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고조선 아사달문명과 아사달문명이 서양사에 미친 영향

설레임의 하루 2009. 4. 15. 20:11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道不遠人      http://cafe.daum.net/dobulwonin/IFOx/16

 

 

 

 

고조선 아사달문명


산동반도에서 발굴된 고조선족의 팽이형 토기와 아사달 모양(네모 안). 아침 단(旦)을 나타내는 그림 아래 산
(당시에는 ‘달’이라고 불렸음)이 그려져 있다.

중국 측은 기원전 4300년∼기원전 2200년의 유물로 추정한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서해(황해)를 둘러싸고 말굽형으로 생긴

한반도서해안, 요동반도와 발해만 유역, 중국의 동해안 일대와 이 지역 여러 강가에는 수십만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50만 년 전 베이징원인(北京原人)이나 65만 년 전의 평남 상원 검은모루(黑隅里) 유적은 이 지역이 오래된 구석기시대 인류거주지역임을 잘 증명해 준다.

기원전 8000년∼기원전 3000년경 서해로 흘러드는 한반도의 한강 금강 임진강

예성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만주의 요하 대릉하 난하, 중원의 황하 상류, 회하,

양자강 상류 유역에여러 부족의 신석기문화가 형성·발전됐다.》

 

 

부족들은 서로 통합하여 고대국가와 고대문명을 형 성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형성된 고대 국가가 ‘고조선(아사달)’이고, 뒤이은 것이

고중국 (夏)이다.

고조선은 ‘한’ ‘맥(貊)’ ‘예(濊)’ 세 부족이 결합해 수립한 고대국가이다.

 

 

 

 

‘한’족은 원래 한강 중상류에서 기원해 북으로는 대 동강 유역, 남으로는 금강 일대까지 거주했던 부족 이다.

한족은 가장 일찍 농경문화로 들어간 선진 부족이었으며, 태양 숭배와 천손(天孫)의식을 가진 부족이었다. ‘후한서’ 동이열전의 ‘양이(陽夷)’가 이 부족으로 해석된다.

 

 

 

중국 고문헌에는 ‘한(汗)’ ‘한(韓)’ ‘한(寒)’ ‘환(桓)’ 등 여러 한자로 기록되어 나오는데, 이는 ‘한’이란 명칭 이 순수한 한족

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기(古記)’에는 ‘환(桓·환웅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이들은 팽이형토기, 빗살무늬토기, 고인돌무덤, 각종 발달된 신석기 도구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15,000년전의 볍씨들을

유물로 남기고 있다.

 

‘맥’족은 지금의 요하(이전 이름 패수) 중류에서 기원하여 요동·요서와 동으로는 송화강, 압록강, 대동강 유역까지 넓게 퍼져

살던 곰 토템 부족이다. 모계 중심 유목문화와 옥문화를 발전시키고 적석총을 남긴 신석기 부족으로, ‘후한서’ 등에 ‘맥이

(貊夷)’ ‘웅이(熊夷)’라고 기록되어 나온다.

 

‘예’족은 요하의 지류인 예하(濊河)에서 기원하여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해안에 거주하던 범 ( 호랑이)  토템 부족이다.

‘후한서’ 예전에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고 한다.

또 범을 신으로 여겨 제사지낸다”고 기록하였다.

 

이 세 부족의 거주지역이 만나 중첩된 지역인 대동강 중류 강동(江東)지역에서 한족이 왕을 내고 맥족은 왕비를 내며 예족은

소왕을 내는 결합 방식에 의해 동북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이 건국되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고문헌 ‘위서(魏書)’를 옮기면 “위서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檀君) 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開創)하여 조선(朝鮮)이라 하니 고(高·중국 요임금)와 같은 시기이다”라고

하였다.

 

이병도 박사의 지적과 같이 ‘조선’은 ‘아사달(아침 땅·아사는 아침, 달은 산·땅)’의 한자 번역이다.

 ‘아사달’은 순수한 고조선말 나라이름이었다.

