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스크랩] 우리는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설레임의 하루 2011. 6. 15. 11:15

 

가끔 인터넷 등을 보면 우리의 고향을 북두칠성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다른 글들이야 그냥 읽고 흘려 버릴수 있으나 고향은 우리의 출발점이자 민족의 근원을 다루는 핵심적인 사안이라 한동안 지켜보다가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여 졸필이나마 한편의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고향이 서로 다르다면 그 민족은 처음부터 다른 민족이 될수 밖에 없기에 이는 장난삼아 얘기할수 있는 사안이 될수 없으며 매우 신중하고 엄정한 바탕위에서 다루어저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북두칠성을 우리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글에 대한 반론이오니 제현들께서 우리 역사연구에 참조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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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별인 지구를 주소로 표시하면 우리은하계, 오리온의 나선형 팔, 태양계의 세 번째 별로 알려저 있습니다.

즉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그 태양은 다시 오리온을 중심으로 우리 은하계를 돌고 있지요. 따라서 지구가 우리은하계를 도는 것을 달리 세차운동(歲差運動)이라 하며 한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오는데 걸리는 기간이 대략 2만 5천년 정도 걸리는 것으로 과학자들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차운동으로 인하여 지금의 북극성(北極星)은 항상 진북(眞北)을 가리키지만은 않으며 1만 2천 5백년 후에는 직녀성(織女星)이 그 북극성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지요.

우리 선조들께서는 일찍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북극성을 천자성(天子星), 직녀성을 천손성(天孫星)이라 불렀지요. 기원전 2세기경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Hipparchos)가 이러한 사실을 밝혀내기 이전에 이미 우리 선조들께서 눈으로 직접 보고 후대에 그 사실을 남기셨으니 우리의 역사는 가장 최소로 잡아도 3만 5천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지요.

또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365일 5시간 48분 48초 정도 걸리고 총 주행거리는 약 9억 4천만 K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리(里)는 오행의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엔 수(數)의 이치에 따라 1리부터 10리까지 모두 다 쓰이고 있었으며 지금의 10리를 1리라 불렀지요.

1리를 12,960자라 하고 1자를 32.21Cm(고려시대 기준)라 하면 지구가 태양을 향해 하루에 가는 거리가 약 62만리가 되나, 자의 수축율을 감안하여 1자를 33Cm로 보면 정확히 60만리(940,000,000Km ÷ 365.24일 ÷ (12,960자 × 33Cm ÷ 100,000Cm))가 되지요.

 

우리 선조들께서는 삶의 최고의 목표를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는 복본(復本)에 두었지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삶을 마감할 때 그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종교의 내세관(來世觀)이 탄생하기 이전에 이미 복본은 우리민족 최대의 인생 목표가 되었지요.

하여 선조들께서는 그들 삶의 모든 흔적을 복본과 결부시켜 남겨 놓았고 이를 후대에 여러유물과 기록으로 남김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별이 고향을 향하여 하루에 60만리를 간다고 생각하였지요.

그러나 음양의 이치에 충실하였던 그들은 이를 밤과 낮으로 구분하여 이 별이 하루에 120만 마일(麻日)을 간다고 생각하고 이를 후손들에게 숫자의 개념으로 남겨 놓았지요.

마일은 리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리로 마(麻)는 창조주가 사는 마별을 의미하고 일(日)은 해를 가리키니, 곧 이 별이 해를 따라 고향으로 가는 거리의 최소단위로 삼게 되었지요.

지금은 비록 우리에게 쓰이지 않는 거리의 단위이나 문명의 이동경로에 따라 현재는 다른 민족들이 이를 Mile로 쓰고 있지요.

숫자 12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신성한 숫자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1년을 12개월로 정하고, 1일을 12시진(時辰)으로 정한 이유가 모두 복본의 염원과 관련이 있지요. 즉, 이 별이 하루에 고향으로 가는 거리를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지요. 그래서 시간을 정하는 단위는 물론 물건을 세는 단위에도 숫자 12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한인(桓因)께서 다스리는 무리를 12무리로 나눈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지요.

 

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가장 먼저 태어난 인간의 무리라고 하여 코리(高麗)라 불렀지요.

국어사전에서 한 겨레나 가계(家系)의 맨 처음이 되는 조상을 비조(鼻祖)라 합니다.

비조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옛날에 중국에서 인간이 생겨날 때 가장 먼저 코가 형성되어 그리 부른다고 하기에 그냥 웃었습니다.

코는 달리 남성의 상징을 은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지요.

아마도 생김새나 쓰임새가 비슷하여 그리 부르는 것으로 추측은 됩니다만, 하여튼 은유하여 말하는 그 코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처음의 조상을 비조라 부르게 되었지요.

또한 지금은 나라를 의미하는 리(麗)는 사람들의 집합체, 즉 무리를 말하는 것이니 코리는 처음으로 태어난 인간의 무리를 의미함을 알수 있지요.

부도지(符都誌)에 인간의 무리중에 가장 먼저 태어나신 분이 황궁씨(黃穹氏)고 그분이 곧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이 된다고 하니 이로써 코리의 뜻이 한층 명확해 지지요.

이름은 스스로 부르기 보다는 남들이 부르는 용도로 더 많이 쓰이고 있으니, 남들이 땅을 의미하는 아(a)를 붙여 우리나라를 코리아라 부르는데서도 우리의 진실된 이름을 명확히 알수 있지요. 징기스칸이 무리를 통일한 후 금(金)의 황제에게 처음으로 받은 직함이 자오드 코리(코리부족의 장)이니 코리는 처음 생겨날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우리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수 있지요.

코리가 꿈꾸었던 복본의 땅, 그들이 살아 생전에 가지못하면 죽어서 혼백이라도 가고자 했던 그들의 고향은 과연 어디 일까요?

어느 분의 말씀처럼 그들의 고향은 과연 북두칠성일까요?

우리가 칠성각(七星閣)이나 칠성판(七星板)이라고 하면 흔히들 북두칠성을 거론하는데 여기 또 다른 칠성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오리온을 촬영한 것입니다.

동절기를 전후하여 남쪽 하늘에서 육안으로 쉽게 관찰이 가능하며 사방에서 항상 네 개의 별이 오리온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수 있지요.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변함없는 칠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코리는 저기 보이는 오리온에 창조주인 마라(麻羅)가 산다고 믿었지요.

