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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의 정체를 밝힌다.

설레임의 하루 2009. 10. 1. 01:58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GXtu/177 

 

 

 

 

 

선비鮮卑족은  우리와 한 핏줄이다.

우리는 선비, 또는 선비족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동양사나 한국 고대사를 보면 우리의 주변민족 또는 북방의 한 오랑캐 족속으로 선비라는 민족이 존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비족에 대하여 중화사관에서는 소위 ‘춘추전국(단군조선이 약화됨에 따라 단군조선의 연방소국들이 독립하고자 반란을 일으켜

들고 일어난 혼란한 시기)’시대에 등장하여 남만주와 몽골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서기 후 이른바 5호16국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선비족은 고대 동아시아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수(隋, 영어:Sui Dynasty, 581년 ~ 619년)나라 나, 북위 정권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는 학설이 강력히 제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선비鮮卑라는 말에서 卑를 보면 ‘저속하다, 낮다, 천박하다’ 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차이나족속이 자기중심의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면서 주변 한민족을 비하하여 부르며 붙인 이름이라는 것은

참역사학계에서는 다 아는 일반상식이다.

자기네를 중심으로 두고 주변의 네 방향에 자리 잡고 있는 던  4 이(四夷)한겨레, 즉 큰 활을 쏘는 네 부류의 한겨레를 이만융적

(夷蠻戎狄)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중화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한 이씨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선비족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북방의 이민족으로 배워왔다.

백제와 고구려의 도성에 침범한 소정방과 설인귀의 당나라군대가 아주 작정하고 착수한 제일의 만행은 당시까지 존재하던

단군조선의 사서 등 고사서를  모두 불태우거나 약탈한 것이다.

그리고 차이나족의 거수국, 이씨정권은 차이나중심의 사서만 남은 상태에서 이것을 베껴다가 우리역사의 기틀을 잡는다.

이것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고해졌고, 정치적 광복이후에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선비족은 우리와 남남이 되었다.


그러나, 단군세기 등 참역사 사료를 보면 선비족이 우리와 남남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15세단군 대음(후흘달)재위51년 기미40년(서기전1622년)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둘째, 32세단군 추밀 재위30년 갑인3년(서기전847년)선비산의 추장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셋째,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는데, 보면 고구려시대까지만 해도 선비족은 고구려연방의 한 연방자치국으로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즉 당연히 선비족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 여름 4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우리역사의비밀 네티즌 게시판의 신완순님 게시물에서 발췌)


넷째, 신라의 법흥왕은 선비족의 모용씨의 후예였다고 하는 주장도 나타나고 있는데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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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경북 경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이다.

그런데 아래 선비족의 유물에서도 같은 천마도가 발견된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가, 분명히 한반도 경주에 나라를 건설한 세력과 선비족은 같은 핏줄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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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선비족의 활동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이들의 뿌리문화 역시 한반도 한겨레의 당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을 보면 천손신화를 나타내는 황금으로 된 새모양이 나타나고 신목(神木)의 나무가지가 뻗어 있는 것도 나타난다.

여기서 신목은 무당문화의 결정체, 강원도 강릉단오제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신목-당목-서낭당의 나무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비족에게도 아직 확인은 안되고 있지만 분명히 독자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제천행사도 있었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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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유물은 전형적인 북방한겨레의 하늘자손사상을 담고 있는 봉황=새를 나타내고 있다.

새는 북방한겨레의 무당문화에서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역할을 하는 상징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천손문화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지역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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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목의 나무가지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신목은 우리나라의 서낭당의 나무와 같다.

여기에는 현세의 복락을 기원하면서 오색의 천 조각을 매달아 놓기도 한다.

현재북방시베리아 소수 한겨레는 자작나무에 복락을 비는 천조각을 달아 놓고 있는데

러시아인들이나 관광방문객들도 덩달아 따라하고 있는것이 발견된다.

역시 무당문화의 한 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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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을 무지막지한 미개인 내지 야만인으로 학습받아온 세대는 위와같은 고급문화를 상상하기 힘들것이다.

자세히 보면 바둑을 두고 있는 그림으로 추정된다.

바둑의 원조는 한겨레라는 것은 이미 증명하였다.(백제방의 공지-금동대향로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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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째, 선비족의 언어는 오환족과 함께 고대 몽골어(퉁구스어)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몽골어와 우리 한국어는 본 바탕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동호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 한겨레임이 이미 증명되었는데, 이미 연구된 바로는 선비는 동호족의

후예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선비족의 영웅은 서기2세기 중엽의 단석괴(檀石槐)가 있는데 단석괴의 檀을 보면 단군의 단과 같다.

이 점을 보아도 선비족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같은 핏줄임을 알 수 있다.(임승국의 한단고기-단군세기편 참조)


결론적으로 선비족의 역사는 우리 한겨레의 역사이다.

또한 선비족은 우리와 다른 이민족 오랑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한겨레다.

마치 우리와 다르게 배우게 된 것은 한국내 중화사대주의 새끼중국인들이 한국 제도권 사학계를 틀어쥐고 현재의 국사책을 썼고

이것을 참역사인 양 국가가 강제로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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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 출처: http://blog.naver.com/cjswodlrlcjf?Redirect=Log&logNo=60044731035 

( 이 블록은 위 그림을 차이나측 누리집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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