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진승'과 '오광' 농민봉기 임박(중국대륙)

설레임의 하루 2009. 5. 7. 01:28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박현정         http://cafe.daum.net/mookto/GbA8/21

 

 

 

 

중국이 드디어 서서히 찢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네요. 

중국대륙이 다시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하면, 우리는 먼저 잃버린 고토 만주를 접수해야 겠지요.

그런데 이런 천우신조의 기회가 다가오는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답답해서 죽겠어요.

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남쪽은 다시 동서간 계층간 나뉘어 서로 으르렁 대기만 하고 있어요.

더이상 매국노 세력의 농간에 속지 말고 온 인민이 제정신으로 돌아와야 할텐데, 어서 참역사를 알았으면 좋겠네요. 

  

아래 자료 출처:

 

http://blogbbs1.media.daum.net/griffin/do/blognews/foreign/read?bbsId=B0015&articleId=1319

 

중국의 전 정치국 상무위원 교석은 10년 전, "중국의 농촌에 가보니, 모든게 다 준비되어 있더라,

이제 진승과 오광만 있으면 된다." 라고 걱정하며 한탄을 하였다.

진승과 오광은 중국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농민운동 지도자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의 농촌은 정체 모를 긴장감이 가득했다.

농촌 경제발전 현지조사를 위해 중국의 한 서부 농촌 마을에 도착했을때, 뜻하지 않게, 마을 간부들의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나중에야 알고 보니, 얼마 전 이 지역 현(縣)정부가, 중앙정부에서  농촌 빈곤층을 돕기 위해 지원한

예산을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 발각되어 전 중국에 낱낱이 방송된 터였다.

마을 간부들은 동부 대도시에서 사회조사 한다고 온 학생들을 심히나 경계하였고,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가는 곳마다 동행을 고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신기하다는 듯,  제법 큰 사진기를 보고는 기자냐고 연신 물어댔다. 
 

 아침 나절 길에서 만난 이 할아버지들은 마작을 하기 위해 친구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요즘 생활이 어떠시냐는 질문 한마디에 30분 넘게 장황한 연설을 하셨는데, 요점은 중앙 정부는 지방관리들을 잘 통제하고 지방

관리들은 농민들을 잘 보살펴야 하는데, 이 지방관리들이 농민은 저리 제껴두고, 자기들 뱃속 챙기기에만 바쁘다고 , 지방 관리들의

만행을 불평하시는 것이었다 

 하루 조사가 끝날 무렵, 어느 농민 하나가, 손짓을 해 부르더니,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집안으로 안내했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몇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마자, 한 마을 사람이 격양된 목소리로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기자라고 생각한 그는, 그들의 말을 녹음해서 꼭 상급기관에 전해주길 원했다. 

 

몇 년 전에 자신들의 토지에 공장을 짓는다 해서, 보상금을 받는다는 조건하에 토지를 내주었는데, 주민 대표가 중간에서 토지

보상금을 거의 떼어 먹고는 10%도 안되는 푼돈을 던져주었다는 것이다.

토지는 농민들에게 있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도로에 드러눕는 한이 있어도 토지를 절대

양도하지 않을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피같은 돈을 위에서 낼름한 것이다.

농촌 지방 관리들의 부패행각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생계형 탐관오리로, 먹고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몰래몰래 농민들 돈을 가로채는 경우이다.

현재 이곳 촌간부의 한달 월급은 220위엔(약 3만원)이다.

이곳 물가에 비교해도 턱없이 모자라는 금액에다가, 이런 저런 할일이 많고 신경쓸 일이 많아 농사를 지을 시간도 없다고 한다.

또다른 하나는 전형적인 배째라형 탐관오리로, 대놓고 농민들의 돈을 수탈하는 경우이다.

 

이들이 말하는 주민대표는 배째라형 탐관오리였다.

그 부패행각이 극에 달하고 인하무인이라 주민들도 참다참다 분통이 터진 것이다.

게다가 주민들이 선거로 뽑은 대표도 아니고 돈을 사고 그 관직을 샀다고 한다.

전에 마을 사람들 약 20여명이 이 주민 대표를 고발하려 하자, 오히려 "니들이 감히 나를 고발 할 수 있겠냐?!" 라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주민들이 이 주민대표를 파면시킬려고 서명도 하고 고발하려고도 했지만 아직까지 효과가 없단다.  

 

마을 주민 한명이 열쇠로 겹겹히 잠긴 서랍을 열어 이런 저런 서류를 보여줬다.

관련 법 서적도 있고, 중간에 떼먹은 돈을 세세히 적은 서류도 있고, 주민들이 서명한 파면요구서도 있었다. 


