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이인구 회장 “日왕실은 한민족 혈통” 폭탄 발언

설레임의 하루 2009. 3. 6. 05:09

*출처: 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응 흔적  글쓴이: 道不遠人

     

     

     

     

    이인구 회장 “日왕실은 한민족 혈통” 폭탄 발언

    일본서기.건국신화 등 허구성 제기 日사관 비판
    역사인식.교과서왜곡 등 팽팽한 대립 ‘평행선’

     지난 84년 대전에서 치른 ‘한·일 학술세미나’는 일과성 행사가 아니라 ‘국제논단’의 지평(地平)을
    새벽종소리 같은 것으로

    ‘여명’ 그 자체였다면 과대포장이라 나무랄 것인가.

    이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던지 일본신문 ‘구마니치(熊日)’에선 연일 예고기사와 컬러광고를 실었다.

     이 행사는 당시 대전 상공회의소 이인구(李麟求) 회장의 지원에 힘입어 무난하게 치렀고 그가 회장 재임시 81~89년은 한·일간

    민간교류의 절정기였다는 평을 들었다.

    또, 그가 국회의원시절엔 한·일 의원연맹 간사장을 맡아 차원 높은 교류를 추진했고 정계은퇴 후엔 계룡장학회를 설립, 10여 년간

    줄기차게 연구 사업을펴왔다.

    중국과 일본, 고구려와 백제유적탐사를 위해 전문가들을 인솔 연 2~3차례씩 해외에 나갔고귀국보고, 세미나 등 경비일체는 그가

    전담했다.

    그것은 폭탄성 질문이었다

     


     제1차 대전세미나 때 이인구 회장은 일본 측 ‘미지마(三島恪)’ 교수의 발표를 듣고 나서 폭탄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일본역사, 왕실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그 누구도 생각 못한 것으로 장내를 긴장시켰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일본건국사’와 ‘왕실의 혈통’에 대해 늘 의문을 가져왔다”고 전제하고는 포문(?)을 열었다.

     

     

    ▲ 한국측 대표 이인구 회장
    ▲ 일본측 대표 히라노 구마니치 신문 주필
     
     
     
     
     
     
     
     
     
     
     
     

     

     

    ▲ 일본 건국의 조(祖)는 ‘스사노오노 미코도(素佐之男尊)’라 생각하며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祖大神)’는 ‘스사노오노 미코도’의 현지처(妻)라는 설.
    ▲ 기원전 ‘아마테라스’ 대신(大神)은 남성이었다고 보고 있으며

     

    ▲ 초대천황 ‘신무천황(神武天皇)’ 즉위 시 지참한 검(劍)과 거울[鏡] ‘마가타마(曲玉-보물)’ 등 삼종의 신기(神器)는 한민족

      유물이 분명하고

     

     

     ▲ ‘야마다이고쿠(雅馬臺國)’란 북규슈(北九州)가 아니라 남단 ‘미야자키(宮崎)’ 현 서부지역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왕실 혈통은 도래계(한민족)라 짐작하는데 ‘미지마(三島)’ 선생의 견해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때 일본 측 ‘히라노(平野敏也)’ 대표는 이 회장의 주장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그는 도쿄대 사학과 출신으로 일본고대사

    전문가로 언론계에서 활약했다. ‘미지마’ 교수는 이와 같은 질문에 당혹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이어 이 회장은 “불편하게 생각마시고 ‘아마추어’의 소견이라 이해하기 바란다”며 또 다른 문제를 들고
    나왔다.

    “나는 대일(對日)감정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며 일본석학 중에 이런 주장을 펴는 이가 있는 걸로 안다”며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는 또, 일본인이 경전(經典)처럼 내세우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8할 이상이 거짓말이다”,

    “고지기(古事記)는 절반가량이 허구(虛構·픽션)이다”라고 주장하는 일본학자가 있다는 지적에 장내는 숨을 죽인 듯 조용해졌다.

    이는 일본의 정체를 뒤흔드는 폭탄과도 같은 질문으로 한국 측 교수와 주최자인 필자 그 누구도 이런 질문이 나올 줄은 예상을

    못했다.

    한·일간 지성들이 만난 자리에서 이렇듯 폭탄성주장이 나온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날 안승주 교수는 ‘백제의 묘지제도’ 전공에 성주탁 교수는 축성(築城), 박계홍 교수는 민속학이기
    때문에 그 나름의 주장을 폈다.

     이인구 회장의 ‘일본 왕실의 혈통과 일본의 건국신화’에 대한 반박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미지마(三島)교수 이마엔 식은땀이


    미지마’ 교수는 이 회장의 질문에 얼굴이 창백해지며 “일본학자 중에 비슷한 주장을 하는 이가 있지만…”하고 목소리를 낮추더니

    자신도 그 학자(작가)의 논문을 예의 분석중이라며 한발 비켜섰다.

     

    하지만 이 회장의 주장에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일본 학자로서 한국에 건너와 일본 사관(史觀)을 뒤집을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들은 이야기로는 이 회장은 일본 고대사에 대해 진작부터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1960년대 나온 저 유명한 ‘하라타(原田常治)’의 기원전(紀元前) 자료에 의안 고대일본정사(古代日本正史)를 줄곧 탐독했다는

    확인한 것은 근자의 일이다. 작자 ‘하라타’의 필명은 ‘아리타(有田治)’였다.

     그는 소설가로 ‘고오단샤(講談社)’ 편집장을 거쳐 ‘부인생활사’와 ‘동지사(同志社)’를 창립한 인물이
    기도 하다.

