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풍습

'먹'의 기원과 발달은 우리민족이 먼저

설레임의 하루 2009. 3. 20. 01:50

*출처:코리아 플러스  글쓴이-솟대 심제 

 

 

 

 

 

 

 

'먹'의 기원과 발달은 우리민족이 먼저

문방사우의 하나인 '먹'의 기원과 발달과정을 밝힌다

 
 

우리는 종이, 붓, 먹, 벼루(紙・筆・墨・硯)을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한다.

이 문방사우 중 종이는 우리 민족인 동이의 발명품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열린 북경올림픽에서 종이를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고

전 세계에 선전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번에는 종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먹의 기원과 발달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중국에서 먹(墨)의 기원은 은(殷)나라 때 백자, 옥기 그리고 갑골문에서 발견된 주서(朱書)와 먹의 흔적으로 보아 동이의 일원이었던

은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시기적이나 지역적으로 고조선에서 은나라로 전수 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   붉은 글씨를 쓸 때 쓰는 주사묵 

그러나 은나라 때는 현재와 같은 고형묵이 아니라 목탄(木炭)이나 석묵(石墨), 석묵을 물에 녹인 묵즙 그리고 단사(丹沙-붉은 모래)를 제련시켜서 만든 주액(朱液)들을 사용하였고, 주(周)나라

때는 대나무 조각에 칠먹(漆墨-옻먹)으로 글자를 썼다고 전한다.

참고로 단사는 주사(朱砂) 또는 진사(辰砂)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황하수은(HgS)를 주성분으로 하는 광물로 결정편은 선홍색이고 다이아몬드 광택이 있다.

광산에서 캐낸 단사를 정제하여 물감으로 사용했으며 붉은 색으로 인해 부적을 쓰는데 사용되었다. 한방에서는 정신을 안정시키고 경풍을 멈추는 약으로도 쓰이는 물질이다.

주나라 때 이런 먹을 필기한 방법은 송연묵(松煙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대나무의 첨필(尖筆)에 흑칠을 해서 간독(簡牘:대쪽과 같이 얇은 나무쪽)에 썼다. 관련기록인 <관자 管子>를 보면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인 제(齊) 환공(桓公)은 정치개혁을 위해 소리(小吏)에 명하여 그의 명령을 필묵을 사용하여 나무 조각에 적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먹의 대명사인 송연묵(松煙墨)의 기원

현재와 같은 고형체로 된 먹의 시초는 송연묵인데, 차이나에서는 한대(漢代)의 묘에서 잘게 부서진 상태의 송연묵이 유물로 출토되었다

고 한다. 그런데 이 송연묵(松煙墨)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기록을 찾아보면 후한(後漢)의 허신은 <설문>에서 먹에 대해 쓰기를 “검은 것으로 송연으로 만든다.”고 풀이하여 송연묵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송나라 때의 문헌인 <묵경 墨經>에는 한나라 때 이미 먹을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인 <후한서>와 <동관한기 東觀漢記>에는 2세기 초에 화제(和帝, 89~105)가 외국(동이)에서 먹을 헌납 받았고,

황제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만 이를 고위관료나 학자들에게 하사했다고 하여 고관대신들도 쉽게 구입하기 어려운 것으로

서술했다.

위진<魏晉>시대까지 석묵을 사용한 것이나 위진시대에도 온전한 송연묵이 아니라 묵환(墨丸)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그리고 송나라

때 송연묵인 휘묵(徽墨)이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것, 후한 때 사신으로부터 받은 송연묵을 황제가 특별한 때에만 신하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아 <후한서>와 <동관한기>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보이며, 고구려 등의 사신으로부터 받은 송연묵은 황실에서만 쓰일

정도로 흔치않았던 귀중품으로 생각된다.

위진시대에 이르러서는 동이(東夷)의 송연묵을 모방한 형태로 보이는 옻과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든 묵환(墨丸)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묵환을 물에 타거나 벼루에 갈아 먹물을 만들어 쓰면서 석묵(石墨)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위무제(조조)의 아들인 조식(曹植)의 <악부시 樂府詩>의 “먹은 소나무의 매연으로 만든다.”라는 기록과 <잠확유서 潛確類書>에

이르기를 “고대에는 칠유(漆油-옻기름)로 쓰다가 뒤에 모두 석묵을 쓰게 되었으며, 한(漢)나라 이후에 와서는 송연(松煙-소나무

그을음)과 동매(桐煤-오동나무 그을음)가 성행하면서 석묵은 사라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석묵 대신 묵환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물에 타서 사용할 정도라면 동이 삼국의 송연묵 품질이 못되는 강도가 약한 연묵이 아닌가 싶다. 