하여 그 별을 창조주의 이름을 받아 마별이라 불렀으니 이는 세 별을 합하여 부를 때의 이름이고 나누어 부를 때는 허달성(虛達星), 마코성(麻姑星), 실달성(實達星)으로 각기 그 명칭을 달리 하였지요. 부도지에 기록되어 있는 성(城)은 바로 별을 가리키는 성(星)의 또 다른 표현임을 알수 있지요.

마별에 사는 마라는 본디 자웅동체(雌雄同體)의 형상이라 이를 함께 부르지 않고 남성과 여성의 형태로 각기 달리 불렀지요.

마(麻)는 여신(女神)의 형태로 전해오니 라(羅)는 남신(男神)을 가리킴을 알수 있지요.

그러나 코리는 그들 무리의 이름을 더하여 마코(麻姑)라 불렀으니 이는 마라에게 생명을 받았음을 늘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서양에서는 자식이 태어날 때 유명한 신들의 이름을 받아 작명을 하는 예가 흔하게 있지요. 麻姑는 Marco의 흔적으로 처음부터 마코로 불리웠음을 쉽게 짐작할수 있지요.)

별은 지금은 별이라고 하나 과거엔 이를 벨이라고 불렀지요.

지금도 제 고향에서는 연세드신 분들이 모두 ‘벨봐라’라고 하니 마별의 본디 이름은 마벨이었음을 알수 있지요.

마별은 코리가 꿈에서라도 가고 싶은 그들의 고향이지요.

그래서 그 염원을 담아 마별의 형상을 닮은 연(鳶)을 만들어 날렸으니 지금까지도 풍속(風俗)으로 그 흔적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요.

지금도 제게는 어린시절에 그 연을 만들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각의 형상으로 틀을 만들고 가운데 큰원과 좌우에 작은원을 그려 오려낸 연의 형태는 사진에서 보는 칠성의 모습과 너무나 많이 닮아 있지요.

지금은 흔히들 방패연이라 부르나 고향의 형상을 본따 마코의 부름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만들었을 것이니 그 이름은 아마도 마연(麻戀)이 더 어울리겠지요.

 

코리는 그들끼리 의사소통을 위하여 처음으로 말을 만들었으니 여기에 복본의 염원을 고스란히 반영하였지요.

마별의 형상을 따라 말하는 이치를 세웠으니 이를 초성(初聲), 중성(中聲), 종성(終聲)이라 하며 세 개의 소리가 합쳐져야 비로소 하나의 말이 되지요. 마치 세별을 합하여 마별이라 부르는 논리와 같은 이치이지요. 따라서 초성은 실달성을, 중성은 마코성을, 종성은 허달성을 받은 것임을 알수 있지요. 또한 마별을 둘러싼 네 개의 별인 사수호성(四守護星)의 형상을 따라 말하는 법을 세웠으니 이(齒)와 혀(舌), 입술(脣)과 목구멍(喉)으로 내는 소리를 다 다르게 하였지요. 더불어 음양의 이치를 여기에 반영하였으니 위에 있는 것과 아래에 있는 것, 낮에 보이는 것과 밤에 보이는 것을 각기 달리 부르게 하였지요. 하여 위에 있는 하늘을 훤하다거나 흐리다고 하고 구름을 가리켜 희다거나 흐른다고 하며, 아래에 있는 땅이나 돌은 딴딴하거나 단단하다고 하지요. 물은 맑다고 하고 샘은 솟는다고 하며, 낮에 보이는 해는 환하다고 하고 밤에 보이는 별은 밝다고 하지요. 그러니 하늘이 맑다거나 해가 밝다고 할 수 없으며 별이 환하다고 하지 않는 것이 이 이치에 맞지요.

코리는 그들의 말을 처음으로 문자로 만들었으니 이를 가리켜 가림토(加臨土)라 하지요.

글자를 씀에 있어 토씨 하나하나를 가려 그에 맞도록 쓰게 하였기에 가림토라 불렀지요.

 

영화 인디애나존스 시리즈 네 번째 편에 마야의 문자를 설명하며‘코요마’라 부르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임의로 그렇게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마야의 후예가 부르는 말을 그대로 참고하여 옮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요.

우리는 비록 ‘요’의 뜻은 모르더라도 그 문자가 코리와 마코의 어떤 커넥션을 의미함을 쉽게 눈치챌수 있지요. 그들 역시 복본의 염원을 담아 그 문자를 만들었을 것이니 가림토와의 연관성을 충분히 찾아낼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소위 한자(漢字)라고 하는 뜻글자에도 복본의 염원이 담겼으니 이의 발음을 설명하는 반절법(半切法)의 이치를 살펴보아도 쉽게 그러한 사실을 알수 있지요.

 

코리는 마별을 사방에서 지켜주는 사수호성을 본따 이별에 처음으로 동,서,남,북의 방위(方位)의 개념을 도입하였지요. 그리고 한인께서 사방으로 일천보(一千步)를 천천히 걸어 가시니 이를 모두 합한 사천보를 일러 일리(一里)라 하였지요. 이는 사람이 일천보를 가면 눈에서 저물어 지기 때문이니 천(千)을 일러 달리 저문(즈믄)이라 하였지요.

또한 각각의 방위에 수호신의 임무를 부여하여 이별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로써 사신(四神)이 탄생하게 되었지요.

위의 사진은 사천성에서 발굴된 화상석에 담긴 그림으로 사신도(四神圖)의 초기 형태로 알려저 있습니다.

 

코리는 처음으로 사신을 정함에 있어 원래부터 이별에 살던 동물로 하고 그들이 부르는 이름과 일치하도록 하였지요. 하여 동은 코리(高麗)가 산다하여 리(麗)의 원래 음인 려를 따르고 이와 음이 같은 동물로 여우를 정하였지요. 그러나 코리는 아홉의 무리로 이루어져 코구리라 하니 여우의 꼬리를 아홉으로 하였지요. 구미호(九尾狐)라는 말이 탄생한 배경이지요. 서는 서토(西土)라 불렀으니 이와 음이 같은 동물인 토끼로 정하였지요. 다만 남은 그들의 고향인 마별이 있는 곳이니 그들의 영혼을 고향에 전해주는 동물인 마추(麻隹, 삼족오)로 정하였지요. 북은 북두(北斗)가 지키고 있으니 이와 음이 같은 동물인 두꺼비로 정하였지요.(북두칠성은 칠성이란 말보다 북두란 말로 더 널리 쓰였지요)

 

지금도 동남아나 티벳 등지에 가면 조장(鳥葬)을 하는 풍습을 볼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후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 새(까마귀, 독수리 등)를 이용하고 있지요.

