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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중국총독 순임금의 의문사 (7부)

설레임의 하루 2011. 9. 7. 22:33

*출처:역사복원신문  글쓴이-성훈컬럼니스트

                          

 

 

 

 

단군조선의 중국총독 순임금의 의문사 (7부)

순임금의 기록은 단군조선의 역사강역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
 
성훈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1/09/06 
본 글은 아래 (4부)와 (5부)와 관련 있는 글입니다.
(4부) 중국 삼황오제 요임금은 단군왕검에게 항복했다
(5부) 조선의 중국총독 순임금이 다스린 유주는 어디인가? 

(단군세기 원문) 2세 부루단군 재위 58년
“제순유우(帝舜有虞:순임금)가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주를 람국(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와 도라 등을 보내어 그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해설) 순임금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밝히는데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맹자가 <이루장구 하(離婁章句下)>에서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

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

(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순임금의 행적을 추적하면 동이족인 단군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순임금이 죽은 장소인 명조(鳴條)는 산서성 남부 운성시 부근으로 현재 당나라 때 조성한 순임금의 무덤이 있다.
(순제능: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88§ion=sc6§ion2= 참조 ) 
 

▲ 청나라 때 만든 지도인 <대청광여도> 산서성 남부에 그려져있는 명조(鳴條:원표시 상단)에는 실제 순임금의 무덤이 있다.    

© 역사복원신문

▲ 산서성 남부 운성시 염지 부근에 있는 순임금의 실제 무덤                                               © 역사복원신문

 
위 <단군세기>의 내용은 조선의 2세 부루단군이 중국총독이었던 군사를 보내 순임금을 정벌한 후 파직시키고 새로운 제후들을 보낸

것으로 해석되어지는데, 이 기록은 중국의 역사기록에서 순임금이 왜 갑자기 죽었는지 그 의문을 밝혀주는 아주 중요한 문구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단군왕검의 명에 의해 요임금의 왕위를 빼앗은 후 중국총독이 된 순임금은 초기에는 상국(上國)인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며 충성을 다했으나 점차 단제(檀帝)의 명령에 불복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에 조선이 무력을 동원해 순임금을 정벌하고 해임시키고, 치수에 공이 많은 우사공(禹司空)이 그 자리를 이어가게 된다.
이 우(禹)가 바로 하(夏)나라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신라 때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 제19장>에 따르면, 순임금은 단군왕검이 요임금의 반란을 바로잡기 위해 특사로 파견한 유호씨의

아들이었다.

 

순임금이 미인계에 빠져 요임금의 두 딸인 아황과 여영을 아버지 몰래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요임금과 협조하면서 현인(賢人)들을 죽이고 계속 묘족(苗族)을 정벌하는 등 단군조선의 이념 (홍익인간)과 대립하게 된다.

 

결국 요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에 올랐으나 아버지 유호씨의 노여움을 사서 수년간 피비린내 나는 부자지간의 전쟁을 벌이다가 패하여

멀리 창오(蒼梧)의 들로 달아나다가 우(禹)에게 살해되고, 그의 두 아내도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위 <부도지>의 기록과는 달리 순임금의 죽음에 대한 중국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순임금 말년 남방의 묘인(苗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친히 대군을 이끌고 두 부인인 아황과 여영을 데리고 반란을 평정하러 갔다.

상수(湘水)에 이르러 순임금은 두 부인을 남겨두고 군대를 이끌고 계속 전진해 창오(蒼梧)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병이 나서 죽어

구의산 아래에 안장되었다.

 

비보를 접한 두 부인은 통곡을 그치지 않았으며, 상수를 따라 내려가면서 계속 흘린 피눈물이 대나무에 뿌려져 대나무를

얼룩얼룩하게  물들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상비죽(湘妃竹)이라 일컬었다.

마침내 두 부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상수에 뛰어들어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강가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두 여인은 모두 상수의 신이 되었는데, 아황은 상군(湘君)이 되고 여영은 상부인

(湘夫人)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상수는 호남성에서 동정호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 호남성 상수변의 특산물인 상비죽에는 순임금의 두 부인인 아황과 여영의 피눈물이 얼룩졌다는 전설이 있다.      

© 역사복원신문


그러나 ‘순임금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는 이 전설은 사서의 기록과 다르다.
≪사기≫「하본기(夏本紀)」와 ≪맹자≫의「만장(萬章)」에서는 “순임금이 만년에 옛날의 영명함을 잃어버리고 놀기만 좋아하는

아들 상균(商均)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우(禹)는 여기에 불복하고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순을 창오(蒼梧)로, 상균을 양성

(陽城)으로 추방한 다음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부도지의 내용과 아주 흡사하다.  

