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설레임의 하루 2009. 3. 6. 00:13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


오늘부터 존 코벨의 '한국문화 탐구'를 주 1회 연재한다.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인 코벨은 당초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이후 일본문화의 원류인 한국문화에 주목, 약 8년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문화에 관한 수많은 글을 썼다.
  
  한국문화에 대한 그의 연구 업적은 일제시대 한국문화를 일본에 알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비견될 수 있으나 불행히도 그의

영문저작은 국내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마침 코벨 박사의 한국 체류 당시 그와 교분이 있었던 언론인 김유경씨가 코벨 사후 그의 유고들을 한데 모아 편역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프레시안은 김유경씨의 번역으로 코벨 박사의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편집자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1996)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 미국 오벌린대학을 나와 서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15세기 일본

禪畵家 셋슈(雪舟)의 낙관이 있는 수묵화 연구’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교토 대덕사(大德寺) 진주암에서 오랜동안 불교 선미술을 연구했으며 1959년부터 1978년까지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하와이주립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다.
  
  일본문화를 연구하면서 그 근원으로 인식하게 된 한국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위해 1978-1986년 한국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하여 한일 고대사, 한국미술, 불교, 도자기 등에 대한 1천여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조선호텔

70년사’ ‘한국문화의 뿌리’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영문저작을 냈다.

일본문화와 미술에 관해서도 16권의 저작이 있으며 ‘대덕사의 선(禪)’, ‘일본 선정원 연구’ ‘잇뀨(一休)선사 연구’ 등이 꼽힌다.

    편역자의 말- 김유경(언론인. 전 경향신문 문화부장)
  
  지난 수년간 존 코벨 박사와 그의 아들 알란 코벨 박사가 1978-1986년에 걸쳐 쓴 1천 수백편의 글중에서

‘한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에 해당하는 모든 원고를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영문 오리지널 원고의 일부는 1982년 한림출판사에서 펴낸

영문판 책으로 나왔으나 일본의 역사왜곡 등은 미처 책으로 엮어지지 않았고 부여족 이야기 전반, 법륭사부분도 책에 쓰여진 것보다

더 자세한 글이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이를 우리말로 한국 독자에게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서 고미술에 관한 존 코벨 박사의 심미안이 발휘된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은 1999년 우리말 책으로 편역해 냈다.

그는 실로 탁월한 한국문화의 해설자였으며 두 사람의 고미술연구는 한국과 일본간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기도 했다.
  
  존과 알란 두 코벨 박사는 일본이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거짓말하여 소위

임나일본부설 등 진실을 속이고 있음을 알아챘다.

두 사람은 1980년대부터 이를 학문적으로 밝히는 작업의 중요성을 말하며 ‘누군가 해야할 일’ 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제3국 학자의 이같은 성찰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위해, 그리고 학문적 진실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것이다.
  
  한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의 전체구성은 한림출판사 발행 책과는 별도의 것으로 부여족의 야마도 정벌, 부여기마족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제시함으로서 코벨의 부여족연구를 전체적으로 다루어 보겠다.
  
  문화부문에 가서는 무속신앙과 불교, 韓문화의 일본유입, 일본에 남은 백제를 대표하는 건축 법륭사 중에서 건축기법, 백제관음,

옥충주자(玉蟲廚子; 다마무시노 즈시), 금당, 몽전구세관음 등에 관한 것을 소개하겠다.
  
  덧붙여 존과 알란 두 코벨 박사가 일본의 역사왜곡을 낱낱이 파헤친 1982년도의 글도 소개할까 한다.

이들은 그동안 영어와 일어로는 소개되면서도 막상 우리말로 충분히 소개되지 못했다.

이 글을 통해 한국뿐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서론
  
  
부여 기마족의 자취
  
  어느 나라나 그 역사초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지역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이민자들이 처음 미국땅에 발디딘 플리머스록, 제임스타운, 센트 오거스틴같은 곳이다.

일본의 경우도 역사의 시작 단계때 결정적인 곳인 이즈모신사, 이세신사, 그리고 이소노가미신사를 든다.

이곳은 관광용 장소가 아니라 일본 신또(神道)신앙으로 닦여진 일종의 성소같은 곳이다.
  
  수백만 일본인들은 해마다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이세신사를 방문한다.

이슬람교도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번 이상 메카를 성지순례차 오는 것과 같다.

이슬람교도들은 메카에 와서는 아라비아가 그옛날 받들던 카바신전의 검은 돌 주위를 여러번 맴돈다.

이세신궁에 온 일본인들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거울이 있는 목조 건물을 가려논 두꺼운 장막앞에 대고 절한다.

아마데라스는 일본 고대역사서(712년과 720년편찬된)에 지금 천황가계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신이다.
  
  이즈모신사는 이보다 방문객이 덜하다. 이즈모는 2000여년전 한국땅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식민구역으로 만들어 정착했던 곳이다.

이곳 신사에 모신 바람의 신 스사노오노는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오빠라는 신이다.
  
  세 번째는 이소노가미(石上)신사, 또는 ‘부여 바위신’의 신사이다.

이 곳은 일본이 처음으로 중앙집권 체제아래 이룬 문화구역 아스카의 심장부 기차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의 언덕숲에 있다.

부여왕족혈통의 여걸 왕녀 神功이 이끈 일단의 기마족들이 배를 타고 이곳 일본으로 건너와 선진문명과 기술을 전파한 것이다.
  
  많은 일본인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이세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애국적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에 보관돼 있다는 아마데라스의 거울은 오직 아마데라스의 후예, 왕위(천황)에 오른 지배자만이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이즈모신사가 이세신사보다 더 역사 깊은 곳으로, 석기시대에 이곳으로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이주해온 사람들은

주로 한국 신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소노가미는 일본 고대사에 잘 알려진 곳이지만 이세신사에 비하면 방문객은 많지 않다.

여기 보관돼 있는 칼은 스사노오노가 용의 머리를 베었다는 그 칼도 아니고 해의 여신이(아마데라스 오미가미) 진무에게 ‘일본땅을

정벌하라’며 내려주었다는 그 칼도 아니다. 그 것은 무속적인 형태의 칠지도라는 칼이다.

이 칠지도는 바로 실제적인 ‘일본정벌’을 입증해 주는 유물로서 여기에는 서기 369년에 해당하는 년대와 한문 금글자가 새겨져 있다.
  
  369년에 왜(일본)에서 한문을 읽을 줄 아는 자는 없었으며 백제에서도 오직 최고의 지식인만이 그당시 극동의 유일한 기록문자이던

한문을 읽고 썼다. 칠지도는 神功(진고왕후)이라는 이름의 젊고 아름다운 부여왕녀가 이끌었던 기마족 일단이 369년 한국에서 건너와

일본을 정벌했음을 확증시키는 자료다.

  
  이때의 외래 기마족들에 의한 왜 정벌을 감추어보려는 시도가 후일 8세기의 일본 역사에서 행해져 이들은
진고가 한국을 정벌한

여걸이라고 묘사했다. 너무나도 극적이고도 대담한 이 시도는 진고를 한국의 왕녀가 아닌 순수 일본인으로 설정하고 한국에서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180도 반전시켜 진고가 한국을 침입했다고 만들었다.
 
  오늘날 일본인 중에는 이소노가미 신사 깊숙이 비장되어 있는, 기묘한 형태의 칼 칠지도의 본질을 바로 알거나 부여족의 이야기를

들어 알거나 이 칼이 부여지배자들의 성물중의 성물로 성스러운 바위를 받드는 신사,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은 이세신사의 ‘고대 거울’이 실은 오래 전에 망실되었음을 들어본 적도 거의 없고 여기서 밝혀지는 사실은 상상조차도 해 본적이

없을 것이다.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의 행렬도중 일부. 375년. 보병부터 기마병까지 각종 무기를 들고 갑옷입은 전사, 의장대, 악대등 250명의 인물이 6미터 길이로 웅장하게 배치되어 있고 중앙의 수레에 왕이 타고 있다. ⓒ프레시안

 

 

408년의 고구려 안악1호분 벽화의 행렬도. 창과 활을 들고 갑옷으로 무장한 기마병과 말갑옷으로 무장한 말의 대열이 보인다. ⓒ프레시안

 

 단편적으로 축적된 이야기를 통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본인이 이 책 ‘한국이 일본문화에 준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1984, 한림출판사)’를 처음 구상한 것은 1930년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연구할 때였다. 이후 일본 교토, 하와이, 그리고 최근 서울체재까지 40여 년 동안 자료가 모이고 사실이 구체화되었다.

마침내 이 모든 것을 가지고 1500년 이상 한국과 한국인이 일본과 그 문화에 끼친 엄청난 영향의 중요성을 밝힌 내용을 빙산의

일각이나마 우선 책으로 내기에 이르렀다.
  
  중앙아시아 및 북아시아에서 기마유목민족은 수없이 여러번 역사의 변환을 불러온 막강한 힘으로 작용했다.

여러 부족이 함께 어울려 대집단을 형성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따라 좀더 살기 좋은 평원지대로 이주하고 때로는 중국과 인도의

부패왕조를 전복시키고 북극아래 시베리아지방부터 남으로 만주까지를 휩쓸었다.

요새를 불태우고 남녀포로와 약탈한 전리품들을 챙겨 떠났다.

인도의 힌두쿠시산맥도 중국의 만리장성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기마유목국가들은 역사상으로는 짧은 기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후세까지 서구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진 카니슈카, 훈족의 아틸라,

징기스칸, 타머레인, 호랑이 바부르 등의 존재와 스키티아, 훈, 타타르, 투르크(돌궐), 몽골과 만주족들이 정복자 부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시아초원지대의 잔혹한 기마민족들은 중국과 인도, 유럽의 거주민들을 짓밟아 정복했다.
  
  서력기원이 열릴 무렵 지금 한국(북위 38도선에 이르는 지정학 구역)이라 불리우는 나라의 남반부에는 농사와 수렵 어업 등으로

살아가는 여러 부족들이 서로 느슨한 연대를 맺고 있었고 이중에는 대마도해협을 건너 왜와의 해상교역에 나선 부족도 있었다.

이때까지도 강력한 왕국은 형성되지 않았다. 거리상 멀리 떨어지고 척박한 지역은 한반도에서 후일 삼국이라고 지칭하게된 부족들의

영역밖에 밀려나 있었다.
  
  오늘날 한반도를 양분하는 선 이북에는 역시 알타이 계통어를 쓰는 기마종족들이 살면서 영토와 지배권을 두고 내부 분란과 함께

사나운 이웃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때 대동강유역에 낙랑이라 불리는 소규모 관리구역을 설정했다 한다 .

(역자주; 이당시 코벨은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설을 접하지 못하고 대동강유역이라는 과거의 통설을 차용했다).

그들 사나운 기마족들은 두 번 휜 활을 무기로 다루며 기마전술에 능하고 용맹무쌍하기 이를데 없는 기질로 미개한 문명을 모두

정복했다.
  
  4세기에 고구려가 한의 낙랑을 정복함으로서 중국이 심었던 식민지는 사라졌다.

이때의 고구려는 역사가 기록하는대로 북부여족의 일파였다. 고구려는 한반도내 여러 기마족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남진을 차단함으로서 지금은 동부여란 이름으로 알려진 일파를 동해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북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동부여는 한반도 남쪽으로 계속 남하하여 원주부족들과 합류하고 이후 가야와 신라로 태어날 기반을

형성했다.
  
  부여왕국은 옥황상제의 자손이 세운 국가라고 건국설화가 전한다.

부여의 통치자는 부족 전체의 행 불행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무속적 신앙의 지배자였다.

송화강과 압록강 사이 비옥한 만주벌판 초원지대에 자리잡은 북부여는 여러 차례 기마유목민족의 외침과 내부의 반란을 겪었다.

4세기 초에는 만주의 산림 속에서 쏟아져 들어온 선비족의 침입을 받았다.

중국 한나라도 어지러운 내정으로 인해 그들이 ‘선진화된 동이’로 인정하던 부여를 도울 힘이 없었다.
  
  이로써 북부여가 망하자 주요인물을 포함한 난민들은 한반도로 남하해 들어왔다.

이들 방랑부여족(Volkerwanderungen) 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그로부터 4백년 후에나 쓰여진다.

이미 그들의 기마족 조상으로부터 멀어진 일본이라는 땅에 둥지를 튼 자손들에 의해  
  부여기마족들은 그 시대에 신무기 철로 제작한 칼과 갑옷을 장착하고, 전쟁에 임하여는 무당의 긴 사설을 듣곤 했을 것이다.

그들 이야기는 ‘바바리안 코난’ 과 잘 들어맞는다.

보다 나은 땅을 찾던 군사강국의 부여족은 한반도에 삼국시대를 열고 이어서 일본 야마도 평원을 정복한 ‘바위의 후손들’

(Children of the Rock)이었다.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


일본문화의 근원 부여,가야 그리고 백제

1장 부여족과 말
  
  
1. 일본문화의 근원 부여, 가야 그리고 백제
  
  오늘날 많은 나라의 지식인들 사이에 ‘뿌리’를 찾는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상용업무가 아님에도 상당한 일정으로 한국 남부지역을 방문, 부산으로 입항해 경주를 방문하고 부여와

공주를 찾는다.

사실상 백제권의 박물관은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인보다 더 진지한 자세로 둘러보는 장소다.

이곳은 한국으로부터 전래된 일본역사와 문화, 특히 6세기에서 7세기 문화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반도에 융성했던 국가들 중에 백제는 오늘날 상하이 부근의 불교국가 중국 양(梁)나라와 가까운 국교를 누렸는데 ‘
가장

예술적이고 비전투적인’ 성향의 나라로 간주되었다.
  
  백제와 양나라 지도자들은 경쟁적으로 불교를 숭상했다.

이 당시의 불교는 대륙에서 한반도로 문자와 의학지식(의료사업은 불교전도의 한부분이었다) 외에도 여러

가지 예술을 전파하는 도구역할을 했다. 조각과 회화, 기타 세세한 예술도 불교를 장엄하는 목적으로 발전되었고 불교 건축 또한

성행했다.

불교의 대 파트론들이 바로 귀족층이었으므로 궁궐은 절 건축을 본 딴 것이 되었다.

지배계층 귀족들은 호국불교로서 이 종교를 받아들였다.
  

 

 

 

일본 규슈 다케하라(竹原) 고분 벽화.
5세기경 항해해온 배에서 말을 부리는 사람이 있고 공중에는 또하나의 커다란 말(天馬)이 그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와 일본에 들어온 부여족과 말을 그린 것이다. 동시에 天馬의 개념도 따라왔다. ⓒ프레시안

 

 

 


  그러나 일본은 6세기 중엽까지도 불교를 접하지 못했다.

369년부터 505년에 이르기까지 왜일본은 한국혈통의 무속왕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철기사용과 군사 전략면에서 일본 원주민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었던 한반도 부여기마족들은 369년에서 370년에 걸쳐 왜국을 손쉽게

정벌하고 일본에 최초의 중앙집권체제를 수립, ‘신성한 왕권’을 누리게 되었다.

부여족들은 한반도의 가야와 외교적으로 긴밀한 유대를 지켰는데 근본적으로 부여족이 일본내에 전파한 문화는 불교 이전의

무속문화권으로 말을 숭배하고 강력한 통솔력과 대형 봉분 매장제도를 지닌 것이었다.
  
  
  1973년 나는 일본 나라(奈良)의 가장 오래된 마을을 찾아갔다.‘후루’라는 이름을 지닌 곳이었다.

컬럼비아대학 개리 레저드 한국어교수에 따르면 ‘후루’란 말은 ‘부루’ 또는 ‘부여’를 이르는 것이라고 했다.

레저드교수는 부여족이 상당수 바다를 건너와 일본을 정벌한 연대를 정확하게 369년으로 제시하고 있다.
  
  필자 역시 오사까-나라일대에 산재한 떼 입힌 대형 고분들이야말로 일본의 정복자 부여족의 무덤이라고 믿는다.

이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고분은 닌또꾸천황(仁德王)능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한 겹의 해자만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지만 원래는 세 겹의 해자가 둘러쳐져 있었고 총길이는 무려 1천미터가량이다.

이 규모는 이집트 피라밋의 절반에 달한다.
  
  일본왕의 한국 부여족 혈통을 보다 일본적인 화족 혈통으로 변조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720년 쓰여진 일본의 공식 역사서

일본서기에도 닌또꾸왕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 기록자들은 그 같은 변조를 뒷받침하기위해 부여족이 일본을 정벌하여 생긴 왕권교체기에 어떤 일본왕들은 몇백년씩을

살았다고 조작해놓고 있는 것이다.

8세기 일본사가들은 오진(應神)왕을 ‘神功황후가 한국을 정복한 뒤 12개월만에 출산한 아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공이 한국을 정복했다’는 이 기록은 물론 완전히 뒤집혀져 날조된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로 부여기마족들이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가 우선 규슈를 정복하고 연이어 서부 혼슈를 점령하여 지금의 오사까-

나라일대

대평원에 수도를 건설했다. 부여족은 기마족으로서 매우 월등한 전투력을 지녔기 때문에 신속히 정벌을 이뤄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미개한 일본 원주민들은 쉽게 굴복했다.

부여 기마족은 505년에 이르러 내부분열로 부여족 왕권이 끊길 때까지 일본을 보다 조직적으로 통합되고 개선된 군사력을 갖춘

국가로 이끌었다. 부여족들은 무속을 신봉하고 있었으며 불교는 그때까지 전래되지 않았다.
  

 

 

 

일본 오사까에 있는 후기고분시대의 仁德王(닌도쿠천황)릉. 한반도에서 간 부여족의 무덤으로 간주되는 이 능의 발굴은 금지되어 있다. 능 주변에는 해자가 둘러쳐 있다. ⓒ프레시안

 

 

 


  이들 부여족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고구려에 인접한 한반도 북방계 부족으로 낙랑이 망한 뒤 남쪽으로 이동해 왔으며 일부는 선비족에게 정복되었다.

부여의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한강까지 접했으며 부족 일부는 백제와 합쳐치고 일부는 가야를 거쳐 부산으로 이주, 정착했다.
  

  일본이 ‘만세일계’ 혈통의 첫 왕으로 떠받드는 유명한 신무왕(神武王), 즉 진무덴노에게는 규슈에서 나라로 정벌했다는 이야기가

따른다. 이 사실은 바로 부여족의 일본 정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8세기 들어 기록에 나선 일본사가들에게 일본에 문자가 등장하기 이전 시기의 역사란 매우 까마득한 것이었다.

이들은 신무왕의 거사를 서기전 660년의 일로 돌려놓았다.

어느 나라나 초기의 역사기록은 개국이 오랜 옛날 이루어졌음을 역설하고 있으며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규슈에는 한반도에서 해협을 건너 일본에 상륙한 부여족을 묘사한 벽화가 남아 전한다.

규슈는 그런대로 발굴이 가능했지만 일본 나라의 고분은 발굴이 금지되어 있다.

만일 닌또꾸왕릉이 발굴됐을 때 가야양식의 금관이나 귀걸이가 나오든지 가야나 백제토기와 같은 유물이 나오면 일본왕실로서는

난처한 일이 될 것이다.

일본은 보다 자유로와져서 20세기 식민정책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중들이 진실을 알 수 있도록 나와야 한다.
  
  
5세기 일본의 부여족들은 가야출신의 귀족가문과 혼사를 맺었다.

부여족 후손들은 신라가 가야를 합병한 562년까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지녔다.

7세기말 일본이 처음으로 실시한 호구조사에서 귀족층의 30%가 외국인 성을 지닌 사람이었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인, 특히 660년 백제가 신라에 함락되자 유민이 되어 조국을 떠나온 부여족 후예들이었다.

백제 인구의 상당부분이, 그것도 지적으로 뛰어나고 유능한 전문가그룹이 조국을 떠나 동맹국 일본으로 피신해온 것이다.

한국으로부터의 이러한 다량의 두뇌유입은 7세기들어 불교국가를 표방한 일본이 불교예술과 건축기술 등

차후 자국문화를 일궈나가는 데 크나큰 힘이 되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본 불교예술의 번영과 중앙집권제같은 정부구조법 등은 지속적으로 한반도로부터의 유입에 크게 의지한

것이었다.

한반도로부터의 이러한 유입은 서기전 330년 석기시대의 일본사회에 논농사법을 전파한 이래 시대가 지나면서 수많은 영향의 전래로

이어졌다.

이런 영향 가운데 가장 중대한 두 가지는 4세기 부여기마족에 의한 상당수의 지배층 유입과 대형 고분장제의 도입, 그리고 7세기

후반 수많은 백제 유민들의 일본사회 편입에 따른 영향이다.
  
  규슈국립대학 다무라교수는 최근(1982년) 출판된 저서에서 8세기 이후 중국이 일본문화의 종주국으로 나서기 전까지 한국은

수백년 동안 일본문화의 모체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다무라교수는 이 책을 출판한 직후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일본에서는 그런 사실이 듣기 싫은 것이었을 수 있다.
  
  원문; Japan's Culture Rooted in Korea 1 : Puyo, Kaya and Paekche 
1982.5.10 경향신문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3>

부여기마족과 고고학


1장 부여족과 말
  
  
2. 부여기마족과 고고학
  
  고고학은 군국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위험천만한 학문이 아닐수 없다.
  
  일본의 군부세력은 ‘신성한 천황’ 개념을 불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토착 신또(神道)신앙’에 누구랄 것
없이 고개 숙여 절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위의 두 가지 사실 모두가 한국에서 유래된 것이란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은 학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야출토 말머리 갑옷 ⓒ존코벨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서기전 660년 이래 ‘만세일계’를 이어오고 있다는 일왕혈통이 사실은 수차례 끊겼을 뿐

아니라 ‘신성한 천황’들이 무려 1백년 이상 완전한 한국인의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갔다는 것을 생각지 않으려 한다.

일본의 신또가 한국의 무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아는 일본인은 드물다.

한국무속은 일본에 가서 미화되고 천황숭배사상과 결합됐다.

반면 한국에서는 유교적 지배계층과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비천한 것으로 격하돼 버렸다.
  
  고분발굴과 연구가 자유롭게 허용된다면 고고학은 일본의 과거 천황의 존재를 제대로 밝혀낼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1920년대 초 일본 고고학자들은 경주 일대의 고분발굴에 나서서 여러 점의 아름다운 금관, 귀걸이, 허리띠 및 수많은 부장품들을

발굴했다.

