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인간의 시원

설레임의 하루 2009. 3. 23. 03:04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삼태극

 

 

 

 

 

<인류의 시원>
가. 약 300~400만년 전: 최초의 인류라고 불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출현.
나. 약250~150만년 전: 호모 하빌리스.......(중략)
다. 약4만년전: 지금의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약4만년 전~1만2천년 전까지에 걸쳐 구석기 후기 문화)
라. B.C 10,000년: 신석기 시대가 전개.
(특히 녹경과 목축으로 인한 식량 생산의 경제활동은 신석기 혁명
혹은 제 1차 산업혁명으로 까지 불리어지는 생활의 큰 변화였다.
신석기 시대의 집단 생활과 공동체 생활은 상당한 수준의
국가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인간의 사회는 점점 집단화 되고, 갖가지 유용한 문명이 개발되었으며,대규모의 종교의식도 행해졌다.

제단(祭壇)을 쌓고 제천의식도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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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탄생과 시원국 환국>


하늘의 변화의 길은 북극에서 처음 열린다.
따라서 하늘의 통일정신이 물을 생성하니 이를 북수(北水)라 이른다.
북극의 물은 인간생명 창조의 씨가 머무는 곳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현생 인류 의 조상을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라 한다.
나반과 아만이 서로 처음 만난 곳은 아이시타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칠월 칠석날 만나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九桓)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동서東西 인류의 원조인 나반과 아만의 후손은 오색인종五色人種으로 나뉘어
살았다 한다.
본래는 이처럼 전 지구상의 인류가 한 조상을 바탕으로 생겨난 가지였으니 이동해
다니며 그 곳에 정착하여 자연환경(地運)의 영향을

받아 지금과 같이 달라진 것이다.
즉 이 5색인종이 만물이 여름에 가지를 치듯이 중앙 아시아의 환국桓國으로부터
지구의 동서남북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오환건국이 최고라(吾桓建國이 最古也).

우리 민족의 환국건국이 나라로 가장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인류의 시원 국가인 환국(서기전 7199~3898년)이 있었다.환국은 중앙아시아의 파미르고원에 있는 천산(天山,일명 차내류산)에서

발원하여 천해(바이칼호)의 동쪽으로 뻗어나가 그 영토가 동서 2만리,남북 5만리에 달했다.
환국의 백성들은 천산에서 천해에 이르는 넓은 땅에 흩어져 살면서 문명을 개척하였다.
그들은 점차 분파하여 구환족과 64민(무리)으로 이루어진 열두개의 나라로
나뉘어졌는데,이 분국을 총칭하여 환국이라고 하였다.
그 열두 나라는 비리국(卑離國),양운국(養雲國),구막한국(寇莫汗國),구다천국(句茶川國),일군국
(一群國),우루국(虞婁國),객현한국

(客賢汗國),구모액국(句牟額國),수밀이국(須密爾國),매구여국(賣句餘國),사납아국(斯納阿國),선비국(鮮裨國)이다.
환국의 백성들은 신의 권한을 대행하여 교화를 베풀고 배고픔과 추위,전쟁을 없애주면서 12분국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그들의

지도자를 "인(仁)"이라 불렀다.
이 환국의 초기에 천산에 거하며 득도(得道)한 인물이 있었다.
백성들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만인의 아버지"라는 뜻의 안파견(安巴堅)
환인(桓仁)이다.
오가(五加)의 부족장과 민중으로부터 추대 받아 제위에 오른 시조 환인은 "통치자와
제사장"을 겸하였으며 천지광명의 신성을

대각하여 광명정신으로 민중을 다스렸다.
환국은 초대 안파견 환인으로부터 (2세) 혁서(赫胥) 환인, (3세) 고시리(古是利) 환인,(4세) 주우양
(朱于襄) 환인, (5세) 석제임

(釋提壬) 환인, (6세) 구을리(邱乙利) 환인,(7세) 지위리(智爲利) 환인에 이르기까지 일곱분이 대통을 계승하면서 총 3,301년 동안

존속하여 태초의 선(仙)의 장수문명을 누렸다.
장자(莊子)는 환국의 2세 혁서환인을 언급하며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상고(上古)의 혁서제왕 시대에 백성들은 편안하기만 해서 집에 있어도 무엇을 해야
좋을지 그 할
바를 알지 못햇다.

먹을 것을 입에 물고 즐기며 배불리 먹고는 배를 두들겨 가며, 백성들은 그저 이와 같이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생활을 했을

뿐이다."


