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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대륙을 가다.-누가 남극을 탐험했을까?

설레임의 하루 2010. 1. 23. 20:13

출처: 자료설명/사진제공 : 극지연구소 이종익 박사  작성자:이은정기자  

      작성일:2010-01-23

 

※ 기자칼럼은 KBS 보도정책과 무관합니다.

 

 
  

 

 

남극 대륙을 가다.-누가 남극을 탐험했을까?

아라온 호 동행취재 중인 이은정 기자로부터 ’인터넷 접속 불가’ 연락이 왔습니다. 
짧게는 1월말, 길게는 2월초까지 접속 불가 상태가 계속될 것 같다고 합니다. 
남극 현지의 생생한 소식을 기다리시는 네티즌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전하며, 이은정 기자가 출발 전 미리 전해주고 간

’남극 이야기’를 당분간 연재합니다.
현지 인터넷 상태가 좋아지는 대로 아라온호 소식은 계속 전해 드리겠습니다.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는 극지 탐험의 시기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비롯해 노르웨이, 벨기에, 미국의 많은

탐험가들이 북극과 남극을 정복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당시 유일한 탐험 수단은 배. 그래서 많은 선원들이 필요했다. 영국의 한 신문에 실린 선원 모집 광고를 보자. 
 
 
“아주 위험한 여정과 낮은 월급, 굉장히 춥고 수개월간 캄캄한 어둠이 있다.

위험은 계속되고 귀국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음. 하지만 성공할 경우 명예가 뒤따른다.
 / 어네스트 쉐클턴”



이 광고를 보고 누가 탐험을 지원했을까?
경쟁률이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시 수많은 탐험가들이 머나먼 대륙, 남극을

찾아가는 데 충분한 선원이 모여들었다.

 
남극 탐험의 기치를 가장 높이 세운 사람은 영국 사람 로버트 스콧(Robert F Scott)이었다.
그는 1901년부터 1904년까지 한차례 남극을 탐험해 남위 82도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성공에 힘입어 1910년 다시 한번 남극점 도전에 나선다.

남극점을 가기위한 가장 짧은 길은 이번에 아라온 호가 찾아가는 서남극 쪽이다.
전체 남극 지도를 보면 동쪽은 남극점까지의 거리가 길고 북쪽은 높은 절벽으로 배를 대기가 어렵다.
서쪽 로스해 주변에 배를 댈 경우 직선 거리로 가장 가깝게 남극점에 갈 수 있다.
 

당시 남극 탐험을 하려면 1년 전에 미리 배를 타고 와야 했다.
한해 전에 미리 와서 본부를 짓고 겨울을 난다.
이때 탐사 루트를 미리 탐사해 중간 중간에 식량을 묻어두는 준비 작업도 한다.
스콧은 1910년 65명의 탐사대를 데리고 로스해 동쪽 해변에 상륙한다.

이와 동시에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젠(Roal Amundsen, 1872~1928)도 남극점 탐사를 결심한다.
아문젠은 원래 북극점 항해를 준비해 왔으나 1909년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을 먼저 정복해 버렸다.

아문젠은 이에 낙담하고 노르웨이 여왕에게 찾아가 “남극을 다녀오겠다”고 보고한 뒤 배를 남극으로 돌린다.

이때는 이미 스콧이 남극 탐사를 떠난 후였기 때문에 아문젠은 자신의 남극 여행을 비밀로 하고 길에 오른다.  

남극점 탐사의 경쟁자, 아문젠(왼쪽)과 스콧.
 
결과적으로 아문젠은 스콧보다 30여일 일찍 남극점에 도착해 인류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영광을 누렸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
뒤늦게 출발한 아문젠은 스콧과 달리 19명의 정예 탐험 멤버를 꾸렸다.

운송 수단은 모두 개썰매로 결정한 뒤 50마리의 알래스카 개를 데리고 출발한다.
아문젠은 로스해의 서쪽 끝 해안에 상륙한 뒤 얼음 위에 집을 짓고 그해 겨울을 보냈다.
이때 아문젠이 선택한 루트는 스콧의 루트보다 100여km 더 짧았다(여기서부터 아문젠이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아문젠은 남극의 여름이 시작되는 10월에 탐험길에 올랐다.
얼음으로 덮인 로스해를 걸어가다 높은 산을 만난다.
 이때 아문젠은 24마리의 개를 사살하고 식용으로 사용한다.
1911년 12월14일 드디어 남극점을 정복하고 노르웨이 깃발을 남극점에 꽂은 채 의기양양하게 귀환한다.
 
한편 스콧은 어떻게 됐을까. 65명의 스콧 탐사대는 거대한 자연과학팀이었다.
탐험전문가뿐 아니라 의사, 과학자, 사진가, 스키어 등이 포함됐다.
운송수단으로는 19마리의 ‘시베리안 포니’(말과 조랑말의 중간정도 크기)와 36마리의 개를 선택했다.
남극 해안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탐사팀의 과학자들은 남극의 지질을 연구하고 해안선을 탐사했다.
일부는 황제펭귄을 탐사하기 위해 남극의 겨울동안 5주간 탐사를 했는데 수확물은 겨우 펭귄 알 3개뿐이었다.

(이 탐사는 ‘지상 최악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다).
 

스콧의 극점 탐험대도 1911년 10월 에반스 곶을 떠나 남극점을 향했다.
하지만 기상 악화,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한 말들 때문에 탐사 일정은 지연되기 시작했다.
결국 말들은 모두 안락사시키고 고생고생 끝에 해를 넘긴 1912년 1월 남극점에 간다.
하지만 그들을 반긴 것은 검은색 텐트(노르웨이 탐사대의 상징)와 텐트 위에 올려진 노르웨이 깃발이었다.

아문젠은 노르웨이 국기와 노르웨이 국왕기를 함께 매달아 놓고 스콧에게 편지를 남겼다.

스콧이 나중에 도착하면 이 편지와 국왕기를 노르웨이에 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문젠이 남극점에 남긴 검은 텐트.
위에 노르웨이 국기와 함께, 아래에 하다 더 달린 것이 노르웨이 국왕기다.
 
아문젠은 남극점 정복 이후 노르웨이의 영웅이 된다.
이후에도 수많은 탐험을 계속했는데 1918~1920년에는 모드호를 타고 북동항로를 항해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비행선 노르게호를 타고 북극점 상공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함께 탐험했던 이탈리아 탐험가 노빌레의 북극탐험대가 1928년 실종되자 아문젠은 친구인 노빌레를 구하러 비행정을 타고

북극으로 향했다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아문젠의 동상은 아문젠이 그곳, 노르웨이 스발바드에 서 있다.

 [ 자료설명/사진제공 : 극지연구소 이종익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