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국사, 식민사관탈피 사실대로 고쳐야한다!

설레임의 하루 2011. 1. 13. 22:27

 
단군조선을 역사 아닌 신화로 보고, 기자조선을 부인
 
강동민 칼럼니스트


현행국사학계는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는 국사가 일제식민사관을 탈피한 국사라고 주장한다.그러나 현행국사 체제는 식민사관 그대로의 체제에서 지엽적인 부분만 조금 수정한 식민사관 복사판 국사임을 확인 할 수 가있다. 그 예를 확인해 보면 첫째 단군(계급의 명칭)조선을 역사 아닌 신화로 보는 것이다. 둘째 기자조선을 부인하는 것이다.

셋째 위만조선을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넷째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부여를 부인하는 것이다. 다섯째 반도조선이외 대륙에 있었던 대륙조선을 부인하는 것이 식민사관과 일치한다.

▲ 강동민     ©브레이크뉴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의 초대학장이던 이마니시(今西龍)가 삼국유사에 있는 단군조선은 몽고족이 고려 침입이후 항몽사상을 고취하기위하여 조작된 단군이었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장을 하였는데, 이와 똑같이 계승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국사학계다.

* 그 증거로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魏書)는 한(漢)나라가 멸망한 다음 삼국시대(조조. 유비. 손권이 세운나라)의 위(魏)(AD 220~265)나라의 2000년 전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고려 충렬왕(1274~1308)11년 이던 1285년에 일연(一然)스님이 삼국유사를 찬술하기 1000년 전 위서(魏書)에 단군조선을 증언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마니시(今西龍)는 몽고족의 고려 침입이후에 항몽사상을 고취하기위해 단군조선을 조작하였다고 논문을 발표하였다.

신라 제19대 눌지왕(417~458) 때의 충신이었던 박제상이 찬술한 부도지(符都志)는 삼국유사이전의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을 삼국유사보다 850여 년 전인 AD430년대에 이미 단군조선을 증언하였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먼저 4300년 전의 단군조선을 국정국사로 복원해 놓아야한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단군조선을 신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응당 우리선조들이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를 동양에서 최초로 건국하였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 또 현행 국사학계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부인한다. 이유는 기자가 한반도에 건너오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모든 것을 대륙조선은 한반도조선과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중국 고대 역사책인 사기(史記)에는 은나라 말기의 기자가 주(周)무왕의 혁명을 피해 조선으로 가버렸다는 소문을 듣고,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인정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고 역사서인 “사기 송미자세가”에 기록되어있다.


▲ 조선일보    
뿐만 아니라 기원전 2200년경 하(夏)나라 우왕 때부터 기록했었다는 고대중국의 지리풍속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고대 중국의 동해라는 황해와 북해라는 발해 쪽 모두가 고대 조선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은나라말의 기자가 산해경의 기록대로 요동(북경쪽)조선으로 갔다고 하였으며, 전한서 지리지에도 똑같이 기록되어있다.

前漢書 卷二十八 下地理志 樂浪(眞番竝合). 玄菟(臨屯竝合) 武帝時置 皆
濊貊朝鮮 故箕子去之朝鮮 樂浪. 玄菟屬幽州 應劭曰 故眞番朝鮮國

근래 발해지방에서 기자가 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후(箕候)라고 새겨진 기정(箕鼎:솟)의 유물이 발굴되어 사기 송미자세가의 기록(箕子去之朝鮮 : 기자가 대륙 요동조선으로 갔다)이 입증되었고,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위략”에 기자의 자손이 진번조선의 부왕(否王)
과 준왕(準王)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위촉을 받고 조선사를 번역한 모 대학 교수가 사기 조선열전을 번역하고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번역했지만, 진나라의 진시황 때 축성한 만리장성이 서역 감숙성(甘肅省)의 임조(臨洮)로부터 한(漢)나라 때 이전 요동의 음산산맥 동쪽(북경 서쪽지역)까지 쌓은 만리장성을, 마치 요동의 음산산맥 동쪽으로 부터 한(漢)나라 때 이후 갈석산의 산해관까지 쌓은 만리장성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으니, 즉 보았으면서도 인식하지 못하는 견이불견(見而不見)의 지경에 와있는 것이다.

