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의 대한 역사적 사실
1) 東方禮義之國[동방예의지국]과 禮義[예의] 田蠶[누에농사] 및 織作[베짜기]는 箕子기자대왕으로 부터 시작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
2009년 새해 벽두, 원로 칼럼니스트인 김대중 씨가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이란 제하의 글을 통해, 우리나라는 본래 동방예의지국이었는데 지금은 도처에서 무례함이 넘쳐나니 우리 모두 자성하고 예의를 되찾자는 취지의 충언을 하였다. 공감하며, 다만 동방예의지국의 기원으로 제시한 출전 부분이 후한서 등과 충돌되므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로, 그 출전은 공자의 후예인 공빈(孔斌)이 지었다는 동이열전으로 공빈은 위나라 재상을 지낸 명사이다. 그런 정도의 인물이 쓴 내용이라면 중국에 전해 내려오지 않을 리가 없는데, 1959년에 국한문본으로 복원되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란 책의 부록에 실려 최근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 의혹이 든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서두에서 “동이가 천성이 유순하고 도리로 다스리기 쉬워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이라 일컬어졌으며, 그래서 공자가 구이에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논왈(論曰) 부분에는 “옛적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갔다. 그것이 그 나라 풍속의 시작이며 그 이전에는 들은 바가 없다. 기자가 8조의 규약을 시행, 사람들로 하여금 금할 바를 알게 하니 마침내 음란함과 도둑질이 없어졌다. 그 법이 수백천년 동안 이어진 고로 동이가 통하여 유순하고 삼가는 것이 풍속이 되었으며 서융, 남만, 북적의 3방과는 달랐다. 진실로 정치하는 바가 펼쳐진 즉 도의가 있었다. 그래서 공자가 분함을 품고 구이에 가서 거하고자 하였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에 반해, 약 2300년 전에 공빈이 썼다는 동이열전에는 단군과 자부선인 그리고 동이 사람인 순(舜)이 중국 백성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쳤음 등을 언급하며,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 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義之國)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나의 할아버지 공자께서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시면서 누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이렇듯 둘은 내용이 다르며 기원 면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켜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충돌을 해결할 방도는 없을까? 있다. 과연 공자가 기자로 인해 동이로 가고 싶어 했는지 아니면 단군과 자부선인, 순 임금으로 인해 동이로 가고 싶어 했는지는 공자와 관련된 문헌들을 조사해보면 그 정황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공자가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 누추하지 않다.”고 말했다는 부분의 출전은 논어 자한(子罕) 편이다. 공자가 구이에 살려고 하니 혹자가 “그곳은 누추한데 어찌하시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는 “군자가 거주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런데 논어에는 공자가 단군이나 자부선인을 언급한 대목이 전혀 없다. 그리고 단기고사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순 임금을 묘사한 적도 없다. 이는 다른 공자 서적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 기자에 대해서는 논어에서 분명히 “공자왈, 은유삼인(殷有三仁)”이라 하며 인자라 칭하였고, 또 주역 명이괘(明夷卦)에서는 기자를 군자라 하였다.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에서는 “우리 동방이 예의지국으로 천하에 알려진 것은 기성(箕聖)의 교화 때문”이라 하였고, 금남집(錦南集: 1571)에선 “우리나라 교화예의는 기자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당나라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기자비에서 “은나라에 어진 이가 있으니 기자라... 그런고로 공자가 그에게 특히 정성스러웠다.”라고 명기하였다.
따라서 여러 증거자료와 정황으로 볼 때 중국이 우리나라를 본래 예의지국이라 일컬은 기원은 기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2008년 경북대 김주현 교수에 의해 신채호가 썼다는 단기고사의 중간서 부분이 실은 단기고사의 역자이기도 한 이관구가 직접 쓴 걸로 밝혀진 것처럼, 그 부록에 실린 동이열전의 내용 또한 위작으로 보인다.
2009. 1. 4.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朴大鍾
첨부: 『漢書』(卷28 地理志下2)의 다음 문장 또한 동방예의지국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자료입니다.
“殷의 도가 쇠락하자 箕子는 朝鮮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禮義(예의)와 田蠶[누에농사] 및 織作[베짜기]을 가르쳤다.” (원문: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2011. 2. 17. 추가
출처:대종 언어연구소
2) 당시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지역은 기자조선.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료출처: 심백강 원장
3) 부여의 습속[은나라와 관련 하여 점복신앙,은력,흰색(백의민족)을 숭상하는 풍속, 순장 습관등도 은나라 왕족인 기자로 부터]
부여[扶餘, 혹은 夫餘]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중의 하나로서 발해연안 북,동부 지구에 위치했다. 부여에서는 제사, 군사, 정치면에서 고대 동방 사회의 중요한 싱앙 활동의 하나인 갑골을 통하여 점복을 행하고 있었음을 사서[史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선 중국의 진[晋]나라 진수(233~297)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서 보면, 군사라든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소를 잡아 그 굽뼈를 보고 좋고 나쁨을 점친다. 이때 소의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해져 있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한자원문 생략]"고 하였다. 이는 군사 활동이 있을 때마다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의 제골[굽뼈]로 점을 쳐서 출진[出陳] 여부를 결정했다고 하는 기록이다.
4) 은나라와 기자조선 관련 기사
이 외에도 8조의 법[8조법금], 홍범구주도 箕子기자대왕으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와 李조선시대에는 기자대왕을 우리역사이자 조상으로 보았는데 현 강단사학에서는 기자조선은 모순이 많다는 이유로 허구로 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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