 

이 중국 고문헌은 기원전 24세기경 고조선(아사달)이 건국되었음을 명료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 가들은 외국 역사를 깎아내리는 악습이 있으므로, 만일 의심한다면 고조선 건국 시기가 중국 요임금 시대인 기원전

24세기보다 더 이전일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소호(少昊)족의 ‘삼족오태양신(三足烏太陽神)’ 전설에는, 이미 바다 건너 동방의 천제(天帝)  (俊)이 구이(九夷)를

통치할 무렵 한발이 극심하여 요임금이 천제 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에서 요임금이 소왕국의 작은 왕이었을 때 동방의 천제 준은 9개 동이족을 모두 통치하는 천제가  되어 있었으므로

고조선이 요의 소왕국보다 훨씬 이전에 건국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중국 고고학계는 산동반도의 동이족 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에서 ‘아사달’ 문양이 그려진 팽이 토기(고조선의

독특한 양식 토기) 11개를 발굴했는데, 중국 측은 기원전 4300년∼기원전 2200년의 것으 로 연대 측정했다.

이는 고조선 사람들이 고조선 건국 후 건너가 제작한 것이므로, 고조선 건국이 적어도 기원전 43세기∼기원전 22세기 이전의

일이었음을 알려주는 고고 유물이다.

 

‘고조선’의 건국은 한강신석기문화(한족, 왕 배출)와 요하신석기문화(맥족, 왕비 배출), 대동강신석기  화(수도 설정)의 세

강의 신석기문화를 통합해서 한 단계 더 높인 동북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건국이었 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은 이 지역 최초의 고대국가였으므로 빠른 속도로 만주 요동·요서지방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 이에 따라 수도도 ‘강동’에서 요하 부근 개평현 험독(險瀆·검터)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3경5부(三京五部)제를 실시해서 지금의 중국 요령성 조양(朝陽·아사달), 영평부의 조선현(아사나, 고죽국) 내몽고

자치주의 적봉(赤峰·붉달, 밝달)을 부수도로 하여, 넓은 지역을 5개 구역(부)으로 나누어서 그 안에 포함된 부족들을 직접

간접으로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 통치지역에 공통의 ‘아사달(고조선)문명’을 창조하여 발전시켰다.

 


중국 요동 출토 옥귀고리
중국 요동 지역의 흥륭와 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옥 귀고리. 기원전 60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제공 소나무

중국 측이 최근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요서·요동지 방의 고고 유물을 발굴하다가 신석기시대 맥족문 화의 발전에 경악하고 있다.

우실하 교수와 심백강, 복기대 씨의 저서 및 답사보고서를 종합하면, 이른 바 소하서(小河西)문화, 흥륭와(興隆.)문화, 사해 (査海)문화, 부하(富河)문화, 조보구(趙寶構)문화, 홍산(紅山)문화, 소하연(小河沿)문화 등의 발굴, 특히 홍산문화 후기의 우하량(牛河梁) 유적 발굴에 기초하여 요하문명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집트문명보다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랜 중국 문명이 요하 문명이라고 홍보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중국 측의 ‘문화’는 서양 고고학의 ‘터(site)’를 과장 표현한 것이다.

이 발굴 유물·유적들은 고중화문명에 속한 것이 아니고 아사달(고조선)문명에 먼저 속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위의 유물·유적이 모두 맥족과 예족의 신석기시대 것들이다. 맥·예족은 고조선을 형성한 부족이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맥족, 예족을 ‘동이(東夷), 북이(北夷)’라 하여 고대 중국 형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배척해 오지 않았는가?

 

둘째>,

가장 발전된 ‘우하량’ 유적에서는 실물의 약 세 배 크기 여신(女神) 또는 여성 토상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신석기시대 모계사회에 관련되어 있으며, 고대문명을 만든 가부장 사회 이전 단계임을 시사한다.