* 명나라 때 음산산맥 동쪽으로부터 요동의 산해관까지 새로 건축한 만리장성은 가짜 만리장성이었는데, 요즈음은 산해관에서 또 압록강 위 단동까지 약2500km 새 만리장성을 벽돌로 쌓고 있다.

* 위만조선(衛滿朝鮮)을 한반도내(內)라고 하는 억지주장과 똑같이 일치한다.

위만조선의 정확한 사료는 중국의 정사인 “사기 조선열전(史記朝鮮列傳)”을 보아야한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의 왕도는 요동 창려 지방 험독현 발해연안에 위만조선의 구도(舊都)가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위만이 망명하여 준왕(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의 허락을 받고 진(秦)나라와 경계였던 공지상하장(空地上下鄣)에 머물게 하였을 때 진번조선인들에게 부역을 시켰던 위만 이었고, 한(漢)나라의 침략을 대비하는 수비를 구실삼아, 준왕 조선을 탈취한 후의 위만조선 왕도는 발해연안 험독현의 왕검성이었다는 기록이다.

또한 한나라와 위만조선과의 전쟁 때 한나라 수군이 발해 쪽에 도착하여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했다가 대패를 했었고, 육군 또한 요동으로 출격하여 요동의 패수를 방어선으로 했던 위만조선군과의 전쟁이(左將軍荀彘 出療東 討右渠: 좌장군순체 출요동 토우거) 요동위만조선 지역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조선군과 한나라 군이 전쟁한 장소는 패수인데 이 패수는 한반도의 청천강이 아니라 현 중국지역 발해 쪽임을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다.
 
* 고구려. 백제. 신라의 뿌리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부여(동호)라는 나라인데, 현행 국사학계는 삼국이후 서기49년에 부여가 나타났다고 <부모가 자식 되는 듯이> 선후가 뒤바뀌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니 한심한 지경이다.

* 주류 학자들은 조선을 한반도 안에서만 이야기해야지 대륙조선을 이야기하면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광복 후의 국사학자
는 반도위만조선 이외의 대륙조선이 존재 했었다는 국사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다른 하나는 반도조선이외의 대륙조선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국사대관(이병도저)을 기본으로 해서 논문을 발표 해야만 하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도록 서로 엮어 놓고 있기 때문 이기도하다.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일본보다 짧은 역사로 만들어야만 통치하기가 쉽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대륙에 있었던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한반도 안으로 만들어서 역사를 축소해 놓았다.

일본(日本)이 위만조선 이전에 있었던 대륙 조선을 인정하게 되면, 조선민족을 후진민족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선진문화와 역사를 지닌 조선을 지배한다는 것은 모순이며,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위만조선이전 기자조선과 요동 예맥조선전체를 부인하고 은폐했음이 확인된다.

* 일제식민사학자로 동원되었던 경도제대 후지다(京都帝大 藤田亮策)교수까지도 그의 저서 <朝鮮考古學硏究>350~353 쪽에 기록하기를 “한반도 평양토성은 낙랑군 치소로 보기어렵다고 하며 평양에서 발굴되었다고 하는 낙랑군장 봉니(封泥)도 위조품이었다고 증언했음이 확인된다.”

* 북한 평양의 낙랑국(樂浪國)은 기원전 165년에 세워졌다가 AD37 고구려에 항복하였고, 고구려 대무신왕 20년 아들“호동왕자와 낙랑국의 낙랑공주”와의 사이에 사랑의 일화가 있는 최씨(崔氏) 낙랑국(樂浪國)이었는데 여기를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이름이 비슷하니 거짓으로 위장하여 만들어놓은 곳이다.

*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 대하여서도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위지동이전등 여러 사서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한반도 한강 이남에 “삼한”이 모두 다 있었다고 국사책에 거짓 기록해 놓고 있다.

後漢書東夷傳. 三國志魏志東夷傳  韓在帶方之南 方可四千里 有三韓馬韓.辰韓.弁韓.............
辰韓在馬韓之東 避秦役來適韓國 非但燕齊之名物也

(후한서동이전과 삼국지위지동이전: 대방(북경 서남 아래쪽)의 남쪽에 한이 있는데 사방 4천리이며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이라..... 진한은 마한의 동쪽이며 진(秦)나라의 부역을 피해 진한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 근세조선 정조(正祖 1776~1800) 때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도 삼한 사료는 한반도에서 찾을 수가 없다고 하였고, 청나라 때 역사서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도 한반도 내의 삼한사료는 찾을 수 가없다고 하였다..