환국의 말년에 동쪽으로 건너가 베링해협을 건너 이주한 무리가 아메리카의 인디언이되었고 남아메리카에 간 무리들은 인디오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900년전,인구가 증가하고 급격한 기후변동이 오자 시원국가인 환국의 9환족은
동서양의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환국문명이 세계로 뻗어나가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년),이집트문명(BC 3100년),황하문명(BC 3000년),인더스문명(BC

2500년)이 열렸다.
이 때 천하를 건지려는 큰 뜻을 품고 12환국중 환국의 정통을 계승하여 동방의 새 역사를 개척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서자부

(庶子部)의 수장(首長)인 환웅이다.


환국의 마지막 임금인 7대 지위리 환인은 삼위산과 태백산(백두산)을 두루 살피시고
동방의 백두산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

이라 하여 환웅을 백두산으로 보내셨다.
이 때 환인은 정통의 증표인 천부(天符)와 인(印) 세개를 주시고 문명개척단 3천명을 내려주셨다.
환웅께서는 해뜨는 곳을 향해 이동하다가 백두산 근처에 배달국(서기전 3898~2333년)
신시(神市)를 여시니 서기전 3898년

10월3일 이날이 바로 환웅천황께서 배달국을 여신 개천절이다.

 

<배달국>
환웅 께서는 18대를 계승하시면서 배달국을 1,565년 재위 하셨다.
그런데 환웅께서 태백산으로 떠난 직후,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반고는 삼위산
(三危山)으로 이주하기를 환인께 자청했다.
수많은 재물과 보화를 꾸린 반고는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의 신장(神將)과 공공(共工),유소(有巢),
유묘(有苗),유수(有燧)의 부족장과

 백성을 거느리고 삼위산 납림(拉林)동굴에 이르러 임금이 되었다.
이들을 제견(諸畎)이라 하였으며 반고는 반고가한(盤古可汗)이라 불렀다.
태백산족과 삼위산족은 모두 환국에서 갈려나간 것이다.
이 두종족 가운데
태백산족,즉 천부(天符)와 인(印) 세개를 전수받은 동방 신시배달의 환웅천황이
환국의 법통을 이어온 환국의 정통

장자<本流>이다.
환웅천황께서는 18대를 계승하셨다.
1대 거발한 환웅(居發桓, 94, B.C 3897, 120세, 일명 배달 환웅)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86, B.C.3803, 102세)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99, B.C.3717, 135세)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107, B.C.3618, 129세)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93, B.C.3511, 115세)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98, B.C.3419, 110세)
7대 거련 환웅(居連, 81, B.C.3320, 140세)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73, B.C.3239, 94세)
9대 양운 환웅(養雲, 96, B.C.3166, 139세)
10대 갈고 환웅(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 96, B.C.3070, 125세)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92, B.C.2970, 149세)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105, B.C.2878, 123세)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67, B.C.2773, 100세)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15대 치액특 환웅(蚩額特, 89, B.C.2597, 118세)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56, B.C.2453, 99세)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72, B.C.2452, 97세)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48, B.C.2380, 일명 단웅(檀雄), 82세)
거발한 환웅께서 동방 백두산 문명을 개창할 무렵,백두산에서 송화강에 걸친 만주
일대에는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어렵 생활을하며 굴속에서 살고 있었다[穴居].
범을 토템으로하는 호족은 남권(男權)중심의 부족으로 사납고 약탈에 능했고,곰을 토템
으로하는 웅족은 여권(女權)중심의 부족으로

어리석고 고집이 세었다.
웅족과 호족은 자신들도 삼신상제님의 계율을 따르는 밝은 백성[桓族]이 될 수 있기를 환웅께 간절히 청하였다.
이에 환웅은 신교의 가르침으로 두 부족을 포용하고자 그들에게 햇빛을 보지 말고
100일을 기원하도록 가르침을 내려 주셨다.
환웅께서 내려주신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달래 스므 개를 먹으며 웅호 두 족속은 수도
생활에 들어갔는데 호족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고
 웅족 여인은 굶주림과 추위를 참고 계율을 지킴으로써 "21일(三.七日)만에 삼신의 광명의 도를 깨우쳐 마침내 참된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환웅의 동방문명 개척단과 웅.호족의 결합에 관한 고대역사가,외래 종교에 찌들어있던 일연에 의해 유치한 신화로 윤색되어

버렸고 그뒤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더욱 근본이 부정되고 엉뚱하게 해석되어 "한민족의 뿌리사"가 지금까지 왜곡되어 버리고

것이다.

 

배달의 시조 환웅천왕의 신하로

"고시씨(高矢氏)"가 계셨다.
고시씨께서는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농사를 관장하셨다.
들판에서 농부가 밥을 몇숱갈 퍼서 "고시례!"함은 고시씨에 대한 예를 올림이니 바로
고시례
(高矢禮)이다.