 

*******을 파면하는 서(書)

 

파면대상:**지역 주민대표 ****
파면이유: 일처리가 공정하지 못하고, 관직을 악용해서 마을 주민들의 이익을 가로챔, <중화인민공화
 국 촌민위원회 조직법>

제10,11 제 2관(款) 제 16조의 규정에 따라 현재 **촌 **지역의 선거권이있는 주민들이 파면을 요구한다.

상급기관이 법적 절차에 따라 이자를 파면하길 희망함. 파면을 요구하는사람들 서명


 

이들은 바로 상위 행정단위인 鎭 정부에도 이야기해보고, 또 그 상위 행정단위인 縣정부에도 이야기를 해보고, 지난 5월초에는

그 상위 행정단위인 市정부에서 지방 관리들이 나와서 회의를 한 후 10일 안에 연락해주기로 했지만 몇달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라

고 한다.

 

이 주민들은 우리가 마치 무슨 권한을 가진 사람들인 것처럼, 마치 기자인 것 처럼 이런 저런 자료를 보여주고, 울먹이며 하소연을

했다.

자신은 원래 문맹이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글자 하나 하나 깨우치며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말을 듣다가 결국 눈물이 났다.

그들과 함께 분노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이러한 출구가 안보이는 현실이 가슴아파서였다.

이들은 가장 밑바닥에서 불이익을 당해도 하소연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방관리들은 거의 한통 속 이거나, 뇌물이 마치 먹이사슬처럼 연결되어 있기때문에, 하소연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어찌보면,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지방관리들은 자신들의 작업량에 비해서 월급이 너무 적기때문에, 그리고 그시간에 충분히 다른 일을 해서 큰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리때문에, 농민들의 돈의 일부분을 자기 주머니로, 그 밑의 관리 또 그리고 그 밑의 관리...

결과적으로 농민들 손에 남는 돈은 아주 일부분인 것이다.

 

  중국 13억 인구의 62%는 농촌 거주자이다.

해마다 농민들의 불만수위는 높아만 가고, 중국 각지에서  많은 농민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홍콩측 언론에서 한해 약 8만여건의 농민시위가 일어난다고 밝혔지만, 확실한 것은 그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농민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작년 전 농촌의 세금을 없애고, 9년 의무교육제도를 전격 도입했다.

서부대개발정책과, 신농촌건설운동에 맞물려 실시된 정책이다.

중국 토지면적이 워낙에 넓고 인구가 많아 그 효과는 아직 미지수이다.

제대로 효과를 볼려면 몇십년은 지나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있다.

2007.01.04 ⓒHL

 

 

난세의 영웅-중국 최초의 농민반란가

항쟁을 계속 전개하여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 한나라를 탄생시켰다.

진승과 오광은 직접 진왕조를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봉건왕조의  폭정에 과감하게 항거함으로써,

중국역사상 최초의 농민투쟁을 이끈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중국 고대 첫 농민봉기를 일으킨 진승, 오광

진승은 자가 섭(涉)이므로 진섭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진승은 양성(陽城), 그러니까 오늘의 하남성 등봉동남(登封東南) 태생입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머슴을 살았습니다.

당시의 머슴은 노예나 노비의 신분이라기보다는 남에게 고용된 농업노동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고용하여 농업경영을 하는 방식이 이미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진승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은 사람이였습니다.

어느 하루 진승은 밭일을 하다가 함께 일하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후일 우리 사이에 꼭 누군가 부귀를 누리게 되겠는데 부귀를 누리게 된 사람은 가난한 형제들을 잊어서는 안되오.]

 

 그러자 친구들은 남한테 고용되여 일하는 신세에 부귀를 누릴 헛된 꿈을 꾼다고 진승을 비웃었습니다.

이에 진승은 후세에 널리 전해져 내려온 유명한 고사성어를 남겼습니다.

그 성어가 바로 [어찌 참새가 기러기의 큰 뜻을 알겠는가]입니다.

이 성어만 보아도 진승은 당시 자신이 훗날 무엇인가 성취하리라고 확신했던것이 분명합니다.

 

 오광도 진승과 같은 하남 출신으로, 역시 매우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테여났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진시황의 아들이 황제를 계승한 기원전 209년에 변방으로 징발됐습니다.

이들이 가게 된 곳은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 서남 지역인데 이 지역엔 당시 주로 가난한 사람들만이  변방수비를 위해 동원됐습니다.

진승과 오광은 징발된 900여명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미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홍수를 만나 길이 막힌 그들은 도저히 기한 내에 도달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당시의 법은 정해진 시일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무조건 처형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진승과 오광은 [지금 도망가도 죽고, 봉기해도 죽을 수 있다.