우리가 아는 까마귀는 지금은 흉물(凶物)로 인식되고 있으나 사실 그 새는 초기 사신도에 등장할 정도로 매우 신성한 동물로 묘사돼 왔지요. 이런 새를 우리 선조들께서 앞 못보는 장님 새인 오(烏)로 명명(命名)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새를 지칭하는 글자중에 지금은 자주 쓰이지 않지만 추(隹)라는 글자가 있지요. 추의 자형을 파자(破字) 해보면 인(人)과 십(十)과 왕(王)으로 구성이 되지요. 십(十)은 십진법에서 가장 높은 수로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이 창조주인 마코(麻姑)의 상징 기호로 써 왔지요. 사람과 그의 탄생을 주관하는 신을 연결시켜주는 새들의 왕이 바로 추(隹)이지요. 그러니 코리가 그 새를 불러 그들의 영혼을 마코에게 데려다 주는 새, 즉 마추(麻隹)라 불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 하겠지요. 추(隹)는 오(烏)보다 쓰기가 더 쉬운 글자이나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고 있으니 여기엔 필히 우리가 알수 없는 곡절이 숨어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추장(酋長)은 추장(隹葬)을 관장하는 우두머리인 추장(隹長)이 와전(訛傳) 되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추장(隹葬, 조장)은 일반 백성들이 복본의 수단으로 활용하였으나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복본의 염원을 이루고자 하였지요.

그들은 마별의 형상을 본따 탑을 쌓고 거기에 안장됨으로써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지요.

 

위의 사진은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를 담은 것으로서 오리온을 닮은 전형적인 형태이지요.

피라미드는 이집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으며 그 규모나 모양은 조금씩 달라도 그 배치형태는 모두가 동일하지요.

 

위의 사진은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는 피라미드중 일부를 위에서 촬영한 것이지요.

좌로부터 순서대로 살펴보면 중원 대륙의 서안(西安)과 이집트, 마야에 있는 피라미드로서 그 배치형태가 모두 우측에 있는 별자리인 오리온을 닮아 있지요.

이러한 사실로 피라미드를 축조한 이들이 비록 사는 곳은 달라도 모두 같은 문화와 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되는 유물로 그들이 바로 코리의 후손들이었음이 입증되고 있지요.

 

코리는 다른 민족과 달리 그들만의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으니 피부색은 차치하고 편두(偏頭)와 두개골의 뼛조각 모양, 새끼 발가락, 엉덩이의 푸른반점 등으로 확연히 구분되고 있지요.(상세한 내용은 본 싸이트의 관련 글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북방계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그들의 팔뚝에 신체적 특징이 유전(遺傳)되어 온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혹시 관심이 있는 분들은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먹을 쥔 상태에서 팔뚝을 엄지로 힘껏 아래쪽으로 잡아당기듯이 눌러보면 칼로 벤 것 같은 자국이 보일것입니다. 양쪽 팔뚝에 똑같은 흔적이 보인다면 북방계로 단정하여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신라 김씨들에게서 이런 흔적을 많이 봐왔지요.)

피라미드가 있는 곳에서는 이런 신체적 특징을 가진 유골이 수없이 발굴되고 있지요.

또한 피라미드를 쌓는 모습을 놀이로 가르쳤으니 윷놀이의 풍속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요. 윷말이 놓여지는 판을 들여다 보면 마치 피라미드를 위에서 보고 있는 것과 같지요. 도(돼), 개, 걸, 윷, 모는 당시의 오가(五加)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양가(羊加), 구가(拘加), 저가(猪加)를 의미함을 쉽게 알수 있고, 이 오가가 후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오등작(五等爵)으로 전해 내려옴을 짐작할수 있지요.

지금 우리는 모두가 윷놀이라 부르나 저는 그것이 마별탑을 쌓는 놀이, 즉 마작(麻作)으로 불렸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마작(麻雀)은 명대(明代)에 만들어 졌다고 알려저 있으나 놀이와 이름의 친연성을 찾아볼수 없으니 아마도 그전에 널리 쓰였던 놀이의 이름을 강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수 없습니다.

 

코리는 피라미드를 일러 마별을 본따 만들었다고 하여 마별(마벨)탑이라 불렀지요.

고향에 사는 이들이 쉽게 보고 데리러 올수 있도록 마별의 형상을 따라 탑을 배치하고 엄청나게 크고 웅장한 규모로 지어 한눈에 그들의 후손임을 알아볼수 있도록 하였지요.

그리고 지도자의 유해를 마별탑에 안장하여 사후에라도 복본의 염원을 이루도록 하였지요.

그들은 마코께 돌아간다는 뜻을 명확히 알리기 위하여 유해의 머리를 코룸(백두산)으로 향하도록 안치하였으니 거기에는 사시사철 항상 마코의 뜻이 전해지는 천부단(天符壇)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후부터 지도자가 안장된 마별탑이 있는 곳을 굳게 지키며 머물러 살아 왔으니 그곳을 일러 스스로 모든 허물을 벗고 이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아스탈이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아사달(阿斯達)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요.

 

아스탈은 코리뿐만 아니라 이별에 사는 모든 무리들이 복본의 장소로 성스럽게 여겼으니 때가 되면 모두가 여기에 모여 마코의 부름을 기다리게 되었지요.

마별탑의 꼭대기에 제단을 마련하고 양의 피와 물고기의 피를 바쳐 그들의 소원을 빌게 되었으니 이로써 조선제(朝鮮祭)가 탄생하게 되었지요.

지금도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살아생전에 그분들이 드셨던 음식을 대접하니 양과 물고기는 당시에 그들의 주식이었음을 알수 있지요.

