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막고굴이 간직한 한국의 문화유산

설레임의 하루 2009. 4. 7. 01:48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운영자   http://cafe.daum.net/dobulwonin/IFP1/23

 

 



 

 

  둔황의 밍사산(명사산, 鳴沙山)은 모래산의 날카로운 능선 너머로 떠오르는 신비의 해돋이가 일품이다.

이 장관을 보려고 새벽 6시 이전에 서둘러 둔황 시가 남쪽으로 4㎞쯤 떨어진 밍샤산 어귀에 도착했다. 벌써 사람들로 붐빈다.

밍사산은 불어대는 강풍에 무너져내리는 모래 소리가 산울림처럼 들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가 무려 1600여 미터나 되며 길이만도 동서 100리, 남북 50리나 되니 모래산 치고는 드물게 큰 산이다.

 

모래산 경사면에 기다랗게 드리운 나무계단을 타고 가까스로 정상에 올랐다.

이윽고 사막의 아스라한 지평선 너머에서 금빛 햇살이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모래 바람이 윙윙거리기 시작한다. 밍샤산은 제 등성이에 오래 머무는 것을 허용치 않는 모양이다.

멀리 푸른 물감으로 점 찍어놓은 듯한 둔황 시가지가 한눈에 안겨온다.

둔황 사람들은 단옷날 이 산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면 한해의 액을 면한다고 믿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믿음이 상술로 변해서인지 100여 미터 높이의 산 중턱에서 돈 받고 함지박 같은 미끄럼대를 빌려준다.

모래 바람 흩날리며 미끄럼 타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따로 없이 액땜에 신이 나는 모습들이다.

 

780년께 오대산 건원보리사란 절에서 입적했다는 기록 한 줄만…

산 기슭에는 초승달 모양의 신비로운 월아천(月牙泉)이 고여있다. 2천여 년 전부터 기록에 나오는 이 월아천은 사막의 나그네들에게

마를 새 없이 마실 물을 대주는 천혜의 생명수다. 길이가 동서 224m, 남북으로 최대 39m, 깊이 2m쯤 되는 샘물가에는 이름 모를

수초들이 파릇파릇하다.

열사의 험로를 누비는 ‘고행’은 이제 시작이다.

산장에서 동남쪽을 향해 25㎞쯤 황량한 사막을 달려 막고굴(莫高窟)에 도착했다.

막고굴 고급해설원이자 한국둔황학연구회 회원인 리신(李新)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대면이지만 미리 들어서 알고 있다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리 선생은 막고굴의 한국 관련 유물을 연구, 소개하기 위해 10여 년전부터 한국어를 독학해왔다고 한다.

지금은 제법 유창한 한국어로, 전문가답게 안내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17호굴이다. 16호굴 안에 있는 곁간굴이다.

사방이 10m 정도로 막고굴에서는 꽤 큰 굴에 속하는 16호굴 전실에서 연도로 들어서자 오른쪽 벽면에 ‘017’이란 번호가 붙어있는

17호굴의 작은 벽문이 나타난다.

높이 180㎝, 아래 넓은 부분이라야 92㎝에 불과해 보통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안을 보니 굴 크기는 사방이 3m쯤 되는데, 중앙에 당나라 고승 홍변의 소상이 있다.

상의 좌우에는 미녀와 비구니가 고승을 향해 협시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런 곁간굴 형식에 관해서는 중국 전통 분묘축조법의 일부로 묘도 좌우에 부장품을 넣으려고 지은 ‘이실’(耳室) 설과 인도 비하라

석굴식으로서 승려들이 수도하는 승방이라는 설이 있다.

이 굴은 1900년 막고굴의 주지 왕원록 도사가 쌓인 토사를 치우다가 갑작스레 벽이 무너지면서 발견됐다.

그 안에 뒷날 서방 탐험가들이 털어간 숱한 경전과 회화 유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해서 ‘장경동(藏經洞)’이라고도 부른다.

 

 

맨먼저 ‘왕오천국국전’ 발견된 17호굴로

중국 당국은 둔황의 석굴이 점차 훼손되자

석굴 입구에 실제 내부의 모습을 재현한 ‘석굴문물보존연구소’를 만들고 있다.

사진은 제 285굴의 모형관 안에 있는 대형 불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굴에서 신라승 혜초가 남긴 불후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이다.

 

1908년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는 이 굴에 소장된 사경류 1500여 종을 헐값에 사들였는데, 그 속에 이 여행기가 들어있었다.

여행기는 한 권의 두루마리 필사본으로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나간 총 227행의 절략 잔간이다.

이 국보급 진서는 후손들의 불초로 오늘날까지 90년 넘게 연고도 없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유폐되어 있다. 또한 연구도 남들보다 뒤져있으며 해명하지 못한 점들도 적지 않다.

필자는 이러한 불초를 조금이라도 씻어보려고 지난해 역주본을 펴내면서 여행기의 내용과 스님의 행적을 밝혀보려 했다. 물론,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미제의 과제들도 많이 남겨놓았다.

가장 큰 공백은 스님의 입적지를 알아내지 못한 점이다. 780년께 오대산에 들어가 건원보리사란 절에서 입적했다는 기록 한 줄만 되뇔 뿐, 그 절이 도대체 어디 어느 사찰인지는 오리무중이다.

최근 한 연구자가 ‘보리’라는 말의 연원부터 추적해 그 사찰을 오대산에 있던 금각사의 별칭 혹은 숙종 원찰로서의 상징적 보통명사일 것이라는,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그 자신도 ‘가설’로 제기한 것인 만큼 확증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런 미궁 속을 헤매는 우리에게 61호굴은 한오리 불빛을 던져주었다.

