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조선열전의 본말과 한사군의 허구
한나라 무제(BC 156 ~ BC 87)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하였다는
<사기> 권115 ‘조선열전’만큼 우리나라 고대사의 핫이슈가 되고 있는 것도 드물다.
한4군의 설치경위와 존재여부, 위치, 존속기간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국내외의 사관(史觀) 등이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의 동북공정과 영토문제 등 국제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사기> ‘조선열전’과 소위 한4군이 설치되게 되는 경위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먼저 한(漢)나라의 개국과정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병술로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했다’는 지략가 장량(張良 ? ~ BC 168)의
행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장량이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동이(東夷) 즉 북부여의 결정적인 도움 때문이었다.
이는 <사기> 권55 ‘유후세가(留侯世家)’편과
<한서(漢書)> 권1 ‘고제기(高帝紀)’에 보면 알 수 있다.
한(漢)나라, 북부여와 연나라 눈치 봐
‘유후세가’에는
“장량은 일찍이 회양(淮陽)에서 예를 배웠다.
동으로 창해(倉海)의 임금을 알현하고
무게 백 20근 철퇴를 휘두르는 역사(力士)를 만나
동유중인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같이 저격을 하였으나
적중을 하지 못하고 부거(副車)를 박살냈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창해의 임금’은 <사기>를 주해한 많은 학자들이 밝혀 놓은 것처럼
진시황의 군현에 속한 것이 아니며 동이의 군장이고
이곳은 예맥국의 땅이라 하였으며 예맥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으며
신라의 북쪽에 있고 동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는 곳이라 하였다.
이 창해 지역을 현 한반도 강원도 어디쯤으로 여긴다면 큰 오해이다.
장량이 찾은 창해는 현 하북성과 산동성 부근으로서
옛 고조선과 북부여 강역 안에 있었다.
장량은 북부여의 제후국인 창해에서 역사 여홍성(黎洪星)을 만나
진시황을 저격하였으며 훗날 병법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창해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밀려 지금의 하남성 낙양 근처의 영양(滎陽)을 항우에게 바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북부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유방은 한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한서> 권1에
“북맥(北貉)과 연(燕)나라 사람이 와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한(漢)을 도왔다(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라고 하여
북부여의 실체와 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방에 대한 북부여의 이러한 군사적 지원은
중원의 주도권을 북부여가 쥐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 세워진 한나라는
북부여와 연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 건국 후 20여년이 지난 기원전 195년에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 망명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연나라의 위만(衛滿)이 상투를 틀고 추수(溴水)를 건너
번조선의 준왕(準王)에게 가서 항복을 하자
준왕은 위만을 믿고 아껴서 박사(博士)로 임명을 하고
100 리의 땅을 봉지로 주고 서쪽 경계를 잘 지키도록 하였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연(燕), 제(齊), 조(趙)에서 많은 사람이
번조선으로 망명을 해오자 위만은 그들을 이용하여
준왕을 배신하고 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에 준왕은 해(海) 지역으로 망명을 하였다.
이렇게 번조선을 빼앗고 왕이 된 위만과 그 손자 우거(右渠)까지
약 87년의 기간을 보통 위만조선이라 칭한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 즉 단군조선과는 전혀 별개이다.
위만조선, 고조선(단군조선)과는 전혀 별개
위만조선의 세력이 커지면서 북부여와 한나라와도 경쟁관계를 형성하였다.
위만조선을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 기원전 128년 북부여의 고해사 단군은
몸소 보기 1만 명을 이끌고 남려성(南閭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관리를 두었다.
이 사건을 두고 중국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서는
“원삭 원년(BC 128) 동이의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을 하여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며
<후한서>는 “예군 남려 등이 우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내속되니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마치 창해군이 한나라에 속한 군현으로 착각이 들게 하고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아무런 설명 없이 2년이 채 안되어
“원삭 3년(BC 126) 봄 창해군을 파하였다.”라고 하여 어리둥절하게 한다.
앞서 창해는 장량과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강역이라 설명하였다.