이들은 또 규슈지방의 한 고분에서 말과 배 그림이 온통 뒤덮여 있는 벽화를 찾아냈다.

유물로는 금동관만이 나왔을 뿐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고학에서 밝혀진 것은 5-6세기 한국은 일본보다 월등하게 앞서있던 나라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정부는 고고학 발굴을 금기시 하게 되었다.

나라(奈良)평원 일본왕들 고분은 따라서 발굴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발굴결과 나오는 부장품들이 그러한 사실을 더욱 입증하는 것이 될까봐 취한 조치이다.
  
  아직도 일왕 고분은 발굴이 금지되어 있지만 정복자 부여기마족 1세인 오진(應神)왕이나 2세 닌또꾸(仁德) 왕능이 발굴된다면

가야타입의 금관이 나올 소지가 크다. 고고학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역사는 종종 지배자에게 야합하는 거짓말 기록을 남긴다.

반면에 고고학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유물만을 남기고 여기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일본 후기 고분시대(4세기 중엽부터 6세기까지)의 무장한 전사와 말 모습을 보여주는 하니와 흙인형. 부여족 2세인 닌도쿠(仁德)왕릉주변에는 이런 토용이 2만개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존코벨

 

 

 


  그 실례를 들면 일본의 고대 역사서 고사기(古事記)는 서기 712년에,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됐다.

일본궁중의 사관들은 일찍이 부여기마족이 와서 통치한 1백30여년의 흔적을 묻어버리고 당시의 화족 지배자에게 혈통의 정당성을

꾸며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컬럼비아대학의 레저드(Ledyard) 교수에 따르면 부여족이 일본을 통치한 시기는 서기 369년부터 505년까지이며 이는 15대 오진왕

(일명 호무다왕)대부터 26대 게이타이 왕대에 이르는 것이다.
  
  부여족 출신 오진왕 이전의 일본은 느슨한 부족국가 사회로 그중 강력한 우두머리가 비옥한 논농사 터전인 야마도 혹은 나라평원

일대를 다스렸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된 개념의 ‘국가’는 미처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에 처음으로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부여족의 통치에 의해서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가? 이들 부여족은 말을 배에 싣고 해협을 건너왔으며 창, 칼 등 월등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부여족들은 쉽사리 원주민들을 제압하며 규슈에서 나라평원으로 전진해 나갔다.

오진왕대의 부여족이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정착한 것은 아니며 서기전 300년 경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일단에

대해선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8세기초 일본의 어용사가들은 역사기록에 너무나 기묘한 수단을 꾸며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들 사서는 반쯤은

신빙성이 없는 자료로 남았다.

사가들은 그들 자신이 ‘규슈로부터 나라평원으로 나아온 정벌자’ 로 호칭하는 진무천황의 역정을 서기전 600년에 일어났던 것으로

각색해 버렸다.

그 당시의 일본이라면 석기시대를 벗어나지도 못하다가 서기전 300년대에나 와서야 한국인들의 도래로 말미암아 논농사와 청동기

금속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한국은 일본에 전파하기 4세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
  
  8세기의 일본사가들이 꾸며낸 또하나의 방편은 천황의 수명을 길게 조작한 나머지 완전한 허구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사가들로서 최대한 짚어낼 수 있었던 역사는 4세기 이후에 불과했다.

오진천황이 적어도 일본땅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강변하기 위해서는 일본사가들도 한국왕녀임을 인정하는 그의 모친인 진구왕후가

일본의 천황남편 사후 유복자를 잉태한 것으로 했다.

역사서는 그녀가 오진의 출생을 늦추기 위해 무속적 방식으로 돌을 사용했음을 적고 있다.

한국인에 의한 일본정벌을 국속화시키기 위한 책략으로는 정벌의 본말을 통채로 뒤집어 마치 일본이 한국(가야 및 신라와 백제도

어느 만큼 포함시켜)을 정벌한 것처럼 역사에 기록해 버렸다.

그렇게 해놓음으로서 후일의 일본인들이 만족히 여기도록 한 것이다.

근세들어 일본이 한국을 식민통치하던 시절 일본으로서는 한국인의 피가 그들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일본문명이

전적으로 한국에 의존해 발아되었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일본 후기고분시대의 고분 벽화. 뱃전에 새를 앉히고 항해해온 사람을 그린 그림은 부여족의 일본정벌을 말해주는 사료이다. ⓒ존코벨

 

 

 


  240년 처음으로 중국 사신이 왜국에 왔다. 이들은 처음에 규슈에 상륙하여 그곳에서 일본 여타 지역에 관한 보고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중국역사 기록은 소규모의 부족장들이 가장 강력한 존재인 무당 히미꼬(비미호) 여왕과 더불어 나라지역의 비옥한

땅을 통치하고 있다고 했다.

이 당시 한국의 남부지방과 일본 규슈 및 서부 혼슈지방은 혈통으로나 언어간에 서로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이 또한 별도의 해설이

필요하다).
  
  서기 3세기의 일본사회는 석기시대를 막 벗어난 야요이(미생)시대로 불리는데 한반도로부터 철기와 청동기및 도자기의 물레사용법

 배워 익혔다. 육로 교통은 보잘 것 없었고 이들은 주로 뱃길을 이용했다.

한반도의 김해는 이때 철광이 있어 한반도 북부와 중국, 일본으로 철을 선적해 보내는 요지였다.
  
  이 당시 일본전역에 무속신앙이 팽배해서 수많은 신령들이 있었다. 무속무당인 지배자는 예언을 하여 부족을 통치했다.

강신을 받은 무당들은 종종 여자였다. 크고 작은 수로를 파다가 잘 안되면 산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이 때 부여족 전사들이 어떻게 규슈로 향해 바다를 건너갔는가는 상상해 보는 수밖에 없다.

안전한 항해를 기원해 바다의 용왕에게 바치는 상징적 예물이 뱃머리에 분명히 실려있었을 것이다.

나뭇잎을 여러장 꿰어서 평평하게 한 뒤 고사떡을 담아 띄워보냈다. 더 자상하게는 용왕님이 드실 젓가락도 함께 놓아 보냈을 것이다.
  
  야요이 시대 일본에 온 한국인들은 ‘문화적 침입자’로 부를 수 있겠지만 369년 일본에 온 부여족들은 달랐다.

이들은 군대집단이었으며 새로이 정착할 신천지를 구해 일본에 온 것이다. 그 때문에 말을 대동해갈 필요가 있었다.(일본에는 초기에

말이 없었다).

배 한 척에 최대한 말 15마리와 기병-마부 15명, 수병 3명이 함께 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식량과 마실 물을 선적할 공간이 따로 마련돼야 했다. 배는 20미터 이상 크지 않았으리라고 보이며 말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꽁꽁 묶인 채로 실렸다.

항해 중간기착지로 대마도에 들려 쉬었다가 다시 추스려 떠났을 것이다.
  
  역사서에는 이때 바다에 폭풍이 일었는데 까마귀가 나타나 선두의 배를 본토로 인도해갔다는 전설이 있다고 적혀있다.

진무천황의 두 형제는 이때 폭풍으로 죽었다. 규슈의 고분벽화에는 배 키에 새가 앉아있는 그림이 있다.

일본으로 간 부여족의 항해를 입증하는 기록이다.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4>

부여족의 항해와 말 1;보병대 기병의 전투력 비교말을 어떻게 싣고 갔나?


오늘날(1982년 현재) 한국은 일본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 세계 제일의 조선국으로 위치를 굳혀가고 있다.

그러나 서기 369년경에 있었던 한반도 최대의 선박건조에 대해서도 알아두자.

그때 한국에서 건조된 배는 대마도에 중간 기착했다가 규슈로 기항했다.

당시의 대담한 모험가들이었던 부여-가야인들은 이 배를 타고 가 후진국이던 왜 일본 서부의 절반 이상을 정복하고 이후 1백년 넘어

일본왕의 자리를 대이어 갔다.
  
  이 장정에 대해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은 모두 왜곡된 상태로 남아있지만 말에 대한
지식 및 사람과 동물의

력조건 등을 감안해 따져볼 때 이들의 항해가 어떤 것이었을지 재구성해 볼 수 있다.
  
  4세기 부여-가야족의 현해탄을 넘는 항해는 그보다 5백여년 후 바이킹들이 해낸 유명한 항해보다 훨씬 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이킹들은 대담하고 강인한 뱃사람들이었지만 10세기 그들의 활동시기에도 말을 대동한 항해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부여족, 또는 모호한 명칭이긴 하나 이들을 지칭하는 바 ‘기마족’들은 서양에서 로마제국이 ‘야만인’들에 짓밟혀있을

무렵 약동의 아시아에서 그 기록적인 항해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다.

이 시절은 ‘힘이 정의’이던 때여서 잘 무장된 부여족 전사들은 쉽사리 일본 땅을 정복했다.
  

 

가야출토 철제갑옷 (왼쪽사진). 부여기마족은 이런 철제갑옷을 입었을 것이고 말에도 철갑옷을 입혔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무사도(오른쪽사진)는 이런 기마병의 모습을 보여준다. ⓒ프레시안

 


  고대 전투에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던가에 대해 충분한 고찰이 되어있지 못하다.

부여 기마민족의 장거 이후 1천년이 지나 스페인의 모험가 피사로가 2백여기가 채못되는 기병대를 이끌고 남미 페루의 전설적인

부를 탈취했다.

그 당시 남미에나 북미대륙엔 말이 없었기 때문에 페루나라가 황금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간에 손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또다른 스페인 모험가 코르테즈도 말 탄 기병대를 이용해 멕시코 전역을 정복했다.

멕시코의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4세기 일본에는 약간의 말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들 말은 몸집이 작고 닭과 같은 식용이었지 기마용은 아니었으며 기병대를 구성하는 전투용 말은 더 더욱 아니었다.  

배에다 무기로서 말을 싣고 바다를 건너간 부여족의 모험은 ‘수륙양용의 상륙작전’이었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보다 1천6백년 앞서 감행된, 그것도 과학적 현대장비 없이 이뤄진 작전임을 생각하면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가 보다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이제 부여기마족들이 어떻게 그 많은 말과 군사, 그 위에 무거운 쇠갑옷까지 배에 싣고 한일 사이의 해협을 건너갔는지 학구적인

추리 해보자...
  
  일본역사 기록엔 가을에 태풍이 인다고 했다. 그렇다. 병참상의 문제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말은 누구보다 고생이 심했다.(1천년후 몽고족이 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해 보라).
  
  이 당시 부여족들의 말은 아마도 소아시아의 몸집 큰 말(페르가나에서 유래한 아랍종 같은)과 몽골말의 혼합종이었을 것이다.

몽골말은 만주의 눈 내린 산간지대나 고비사막, 툰드라의 계속된 영하의 날씨도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전장에서 달려야 할 때는 그 속도가 떨어진다. 몽골말은 한도 끝도 없이 걸을 수 있지만 모양이 볼품없고 질주하는 데

있어서는 여타 품종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반면 아라비아산 말(그 비슷한 말까지도)은 다리가 길고 민첩하며 영특하다.

단점은 몽골말에 비해 살가죽이 얇아 추운 날씨에 몽골말처럼 잘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여인들이 탔던 말은 혼합종(몽골말에 보다 가까웠을 것임)으로 현대적 기준에서 볼 때 비교적 큰 말에 속한 것임직하고 이 당시

군사들의 평균키는 164센티 정도였다.
  
  기마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거리 및 장거리에서 얼마나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거기 더해 달리고 휘돌고 뛰어오르는 것을 지속적으로 버텨내야 하고 박차가 가해지는 상황에서는 전광석화처럼 기민하게

움직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적군을 짓밟는 데도 말은 유용하게 쓰였다.
  
  발 등자는 여기서 아주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것이다.

낙랑시대 그림이나 고고학적 유물에서 보는 것처럼 등자는 기병에게 보병을 압도할 엄청난 이점을 주는 것이었다.

말탄 기병이 창이나 단검으로 보병인 적을 향해 일격을 가할 때 등자는 지렛대 역할을 하여 힘을 가해주는 중요한 마구였다.

등자에 발을 버티고 섬으로써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병의 몸무게가 창칼을 휘두르거나 찌르는 데 그대로 보태어지기 때문에 그의

타력은 맨땅에서 대항하는 보병이나 안장 등자없이 말 탄 경우보다 3배 이상 증대되었다.
  
  이렇게 해서 말은 무장한 기병에게 귀중한 기동성을 부여했다.

그렇다해도 4세기의 기병은 36kg은 나가는 쇠갑옷을 걸쳤던 듯하고 이 때문에 민첩성이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말이나 기병 모두 그렇게까지 재빨리 움직이지는 못했고 또 쉽게 지쳤다.

병사들은 또 갑옷아래 맨살이 쓸리지 않도록 두껍게 누빈 속옷을 받쳐 입었을 것이다(이 시대에 군인노릇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고학 유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의 기마병은 코 주변 얼굴을 보호하는 투구에다 중세유럽의 쇠사슬갑옷 비슷한 주름잡힌 갑옷을

입었을 것이다.

이들의 갑옷은 사슬을 연결한 것이 아니라 쇠편을 이어 붙인 것이었다.

말 갑옷 또한 안장 아래로 무게가 고르게 분산되도록 장착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서 말몸뚱이 어느 한 부분에 무게가 집중돼 살이 까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말다리 부분만큼은 헐렁하게 감싼 편이었다.

말이 급회전을 하거나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상대방 적에 대해 보다 유리한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4세기 말갑옷은 무게가 45kg 가까이 나가는 것이었고 기병이 입는 갑옷 또한 적어도 그 절반은 나가는 것이었다.

기병의 갑옷은 특히 팔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나머지 부분은 코트처럼 허리아래까지 내려오도록 걸침으로써 화살이나 창칼, 기타 무기로부터 보호하였다.

다리 부분은 등자 위에 쉽게 버티고 일어설 수 있도록 헐겁게 감쌌다.

말에 올라탐으로써 기병이 취하게된 높이는 적의 머리와 어깨부분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데 유리했다.

이렇게 해서 기병은 그가 본래 지닌 타력에 중력을 실어 힘을 배가시켰다.
  
  반면에 보병은 기병을 위로 올려다보며 창을 겨누는 자세에서 그의 목과 팔 부위를 훤히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무장한 기병은 상대적으로 몸을 드러내놓은 부위가 적었으며 압도적인 힘과 속력으로 인해 소수로도 대단위 보병을 제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여-가야족의 일본 정벌은 말이 해상에서 병날 위험을 감안하고라도 바다건너 일본으로 필요한 만큼의 말을 어떻게 해서든

가져오는 데 일의 성패가 달려있었다. 이들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말을 실어왔던가?
  
  (이 글은 존 코벨과 아들 알란 코벨이 함께 쓴 것임)
  원문; From Korea to Japan ; 4th Century Boat Problems 1   1982.6.7 경향신문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5>

부여족의 항해와말 2 ; 말을 어떻게 싣고 갔나?


 고분 발굴 유물 중에는 4세기에서 6세기의 배 모양을 한 토기, 석기가 상당수 있다.

이들은 모두 무속신앙 법에 따라 왕이 사후에도 생전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 부장되었던 것들이다.
  
  최근(1982년) 용인에 개관한 호암 박물관에는 배 모양의 가야토기가 있는데 크기는 30cm 가량으로 작은 편에 속한다.

한국 고분에서 나온 다른 몇 개도 역시 크기가 작다. 그러나 일본 미야자끼현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배는 그 길이가 101cm나 된다.

(현재 이바라기박물관 소장)..


  이 토기 배를 만든 사람은 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배가 말을 싣고 험한 파도를 넘어 수천리 바다를 건너온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참고할 자료가 많지 않으니 부여족의 항해는 이 배 모양 토기를 염두에 두고 상상을 발전시켜 나갈 방도밖에 없다.
  
  일본 사서에는 4세기 정복자의 배가 폭풍을 만나 정복자의 두 동생이 물에 빠져 실종됐다고 기록돼 있다.

8세기에 와서 쓴 이야기에 이만큼 자세한 설명이 돼있는 것으로 보아 항해는 무척 험난했던 것 같다.

부여-가야족이 말을 대동해 대담한 일본상륙을 하기 이전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4세기에 이르기까지 6백여년에 걸쳐 한국에서 왜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음을 인정하자.

소수 집단을 이뤄 초기에 이주해온 한국인들은 일본땅에 마을이나 자치구를 만들고 그곳에서 일본 원주민들보다 앞선 양잠술이나

도자기 제조, 논농사로 생활을 일구어갔다. 그와 함께 자신들의 종교이던 무속 신들을 받들어 그들을 모신 사당도 지었다.

이즈모(出雲)신사가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신사는 일본민족주의자들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도 사당임을 인정한다.
  

 

일본 미야자끼현에서 출토된 4-6세기의 토기 배(위 : 이바라기박물관소장)와 가야에서 출토된 배모양 토기(아래 : 호림미술관소장). 부여인들이 말을 대동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타고 간 배를 이로써 짐작해 볼 수 있다. ⓒ프레시안


  그러나 지금 하는 이야기는 일본서기에 세 갈래의 맥락으로 나타나 있는 당시 대규모의 ‘외적침입’에 대한 것이다.

세 갈래의 맥락이란 제1대 일본왕으로 알려진 진무(神武)왕, 해의 여신 아마데라쓰 오미가미(天照大神)의 용맹한 남동생 스사노우,

그리고 일본에서 신라 가야로 항해해 왔다고 일본내에 알려져있는 진구(神功)황후를 말한다.

진구황후의 항해 방향은 일본서기가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가야에서 일본땅으로 향했던 것이며 이 담대한 한국여성은 일본에서 왕의

가계를 장악해 일본 전역을 통일한 최초의 부여족 천황 오진(應神)왕과 닌또꾸(仁德)왕을 배출했다.
  
  그렇다면 고대 한국인들은 어떤 구체적 방법을 동원해 배에다 말을 실어 일본땅까지 수송하고 그 지역을 정복, 일본의 고고학적

유물들을 갑작스럽게 변화시켰던 것일까?

일본 고고학사에서는 부여족의 정벌 이후 일본에서 진행된 강력한 중앙집권의 한국왕조 분위기를 감지케 하는 거대한 봉분의

매장제도가 등장하고 말은 이들 고분의 중요한 부장품이 되었다.
  
  4세기 부여족의 항해선단은 전투용 배와 식량과 물 등 보급품을 실은 병참 배 두 종류로 구분돼 있었을 것이다.

항해중의 말에게는 한 마리당 기병마부 한 사람이 배치돼 이 성질 사나운 짐승을 돌봤을 것이다.

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하게 묶어서 날뛰지 못하게 했다. 말 두어필 당 시중꾼 하나가 말오줌 똥을 치우는 것 같은 잡역을

떠맡았을 것이다. 배의 항해를 책임지고 때로 노를 젓는 일에는 배 한척 당 최소한 4사람의 인력이 필요했다.

거기에다 상륙시 기병들이 말을 부릴 때 이들을 엄호하기 위한 사수나 보병 4,5명이 더 있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101센티의 배는 부장품 용으로 축소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전투선은 적어도 20-25미터 길이에 폭 4미터 가량

했으리라는 계산이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모든 부락마다 30미터쯤 길이의 배를 만들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서기가 쓰여진 8세기 당시 상황에 맞춰진

것이지 4세기 때에도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배가 그처럼 컸다면 한척 당 최대한 14마리에서 16마리의 말에다 교대로 잠자고 말을 살피고 뱃일도 이것저것 해야하는

기병마부까지 합해 승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급품으로는 배 한 척마다 승선한 사람 수에 맞춰 하루항해에 필요한 양으로 쌀 등의 곡식 2홉, 채소 5백그램, 물 5백그램 정도를

실어야 했을 것이다.
  
  말은 하루에 2리터의 물을 마셔야 했다. 배에 타고 있는 동안 말의 먹이는 하루 1킬로그램 남짓한 곡물과 사람이 먹다 남긴 채소나

먹고 움직일 만큼의 무우따위가 필요했다. 말은 풀을 먹지 않으면 물도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는다.

그렇지만 곡물만 먹게 되면 섬유질 사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비상시 얼마동안은 말에게 곡물만 먹임으로써 배설물의 양을 줄일 수도 있다.
  
  정복군에 앞서 척후대가 먼저 현지로 갔을 것이다. 또한 이미 왜 땅에 정착해 있던 한국인 마을이 교두보로 이용됐을 것이다.

서기 220-265년간의 중국사서 위지(魏志)와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일본에는 이때 1백여개의 부족국가들이 있었다.

즉 한반도에서 온 부여- 가야 기마족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지도자가 없이 소규모 부족사회가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온 기병 전사들이 진실로 우수한 집단이었다면 그들은 뱃머리를 상륙용으로 경사지게 설계했을 것이다.

과연 토기배에는 이런 흔적이 보인다.
  
  배가 일단 해안에 닿으면 말들은 별 수없이 무장 안 된 상태로 물 속을 헤엄쳐 나와야 했을 것이다.

대마도는 중간 기착지로서 선단은 이곳에 들려 말을 운동시키고 쭈그리고 지내던 사람들도 몸을 풀 여유를 가졌다.

물론 물도 갈아넣고 식량도 보충했다.
  
  상륙지에서 먼저 적의 저항이 없었다면 기병들은 맨 먼저 말을 끌어낸 뒤 말갑옷을 꺼내 말을 무장시킨 다음에 자신의 무장을

갖추고 나서 전투가 벌어질 장소로 이동했을 것이다.

해안에서 적의 저항을 받는 경우에는 말을 내려 절대적으로 필요한 절차인 말을 무장시킬 동안 배에 남은 군사들이 불을 먹인 화살을

쏘아 이들을 엄호했다.
  
  해안에 발 디딘 기마병사들은 긴 줄을 이뤄 돌격하면서 변변찮은 무기를 들고 모여서서 대항하는 보병 원주민들을 대량 살상할 수

있었다. 말이 발목을 다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에 뱃전을 뛰어넘지 못하고 대신 뱃머리를 비탈지게 하여 내리거나 아니면 배

안에서부터 완전무장을 갖춘 채 기병이 타고 내려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듦으로써 적을 심리적으로도 제압하는 효과를 냈다.

배의 앞머리가 경사진 상륙대 램프로 이루어진 배라면 기병은 이미 무장한 첫 말을 날쌔게 몰아나갔었다는 얘기가 된다.