이왕 죽는 것이 마찬가지 일 바에는 난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죽는 편이 낫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주 미신적이여서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 꼭 점괘로 길흉을 보았습니다.

점쟁이는 점 치러 온 진승과 오광의 뜻을 알아차리고 좋은 점괘가 나오도록 했습니다.

진승은 봉기에 앞서 비단천에 [진승왕]이라고 붉은 글로 쓴후 물고기 배속에 넣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물고기를 사다가 배를 가르니 [진승왕]이란 글이 적인 비단천이 나왔습니다.

모두들 진승이야 말로 하늘이 돕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였습니다.

 

 

 진승과 오광은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진나라에 의해 천하가 고통당한지 이미 오래거늘 천하를 위해 일어서면 호응하는 자들이많으리!]라고 일행을 선동했습니다.

진승은 [왕후장상이 어찌 처음부터 따로 있겠는가] 하면서스스로 장군으로 칭하고, 오광을 도위(都尉)로 명했으며 국호를 대초

(大楚)로 정했습니다.

국호를 대초로 정한것은 봉기가 전국시대의 초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초는 중국 최초의 농민정권이었던 셈입니다.

 

봉기를 일으킨후 진승, 오광의 농민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했습니다.

진승은 본 부대를 이끌고 오광은 병력 일부를 휘솔해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습니다.

오광의 부대는 곧 정부군 지도자를 내세워 수도로 돌진했습니다.

한달도 못되여 봉기군은 군사요충지인 진현, 즉 오늘의 하남성 회양시를 점령했습니다.

이 시기 진승의 봉기군은 전차 6백여대를 소유하고 있었고 군사는 기병 천여명, 륙군이 수만명에달했습니다.

 

진승, 오광이 봉기를 일으킨후 진나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각지의 백성들과 귀족들은 분분히   호응해 나섰습니다.

진승은 여러 갈래의 봉기군을 휘솔해 가지고 진왕조를 뒤엎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습니다.  

 

 

진왕조 2세 2년인 기원전 208년 9월 진승의 부하인 주문이 함곡관(函谷關)을 공략했습니다.

이때 봉기군은 천여대의 전차를 갖고 있었고 군사수는 몇십만명에 달했습니다.

봉기군이 함양과 백여리도 안되는 지점까지 진격해 가자 진왕조는 대장인 장감(章邯)에게 대군을 주어 동진해 봉기군을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홍문전역(鴻門)에서 진승의 봉기군은 대패해 관외로 퇴각했습니다.

11월에 이르러 주문이 이끈 봉기군은 연속 두번이나 대패해 거이 전멸되였고 주문은 자살했습니다.

주문이 이끈 서로군이 전멸된후 오광이 이끈 봉기군은 협공을 받게 되였습니다.

이때와서 봉기군 내부에는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오광의 부장인 전장(田臧)이 부하들을 선동해 오광을 살해했습니다.

내분으로 더 큰 타격을 입은 봉기군은 장감이 이끈 진나라 군대에 패했습니다. 

 

 

 주문과 전장이 이끈 봉기군을 소멸한후 장감은 곧추 장촉정권 중심인 진현으로 진격했습니다.

워악 진현을 수비하는 군사가 적었기에 진승은 군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도망쳐온 등설 (鄧說)을 처단했습니다.

그러나 진승은 적은 군사로 진나라 대군의 진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진현에서 퇴각해 지금의 안휘성 경내로 이동하던 도중 차몰이군인

장가(庄賈)에게 살해되였습니다.

진승과 오광은 실패했지만, 이들은 진왕조의 멸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반란한 틈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의 귀족세력, 특히 통일전 진나라와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후예들이 진왕조에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특히 항우(項羽)와 류방(劉邦) 두 인물이 등장하여 패권을 겨루다가 결국 기원전 206년 진왕조가  붕괴하고 한왕조가 탄생했습니다.

진왕조의 멸망과 한왕조의 계승은 진승과 오광에 의해 그 계기가 마련됐던 셈입니다.

 

거시적 측면에서 볼 때 진승과 오광이 이끈 농민봉기는 중국사의 독특한 발전모식을 형성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후 거의 모든 왕조의 쇠퇴기에는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왕조는교체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에서는 농민봉기가 역사에 미치는 역할이 대단한것만은 사실입니다.

거대한 봉건왕조를 무너뜨리는 대규모 농민봉기가 이미 2천년전에 발생했다는 사실이야 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진승, 오광이 일으킨 중국 고대 첫 농민봉기는 중국 역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수록했습니다.

 

 
출처:중국국제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