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성왕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역사 교과서를 부분 개정해야 할까?
6세기 무렵 백제를 삼국 최고의 문명국으로 중흥시키고 일본에 불교문화를 전파한 성왕(523~554 재위).
그동안 역사학계는 <일본서기> 중 흠명천황 15년조 내용과 <삼국유사> 중 성왕 32년조에 기록된 ‘성왕은 죄지촌(지금의 충남 옥천
또는 보은)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죽임을 당했다’라는 내용을 정설로 여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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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담당 홍윤기 교수가 발표해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홍 교수가 이 같이 주장하는 고증적 근거는 <대초자>와 <성예초> 그리고 일본학자들이 발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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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법륭사에 대한 모든 정보와 비사를 기록하고 있는 <성예초, 1394~1427>의 내용도 홍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고증자료로 신빙성을 더 하고 있다.
이 문서는 ‘백제 성왕의 전신은 지금의 성덕태자이시다.
따라서 이 구세관음상은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 나라대학 나카가와 토모요시(中川友義) 교수의 논문<일본에 도래한 신들>에서는 ‘제1신전은 성왕, 제2신전은 구도왕
(온조), 제3신전은 고개신(비류왕과 근초고왕)이 모셔져 있는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가 1991년 저술한 <두 개의 얼굴의 대왕>에서 ‘백제 성왕은
일본에 건너와 흠명천왕이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교토산업대 역사학과 이노우에 미쯔오(井上滿郞) 교수의 논문
<헤이안의 풍경, 1994>에서 ‘히라노신사에 모셔진 제신은 백제에서 건너 온 금래신(今來神)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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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에 소재한 히라노신사(平野神社)는 서기 794년 칸무천왕이 수도를 교토로 천도한 기념으로 세운 사당이며 금래신
또는 흠명천왕, 히라노신이란 명칭은 이미 일본사학자들에 의해 백제 성왕으로 판명된 부분이다.
이에 대해 일본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마 사아끼(上田正昭) 명예교수는 “‘백제 성왕은 일본 왕을 겸했다’라는 내용이 담긴
홍 교수의 연구논문은 일본 고문서와 논문을 바탕으로 고증한 신빙성 있는 자료로 평가되며 이 대목에 있어서는 일본사학자들도
상당부분 인정하고 있다”며 “이 부분의 진위여부는 양국의 역사 교과서를 수정할 정도로 중요한 대목인 만큼 한ㆍ일 불교사학자들의
충분한 연구와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홍 교수는 200년 전 에도막부 말기에 쓰여진 고문서<일본시사>를 바탕으로 ‘일본 정형시조인 와카의 창시자 또한 왕인
박사였다’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1970년대에 발표한 바 있다.
왕인 박사는 4세기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 집권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한자 보급은 물론 백제의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전수한 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