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대만 센카쿠제도 분쟁과 독도 정책에의 함의
- 2009-03-10
최운도(동북아역사재단)
지난 6월 10일에는 센카쿠제도 남쪽 약 9km 지점에서 대만 고기잡이 배 ‘롄허호(連合號)’와 일본 해상보안보부 제10관구 순시선 ‘고시키’가 충돌하여 대만 어선이 침몰하였고 승선중인 16명은 전원 구조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선장이 얼굴에 찰과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후 10여일에 걸쳐 이 지역에서는 대만의 항의와 영유권 주장, 전쟁불사의 언급에 이를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대만과 중국과의 교류협력 관계의 심화, 일중관계의 발전 등의 논의와 합의가 동시에 진행되는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결국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고 이에 대한 대만의 수용으로 사태는 진정되기에 이르렀다.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도발에 대비하는 우리로서는 이번 사건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미래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왜 일본은 사과를 하였으며 배상을 약속하였을까 하는데 있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최근 사건의 진행과정을 살펴본다. 그 다음으로는 그 분쟁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 센카쿠제도와 독도의 영유권 차이를 비교한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일본과 대만의 타협 배경에 대해 분석하고, 이로부터 독도에 대한 함의를 알아보고자 한다.
센카쿠제도는 중국에서는 댜오위다오(釣魚島), 대만은 댜오위다이(釣魚臺)라고 부르는 여러 섬으로, 일본과 중국, 대만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현재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이후 편의를 위해 실효적 지배국 명칭인 센카쿠제도로 기술함). 1970년대 초, 동중국해에서 천연가스가 발견되면서 센카쿠제도의 영토 문제가 표면화되고,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시작되었다. 1978년에는 일본의 우익 단체가 한 섬에 등대를 건설한 바 있으며, 1996년에는 이에 항의하는 홍콩의 한 시민단체 회원이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지난 10여 년간 영유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중국, 대만 사이에는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6월 10일 센카쿠제도 인근 해역에서 대만 낚싯배가 일본 순시선에 부딪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의 제11관구 해상보안부에 의하면 경계활동 중인 순시선이 영해내로 침범해 온 수상한 배를 발견하고 국적 등을 확인하고자 접근하려 하자 낚싯배가 지그재그로 항행하면서 달아났다고 한다. 순시선이 오른쪽 후방에서 추적하던 중 낚싯배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선회하였고 순시선의 왼쪽 선수부분에 충돌하였다. 그 후 낚싯배는 침몰하였고 선장을 비롯한 16명은 전원 구조되었다.
당일 즉각적으로 중국 외교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의 영유권을 주장과 일본의 행위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대만도 11일 영유권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13일에는 대만 국회가 댜오위섬 주변에 군함파견 요청서를 국방부에 제출하였고, 대만 행정원장(수상)은 국회답변에서 ‘최후의 수단으로서 전쟁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발언하였다.
14일에는 일본 제11관구 해상보안본부가 대만 ‘롄허호(連合號)’ 선장 및 가고시마 해상보안부 소속 순시선 ‘고시키’선장 두 사람을 ‘업무상 과실왕래위험용의’로 나하지검 이시가키 지부에 서류송검 처리하였다. 아울러 대만 낚싯배의 업무상과실 뿐 아니라 일본 순시선의 과오도 인정하여 상대배의 침몰과 선장의 부상에 유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15일에는 동일 해상보안본부의 부장이 기자회견에서 ‘고시키’에 일정한 과실이 있음을 인정하고, ‘결과적으로 상대의 배를 침몰시키고 선장에게 부상을 입힌 것은 유감’ 이라고 대만 측 선장에게 사죄하였다. 일본 외교부는 대만의 배가 일본 영해를 침범하였고 무해통행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형태로 항행을 했으며 이번 사태 자체가 매우 유감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대만은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는 반면 중국과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우호적인 관계의 진전을 이루어 나갔다. 6월 14일에는 중·대만 주말 챠터기 정기운항과 중국인의 대만관광 확대에 대해 합의하고 문서교환까지 이루어 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6월 16일에는 중국 웹사이트에는 ‘중대공투(中臺共鬪, 중국과 대만이 공동으로 투쟁하자)’를 요구하는 주장이 넘쳐나기도 하였다. 같은 날, 대만의 어선이 9척의 순시선과 함께 센카쿠 주변 일본이 영해라고 주장하는 지역에서 2시간 30분가량 머물다가 돌아갔다. 또 한편으로는 대만은 공식적 사죄를 요구한 반면 일본은 대만 외교부장에게 항의와 경고를 전달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이어서 사태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6월 16일, 일본과 대만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중국은 동지나해의 영유권분쟁지역에서 복수의 가스전에 대한 공동개발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6월 17일에는 미국 국무성에서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일본과 대만, 쌍방에 관계당사자간 평화적 해결 촉구하였다. 