앞말이 나가면 뒤에 내릴 말들도 속속 상륙준비를 갖추며 차례를 따랐다.
  
  부여기마족들이 무장을 하고 말을 달려 질주해오는 광경은 일찍이 일본내에서 보도 듣도 못하던 일이었음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고대사에 있었던 전차부대 정도의 위력같다고나 할까...
  
  말은 파도를 싫어하기 때문에 배안에서 파도에 시달리며 7-10일간 꼼짝못하고 쳐박혀있다 보면 뭍에 닿기를 고대하기 마련하다.

‘정복자’ 혹은 ‘신성한 천황’이 두 형제를 잃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상당수의 배와 말이 함께 망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얼마만한 규모의 기병들이 일본 본토공략을 담당했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노비들을 제외하고 한 1천여명 가량 될지 모른다.

노비는 부여족이 전장에서 사로잡은 사람들로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원주민들은 이때 아직 청동기 초기와 철기시대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식 무기인 창 정도를 든 보병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말탄 부여족들은 이들 한가운데로 돌진해 적의 눈을 후벼내거나 목을 쳐서 정복을 실수 없이 이룩했다.

전쟁포로들은 보급품을 나르고 다음 전투준비에 동원됐다. 부여족은 전쟁포로를 ‘인간 이하의 노비’라는 뜻의 ‘하호(下戶)’라고

불렀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2차 세계대전중 그들의 전쟁포로를 역시 하호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원문; From Korea to Japan ; 4th Century Boat Problems 2  1982.6.9 경향신문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6>

부여족 과 말


 6. 부여족과 말
  
  인류역사상 인간의 말 지배는 불의 발명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갖는다. 특히 아시아 역사는 많은 부분이 말과 연관되어 있다.

4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정복한 것도 일본에는 말이 없던 차에 한반도에 존재했던 말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근대품종의 말을 수송해 가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근대 들어서는 15세기에 와 스페인이 시도, 남미대륙을

휩쓰는 엄청난 파워를 과시했다.
  
  피자로가 페루를 정복한 데는 불과 50마리의 말과 기병으로 족하였다. 코르테즈는 200명의 기병과 말로 멕시코를 제압했다.

이때 스페인 군사들이 미국대륙 원주민들이 써보지 못한 화약을 사용했던 것도 정복을 용이하게 한 요인이었음은 물론이다.

기마병의 존재는 화력을 쓰든 안 쓰든 간에 보병을 제압하는 위치에 있었다.
  
  서기 369년 배를 타고 일본 규슈에 처음 상륙한 부여-가야 기마족들은 전투용 말을 어디서 획득했던 것일까?

규슈를 비롯해 일본 본토의 서부지역 절반(혼슈)에 해당하는 땅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양의 말을 어떻게 배에 싣고 건너올 수

있었을까?

지금 ‘한국 코리아’로 일컬어지는, 그 당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이 기마족 한국인들은 도대체 누구였더란 말인가?

‘일본’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훨씬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든가 ‘해뜨는 나라’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전에 이들 땅에서 살던 이들은

누구였던가...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의 말.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부여-고구려족의 대담함이 느껴진다. ⓒ프레시안


  오늘날 이 당시 기마족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옷들을 입었고 정복을 목표로 만들어 타고 간 배의 모양새와 사용한 무기 등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치는 유물 다수를 통해볼 때 일본의 고고학은 여지없이 한국땅을 근원지로 가리키고 있고 ‘삼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당시 한반도 거주자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69년 한반도 부산근처 김해에서 떠나온 사람들은 한국인 샤먼 신공왕후가 이끄는 무속의 특권적 소명의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이 여성에 대한 8세기 일본 역사서의 기록은 신과 소통할 능력이 있었으며 신들로부터 한국에서 ‘바다 건너 땅(일본을 말함)을

정복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부여족은 한반도 남단의 농부나 어부 원주민들에 비해 훨씬 전투적인 종족이었다.

이들 부여기마족들은 지상에서의 거주를 공들여 꾸미는 일보다는 말과 더불은 생활을 중히 여겼다.

말 위에 앉은 채로 먹고 마시는 생활이 가능했으며 말목에 엎디어 잠을 잘 수도 있었다. 말 잔등에 올라 앉아서 쏘는 화살은 ‘싸우라,

이기지 못하면 죽으리라’는 전투에서 위력을 발하는 무기였다.
  
  신공왕후가 이끈 기마군사들이 도일에 사용한 배는 말이 쉽사리 상륙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일본고분 출토 도기에서 보이는 배 가운데 큰 것들은 2차세계대전때 상륙작전용으로 개발된 주정의 램프처럼 앞부분이 낮추어진

것들이다. 기병들은 여기에 실려온 말에 올라탄 채 유사시 파도 속으로도 뛰어내릴수 있었다.

말 탄 기마전사가 보병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여러 지역에서 지켜진 철칙이었다.

대륙에 보편화된 철기에 힘입어 369년 말과 함께 일본땅을 침입한 기마족들은 말을 탱크처럼 무장시킴으로써 일본땅의 비무장

보병들이 막아내기에는 도저히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도쿄박물관의 하니와 토기 병사와 말.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과 똑같은 말안장 고리를 달고 있다. ⓒ프레시안


  페루를 정복한 피자로의 50기병을 기억해보면 한반도의 기마족들이 처음 규슈를 정복하고 잇달아 오사까-나라를 점령하는 데

그다지 많지 않은 기병으로 충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신예 무기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네발 달린 탱크’격인 말을 소유한 군사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 지역 지배계층으로 자리잡았다.

언제 어디서나 최첨단의 무기와 전술을 구사하는 자는 양적인 숫자에 상관없이 적을 물리치고 승리한다는 것은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숱하게 되풀이해온 것이다.
  
  이때 부여-가야인들이 실어간 말은 오늘날에 보는 몽고말에 가까운 땅딸막하고 몸통이 넓으며 참을성이 강한 말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당대 ‘기마족 침입자’의 우두머리들(일본의 왕이 된 사람들) 무덤을 지키는 수많은 말모양 토우 하니와를 보면 명확해

진다.

일본에서 출토된 관(冠) 중에는 이런 종류의 말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있다.

지금의 도꾜 부근에서 출토된 이 관은 부여-가야기마족들이 행동반경과 힘을 어느 한도까지 행사했는지를 증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서기전 1세기 중국의 한무제는 중국말의 품종을 개량하고 싶어해 군사들을 페르가나(아프가니스탄의 옛이름, 박트리아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大宛國으로 불렀다: 역자)로 파견, 오늘날의 아라비아말과 연관된 품종인 피빛땀을 내며 질주하는 기마를 확보토록

하였다.
  
  한국사에서 말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경주고분을 통해 입증되었다.

또한 일본사를 바꿔놓았던 말의 중요성도 5세기 이후 일본고분의 부장품이 그 이전 초기 무덤의 부장품과는 아주 다른 것이라는

사실로써

증명된다. 그 이전 일본고분에는 한국 또는 중국에서 들여온 청동거울을 부장품으로 묻었다.
  
  그러다가 400년 이후 고분에서부터 갑작스럽게 마구들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말굴레, 손잡이 달린 금속제 칼등 일본고분에서

출토된 이런 유물은 현재 경북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대구 근교의 출토품들과 완전히 똑같다.

당시 일본에서 그같은 무덤을 마련할 수 있었던 지배계층은 단연코 새로운 철기술과 기병술을 도입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신라의 일본정착지 이즈모에 거주했던 신라 뱃사람들, 어부들은 서기 3세기까지 일본 북방 및 중앙 해안지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400년-500년에 걸치는 시기 일본왕(천황)이 된 기마족의 무덤에서 나오는 부장품은 대구에서 낙동강을 따라 부산까지 뻗쳤던

가야지역 출토품과 흡사한 게 많다.
  
  미국내의 웬만한 박물관이나 파리의 박물관 일본실에는 몽고조랑말 형태를 한 하니와 토기가 반드시 진열돼 있다.

말재갈이며 고삐, 금속제 말방울, 높이 올린 말안장 같은 것들이 진흙으로 빚어져 붙어있는 이 하니와 말은 일본 고분출토품으로

일본학자들이 뽐내며 말하는 바 ‘결코 정복된 적 없는’(물론 1945년 이전에 한해) 이라는 자랑을 떠올리게 하지만 일본 초기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역사기록이 남기 시작한 시대 이후’로나 고쳐 써야 할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 일찍이 일본을 정복한 것은 분명히 369년 금의 바다 김해를 떠나온 야심만만한 일단의 사나이들이었다.
  
  최근(1982년) 뗏목으로 고대 한일간의 바닷길을 답사하려는 한국 대학생들은 뗏목이 아니라 일본 하니와 토기에 나와있는 모양의

배를 타고 나서는 게 정당하다. 여기에 옛 선조들처럼 말도 대동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입증해낼 수 있을 것이다.
  
  원문:
  
  1. Horses Vital Force in Korean History 코리아 헤럴드 1983. 3.9
  2. Horses Can Change History 코리아 헤럴드 1984.10.17
  3.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Japan's Hidden History 1984 한림출판사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7>

페르가나말 과 천마


한국의 고고학과 역사는 한반도에 일찍이 두 종류의 말이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 몽고말이 땅달막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경주 155호 고분 천마도의 천마는 몽고말과는 달라보인다.

여기 그려진 말은 긴 다리에 아름답게 곡선을 그리고 내려온 목덜미, 쳐지지 않고 하늘을 향해 솟구친 꼬리를 하고 있다.

천마도의 천마가 실제 말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이상적인 표현으로 미화된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처럼 날렵한 말은 틀림없이 신라 샤먼왕의 것으로 한반도에서 그와 같은 말은 매우 귀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의 말이었다면 그 조상은 아라비아 종으로 13핸즈(역자 주; 땅바닥에서 말등까지 말의 키를 손바닥 옆폭으로 재는 단위)를

넘어선 16핸즈의 말이다. 그처럼 훌륭하고, 우아하고 힘차보이는 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4-5세기 한국의 샤먼왕들이 지녔던 천마의 근원이 어딘지는 불가사의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어느 정도 이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천마’는 신라 금관의 무늬가 유래한 곳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경주 고분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의 천마. 이 말은 분명 몽고말은 아니며 치달을 때의 모습이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아름다운 아라비아산 백마로 그 옛날 페르가나의 종마가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프레시안


  중국의 한무제가 오랜 재위기간중 벌인 두 가지 업적에서 이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5세기의 신라회화로 그 출토가 너무 극적이라 이름 또한 천마총으로 명명된 고분출토의 이 천마는 일찍이 중국의 한무제가 그처럼

우아하고 빨리 달리는 종의 말을 구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시점에서 5백년후에 그림으로 남은 것이다.

이 당시를 말해주는 한국의 고대역사서는 남아 있지 않지만, 한무제의 말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바 있다.
  
  서기전 138년 한무제는 서방의 흉노족을 정찰할 사자(使者) 장건을 서역으로 보냈다.

장건은 서역에서 흉노족의 포로가 되었다가 12년후에 돌아왔다. 그는 흉노와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으나 놀라운 정보를

입수해 왔다. 그의 견문록 일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곳 페르가나(아프가니스탄) 오랑캐들은 포도를 재배해 먹으며 아주 뛰어난 말을 기른다.

피빛 땀을 흘리는 이들 한혈마(汗血馬)는 천마의 혈통을 이어받은 말들이다”
  
  말 중의 말, 최고의 훌륭한 말로서 이미 천마가 거론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도 이와 같은 것으로 칠 수 있다).
  
  피같은 땀을 흘리는 페르가나의 뛰어난 말, 천마는 한무제의 정열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들 말을 가지고 싶어했다.

결국 군대를 풀어 흉노족을 몽고로 내몰고 감숙성 지역을 통과하는 길목을 차지, 서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니게 됐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실크로드이다.
  

 

2002년 경주 덕천리 출토 기마인물 토기 ⓒ문화재청


  피빛땀을 흘리는 페르가나의 한혈마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 말은 피부 밑에 서식하는 균들이 있어 달리면서 땀을 흘리는 것이 마치

피를 뿌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더욱 빨리 치닫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중국서 온 사자가 말 무게 만큼의 금을 주겠다는데도 페르가나의 통치자는 이 귀한 말을 팔지 않았다.

그러자 6만 한나라군은 페르가나의 식수원을 끊어놓는 데 성공, 갈증을 이기지 못한 이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피빛 땀을 흘리는 최고 우량 종마 30마리와 여타 말 3천필이 한나라에 귀속되었다. 이것이 서기전 102년의 일이었다.
  
  페르가나의 한혈마는 오늘날 어떻게 알려져 있는가?

한무제가 군사 5만명을 희생시켜가며 서역에서 얻어낸 말은 반 아라비아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말은 처음엔 진한 밤색이다가 점점 밝은색으로 착색되어 간다. 순백색의 아라비아말은 아주 드물지만 점박이나 얼룩말은 많다.

이들이 공중으로 차오르듯 질주하는 모습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장관이다. 보통 말들은 꼬리를 아래로 내려뜨리지만 아라비아말은

하늘로 감아 올린다. 경주 천마총 천마의 말꼬리가 위로 솟구쳐 있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후 수세기를 지나면서 중국왕실의 말은 중국미술사에서 보는 것같은 개량종으로 바뀌어갔다.

땅딸막한 몽골말은 점차 이상적인 질주마의 형태로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가야기마족들이 일본에 실어간 전투용 말은 그당시 한반도의 일상용이던 몽골말이었다.

부여족은 통치자용의 천마도 그 개념을 지니고 갔다.

땅을 밟을 필요가 없이 하늘을 나는 천마는 부여-가야족 통치자 오진, 후일 진무천황으로도 불리게 된 왕을 위한 것이었다.

한국무속의 ‘천마’와 ‘일본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자와의 묘한 결합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다.
  
  서기전 108년 한무제는 4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페르가나의 말이 이로 인해 곧바로 한나라에서 낙랑에 직수입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경주 155호 고분의 말은 오히려 다른 경로로 해서 들어왔다고 본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서기 49년 부여왕이 중국황제를 만났다.

부여족들은 당시 한쪽에선 선비(鮮卑)족에게, 다른 한쪽에선 고구려에게 협공을 받고 있었으므로 중국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려했다.

부여의 지배층은 한나라 수도 낙양성에서 이 놀라운 말을 목격했을 것이다.
  
  페르가나의 말은 시베리아 초원시대를 거쳐온 천마의 전설에 꼭 맞아떨어졌다.

3세기, 아니면 늦어도 4세기 후반 부여는 페르가나의 말 여러 필을 확보했으며 무속신앙의 부여왕이 천계를 나는 데 이 말이 쓰여졌다.
  
  한나라가 망한 뒤 313년에는 한사군도 부여 군사들과의 접전에 시달리다가 망했다.

326년 선비족이 부여를 쳐들어오자 패망한 부여족의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와 이미 남하해 있던 낙랑일족과 합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이동상황은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부여족들은 페르가나 말과 함께 피신해 남하했음이 분명하다.
  
  페르가나는 서기전 102년 함락되어 없어졌으나 그의 훌륭하고 힘차며 나는 듯 질주하는 천마는 중국에 남았다.

부여가 이들 말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남으로 이동할 때 당연히 이들을 데리고 나왔을 것이다.

이 말은 너무나 귀한 것이었으므로 오로지 왕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경주 155호 천마총의 천마는 상류계층의 말이 점진적인 우량종으로 개량되면서 형성된 진짜 말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369년 부여족들이 일본정벌을 위해 바다를 건너갈 때도 이 말을 가져갔으리라 생각된다.
  
  20세기 히로히토 일본천황의 ‘성스런 백마’는 페르가나에서 피빛땀 내는 말을 쟁취했던 한무제로부터 재차 부여기마족의

일본정벌을 거쳐 전래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원문:
  
  1. Galloping on Korea's "Flying White Horse" From Ferghana Through Korea to Japan, 경향신문 1982.5.24
  2. 'Tremendous Hoax' of History (3), 코리아 헤럴드 1985.4.3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8>


쓰루가의 한국인 자취: 신공황후와 용감한 큰곰. 


지금 4천만 한국인 중 대부분은 쓰루가(敦賀)란 지명은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이곳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1천5,6백년 전 한국땅에서 떠난 사람들은 일본 서부의 이곳 쓰루가에 배를 대고 왜에 들어와 정착했다.

일본인들도 이곳을 통해 한반도의 문명이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옛날 부산 김해항을 떠난 한국인들은 우선 북 규슈를 거친 뒤에 왜국 내지로 들어가 야마도 지방에 정착했다.

쓰루가는 위도상 부산의 동쪽에 마주한 항구다.

북대서양과 동해의 해류를 타고 한반도를 떠난 배는 자연스럽게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조류를 타고 내려와 닿게 되는 곳이다.

이 일대에서는 일본 제일의 항구로 꼽힌다.

삼면이 산으로 에워싸이고 바닥이 깊어 큰 배들이 입항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藥師寺 소장 신공황후상. 한국왕녀 출신의 여걸이다. ⓒ프레시안

 


  미국인 최초로 한국사(그리고 일본사를)를 쓴 그리피스는 1880년대에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이곳 쓰루가에

오게 되었다.

그리피스가 쓴 책의 앞부분에는 그가 어떻게 해서 바다 너머 들리는 명랑한 종소리를 알게 됐으며 그곳에 애초부터 있던 두 개의

무속사당이 신공왕후와 그의 휘하 장군 다케우치노 쓰고네를 받드는 신또신사로 바뀌었는지가 쓰여있다.

다케치우치노 쓰고네(武內宿)는 ‘용감한 큰 곰’(역자주; 고사기를 영역한 도널드 필립은 무내숙미를 용감한 늙은 곰의 뜻으로

해석했다.

그리피스는 다께치우치로 썼다.)이란 의미로서 그의 이름에 내포된 고마, 혹은 곰이란 말은 그의 조상이 부여-고구려사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국의 가야토기. 하버드대 박물관 소장 ⓒ프레시안

 

 

 


  위의 두 사람이 함께 사당에 봉안된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내가 조사한 바 두 사람은 비밀의 연인관계로서 신공왕후는 왕족 여성이고 다케치우치는 전투 지휘관이었다.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이 바로 일본의 15대 왕이자 부여기마족의 일본 통치 초대 임금인 오진천황이다.

369년 진고(신공)는 부여족뿐 아니라 백제 가야 신라의 모험적인 투사들을 거느리고 바다건너 왜로 떠났다.

이들이 말을 대동해 떠난 전투 선단은 한반도 남쪽항구에서 출발했다. 일부는 후사를 위해 뒤에 남겨졌다.
  
  쓰루가에는 이곳에 상륙한 잊지 못할 두 사람에 대한 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리피스가 말한 종은 물론 일본이 한반도에서 탈취해가서 일본 절이나 신사에 걸리게 된 10여개 한국 청동종 가운데 하나다.
  
  4세기에 왜로 떠난 한인들은 농부가 아닌 상류계층의 인물들이었다.

쓰루가에는 지금도 농부와 그보다 앞서 이주해온 어민, 뱃사람간의 싸움을 되살린 신또무속 축제가 있다.

후꾸이현 쓰루가 시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열리는 행사인데 흡사 전투와도 같은 양상을 띄었다!
  
  양측이 각기 받드는 신이 있다. 신또에서 유래한 신들로서 농부들의 다이고구 신은 농부들에게 부를 가져다 주는데 잘 먹어서 뺨이

불룩한 얼굴에 양팔에는 쌀이 가득 든 가마니를 안고 있다. 에비쓰는 바다에 의지해 사는 어민, 뱃사람, 항구사람들의 수호신으로

바다에서 나는 산물, 큰 도미생선을 꿰어든 낚싯대를 높이 쳐든 모양이다.
  
  오후가 되면 마을 젊은이들은 다이고구 혹은 에비쓰처럼 보이는 옷과 가면을 쓰고 나온다.

농부와 상인이 편을 가른다. 줄다리기를 할 굵은 동아줄이 미리 준비돼 있다.

청년들이 가면을 쓰고 쓰루가의 거리 곳곳을 행진하고 난 다음, 한바탕 ‘전투’ 같은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에비쓰편이 이기면 물고기가 잘 잡힐 것이라 하고, 다이고구가 이기면 농사가 풍년 들겠다고 한다.

오직 역사가들만이, 이들의 상징적 줄다리기 싸움에 감춰진 역사적 진실, 천오륙백년전이나 그보다 더 오래전 한반도를 떠나

왜국땅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온 일단의 개척자들이 그보다 앞서 살고있던 사람들과 벌였던 실전을 깨달을 뿐이다.
  

 

 

 

일본의 쓰에끼 토기. 교토박물관 소장 ⓒ프레시안

 

 

 


  일본의 역사서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해 두지 않았지만 일본땅에서 출토되는 토기유물엔 그 자취가 남아있다.

서기전 200년경부터 서기 250년 사이에 만들어진 야요이(彌生)토기를 보면 한반도에서 쓰던 물레와 회전판이 비로소 수입되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 부산근처 고분에서 출토되는 김해토기와 같은 경질토기의 제작기법도 들어왔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쓰에끼(須惠器)토기는 대구 고령일대에서 출토되는 한국 가야토기의 완전한 복제품이다.

가야토기는 부산대 박물관과 진주박물관(김해박물관으로 옮김)에 훌륭한 소장품들이 많다.

긴 목과 나팔꽃처럼 퍼진 밑바닥, 귀신이 제기에 접근하는 세모 네모 또는 다른 모양의 가파른 수직상태로 뚫린 구멍들(역자 주; 이런

구멍은 받침대에 숯을 넣고 그릇의 음식을 데울 때 공기가 통하도록 하는 환기창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현대의 신선로 그릇 받침대를 보면 명확해진다) - 이런 요소는 김해토기와 쓰에끼토기 모두에서 볼 수 있다.
  
  신공왕후와 다케우찌가 왜를 정벌하러 올 때 전사들만이 아니라 도공들도 동행해 온 것이다.

전쟁이 나면 통치자들은 전쟁에 임하기 전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한 제기용 토기를 빚었다.

일본역사서가 감추고 있는 부분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해낸 토기형태를 통해 구체화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면 코벨지음 1986년 발행 ‘한국 도자기의 세계’ 18 -27면을 참조할 것).
  