원래 이 굴은 사방이 14m 정도로 막고굴 중에서도 손꼽히는 큰 굴이다.

동·남·북 세 벽면에 강렬한 색채로 한족, 위구르, 호탄 출신의 여성 공양자상 52명을 그린

벽화가 있고, 특히 굴 중앙에 놓여있는 기단 뒤 서벽에 거의 완벽한 ‘오대산지도’가 그려져 유명하다.

전체 면적 250㎢에 달하는 산시성 오대산의 축소도인 이 그림의 길이는 13m, 폭은 3.4m로서 막고굴에서도 가장 큰 벽화 중 하나다.

리 선생은 남아있는 지도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대에 그렸다고 하나, 당대 지도라는 견해도 있다고 했다.

지도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남선사와 불광사를 비롯한 67개의 명찰 이름이 명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생활풍속도 그려져 대단한 진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신라○탑’이란 글자가 어렴풋이 보인다.

20년 전에는 ‘신라승탑(新羅僧塔)’으로 또렷이 보였다고 한다.

‘신라의 승려 탑’(사리탑)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한 고승이 입적한 곳임을 시사한다. 순간, 전율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 스님은 궁중 원찰에서 지송승이란 지고의 지위를 누리다가 이곳에 와 천화한 혜초가 아닐까 하는 예감이 번뜩인다.

그 곁에 ‘신라송공사(新羅送供師)’, 즉 ‘공양을 보내는 신라인’이란 글자도 있었으나 지금은 닳아 보이지 않는다고 리 선생은 소개한다.

속단은 이르지만 혜초의 입적지를 밝히는 새 실마리를 찾아냈음에는 틀림 없다.

 

 

세계 최대 ‘오대산지도’ 에서 발견한 단서

막고굴에 간직된 우리네 문화유산을 언급할 때마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이른바 조우관(鳥羽冠,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과 이 관을

쓰고있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원래 조우관은 일찍부터 북방 유목민족들이 즐겨 쓰던 모자였다.

그 상관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땅에서는 고구려나 신라시대 갑자기 나타난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귀천 구별 없이 널리 쓰이고 있었다.

그러한 조우관을 쓴 인물상이 막고굴 벽화를 비롯한 중국 고적 유물에서 여러 점 발견되었다.

관이나 주인공의 모양새, 그림의 배경 등이 엇비슷한 것도 있지만, 시각에 따라서는 달리 보이는 것도 있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중당시대 조성된 막고굴의 220호와 335호굴 벽화에 그려진 조우관의 배경은 다 같이 ‘유마힐경변상도’의 공양도다.

시안 이현묘의 예빈도에서 본 것처럼, 새의 깃털 모양이나 주인공의 얼굴 생김새, 직령에 오른쪽 여밈을 한 옷차림 등에서 전형적인

조우관을 쓴 한국인(고구려나 신라)의 모습이다.

최근 같은 시기 조성된 237호굴 변상도에도 조우관을 쓴 인물이 있다는 주장이 있어 그 그림을 자세히 훑어보니 조우관은 있으나,

청대에 다시 그린 것이어서 신빙성에 의문이 든다.

 

 

벽화 속 장구 가락에 덩실 춤추는 무희도

이러한 벽화말고도 시안에서는 뚜껑의 표면을 장식한 꽃잎에 조우관을 쓴 다섯명을 그린 은함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산시성

법지사지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정방형 사리함 표면에도 조우관을 쓰고 앉아있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벽화나 유물들에 조우관을 쓰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에서 온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절, 공양사 신분의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하거나 공양하는 자리, 인도

불교전설의 불사리 분배 장면 등에 다른 외국 사절들과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인을 비롯한 여러 외국인들을 등장인물로 만들어 당나라 중심의 천하사상을 은연 중 과시하려는 양식화된 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막고굴 제61호굴의 서벽화인 ‘오대산지도’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실사 지도로 꼽힌다.

이 가운데 ‘신라승탑’(동그라미 안, 오른쪽 확대한 그림)이라는 명문과 함께 신라 고승의 사리탑으로 추정되는 탑이 그려져 있다.

석굴 내부 촬영이 금지돼 입구에 새롭게 만들고 있는 ‘석굴문물보존연구소’에 있는 모사품을 찍었다.


그밖에 98호굴 남벽을 비롯한 여러 굴의 벽화에는 장구(장고)의 신명나는 가락에 맞춰 덩실덩실 어깨춤 추는 익숙한 장면도 눈에

띈다.

428굴 벽화에 그려진 하늘을 나는 비천상은 고구려 덕흥리 고분 전실 천장에 그려진, 천마상을 연상케 하며, 435호굴 벽화에서

인물상을 흑백색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기법은 고구려 수산리 고분의 기단을 입체감 나게 그린 기법과 동일한 음양법이다.

이들 현상은 두 지역간 문명이 공유한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다.

외국에 간직된 한국 관련 기록이나 유물을 우리 문화유산으로 보고, 진상을 따지고 캐묻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지간의 교류 관계와 당시 이 땅의 옛 나라들이 지닌 대외적 위상의 일면을 보여주며, 우리 자신을 비쳐주는 거울도 되기 때문이다.

몰랐던 역사를 그러한 기록이나 유물 속에서 알아낼 수 있으며, 또한 비교를 통해 남들과의 공유성을 확인하고, 우리의 나음과

모자람을 가릴 수도 있다.

어디를 가나 우리와 관련된 것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여기고, 잘 가꿔 나가야 할 것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