창해는 곡창지대이며 한나라 수도로 직격할 수 있는 거점이기 때문에
한나라는 이 지역을 차지하는 세력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나라의 사람도 위만조선으로 망명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에 불안을 느낀 한무제가 기원전 109년
우거에게 섭하를 보내 중재를 하려고 하였으나 우거왕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섭하는 배웅하러 나온 조선의 비왕을 살해를 하고 달아나서
한무제에게 보고하니 한무제가 잘했다며 섭하를 요동동부도위로 임명을 하였다.
이에 분노한 우거왕이 군사를 내어 섭하를 죽이게 된 것이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의 시발이 된 것이다.
한무제는 순체와 양복을 장수로 삼아
수만 명의 수륙 양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공격하였지만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
왕검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위산과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냈지만
별 소득이 없자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대치는 왕검성에 내부 반란이 일어나
반란세력들이 우거왕과 끝까지 저항을 하던 성기(成己)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우거왕과 성기를 죽인 재상들은 봉토를 받고 제후에 임명되는데 반해
조선정벌에 나섰던 한나라의 장수 순체는
기시(棄市,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의 목을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던 형벌)에 처하였으며 양복은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한나라가 승리하였다면 장수들이 그 공으로 제후가 되거나 큰 상을 내렸을 것이다.
현도.낙랑, <사기>에 나오지도 않는 지명
그런데도 조선을 배신하고 항복한 조선의 다섯 사람을
획청후(澅淸侯), 추저후(萩苴侯), 평주후(平州侯), 기후(幾侯), 열양후(涅陽侯) 등으로 각각 제후로 봉하였다.
다섯 제후가 임명된 지역은 현 중국의 산동성, 하북성, 산서성, 하남성 등이다.
이로 보면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으며
내부 반란으로 한나라에 항복을 하여 다섯 명이 제후로 임명이 되는데
그 지역이 모두 현 중국 화북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으며 설령 한4군이 있었다 하더라도 한반도는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으로 삼았다(遂定朝鮮為四郡)”라고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4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후대에 편찬된 <한서>에 “원봉 3년(BC 108) 여름
조선이 그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을 함으로써 그 땅을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4군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
4군 중에 ‘진번’이라는 이름은
이미 진시황 이전에 있었음을 ‘조선열전’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현도’와 ‘낙랑’이라는 이름은 <사기> 전체를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한서> 권73 ‘위현전(韋賢傳)’에
“동으로 조선을 정벌할 때 현도와 낙랑의 군대를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끊도록 하였다(東伐朝鮮 起玄菟樂浪 以斷匈奴之左臂).”라고 하여
처음으로 현도와 낙랑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을 정벌하는데 현도와 낙랑을 이용하려 했다면
현도와 낙랑은 위만조선 내에 속하지 아니한 별도의 지역 또는 국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북부여, 위만조선, 진번, 현도와 낙랑 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모두 북부여와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사기>에서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으로 삼았다”라고 한 부분과
<한서>에서 “그 땅을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으로 삼았다”라고 한 내용은
사실과 다르며 위만조선이 항복하여 4군을 설치한 것이 아니며
‘조선 5후’가 있었을 뿐이다.
‘조선 5후’가 있었던 지역도 지금의 한반도 북부 지역이 아닌
앞서 말한 화북평원을 중심으로 한 유역이다.
한(漢)4군 대신 항복한 위만조선 5제후가 실재
한4군 문제를 풀기 위해선 한무제의 통치를 기록한
<사기> 권12 ‘효무본기(孝武本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마천은 12본기, 10표, 8서, 30세가, 70열전 등 모두 130편으로 나누어
<사기>를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기 중의 맨 마지막 편이 ‘효무본기’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썼던 당시의 한나라의 왕이 유철 즉 한무제다.
그런데 ‘효무본기’를 보면 여러 가지로 이상한 점이 눈에 많이 띈다.