양의 피를 모아서 바쳤던 제기(祭器)는 현재 동복(銅鍑)으로 알려진 그릇의 형태로 쉽게 짐작이 가능하고, 물고기의 피는 삼해(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에서 나는 것을 합하여 받쳤으니 일목삼신어(一目三身魚)가 그려진 제기를 보면 알수 있지요.

조선제가 행해지던 기간에는 모든 무리가 그들의 정성을 모아 제사에 바쳤으니 이를 조선제에 바치는 공물이라 하여 조공(朝貢)이라 불렀지요. 그러니 조공을 받는 주체는 조선제를 주관하는 주최측이고 나머지 무리들은 제사가 끝난 다음에 조공을 나누어 받는 것에 불과함을 쉽게 알수 있지요. 이는 조선제의 전통을 물려받은 영고(迎鼓), 무천(舞天), 동맹(東盟)등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왔을 것으로 짐작이 가능하지요.

그들은 고향을 지켜주는 사수호성을 따라 4년을 주기로 한번씩 조선제를 개최하였으니 이 흔적이 지금도 올림픽 등의 개최주기로 이어지고 있지요.

조선제에 참가한 모든 무리는 탈을 만들어 얼굴에 쓰게 되었으니 복본의 길로 향함에 있어 피부색이나 미추(美醜)를 기준으로 선후를 따지지 않는다는 평등사상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복본을 염원하는 춤을 추었으니 서로가 손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였지요. 무릎을 구부리고 앉는 것을 감이라 하고 다시 일어나는 것을 간이라 하며 손을 잡고 도는 것을 수할라라 하였지요. 그래서 그 춤의 이름을 감간수할라라 하였으니 지금은 강강수월레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요.

십수년전에 문화방송에서 중남미의 오지를 탐방하는 중에 원주민이 보관하고 있는 탈을 보여 주였지요. 그 탈은 우리의 하회탈을 빼다 박은듯이 너무나 똑같이 닮아 있었지요. 하회탈은 결코 조선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탈로써 증명하고 있지요.

조선은 국명(國名)이 아니라 제사의 이름으로 쓰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올림픽이 지금처럼 세계 각국에서 개최되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에서만 열린다고 가정하면 그 나라는 그리스라는 국명보다는 오히려 올림픽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될 것입니다. 조선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습니다.

 

조선제는 복본의 염원으로 여는 것이니 반드시 마코의 뜻이 전해져야 가능하지요.

그러니 그 메시지를 마코의 뜻이 전해지는 천부단에서 받을 수밖에 없지요.

 

위의 사진은 산동성 대문구문화유적에서 발굴된 팽이형 토기(가칭)지요.

중국측은 토기의 연대를 대략 기원전 4300년에서 기원전 2200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거기에 특별한 문양이 그려저 있다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아사달문양이라 부르고 있지요. 그러나 저 그림은 우리에게 잊혀진 천부단의 실제 모습이지요.

신라(新羅)에서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에 모신 일광신(日光神)의 모습이 마치 저와 같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부단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인 코룸(백두산)에 모셨지요.

코룸은 대홍수 이후에 코리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터전으로서 그 높이가 삼천척(三千尺)을 넘었으며 달리 불러 곤륜(崑崙)이라 하였지요.

천부단은 코룸의 다섯 봉우리중 가장 높은 봉우리인 빌어봉에 있었지요.

빌어봉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마코께서 계신 곳과 가장 가깝다고 하여 복본의 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빌어보고자 그렇게 이름 지었으니 달리 불러 비로봉(毘盧峯)이라 하였지요. 산중의 제일봉(第一峯)을 일러 비로봉이라 하는 말이 여기서 나왔지요.

천부단의 윗 부분을 따로 천부경(天符鏡)이라 하였으니 마코의 뜻을 전해받는 거울이지요.

그리고 천부단의 아랫 부분은 복본의 염원을 이뤄 고향으로 향할 때 모두가 타고 갈 배를 형상한 것이지요.

마코의 메시지는 먼곳에서 빛을 빌어 우리에게 전해지니 빛을 뜻하는 일(日)과 마코의 상징기호인 십(十)을 위아래로 연결하고 복본의 꿈이 담긴 배를 형상화하여 글자를 만들게 되었지요. 이로써 조(朝)라는 글자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바로 천부단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그러니 조(朝)는 제물(祭物)을 뜻하는 선(鮮)보다 반드시 앞에 있을 수밖에 없지요.

조선(朝鮮)이라는 글자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천부단은 복본의 염원을 이루어주는 최고의 상징물이지요.

그래서 천부단의 형상으로 문양을 만들어 항상 그들 삶의 가까이에 두고 복본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마코께 빌고 또 빌었지요.

지금은 우리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그 문양이 티벳에는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지요. 집을 들어서는 대문위에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절안의 풍경(風磬)속에 물고기 대신 그 문양이 달려 있는 등 여러 형태로 남아서 전해지고 있지요.

아래 사진은 대문에 그려진 문양의 일부이며, 더 좋은 그림은 인터넷상에 많이 공개되어 있으니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몽골의 국기에도 이와 같은 문양이 들어 있음을 아래 사진을 통하여 확인할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 문양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이 문양을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지워버렸는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으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밝혀질 것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리의 최고 지도자는 천부단의 형상을 관(冠)으로 만들어 머리에 쓰고 다녔지요.

이는 오로지 그분에게만 마코의 권능(權能)이 이어지므로 조선제를 주관하는 제사장(祭司長)의 신분으로서 천부단을 열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지요.

위의 사진은 이집트의 하토르 여신의 조각상입니다. 천부단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관을 쓰고 있는 모습을 한눈에 볼수 있지요. 또한 아래 그림에서도 천부단의 또 다른 형태를 보실수 있을 것입니다.

 

왼쪽의 인물이 하토르 여신입니다.

 

또한 일부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의 형상으로 표현한 치우 한웅 역시 천부단의 형상으로 관을 만들어 썼으니 마코의 권능을 받은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그분의 형상이 어떻게 후세에 전해졌는지 알려주는 자료라 할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본 카페의 자료를 활용한 것으로서 오른쪽 사진의 형상을 산타클로스의 원형으로 보고 있지요)

 

이렇게 코리의 최고지도자들은 천부단의 형상으로 관을 만들어 머리에 쓰기 시작하였으니 이때부터 코리의 후손들은 이를 기본형으로 하여 여러형태의 왕관을 만들게 되었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천부단의 본 모습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할 것입니다.

