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위만,기자조선의 위치에 대하여

설레임의 하루 2009. 4. 19. 08:33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心濟      http://cafe.daum.net/dobulwonin/IWCC/4

 

 

 

 

고조선기 만약 기자가 조선에 들어와 왕이 되었다면 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중국의 영향을 받은

출토물이 없는가?

즉, 만약 지나쪽에서 기자가 들어왔다면 자기 혼자서 들어 와서는 고조선의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어느 정도 데리고 중국의 발달된 무기(즉,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 함께 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왜 고조선 시대의 출토물 중에 중국 계통의 청동기는 출토되지 않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족계통의 청동기 무기의 성분은 <구리+납>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구리+납으로 된 중국 청동기가 고조선의 영토에서 출토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고조선 시대의 청동기 무기로 출토된 것은 북방계통의 <구리+아연>으로 된 청동기만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중국과 다른 양식입니다.

또한, 위에 사실을 보면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북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가 됩니다.

즉 지나인 기자가 西周에서와 고조선국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뒤집어 이야기하면 기자는 동이족라는 이야기도 되는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지나사가들 말대로 고조선 중간에 기자조선이 들어서고

기자조선 다음에 위만조선이라는 기존의 인식 논리가 아니라  고조선(BC2333-108),기자조선

(BC1122-194) ,위만조선(BC194-108)이 서로 다른 조선국이라는 이야기이며 이들은 전란을 피해

황토고원일대에서 고조선국의 서부국경 일부로 이주해 와 고조선서부국경에서 봉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제후국이라는 이야기 이다.

 

위만조선의 세력팽창을 경계한 漢이 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하였다는 식의 황당한 이야기

전개는 이제 그만 할 때가 되었다.

 

또 하나의 근거로 광개토왕비 表文에 고구려의 왕통이 동부여 금와왕으로 부터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그연대를 따지면 BC233년 정도가 되는데 같은 하북성 북부유역을 차지하였던 부여

(고구려)와 부딪히지 않고 있었다는것은 정치역학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것이다.  

왜냐하면 고조선도 말기에는 列國으로 분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것은 지나사가들이 의도적으로 <요수를 영정하로 둔갑을 시켜> 고조선의 강역이 동으로

이동하게끔 조작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서부지역 산서성 상간하(상류)와 같은 하천인 영정하(중류) 와 별도로 그 동쪽에 있는

요수를 영정하로 조작하여  사서를 작성하여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고조선 수도 왕검성(하북성 창려 추정)이 夏族의 공격에 더 가까운 최전방지역으로

둔갑하는것이다.

 

기자나 위만조선은 고조선 서부국경인 하북성 남부(붉은점선)에 위치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지나역사서에는 그들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대대로 개작과 위작을 서슴치않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 운영자 씀.

 

운영자는 윗 설을 수정합니다.

71번글에 의해서 위만의 고조선 봉지는 산서성 남단 濟 源.

기자는 하남성 화하로서 상동,하북과는 관련없음이 밝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