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코리아 플러스 글쓴이-솟대 심제 | ||||||||||||||||||
'먹'의 기원과 발달은 우리민족이 먼저 문방사우의 하나인 '먹'의 기원과 발달과정을 밝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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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이, 붓, 먹, 벼루(紙・筆・墨・硯)을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한다. 이 문방사우 중 종이는 우리 민족인 동이의 발명품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열린 북경올림픽에서 종이를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고 전 세계에 선전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번에는 종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먹의 기원과 발달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은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시기적이나 지역적으로 고조선에서 은나라로 전수 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은나라 때는 현재와 같은 고형묵이 아니라 목탄(木炭)이나 석묵(石墨), 석묵을 물에 녹인 묵즙 그리고 단사(丹沙-붉은 모래)를 제련시켜서 만든 주액(朱液)들을 사용하였고, 주(周)나라 때는 대나무 조각에 칠먹(漆墨-옻먹)으로 글자를 썼다고 전한다. 하는데, 황하수은(HgS)를 주성분으로 하는 광물로 결정편은 선홍색이고 다이아몬드 광택이 있다. 광산에서 캐낸 단사를 정제하여 물감으로 사용했으며 붉은 색으로 인해 부적을 쓰는데 사용되었다. 한방에서는 정신을 안정시키고 경풍을 멈추는 약으로도 쓰이는 물질이다. 고 한다. 그런데 이 송연묵(松煙墨)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있었음을 보여준다. 송나라 때의 문헌인 <묵경 墨經>에는 한나라 때 이미 먹을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황제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만 이를 고위관료나 학자들에게 하사했다고 하여 고관대신들도 쉽게 구입하기 어려운 것으로 서술했다. 때 송연묵인 휘묵(徽墨)이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것, 후한 때 사신으로부터 받은 송연묵을 황제가 특별한 때에만 신하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아 <후한서>와 <동관한기>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보이며, 고구려 등의 사신으로부터 받은 송연묵은 황실에서만 쓰일 정도로 흔치않았던 귀중품으로 생각된다. 시작하였는데 이 묵환을 물에 타거나 벼루에 갈아 먹물을 만들어 쓰면서 석묵(石墨)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르기를 “고대에는 칠유(漆油-옻기름)로 쓰다가 뒤에 모두 석묵을 쓰게 되었으며, 한(漢)나라 이후에 와서는 송연(松煙-소나무 그을음)과 동매(桐煤-오동나무 그을음)가 성행하면서 석묵은 사라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석묵 대신 묵환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물에 타서 사용할 정도라면 동이 삼국의 송연묵 품질이 못되는 강도가 약한 연묵이 아닌가 싶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인용한 서위(徐渭-明대 문인)의 <노사 路史>기록은 “당나라 때 고구려는 송연묵(松煙墨-소나무 연기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진상했는데, 이것은 송연(松煙)에다가 사슴의 아교를 섞어 만든 먹으로서 ‘유미(隃麋)’라고 불렀다.”고 언급하였고, 이름을 ‘유미’라고도 한다.” 하여 고구려 시대부터 사신의 왕래 시 송연묵이 중요 교역물품임을 알려준다. 항 10자 총 81항의 사경체(寫經體) 묵서과 동수묘(冬壽墓)에 쓰여진 묵서명(墨書銘) 등이 남아 있다. 전수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신라도 또한 비교적 정품(精品)의 먹을 생산하였다고 하며 양가(楊家)와 무가(武家)의 먹은 둘 다 송연묵으로 그 품질이 매우 좋았으며 현재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 그 유물이 남아 전하고 있다. 이르러서 이다. 5대10국 말기인 남당(南唐 937년~975년)의 마지막 왕인 이욱(960~975년) 때 해초란 사람과 그의 아들이 북에서 내려와 남당의 흡주(歙州-현재의 안휘성)에 정착해서는 동이의 전통적인 송연묵을 지나 최초로 제조해내면서 당대의 수많은 문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도 대표적인 지나 묵 중의 하나인 휘묵(徽墨=안휘성특산)이다. 현재도 안휘성의 휘묵은 황산(黃山)의 소나무와 계곡물로 만들어 품질이 훌륭하다고 자랑하고 있다.
된다. 이로 인해 송나라 때 송연묵의 제조법이 알려지면서 송연묵이 각광을 받게 되는데, 소동파 같은 이도 명묵을 수집하거나 동파법묵 (東坡法墨)이나 홍화묵(紅花墨)이라는 먹을 직접 제조할 정도로 송연묵은 당대의 쟁쟁한 지나 문인들의 예찬을 받았다. 송나라의 유명한 제묵사(制墨士) 반곡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러하였고, 소동파 같은 이는 수집한 수많은 묵 중에서 낙랑(樂浪)의 먹을 보배처럼 여겼다고 한다. 휘묵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먹똥과 응어리가 안 생기는 청묵(靑墨)을 제조하였다. 또한, 희녕(熙寧) 원풍(元豊) 연간에는 장우라는 사람이 유연(油烟)에 사향(麝香)을 배합하여 금박까지 입힌 최초의 유연묵(油煙墨)인 용향묵을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 고려에서 사신을 보낼 때에도 매번 물품목록에 포함되었다. 명대에 생산된 송연청묵은 당묵(唐墨)이라고도 호칭한다. 애호하여 유연묵이 각광을 받는다.
요약할 수 있다. 이용하였다. 사신왕래를 통해 황실용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였고, 위진(魏晉) 때에는 동이의 주요 수출품인 고구려의 송연묵을 모방해 만든 먹이 발전을 거듭해 강도가 연약하지만 묵환(墨丸)형태까지 발전한 것이었다. 제조법이 알려져 송대에 휘묵이라 알려지면서 처음으로 지나에서 송연묵이 제조된 시기이다. 명대에는 먹 문화가 동국(東國)보다 발전하여 먹의 황금시기를 맞이한다. 명성을 떨치지만, 송나라 이후로 고려말기부터 점차 역전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지나 묵의 황금시기를 이루었다는 명나라에 비해 많이 떨어지게 된다. 근세조선은 송나라나 명나라의 노력처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전시키거나 받아들여 오래 가꾸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완전히 역전되어 명나라가 묵문화의 전성기를 이루며 앞서나갔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묵문화가 발전하여 국내에서도 가장 인기있고 좋은 먹은 일본 묵으로 인식되고 있고 보통 40만원에서 50만원정도의 가격으로 고급 먹으로 인정받고 있다.
천차만별의 품질을 보여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는 묵공의 명맥이 끊어질 정도로 퇴락하였으며, 현재 다시 과거의 명성을 되찾고자 몇 군데 남지 않은 묵 공장이 노력하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먹 만드는 작업은 복잡하며 최고의 묵은 가장 좋은 최고의 그을음을 채취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걸린다고 한다. 먹이 보기에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어렵고 복잡하여 아무리 정성을 들여 잘 만들어도 기온 등 조건이 맞지 않으면 먹이 깨져버리거나 굽어버린다고 한다. 손상을 입었을 때 분비되는 발삼)이나 송진을 포함한 소나무뿌리를 태워 그을음을 채취하는 과정은 최고의 먹을 만들기 위한 첫째 관문으로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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