반면 다른 무리의 수장들은 천부단의 형상을 받을수 없었으니 그를 받치고 있는 코룸의 다섯봉우리의 형상을 따라 관을 만들어 머리에 썼지요. 이는 마코의 권능을 부여받은 분을 그들 스스로 떠받들어 모신다는 충성의 또 다른 표현방식임을 알수 있지요.

 

코리는 시기별로 크게 황궁씨(黃穹氏)의 시대, 유인씨(有因氏)의 시대, 한인씨(桓因氏) 시대로 구분할수 있지요. 각각의 시대가 일천갑자(一千甲子)가 되니 세분의 무리가 합하여 살아온 기간이 모두 삼천갑자(三千甲子)가 되지요. 그래서 코리를 일러 흔히들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이라 하였지요. 삭(朔)은 슭의 다른 말이니 이는 곰을 의미하지요. 동방에 사는 슭(곰)의 후예가 삼천갑자를 살아왔다는 뜻이지요. 신화나 전설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겨나게된 동인(動因)이 있으니 삼천갑자 동방삭의 신화에 비추어 볼 때 사서에서 말하는 우리역사 18만년이 전부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지요.

국어사전에서 슭곰발을 큰곰의 발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말이 원래 같은 뜻을 강조하는 말을 덧붙이는 경향이 흔히 있으니 슭이 곧 곰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이는 송골(松鶻)매의 경우에서도 쉽게 볼수 있지요. 부도지에서는 세분의 시대를 각각 일천년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그 무리를 의미하는 말을 사람으로 오인한 때문이지요. 단순히 한인씨의 시대만 따져보아도 이미 일천년을 훌쩍 넘고 있지요. 아마도 황궁씨와 유인씨의 흔적은 아틀란티스와 뮤대륙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황궁씨와 유인씨가 이룩하였던 찬란한 문화유산을 넘겨받지 못한 한인께서는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지요. 이땅에서 처음으로 불을 다스려 모든 무리가 날것을 먹는 생식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지요. 그러자 모두들 그분을 일러 불을 다스린다 하여 불리라 불렀으니 흔히들 부리라고 하였지요. 지금도 무당이 일가를 이루려면 부리를 받아야 한다고 설명하니 부리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제사장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 왔음을 짐작할수 있지요. 후세에 한인의 후손들이 그들이 사는 곳을 일러 역시 부리라 하였으니 이는 한인의 호칭을 받은 까닭이지요. 그러니 부리는 그것이 불여(不與)나 부려(夫黎)나 부여(夫餘) 등으로 쓰여 있더라도 모두가 부리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이는 징기스칸을 배출한 부리야트족을 보더라도 그 원래의 명칭이 무었이었나를 쉽게 짐작할수 있지요.

 

우리 옛말은 아직까지 그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앞말의 받침이 탈락하는 경우를 많이 볼수 있습니다. 제 고향에는 한티재라 부르는 높은 고개가 있습니다. 뜻글로는 대치(大峙)라고 쓰나 소릿글로는 한티재라 합니다. 그런데 고향사람들 모두가 이를 하티재로 발음하고 있습니다. 앞말의 받침이 탈락하는 현상이 여전히 남아 있지요. 저는 이를 근거로 히말라야가 흰 마라에서 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치와 티를 혼용하여 쓰는 것을 보아 이집트의 첫 번째 파라오인 티우가 치우와 같은 말임을 알수 있지요.

부리가 이와 같은 원칙에서 불려지는 말이라면 그 어원은 문화적 상징성을 고려해 볼 때 불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둑은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분명히 들판에 둑을 쌓아 밭을 만드는 놀이라는 것을 알수 있지요. 그러니 바둑은 집짓기 놀이가 아니라 밭둑놀이임을 짐작할수 있지요. 선조들께서 수(數)의 이치를 가르치기 위하여 일찍이 이 놀이를 만들었으니 반상에 찍힌 아홉 개의 점이 이를 말해주고 있지요. 바둑판의 길고 짧은 면이 각각 둘씩 있으니 이는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의 이치를 담았고 반상을 휘감고 돌아가는 모서리가 모두 365개니 이는 한해의 날수를 담은 것이지요. 가운데 점을 기준으로 수의 이치에 따라 사방으로 9개의 줄을 그으니 한가운데가 십(十)자 모양으로 비게 되었고, 여기에 사방으로 줄을 그어 십(十)을 만들어내니 비로소 십진법이 완성되었지요. 하여 십을 가장 높은 수라 하여 마코의 상징기호로 삼게되니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달리 십(拾)이라는 글자를 만들게 되었지요. 바둑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 비록 전해지지 않으나 그 놀이가 밭둑에서 나왔음은 쉬이 짐작할수 있지요.

 

한인께서는 코리의 무리를 다스림에 있어 복본의 염원을 부여하여 모두 12무리로 나누었지요. 또한 코리가 사는 별을 일러 마코의 뜻이 환하게 전해지는 곳이라 하여 한(桓)이라 이름짓고 12무리가 사는 곳은 모두 해라고 불렀으니 이는 마코의 뜻이 해를 거쳐 그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이었지요. 한국의 영토는 동서로 2만리 남북으로 5만리에 이르렀으니 이는 이별에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갈수 있는 모든 지역을 포함한 것이지요.

위의 사진은 어느 분께서 한국의 영토를 지도로 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 지도에는 코리가 살고 있는 이집트와 아메리카는 빠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저는 저 지도를 열배로 확대하면 그것이 곧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땅에 오행이 들어오면서 리(里)의 개념이 흔들리니 지도가 저렇게 밖에 그려질수 없었다고 봅니다. 지구로 불리기전 이별이 과연 무엇으로 불리웠을지 생각해 보면 그 해답은 간단히 나오지요.