    이미 타계했지만 …. 이 회장은 큰 기업가요, 한 시대 정계를 주름잡은 인물이지만 독서광(狂)으로 알려져 있다.

    국회의원시절엔 한·일 의원연맹 한국 측 간사장을 맡는 바람에 일본에 대해 깊숙이 파고든 것으로 짐작된다. 

     정계를 은퇴한 뒤엔 ‘계룡장학회’를 설립, 10여년간 해외문화 연구팀을 진두지휘하면서 ‘일본 속의 백제
    탐사’와 ‘고구려사연구’를

    위해 20여 차례 중국과 일본을 내왕, 귀국보고와 세미나를 가진 일도 있었다.

    해외탐구’에 나설 때는 일행에게 사전지식을 심어주며 연구방향까지 지시했다.

    이렇듯 해박한 지식을 지닌 탓에 그와 일본역사를 논하다 보면 그 식견에 학자들도 놀란다.

    장학회 임원중에는 사학자출신 대학총장과 국립박물관장, 교수와 언론인이 있지만 늘 새로운 식견(논리)을 들고 나와 주변을

    긴장시키기 일쑤였다.

     그래서 중국, 고구려, 백제에 대한 책(古典)이 그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거느리는 기업을 챙기기도 어려울 것인데 그 나이에 연구라니….” 그를 아는 이는 그의 정열에 혀를 내두른다.

    한·일간엔 산적한 숙제가


     대전 세미나는 한·일 양측이 서로의 주장을 확인하는 계기였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제1차 포럼을 마치고 필자는 일본 측과의 협약대로 ‘구마모토’에서 있을 2차 행사를 서둘러야 했다. 대전 행사 때 일본 측에선

    명의 발표자가 건너왔기 때문에 우리 측에서도 3명을 선정했다.

    그 바람에 1차 때 참가했던 박계홍 충대교수와 이석호 부여문화원장이 빠졌다.

     따라서 안승주(공주대 전 총장) 성주탁(충남대 교수) 그리고 필자가 논문준비에 들어갔다.

    그 무렵 남북관계는 더 없이 냉엄했고 국내 정정(政情) 또한 암울한 때라 민감한 정치문제는 배제하기로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무렵 한 ·일간엔 역사문제뿐 아니라 전 분야에 걸쳐 입장차가 커 사사건건 평행선을 달릴 때였다.

     이인구 회장이 제기한 질문(주장)이외에도 사안마다 갑론을박(甲論乙駁), 첨예하게 맞서던 시절.
    예를 들면 ‘징구고오고(神功皇 后)’의 ‘신라정벌’이라든가 ‘미마나 일본부(任那日本府)설’, ‘일본교과서왜곡’, 심지어 영토분쟁이라 할 ‘독도문제’,

    ‘종군위안부논쟁’등 양측은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든 이제 우리는 대일 전략과 연구 자세를 가다듬으며 자성을 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절감한다.

     

    일본의 식민사관(매판), 교과서 왜곡, 반성할 줄 모르는 근성 앞에 팔을 걷어 붙이고 성토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젠 반격할

    구체적인 전략(각론)을 세워야 한다는 소명 앞에 서 있다.

     일본을 알고 또 그들이 주장하는 허구성을 추적검토, 인양(引揚)해 이를 토대로 반격하려면 우리는
    역사공부를 해서 보다 확실한

     논거를 갖고 반격할 때 초극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거듭 말해서 일본을 제대로 알고 맞서야 하는데 일인들만큼 역사공부를 많이 하고 또, 책을 읽는 민족도 드물다는 걸 어떻

    설명해야 하는가.

     일본에는 한국사(동양)를 연구하는 석학이 300~400명이 된다는 소식인데 일본 것을 파고드는 한국
    학자는 10여명 선이라 하니

    서글픔을 금치 못한다.

    일인들은 끈질긴 연구와 논리를 갖고 ‘인해전술’로 나오고 있는 걸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필지는 70년대 말, 인터뷰를 위해 ‘니시타니(西谷正)’ 교수의 연구실(후쿠오카)을 찾아간 일이 있다.

    대담 중 ‘징구고오고’의 ‘신라정벌’설에 대해 필자가 언성을 높이자 그는 “일본에는 아직도 그런 바보
    가 있다”며 피식 웃어넘겼다.

    ‘일본에도 이렇듯 양심적인 지성이 있구나!’하는 생각에 그와는 계속 유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이미 30년 전에 놀랍게도 한국사에 나오는 ‘가야국’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질구레한 토기, 전투 때 쓰던 화살촉, 말발굽, 기마병이 깔고 앉았던 안장 등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우리 역사엔 분명 가야국이 나오지만 30년 전 우리 주변에 그것을 연구한 학자가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다시 화두를 돌려보자.

     대전세미나 때 이 회장이 일본 건국신화에 이견을 내세웠지만 그는 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9년 후에
    일본 ‘건국신’의 요람

    ‘미야자키’로 연구팀을 이끌고 건너간 일이 있다.

    신들이 칩거했다는 고원과 백제마을’을 답사했는데 ‘백제촌’이야기는 추후따로 다룰 생각이다.

    ‘계룡장학회’ 해외탐사에는 이 회장 측근(참모)으로 국제감각에 능하고 외국어를 잘 구사하는 조중원
    이사와 실무에 밝은 윤건원

    비서실장이 20~30년간 사전답사, 뒤치다꺼리를 해온 탓에 이들은 전문가가 다 되었다고 주변에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