▲   왼쪽이 송연묵, 오른쪽이 유연묵이다.


고구려 송연묵은 사신왕래 시 주요물품으로 고구려말까지 계속 수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인용한 서위(徐渭-明대 문인)의 <노사 路史>기록은  “당나라 때 고구려는 송연묵(松煙墨-소나무

연기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진상했는데, 이것은 송연(松煙)에다가 사슴의 아교를 섞어 만든 먹으로서 ‘유미(隃麋)’라고 불렀다.”고

언급하였고,

한치윤의 <해동역사>도 《노사 路史》를 인용해, “당나라 때 고구려에서 송연묵을 조공하였는데, 미각교와 섞어서 만들었으므로

이름을 ‘유미’라고도 한다.” 하여 고구려 시대부터 사신의 왕래 시 송연묵이 중요 교역물품임을 알려준다.

송연묵과 관련된 고구려 유물로는 고구려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의 전실 정면 윗벽에는 가로 세로로 그어진 계선(界線)에 매

10자 총 81항의 사경체(寫經體) 묵서과  동수묘(冬壽墓)에 쓰여진 묵서명(墨書銘) 등이 남아 있다.

당시 삼국 모두가 이 송연묵을 중요한 교역물품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일본서기에는 고구려의 담징이 묵 만드는 법을 일본에

전수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신라도 또한 비교적 정품(精品)의 먹을 생산하였다고 하며 양가(楊家)와 무가(武家)의 먹은

다 송연묵으로 그 품질이 매우 좋았으며 현재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 그 유물이 남아 전하고 있다.

지나에서의 송연묵 자체제조

최초로 지나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의 단단한 고형묵인 동이의 송연묵을  처음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5대10국 말기와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 이다. 5대10국 말기인 남당(南唐 937년~975년)의 마지막 왕인 이욱(960~975년) 때 해초란 사람과 그의 아들이 북에서

내려와 남당의 흡주(歙州-현재의 안휘성)에 정착해서는 동이의 전통적인 송연묵을 지나 최초로 제조해내면서 당대의 수많은

문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도 대표적인 지나 묵 중의 하나인 휘묵(徽墨=안휘성특산)이다.

현재도 안휘성의 휘묵은 황산(黃山)의 소나무와 계곡물로 만들어 품질이 훌륭하다고 자랑하고 있다. 
 

▲   황산의 소나무와 계곡물로 만들어 품질이 좋은 안휘성의 특산품인 휘묵


 
남당이 송에 흡수되면서 휘묵은 양자강 이북으로도 퍼져 더 이상 수입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제작한 송연묵이 널리 쓰이게

된다.

이로 인해 송나라 때 송연묵의 제조법이 알려지면서 송연묵이 각광을 받게 되는데, 소동파 같은 이도 명묵을 수집하거나 동파법묵

(東坡法墨)이나 홍화묵(紅花墨)이라는 먹을 직접 제조할 정도로 송연묵은 당대의 쟁쟁한 지나 문인들의 예찬을 받았다.

특히 해초부자가 남긴 휘묵은 문인, 묵객들이 서로 가지고 싶은 보배로 일생 한번만 보아도 원을 풀겠다는 이들까지 있었는데

송나라의 유명한 제묵사(制墨士) 반곡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러하였고, 소동파 같은 이는 수집한 수많은 묵 중에서 낙랑(樂浪)의 먹을

보배처럼 여겼다고 한다.

송나라 때 이 휘묵을 바탕으로 고려에서 생산되는 송연묵에 버금가는 새로운 묵을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며, 엽무실이라는 사람은

휘묵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먹똥과 응어리가 안 생기는 청묵(靑墨)을 제조하였다.

또한, 희녕(熙寧) 원풍(元豊) 연간에는 장우라는 사람이 유연(油烟)에 사향(麝香)을 배합하여 금박까지 입힌 최초의 유연묵(油煙墨)인

용향묵을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

이렇게 유연묵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지게 된 송대(宋代)에도 고려에서 들어온 송연묵은 송의 문인들에게 상당한 사랑을 받았으며,

고려에서 사신을 보낼 때에도 매번 물품목록에 포함되었다.

지나를 정복한 몽골제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유연묵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어 송연묵과 유연묵이 함께 제조되어 두 가지가 다 사용되었고, 명나라 때에는 소나무의 청연(淸煙)으로 만든 송연청묵(松烟靑墨)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명대에 생산된 송연청묵은 당묵(唐墨)이라고도 호칭한다.