 

한인께서는 모두 7대를 이어왔으니 그 끝에 이 땅에 큰바탈이 나셨지요. 큰바탈은 대영웅, 즉 한웅(大雄)을 의미하니 뜻과 소리를 따라 달리 거발한(巨發桓)이라 불렀지요. 큰바탈께서는 코리의 12무리를 수의 이치에 따라 모두 9무리로 구분하니 이후부터 코리를 불러 코구리라 하였지요. 그러나 일부는 이를 줄여서 구리라 하고 또 일부는 이를 합하여 쿠리라 하였으니 세 말은 모두 같은 뜻을 의미함을 알수 있지요. 이때부터 코리는 스스로를 일컬어 바탈무리라 하였으니 배달민족(倍達民族)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지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탈(Ulaanbaatar)은 붉은 영웅을 의미하니 큰바탈은 대영웅으로 봐도 무방하겠지요. 사서에는 居發桓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저는 단지 이름의 친연성에 비추어 巨發桓으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한웅(桓雄)은 모두 18분이 계셨으니 그 끝에 비로소 이 땅에 탄이 탄생하셨지요.

탄은 마코의 뜻을 온 무리에게 전해주는 분이니 달리 王이라 하였지요. 탄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하나로 이어준다는 뜻이니 지금은 우리에게 단(檀)으로 전해지고 있지요. 그러나 이는 본디 지위를 가리키는 말이니 사람이 스스로 하늘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초대 탄을 달리 불러 임검씨(壬儉氏)라 하지요. 우리가 아는 임금님의 말이 여기서 나왔지요. 탄은 거인이셨던 큰바탈의 뒤를 이어 마코의 권능을 물려받으니 모든 무리가 조선제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신분으로 이분을 인정하고 도처에서 그를 따랐지요. 당시 사대륙(四大陸)에는 황궁씨(黃穹氏)와 청궁씨(靑穹氏),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의 후손들이 나누어 살고 있었으니 탄께서 그들 무리중 수장(首長)을 뽑아 각각 술탄(述王)의 지위를 부여하였지요. 술탄은 탄의 뜻을 받아 그들 무리들에게 마코의 가르침을 대신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으니 이들을 합하여 흔히들 사탄(四王)이라 하고 본래의 탄은 본탄(本王)이라 불렀지요. 탄께서는 일반 백성들이 복본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추장(隹葬)을 지내는 광경을 보고 그들의 염원을 양어깨에 짊어진 채 밝고 환한 길로 그들을 인도하고자 스스로 흰옷을 입고 무리의 앞에 나타나니 모두들 그분을 일러 옷흰(오딘)님이라 불렀지요. 오로지 양어깨만 검은 색이었으니 거기에는 백성들의 염원을 고향에 전해주는 새인 마추(麻隹)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백성들이 이를 보고 이후로 아무도 흰옷을 입지 아니 하였으니 오로지 옷흰님을 기리기 위함이었지요. 탄께서는 이를 어여삐 여겨 그들이 고향에 돌아가는 때는 누구나 흰옷을 입도록 하였으니 이후부터 상중(喪中)에 흰옷을 입게 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지요.

마야인들이 이를 보고 그들이 머물러 사는 곳에 있는 신전을 불러 마추피추(麻隹被隹)라 하였지요. 마추가 옷흰님과 함께 하니 언젠가는 그분께서 모두를 고향에 데려갈 것이라는 염원을 담아 그렇게 이름 지었지요.

 

신화나 전설은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탄생하게된 동인이 있지요.

수메르의 지도자였던 소호금천이 루시퍼(Lucifer)에서 사탄(Satan, Shaitan)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 사탄이 당시 그들에게 공포의 존재였음을 알수 있지요.

 

북유럽의 오딘(Odin)의 신화를 살펴보면 그의 할아버지는 신들의 시조인 부리(Buri)이고 그를 호위하는 여전사는 발키리(Valkyrie)이며 항상 양어깨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고 설명하지요. 부리는 한인을 가리키니 그의 손자인 단군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발키리가 천부단을 호위하는 신녀로서 밝히리라 불리웠음을 알수 있지요. 오딘은 아스 신족(神族)으로서 달리 보탄(Wotan)이라 불리웠다고 설명하고 있지요. 이는 탄께서 머물러 살던 곳인 아스탈을 가리키며 본탄(本王)의 앞받침이 탈락하여 보탄이라 불리웠음을 알수 있지요.

오딘의 신화에는 최초의 생명체로 황소가 등장하지요. 황소의 후손인 오딘이 거인과의 싸움에 이겨 신들의 왕이 된다고 설명을 하지요. 황소는 바로 천부단을 가리킴을 알수 있지요. 천부단의 형상이 황소의 뿔을 닮아 그렇게 묘사한 것이니 이는 이집트의 하토르여신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수 있지요. (힌두교에서 소를 공경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 볼수 있습니다.)

이는 단군께서 한웅의 뒤를 이어 천부단의 주인이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의 수요일(Wednesday)은 보탄(Wotan)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화요일(Tuesday)이 치우 한웅의 날이니 수요일은 그의 아들인 단군의 날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금요일(Friday)은 오딘의 아내인 프리그(Frigg)의 날로 알려저 있지요.

 

코리가 복본의 염원으로 여긴 조선제는 마코의 뜻이 천부단에서 전해져야 열수 있지요.

마코의 뜻은 천부단을 통하여 빛으로 전해지니 천부경의 방향이 마별탑을 향하여 그 빛을 환히 비추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천부경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를 작동시키는 열쇄가 필요하였으니 이를 달리 천부인(天符印)이라 하였지요. 천부인은 코리의 최고지도자에게 대를 이어 전해지는 것으로서 이를 결코 그의 몸에서 떼어 놓을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한몸과 같이 하고 항상 모두가 볼수 있도록 하였으니 손가락에 반지처럼 끼고 있었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탄의 대를 거듭하는 동안 천부인을 분실하게 되니 이로써 조선제가 더 이상 열릴수 없게 되었지요. 이로서 마코의 뜻이 더 이상 전해질수 없게 되니 결국엔 천부단이 코룸에서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요. 21대 소태 단군 재위시에 거대한 화산이 코룸의 지하에서 분출하니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이후로 수백년 동안 코룸의 주위는 더 이상 사람이 살수 없는 곳으로 변하게 되었지요.

 

지금은 우리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의 광경은 지나간 영화의 한 장면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우리와 유사한 전승문화를 간직한 켈트족의 전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지요.

