이 꼬리를 깨물어 잘랐다. 깨어서 그 길흉 여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호랑이는 백수의 으뜸이고, 표범은 같은 종류의 작은 것입니다.

그 뜻은 왕족으로서 대왕의 후손을 끊으려고 음모하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왕은 불쾌하여 우보 고복장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본 것이 있었는데, 점치는 사람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고복장이 대답하였다.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길吉이 변하여 흉凶이 되고, 착한 일을 하면 재앙이 거꾸로 복이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집처럼 근심하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시니, 비록 작은 이변이 있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고복장은 태조대왕의 근신이었다.

그리고 태조대왕의 꿈은 수성왕이라는 표범이 태조대왕이라는 호랑이의 꼬리를 깨물었다는 것을 은유하였다.

 94년(146) 가을 7월에 수성은 왜산 밑에서 사냥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대왕이 늙도록 죽지 않고 내 나이도 장차 저물어 가니 기다릴 수 없다. 주위에서 나를 위하여 꾀를 내어라.” 주위사람들은

모두 “삼가 명을 좇겠습니다.”고 하였다. 이때 한 사람이 홀로 나아와 말하였다.

“저번에 왕자께서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실 때, 주위 사람들이 직간하지 못하고 모두 ‘삼가 좇겠습니다.’고 말하니 간사하고 아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직언을 하려고 하는데 높으신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수성은 말하기를 “그대가 직언을 할 수 있다면 약석藥石이 되는 것이니 어찌 의심을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지금 대왕께서 어질어서 서울과 지방에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은 비록 공이 있으나 무리 중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어진 임금을 폐하려 모의한다면, 이것은 한 가닥

실로 만균萬鈞의 무게를 매어서 거꾸로 끌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비록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왕자께서 의도와 생각을 바꾸어 효성과 순종으로 임금을 섬기면, 대왕께서 왕자의 착함을 깊이 알고 반드시 선양할

마음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수성은 기뻐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 곧음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언하였다.

“왕자께서는 대왕이 늙었기 때문에 임금의 지위가 위태로워질까 염려하여, 뒤를 이을 것을 도모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언하니 저희들은 비밀이 누설되어 화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죽여 입을 막아야 합니다.” 수성은 그 말을 좇았다.

(146년) 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 요동 공격 기사에 대한 중국 기록은 모두 신대왕 백고의 침략이었다.

<후한서/구려전> 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132),置玄菟郡屯田六部.質、

桓之閒(146년),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
 
<위지/동이전> 宮死 ,子伯固立 。 順桓之間 ,復犯遼東,寇新安、居鄉,又攻 西安平,於道上 殺帶方令 ,

略得 樂浪太守妻子.

따라서 146년 초에 수성왕이 국내성에서 스스로 차대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리고 태조대왕의 졸본성을 친 것이다. 대신에 국내성의 구려왕 지위는 신대왕 백고에게 양위한 것이다. 

겨울 10월에 우보 고복장이 왕에게 말하기를 “수성이 장차 반란을 일으킬 터이니 청컨대 먼저 죽이십시오.” 하니,

왕은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다.

수성이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나는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대는 번거롭게 걱정하지 말라.” 고복장이 말하였다.

“수성의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해, 오늘 대왕의 선양을 받으면 내일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풀 것은 알고, 무고한 자손에게 화가 미칠 것은 알지 못하십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십시오.” 12월에 왕은 수성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어 모든 정사政事에 싫증이 났다. 하늘의 운수는 너의 몸에 있다.

더욱이 너는 안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 군사軍事를 총괄하여 사직을 오래 보존한 공이 있고, 신하와 백성들의 소망을

채워 주었다.

내가 맡기는 이유는 사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니, 너는 왕위에 올라 영원히 신의를 얻어 경사를 누려라.”

그리고 왕은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태조대왕이라고 칭하였다.
태조대왕이 졸본성을 버리고 피난하였다가 이때서야 수성왕에게 국새를 넘기고 은거하였다고 고려된다.

<후한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 왕 궁이 죽어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현도태수 요광이 아뢰기를 ‘그들이 상喪 당한 것을 타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합니다.’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궁이 전날에 교활하게 굴 때에는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은 한나라의 산 포로를 돌려보냈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서기 53) 계사癸巳에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丙戌(146)에 이르러 친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으며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 그러므로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 적힌 것과 고기는 달라 서로 합치되지 않는다. 후한서의 틀린 것이 어찌 이와 같은가?>

김부식은 중국 기록과 고구려 기록이 다른 것을 무조건 <후한서>가 틀린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서부에 구려국이 따로 존재했던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후한서><위지동이전>에 이어서 <북사>에서도 태조대왕이 죽으니 아들 백고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위지동이전>처럼 수성이 빠져 있다.
<북사>...
號曰高句麗,因以高為氏.其在夫餘妻懷孕,朱蒙逃後,生子始閭諧.及長,知朱蒙為國王,即與母亡歸之.

名曰閭達,委之國事.朱蒙死,子如栗立.[四]如栗死,子莫來立,乃并夫餘...至殤、安之間,莫來裔孫,數寇遼東...宮死,

伯固立, 伯固死,子伊夷摸立.伊夷摸自伯固時,已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

焚燒邑落,降胡亦叛.伊夷摸更作新國.伊夷摸死,子位宮立.始位宮曾祖宮,生而目開能視,國人惡之.及長凶虐,

國以殘破.位宮玄孫 乙弗利頻寇遼東...
수성왕이 왕이 된 것은 <후한서>와 <통감>에 나오는데 그 시기가 121년이고, 백고가 왕이 된 것은 <후한서>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데 146년 이전이다. 모두 구려왕이 된 것이다.

대신에 고구려왕은 각각 태조대왕과 수성왕이었다.
146년에 태조대왕이 고구려왕에서 쫓겨나고, 수성왕이 동쪽 고구려왕이 되었으며, 동시에 신대왕 백고가 구려왕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