고조선 건국 때 한족이 왕을 내고 맥족이 왕비를 내는 혼인동맹으로 결합하여 최초의 고대국가를 세우고 아사달 문명 단계로

들어갔음을 고려하면, 우하량의 맥족 유적은 고조선 건국과 아사달 명의 형성 요소로 보아야 한다.

 

셋째>

우하량 유적에서 대량 발굴된 잘 간 ‘옥’ 장식물은 지배층의 것인데 곰의 형상이 많고 곰 토상의

일부도 발굴되어, 이들이 곰 토템 부족임을 알려 준다.

곰 토템 부족(맥족)이 고대국가의 지배층으로 들어간 것은 이 지역에서는 고조선과 아사달문명뿐이다.

 

넷째>

발굴된 옥돌 가운데 환옥은 우실하 교수가 비교한 바와 같이 한반도 강원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 된 환옥과 동일 형태이다.

이 옥 문화는 맥족과 예족이 공유한 문화로서 한반도와 요서지방이 동일 고대 문명권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함께 발굴된 토기들이 검회식 민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평저(平底) 화분형 토기(팽이형토기 말기에 나오는 토기)로서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토기와 같은 유형이다. 채도 등 고중국 토기 유형과는 다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요하문화는 고조선의 아사달문명의 구성 요소의 일부이다.

요하문명은 과장 된 것이며, 더구나 이것을 고중국문명이라고 해석해 홍보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여러 하위문화가 모여 문명 단계로 발전했음을 증명하려면 종합적으로 반드시 고대국가 형성이 동시에 증명되어야 한다.

이 시기에 동북아시아에서 형성된 고대국가는 고조선뿐이며, 고조선 아사달문명이 한강문화, 대동강문화, 요하문화를 통

합하여 한반도와 요동·요서에 걸친 새 문명을 개창한 것이다.

 

 


돌궐(튀르크) 민족의 발상지 ‘위투켄’ 산은 고조선말로 ‘우뚝한’ 산이며, 

지방민들은 ‘박달’ 산이라고도 부른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고조선 국가는 영역이 요동 요서로 넓어짐에 따라  다수의 부족을 후국(侯國) 제도를 통해 통치했다.

후국은 2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제1형 후국은 ‘직할후국’으로서 매우 일찍 후국이 된 맥과 예(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경우), 부여, 옥저, 구려,진(辰), 숙신(읍루) 

등이다.

 

제2형 후국은 ‘변방후국’으로서 동호(東胡), 오환(烏桓), 선비(鮮卑), 해(奚), 오손(烏孫), 유연(柔然),

산융(山戎·흉노), 돌궐(突蹶·원튀르크), 실위(室韋·원몽골) 등이 포함된다.

 

고조선 제왕(단군·천제)은 후국에 왕족을 보내거나 부족장을 제후로 임명해 통치했다.

이 때문에 후국 호칭이나 소왕에는 단(檀)씨가 많았다.

예컨대, 선비족의 왕은 단석괴(檀石槐), 유연은 대단(大檀·아발), 흉노의 왕 호칭은 단우(單于·‘선우’로 읽는 것은 후의 변화, 단후·

檀后와 같음) 등이었다.

아사나(Asana·阿史那=조선·朝鮮)와 해(태양)와 같은 어의 자취도 찾을 수 있다.

돌궐의 왕족이 ‘아사나’이고, ‘아사나’의 축소 변음(ㅱㅱ→오손)으로서 오손의 국명, 해(奚)족의 국명, 오(烏)와 환(桓, 한·韓)의합성인

오환의 국명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후국들은 전조선 기간만도 1500여 년간 고조선 통치를 받는 사이에 고조선 문화를 분유

통합하여 상위의 공통 ‘아사달(고조선) 문명’을 형성 발전시키게 되었다. 

 

 

아사달 문명권의 원민족들이 공유한 주요 문명 항목으로는;

△고조선 언어

△통치제도와 양식

△고조선 금속기술

△고조선 무기

△태양숭배

△천손(天孫)사상

△고조선 신앙과 종교

△고조선 기마문화

△고조선 궁사(弓射)문화

△고조선 축제문화

△고조선 경기문화

△고조선 음악과 무용 등을 들 수 있다.