* 사방4천리가 되는 넓은 땅“삼한“의 장소는 한반도의 남한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 신문 보도
* 현행국사에는 위만조선의 영토가 한강 이북에서 압록강까지 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위만조선을 알기위한 기본사서(史書)는 “사기조선열전”인데 여기에는 위만조선의 영토가 동서1,300리이고 남북 2,000리라고 적혀있다. 즉 한반도 전체보다 더 넓고 큰 위만조선 이었던 것이다.

* 사기조선열전에 기록된 내용은 연(燕)이 전성 했을 연소왕(燕昭王: BC311~279)때 연이 진번조선을 침략 했었다고 하며, 진(秦)이 연을 멸했을 때의 조선은 음산동쪽 요동 바깥쪽(遼東外徼)의 조선이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진나라와 조선의 경계를 적어놓았던 것이다.
조선의 강(江) 중 하나는 북경서쪽 음산으로부터 발원하여 하북성 북경 멀리 서남쪽으로 흘러 발해 쪽으로 들어가는 상건하(桑乾河)이자 영정하(永定河)를 추수(溴水)라고도 하고 열수(迾水)라고도 하고 살수(薩水)라고도 하고 폐수(浿水)라고도 하는 강을 한(漢)나라와 경계로 했던 “조선이 진번조선이며 준왕조선 이었고 위만조선” 이었다.

이러한 위만조선은 예맥조선의 한 부족국가였다는 것이 사기흉노전에 기록되어 있다.

* 사기 권8 고조본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한나라는 건국직후이던 고제오년(高帝五年: BC201)에 항우(項羽)가 불복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그다음 고제11년에는 한신(韓信)의 반란이 있었고, 그다음 줄을 이어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의 반란이 있었고, 연왕 노관<燕王盧綰: 한고조 유방의 고향친구이며 위만(衛滿)이 모시던 왕(王)>등의 반란이 줄줄이 이어져서 한(漢)나라 초기에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므로 경제(景帝 BC156~BC141) 때 까지 나라가 혼란하여 사마천은 증언하기를 이때는 마치 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는 증언이다.

위만은 한나라의 이러한 혼란기를 이용하여 산동지방의 옛 제나라 땅들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했었음이 입증된다.

이곳이 요동 위만조선으로서 예맥조선의 부족국가였고 사방이 수 천리였으며, 위만조선의 부족장인 예군남여(濊君南閭)가 거느린 호구(戶口)가 28만구(萬口)였다는 것이 입증된다.
이성계의 근세조선 초기의 한반도 인구가 10만호인 것을 감안해보면 저절로 답이 나온다.
* 당시 조선의 땅은 지금의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삼성과 하북성, 산동성 등이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 또한 612년에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시 싸웠던 장소인 살수대첩 장소인 살수강은 요동 지역인 열수 또는 폐수인 것이 확인 되었다. 북한의 청천강이 아니다.
* 결론적으로 단군조선을 바로 이어받은 나라는 부여이며 동호라고도 불려 졌고, 한사군중의 하나인 낙랑군은 요동 낙랑 이었으며, 살수대첩의 장소인 살수강은 북한 청천강이 아니라는 확인을 하게 되었다.

*** 단군조선의 처음수도는 심양(아사달=광명의 땅. 밝은 땅)이었으며,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서쪽변방인 지금의 하북성 북경지역이었으니, 자연히 기자를 이어받은 위만조선도 요동지역인 북경 지역 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명료하게 밝혀진 우리민족의 역사를 복원하여 잘못 기재된 국사교과서를 올바르게 고쳐야 한다.

여기에 적힌 모든 사료들은 중국지역에 산재해 있었던 각 나라들이 기록한 역사서인 “산해경” “사기 조선열전“ ”삼국지 위지동이전“ ”사기 흉노전“ 사기 송미자세가” “후한서 동이전” “사기 소진열전” “사기 진시황본기“”화식열전“ ”한서 지리지“등 많은 사료에서 확인 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에 도달했으며 세계12대 무역 강국의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더욱더 발전해야하는 우리는 홍익인간의 세계평화 이념인 우리민족의 기본정신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사실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책을 만들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추어 야만 한다.그래야 우리후손들이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진 훌륭한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hanminjock1944@hanmail.net

*필자/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