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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설레임의 하루 2009. 3. 16. 06:21

"선화공주,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연합뉴스 | 입력 2009.03.15 18:21 | 수정 2009.03.15 19:31

 
미륵사 학술대회서 첨예한 논쟁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사상사학회(회장 최기영)가 14일 서강대 다산관 209호 세미나실에서 '익산 미륵사지

백제 불교'를 주제로 개최한 월례학술발표회는 최근 발굴된 미륵사 사리장엄구 발굴성과를 처음으로 학술 토론 대상으로

올렸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그런 관심을 반영하듯 좁은 세미나실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
이렇게 좁은 장소를 학술대회장으로 정하게 된 까닭을 전임 학회장인 조성을 아주대 교수는 "월례발표회는 원래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전의 월례발표회처럼 '소규모'로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세미나실은 이내 사람들로 가득 찼고, 학회 측이 준비한 100부 가량 되는 발표문도 이내 동나는 바람에 늦게 도착한

사람들에게는 발표문을 이메일 발송을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술발표회는 불교사상사 전공인 최연식 목포대 교수의 사회로 모두 4편에 이르는 논문 발표와 그에 대한 개별 및 종합토론

순서로 진행됐다.

발표자 중 최연장자이면서 미륵사 서탑 사리봉안기를 국립문화재연구소 의뢰로 판독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가장 먼저

'백제 무왕의 왕후와 미륵사 창건'이라는 발표를 통해 삼국유사의 미륵사 창건 기록에 너무 얽매이지 말 것을 강조했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사를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 딸인 선화공주가 함께 발원해 창건했다 했지만, 당시 백제인들이 작성한

이번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비인 사택(沙宅)씨가 창건한 것으로 나오는 만큼, 봉안기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제불교에 관한 연구를 주도하는 소장파 학자들인 국가기록원 길기태 박사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경철 박사는 봉안기

발굴로 학계가 봉착한 가장 난처한 문제일 수도 있는 미륵사 창건을 뒷받침한 불교사상을 탐구한 성과를 내놓았다.


이밖에 사리봉안기 서체에 관한 발표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그다지 쟁점이 되지는 않았다.


사회자인 최연식 교수는 개별발표와 개별토론이 끝난 뒤 논쟁점을

▲미륵사 창건 과정

▲그것을 뒷받침한 불교사상

▲선화공주의 문제 등 3가지로 정리해 종합토론에 부쳤다.


사리봉안기 발견 이전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 부부가 석가모니 부처 입멸 이후 도래한다는 미륵불에 대한 신앙심에서

발원해 창건했다는 연구성과를 발표한 적이 있는 길기태ㆍ조경철 두 박사는 사리봉안기 내용을 종래의 자기 학설의 범위에서

해석하고자 했지만, 이는 첨예한 논란을 빚었다.

두 연구자 모두 사리봉안기에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전혀 보이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신앙만 표출했지만, 그

이면에는 삼국유사 기록처럼 미륵불 신앙의 흔적을 여전히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첫 발표자인 김상현 교수가 포문을 열었다.
김 교수는 "불교사상을 석가모니 신앙이다, 미륵신앙이다, 화엄신앙이다 하는 식으로 갈라보는 시각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학계에서) 미륵신앙이라고 해서 그 근거로 드는 불교경전만 해도 불설(佛說)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불교신앙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석가모니 부처를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미륵불 또한 석가모니 부처에 의해 미래의 부처로 약속을 받았으니, 미륵신앙 또한 그 근본은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신앙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맞물려 한국 고대 사찰에서는 유일하게 중원(中院)ㆍ서원(西阮)ㆍ동원(東院)의 삼원 체제를 갖춘 미륵사가 일시에

창건된 것인지, 아니면 순차적으로, 그리고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도 논란 대상이 되었다.

길ㆍ조 두 박사는 분리설에 무게를 두었다. 다시 말해 중원이 어느 시기에 먼저 이룩되었으며, 봉안기에서 말하는 서탑의

창건연대인 639년에 이르러 서탑과 동탑, 그리고 서원과 동원이 무왕의 왕비인 사택씨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자연히 선화공주가 삼국유사 기록처럼 어떤 형태로건 미륵사 창건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이와 관련해 길 박사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정비가 아닌 후궁 일종인 부인(夫人)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래서

사리봉안기에는 그가 창건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조 박사는 재위 기간이 40년에 이르는 무왕시대 그의 왕비가 사택씨 외에 다른 왕비가 있었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처음 창건할 때 왕비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 또한 김 교수의 반격을 받았다. 김 교수는 "미륵사지 발굴성과를 존중하면, 미륵사가 창건 당시 삼원

체제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되었으며, 다른 무엇보다 봉안기 자체에서 왕비 사택씨가 서탑 외에도 '가람'을 발원해 창건한

것으로 나오므로 근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반박에 곤혹스러워진 길 박사는 급기야 "그럼에도 선화공주는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미륵사 사리장엄구 발굴이 촉발한 이런 논쟁은 일주일 뒤인 21일 신라사학회와 국민대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주최하는 학술대회에서 2라운드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