그러나 6월 18일, 대만 마잉주 총통은 기자회견에서 센카쿠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낚싯배가 영해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일본의 순시선이 침입한 것이며, 대만 측 순시선과 항의 선박의 행동을 지지하고 칭찬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6월 19일에 되자 대만 마잉주 총통은 입장을 바꾸어 일본에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고 정식 사죄와 어선에 대한 배상은 요구하면서도 센카쿠 열도 부근에의 군함파견은 중단키로 결정하는 등 사태수습에 나서는 모습을 모여 주었다. 반면 중국과 일본은 이날 동중국해의 가스전에 대한 공동개발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6월 20일이 되자 일본은 일본교류협회 후나마치 부대표가 대만 낚싯배의 선장을 방문하여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문구가 담긴 일본의 제11해상보안본부장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동시에 배상문제에 대한 조기 타결도 약속하였다. 이에 대한 대만은 공식적 사과로 수용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로서 10여일 만에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분쟁은 진정되었다.
일본은 센카쿠제도에 대해 1895년 중일전쟁과 무관하게 세 차례의 조사를 통해 무주지임을 확인하였고 이듬해인 1896년 오키나와현의 행정구역으로 복속시켰음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무주지 선점론을 권원으로 삼고 현재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역사적인 권원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약탈당한 것으로 본다. 1985년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때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면서 당시 부속도서였던 센카쿠가 포함되었다는 주장이다. 대만도 1895 일본의 식민지관할로 될 때 센카쿠가 함께 포함되었으므로, 1945년 이후 카이로선언에 따라 대만이 연합국에 의해 해방됨과 동시에 센카쿠가 대만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독도와 비교했을 때 센카쿠제도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공통점으로는 한국이 독도의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역사적 권원과 대륙붕의 연장으로서의 자연지형설에서 찾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 또한 이 두 가지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일본은 두 경우 모두 ‘무주지 선점론’을 근원으로 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과 중국은 각각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과정에서 일본에게 강제 점령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국이 일본의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분쟁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는 점이다. 조약상 일본이 포기해야 하는 영토에 명시되지 않음으로써 일본이 자국 영토일 것으로 확대해석할 여지를 두었다는 점이다. 동 조약은 일본이 오키나와를 잠정적으로 미군정의 관할에 두는 것으로, 그리고 센카쿠제도를 일본이 포기해야할 영토가 아니라 미국이 행정권을 행사하는 지역에 포함시켜 두었다. 이후 1971년 미국과 일본 사이의 오키나와 반환협정을 맺게 되는데 그 부속도서인 조어도도 함께 반환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그런가 하면 두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센카쿠제도는 일본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반면 독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센카쿠제도에는 주변 지하자원으로 인해 단기적, 실리적 이해관계가 얽혀 단기적이며 치열한 갈등의 전개 양상인 반면, 독도의 경우 지하자원에 대한 신뢰할 만한 결과보고가 없는 상황으로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장기화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영유권 주장의 유효성에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1968년 유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의 조사보고서가 이 지역 대륙붕의 석유자원 대량매장 가능성을 지적한 후 관심을 보일 때까지 영유권 주장하지 않았으며,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때도 이의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상 권원 주장의 취약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독도의 경우에는 이승만 라인을 통해 적극적 영유권 주장이 있었다.
일본의 사과와 배상약속이 이번 사태 진정의 실마리가 되었다면 일본은 왜 사과를 하였을까? 독도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명확한 실책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대만의 강경 대응 때문에 사과로 인한 영유권 주장의 손상을 무릅쓰고도 사과한 것일까? 일본은 대만과 중국의 기세에 눌려 법적인 대응보다는 정치적 해결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대만 또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수용하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 지음으로써 일본과 타협한 셈이다. 어떠한 계산이 있었을까?
