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대진국(발해)

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왜곡한 중국

설레임의 하루 2011. 8. 27. 10:35

*출처:역사복원신문

              

                        

 

 

 

 

 

 

(2부) 발해는 대야택으로 산동성 서부에 있었던 큰 호수
 
성훈 컬럼리스트 기사입력  2011/05/15 
발해(渤海)를 중국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이상한 지명이 많이 나타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야택(大野澤)과 거야택(巨野澤 또는 鉅野澤)이라는 지명인데, 이는 본시 같은 지명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대야택을 검색 해보니, 아래와 같은 설명이다.

(원문) (大野澤) : “钜野”又称钜野泽,是古代著名的水泊,《尚书》、《周礼》等古籍中均有记载。 野泽的故址在今山东省钜野县北,

 在古代是与济水、泗水相连接的。

唐代的钜野泽,水面南北长三百里,东西宽百余里,号称大野泽。宋代时,钜野泽的南部干涸为平地, 北部成为梁山泊的一部分,

其中水草丛生,鱼虫很多。

(번역) 대야택 : 거야 또는 거야택이라 부르며 고대의 저명한 호수이다.

거야택은 현 산동성 거야현 북쪽에 있고, 고대에는 제수와 사수가 서로 연결되어 접해 있었다.

당나라 때의 거야택은 수면이 남북 삼백리 동서 약 백리이며 대야택이라고도 불렸다.

송나라 때 거야택의 남부는 마르고 땅이 굳어져 평지가 되었고, 북부는 양산박의 일부가 되었다.

그 가운데 수초가 많이 살고, 물고기와 벌레가 아주 많다.
위 자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대야택이라고도 불린 거야택의 위치와 크기이다.

위치는 산동성 거야현 북쪽이고 크기는 당나라 때 300리 x 100리나 되는 엄청난 크기였는데, 송나라 때 작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산동성 거야현은 산동성 서쪽으로 하남성과의 경계에 있다.

즉 대야택은 바닷가 쪽이 아닌 내륙 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거야택’으로 검색을 했더니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왔다.
(원문) 巨野,原为鉅野,因鉅野泽而得名。鉅野泽,又名大野泽,是古代有名的湖泊沼泽地。

古时候童子启蒙读物《千字文》(天地玄黄,宇宙洪荒),其中有一句“泽有鉅野”,就是指大野泽。 大野泽在现在山东巨野的北面,

到唐朝时,湖面南北长三百余里,东西宽百余里。 五代以后,湖面自南向北逐渐干涸,中南部成为平地,也就是现在巨野、嘉祥、

郓城、梁山的地面, 其北部就成为梁山泊。

(번역) 거야 : 원래는 거야로 가야택으로 인해 이름을 얻었다하며 일명 대야택이라 하며

(위 대야택에서 나온 설명과 같다) 오대시대 이후 호수가 말라 평지가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거야, 가상, 운성, 양산의 지면이다.

(참고로 천자문의 ‘택유거야(澤有鉅野)’란 4자성어가 바로 대야택이란 설명이다.)
 

발해라 불린 대야택은 현재 많은 부분이 육지로 변해있다.

아직도 동평호와 남양호 독산호 미산호 등이 남아 있다.

사진의 오렌지 부분이 옛날 대야택의 위치로 추정된다.

대조영은 대야택(발해) 서쪽 황하 북쪽 하남성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당나라는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봉한 것이다.

발해란 국호는 거기에서 유래했다.     © 역사복원신문



그렇다면 이 대야택(거야택)과 발해는 과연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자료는 < 해경신탐(海經新探) >으로, 바로 그 유명한 산해경(山海經)을 새로이 탐구하여 설명한 자료이다.

참고로 산해경은 산경(山徑)과 해경(海經)의 두 파트로 나누어진 고대 문헌으로 산과 바다(호수,강)를 설명한 책이다.