 

고조선 사람들이 중국 산둥(山東),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허난(河南) 성 등에 진출해 자치 소국들을 세워 생활함에 따라 아사달

문명권은 산둥반도 일대와 만리장성 일대, 화이허(淮河) 일대에 미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고중국(하·夏) 문명이 뒤이어 들어왔기 때문에 두 문명이 변경에서는 중첩되었다.

따라서 아사달 문명권은 고조선 국가보다 그 지리적 범위가 더 넓었다.

 

○ 만리장성은 고조선에 대한 고중국의 방어선

  아사달 문명권 민족들과 고중국 문명권은 처음의 협조와 평화 관계가 장기간 존속했다.그러나 기원전 10세기경부터 고중국 계열

왕국들이 산둥반도의 고조선 계열 소국들(엄·奄, 서·徐, 수·遂, 거·거, 근·根, 모·牟, 서·舒, 회·淮, 우·우, 우·(옹,우))을 공격함으로써 평화는

깨어졌다.

기원전 284년 연(燕) 진개(秦開) 의 고조선 공격과 반격, 기원전 214년 진시황의 고조선 공격과 반격이 이어져 약 200년간 아사달

문명권과 고중국 문명권은 갈등기에 들어갔다. 만리장성은 이 시기 아사달 문명권에 대항한 고중국 문명권의 방어선이었다.

 

한(漢) 고조 때까지도 열세였던 고중국이 한 무제(武帝)가 준비한 대병력으로 고조선을 공격해 기원전 108년 마침내 고조선 국가는

패전해(운영자는 동의 안함) 붕괴되고, 고조선 문명권은 해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조선 문명권에 속했던 여러 민족들은 각각 한족(중국족)과 투쟁하면서 때로는 한족을 굴복 시키고 때로는 패전하여 쫓기기도

하면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동하였다.

서방으로 이동한 몇 개 민족만 들기로 한다.

 

고조선 문명권의 가장 서변에 위치해 중국 한족을 공포에 떨게 했던 흉노(훈)족 아틸라(Attila)의 군단이 406년경 발칸반도의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 평원에 도착하여 그곳 동고트(Goth·게르만족의 일부)족을 몰아내고 정착하여 훈 제국(Hungary·헝가리는

Hun·훈+gary·땅)을 세우고 거대 제국으로 확장했다.

 

서양사의 게르만 민족 이동은 먼저 기원전 108년 고조선 해체로 말미암은 동방의 ‘민족 대이동’에서 파급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훈 제국은 아틸라의 사망으로 멸망했다.

2)후에 마자르(Magyar·말갈)족이 도착하여 헝가리 왕국을 계승하였다.

3)이어 유연(아발, 대단·大檀)족이 서방에 이동해 와 캅카스 지방과 다뉴브 강, 라인 강 우안 일대에 6세기 초 정착해서 250여 년이나

  이 지역을 통치했다.

4)뒤이어 부여족이 캅카스 지방을 거쳐 발칸 반도에 들어가서 불가리아 제1제국을 건설하였다.

5)오손족은 서방으로 이동하다가 강거(康居)족과 융합하여 오늘의 카자흐 민족을 형성하였다.

6)뒤이어 돌궐(튀르크)족이 서방으로 이동했다.

  ‘수서(隋書)’ 돌궐전은 “돌궐의 선조는 평양(平凉)의 잡호(雜胡)이다. 성은 아사나 씨이다”라고 했다.

   캐어 들어가 보면 고조선 해체 무렵 고조선족 마을 하나가 외적에게 초토화됐다.

 

살아남은 한 소년과 몇 가족이 흉노족에게 구원되어 안전한 몽골 지역까지 피신해서 혼혈하며 힘을 길러 재기했다. ]

현재 모든 튀르크 민족들은 기원지를 위투켄(¨Utuk¨an) 산과 기슭이라고 여기며 지금도 극히 신성시한다.