첫 번째로 사마천이 살아있는 왕을 ‘효무’라 칭하고 기술할 수 없다는 점과
두 번째 ‘효무본기’는 다른 본기와 달리 봉선(封禪)에 관한 일만
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효무본기’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원봉 원년(BC 110) 태산으로부터 다시 동으로 바다를 따라 순행을 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요서로부터 북변 구원(九原)을 거쳐 감천(甘泉)으로 돌아왔다.”라고 되어 있던 것이
<한서>에는 한술 더 떠서 한무제가 백일 동안 순행한 거리가 만 8천 리라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본 송나라 때 공평중(孔平仲)은 그의 저서 <형황신론(珩璜新論)>에서
“오호라! 그 황당함이 심하도다(嗚呼其荒唐甚矣)”라고 하였다.
기원전 110년이라면 위만조선 문제로 골칫거리였고
곧이어 기원전 109년부터 전쟁이 시작되는데 만 8천 리나 되는 지역을
그것도 북부여와 위만조선의 강역을 다녔다는 것은 황당함의 극치이다.
이는 한나라가 세워진 뒤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던 한무제를
진시황과 견주어 미화시키려 나온 이야기이며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후대의 지리개념으로 맞춰진 것일 뿐이다.
위서(魏書, 삼국지 위지) 권13 왕숙전(王肅傳)에
“한무제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다는 말을 듣고
‘효경기(孝景紀, 한무제의 아버지를 기록한 본기)’와 자신의 본기를 본 뒤
크게 분노하여 책을 찢어 던져버렸으며 오늘에 이르러
‘효경기’와 ‘효무기’는 목록만 있을 뿐 글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지금 볼 수 있는 <사기>는 사마천이 직접 쓴 것이 아닌
후대에 임의로 두 본기를 <사기>에 삽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이 정작 ‘효무본기’에는 전혀 없다는 것은
‘조선열전’ 또한 후대에 개작 또는 가첨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사기> 전체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것이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후대에 많은 개작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제는 한4군에 대한 논쟁을 끝내야 한다.
더 이상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와
일본의 식민지 지배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한4군 설은 폐기되어야 한다.
있지도 않았던 한4군의 악령에서 벗어나 올바른 역사 정립이 절실하다 할 것이다.
한나라 무제(BC 156 ~ BC 87)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하였다는
<사기> 권115 ‘조선열전’만큼 우리나라 고대사의 핫이슈가 되고 있는 것도 드물다.
한4군의 설치경위와 존재여부, 위치, 존속기간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국내외의 사관(史觀) 등이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의 동북공정과 영토문제 등 국제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사기> ‘조선열전’과 소위 한4군이 설치되게 되는 경위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먼저 한(漢)나라의 개국과정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병술로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했다’는 지략가 장량(張良 ? ~ BC 168)의
행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장량이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동이(東夷) 즉 북부여의 결정적인 도움 때문이었다.
이는 <사기> 권55 ‘유후세가(留侯世家)’편과
<한서(漢書)> 권1 ‘고제기(高帝紀)’에 보면 알 수 있다.
한(漢)나라, 북부여와 연나라 눈치 봐
‘유후세가’에는
“장량은 일찍이 회양(淮陽)에서 예를 배웠다.
동으로 창해(倉海)의 임금을 알현하고
무게 백 20근 철퇴를 휘두르는 역사(力士)를 만나
동유중인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같이 저격을 하였으나
적중을 하지 못하고 부거(副車)를 박살냈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창해의 임금’은 <사기>를 주해한 많은 학자들이 밝혀 놓은 것처럼
진시황의 군현에 속한 것이 아니며 동이의 군장이고
이곳은 예맥국의 땅이라 하였으며 예맥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으며
신라의 북쪽에 있고 동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는 곳이라 하였다.
이 창해 지역을 현 한반도 강원도 어디쯤으로 여긴다면 큰 오해이다.
장량이 찾은 창해는 현 하북성과 산동성 부근으로서
옛 고조선과 북부여 강역 안에 있었다.