그 내용을 중요한 내용만 번역을 하면 아래와 같다.
勃海是钜野泽的古名。这个古名一直袭用到汉初。
《战国策·赵策》中苏秦说:“秦攻赵则韩军宜阳,楚军武关,魏军河外,齐涉勃海,燕出锐师以佐之。”这个勃海就是钜野泽
《史记·河渠书》云:“今天子元光之中而河决于瓠子,东南注钜野,通于淮泗。”
《汉书·武帝记》说是“元光三年春,河水徙从顿丘,东南流,入勃海。”两文对照,可知这个勃海还是钜野。又,钜野因此也称东海
《史记·项羽本纪》称,汉之四年,因为彭越攻东阿,杀楚将,项羽回师破走彭越,接着说:“项王已定东海,来西,与汉俱临广武而军。

 ”东阿距勃海很远,这个东海无疑义是指钜野
《水经注》引《晋书·地道记》云:“廪丘者,春秋之齐邑,实表东海者也。”地在今范县境内,距汉、魏的东海郡、渤海郡都比东阿更远,

说明魏晋时的钜野还被人称为东海。钜野的海名持续了两千来年。

발해는 거야택의 옛 이름으로 이 이름은 한나라 초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전국책 조나라책>에 설명된 “제가 발해를 건너다”의 발해는 바로 거야택이다.
<한서 무제기>의 원광 3년 봄 하수(황하)가 범람해 언덕에서 꺾여 동남류해서 발해로 들어간다는 발해는 거야택이다.

그리고 거야는 동해라고도 불렀다.
<사기 항우본기>에서 “항우가 이미 서쪽에서 와 동해로 정했다.”는 동해는 거야를 가르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진서.지도기>를 인용한 <수경주>에서 전하기를 “름구란 자는 춘추시대의 제나라 도읍인 동해 사람임이 밝혀졌다.

땅은 현재 범현 경내에 있다. 멀리 한나라와 위나라의 동해군이고 발해군 도읍은 동아에 비해 아주 멀다.

위.진 시대의 거야택은 사람들에 의해 동해로 불렸다. 거야가 바다(해)라는 이름으로 불린 건 2천년이 지속된다,

위와 같이 발해는 대야택(거야택)의 고대 명칭을 말하는 것으로 동해(東海)로 불리기도 했으며, 바다(x海)라는 호칭으로 2천년 동안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물증으로는, 청나라가 망하고 민국이 성립된 1922년 영국에서 발행된 중국 지도인데, 현재 중국의 내해는 1922년

당시에도 발해(渤海)라 불리지 않고 북직예해(北直隸海)로 불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 1922년 영국에서 발행된 중국 지도에도 현 중국의 내해는 분명 '북직례만'과 '요동만'으로 그려져 있고

 '북직례해협'으로 명기되어 있다. 발해만이란 현재 지명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중국의 내해가 발해만으로 불린 것은 1926년 지명 변경 이후이다.     © 역사복원신문


 
참고로 하북성의 역사연혁을 보면, 현재의 하북성은 명나라 때는 북직례(北直隷)로 불렸고, 1645년 직예(直隸)로 개칭되며,

1669년 직예성(直隸省)으로 불리게 된다.

 

1928년 6월 20일 국민정부의 결정을 거쳐 직예를 하북성(河北省)으로 바꾸고, 북경을 북평으로 바꾼다.

그래서 1922년 지도에 중국의 내해가 발해가 아닌 북직예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 우리 역사를 도륙(屠戮)낼 때, 중국의 한족은 일제와 합작하여 역사지명을 조작함으로서

역사왜곡을 자행한 것이었다.

물론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왜곡은 한족이 천하를 지배했던 명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다,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형성되면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발해의 경우라 하겠다.

▲ 직예성의 역사연혁을 말하고 있는 인터넷 자료     © 역사복원신문


또한 우리는 춘추시대의 제나라의 도읍이 현 산동성 임치(臨淄)가 아니라 현 하남성 범현(范縣)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산동성 임치도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 되었던 것이다.