이 영화에는 중간계(마코성), 절대반지(천부인), 반지의 주인인 골룸(코룸), 반지를 찾아 다니는 기사들(사탄),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부단이 화산폭발로 사라지는 광경을 총 4편에 걸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반지의 제왕 씨리즈이지요. 그들은 천부단을 일러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그들을 주시하는 절대자의 눈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천부단이 이 땅에서 사라지자 코리는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이를 기화로 서로가 마코의 권능을 이었다고 주장하게 되니 이로써 마침내 코리의 무리가 삼한(三韓)으로 갈라지게 되었지요. 그들은 스스로 마코의 뜻이 그들에게만 전해진다고 주장하고 스스로가 다스리는 무리의 이름을 고향에서 빌려오게 되니 이로써 마와 별(벨)과 진(辰)이 탄생하게 되었고 지금은 우리에게 마한(馬韓)과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으로 전해지고 있지요.

 

사서에는 조선이 처음부터 삼한으로 갈렸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후손들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을 결코 국시(國是)로 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단군은 스스로 선대에서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나 색불루 단군때에 이 기록이 깨어지지요. 아마도 당시에 제위를 순조롭게 승계하지 못할 어떠한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소태단군께서 천부단이 사라진 모든 책임을 홀로 지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일로 인하여 후대에 들어선 단군들이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게 되니 대륙에 대한 힘의 공백이 발생하고, 이로써 대륙에 춘추전국시대가 열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들이 삼한의 이름을 정할 때 고향의 이름을 빌려온 것은 나중에 궁예(弓裔)가 이를 물려 받은 흔적을 볼수 있지요. 그가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마별을 뜻하는 마진(麻辰)을 가리킴을 알수 있지요. 그러나 고향의 이름을 국호로 정한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고쳐 태봉(泰封)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천부단이 있었던 봉우리인 빌어봉을 달리 태봉(泰峯)이라 불렀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그 역시 천부단이 부여하는 마코의 권능을 이어받고자 하는 뜻이 있으니 나라의 이름을 그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이는 궁예뿐만 아니라 삼한을 다스렸던 지도자들 또한 한결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코리(高麗)나 코구리(高句麗)는 한인이 다스리던 영토와 권위를 되찾고자 그들의 국호를 그렇게 불렀고, 부리(夫餘)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부여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지아비가 남아 있다니 어찌 이를 나라 이름에 쓸수가 있는지... 옮긴 이의 잘못이 참으로 크다 하겠지요.) 백제 또한 같은 생각을 가졌을테니 그 이름은 아마도 백제(白帝)가 어울리겠지요. 하늘에 계시는 한인은 달리 불러 백제(白帝)라 하였지요.

새라(新羅)는 새로운 라의 나라를 뜻하니 그들 스스로가 마라의 후손임을 말해주고 있지요.

신라 처용가의 후속편이라 할수 있는 고려 처용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지요

“신라성대 소성대(新羅聖代 紹聖代) 태평성대 라후덕(太平聖代 羅候德)”

신라의 태평성대가 라후(羅候)의 덕이라는 말이지요. 라후는 ‘라’라고 하는 임금을 말하는 것이니 바로 마라를 가리킴을 알수 있지요.

또한 스스로를 가리켜 새라부리라 하였으니 새라에 사는 부리를 가리키는 말이며 지금은 서라벌(徐羅伐)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요.

가야(伽倻)는 카라코룸의 흔적에 비춰볼 때 카라로 불리웠을 것이며 지금은 가락(駕洛)으로 전해지고 있지요. 그들 역시 코룸이 부여하는 옛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거라(去羅)는 라에게 가고 싶다는 뜻이니 지금은 거란(契丹)으로 전해지고 있고, 마갈은 마코께 가고 싶다는 뜻이니 이 역시 지금은 말갈(靺鞨)로 전해지고 있지요.

동유럽에 사는 마자르족은 달리 마가르라고 하니 이들은 곧 마갈의 후손이지요.

리진(麗震)은 코구리와 진(震)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나 지금은 여진(女眞)으로 전해오고 있지요. 진은 달리 밝해라 하니 밝은 해의 나라를 말하며 지금은 이를 발해(渤海)로 전해오고 있지요.

 

또한 코룸의 형상이 지상에서 사라지자 여러 부족들이 앞다퉈 그들의 거주지에 이를 모시고자 하였으니 코룸에 있던 천부단이 부여하는 마코의 권능을 잇고자 한 것지요. 몽골과 인도,파키스탄에서는 이를 카람코룸이라 하였고 화하족은 이를 곤륜(崑崙)이라 하였지요.

 

불교에서는 복본을 달리 가리켜 성불(成佛)이라 하지요.

인간이 깨달음을 이루면 누구나 부처님이 될수 있다고 가르치지요. 그들은 인간의 몸속에 일곱 개의 태양이 심어저 있으니 이를 모두 환히 밝혀내면 부처의 길에 이른다고 하지요. 제가 약30년 전에 합천 해인사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이를 달리 차크라라고 하지요. 그러나 차크라는 찾그라(찾거라)에서 그 어원을 찾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천부경(天符經)에 기록되어 있는 ‘본심본태양(本心本太陽) 앙명인중천지일(昻明人中天地一)’은 바로 이 얘기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할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고대사의 흔적을 쭉 살펴보았습니다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지못하고 또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땅에 오행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우리의 정신세계를 모조리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오행에 대하여 잠시만 살펴 보겠습니다.

화하족(華夏族, 지나족)은 그들의 대표적 역사 인물로 황제(黃帝)를 내세우고 있지요. 오행은 한가운데 자리를 토(土)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사실에서 황토(黃土)라는 단어를 추출해 낼수 있지요.

물론 치우와 헌원(황제)의 전쟁에서 헌원이 패하여 황토지역으로 물러났다는 기록도 있지요. 그 기원을 하(夏)나라로 소급해서 보기도 하는 산해경(山海經)에는 헌원이 여발(女魃)로 기록되어 있지요. 발(魃)은 우리가 한발(旱魃)이라고 할 때의 그 발입니다.

따라서 여발은 가뭄과 관련이 있는 단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지요.

황토지역에 사는 무리가 가뭄의 신을 모시고 사는 생활환경은 쉽게 추측이 가능하지요.