위투켄 산은 몽골의 항가이 산맥 가운데 높이 4021m로 우뚝 솟은 최고봉이며, 몽골인들은 ‘오트콘 텡그리’ 산, 지방민들은 ‘박달

(때로는 복돌)’ 산이라고도 부르는 산이다.

위투켄 산 끝자락에는 방목에 적합한 고원과 평지가 있다.

 

 

○ 튀르크 기원지 ‘위투켄’은 고조선 말에서 유래

필자는 ‘위투켄’은 고조선 말 ‘우뚝한(우뚜칸)’이라고 본다.

 옛 중국 역사가들이 突厥(돌궐)이라고 ‘突’ 자를 채자한 것도 이 ‘우뚝한’의 뜻을 포함한 것이라고 본다.

왜 ‘우뚝한’ 산의 고조선어가 돌궐족 발생지에 붙여졌을까?

돌궐족의 시조가 고조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돌궐족은 이어 ‘유연(아발)’이 지배할 때에도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장이 역할을 하며 세력을 기르다가, 아사나 두만(Asana Tuman)이

기원후 552년 알타이 산기슭에 ‘돌궐제국’을 건국해 제위에 올랐다.

왕족은 ‘아사나’족이고 최고 귀족은 ‘아사다르(Asadar, 아사덕·阿史德)’라 호칭했다.

 

아사나 두만은 재위 30년간 돌궐 제국을 동쪽은 싱안링(興安嶺) 산맥으로부터, 서쪽은 카스피 해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시켰다.

 

중국 시안(西安) 부근 흉노족 무덤에서 출토된 구리 허리띠에

 새겨진 흉노족의 씨름 모습.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돌궐족이 알타이에 돌궐 제국을 건국한 6세기 후반은 한국사 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가 찬란했던  

삼국시대라는 사실이다.

언어구조가 동일한 어족을 ‘알타이어족’이 라 한다고 해서 한국 민족이나 한국말이 알타이에서 왔느니, 몽골에서 왔느니 설명 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다.

 

이미 고조선 말을 분유한 고조선족의 후예 하나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쪽으로 이동해 가서 6세기에 알타이 산기슭에 제국을

세운 것이었다.

돌궐족은 580년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어, 서돌궐은 당(唐)의 회유 정책에 굴복했다가 완전히 멸망했으나, 동돌궐은 682년

‘아사나쿨튀르크(AsanaKulturk, 아사나골 돌록·阿史那骨돌祿)’에 의해 재기해 다시 대제국을 건설해서 당과 겨루었다.

 

그 후 돌궐족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면서 서서히 서방 이동하는 중에 위구르(지금의 신장·新疆), 키르기스, 우즈베크, 타지크,

투르크멘 등 다수의 국가와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결국 오스만 베이(Osman Bey)가 아나톨리아 반도 끝까지 진출하여 1299년 오스만

제국을 건국해 오늘의 터키를 탄생시켰다.

이 사이 튀르크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약 3억 명에 달하게 되었다.

 

종래 한국 민족의 기원과 고대문명 이동의 큰 흐름을 서방에서 동방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들어왔느니, 몽골, 바이칼, 알타이,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왔느니 하는 가설은 사실이 아니다.

 

패러다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상호 교류는 있었지만, 역사적 진실은 반대로 동방 ‘아사달 문명’이 서방으로 이동한 것이다.

고조선 국가 붕괴의 빅뱅으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서 아사달 문명후예들이 서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유라시아 대륙의 고대역사가

격동하게 된 것이다.

일제 식민주의 사관이 고조선 역사를 말살 왜곡했고, 이제 중국 동북공정이 고조선과 아사달 문명을 빼앗아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민족의 기원인 고조선과 아사달 문명의 역사 진실을 밝히고 지키는 것은 한국 국민과 학자들의 의무이며,

역사의 독립운동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신용하 교수의 기고는 10회 마지막편은 근세사에 수록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