  나는 1960년대 어느날 한반도를 마주보는 일본 서해안 최북단의 강파른 어촌 도짐보의 한 여관에서 보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강한 바닷바람에 그대로 내놓이고 파도에 씻겨 암석들이 기괴한 모양을 한 어촌 마을이었다.

화산의 절벽이 가파르게 90미터높이로 솟아있어 거친 자연의 본색을 그대로 접할 수 있었다.

본토의 나라나 교토의 안온한 지형과는 비교도 안되는 일본북부 지역은 접근이 규제된 곳이다.

5세기, 6세기, 7세기에 왜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지금의 오사카 나라 지역에 정착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스카는 초기 정착자들이 형성한 한국인촌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 완성된 아스카 불교유적은 지금 일본의 불교미술사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원문
  Tsuruga and Koreans 코리아 헤럴드 1987.2.20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9>


부여족의 바위와 이름 -인덕천황,바위공주 이와노히메를 배필로


현대 한국인들은 산천과 바위를 사랑한다.

일찍이 부여 기마족들도 사람이름이나 땅이름에 ‘바위’가 들어가는 이름을 많이 붙였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지금도 한국의 어린아이 이름은 바우, 돌이, 차돌이 그런 아명이 많다.
  
  일본건국시조 진무(神武)천황의 이름도 이와레(이와레 히꼬노 수메라 미꼬도)이다.

일본어로 이와는 바위, 레는 족속이란 뜻이며 진무는 바위배(天岩舟)를 타고 일본 본토로 동정(東征)해 갔다 한다.

이와레(磐餘)의 레는 부여의 여(餘)와 같은 한자다. 부여라는 이름은 영어의 Rockling 개념에 비견할만하다.
  
  컬럼비아대학의 개리 레저드교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동부여가 동해의 가섭원으로 갔다’는 구절을 ‘부여족의 한 일파가 왜국의

가시와라 평원으로 갔다’ 라고 해석한다. 가시와라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섭원이라고 한다.
  
  부여족이 왜국에서 왕권을 잡은 이후 1백여년간 그들의 배필은 가야혈통의 가쓰라기(葛城)가문 여성들이었다.

부여족 2대 왕인 닌도쿠(仁德)천황은 가장 거대한 능묘를 남긴 임금으로 가야의 왕족 아니면 귀족여성인 바위공주; 일본어로 이와노

히메(磐之媛)에게 장가들었다. 바위공주의 집안 가쓰라기(葛城)는 가야에 뿌리내린 호족이면서 동시에 왜국의 화족들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 천지. 북방지역에 살았던 부여족들은 바위공주, 바위왕자등 바위가 들어간 이름이나 지명을 많이 남겼다. ⓒ프레시안


  가쓰라기 가문은 바다 건너 왜에 정착한 부여기마족과의 동맹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가야와 왜국 양쪽에 모두 근거를 두고 있었고, 여러 나라 언어에 능한 만큼 한국과 중국과의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인물 -

 일종의 외무장관을 많이 배출했다.
  
  후일 근대 조선에서 서로 적대적인 가문 출신의 왕비들로 왕에게 문제가 생겼듯이 5세기 부여족 통치자들도 가쓰라기 가문에서만이

아니라 가야출신 아닌 여성도 비로 맞아들였다.

결국 500년 경에는 내분이 일어나 부여족의 왕권이 약해졌을 뿐 아니라 ‘신성한 임금’의 한국혈통이 500년에서 505년 사이에는 다른

혈통의 임금에게로 넘어가는 결과를 불렀다.

부여왕권의 재정적 힘은 한국에 입지한 것이었는데 그 연줄이 약화되면서 권력 또한 손에서 떠난 것이다.
  
  그때까지의 순수 부여족 임금들이나 그 뒤를 이은 화족혈통의 왜국 통치자 모두 무속을 신앙하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의 사서 위지(魏志)에 왜의 원주민을 두고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큰새의 깃털을 덮어 장사한다’고 묘사했다.

오늘날에도 한국의 무당은 모두 새털을 머리에 장식한다.

나아가 경주의 아름다운 금관에도 5세기의 무속왕이 사후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하는 날개장식을 붙였다.
  
  일본의 고대기록에는 귀신을 쫓는 액막이 행사가 많았다고 적혀있다. 왕비들에게 자주 신이 내렸고 그녀들은 앞일을 예언하곤 했다.

무당이 그러는 것처럼 왕녀들이 신내림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수군병사들을 이끌고 왜국으로 원정 온 용맹한 전사 진구왕후 또한 무당이었다.
  
  부여기마족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위지에 ‘3세기 왜국에는 말이 없었다’고 했다.

3세기 경에는 배가 작아서 말을 실을 수 없었거나 장사꾼들에게 난관을 무릅쓰고 배에다 말을 태워 원거리로 가져다 파는 일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이었을 수 있다. 그러다가 4세기 부여기마족이 왜일본에 들어온 뒤 갑자기 말은 무덤의 부장품이 되고 벽화에

말그림이 그려지거나 토기 말이 빚어지는 등 일본 예술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4세기 고분 벽화에는 말과 함께 배가 그려져 있는데 사람이 배를 젓고 있거나 노가 달려 있는 정도의 단순한 그림이다.

후기의 그림에는 말이 배에 실려있거나 내리는 장면 모두가 그려져 있다. 이들은 부여기마족의 침입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여기마족들은 1백여년이 넘게 왜국의 지배자로 통치하면서 일본역사에 무슨 영향을 끼쳤던가? 중요한 것은 통일에 따른

안정이었다.

강력한 군벌의 지배는 영토 전역에 단일집권체제를 실시하여 보다 평화로운 상황을 가져왔다.

부여족은 발달된 무기류를 가졌던 만큼 중요한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 마구제작은 대단히 중요한 금속공예였다.

건축적 측면에서 부여족은 무덤주위를 물도랑 해자로 겹겹이 두른 거대한 능묘 매장제도를 행했다.

능 주변을 토기인형 토우를 둘러 장식함으로써 일본내의 토기 발달이 이루어졌다. 도기제작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선진국이었다.

도자기 빚을 때 쓰는 회전판과 물레의 도입은 그 당시 왜의 야요이토기에 자극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2천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은 지금도 일본에서 쓰이는 오름가마(登窯)를 소개했고 4세기 후반에는

한국에서 온 새로운 타입의 받침대 있는 가야토기가 일본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이 일본의 쓰에끼 경질토기로서, 그 귀족적 토기는 일본이 또다시 한국으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거진 1천년간

줄곧 쓰였다.
  
  초기의 일본역사가들이 쓴 역사서에 나오는 오진(應神)천황은 여기서는 부여기마족 신성한 황통의 제 1대 왕인 오진을 말한다.

일본 초기의 역사가는 전부 한국에서 온 학자들이었다. 뒤이어 일본에도 유교서적이 들어왔다.

그렇긴 해도 불교만큼은 부여기마족의 전래물이 아니다. 부여족들이 백제를 떠날 당시 그들은 무속을 받들었다.

366-367년, 그리고 368-369년 두 번에 걸쳐 일단의 부여족이 백제권역에서 마한을 축출했다고 레저드교수는 주장한다.

그리고는 369년 왜를 정벌하러 온 것이다. 불교가 백제에 들어온 것은 공식적으로 372년이었다.

그후 2백년 가까이 지난 뒤인 552년에 이르러 백제 성왕이 비로소 왜에 여러 가지 불교용품을 전했다.

6세기와 7세기에 들어와 백제가 일본에 전한 불교예술에 관해서 쓰려면 또다른 자리가 필요하다.
  
  원문:
  
  Puyo's Horseriders and Rocks 경향신문 1982. 5. 31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0>


일본으로간 부여의 한국인들: 5세기의 왜국의 지배자



일본인들은 옛것을 보전하는 데 뛰어난 능력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서 이즈모 후도끼는 8세기 당시의 일본 통치자들을 위해 편찬된 지지이다.

여기에는 이즈모(出雲; 한반도 남부를 마주보고 있는 일본의 해안)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인용하고 있다.
  
  ‘신이 어느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땅을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이 전설이 뜻하는 것은 신라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말하는 민간전승 설화인 것이다.

땅이 남아돌았다기보다는 많은 한국인들이 오늘날 미국이민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그당시 일본으로 이주해간 것이다.
  
  일본 최초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에는 바람신 스사노 오노 미꼬또(素盞鳴尊)에 관한 기록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모국은 한국이었다. 서기전 1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해간 사람들은 작은 배에 의지해 바다를 건너가야 했기에 초기

무속신앙 형태로서 그들에겐 산신이나 해의 여신보다 바람신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뱃사람이나 어부들에게 바람은 생존에 관련된 중요사항이었다.
  
  스사노 오노 미꼬또는 이즈모 거주 한국인들에게 주신으로 섬겨졌다. 한국인들은 후기석기시대에 머물러있던 일본 본토내의

원주민들과 섞여 어울리고 그들보다 우위를 점하는 일에 하등의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스사노 오노에 관한 유일한 무용담은 부부신이 아기를 가질 때마다 예쁜 아가씨를 제물로 삼키는 머리 8개 달린 뱀을 처단해

죽였다는 것이다.

스사노 오노는 다음번 아기가 태어날 즈음하여 술 여덟통을 차려놓으라고 일렀다.

용이 와서는 여덟 개의 머리를 술통 8개에 각각 들이밀고 술을 마셔 나른해지자 그 틈을 타 스사노 오노 미꼬또는 칼로 여덟 개의

머리를 모두 베어버렸다.

그때 사용된 칼이 오늘날까지 일본 통치자에게 통치권의 증표로 내려오는 칼이라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이즈모의 한인 사회는 번창하였으며 바람신을 모시는 거대한 신또 사당을 짓기에 이르렀다.

옛날 척도로 그 사당은 몇백자나 되는 높은 건물로 당시로선 혁명적인 건축이었다.

그러나 그 사당은 1천5백년전 무너지고 오늘날 재건축 바람신의 이즈모 신사는 해의 여신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 신사에 우위를 내주고 서열 2위로 물러나 앉은 신사가 되었다.

아마도 바람신을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신라출신 한국인과 해의 여신을 최고의 신으로 하는 한반도 남서부출신 한국인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스사노 오노 바람신은 해의 여신의 오빠로 낙착됨으로써 이즈모가 훨씬 앞선 거주지였음을 표명하게 되었다.

일본초기 역사가 기술될 당시 사관들은 해의 여신을 주신으로 받들고 있었으므로 바람신은 변덕스런 바람의 속성에 걸맞게

파괴적이고 심술궂으며 거친 성격의 신으로 그려지고 말았다.
  
  평양의 사학자 김석형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세 그룹의 한국인 사회가 건설돼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백제 신라 고구려의

분국이었다고 한다. 김석형은 이중 고구려계가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

평양사람인 그로선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음직하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 역사에서 빈번히 언급되는 것은 신라와 이즈모이며 4-5세기에 들어서는 백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고구려가 등장하는 것은 552년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뒤에 와서이다.

일본왕실의 스승으로 불교승려가 유입된 것을 위시해 일단의 승려들이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갔다.

지형학적으로 보더라도 북방의 고구려보다는 백제와 신라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 기간동안 한일 두 나라간의 정치적 상황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것처럼 첨예한 대립양상을 띤 것은 아니었으며 주민들간의

이동도 잦았다.

어업은 중요한 생업이었으며 한반도 긴 해안선 어디서든 배들이 떠날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사이의 해협을 건너 넘나드는 데 오늘날처럼 여권이니 지문같은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유동적이었다. 중국사서에는 이 당시 일본에 수많은 부족사회가 산재해 있었다고 했다.

보다 발전된 문명을 누리던 한국인들은 능력상 잘 대우받을수 있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게 자연스런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백년전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일었던 ‘가자 서부로’ 열풍과 흡사한 것이다.

동부의 안정된 사회를 벗어나 서부로 가면 보다 빠른 성공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란 기대가 젊은이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1862년의 법령으로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360에이커의 농장이 이양되었다.
  
  일본땅까지 험한 뱃길을 건너간 한국인들은 1세대 뒤에는 보다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오늘날 미국으로 이민 가는 한국인들도 마찬가지 상황이며 19세기 ‘가자 서부로’의 젊은 미국인들도 똑같은 이유로 떠났던 사람들이다.

인류역사의 진보는 언제나 발전된 기술을 처녀지에 가져가 개척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오늘날 일본에서 재일 교포들이 처해있는 낮은 위상에 대한 여러 가지 끔찍한 이야기와는 달리 5세기 일본의 한국인 부여족은

일본을 통치한 ‘신성한 천황’들이었으며 그에 따라 확실한 귀족계급으로 군림했다.

369년 부여족이 일본땅에 들어가 왜라고 하는 원주민들을 밀어내고 정권을 차지했지만 사실 이들 원주민들도 부여족에 앞서

한반도에서 건너온 한국인 피가 반 가량 섞인 한국인 후손들이었다.
  
  서양인으로 내가 구별해내는 한국인과 일본인 용모의 다른 점은 한국인이 키가 더 크고, 콧대가 높고 콧날이 길며 곧바르고 얼굴은

그리 동글동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남방계 피가 섞여있기 때문에 콧대가 거의 없고 뺨에 좀더 살이 올라있으며 얼굴이

동글동글하다.

일본인의 코는 콧망울이 좀더 퍼져있고 허리 아래 다리길이가 짧다.

머리칼은 완전 흑색이며 결이 뻣뻣하고 거칠다.

피부색은 오늘날의 서울사람들보다 좀더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다.
  
  한국인의 눈은 갈색을 띄고 있기도 하며 밝은 갈색눈의 경우도 있다.

햇빛에 비쳐보이는 머리칼은 갈색조를 띄고 있는데 이 모든 특징은 한국인에게 코카시언의 피가 섞여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5천년전이나 7천년전 한국인의 먼 조상들은 알타이산맥에서부터 시베리아를 건너 동쪽을 향해 나아온 것이다.

서기전 2세기에는 몽고혈통이 가미되었다.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눈꺼풀이 몽고식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 1백퍼센트 순종 한국인인 내 친구는 수술을 한 것도 아닌데 눈꺼풀이 몽고타입이 아니다.
  
  요즘에도 눈에 띄는 이러한 차이점은 5세기에는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다.

지배계층이 된 부여족은 해협을 건너는 일본행에 동행한 주변친지들을 요직에 기용했다.

나의 아들 알란 코벨은 기병 5백명과 보병 7백 정도가 한국으로부터 와서 규슈에 상륙했으리라 보고 있다.

이 정도 병력이면 당시 일본을 정복하기엔 충분한 규모였다.
  
  일본으로 이주해간 한국인들은 잠업이나 직조, 도자기 제조에 있어 현지인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다.

한 왕비가 죽었을 때 왕실에서는 이즈모(出雲;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일찍이 이주해온 한국인들의 정착중심지)에 도공을 보내 능에

장식할 토기며 토우, 토용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하니와 흙인형들은 역사기록이 없던(나중의 역사서에는 부여족 1세대인 오진왕이 처음으로 일본에 문자를 도입했다고 하는데

이런 기록은 망실되었다) 5세기 당시의 일본 사회상을 어느 정도 반영해 준다.
  
  하니와 토기에는 말과 배, 방패, 닭, 무당, 음악가, 병사 기타 여러 가지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

부여족 2세인 닌또꾸(仁德)왕능에는 이런 토용이 2만개나 들어서 있었고 세겹의 해자가 둘러쳐져서 접근을 막았다.

이들은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5세기 초 닌또꾸왕의 사망 당시만 해도 무속신앙에서 잡귀가 얼마나 강한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케 되는 것이다.
  
  당시의 장제는 물론 무속신앙의 의례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고 대개 무녀가 집전했다.

하니와 토기에 붙어있는 조각에 보면 이런 무녀들은 곡옥 목걸이를 걸치고 있으며 소매가 좁고 깃이 밭은 저고리와 넓게 퍼진 치마를

입고 있다.

어떤 무녀들은 면류관같은 각진 모자를 쓰고 있다(바로 이 시기의 고대 중국황제들이 면류관을 착용했다).

처녀들은 머리 한가운데를 갈라 양쪽으로 묶어 내렸다.

5-6세기 남자들은 보석치장을 했다(5세기 경주고분의 발굴품을 생각해보면 이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5세기의 일본은 오늘날의 일본과는 정반대 상황에 있었다.

오늘날의 한국은 비싼 댓가를 치르면서 외국인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기술을 전수 받는다.

5세기 일본에게 부여족은 최신기술을 지닌 외국인 전문가집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여족들은 제일 좋은 땅을 차지하고 그 일족들에게 토지를 내리고 왕실의 요직을 맡겼으며 일본 원주민들은 노동력을

제공했다.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은 부여법에 따라 노예가 되었다.
  

 

 

 

 

일본 규슈 다께하라 고분벽화. 5세기경. 항해해온 배에서 말을 부리는 사람이 있고 공중에는 또하나의 커다란 말 천마가 그려져 있다. 7개의 가지를 지닌 종려나무도 있다. ⓒ프레시안

 

 


  몇주일전(1982년) 부산 조선호텔 앞 바다에서 동트기 전 용왕님께 제올리는 한 무당을 사진찍고 있을 때 부산 상공회의소에서 오는

6월 한국인 초기 이주민이 항해해간 뱃길을 따라 후꾸오까까지 가는 탐사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상황을 더 실감나게 재현하려면 현대식 엔진없이 오직 항해기술에 의지한 배에 말과 식량 등을 싣고 가는 것이어야 한다.

비상시를 대비한 무전기만은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항해자들이 그 옛날 사람들 같은 옷차림을 하고 가능한 한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당시와 같은 조건아래 항해한다면 더 흥미로울 것이다.
  
  후꾸오까현 와카미야에 있는 다께하라 고분벽화가 이 일에 상당한 참고가 될 것이다.

고분 내부 석판 널 위에 광물안료로 그려진 이 그림에는 배에서 말을 끌어내리는 항해자의 옷차림이 분명히 보인다.

그 복식은 승마바지 같은 것에 높이 올라간 건같은 모자를 쓴 것이다. 무덤의 돌널은 140센티미터 높이이다.

여기에 칼러로 된 사진과 모사도를 소개한다.
  
  그림에 보면 말은 거의 배만큼이나 크지만 말을 다루는 사람보다는 작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벽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또다른 말그림이다. 크기도 배에서 내리는 말보다 훨씬 크다.

이 말은 공중 높이 질주하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이 말 또한 샤먼왕의 하늘을 나는 말, 천마가 아닐까?

(경주 155호 고분 천마총을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후꾸오까의 이 고분벽화가 일본을 정벌하러 온 부여족이 규슈에 상륙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긴 데서 부여족이

배에 싣고온 일반 기마용 말과 기수 외에 무속에 등장하는 천마까지 완벽히 갖춰 한반도로부터 가져왔음을 알게 된다.
  
  두 그루 종려나무가 배 양쪽에 서있어 그림의 틀을 겸하고 있다.

규슈지방은 한국보다 날씨가 훨씬 온화하며 오늘날에도 종려나무가 자란다.

부여의 눈 많이 내리는 추운 고향에 비하면 규슈는 아주 따뜻한 기후대에 있다.

한반도 땅으로부터 길고 위험한 항해 끝에 와닿은 이곳의 부드러운 기후가 화가에게 깊은 인상을 준 나머지 기념비적인 벽화에 비록

낯설긴 하지만 종려나무를 그려 넣게 된 것같다.

그리고 이 나무는 7개의 가지를 지니고 있다. 무속의 7천(天)세계를 상징하는 것일까?
  
  원문: Koreans Who Sailed to Japan 코리아 헤럴드 1984.10.6
  Japan's Culture 'Rooted' in Korea Part 3; Korean Royalty in 5th Century Japan 경향신문 1982.5.17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1>

일본의 첫사서 구다라기(백제기)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반한적인 시각이 문제시되는 가운데, 일본의 첫 역사서가 그 당시 일본의 쇼군(쇼군이란 말이 생기기

전이지만) 같았던 존재로 정권을 거머쥔 최고실력자 한국인과 절반 한국인인 그의 조카이자 사위인 섭정태자가 같이 써낸 책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바로 일본불교의 아버지로 호칭되는 쇼토쿠(聖德)태자와 그의 장인이자 2백년 가까이 왜국의 최고실력자로 대를 이어 권력을

잡아온 소가 우마코(蘇我馬子)가 그들이다.

이들의 조상은 4세기 가야에서 건너온 한국인으로, 다른 기마족들과 함께 한국에서 왜로 이주해왔다.
  
  오늘날 일본에서 아스카시대 불교미술로 호칭되는 호화로운 불교유물의 대부분은 이 두 사람에 기인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이 그때 짓도록 한 절과 만들게 한 불교조각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공저한 역사책은 후일 소가가문이 대궐에서 일어난 정변의 희생이 되어 죽을 때 같이 불길에 던져져 남아있지 않다.

이때 이들이 찬한 역사는 초기 백제역사를 기술한 구다라(백제)기를 근저로 해 쓴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구다라기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이들 역사서에는 아마 서기 369년부터 505년까지 왜(671년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기기 전)를 지배한 한국인으로 왕가의 계보를 이룬

기마족과 그들의 바다 건너온 항해사가 기술되었을 것이다.

505년 이후 일본 본토종의 피가 혼합되긴 했지만 권력은 그때까지도 소가가문과 같은 한국에 근원을 둔 자들의 손에 있었다.

이 시기 일본의 귀족층은 다수가 한국인이었다.
  
  정변이 있고 반세기쯤 지나서, 일본내 토착 세력들이 이젠 스스로의 역사책을 서술할 만하다고 생각된 그
시기, 역사서들은

구다라기와 함께 불길에 사라졌다.
  
  그 당시 사서편찬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조국이 망하자 일본으로 도망쳐온 백제의 망명 학자들이 일본대궐의 사서편찬위원으로 발탁되었다.

한문에 능통한 이들 사서편찬자들은 그때까지 일본에서 지나간 역사를 암기하는 토착 직업인들을 듣고, 자료를 수집하는 능력이 있는

학자들이었다.

사서편찬의 유일한 금기는 밖에서 들어온 부여족의 왜 정벌을 철저히 삭제하고 그대신 현 집권자들의 계보를 늘려 오래전 중국의

역사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호한 과거에까지 가 닿도록 꾸미는 것이었다.
  