 

신지씨(神誌氏)께서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 "녹도문"이다.

 

치우씨(蚩尤氏)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번개·구름·안개를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칼·창·큰도끼·긴창 등을 만들어 이로서 초목과 금수며 벌레와 물고기의 무리를 다스렸다.
이에 초목이 차츰 걷히고 금수와 벌레며 물고기들이 깊은 산 속이나 큰 못 속으로 피하여 달아나 숨어 버려서 다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해악이 되지 않았다.
이로서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
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히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畎夷)우이(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

(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구이는 곰씨족(熊族)을 중심으로 구려(九黎)라고도 했으며 구려(句麗),고리,고례라고도 했고 동방의 이족(夷族)이라 하여 동

이(東夷)라고도 했다.
5대 태우의 환웅의 12번째 아드님 태호 복희씨(?~서기전 3413년,風山에 사시어 風氏姓)
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마침내 중국 하남성 회향현 진(陳)에 도읍을 옮겨 수인, 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까지 빛냈다.

고대에는 어머니가 다르면 성씨도 달랐기 때문에(모계사회) 복희씨와 이복 남매인 여와씨는 부부가 될 수 있었다.
복희씨 나라는 여와씨가 이어서 잘 다스렸다고한다.
복희씨께서 붕어하시기 6년전에 배달국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98,B.C.3419,110)
께서 배달국의 제위에 오르신다.
복희씨와 여와씨의 후손은 풍(風)씨로 내려오다 대가 끊기게 된다.
복희씨와 여와씨의 나라를 염제 신농씨가 다스리게 된다.
고시씨의 후손에서 배달의 8세 안부련 환웅천왕의 신하(군병감독관)이자 유웅국의 임금
(有熊國君)
소전씨(小典氏)가 나왔는데

소전씨- 염제신농씨-제임괴-제승-제명-제직-제리-제애-제유망에 이르는 계보가 형성되었으며 소전의 별파(부인이 다름)로-공손씨

(公孫氏)-황제헌원씨계보가 있다.

 

배달국이 도시국가의 차원을 넘어 넓은 중원땅으로 그 강역이 확장되자 마침내 10세 갈고환웅께서는 영토를 나누어 동방족

이주민이 세운 염제 신농씨의 나라와 경계를 정헀다.
한편 중원으로 내려온 삼위산족 가운데 일부는 동방족 성황의 교화를 받아 동방족의
구성원이 되기도 하였는데 그 한 예로 묘족(苗族)

<三苗>을 들 수있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반고씨와 태호 복희씨와 치우천황을 조상으로 섬긴다.
황제헌원씨는 배달국 14세 치우천황(자오지 천황)때 사람이다.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염제 유망이었다.
그 나라가 쇠퇴함에 따라 치우천황께서 웅도(雄圖)를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차례로 정벌한 뒤 마침내 유망의 수도인

공상(空桑:하남성 진류)을 함락하였다.
이에 대패한 유망이 탁록으로 달아나자 진격하여 정벌하였다.
이 때 천자인 치우천황의 공상 입성 소식을 듣고 제후였던 헌원이 독자적인 천자의 뜻을 나타내며
대군을 일으켜 대항해왔다.
신농씨는 소전씨의 후손이므로 염제 유망은 황제 헌원씨와 한뿌리(소전씨 별파 계보)
였다.
그리하여 유명한 탁록대전이 있었다.
약 10년간에 걸쳐 70여회의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으나 치우씨의 후예인 치우천황께는 이길 수가
없었다 .
싸움이 지속되면서 치우천황의 안개로 인하여 방향을 잃고 고통을 받던 헌원은 결국
지남거(指南車)라는 일종의 나침반을 만들어

안개 속에서도 길을 찾게 되었으며,또 천황군의 갑옷 등 군 장비도

모방하여 착용하는 등 처음의 열등하던 병장기의 격차가 현저하게 좁혀지는 양상으로 변했다.
탁록 전쟁당시 치우천황 장수중 '치우비'라는 장수가 공을 세우려는 욕심에 지나치게
깊이
추격하였고,매복에 걸려 유명을

달리하였다.
어느새 10년간의 세월이 흘러갔고 이제 천황군도 헌원군도 모두 지쳤다.
이때 헌원측에서는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 짓기를 원하는 탄원을 한다.
치우천황의 입장에서도 한정된 군대를 이끌고 드넓은 중국천지를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헌원군을
무한정 쫓아다닐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천황 역시 생각을 바꾸어 문제를 전쟁이 아닌 정치적 협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도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독립하여 살기를 원하는 것뿐인데 그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치권 정도는 인정해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리하여

