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心濟
오랜시간이 지나면 실제의 전쟁터도 지명이 바뀌어 불분명해 집니다. 더구나 4500년전의 전쟁터야 말로 말할것도 없겠습니다. 그동안 고려이후 조선에 이르기 까지 1000여년전 동이에게 쫒겨다닌 남송의 안식처 장강이남... 흐트러진 민심을 달래고 화하족의 자부심을 되살리려 2500년전에 죽간으로 만들어진 사라진 공자 어록을 헝겊 쪼가리 이어 붙이듯 소설 쓰듯이 만들어 내어 주희가 재편찬한 <사서오경>... 그 문헌들을 주자학의 숭상으로 돌아선 고려와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 자신과 조상님네들의 역사 기록은 한없이 닳아 없어져 버렸습니다.
당 후기 모든 기존의 동이 기반의 역사가 없어지고 북-남송에 의해 두번째 역사가 조작되더니 명나라에 의해 세번째 동이의 역사가 조작됨과 동시에 기존의 모든 역사 지명이 하북과 만주로 옮겨져 내몽고 , 山西와 河套 지방의 고대역사는 우리 뇌리에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던바 네번째로 조선초 왕명에 의해 남겨진 그 얄량한 역사 기록마저 없아지더니 또 다시 식민지 청년학자들에 의해 왜곡되는 다섯번째의 史禍가 있었고 1990년대에는 급기야 서토족의 저질적 고질병인 역사조작인 동북공정이라는것이 백일하에 드러나 <아 ! 역사는 이렇게 조작되는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또 앞으로 우리의 역사는 연해주로 밀려나 북해에 빠져 지구상에서 없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전자시대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 시류를 앞서가는 우리들은 서토역사가들이 막아놓은 그들만의 역사망을 인지하고 알아차려서 조작의 움직임을 파악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위 그들이 동이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그들 역사로 만들기 시작햇던 한나라 시대의 역사서 산해경,사기를 시작으로 전 역사서들이 예전 같으면 전문적 한자전공 학자들만 이해하고 볼수 있었던 25사 및 통전 등을 우리가 읽기좋게 전자문서로 바꾸는 통에 우리가 그 기록의 진위를 본인 같은 한자 무지랭이들도 판단할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치우와 황제가 치열하게 싸왔던 <판천대전>의 주무대가 아직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치우황제가 헌원을 꺾고 (중국사서에서는 치우가 패한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金文기록 분석으로는 헌원이 패해 왕위에 오른바가 없다고 기록되어 한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함) 수명을 누리다가 하늘로 올라간 지역이 당나라시대의 기록으로 보아 하북 탁주가 아닌 산서성 서남단 解州로 비정되고 실제 그 지역이라야 지형적으로 일치하는 여러가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상나라 걸왕의 친척으로 걸왕을 무너뜨린 주나라 무왕의 入朝幹請을 받아들일수가 없다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으며 살다가 죽은 古竹國지역이 바로 산서성 해주지역 입니다. 바로 서토족의 주나라 수도 西安,咸陽에서 동북진하면 황하의 泥河가 나오고 황하를 건너면 바로 산서성 해주로서 이지역이 고조선의 번국 고죽국이 있었다 비정되는곳 입니다.
중공정부가 조작한 산해관 근방 백이숙제묘는 고도 10 미터도 안되는 매우 조그만 언덕인데 고사리가 나다니. 실제로 산서성 해주인근 백이숙제묘가 대청광여도대로 남아있는지 확인하니 크지않은 봉분 2개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동북방으로 존재하는 安邑 그리고 鹽池 는 광물질이 있어 붉은 보라빛이 난다고 하는데 이를 치우의 피라
한다고전합니다 이것도 확인 되엇습니다. 이 근방은 바로 高句麗와 唐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 薩水,浿水 그리고 安市城 ,平壤城, 國內城 이 존재 햇던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는것 입니다.
아래는 블로거 향고도님의 글중에서 발췌한것 입니다. 치우가 황제 헌원(軒轅)과 전투를 하다 죽은 곳은 현 하북성 북부의 탁록(?鹿)이라고 그들의 기록에
되어있다. 현재 지명을 고대의 그것으로 오해를 하기 때문이지만, 하북성이 아니라 산서성 운성현(運城縣) 해진 (解鎭)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산서성 남단인 해주(解州)의 염지(鹽池)를 중심으로 한 일대가 치우와 헌원이 전투를 벌린 지역임을
주장하는 아래의 근거 자료는 지나 웹에서 발췌한 것이다.
"原解梁亦稱?鹿" 이라는 기록이 있고, 안읍현지(安邑縣誌)에는 "他是安邑"蚩尤村"(今改爲從善村)人" 이라는 기록이 있다. "?鹿城頭分曙色,素池如練?無塵"
<河東鹽法備覽、鹽池門勝跡>이라는 소금과 염지 관련 고서에는 염지의 남쪽에 치우성(蚩尤城)이 있음도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 羅必이 지은 <路史>에는
뜻한다. 로사에는 일설, 헌원의 성(姓)이 "公孫"이라는 기록도 있다.
송나라 문인 宋沈括의 <夢溪筆談>에는
적고 있다.
<孔子三朝記>에는 절단되어 죽은 치우의 피가 간수처럼 변하여 해주의 염지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雲?七簽、軒轅本紀>의 的又一證據" 지역임을 주장하는 근거 자료를 살펴보았다.
헌원의 강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산서성 남단에서의 사건이라면 태행산맥 이동지역은 모두
치우의 강역이었다는 재야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이다.
수가 있다. 이라고 치우를 말하면서도 헌원과 함께 중화민족의 위대한 선조로 만들어 가고 있는저들의 행태를
봐야 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상)
12세기 제작된 우적도 탁본. 해주와 치우의 무덤이 있다는곳과 동일 지역에는 雷首라 표기되어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대청광여도에는 해주, 염지,백이숙제묘라 표기 되어 있다. 운영자 심제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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