제나라 뿐만이 아니라 하남성에 있던 연(燕)나라를 북경 근처로, 노(魯)나라를 산동성으로 지명이동 시킨다.

현 산동성 곡후(曲阜)에 있는 공자묘는 후대에 이장한 것 아니면 역사왜곡을 위한 가짜 묘일 가능성이 크다.

▲  중국은 춘추전국 시대의 제, 노, 연을 사진과 같이 지명이동하여 역사를 왜곡했다.                 

©역사복원신문


또한 산동성 앞바다가 고대의 동해가 아니었음을 위 기록은 말해주고 있다.

현재 산동성 아래 강소성과 경계에 있는 연운항시 근처의 동해시(東海市)는 바로 대야택(발해)을 현 동해시로 지명을 옮겨와

역사왜곡을 위해 작명한 도시로 봐야 한다. 

일제와 중국이 말살한 가장 큰 역사왜곡 중 하나가 바로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발해)였다.

발해는 하남성부터 동만주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명조작의 결과 발해의 수도가 동만주라는 이상한 학설로 바뀌게 된다.

그 이유는 통일신라의 영토가 대동강 원산만 이하라는 반도사관의 학설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발해)는 15세 259년간 존재하다 거란이 일으킨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 <요사 태조본기>의 기록을 보면 발해(대진국)를 멸망시킨 요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기록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신책3년(918년), 겨울 12월 경자 초하루에, 요양의 고성에 행차하였다.

 

(神冊三年)冬十二月庚子朔,幸遼陽故城.)

 

신책4년(919년) 삼월 병인, 옛 요양의 고성을 수리하여, 한민과 발해인으로 채우고, 동평군으로 고쳐, 방어사를 두었다.

 (神冊四年 三月丙寅,修遼陽故城,以漢民渤海戶實之,改爲東平君郡,置防禦使.)

신책 6년(921년)12월, 단주, 순주의 백성들을 동평군과 심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神冊六年 十二月,認徒檀順民干東平瀋州.)

즉 요나라의 요양은 현 요녕성 심양 근처의 요양이 아니라, 바로 산동성 서부에 있는 동평군임을 알 수 있다.

동평군은 치우천왕의 무덤이 발견된 곳으로, 발해 즉 대야택의 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지금도 발해(대야택)의 일부분이었던 동평호(東平湖)라는 호수가 남아 있다.

▲    대야택인 발해는 중국에 의해 현 중국의 내해로 옮겨지고, 대조영의 발해는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동만주로 이사간다.    ©역사복원신문


 
아아! 대조영의 대진국(발해)는 동만주에 있었던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하남성에 도읍을 두고 동만주와 시베리아까지의 영토를 차지했던 엄청난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런 엄청난 동아시아의 호랑이를 동만주의 고양이로 만든 것은 중국과 일제의 합작에 의한 역사왜곡의 산물일 뿐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찾아 새로운 국사교과서를 써야 할 것이다.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해 일제가 민족혼 말살용으로 만든 거짓의 식민사학을 아직도 우리는 참역사로 알고 있으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비록 우리 조상이 활동했던 대륙의 영토를 도로 찾을 수는 어렵겠지만, 역사강역이라도 제대로 찾아 후손에게 알려 주어야

민족정기가 바로 설 것이다.


참고로 예전에 기고한 대조영의 ‘천문령’과 ‘동모산’에 대한 글을 참조해 주기 바란다.

* 대진국(발해)의 시국처인 동모산은 어디?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81§ion=sc7§ion2=

 

* 대조영이 이해고를 격파한 천문령은 어디?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83§ion=sc7§ion2=
 

중국이 길림성 목단강시에 세운 발해의 상경용천부 유적비.

이곳을 발해의 도읍으로 보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1/05/15 [13:40]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