순임금의 아들이 추방당한 양성(陽城)은 하남성 정주시 서쪽에 있는 등봉현이다.  
“古阳城邑,《孟子万章》禹避舜之子于阳城,《世本》“夏后居阳城,”即此,汉置县,晋尝置阳城郡,后罢, 后魏复置县,

兼置阳城郡,隋废郡,五代唐改县曰告成,后避朱温父讳更名阳邑,唐复曰阳城,周省, 今为告成镇,在河南登封县东南三十五里。”

 

(고양성읍: <맹자만장>에 우가 순임금의 아들을 피했다. 하남성 등봉현 동남 35리에 있다.)
이는 하나라의 시조가 되는 우(禹)가 단독으로 정변을 일으켜 순임금의 왕위를 찬탈했다기보다는, 중국총독인 순임금이 조선의

 부루단군에게 해임당하고 우(禹)가 그 후임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정세로 볼 때 조선의 허락 없이 우사공이 단독으로 정변을 일으켜 순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위 <단군세기>의 내용이 그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즉 순임금이 중국총독에서 해임된 이후 동정호 이남으로 유배된 것으로 보여진다.

멀고 먼 남방에서 일어난 삼묘족의 반란을 평정하러 가는 위험한 길에 두 부인을 데려간다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한 기록이며,

멀리 유배갔기 때문에 두 부인이 따라 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곳은 남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요임금의 아들 단주와 삼묘족의 활동무대인 언(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의 중국총독 순임금이 죽은 곳은 어디인가?  

<중국백과사전>의 자료에는 “순임금이 요허(姚墟;하남성 범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래 성은 요(姚) 이름은 중화(重華) 자는

도군(都君)으로, 30세부터 28년간 섭정을 했으며 요임금이 죽자 제위를 물려받아 39년간 재위에 있었다.

남방을 순시하다가 창오의 들에서 죽었으며, 강남에 있는 구의산에 장례지냈다 ”고 되어있다.
(舜帝 : 之一的舜有生于姚地(今河南濮阳范县),还传说舜出生于姚墟,故姓姚氏,名曰“重华”, 字都君 舜摄政28年,

据说舜在尧死之后,在位39年,到南方巡守时,死于苍梧之野,葬于江南九疑山, 称为“零陵”) 

순임금이 남방을 순시하다가 창오에서 죽었다는 위 내용은 <사기 하본기>의 내용과 상이하기 때문에 왜곡된 자료로 보인다.

순임금의 죽음과 관련 있는 창오와 구의산은 동정호의 남쪽인 지금의 호남성 영주시 영원현(寧遠縣)에 있는데, 산서성 남부가

본거지인 순임금이 그 멀리까지 친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호남성 영주시에서 1900년대 들어 순제능을 조성하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왜곡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기록에는 순임금이 창오의 구의산에 묻혔다고 했는데, 죽은 장소가 맹자가 말한 곳과 다르다는 것은 ‘창오 = 명조’ 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순임금이 두 번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 단주가 피해있던 곳은 삼묘족이 있던 산동성 서부인데, 순임금이 뭐하러 멀고 먼 호남성까지 두 부인을 데리고 갔을까?    

그 이유는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가 남방의 삼묘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고, 단주가 죽은 후에도 삼묘족이 반란을 계속 일으키자

순임금이 직접 토벌하기 위해 친정에 나섰다는 것인데, 당시 단주가 있던 언(偃)이라는 지명은 지금의 산동성 복현 근처인

견성현으로, 순임금이 단주와 삼묘족을 정벌하려 했다면 이곳으로 와야한다.  

偃朱城 : 在山东濮县东二十五里,本名朱家阜,《孟子万章》舜避尧之子于南河之南,《括地志》偃朱故城, 在鄄城县西北十五里,

即舜避丹朱处。

(언주성 : 산동성 복현 동쪽 25리에 있다. 본명은 주가부이다.

<맹자의 만장>에 순이 요의 아들(단주)을 남하의 남쪽으로 피했다.

<괄지지>에 따르면, 언주고성은 견성현 서북 15리에 있다. 즉 순이 단주를 피한 곳이다.)  

여하튼 맹자가 말하기를 “동이족인 순임금이 죽은 곳이 동이족의 땅”이라 했으니, 역설적으로 중국의 호남성 영원현도 동이족의

강역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순임금에 관한 기록이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번한(番韓)의 땅은 순임금의 활동무대인

유주 즉 산서성 남부와 황하주변 하남성 일대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땅은 서울로 치면 중구(中區) 일대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동이족의 강역이었던 것이 입증된 것이다. 

기사입력: 2011/09/06 [12:05]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