  백제학자들은 일본의 구비관(口碑官)들이 부르는 노래에 나오는 사건과 이름을 백제사에 결부시키고 일부는 가야사와 신라사까지

차용해다 일본사로 바꿔치기 했다.

그들은 ‘일본국의 창시자'라는 신비한 영웅담을 만들어냈다.

여기엔 부여 가야의 왜정벌에서 얻어진 구체적 이야기들을 따다 쓴 만큼 사실적인 내용이 있다.

이런 것들이 짜집기 되어 일본사는 서기전 660년부터 비롯된다는 왕실에서 만족할 만큼의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로 역사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접하는 역사적 사실은 진무(神武)천황이라고 하는 아말감 역사에서 나오는 내용일 뿐이다.

실제로 진무라는 이름은 초기 역사에서 그다지 영광스러운 위상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호무다왕자(15대 오진천황을 지칭)라고도 하는, 일본땅에서 처음 태어난 왜국정벌자 기마족의 왕자 15대 왜왕 오진의 행적을

가상의 진무천황에게 덮어씌워 영광스런 건국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8세기 초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왜를 정벌한 왕자 호무다는 이와레왕자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이와’는 일본말로 ‘바위’를 뜻하며, ‘레’는 씨족, 가문을 말한다. 따라서 이와레왕자는 바위족 집단의 우두머리, 바위왕자였다.

그리고 ‘바위’는 언제나 부여 가야를 배경으로 한다. ‘레’의 한자표기는 ‘夫餘’의 餘자와 같다.

부여의 이 바위왕자는 하늘에서 돌로 된 배를 타고 강림했다. 이 당시 관련된 사항들을 보면, 바위는 바로 한국인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8세기의 역사가들이 서기전 660년 시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4세기에 일어난 부여족의 일본(왜)정벌에 대해 알고있던 사실을 서기전 660년의 일로 가져다 썼다.
  
  부여의 바위왕자가 수월하게 왜를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앞서 6백년동안 한반도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집단을

이루어 왜땅으로 건너와 정착하면서 농업, 어업 무역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 왜로 이주한 사람들이 타고 간 배는 4세기 기마민족이 타고 간 배보다 작은 것이었다.

그래도 기마족들처럼 왜를 침입하려고 배에다 많은 말을 싣고 가는 모험은 하지 않았던 만큼 무사히 왜땅에 건너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出雲)였는데, 이곳은 여러모로 신라와 관련된 곳이다.

실제로 713년에 편찬된 일본의 한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신이 신라땅을 굽어보니 인구가 너무 많은데 왜는 그보다 인구가

없으니 신라땅 한조각을 떼어다 해협을 건너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는 것이다.

바로 신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과 마주보고 있는 이즈모로 이주해 왓다는 뜻이다.

이들 대부분은 바람과 바닷물에 생활을 의지하는 어부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리해서 해신보다는 바람의 신을 더 우러르게 된

것이다.
  
  초기이주사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이 통일국가가 되고나서 바람의 신 스사노우를 모신 이즈모신사는 해의 여신을 받드는 이세신사에

밀려 지위가 두 번째로 낮아졌다는 것이다.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를 받드는 이주민은 신라계통이 아니었다.
  
  만일 60척의 배가 동원되어 한 배에 15명씩의 기마병과 말이 타고, 그중 4분지 1은 망실되엇다 해도, 규슈에 상륙한 기마는 적어도

1백여마리는 규슈에 상륙했을 것이고 기마병들의 전투장비인 갑옷과 무기는 비활동적인 원주민들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난 것이었다.

부여족들은 선비족이 요동의 그들을 침입해온 346년이래 줄곳 이동중이었다.

침입에서 살아남은 부여기마족들은 남으로 이동해 한반도를 거쳐 배로 왜의 규슈로 건너간 것이다.

그리고 이들 기마족들만으로도 일본의 역사는 대변혁을 이룩했다.
  
  이들과 함께 깊이 있게 가꾸어진 그들의 신앙 샤머니즘도 왜로 건너갔음은 중요한 것이다.

기마족들은 무속적인 왕의 통치 아래 있었으며 왕은 사후 모든 공경을 다한 거대한 능에 안장됐다.

이후 일본역사에서 거대고분시대가 열렸다. 부여 기마민족이 왜에 가져다준 가장 큰 은혜는 중앙집권체제였다.

그 이전에는 잡다한 소수의 부족들이 산재해 있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체제가 후일 성숙해서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는 그들의 ‘모국’에까지 대들게 될 줄이야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원문:
  The First Japanese History Book 코리아 헤럴드 1983.3.17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2>

문화교류?고대에는 한국서 일본으로 일방통행이었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에 맞춰 일본에서 나온 책을 보았다.

83세의 히로히토천황은 오직 일제의 한국강점에 한해서 유감이라는 사과를 했을 뿐이다.

1983년 서울에 온 나카소네 총리는 그보다는 더 나아가 6,7세기 한국이 일본에 가져다 준 기술과 문화에 일본이 빚지고 있음을

언급했다.

나는 이에 용기를 얻어 이 주제로 대한항공(KAL) 기내지 <모닝캄>에 글을 썼다.
  
  얼마전 한 출판사는 현재 한일 양국에 있는 미술품중 구조가 엇비슷한 것들을 골라 칼러사진으로 인쇄한
일어판 책을 냈다.

책 제목은 ‘한일 문화교류 2000년‘이라는데 책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교류란 양국의 문화수준이 비슷해야 사상이 교환될 수 있는 법이다.

이 출판사는 1982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나의 칼럼을 출판하기로 했다가 ’국내학자들한테 검증받고 내겠다‘

해서 출판이 무산됐다.

그때 보았던 겁먹음이 오늘 이 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신문의 서평도 그 책을 두고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라고 평했다.
  
  무슨 얼어죽을 교류란 말인가. 3세기부터 4, 5, 6, 7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 원주민들은 한국땅에서 문명화된 잠업과 문자,

금속문화를 가지고 오는 한국인들이 정착할 넓은 땅덩이만 제공할 수 있었을 뿐, 교류할 문화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늘날 동북아시아에 남아있는 고대의 가장 큰 불상인 법륭사 금당의 아름다운 삼존불을 만든 한국인의
후예들은 그 대가로 23조에

달하는 땅을 받았다.

여섯 번이나 실패한 끝에 위임을 받아 동양최대의 53피트 높이 동대사 불상을 만든 한국인 후손도 그 성공에 대한 멋진 보답으로

벼슬을 받았다.

한 신문은 일본에서 ‘일본불교의 전파와 불교예술의 전통이 오로지 중국에 있을 뿐’이라고 한 일본의 불교선전 영화를 보고 난 한국인

유학생이 ‘놀랍다’며 감탄하는 말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이 한국학생은 일본항공 JAL의 장학금 수혜자였다.
  

 

서울의 청동 미륵반가사유상(왼쪽)과 교토의 목제 미륵반가사유상. 한국의 미륵불상이 원류이다. ⓒ프레시안


  이런 한심한 형편에다가 한일 문화적 교류 운운하는 책을 보면 한국인들은 뭘 제대로 아는 것 같지 않다(1984년 현재).

한국인 저자가 쓴 짧은 글에 한ㆍ일 양국어로 편집된 한 책은 앞표지에 교토 광륭사의 미륵보상살을 앞세우고, 한국의 똑같은

미륵보살상은 뒷장으로 밀어놓았다. 앞에 실리는 것과 뒤에 실리는 것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는 독자들이 잘 알 것이다.
  
  반면 두 미국인이 공저한 책(한국이 일본문화에 끼친 영향; 존 코벨과 알란 코벨 공저)은 이 주제를 좀더 직접적으로 다루어서

앞표지에 한일 양국의 똑같은 미륵보살상 사진을 같이 실어 한눈에 두 불상을 비교해 보게 했다.

수백가지 문화를 그렇게 비교해 볼 때 알 수 있는 기본적 사실은 한일문화권에서 한국은 맏형이고 일본은 어린 동생이었다는 분명한

진실이다.
  
  코리아 헤럴드의 고정 기고자인 이원설은 식민시대의 잘못을 인지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썼다.

문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국민 전체가(속셈이 따로 있는 정치가들이 아니라) 과거사를 깊이 알아서 문화가 일률적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만일 거기에 ‘교류’라는 게 있었다면 섬나라에 문명을 가져다 준 한국인들에게 돌아간 땅, 명예와 부가 있었다.

김해에서 모험심 많은 어부, 상인들이 왜로 건너와 살면서 구석기시대의 왜인들에게 벼농사, 도자기성형의 회전판, 도공의 물레,

그밖의 수많은 문명의 제도를 전해 미개한 삶을 끌어올리면서 시작된 일이다.

문명은 언제나 미개한 쪽을 향해 흘러가는 법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세계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오고 인력거와 분칠한 게이샤에서 반도체 산업국가로 탈바꿈했다.

서구의 기술로 일본은 세계 1등국으로 떠올랐다.

똑같은 방식으로, 오래 전의 왜는 바다 건너온 선진기술로 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나아가고 근대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차이점이 있다.
  
  근대에 들어 서구의 신기술을 배울 때 일본의 유학생들이 서구 현지로 가서 배웠다. 또는 최근 IBM에서처럼 기술을 훔쳐왔다.

서방세계에서 일본으로 와서 가르치고 정착한 예는 드물었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미개한 왜인들을 깨워주러 가서 스승이 되고 원주민들로부터 존경과 함께 땅을 얻고 귀족계층으로 살았다.
  
  일본이 귀족계급 성씨를 조사한 책 신찬성씨록에는 3분의 1 이상이 도래인들로서 대부분 백제, 고구려에서 온 한국인들이었다.

이 시기는 한반도의 삼국이 서로 싸우다가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이었다.

예술가나 학자, 지식인, 평범한 직업인들은 전쟁을 싫어했다. 그들은 별일 없는 왜국 땅에 가서 양반이 되어 새 삶을 시작했다.
  
  한국의 도래인들이 쉽사리 왜국에서 지배계층에 진입할 수 있었던 또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369년이래 7세기 말까지 왜, 일본을 지배한 임금들은 순수 한국인 혈통이었다. 이들은 일본 원주민과는 결혼하지 않았다.

사실상 원주민의 상위계층은 1세기경부터 3세기까지, 부여 기마족들이 왜를 침입하고 중앙집권화된 정권을 만들기 전 일본에 건너와

정착한 한국인들이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일본 정부가 재일 한국인을 처우하는 실태를 극히 역설적으로 보게 한다.

강제로 끌려와 가난 때문에 일본땅에 정착한 조선인, 한때 그토록 존중하던 민족에게 일본은 등을 돌린 것이다.
  
  나는 다음 번 저작 ‘한국이 일본이 끼친 영향; 일본의 감춰진 역사(역자주 : 이 책의 제2권을 발행할 예정이였으나 발행되지 않았다)’

에서 일본에서 천황이 된 모든 임금의 혈통을 파헤쳐 볼 생각이다.

완전무결한 한국인 혈통의 임금이름 옆에는 별표를 해둘까 한다.

전 천황 가운데 25대 까지-초기의 임금 25명이 순수 한국인이었다.

그 뒤에는 부분적으로 한국혈통을 가진 자들이 일본의 왕권을 쥐게 되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런데 무슨 희망이 있는가?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맞아 1984년 11월호 특집을 꾸민 ‘역사와 여행’이란 잡지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앞표지에 신라 기마인물 토기 사진을 싣고 뒷표지는 규슈의 바다 위로 해가 뜨는 사진을 실었다.

이 주제에 대해선 다음 번에 다시 논하겠다.
  
  원문 : Cultural 'Swap' With Japan one-Away
  
  
By Jon Carter Covell
  
  Korean Friends have brought to my attention two recently published books on Korean - japanese relations, timed to appear simultaneously with the visit of President Chun to Tokyo. The so-called apology of the 83-year old Emperor Hirohito only mentioned the recent colonial period. Prime Minister Nakasone went further when he spoke at the Blue House last year, acknowledging the "debt in technology and culture" of sixth and seventh century Japan to Koreans. This gave the writer courage to expand on that subject for KAL's Morning Calm.
  
  Recently, very recently, Yolhwadang printed a book entirely in Japanese, showing color pictures of similar structures or artifacts located in present-day Korea or in present-day Japan. However, the title of the book "Two Thousand Years of Exchange between Korea and Japan" gives the tenor of the book away. the two countries had similar cultures and they "exchanged ideas."
  
  Two Years ago, after a series of sixty articles appeared in KyungHyang Shinmun in which this writer expounded on the indebtedness of Japan to Korea, the translator into Korean had a talk with this same publishing company, but the fee that it offered both the author and translator was so low and the fact that they didn't trust the manuscript but wanted to censor it, brought the project to nought. The parts now read of this new Japanese language book suggest the same timidity on the part of the publisher. THE BOOK REVIEW in the newspaper called it "Cultural Swap with Japan."
  
  What a Remarkable "swap," because the Japanese natives of the third, fourth, fifth, sixth and seventh century had nothing to "swap" as they gave vacant land to the Koreans who brought metal culture or sericulture or literary scholarship.
  
  The Korean descendant who created the beautiful bronze triad sculptural piece of Horyu-ji, (the largest to survive in the entire far East) was given twenty-three Cho of land, plus other "gifts." The Korean descendant who was called in after six failures of casting what is now "Japan's largest statue"(53 feet high Todai-ji Buddha), was also given a nice "present" when his casting was successful.
  
  Lately the newspaper quoted a Korean student who won the JAL scholarship to Japan returning and commenting on his surprise at being shown a movie on Buddhism in which the entire credit for the transmission of this religion and its art tradition was given to China.
  
  They are still at it, and books talking about "cultural swap" aren't strong enough to open their eyes. Perhaps the biggest difference between this book, edited by a Korean with short articles by both Japanese and Koreans, is that on the front cover is put a Maitreya(Miruk Posal) statue now in Japan. on the back cover is put the bronze statue in Seoul that is so similar. We all know the significance of "front" and "back."
  
  Two American authors squarely faced the issue more directly, by putting the same two statue side-by-side on the front cover, so they can be seen at once. The whole book titled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 Japan's Hidden History is written comparatively, so that it is plain to see which is, in hundreds and hundreds of cases, "the elder brother "(Korea) and "the younger brother"(Japan) in this big cultural family.
  
  As long time Korea Herald columnist Dr. Lee Won-sul wrote in his column two weeks ago, it is not enough to acknowledge the "mistakes" of the colonial period. to really clear the air, Japanese people as a whole, (not politicians who have their own axes to grind) should dig back into the past, and acknowledge that the 'flow of culture" was all one way. Or if there was a "swap" it was land, wealth, and honors for the koreans who brought the advanced culture to the islands - and this started happening when the adventurous sailors and traders went from Kimhae to stone -age primitives in Japan and brought them "culture," including how to grow wet paddy rice, the turntable, the potter's wheel and oh so many other things which an advanced culture can always teach to a less advanced one.
  
  Japan borrowed much from the western world after Emperor Meiji, and has moved from jinrikshas and paint faced geishas to micro-chips. Everyone knows how, with the use of Western technology, japan was able to pull herself up to the first rank of nations. In similar fashion Japan once long ago used technology which came across the straits to advance from the Stone Age into a modern state. But there was one significant difference.
  
  When borrowing from the West in modern times, Japanese students went to foreign countries to learn(or lately to steal from IBM, etc.); relatively few westerners came as "teachers," settled down and stayed there. The Koreans went to Japan as :teachers" of the more backward land, were treated with respect, given land and titles of nobility. The first record of Peerage in Japan shows that over a third had foreign names, were non Japanese, the largest group from Paekche, then Koguryo etc.
  
  Much of this settlement by Koreans was during a time of the three kingdoms fighting each other, especially Silla conquering Paekche and then Koguryo. Artists, scholars, and the intellectuals in other callings in general dont like war. They were glad to settle in a more peaceful Japan where they became "Nobles of the blood."
  
  Another thing made the settlement of Koreans into the top rung of Japanese society so very easy. From the year 369 A.D. onwards until the end of the seventh century, the rulers were of peninsula blood, and didn't intermarry for consorts with what they thought of as "natives."
  
  Actually the upper class among these "natives" were descendents of Koreans who had come over about the first, second and third century A.D. before the "Horseriders" came and organized Japans first central government with many real power 369 onwards.
  
  That is what makes so extremely ironical the Japanese government's treatment of Koreans now living in Japan. Brought by force and retained there by poverty, in large measure, the once-welcome race of Koreans is now given the back of the hand.
  
  In the next edition of the book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Japan's Hidden History' this writer intends to put a genealogy listing all the "emperors" of Japan, the official line, and to place a star or asterisk besides the names of those of 100 percent Korean blood. There will be twenty-five of them, the first twenty-five. After that the "partially Koreans" came to the so-called imperial throne - and have reigned ever since.
  
  But is there hope? A popular pulp magazine published monthly in Japan called History and Travel, has just printed their Nobemver, 1984 issue. Again, it was timed to cash in on the trip of President Chun Doo Hwan - but this time the front cover has a Silla stoneware figure of a horse and rider, and in the back are waves, with a sun rising over some land, which must represent Kyushu. This newest approach to the problem will be discussed in the next column.
  
  <코리아 헤럴드 1984.9.26>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3>

천황, 오진(應神)부터 게이타이(繼体) 전까지 완전한 한국혈통


1985년 11월 1일자 코리아 헤럴드에 370년부터 64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의 거주지였던 아스카에서 나무판에

그려진 키치(미완성 예술품) 유물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났다.

초기 한일관계사를 밝혀줄 많은 유물이 들어있다고 한다.

일본학자들은 궁중 쓰레기더미 속에서 발견된 이 유물이 일본서기의 폐기된 초고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7세기 일본 정부에는 역사편찬에 대한 고도의 검열이 있었다. 이때부터 한일관계 역사의 왜곡이 시작됐다.

최근 오사카 거주 한국인동포 일행이 내한해서 광주에서 부산까지를 도보여행하면서 왕인사당에 들려 참배했다.

왕인은 405년 왜에 당도하여 일본왕족을 교육시킨 두 번째 한국인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한문을 수학하는 집단을 이루고 대궐의 역사편찬자가 되었다.
  
  왕인보다 1년 전에는 백제인 아직기가 왜에 와서 글을 가르쳤다.

그는 백제임금이 왜왕에게 선물하는 길들인 말 두 마리를 가져온 사람이었다.

아직기가 말다루기 말고도 한문에 유식한 사람이었으므로 왜왕은 그에게 공부스승이 돼줄 것을 청했다.
  
  왜왕이 묻기를 ‘백제에는 당신 말고도 학문에 유식한 사람이 있소?’아직기가 ‘왕인이 나보다 낫소이다’ 하고 추천해

그 다음해 왕인이 왜로 임금을 가르치러 왔다.

왕인은 학업의 신이 되고 후손들은 독점적으로 학문의 조합을 이루었다.
  

 

 

 

일본 고분에서 출토된 이 일본왕 토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듯 물방울 무늬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있다. 왕관은 현재 서울 호암미술관 소장의 가야금관과 비슷한 형태이며 일본의 초기 천황들이 혈통상 한국인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이 당시 왜국의 조정에는 두 개의 전문인 집단조합이 있었던 듯하다.

두 집단 모두 한문을 아는 자들로서 대궐에서 학자로 통했는데 왜는 당시 한자로밖에 달리 기록할 문자가 없었다.

백제인 아직기와 왕인의 평생동안 왜는 369년 한반도에서 건너와 규슈를 정벌하고 이어서 혼슈본토의 서쪽 절반을

점령한 부여기마민족의 후예들이 통치했다. 이들은 한국인이었지만 무인일 뿐 한문을 아는 유식한 학문인들은

아니었다.
  
  왜에 와서 학문의 바탕을 닦은 두 백제인은 모두 진고(神功)왕후의 아들 오진(應神)왕 대에 왜로 건너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고왕후가 궁금한 독자라면 본인의 저작에 소개된 대로 진고왕후가 그의 아들에게 왜국 통치자의 자리를 주려고

왜로 건너온 저간의 사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역자주; 이 시리즈 3부에 소개할 예정).
  
  일본역사에는 공식적으로 16대 천황으로 기록된 오진과 그의 후대를 이은 임금들은 지금 일본천황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507년

왕위에 오른 26대 게이타이 천황 전 무레츠(武烈)까지는 의심할 바 없는 한국인들이었다.

게이타이왕은 4세기에 왜에 온 순수 부여 백제 신라혈통의 기마민족 계열과 그보다 앞서 1세기경 왜국에 와 정착해

살아온 한국계와의 왕권투쟁에서 타협안으로 채택된 인물이었다.
  
  507년부터 531년까지 재위한 게이타이천황은 기마족의 딸을 왕후로 맞고 그 사이에 출생한 긴메이(欽明)가 29대

천황이 되었다.

그의 통치때 소가(蘇我)가문이 왜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소가집안은 오진왕의 실제 부친인 것으로 보이는

다케우치노 수코네(武內宿미)의 직계손이었다. 다케우치는 진고왕후 생존시 그녀와 협력해 섭정정치를 했던 듯하다.

그의 이름은 ‘용감한 큰 곰’이란 뜻이다.
  
  다케우치의 수많은 자손들은 부여왕족의 특징인 바위를 섬겼다.

나라(奈良)와 텐리(天理) 시 사이에는 기마민족들이 찾아 보고 군수품을 간수하던 부여 바위공주 사당(역자주; 石上

신궁을 말한다)이 아직 있다. 바위는 한때 부여왕가의 적통을 상징했다.

일본이 받드는 건국신화에서 해의 여신(天照大臣) 아마데라스 오미가미가 돌로 된 동굴을 단번에 수리하고, 신또의

신들이 일본을 건국하려고 배로 된 배를 타고 강림했다는 것 등을 기억해야 한다.
  
  바위가 물에 뜰 리 없으니 이는 바위의 굳센 힘을 말해주는 전설에 그칠 뿐이지만 서기 712년이라는 시기에도

신또의 역사서라 할 고사기(古事記)에 하늘에서 내려온 돌로 된 배의 이야기가 기록될 정도로 강한 전통인 것이다.
  
  추측컨대 아직기의 후손은 왕인의 후손보다 더 친한적(親韓的)이었던 듯하다.

왕인의 후손들은 몇백년 뒤에는 자연스럽게 더 이상 백제가 아닌 일본에 최고의 충성을 바치기에 이르렀다.