장량은 북부여의 제후국인 창해에서 역사 여홍성(黎洪星)을 만나
진시황을 저격하였으며 훗날 병법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창해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밀려 지금의 하남성 낙양 근처의 영양(滎陽)을 항우에게 바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북부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유방은 한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한서> 권1에
“북맥(北貉)과 연(燕)나라 사람이 와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한(漢)을 도왔다(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라고 하여
북부여의 실체와 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방에 대한 북부여의 이러한 군사적 지원은
중원의 주도권을 북부여가 쥐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 세워진 한나라는
북부여와 연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 건국 후 20여년이 지난 기원전 195년에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 망명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연나라의 위만(衛滿)이 상투를 틀고 추수(溴水)를 건너
번조선의 준왕(準王)에게 가서 항복을 하자
준왕은 위만을 믿고 아껴서 박사(博士)로 임명을 하고
100 리의 땅을 봉지로 주고 서쪽 경계를 잘 지키도록 하였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연(燕), 제(齊), 조(趙)에서 많은 사람이
번조선으로 망명을 해오자 위만은 그들을 이용하여
준왕을 배신하고 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에 준왕은 해(海) 지역으로 망명을 하였다.
이렇게 번조선을 빼앗고 왕이 된 위만과 그 손자 우거(右渠)까지
약 87년의 기간을 보통 위만조선이라 칭한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 즉 단군조선과는 전혀 별개이다.
위만조선, 고조선(단군조선)과는 전혀 별개
위만조선의 세력이 커지면서 북부여와 한나라와도 경쟁관계를 형성하였다.
위만조선을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 기원전 128년 북부여의 고해사 단군은
몸소 보기 1만 명을 이끌고 남려성(南閭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관리를 두었다.
이 사건을 두고 중국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서는
“원삭 원년(BC 128) 동이의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을 하여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며
<후한서>는 “예군 남려 등이 우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내속되니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마치 창해군이 한나라에 속한 군현으로 착각이 들게 하고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아무런 설명 없이 2년이 채 안되어
“원삭 3년(BC 126) 봄 창해군을 파하였다.”라고 하여 어리둥절하게 한다.
앞서 창해는 장량과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강역이라 설명하였다.
창해는 곡창지대이며 한나라 수도로 직격할 수 있는 거점이기 때문에
한나라는 이 지역을 차지하는 세력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나라의 사람도 위만조선으로 망명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에 불안을 느낀 한무제가 기원전 109년
우거에게 섭하를 보내 중재를 하려고 하였으나 우거왕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섭하는 배웅하러 나온 조선의 비왕을 살해를 하고 달아나서
한무제에게 보고하니 한무제가 잘했다며 섭하를 요동동부도위로 임명을 하였다.
이에 분노한 우거왕이 군사를 내어 섭하를 죽이게 된 것이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의 시발이 된 것이다.
한무제는 순체와 양복을 장수로 삼아
수만 명의 수륙 양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공격하였지만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
왕검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위산과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냈지만
별 소득이 없자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대치는 왕검성에 내부 반란이 일어나
반란세력들이 우거왕과 끝까지 저항을 하던 성기(成己)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우거왕과 성기를 죽인 재상들은 봉토를 받고 제후에 임명되는데 반해
조선정벌에 나섰던 한나라의 장수 순체는
기시(棄市,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의 목을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던 형벌)에 처하였으며 양복은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한나라가 승리하였다면 장수들이 그 공으로 제후가 되거나 큰 상을 내렸을 것이다.
현도.낙랑, <사기>에 나오지도 않는 지명
그런데도 조선을 배신하고 항복한 조선의 다섯 사람을
획청후(澅淸侯), 추저후(萩苴侯), 평주후(平州侯), 기후(幾侯), 열양후(涅陽侯) 등으로 각각 제후로 봉하였다.
다섯 제후가 임명된 지역은 현 중국의 산동성, 하북성, 산서성, 하남성 등이다.