일본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대만과 중국 사이의 이례적인 협력의 진행을 배경으로 한 마잉주 정부의 공격적인 정책에 맞대응할 경우 영유권 강화의 효과보다 사태의 심각화로 인한 손실이 더 클 것으로 계산하였을 것이다. 즉, 중국과 대만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사태가 장기화 될 경우 기존의 일본과 대만 관계 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민족주의 대립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직접적으로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춘샤오(春曉, 일본이름 시로카바白樺) 가스전에 대한 공동개발과 같은 일중 협력 분위기의 손상 가능성을 우려했을 것이다. 이는 10여 년 만의 중일관계 복원의 결과물이자 일중우호의 신호탄이 될 가스전의 공동개발은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순시선의 과실 부분에 국한된 배상임을 강조할 경우 실효적 지배로 인한 우위의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중국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임을 염두에 둔 것이다.
대만의 고려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를 얻어낸 것만으로도, 이것이 정부 강경책의 효과임을 널리 홍보함으로써 국내 정치에 대한 홍보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문제를 장기화할 경우에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것이다. 문제 자체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해 내에서의 추적권에 국한된 문제인 이상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일본의 사과와 배상만으로도 향후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분쟁에 있어서 유리한 선례를 확보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반드시 동일한 경우가 아닐지라도 강경대응의 효과에 대한 확신을 얻었으며, 그 효과를 경험하였다는 점이다. 향후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에서 우위에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이익이라 할 수 있다. 중일협력 분위기와 미국의 평화적 해결 촉구 속에서 더 이상의 사태 악화는 대만에 이익이 될 수 없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도 일본과의 협력이 가속화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미국 또한 이로 인한 지역분쟁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익 계산을 바탕으로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앞으로 갈등 양상에 대해 추론할 수 있다. 앞으로는 대만의 시민단체나 정부가 보다 공격적인 태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순시선의 접근을 유발할 행동을 할 가능성 또한 높아질 것이다. 또한 대만의 영해 침범에 대해 일본 해상보안청의 대응이 보다 신중해질 것이며 해상보안청의 독자 행동이나 과잉 행동을 축소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타협이 중국과 대만 관계의 호조와 중일협력의 조류를 배경으로 한 만큼 일시적인 정책에 그칠 수도 있다. 즉, 이들 국가들 사이의 상황이 변하면 또 다시 일본이 적극적 대응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의 정책에 대한 시사점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센카쿠와 관련된 일본의 해결책과 독도와 관련된 우리의 해결이 동일한 상황에 있지 않음을 고려하여야 한다. 일본 국민들이 센카쿠제도에 대해 갖는 관심도와 우리 국민들이 독도문제에 대해 갖는 관심도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 국민들의 동향에 대한 기사가 없었던 사실만으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온도차가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리 측의 사과와 배상은 어떤 경우라도 우리 국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을 고려하더라도 센카쿠제도 사태에서의 일본의 대응 선례는 우리의 독도 문제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향후 일본의 민간선박이 독도 주변의 영해 침범을 일삼으며 우리 측 순시선의 과잉대응을 유도하려 할 것이다. 만약 충돌사고 혹은 침몰사고가 발생할 경우 일본 측은 똑같이 사과와 배상을 우리 정부에 촉구하면서 금번 사례를 거론할 가능성 있다. 그러나 우리 측이 사과와 배상할 경우,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국내여론이 이를 수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정부는 위의 점들을 고려하여 정책적인 준비를 함에 있어서 다음의 점들에 착안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첫째, 상대의 도발에 말려 충돌사고가 발생할 경우, 갈등의 확대로 인한 국제분쟁화와 소극적 대응에 대한 국민적 저항 사이에서 정부의 선택이 어려워질 가능성 있으므로 이에 대한 면밀한 대비가 필요하다. 우리 영해 내에서 비슷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사태를 관리하는 것이 국제분쟁화 혹은 국내여론의 부담이라는 두 개의 상황을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준비해 두어야 한다.
둘째, 영해 내 추적권과 그 한계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면밀한 국제법적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번 센카쿠제도의 사태에 대해서도 두 가지의 국제접적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영해 내에서의 추적권은 정당한 권리 행사로서 추적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배상 책임만 진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영해 내에서 추적권은 있으나 과잉대응으로 인한 손상은 불법일 수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만 배상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어떠한 법해석이 적절한지에 대해 대비를 하는 것이 우리 정부 정책의 선택 폭을 넓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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