660년 백제가 신라에 망해서 흡수된 뒤로는 멀리서 바치는 조국에의 충성도 쓸데없었고 그보다 훨씬 전에 망한

부여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이들 학자들이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되자 그들은 망한 백제의 역사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되 그것을

반(反)신라적으로, 일본의 통치자 입맛에 맞게 왜곡해 기록했다. 그들은 친한세력인 소가가문을 타도해 죽이고

새로운 왕가로 등극하여 한국의 영향력을 축소하려한 후지와라(藤原- 中臣가문의 후손) 가문에 아부했다.
  
  일본서기의 저자는 후지와라 왕가의 역사검열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목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아직기의 후손들은 이에 덜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5,6세기적 부터의 한국인마을 아스카에 그대로 거주한 반면 왕인의 후손들은 후지와라 가문이 통치하는

새로운 도읍으로 이사갔다. 물론 후지와라 혈통에도 한국인의 피가 섞여있다.

그렇지만 그 이전의 천황들처럼 그렇게 압도적인 한국피의 혈통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왕실소속의 역사가들을 감독했다.
  
  오늘날 벌어지는 일본의 역사왜곡은 이처럼 흥미롭다.
  
  원문
  Distortion of History 코리아 헤럴드 1985. 11.7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4>

팬은 칼보다강하다,그리피스의 신공황후 정벌론


 2장 학계 부여기마민족설 연구
  
  
14.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리피스의 진고(神功)왕후 일본정벌론
  
  오늘날 한국정부는 아름다운 책과 인쇄물 등으로 외국인에게 한국의 인상을 심어주는 데 많은 예산을 쓰고 있다.

현대 미국인들은 텔레비젼, 라디오, 광고 붙은 책 등에 아주 익숙한 세대로서 요란한 선전물을 보면 뭔가 그럴만한

속셈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백여년전 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오늘은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Griffis)가 한국에 대해 영어로 쓴 책 <은자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 1백여년 전 발행되어 대단히 큰 영향을 준 책에 대해 말하려 한다.
  

 

 

 

새가 뱃전에 앉아있는 배- 일본 고분의 이 벽화는 한반도에서 건너와 일본천황이 된 부여족의 일본땅 상륙을 의미한다. 그리피스 지음 <은자의 나라, 조선>에 실려있는 그림. ⓒ프레시안

 

 

 


  이 책은 1882년 초판이 발행된 이래 20여년 동안 9판이 발행되면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한국에 관한 가장

일반적이고 유효한 저서로 통해왔다. 책이 나온 1882년은 한미간에 처음으로 우호조약체결이 진행중이던 때였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 땅에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않았음에도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한국관련 책을 썼다는 사실이

흥미를 갖고 이 책을 읽어보게 만든다.

그리피스는 주로 일본측에서 나온 자료를 가지고 3년 걸려 ‘은자의 나라 조선’을 저술했다.
  
  그는 한반도를 마주보고 있는 일본 땅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기에 기술된 사실중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한국인 무녀였으며 후일 왕후가 되었고 4세기 일본을 정벌한 여장부로

우리가 믿고 있는 진고(神功)왕후를 받드는 쓰루가(敦賀)의 신또신사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피스는 진고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에 아무 의심도 갖지 않았다.

그리피스는 진고가 한반도에서 일본을 정벌하러 올 때 군사를 지휘한 사령관이자 진고의 정부였던 다께치우치노

쓰고네(武內宿미) 신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코벨이 지은 <한국이 일본문화에 끼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역자).
  
  그리피스는 또 한국서 만든 거대한 동종을 바다건너 일본 땅으로 싣고 오다가 빠뜨려 아직도 물결따라 그종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도 기술해 놓았다.
  
  실제로 본인으로 하여금 부여-가야 기마족이 일본을 정벌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치도록 용기를 준 것은 1백년도

더 전에 그리피스가 언급했던 위의 진고왕후 일본 정복설이었다.

그리피스가 다룬 이 사실은 많은 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던 것이었으며 일본의 군국 세력은 불과 수년후 이또 히로부미 같은 정치가가 초기 일본역사에 미친 한국의 영향을 강력 부인하고 5세기에서 6, 7세기에 걸친 동안 일본보다

월등 우월했던 한국문화를 격하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마민족설에 관한 주장이 1백여년전 처음 그리피스의 책으로 저술돼 나왔으며 뒤이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이 사실이 계속 억제되어왔음은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그리피스는 일본의 한국통치가 한창 무르익었던 1926년 83세로 사망할 때까지 한국에는 다녀가지 않았다.

그리피스의 이 저서는 1985년 현재 한국 내에서 오직 미 8군 도서관에 딱 한 권 있어 어느 기간동안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이해하는 도서로 활용되었다.
  

 

 

 

고구려를 건설하러 세 신하와 함께 부여를 떠날 때 고기떼가 떠올라 받쳐준 송화강을 건너는 주몽. 1853년 일본 하시모도 그림. <은자의 나라, 조선>에 실린 그림이다. ⓒ프레시안

 

 

 


  그리피스가 이 책을 저술하던 시기 한국은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어서 천주교박해와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행하고

있었다.

그리피스는 뉴욕주의 개신교 목사출신으로 그의 눈에 대원군의 정책은 당시 서구화에 열심이던 일본정세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요사이 한국 민화가 미국의 유수한 박물관에서 인기리에 순회 전시되고 있다.

그리피스의 책 <은자의 나라, 조선>에도 호랑이를 묘사한 긴 글이 나와 있고 악귀를 물리치는 호랑이 그림 설명도

나와 있다.

이 글은 한국 민화 -88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로 지정된 호돌이의 먼먼 조상 호랑이에 대한 최초의 언급으로 보인다.
  
  전쟁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의 역사서에 큰 비중을 갖고 기록돼 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과 히데요시의 일본군간의

전투라든가 일본군에 대항해 일어난 조선 승병 이야기 등은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미국의 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1904-1905년간의 국제사회에서(노ㆍ일전쟁 당시) 한국 아닌 일본편을 들고

나섰을 때 그리피스의 책은 그 영향이 극대화 되어 있었다. 그리피스는 한국을 매우 우호적으로 보고 있었고 그

처지에 깊은 연민을 갖고 있었지만 대원군이 이끌던 1870년대 조선은 너무나 부패가 만연했고 분열이 심했던 작은

나라였다.

그리피스가 자료를 수집하던 1877년-1880년 한국의 여러 파벌간 싸움은 심히 우려되는 것이었다.
  
  그리피스의 책은 중판을 거듭하고 저자는 계속 내용을 보강해 나갔지만 보다 잘 단결되고 보다 규범화 되어있는

일본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은 생산적인 정치단합이 되어있지 못하다는 게 그의 변함없는 기본 입장이었다.
  
  한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미국에게 일본에 비해 한국이란 나라는 기이하며 뒤떨어진 국민들이고 마지못해

근대화되는 나라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는 데 이 책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1890년대에 씌어진 이사벨라 비숍의 여행기에도 저자는 비록 한국과 한국인들을 매우 좋아하고는 있지만 가난하고

미신에 얽매인 나라로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관련 저서로 외국인이 쓴 책은 한국인이 쓴 것보다 백배 - 혹은 천배가량 더 강력하게 세계여론에 이바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가슴에 그토록 강렬하게 와닿았던 그리피스의 글중 일부를 여기 인용한다.
  
  '1871년 나는 일본 에치(愛知)현 후꾸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해협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해변마을 쓰루가와 미꾸니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고대 브리테인의 색슨해변처럼 이곳 에치현의 해안도 오랜 옛날 맞은편 한국땅으로부터 건너오던 뱃사람, 이주자,

모험가등이 배를 대 상륙하던 장소였다.

이곳 쓰루가로 들어온 한국의 사절단들은 여기서 바로 미까도 궁전으로 길을 대어갔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미마나의 한국왕, 진고(神功)왕후, 오진, 그리고 다께치우치를 모신 사당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일본역사에서 ‘서방의 보물로 가득한 나라’와 관련된 인물들이다.


    만에서 건너다 보이는 한국 땅에 소리가 청아한 종이 하나 걸려있었다.

이 종은 647년 한국에서 만든 것으로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지는 않았지만 원래 금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는

종이라고들 한다.
  
  멀지 않은 곳 산 속에 몇 백년 전부터 종이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그만 동네가 있었다.

주름잡힌 종이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에치현의 오래된 가문 사람들은 조상이 조선사람들인 데 대해 매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온 동네가 모두 ‘바다 건너 고향의 것’에 정통해 있었다. 새와 가축, 과실, 매, 채소, 나무, 농기구류와 도공이 쓰는

물레, 땅이름, 예술, 종교이론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바다 건너 한국과 관련된 것이었다.‘
  
  한때 폐쇄된 사회였던 일본도 그 문호를 열고 세계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한국이 왜 폐쇄되고 알 수 없는 나라로 남아있겠는가?
  
  원문: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코리아 헤럴드 1985.2.9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5>

그리피스 ,페놀로사가 밝히는 일본문화의 근원 ;한국


'한국이 일본예술의 근원임은 추측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입증할 수많은 자료가 일본에 넘쳐난다.

일본 고유의 예술은 9세기에 들어서나 겨우 발아했다.‘
  
  이 글은 1919년 미국인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가 쓴 글이다!
  
  하와이대 대학원 도서실 깊숙이에서 나는 1945년 유엔창립에 즈음해 발간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 전에 쓰인 여러 글을 모은 책으로 저자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이중 가장 뛰어난 글은 역사가인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의 것이다.

그는 1869년 일본에 미국식 학교를 만들러 일본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동경제대에서 10년 간의 강의를 마치고는 한국역사를 책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보다 100년 앞서 그리피스는 부여족이 일본에 확고한 정부를 수립했음을 밝혀 같은 주장을 한 나의 선구가

되었다.

나는 그 시기를 369년으로 못박았는데 그리피스는 그렇게 시기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았어도 근접한 연대를

말했다.

나는 그리피스가 그때 자신의 한국사 연구에 인용할 한국 역사서를 다수 갖고 있었다고 믿는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뒤 과거에 한국으로부터 가르침 받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 나머지 걷어들여 불질러

버린 그 한국사 책들 말이다.
  

 

 

 

백제 성왕(聖王)의 모습을 새긴 이 불상은 수백년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페놀로사가 근대에 공개했다. 일본 법륭사 몽전(夢殿)에 안치된 불상의 아름답고 정교한 청동투조 머리관은 한국것임을 잘 나타낸다. ⓒ프레시안

 

 

 


  그리피스는 ‘1868년 이후 새로운 논리를 발판으로 한 제도가 발동하면서 일본은 언론을 지배하고 강요된 교육,

역사의 날조를 저질렀으며 새로이 조장된 미카도이즘(군국주의)에 반대하는 학자들을 잡아다 벌주기 시작했다’고

썼다.
  
  ‘역사는 편향되고 위조될 수 있다’고 그리피스는 썼지만 예술품들은 진실에 가까운 사실을 말한다.

미술사가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Penollosa; 후일 보스턴미술관 동양미술 학예관)가 1880년대 일본에 있을 때,

일본정부는 그를 예술고문으로 임명하고 일본내 모든 예술품을 살펴볼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는 법륭사에서 근 5백년간 한번도 풀어본 적 없던 비단헝겊보자기 안의 불상이 하나 있음을 알았다.

그보다 몇년전 이 불상을 풀어보려 했는데 하늘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쳐서 승려들은 두려워하고 중지해 버렸다.

이 불상은 ‘일본 불교의 아버지’라는 쇼도쿠(聖德)태자를 새긴 성상이라고 알려져 왔다.(역자 주; 1997년 법륭사의

고문서를 통해 쇼도쿠태자상이 아니라 사실은 백제 위덕왕이 그 부왕인 성왕의 모습을 새겨 일본에 보낸 것임이

밝혀졌다).

그당시 페놀로사는 쇼도쿠태자가 당대 왜국의 정권을 손아귀에 쥔 한국인 실력자 소가 우마코의 조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이 미국인 학자가 불상을 싼 헝겊을 풀어내고 그 화려한 청동투조의 관을 보았을 때 그가 환희에 차서

내뱉은 말은 ‘이것은 한국서 온 보물이로구나!’ 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온통 서양 문물의 유입과 그 산물에 미쳐있었던 그때 법륭사의 보물인 이 불상은 ‘당연히 한국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되면서 사정은 서서히, 그러나 눈에 띄게 변화됐다.

오늘날(1983년) 일본의 학자치고 이 불상을 연구하면서 1882년 페놀로사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솔직하게 한국

것이라고 진실을 밝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실이 분명한 만큼 나도 페놀로사처럼 이 불상을 한국 것으로 확실히 인식한다.

지금 이 불상은 일본 전체의 자부심이자 기쁨이며 성스러운 유물이기 때문에, 그리피스가 일찌기 목격하고

증언한대로 예술사까지를 포함한 역사왜곡의 분위기가 지금까지도 농후하다.
  
  다시 그리피스가 쓴 글 ‘일본이 한국에 진 부채’에 관해 돌아가자. 이 글은 1919년 <아시아 매거진> 8월호에 처음

실렸다.

그 다음 1945년 한국의 주장을 청원하려는 목적의 작은 책자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발행되었다. 더 인용해 보겠다.

 ‘6세기 일본으로 흘러들어온 불교의 물결은 이후 수백년간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해뜨는 섬나라로 들어온 불교는 예술과 문자, 힌두, 중국, 한국의 문명을 담아 온 배달부였다.

그당시 신또(神道)는 조직적인 종파로 강화되던 중이었다.

부족장 미카도가 통치하던 좁은 지역의 야마토는 지금 우리가 일본이라 부르는 큰 나라 이전의 조그만 발아에

지나지 않았다.
  
  근대의 국수적 역사관이나 거짓된 황국신민사상으로 인해 자칫 야마토가 일본전역에 걸쳐 통치했던 것처럼 속기

쉽다.

백제가 552년부터 시작해 일본으로 보내 국가적 경사로 받아들여지면서 쉬지 않고 빛을 발한 열정적이고 절대적인

불교전파는 세계 어디에도 비견할 만한 예가 없다.....‘
  
  불교가 처음 일본에 들어갔을 때 일본은 지금처럼 전국적인 큰나라가 아니고 아리안, 말레이, 유태, 타타르

족속들이 서로 분열하여 서부와 남부에 걸쳐 살면서 야마도의 임금, 미카도의 지배를 받는 집단이었다.

불교유입으로 이들의 정치적 위상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격상했다. 새 종교인 불교를 통해 문자, 저술, 건축, 예술이

들어오고 한국으로부터 깨인 사람들이 수백명 들어와 열심히 왜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들의 절대적 영향 아래 야만 왜인이 인간다워지고 사회와 건설전반이 통째로 변화된 것이다.
  
  야마도국의 문화가 얼마나 왜소한 것이며 반대로 한국이 베풀어준 문명의 세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는 황국신민사상이 팽배하면서 직장을 잃거나 억압당한 일본 국내학자들의 저술이나 외국인의 글을 읽어보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아니면 그 당시 순수한 일본문학이나 문물 자산이 어떤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주는 자 한국의 풍요로움과 받은

자 일본의 빈곤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죽자 고립됐던 일본군들은 본토로 철수했다.

그러면서 한국인 예술가, 장인을 아예 통째로 데리고 돌아갔다.
  
  그리피스는 예술사가가 아니라 역사가였다. 나는 일본이 예술분야에서 한국에 진 빚은 나라(奈良)시대 전체를

망라하며, 8세기 중반에 가서도 하찮은 문명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피스는 한국의 강력한 영향력은 10세기까지 일본에 미쳤다고 한다.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은 일본의 예술사가들이 일본의 보물 법륭사의 근원을 추적하면서 중국, 인도, 그 위에 멀리

로마와 그리스까지 들먹거리면서도 정작 한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 경우 ‘역사의 날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다.
  
  원문: Japan's Debt to Korea 코리아 헤럴드 1983.7.9
  
  “The Korean origin of Japanese Art is not a hypothesis but a demonstrated fact, the overwhelming proofs being in Japan itself..... Original Japanese art did not arise until the ninth century."
  
  These sentences were written by an American in 1919!
  
  In the depths of the University of Hawaii's Graduate library, I discovered a book published in 1945 for the organizational meeting of the United Nations. It contained a complication of articles written previously. Most of the authors are now dead.
  Amongs several surprising ones, was an article by historian William Eliot Griffis, who went to Japan in 1869 "to organize on the American principle."
  He ended up teaching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for a decade abd writting a book on Korean history.
  
  Although of course I'd like to think of my writings as being pioneering a hundred years ago Griffis attributed the establishment of a sound government in Japan to the Puyo. He did not date the Puyo conquest of Japan exactly in 369 A.D. as my articles have, but he came close.
  I believe he had available some books which were subsequently burned by Japanese authorities when they took over Korea and did not wish to hear of any indebtedness Japan might have to Korea, then their colony.
  
   Griffis refers to Japans "new system of dogma, manufactured chiefly since 1868, which has since controlled the press, dominated education and made a 'Camouflage of history, penalizing native scholars and critics who have dared to speak their own minds concerning this new-fangled mikadoism."
  
  
Holy Statue
  
   History may be slanted; it may be "camouflaged" as Griffis wrote, but art projects tell truer tales. When Ernest Fenollosa(later oriental art curator of the Boston Museum of Art) was living in japan in the 1880's, the Japanese government appointed him find art councillor and gave him papers to inspect all the arts.
   He discovered at Horyu-ji temple a statue that had not been unwrapped from its silken coverings for over half a millenium. A few years before when the statue was about to be unwrapped, a clap of thunder had occurred and the superstitious priests had stopped.
  
   This was "a holy statue," said to be modelled after Shotoku, "the father of Buddhism in Japan."(note by translator; 1997년 법륭사의 고문서를 통해 쇼도쿠태자상이 아니라 사실은 백제 위덕왕이 그 부왕인 성왕의 모습을 새겨 일본에 보낸 것임이 밝혀졌다) Now Fenollosa did not know that Shotoku Taishi was the nephew and son-in-law of Soga Umako, a pure Korean Military generalissimo who held Japan in the palm of his hand.
  
   But when the American schlor unwrapped this "holy image " and say its gorgeous open work bronze crown, he cried out in ecstacy, "Of course it's a treasure from Korea."
   In those days, when Japan was crazyabout Western things and Western-type Art, the treasures of Horyu-ji' could be identified as "Korean, of course."
  
   But after the colonization of Korea began, things started to change, slowly but perceptively. Today, no Japanese art historian would write a book and "label" this "holy statue" so frankly as Korean as Fenollosa did in 1882. I, too, have been equally "frank" as it is so obvious, but since those Horyu-ji's statues are now Japan's pride and joy, or it's "sacred cows," there still lingers in the air that 'camouflage of history(incruding art history) that Griffis was eye-witness to in its beginnings.
  
   Let us return to Griffis article "Japan's debt to Korea," which was first published in the August issue of Asia Magazine and later in 1945, reprinted in this slender book which was pleading Korea's cause in 1945 at San Francisco. I quote:
  
   "The sixth century saw an outflow to Japan which did not cease for many centuries. To the Isles of Rising Sun Buddhism was was the purveyor of arts and letters, and of Hindu, Chinese and Korean civilization,
   Than the bare ritual Shinto was forced into something like a systematic cult.... Yamado, a small territory over which the Mikado, or trival head, ruled, was than but the tiny germ of the great empire we call Japan. The general tone of modern native historiography, or pseudo-mikadoism, would have us believe it was the whole area.
   We question whether the world can show a parallel to the relative proportions of zeal and thoroughness of the Buddhist missionary movement, which began from Paekche to Japan A.D. 552 - an event which is statedly celebrated in Japan...“
  
   The Japan of the Buddhist conquest was not, in it's beginnings, the homogeneous nation or empire of today, but a conglomeration of unrelated warring tribes, Aryan, Malay, Semitic and Tartar, with the rule of the Mikado, or head of the house of Yamato, confined to a small area in the center and south.
   This political entity was lifted up, from barbarism to civilization, largely by Buddhism. For with the new religion came letters, writing, architecture, arts and hundreds of civilized men and women of learning and zeal from Korea, with a mighty train of influences that completely transformed its humanity, society and the landscape.
  
   those who will consult the foreign authorities and the writings of those native scholars who have not been silenced or driven out of their chairs by the military bureaucracy and the pseudo-mikadoism on which they fatten, may see for themselves in the native literature the entire inventory and assets of the early centuries, only to realize how poor was the recipient Japan and how rich was the giver Korea.
  
   .....After the death of Hideyoshi, the desolating invaders were recalled, but they brought with them whole guilds and villages of artistic workers.
  
  
An Apt Word
  
   There is more, but space is up. Griffis was historian but not an art historian. I would say that Japan's debt to Korea in art almost total until the Nara period, which in 645 A.D. and became rather negligible by the mid-eightth century. Griffis has the influence of Korea very strong on Japan until even the 10th century.
  
   It is interesting the way some Japanese art histories now trace the influence upon Japan's treasures at Horyu-ji back through China, than India, and all the way to Rome and Greece without once mentioning Korea by Name! Yes, "camouflage" is an apt word.
  
   사진설명 This beautiful openwork bronze filigree crown marks as "Korean" the wooden statue called Yumedono Kannon, or Dream Hall Kwanin, now housed at Horyuji, Japan. The sacred image was not seen for many centuries in Japan.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6>

일본학자들의 부여 기마민족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는 <歷史와 旅行>이라는 잡지사가 기마민족설로 유명한 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를 인터뷰했다.

그의 기마민족설은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우선은 규슈로 와서 정복하고 그 뒤 일본 본토에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바로 에가미는 1984년 지금도 일본의 고고학을 강의하고 기마민족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를 종종 주최하고

있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48년이었다.

그 이전에 그런 주장을 했다간 당장 감옥에 가거나 화형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2차대전 이후에 발행된 에가미의 이

책에 앞서 일찍이 1921년 기타 데이키치(喜田貞吉)가 용감하게 ‘부여는 한국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4세기에 일본으로도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

적어도 한국의 삼국과 일본의 건국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 고 지목했다.
  

 

 

 

고구려를 건설하러 세 신하와 함께 부여를 떠날때 물고기떼가 떠올라 받쳐준 송화강을 건너는 주몽. 1853년 일본 하시모도 그림. ‘은자의 나라 조선’에 실린 그림이다. ⓒ프레시안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민속학자들이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부여족의 이야기가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과 유사함을 주목하고 일본의 건국자에 얽힌 전설과 부여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리하여 기타 데이키치는 기마민족설 이론의 최초주장자가 되었다. 기타 박사는 사망했으나 에가미 나미오는 아직

생존해 있다.(역자 주; 2003년 사망).
  