치우천황께서는 헌원에게 황제(黃帝)의 벼슬을 내려주고 10년간의 민족전쟁을 끝냈다.
벼슬 중에 오제(五帝)가 있는데 황제(黃帝-大加:中央)를 수석장관으로 하고 현제(玄帝/黑帝-加:北部), 적제(赤帝-狗加:南部), 청제

(靑帝-馬加:東部),백제(白帝-牛加:西部)가 그것이다.
삼칸(三汗) 아래 전국을 5부로 나누고 각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조직이다.
이들 5부의 대가들은 청(靑), 적(赤), 백(白), 현(玄)의 순서로 매 3년마다 그 임지를
바꾸어 맡는데,

매 12년이 되면 제위에서 은퇴하는 매우 선진적인 공화제도였다.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수석장관에 해당하는 황제(黃帝)의 벼슬을 내려준 것은 배달국의
수석 제후국으로 대접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황제헌원씨의 후손으로  소호금천씨(현효)와 창의(昌意)씨가 나온다.
소호금천씨 계보로는-교극-제곡고신에 이르러 제곡고신의 네분의 부인중 

(元妃 강원)에서-기(棄)-문왕-무왕이 나오고,
(次妃 간적)에서-설-탕(湯;상나라의 시조 설의 14세손)이 나오고
(次妃 경도)에서-요임금이 나오고
(次妃 상의)에서-지(摯)가 나왔다.

황제헌원씨의 후손으로  창의(昌意)씨 계보로는-전욱고양-궁선-경강-구망-교우-고수-제순중화(순임금)이렇게 이었고 전욱고양의

별파(다른부인)에서 우(禹;하나라시조,전욱의 손자)임금이 나왔다.

 

<고조선>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48, B.C.2380, 일명 단웅(檀雄), 82세)과 웅씨국(熊氏國)의
왕녀의 아드님이 초대 단군성제 이시다.
신묘(辛卯: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밝달나무 밑에서 태어나셨다.
14세 되던 갑진(甲辰:B.C 2,357)년에 웅씨국(熊氏國)왕이 왕검(王儉)의 신성(神聖)함을
듣고 비왕(裨王=副王)으로 삼아, 큰 고을과

나라의 일을 대신 처리하도록 하였다.
무진(戊辰: B.C 2,333)년 중국의 요(堯)나라 임금 때에 단국(檀國=熊氏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밝달나무의 터에 이르러,

나라의 국인(國人:공무원)들이 추대하여 천제(天帝)로 삼으니, 자식들이 뭉치듯이 구한(九桓)이 하나로 되고, 신성한 교화(敎化)

곳에 까지 미치었다.
이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니, 비왕(裨王)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천제(天帝)의
제위 93년
이었으며, 수명은 130세 였다.」

고 하였다.
고조선 단군성제께서 다스리시던 때에 요,순시대가  있었다.
단군성제께서는 무진(서기전 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리셔 47세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해아렸다.
단군 성제 께서는 비서갑(非西岬)[주:非西岬-만주 하얼빈 근방이라고 함] 하백(河伯)의
딸과 결혼하시어 황후비로 삼으시니

백성들에게 누에치기와 길쌈하는 기술을 가르치셨다.
아드님을 낳음에 태자 부루(夫婁)로 하여금 질그릇[陶器]을 만들도록 명하시어 민생
(民生)
을 후하게 하시고, 황자 부소(夫蘇)는 의약

(醫藥)을 맡아 병을 다스리게 하시고 ,황자 부우(夫虞)는 사냥[狩獵]을 맡아 사나운 짐승의 해를 덜게 하시고,황자(皇子) 부여(夫餘)는 잔치하는 예절을 맡아 민속을 숭상케 하시며, 계유가 난을 일으키자 부여에게 명하여 그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1

대~21대 단군께서는 송화강 아사달(하얼빈)을 수도로 삼으시고 삼한(진한,번한,마한)을 관경으로 하여 다스리셨다.
22대~43대 단군께서는 백악산 아사달을 수도로 삼으시고 삼조선(진조선,번조선,막조선)
으로 분조
(分朝)하셨다.

초대 국조 단군께서 고조선을 삼한관경(마한,진한,변한)으로 다스리실때 요임금은 한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요임금은 단군조선의 중신 고시(高矢,관직명)의 친형 고수(高叟)의 아들인 우순에게 벼슬을 내리셨다.
동이족 출신인 고수는 그 아들 우순이 단조(檀朝)에서 벼슬하지 않고 이웃
당요조 (唐堯朝)에서 벼슬을 함으로써,부자의 의견이 달라

마침내 화목하지 못햇다.
요임금은 두딸 아황과 아영과 함께 우순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니
이분이
순(舜)임금이시다.

 

참고자도서 자료: 환단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