이로 보면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으며
내부 반란으로 한나라에 항복을 하여 다섯 명이 제후로 임명이 되는데
그 지역이 모두 현 중국 화북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으며 설령 한4군이 있었다 하더라도 한반도는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으로 삼았다(遂定朝鮮為四郡)”라고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4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후대에 편찬된 <한서>에 “원봉 3년(BC 108) 여름
조선이 그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을 함으로써 그 땅을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4군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
4군 중에 ‘진번’이라는 이름은
이미 진시황 이전에 있었음을 ‘조선열전’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현도’와 ‘낙랑’이라는 이름은 <사기> 전체를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한서> 권73 ‘위현전(韋賢傳)’에
“동으로 조선을 정벌할 때 현도와 낙랑의 군대를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끊도록 하였다(東伐朝鮮 起玄菟樂浪 以斷匈奴之左臂).”라고 하여
처음으로 현도와 낙랑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을 정벌하는데 현도와 낙랑을 이용하려 했다면
현도와 낙랑은 위만조선 내에 속하지 아니한 별도의 지역 또는 국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북부여, 위만조선, 진번, 현도와 낙랑 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모두 북부여와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사기>에서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으로 삼았다”라고 한 부분과
<한서>에서 “그 땅을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으로 삼았다”라고 한 내용은
사실과 다르며 위만조선이 항복하여 4군을 설치한 것이 아니며
‘조선 5후’가 있었을 뿐이다.
‘조선 5후’가 있었던 지역도 지금의 한반도 북부 지역이 아닌
앞서 말한 화북평원을 중심으로 한 유역이다.
한(漢)4군 대신 항복한 위만조선 5제후가 실재
한4군 문제를 풀기 위해선 한무제의 통치를 기록한
<사기> 권12 ‘효무본기(孝武本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마천은 12본기, 10표, 8서, 30세가, 70열전 등 모두 130편으로 나누어
<사기>를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기 중의 맨 마지막 편이 ‘효무본기’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썼던 당시의 한나라의 왕이 유철 즉 한무제다.
그런데 ‘효무본기’를 보면 여러 가지로 이상한 점이 눈에 많이 띈다.
첫 번째로 사마천이 살아있는 왕을 ‘효무’라 칭하고 기술할 수 없다는 점과
두 번째 ‘효무본기’는 다른 본기와 달리 봉선(封禪)에 관한 일만
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효무본기’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원봉 원년(BC 110) 태산으로부터 다시 동으로 바다를 따라 순행을 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요서로부터 북변 구원(九原)을 거쳐 감천(甘泉)으로 돌아왔다.”라고 되어 있던 것이
<한서>에는 한술 더 떠서 한무제가 백일 동안 순행한 거리가 만 8천 리라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본 송나라 때 공평중(孔平仲)은 그의 저서 <형황신론(珩璜新論)>에서
“오호라! 그 황당함이 심하도다(嗚呼其荒唐甚矣)”라고 하였다.
기원전 110년이라면 위만조선 문제로 골칫거리였고
곧이어 기원전 109년부터 전쟁이 시작되는데 만 8천 리나 되는 지역을
그것도 북부여와 위만조선의 강역을 다녔다는 것은 황당함의 극치이다.
이는 한나라가 세워진 뒤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던 한무제를
진시황과 견주어 미화시키려 나온 이야기이며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후대의 지리개념으로 맞춰진 것일 뿐이다.
위서(魏書, 삼국지 위지) 권13 왕숙전(王肅傳)에
“한무제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다는 말을 듣고
‘효경기(孝景紀, 한무제의 아버지를 기록한 본기)’와 자신의 본기를 본 뒤
크게 분노하여 책을 찢어 던져버렸으며 오늘에 이르러
‘효경기’와 ‘효무기’는 목록만 있을 뿐 글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지금 볼 수 있는 <사기>는 사마천이 직접 쓴 것이 아닌
후대에 임의로 두 본기를 <사기>에 삽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이 정작 ‘효무본기’에는 전혀 없다는 것은
‘조선열전’ 또한 후대에 개작 또는 가첨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사기> 전체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것이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후대에 많은 개작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제는 한4군에 대한 논쟁을 끝내야 한다.
더 이상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와
일본의 식민지 지배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한4군 설은 폐기되어야 한다.
있지도 않았던 한4군의 악령에서 벗어나 올바른 역사 정립이 절실하다 할 것이다.
출처 : 뉴라이트와 탈근대 자유주의는 다를게 없다
글쓴이 : 종종걸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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