  1984년 <역사와 여행>과의 인터뷰에서 에가미는 새로운 주장을 펼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는 일본의 건국자가 어디서 왔느냐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가서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고, 잡지사

측은 이에 몽고의 지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에가미 나미오가 원래 만주 동부, 한반도 북부를 부여족의 근거지로

제시했던 것과 다른 것이다.

몽고에서 왔다고 하면 일본 독자들에게 더 먼 곳처럼 들리니 이는 정치적 술수같다.
  
  에가미는 고사기에 나오는, 거북 등을 타고 온 진무천황 이야기를 만주와 관련된 고사로 연계시켰다.

바로 부여에서 주몽이 만주를 가로지르는 송화(숭가리)강을 건너 갈 때 강에서 떠오른 거북이며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그 등을 딛고 건너지 않았던가?
  
  에가미나 기타의 이론에 이처럼 역사적 괴리가 발견되는 것은 우물안 개구리같은 일본에서 세계사적인 안목으로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이 이들 모두에겐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발호하고 한국은 고작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그 시기에 이들은 용감한 학자들이긴 했다.

일본의 여타 학자들은 일본왕실의 혈통이 일본 아닌 대륙에서 온 것이라는 이러한 주장에 맹렬하게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시다 아이치로는 1948년의 세미나에서 왜족(和族이라는 것)은 한반도 남부와 일본의 서부 일대를 지배했다고

했다.

이 주장은 요컨대 대구에서 부산 사이 낙동강을 따라 뻗친 지역의 가야라고 불리던 왕국의 국민이 가야왜라는

것이고 이들이 스진천황 치하의 규슈를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이시다는 스진천황때 한두차례 침입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나의 저작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에서는 스진조의 일이 언급돼 있지 않다.

내가 몰라서 생략한 것이 아니라 책이 원래 세 권 한 질로 예정돼 있었는데 369년 부여기마족의 왜 정벌을 강조하고

한국인의 왜국 이주를 중점적으로 다루다 보니 스진때의 일이 빠진 것뿐이다.
  
  오늘날 그 옛날 일을 실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본 왕실측에서 고대사에 반(反)일본적인 증거가 될 고분 발굴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고분에서 나오는 부장품이 한국의 신라 경주나 백제 공주에서 발굴되는 것과 같을까봐 겁내고 있는

것이다.
  
  1984년 11월 <역사와 여행>에 실린 내용은 오래된 고대사를 다루면서 만주지역을 몽고로 변조했다.

에가미 나오미는 절망했을 것이다.

일본서 내쳐 살고 있어서는 이러한 고대사 주제에 관한 한 학문연구는 진척될 수 없다.

에가미 책의 최신판은 아무 이유도 설명도 없이 선사시대에서 원시시대로 비약하고 있어 1948년 초판 당시 대담한

주장이라 하여 적들로부터 공격받던 책이 고작 역사적 고물같은 이 책인가 의아할 따름이다.
  
  이 방면의 새로운 국면은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치는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로부터 나왔다.

레저드는 에가미의 겁먹은 역사관과 횡설수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한국어지식을 활용한 부여기마민족설 주장을

새로이 했다.

그는 부여가 송화강 유역에 있었음을 말하는 많은 자료를 제시하면서 이들이 일본에 와서도 곳곳에 부여라는 지명을

만들었으며 ‘바위의 후손들’인 부여족의 종교가 왜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박식한 학자인 에가미 교수에게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매우 엄격한 역사가의 입장으로 그 특성상

당연히 역사의 여러 시대를 망라하는 예술사를 학문이 아닌 일반론으로 격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82년 하와이대학에서 그가 주재하여 개최한 기마민족 세미나는 별 특별한 성과없이 끝났다.

에가미 교수는 그 주제를 다루는 데 지친 것처럼 보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은 이 주제를 다시 활성화시키고 문제가 고작 식민통치시대에 있는게 아니라 일본이 한국에

그처럼 신세졌던 고대로 눈을 더 돌려보게 했다.

이 문제는 그다지 학문적이지 못한 통속잡지에 다뤄져 끝나거나 겁먹은 책자발행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와 여행>에는 히로시마 대학 마에쯔미 히사카즈교수의 글도 싣고 있다.

그는 여기서 ‘도래한 부여인들은 북규슈에서 권력을 잡고 오진천황시대에 오늘날의 나라 오사카지역인 기나이(畿內)

지방으로 들어와 야마도를 통일했다’고 썼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는 바이다.

전체적인 진실을 걸러내기 위해서는 기타 데이키치, 에가미 나미오, 마에쯔미 히사카즈와 개리 레저드의 연구

외에도 부여 기마민족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덧붙여져야 비로소 확실한 명제로 정립될 것이다.
  
  그러나 나라 오사카 일대에 산재한 고분의 발굴이 일본정부의 반대로 전혀 발굴될 여지가 없어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전체적인 개요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미 북규슈와 가야, 경주, 백제지역의 발굴 및 기나이지방의 우연찮은 발굴만으로도 4세기 후반

일단의 기마족이 한반도 김해에서 떠나 일본에 침입한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규명할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천관우(千寬宇)가 한반도에서 떠나 일본으로 간 기마민족 정벌론을 못박는 중요한 논문을 썼다.
  
  원문 Horserider Theory Draw Attention 코리아 헤럴드 1984.9.22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7>

개리 레저드와 코벨의 부여기마민족 정벌론



미국 컬럼비아대학 개리 레저드(Gari Ledyard)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든 것은

한국인들이었다.

일본의 전통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712년 찬)와 <일본서기(日本書記)>(720년 찬)에 대한 비판은 1878년 처음

제기되었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도 별 진전이 없다.
  
  일본에 군국주의가 뿌리내리던 1920년대와 우경화된 1930년대에 학자들은 천황의 ‘신성한 족보’를 캐는 일을 저지

당했다.

1940년 전후해서 서기전 660년의 일본 건국을 기념하는 세계 42개국 대상 에세이 공모전이 있었는데 바로 필자가

여기서 ‘시부미(절제된 미)’ 라는 글로 상을 탔다.
  
  2차 세계대전 끝무렵에 가서 고대사학에 숨통이 트여 한 일본인 학자가 용감하게 서기전 660년의 일본 건국은

사실이 아니며, 진무(神武)천황의 존재도 허구이고, 4세기에 기마민족이 왜를 침입해 왔음을 선언했다.

기마민족이란 물론 한국인들이었다!
  
  에가미 나미오가 그 장본인이었다. 그의 아들은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4세기 기마민족의 일본 침입’이란

예술사를 연구해냈다.

이로써 이 방면의 학문에 있어서 일본보다 미국이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
  

 

 

 

오사카 부근 닌도쿠(仁德)천황의 거대한 능묘. 일본서기에 닌도쿠왕의 선대 임금인 오진(應神)은 그 어머니 신공왕후가 한국을 정벌하고 12개월만에 출산한 아들이라고 한다. 물론 이 사실은 변조된 것이며 신공왕후란 여성왕족은 부여기마족이 한국에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 규슈를 정벌하고 왜국의 지배자가 됐을 때 한 전환점을 이룬 인물을 말한다. 닌도쿠 왕릉을 과학적으로 발굴 조사해보면, 이 글에서 언급된 한국과의 연관성을 말해주는 굉장한 유물들이 출토될 것이다.
ⓒ프레시안

 

 

 


  나라시대에 왕의 명령으로 일본의 초기역사서를 편찬했던 역사가들은 일본 왕가의 계보가 신의 시대에서부터

내려온 것으로 각색했다. 그때의 일본 왕실은 만세일계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있었다.
  
  역사학자가 아니라 예술사가인 본인이 아는 일본 왕족간 형제자매 살해만 해도 여러 건 이다.

14세기 고다이고천황(後歸; 재위 1318-1339)은 장자로서 상속받은 천황이었지만 현행 천황가계는 그의 동생가계에서 내려왔다.

장자상속이 최우선시 된다면 이는 불법이다.
  
  천황이라는 호칭도 최소한 8세기 이전의 왕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중국식의 이런 칭호는 8세기에 비로소 개시되었다.

실제로, 8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 왕실은 전적으로 한국의 감독ㆍ후견 아래 있었다.
  
  잡다한 부족들의 집합체가 하나로 통일되어 왜에 처음으로 중앙집권정부가 들어선 것은 부여기마족의 침입으로

생겨난 한국커넥션이었다.

이들 부여기마족으로 왜를 다스린 첫 임금은 순수 부여기마족 혈통의 호무다왕, 즉 오진천황이란 왕이었다(호무다는

오진의 다른 이름).
  
  나중에 부여기마민족의 자취를 없애려고 일본역사학자들은 이상한 논리를 적용했다.

그들은 오진천황에 대해 쓰기를 그 어머니 신공왕후가 한국을 정벌하면서 출산을 늦추기 위해 자궁에 돌을 끼워

막았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12개월만에 낳은 아들이고 오진은 왕이 되어 130살을 살았다고 썼다.

물론 이것은 한국의 부여기마족이 규슈를 거쳐 일본 본토를 정벌한 것을 역으로 뒤집어서 쓴 것이다.
  
  부여족의 왜정벌은 일본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백여년간 지속된 부여족 지배는 일본에 처음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물론 이 당시엔 한국인이나 일본인 모두 문자가 일반화되지 못했고 침략한 쪽이나 침략 당한 쪽이나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여 가는 와중에 일어났던 어렴풋한 고대사가 됐을 뿐이다.
  
  이 때문에 8세기 나라의 사가들이 한국으로부터의 침입을 없애고 반대로 왜의 한국침입으로 바꿔서 설정한 것은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3세기 중국의 사서 위지(魏志)가 이 시기 왜에 말(馬)이 없다고 기록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일본 나라ㆍ오사카 지역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거대고분이 시사하는 것도 통합된 집권체제 아래서 부여족들이 수많은 전쟁포로를 동원해 거대고분축조라는 노역을 이끌어냈으리라는 것이다.

거대고분 중에도 369년 직후의 왕릉인 닌도쿠왕 무덤이 가장 크다.
  
  1973년 나는 나라지역의 가장 오랜 마을 후루를 방문했다.

레저드 교수는 후루를 부루, 혹은 부여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단군과 부여, 일본족 전설사이에는 연관이 있어 보인다. 또한 양국민 모두에게 ‘바위’는 중요한 상징이다.
  
  부여의 발자취는 한강에서 내려와 가야를 거쳐 규슈로, 그리고 동정(東征)하여 야마도평원까지 뻗쳤다.

그들은 너무 산재해 있었는데다 북방의 고구려 등으로부터 군사적인 위협을 받았다.

이때 왜국에 와있던 부여족들은 아마 부여를 도우러 바다 건너 구원군을 보냈을 것이다.

곧 부여족들에겐 왜국에 마련한 근거지가 가장 강력한 거점이 되었다.
  
  그래도 부여족들은 5세기 말까지 가야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의 부여왕들은 가야의 귀족집안과 혼사를 맺었고 이는 8세기 일본의 역사가들이 상황을 혼돈하기 딱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가들은 분열을 겪고 있는 일본왕실에 기록상으로나마 만세일계의 왕통을 꾸며내느라 골치 아플

때였던 것이다.
  
  규슈에서는 좀 더 오래 부여혈통의 통치권자가 군림했다.

그러나 한반도에 근거를 둔 부여족들은 점차 쇠락하다가 마침내 결단나버렸다.

6세기에 와서 부여와 비부여(또는 和族이라 불리는 혈통)는 타협하고 드디어 일본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원문: Korean Connection in Origine of Japanese State 코리아 타임스 1980.6.15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8>

북한 김석형의 논문 <삼한삼국과 일본 열도>



개인적으로 나는 반공산주의자이다.

공산정권이 권력을 잡은 나라마다 모두 수백만의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해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알바니아처럼 작은 나라에서조차 실제 결과는 끔찍한

것이었고 북한의 경우도 전쟁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을 통해 얼마나 좋지 않은 곳인가가 밝혀졌다.

공산정권은 무산계급의 통치가 아니라 권력에 굶주린 소수집단의 집합일 뿐이다.
  
  그러나 학문연구를 생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출처가 어디든 학문적 사실이나 의견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은 남북한 문화교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남북한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인 나는, 일본식 교육을 받고 그 학문방식을 계속 견지하고 있는 서울의 몇몇 엘리트 교수들과는

의견을 달리한다.

그러니만큼 민감한 사안인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북한 최고 학자의 학문적 입장이 어떠한지를 들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오직 두 분 학자만이 나의 존재를 인정할 뿐이다.

1982년 그중 한 교수가 1969년 도꾜에서 발행된 북한 사학자 金錫亨(1915-1996; 김일성대학 교수, 북한 사회과학원장)의 논문 ‘일본열도내의 三韓 三國의 분국론’ 복사본을 보여주었다.

혹시 실수가 있을까 저어하는 마음에서 나는 교또의 전문 번역가에게 부탁해 중요한 골자들을 발췌해 읽었다.
  
  김석형의 논문은 규슈 북부에 위치했던 일본내 고구려 식민지에 보다 큰 비중을 부여한 것만을 제외하고 그 기본

입장은 본인이 그간 주장해온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부여족이 일본에 와닿은 서기 369년을 기술하지 않았을 뿐 연대까지도 똑같았다. 그의 논문을 요약해본다.
  
  ‘서기전 3-2세기, 한국인들은 일본 서부로 이주하여 농경민으로 정착했다.

이들은 일본원주민들에게 철제기구의 사용과 논농사를 포함한 새로운 농업기술을 선보였다.

한국인들은 한데 모여서 살았는데 이는 곧 자치구 내지는 왕국의 규모로 발전했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이 형성되는 과정에 빈번한 전란이 벌어지곤 했으므로 이에 질린 한국인들이 점차 일본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 원주민들에 비해 한국인 집단 거주지는 훨씬 선진화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곳이 되어갔다.
  
  서기 2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한반도에서는 백제 신라 고구려가 입지를 굳히며 점점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 하는

동안 일본에는 수많은 한국인 식민지 촌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본국인 한반도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4세기에 들어 일본내의 한국식민지는 보다 강력한 정치적 집단이 되었으며 그중 3군데의 중심 세력이 존재했다.

1)은 나라를 중심으로 일본 동부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가야이주민들이었다.

2)는 이즈모와 기비지역의 신라이주민들이고

3)은 규슈북부를 차지한 백제인들이었다. 이들 세 지역은 말 그대로 일본내의 한국식민지였다.
  
  서기 5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일관계에서 한국은 언제나 선두역할을 담당해갔다.

일본이 대화왜(大和倭)로 통합되었을 때도 한국인 후예들은 강력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들은 서기 600년부터 650년사이 본국과 단절되고 모두 ‘야마토’로 유입되었다.

600년경부터 야마토는 한반도 삼국과는 별개의 국가로 한일관계를 생성하기에 이르렀다. ‘
  
  독자들이 그동안의 칼럼을 주의해 읽었다면 본인이 지칭한 ‘부여’가 김석형의 논문에서는 ‘가야’로 대치되었음을

알아챌 것이다.

여기에 서기 369년이라는 연대가 명기되기만 했다면 평양 김석형 교수의 주장은 나의 주장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

된다.

김 교수는 저간의 변화를 매우 점진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은 375년에서 400년 사이에 있었던

급격한 변화의 증거를 보이고 있다.
  
  나의 일본인 번역자는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소견을 적어 보냈다.
  
  ‘일본의 학자들은 이같은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대신 이들은 고대에 강력하고도 유일한 집단으로 ‘왜국’이 일찍이 존재했으며 이들의 권력은 한반도를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믿는다.‘
  
  똑같은 역사기록을 놓고서도 일본학자들은 이렇게 북한 김석형의 견해와는 다른 주장을 편다.
  
  내 생각에 일본인들은 9세기에 들어와 가나글자를 사용면서부터 일부 불교계 승려를 제외하고는 중국한자의

해독능력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반면 한국인들은 근세까지 한자를 써왔다.(최근에 와서는 벗어났지만).

오늘날에는 일본의 승려들도 고대 중국한자를 읽어내는 데 어려움이 많다. ‘

역사기록’을 말하는 사서는 3, 4, 5세기의 중국한자로 쓰여진 것이다. 나로서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 아직 ‘한국’

대 ‘일본’ 이라는 국가관이 표면화되기 이전, 영국과 미국의 유수한 학자들이 한문 ‘역사기록’을 영어로 번역해낸

판본을 가지고 본다.
  
  일본학자들은 한국학자들에게 결코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영국이나 미국등 제 3국 학자들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고대일본사에 대한

일본학자의 국수적 면모를 쇄신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일본학계도 일본의 고대문명은 전적으로 한국이라는 틀에 담겨서 유입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원문 Pyungyang's views on early Korea-Japan Relations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19>

백제의 칼 칠지도와 천관우


1984년 9월 말, 사학자 천관우 선생과 본인, 그리고 본인의 아들 알란 코벨은 한국일보 건물에 있는 천 선생 사무실에서 한시간 남짓 한국고대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세사람은 기마족들이 일본에 들어갔다는 기본적 사실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 시기가 언제이며 어떤 방편이 쓰였는지는 오사까-나라지역 일본왕들의 고분이 발굴되지 않는한
 확인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100퍼센트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했다.

현재 상황으로 보아 나라 고분발굴 허가를 얻어내기는‘최근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히로히또 일본왕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로 보인다.
  
  천관우 선생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천 선생은 진구고꼬(神功皇后)를 일본에서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쓴 사가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본인과 알란 코벨은 최근 출판된 본인의 저서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 책 한권을 천

선생께 증정하였다.

이 책에 자세히 나와있는 진구(神功)의 일생과 그녀가 어떻게 해서 서기 369년 바다건너 일본땅을 정벌하러

기마군단을 이끌고 나섰는가를 천선생이 이해해 주기 바래서였다. 천선생은 또한 우리에게 한일 고대사에 관한

당신의 저서를 증정했다.
  
  현대 한국인들은 일개 여성이(당시에는 무녀왕녀였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정복군을 이끌고 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 한다.

그러나 일본사서에 나와 있는 대로 그 성격을 분석해 보면 당시 그같은 일이 가능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주자학이 그토록 강세를 떨치기 이전 지도자가 된 한국인 여성은 여러 명이 있다.
  

 

 

 

일본 이소노가미(石上) 신궁에 소장된 칠지도 전체사진 및 명문이 새겨진 부분. 칼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어 그 근원도 여러 가지로 말해지고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이 칼이 백제로부터 신공왕후에게 내려진 하사품임을 밝혀놓고 있다. 부여박물관에 복사품이 진열돼 있다. 길이 74.5센티. ⓒ프레시안

 

 

 


  우리 세사람이 완전히 동의했던 사실- 일본 신또(神道)에서 가장 신성한 보물로 여겨지는 이소노가미(石上)신궁

소장의 칠지도(七支刀)에 대해 좀 더 말해보자.
  
  맥아더장군은 일본에서 신또신앙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 시도는 자이바츠(財閥)를 못 없앤 것처럼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날 일본재벌은 완전히 되살아났으며 신또에 대한 외경은 ‘살아있는 신’으로서 일본 왕가에 대한 경배로 나타나고

있다.
  
  이세신궁에는 그 옛날 천조대신(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이 일본왕가에게 왕권의 표시로 내려주었다는 동경이 소장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동 거울은 일본, 한국, 중국에 수없이 많은 물건이지만 과거 고대 한국인들의 일본 거주지

아스카 부근 이소노가미신궁의 칠지도만큼은 유일한 것이다.
  
  일본에서 어느 누구도 이 신성한 칼을 절대 볼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렇지만 한국 부여박물관 중앙전시실에 이 칠지도의 모사품이 전시돼 있다.

부여박물관이 일본에 요청하여 정확한 모사품을 만들어 왔는데 그 이유는 칠지도 칼등에 금으로 새겨진 ‘백제 왕세자’

란 글짜 때문이다.

아마도 ‘금상감됐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 명기된 연대는 서기 369년을 가리킨다.
  
  이 칠지도는 이곳에 단 하나 뿐으로 한국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의 어용학자들은 칠지도의 명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일합방 기간인 191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이 칼의 명문은 의도적으로 파괴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 369년의 연대에는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천관우선생이 이 칠지도의 한자명문을 읽어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 칠지도는 이를 지닌 사람에게 어떤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피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를 속국의 지배자에게 보낸다.(즉 속국에게 선물을 만들어 보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뜻).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이를 만들었다”
  
  물론 일본의 모든 학자들은 이 명문에 나와있는 ‘속국’을 일본이 아닌 백제로, ‘지배자’를 야마도왕국으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절대 그럴수 없는 명백한 이유는 바로 서기 369년 백제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정점에 올라있던 때였다는 사실이다.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평양을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다.
  
  이 당시 일본사회는 아주 미약한 상황에 지나지 않았으며 무녀왕녀인 진구고꼬와 그의 군사,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심가들이 막 속국을 건설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천관우선생은 중국기록에 나온 백제항목을 펴보였다.

그 기록에는 당시 백제가 5개의 속국을 거느리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일본은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일본 이소노가미(石上) 신궁 ⓒ프레시안


  이 비범한 칼이 어떻게 돼서 왕실의 장막 뒤에 가려져있게 되었는지, 칼은 왜 7개의 곁가지가 달려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아무 설명도 할 수가 없지만 1983년 한국무속에 관한 두 권의 저작을 낸 나의 아들은 아주 간단명료하게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경주출토 금관은 모두 7개의 가지를 주요 장식으로 지니고 있다(한두개 금관은 9개 가지를 지녔다).

이 장식은 무속에서 말하는 ‘우주수목’을 나타내는 것이며 7개의 곁가지는 시베리아 전역에서 부족에 따라 신앙대상이 되는 무속의 7천(天)세계, 혹은 9천(天)세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높은 신격일수록 높은 자리에 깃들인다는 것이다.
  
  백제의 칠지도나 7개 내지 9개 가지를 지닌 신라경주출토 금관은 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전, 위로는 왕에서부터

군신과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속신앙을 믿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들의 종교 샤머니즘을 ‘민간신앙’이라고 격하시킬 이유가 없다.
  