청대에는 유연묵이 사랑을 받아 건륭제도 자신의 이름을 붙인 유연묵을 제조해 사용하였고 황실이나 문인들 모두가 유연묵을 상당히

애호하여 유연묵이 각광을 받는다.

▲  중국은 북경올림픽 개회식에서 종이를 자기네 4대 발명품의 하나라고 전세계에 알렸다. 

사진은 개회식 리허설에서 종이 위에 수묵화를 그리고 있는 장면.

그런 먹의 기원과 발달은? 


전체적으로 요약해보면 차이나 먹(墨)의 기원은 모두 동이(東夷)에서부터 기원하였고, 아래와 같이 세 번의 먹 문화발전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처음 먹을 도입한 나라는 동이의 별종이 세운 은나라였고 주로 석묵이나 묵즙을 사용하였고, 주나라 때부터 칠유(漆油-옻기름)을

이용하였다.

2) 두 번째는 고구려의 송연묵(松煙墨)의 수입과 모방시기인데, 후한대에 이르러서 역사 최초로 고형묵 형태인 고구려의 송연묵이

사신왕래를 통해 황실용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였고, 위진(魏晉) 때에는 동이의 주요 수출품인 고구려의 송연묵을 모방해 만든 먹이

발전을 거듭해 강도가 연약하지만 묵환(墨丸)형태까지 발전한 것이었다.

3) 세 번째는 5대10국 말기인 고려 초기에 남당의 이욱(960~975년) 때 해초부자가 휘주(徽州)로 피난와 정착하면서 송연묵의

제조법이 알려져 송대에 휘묵이라 알려지면서 처음으로 지나에서 송연묵이 제조된 시기이다.

제조기술을 습득하면서 고려의 송연묵을 자체적으로 더 발전시키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먹들을 만들었고 유연묵(油煙墨)도 개발하여

명대에는 먹 문화가 동국(東國)보다 발전하여 먹의 황금시기를 맞이한다.

이렇게 과거 먹 문화를 선도하였던 동국(東國)은 고려 시대만해도 송나라에 주요 교역물품으로 각광을 받았던 송연묵의 본고장으로

명성을 떨치지만, 송나라 이후로 고려말기부터 점차 역전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지나 묵의 황금시기를 이루었다는

명나라에 비해 많이 떨어지게 된다.

근세조선은 송나라나 명나라의 노력처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전시키거나 받아들여 오래 가꾸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묵문화(墨文化)는 고려시대까지는 한민족이 각국에 훌륭한 묵문화를 전파하며 앞서가던 시대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완전히 역전되어 명나라가 묵문화의 전성기를 이루며 앞서나갔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묵문화가

발전하여 국내에서도 가장 인기있고 좋은 먹은 일본 묵으로 인식되고 있고 보통 40만원에서 50만원정도의 가격으로 고급 먹으로

인정받고 있다. 

   가격이 무려 5,250엔인 일본인 상점이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송연묵(松煙墨) 고형묵(固形墨)

 
과거 명시대부터 명성을 떨치던 지나의 경우 묵의 품질이 많이 떨어져 휘주에서 생산되는 송연묵도 아주 나쁜 먹부터 좋은 먹까지

천차만별의 품질을 보여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는 묵공의 명맥이 끊어질 정도로 퇴락하였으며, 현재 다시 과거의 명성을 되찾고자 몇 군데 남지 않은 묵 공장이 노력하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의 몇 안남은 묵공(墨工) 유병조씨는 송연묵에서 그을음을 채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하고 있다.

먹 만드는 작업은 복잡하며 최고의 묵은 가장 좋은 최고의 그을음을 채취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먹 제조과정 7단계 >
그을음채취 > 아교녹이기 > 반죽 > 형틀성형 > 건조 > 가공(墨) > 광택 및 글씨 새겨 넣기 그을음 채취 과정을 빼어도 45일이

걸린다고 한다. 먹이 보기에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어렵고 복잡하여 아무리 정성을 들여 잘 만들어도 기온 등 조건이 맞지 않으면

먹이 깨져버리거나 굽어버린다고 한다.

특히 송연코팅과 관련된 그을음 채취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상처입은 소나무에서 나오는 관솔(=송지松脂, 소나무과 나무가

손상을 입었을 때 분비되는 발삼)이나 송진을 포함한 소나무뿌리를 태워 그을음을 채취하는 과정은 최고의 먹을 만들기 위한 첫째

관문으로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인간문화재로 남은 한국의 묵공(墨工) 장인인 유병조선생의 먹 제조과정. 

사진제공은 경북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