그들은 목축을 주업으로 했을테니 비가 오면 땅이 질퍽하여 가축을 기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가능하면 비가 적게 오는 환경을 원했을 것입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삼황오제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그 전에 염제신농이 있고, 그 후에 소호금천이 있지요. 염제신농은 글자에서 보듯 농업의 신이고 많은 비를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신농을 따르는 무리와 헌원을 따르는 무리의 원하는 바가 상반되니 그 둘의 충돌은 불가피 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우산장사와 부채장사의 싸움을 보는 겪이니 안봐도 훤하게 그려집니다. 그래서 신농의 무리가 당시의 한웅인 치우에게 읍소하였을 것이고 치우가 중재에 나섰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처음에 수십차례 말로 타일러 중재를 하였을 것이고 여의치 않자 결국은 물리적인 방법을 썼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사기에서 70여 차례의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지요. 전쟁이 끝난 후 치우는 황제의 통치권을 회수하고 소호금천에게 대신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소호금천은 수메르를 다스리고 있었으니 사서에 기록된 동으로 왔다가 다시 서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기록함에 있어 소호금천을 황제의 아들로 둔갑시켜 후세에 전하고 있지요. 권좌를 물려 받았음을 그런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화하족은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춘추필법(春秋筆法)의 기법을 동원하지요. 그런데도 치우에 관한 기록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황제에 대한 기록은 두루뭉실하지요. 다만 전쟁에 대한 결과만 살짝 바꾸었을 뿐이니 누가 보더라도 쉽게 파악할수 있는데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정사(正史)로 취급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지요.

중원대륙과 메소포타미아의 사이에 위치하였던 황토지역, 지금은 토질이 변하여 사막으로 바뀐 곳, 아마도 그곳이 화하족이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급격한 사막화에 따른 환경의 변화로 점점 동진하였을 것이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머물렀던 곳의 문화와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이땅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화와 정신을 점점 다른 민족들에게 전파하였을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을 것입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온전히 다스리기 위해서는 전쟁에 의한 강압이나 물질적 풍요에 의한 회유 등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새롭게 포맷하고 원하는데로 프로그래밍하여 스스로 따르도록 함이 최선의 방안임을 다들 아실 것입니다.

최초에 나쁜 신을 뜻하는 악귀(惡鬼)라는 말은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이 숭배하는 마와 같은 음의 마(魔)를 끼워넣어 악마(惡魔)와 마귀(魔鬼)로 분리하고 악귀와 같은 뜻으로 가르치면 마는 그 순간부터 저주의 대상으로 바뀔것입니다.

(이는 마치 God와 Devil을 합하여 Godvil과 Degod으로 분리한 후 Devil과 같은 뜻으로 가르치면 사고의 혼동이 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나아가 마왕과 마녀 등의 파생어로 그 뜻을 넓히고, 자연재해에 화마(火魔), 수마(水魔) 또는 질병에 병마(病魔) 등의 이름을 붙이면 마는 영원히 그들의 정신세계에서 숭배의 대상이 될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뜻은 다르더라도 음이 같으니 상반되는 극단적 상황을 극복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이 숭배하는 마별을 그들의 기억속에서 지워버리고자 이를 삼태성(三台星)이라 명명하고 그 위치를 북으로 옮겨 버리지요. 대신 그 자리에 전혀 새로운 별인 북두칠성을 대두시켜 신격화 함으로써 마별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별탑을 쌓는 놀이인 윷놀이에서 그 유래를 연상시키는 본래의 이름을 지우고 모든 놀이 문화가 그들로부터 전해졌다고 가르쳤겠지요. 거리를 재는 단위인 리를 새롭게 고쳐 1리를 10리로 바꾸고 오행을 연상시키는 5리만 남긴채 나머지 숫자는 모두 지워 버렸을 것이며, 마일이라는 단위는 쓰지 못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모든 행사의 주기를 정하는 4를 죽을 사(死)로만 가르쳐 4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을 갖도록 만들었겠지요. 자식의 이름을 짓는데 오행을 필히 돌림자로 넣어 쓰도록 하여 지금까지도 이를 바꿀수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는 일일이 나열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우리 주변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수백년이상 자자손손 전해지니 세뇌(洗腦)란 당한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쉽게 알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빈 공간에 새로운 정신을 주입시키기란 매우 수월하였을 것이고,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다시 원래의 위치로 환원시키는 작업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보는 분들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할수도 있으니 모두의 동의를 구하기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길이길이 거쳐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연원을 따져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 가보면 그 답을 찾을수도 있을텐데,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을 저만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인가요? 구미호와 까마귀가 요물(妖物)과 흉물(凶物)로 바뀌어 전해지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누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역사의 기록을 조작하고 거기에 목을 메는지 너무나 명확하고 간단하게 추리해 낼수 있을 것입니다. 작금에 저들의 동북공정은 이러한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는 아닙니다. 단지 본 사이트의 내용을 살펴보고 역사공부를 새롭게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저의 글에 대한 입증 자료를 요구하시면 충분히 대응해 드리지 못할 것이오니 제현들께서 이점 십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글을 씀에 있어 몇몇 전문가분들의 의견이나 자료를 일부 활용하였고 저의 경험으로 뇌리에 남겨진 기억을 적극 동원하고자 노력했을 뿐입니다.

저의 글은 역사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쓰여졌기에 많은 부분을 저의 추측에 의지한 바가 크다 할 것이므로 전문성을 결여하였다는 비판은 달게 감수하겠습니다.

저의 글은 비록 거칠게 쓰여지고 정리되어 있어 일부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이해를 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을지라도 결코 허황된 거짓말로 세인들을 희롱하고자 한 의도는 단 한점도 없었음을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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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현재를 낳은 부모이니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결코 사생아의 신분을 벗을수 없을 것입니다

지나간 수백년 동안 남이 만들어 놓은 판위에서 그들의 뜻대로 살수 밖에 없었던 비참한 신분에서 하루빨리 탈피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갈때 미래는 보다 희망찬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역사는 그래서 잊어서도 안되고 버려서도 안되는, 그 어떤 것 보다 가장 귀중한 보물이 될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민족이나 국가간의 우월성을 가르는 잣대로 쓰이는 작금의 현실에서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심제님!

혹여 저의 글이 본 카페가 추구하는 방향과 취지에 어긋난다고 말씀하시면 하시라도 본 글을 내려드리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글쓴이 : 백운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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