  당시의 샤머니즘은 매우 강력한 힘이었고 가장 뛰어난 장인들이 이 땅에서 나는 풍부한 금을 가지고 생전에나

죽어서나 무속의례의 집전자인 왕을 위한 갖가지 금장신구를 만들어냈다.

20세기의 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이 그 때문에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서기 720년 나라의 왕실에서 제작한 일본역사서 일본서기에는 칠지도가 서기 372년 신공왕후에게 전해진 백제의

하사품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720년까지 350년의 세월동안 일본은 문자기록이란 걸 갖지 못한 때였으니 연대가 3년 빗나갔다 해도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어보인다.
  
  우리는 이 칠지도가 백제 왕세자(전장에 나가있던 부왕 근초고왕을 대신해; 근초고왕은 그후 얼마 안 돼 사망했다)

로부터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하러 나선 신공왕후에게 장도를 축하하는 뜻으로 하사된 것이었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3년후인 372년 신공의 장거가 성공했음을 축하하는 뜻에서 내려진 선물이라고 믿는다.
  
  원문 Horserider Exponents agree, Disagree 코리아 헤럴드 1984.10.3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0>

한국역사의 3분의 1은 일본에 있다.


 1979년 정신문화원에서 열린 첫 번째 한국학 국제학술회의에서 필자 생각에 가장 신선했던 것은 전혜성 미국 예일대

학 연구과정의 지도교수였다. 조용한 여성으로 여섯명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학업열정을 놓지 않았다.

(역자 주; 클린턴행정부때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를 지냈고 최근 예일대 법과대학원 학장으로 선임된 고홍주씨의

어머니). 19살에 한국을 떠나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고 일본어도 능통한 그녀는 마음속 깊이 한국인이고 또 아주

여성적이었다.
  
  전혜성은 한국인의 생활 양식에 관한 자신의 모든 연구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둔(1979년에) 연구방식을 개진하고

있었다.

예일에서 전교수는 ‘비교 관점에서 본 문화적 차이에서의 남녀 역할’ 과목을 강의한다.

유교권의 한 면에 이런 고급강의를 하는 여성도 있다!
  
  전혜성이 언급한 말 한마디는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한국역사의 3분의 1은 일본에 있다!’
  
  나는 ‘아스카예술’로 불리는 백제불교미술이나 100여점에 달하는 고려불화가 일본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
있는 등

한국예술의 상당부분이 일본에 넘어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혜성의 단호한 주장에 동조하여 그 사실을

절감했다.
  

 

 

 

전혜성 미국 예일대학 연구과정의 지도교수
ⓒ연합뉴스

 

 

 


  교토시립예술대학의 우메하라 교수는 발제강연에서 ‘일본은 초기 역사를 좁은 안목과 국수적 시각으로 일관하고

있어 7세기 한국이 원시적이고 후진사회이던 일본에 얼마나 자극이 되었는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7세기 일본이 백제와 신라에 얼마나 많은 덕을 입었는가를 지적하면서 마치 광야에서 외로이

울부짖는 것처럼 고독했지만, 우메하라 교수의 같은 주장을 듣고나니 가슴이 따뜻해졌다.
  
  나는 ‘일본 중세의 유명한 승려 이뀨(一休)의 어머니는 한국여성이었을 것’이란 주장을 했는데, 그 일본학자가 이에

동의하는 것을 보고는 또 한번 고무되었다. 나는 얼마전 일본의 선승이자 논객인 이뀨에 대한 저작을 출판했다.

그의 어머니가 한국여성인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심장하다.
  
  회의에 참석한 외국인 한국학 학자 일행은 서울에서 경주, 부산까지 다녀오는 동안 몇가지 주제로 정말 열띤 토론을 했다. 그중 하나는 한국인이 1979년 현재 미국 LA에 정확히 얼마나 살고 있나 하는 것이었다.

어려서 내가 LA에 살 때 그때는 한국인이 하나도 없고 일본인과 중국인은 많았다. 1979년 지금은 달라졌다.

누구는 LA에만 40만 한국인이 산다고 주장하고, 누구는 전 캘리포니아를 통털어 한국인은 10만 정도라고 했다.
  
  1979년 인구 통계를 보면 누구 말이 옳은지 알겠지만 사실상 인구통계란 그리 정확한 게 아니라는 지적도 나왔다.

그외 뉴욕이나 필라델피아 같은 곳에 사는 한국인은 얼마나 되는가도 얘기거리였다.

이번 국제회의를 최종 정리한 자료가 나오면 보다 정확한 정보가 알려질 것이다.

그래도 모두가 동의한 것은 한국인이 가장 많은 곳은 LA이고 그 다음은 호놀룰루라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필라델피아 거주 한국인이 이 방면의 권위자인 발표자가 말하는 수치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발표자는 최대 관심이 ‘한국불교의 절대적 표상인 석굴암’ 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그 말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요구하는데 답하지 못했다.

(역자주; 한글판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책에 코벨이 쓴 원고지 3백장 분량의 ‘석굴암에서’를 참조할 수 있음). 

원문 Discovering 'Roots' 1980.1.5 코리아 타임스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1>

최태영의 연구 일본국의 시원.



 이 글은 최태영 저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2002년 눈빛출판사 발행)에서 ‘일본국의 시원’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일본내의 고대사 인식을 성찰한 국내학자의 연구 중 하나로 소개한다. 편역자
  
  일본측의 연구로 최초의 주목할 사실은 1916년경 기다 사다기지(喜田貞吉)가 일본 왕실의 조상이 부여,
백제계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교토대학의 우에다(上田正昭)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기다의 귀중한

문제제기는 당시 군국주의의 대세를 깨뜨리지는 못했다"라고 말했다.
  
  패전후 군국주의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진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의 농경 기타 모든 산업과 종교, 학문, 예술, 국가의

구성, 사회의 발전 등 모든 분야에 걸친 대변화를 한국인이 일본에 건너간 것과 관련시키는 연구가 많아졌다.
  
  1948년 도쿄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일본국가의 기원과 정복왕조』에서 ‘부여 고구려계의 도래인 진왕

(辰王) 등이 일본을 정복하고 일본 왕실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마민족국가설이 널리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견해는 기다(喜田貞吉) 설의 현대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전기(前期) 고분 문화시대 일본인이 자주적인 입장에서 기마민족적 대륙북방계 문화를 받아들여 그 농경민적인

문화를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부터 직접 일본에 침입해서 왜인을 정복, 지배한 어떤 유력한 기마민족이

있어 그들이 대륙북방계 문화복합체를 가지고 와서 일본에 보급시켰다고 생각한다. “  

 

 

 

독서 중인 최태영 선생(2001년 11월) ⓒ이창성

 

 

 


  에가미가 말하는 기마민족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부여 고구려족 계통, 즉 한국의 삼국이 가야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정복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여는 예맥 조선족으로서 중국의 지배권에 들지 않고 독립해 있으면서 흥망을 되풀이 하다가 고구려에 합쳐져

주로 고구려와 백제의 시원이 되고 일부는 가야를 거쳐 왜국으로도 가서 일본국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에가미는 자신의 학설이 기다의 재판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이들이 가야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일본에 도래한

것처럼 어물어물한다.
  
  일본서기(日本書記), 고사기(古事記)에는 외래의 천신(天神)이 일본에 내려와서 그곳에 원주(原住)하던 국신(國神)

을 정복, 지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천신이 일본에 내려온 지방은 이즈모(出雲)와 츠쿠시(筑紫; 지금의 후쿠오카)

두 곳이다.

이즈모에 내려온 것은 스사노오노 미고도(素盞鳴尊)와 그 추종자들이고 츠쿠시에 내려온 것은 니니기노 미고도

(瓊瓊靈神)와 그 추종자들이었다고 한다.
  
 그 전자의 종말이 소위 국양(國讓; 스사노오노가 천조대신에게 우위를 내어준 사실)이고 후자에 의한 것이 천신강림

인데, 이것은 외래민족이 일본열도에 원주한 국신, 왜인을 두 곳에서 정복하거나 회유하여 지배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천신이라는 외래민족이 조선 남방에서 온 것은 지리적 관계뿐만 아니라 일본서기, 고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사실이다.

니니기가 처음 내려왔다는 츠쿠시의 구시후루다게(久志布流多氣)는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처음 내려온 김해

구지봉(龜旨峰)과 그 음이 같다.
  
  또한 후루는 한국어로 촌의 뜻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구시후루가 소호리(添)라고 되어 있다.

소호리는 백제의 수도를 소부리(所夫里),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徐羅伐), 현재의 수도를 서울이라고 하는 것처럼

왕도를 의미하는 한국어이기 때문에 일본어로는 그 의미가 통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어로는 쉽게 또 합리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만 보아도 그러한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해지는 대로 대화조정 천황가의 조상인 천신이 남한에서 북규슈로 건너와서 그곳에 일본

최초의 거점을 두었다고 추정되며, 몇 대 후에는 기나이(畿內)로 진출하게 된다.

이같은 진무(神武)의 동정설(東征說)과 건국설화가 부여와 그 종족인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천신인 외래 민족, 특히 그 천손계가 일본에 건너온 행로와 그 주역(主役)을 보면 그 행로는 동만주와 부여 고구려

에서 가야 임나를 거쳐서 일본의 북규슈 츠쿠시를 지나 기나이(나라, 오사카, 교토)로 더듬어 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의 주역은, 남한에서 일본 북규슈에 강림할 때에는 니니기이고, 북규슈에서 기나이로 동정할 때는 진무가

아니라 스진(崇神)이라는 것이 일본의 다수설이다.

또한 천신(외래민족)이 조선에서 북규슈로 이동할 때(제1회 왜국 건국)의 주역이 스진이라면 북규슈에서 기나이로

진출할 때(제2회 왜국 건국)의 주역은 오진(應神)이라는 것이 유력한 학설이다.

미즈노(水野祐), 이노우에(井上光貞) 등의 추정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일본 고대사에는 스사노오노 미고도(素盞鳴尊)가 소머리(소시머리)에 거주하다가 일본 이즈모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반도의 소머리(牛首)가 민족이동에 따라 지명을 옮긴 것으로 생각할 때, 소시머리(소머리)는 일본인들의 본래의

고향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제3대 단군 가륵 때 반란을 일으켜 소머리에서 사형당한 자가 있었는데, 그의 후손 샨(陝野奴)이라는 자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국왕으로 칭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36대 단군 매륵 때 섬승노(협야노, 배폐명, 샨)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을 모두 쳐서 평정했다는 것이 단군세기

』와 『태백일사』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 고사에 배폐명이 왜 열도에 가서 왕이라고 일컬어졌다는 사실과, 왜 열도를 모두 토평했다는 부분은 특히

기억해둘 일이다"고 일본의 신진 학자 가시마(鹿島昇)는 주장하고 있다.
  
  가시마는 일본의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인의 최고 조상 니니기가 츠쿠시 히므가(日向)의 다가지오(高千穗; 北九州

宮崎縣의 큰 산) 구시후루 산봉우리에 강림하여"이 땅은 한국을 향하여 있는 고로 매우 길한 땅"이라 하였다.

그것은 한국이 일본사람들의 고향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일본에 왔다.

역사의 텍스트도 가지고 왔다고 이해가 되는 것이다"고 해설하고 있다(『역사와 현대』 일본신화 연구 3,

자유국민사, 1980).
  
  토지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지명을 가지고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명을 바꾼 것으로, 지명을 옮겼다는 것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옮겨갔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다.

미국의 뉴요크는 영국인들이 요크에서 이주한 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일본에는 가야의 지명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무수한데,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카모도(高本政俊)의 저서 『가락국과 임나국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은 일본인의 성씨와 지명 및 일반 명사

중에 가야와 관련된 것을 4백 개나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들 韓人 조상의 시원을 밝히고 있다.
  
  에가미는 『기마민족국가의 일본 통일국가와 대륙 기마민족』에서 조선에서 건너간 집단이민, 야마도 조정의

현저한 현상이던 도래인 및 귀화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화조정 국가가 왕실, 즉 천황씨를 중핵으로 한 여러 호족은 정치적, 군사적 연합체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선 반도인은 여러 사정으로 개인적으로 일본에 건너와서 이미 정착한 사람도 옛날부터 많았지만, 5세기 초

이후에는 집단 이민의 형식으로 계속 건너와서 귀화한 사람이 주체가 된 것은 확실하다.
  
  일본에 정착한 그들의 기술과 지식으로 고대 일본문화와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그들은 많은 경우 본국의 통솔자들과 함께 특이한 집단으로 거주하였는데, 그들보다 먼저 일본에 건너와

야마도조정에서 이미 상당한 지위를 얻은 자들을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하며, 집단들은 각지에 분화, 분산해서 여러

호족에 속하기도 했다.
  
  그들은 5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서 계속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 전체적인 규모와 숫자들을 살펴보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지배층을 형성한 성씨,

즉 중앙정부에서 인정한 정치적 자격을 갖춘 가문의 일람표이다.

좌우 서울과 기나이만을 기록했지만, 전체 1,059개의 성씨 가운데 조선에서 건너온 것이 324개로 약 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많은 숫자의 집단적인 조선인들의 존재는 대화조정 국가 자체의 상태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마민족국가에서는 이러한 대규모의 집단 이민이 일반적인 현상이어서, 정책적으로 외부세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경제적, 문화적으로 외국인을 가능한 한 이용한다는 것을 그 방침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 고대 일본에는 특정한 민족이나 종족만이 귀화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민족들이 귀화해 왔다.

따라서 조선계의 사람도 백제, 임나, 신라, 고구려 등 그 출신 지역과 태생이 다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에서 널리 읽혀지는 일본 역사책 구라다(倉田康夫) 편 『일본사요설(日本史要說)』(동경당, 1976)에서 주쿄

(中京)대학의 히라다

(平田伸夫)는 백제로부터 각 분야의 학자들이 일본에 초청되어 간 사실을 기재하고 "6세기초…

일본 천황의 주변은 귀화한 지식인들이 차지했다.

대담한 추측을 해보면 천황가도 도일계 씨족이었을지 모른다"고 기술했다.

이어서 그것은 어찌했거나 유교에 의한 정치사상, 국사의 기록, 양잠, 기직, 토목, 농업, 토기 제작 등 모든 기술이

장족으로 진보해서, 야마도 조정의 대규모 고분 조영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밖에 야마오(山尾幸夫)의 저서 『일본국가의 형성』과 그의 논문 「일본 고대 왕권과 도래인」에는"이전의

귀화인, 도래인은 일본 왕권의 봉사자였다는 정도가 아니고, 도래인이 중심이 되어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ꡓ는 내용이 있다.
  
  인류학자 하니하라(埴原和郞)는 야요이 시대부터 나라시대에 이르는 약 천년 동안에, 대륙으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라는 측정 통계보고서를 발표해서 대량집단이 이주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도쿄대학 『인류학』 잡지, 고대일본 이주자수 추정, 1987). 일본인의 조상 중에 한인(韓人)이 많다는 것은 오늘날

일본인의 24퍼센트가 한인계라는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의 유전자 연구 설명으로까지 확인된다.
  
  일본의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가 1985년 방한하여 "일본이 아직 미개했던 야요이문화 후기에 한인에 의하여

쌀농사문화를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가 북규슈에 들어와 대변화가 일어났다.

백제로부터 도래한 한인 20만 명이 일본 율령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은 한국인이다"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옛날에 한인이 얼마나 많이 도일하여 일본국가와

 문화 건설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다.
  
  이밖에 수많은 연구 결과가 한인의 집단이주와 문화 전달의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2>

신공황후와 아리나래강-바다건너 왜로.


 왕녀의 남행
  
  서기 346년, 선비족의 침입으로 초토화된 삶터를 떠나게 된 한 무리의 부여족이 지친 행색으로 남쪽 한반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용맹한 부여족으로서, 적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가지 않고 살아남은 왕족지배계급들은 순수 부여왕통의 마지막

피붙이가 된 어린 공주 하나를 조심스레 감싸안고 있었다. 계속 남쪽으로 나아가는 도중 낙랑(역자주: 최리의

낙랑국이 아닌 漢의 낙랑군)에 예속됐던 용병들이 이들에 합류했다.
  
  처음 몇백명에 불과했던 일행은 여자와 어린이까지 합해 긴 행렬을 이루며 역시 과거 북으로부터 난민들이 내려와

건국한 백제땅을 향해 나아갔다.

이들에게 어린 왕녀의 존재는 신천지에서의 삶을 펼쳐나가게 힘을 추스러 주는 유일한 불씨였다.
  
  부여족은 한반도 남단의 농부나 어부 원주민에 비해 훨씬 전투적인 종족이었다.

이들은 말 위에 앉은 채로 먹고 마시는 생활이 가능했으며 말목에 엎디어 잠을 청할 수도 있었다. 말잔등에

올라 앉아서 쏘는 화살은 ‘싸우라, 이기지 못하면 죽으리라’는 전투에서 위력을 발하는 무기였다.
  
  백제건국을 말하는 百家濟海(역자주; 수서 백제편에 있는 기록. 百家가 바다를 건넜다는 뜻)의 사실에서
일백의

숫자를 말하는 백은 고구려를 떠난 백제시조들이 이끌고 온 추종자 무리를 가리킨다.

부여기마족은 소수로도 쉽사리 대규모 원주민을 제압할 수 있었다.
  
  346년부터 375년 사이 백제를 통치한 근초고왕은 북부여에서 남하하는 이들 난민의 존재에 우려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들을 왕의 계속되는 전투에 참여시켜 백제에 충성하는 신하로 붙들어놓지 않는 한 북방에서 백제영토에 와닿기까지

1천수백 km의 고된 장정으로 난폭해진 이들 부여족과 정면대립을 해야될지도 몰랐다.
  
  이들이 받들어 온 어린 왕녀가 하늘의 아들 해부루의 직계손이듯, 백제왕가 또한 해부루의 자손이었다.

골육상쟁은 부여족에 흔한 것이지만 여자인 공주라면 경쟁상대가 아니니 제거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정략결혼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신공(神功)의 결혼
  

 

 

 

일본 약사사 소장 신공왕후상.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왕녀였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프레시안

 

 

 


  백제왕실에 접속된 뒤 부여족은 ‘지도자’를 잃은 셈이었다.

어린 왕녀 신공(神功)은 무계(巫系)를 계승하지만 아직 어려서 신을 받을 수도 없었고 남자들을 전쟁에 이끌어 갈

수도 없었다. 대부분의 부여난민은 백제 근초고왕을 도와 마한 정벌에 가담했다.
  
  왕녀 신공이 숙성해졌다. 왕은 그녀를 직계혈속으로 잡아두느니 다른 정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왕비의 질투를 감안할 때 신공이 왕의 아이를 갖게 될 경우 왕권계승에 경쟁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백제왕국의 동쪽에 오래 전 건국된 가야연합이 있어 역시 천제(天帝)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도시국가의 지도자가

통솔하고 있었다.

4세기 중엽의 가야는 仲哀王(역자주: 고사기, 일본서기에 14대 주아이 천황으로 기록되는 인물)이 집권하고 있었다.

젊은 신공이 중애왕의 비가 된다면 백제와 가야간의 평화적 유대는 보다 확실히 다져질 것이다.
  
  모든 역사기록은 중애왕이 신공보다 나이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애왕에게는 또 왕위를 계승할 장성한 두

아들도 있었다.

신공왕후가 지금의 대구지방인 고령가야의 조정에 왕의 늙으막을 즐겁게 해줄 젊은 후궁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동안 신공은 신내림을 받는 전통적인 무병을 앓고 드디어 신의 뜻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신공왕후는 신의 권위를 가지고 전투의 승리나 왕실의 비극 등을 예언하는 여인이 되었다.
  
  신공왕후와 용감한 늙은 곰공(公) 무내숙미
  
  중애왕의 비가 된 신공은 기쁠 리가 없었다. 늙으막의 중애왕은 대마도와 북부 규슈를 포함해 여러 지역을 잇는

느슨한 무역업과 동시 낙동강을 끼고 지금의 부산과 대구를 연결하는 선박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공이 독자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여지는 없었다. 앞날의 중요한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오직 왕의 아이를 갖는

방도밖에 없었다.

이 또한 쉽게 될 일이 아니었다.

720년의 일본서기에 따르면 50대 초반이던 중애왕에게는 왕위를 물려받을 적통의 아들이 둘이나 되었다. 새로 얻은

젊은 왕비에게서 또 후사를 본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중애왕 휘하의 최고대신으로 ‘용감한 늙은 곰 公(역자주; 1973년 古事記를 영역한 도널드 필립이 Valiant Old

Bear Lord로 해석했다)’으로 불린 인물이며 뛰어난 남자무당인 무내숙미(武內宿미; 다께치우치(혹은 다께우치)

노 수꼬네)가 있었다.

그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5명의 신분에서 한발 비껴난 6인자의 서열에 있었다.
  
  이제부터 펼쳐질 역사에 이 최고대신이자 무당제관인 무내숙미는 신공의 야심만만한 정벌계획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녀의 첫사랑이 되기까지 한 인물로 보인다.
  
  
중애왕의 죽음과 신공의 예언
  
  서기 712년과 720년의 두 일본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중애왕의 죽음을 두고 다른 기술을

하고 있다.

중애왕은 늙어서 천수를 마치지는 않았다. 그는 규슈남부의 반란지역인 구마소를 평정하려는 중이었다.

고사기에 따르면, 중애왕이 그의 계획에 대한 신의 뜻을 알고자 여러 신령들을 청했을 때 대신인 무내숙미가

궁전에서 하늘의 뜻을 물었다고 한다. 무속적인 예언점이었던 것이다.
  
  신공의 입을 통해 내려진 신의 뜻은 중애왕으로 하여금 ‘금과 은이 가득찬’ ‘ 바다건너 땅’으 로 가서 정복하라는

명령이었다. 중애왕은 신들이 그를 속인다고 화를 내면서 예언을 곧이듣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미심쩍은 태도의 중애왕은 새 영토를 갖게되지 못하고 대신 태중에 있는 아기가 사내아이로서 그

땅을 통치하리라는 예언이었다고 한다.
  
  고령가야의 통치자인 중애왕은 절대군주라기 보다는 그만 그만한 가야연합의 수장들중 제일 강한 정도였다.

가야연합은 널리 분포된 소규모 해운 도시국가들의 집합체였다. 그는 아마도 힘이 딸렸거나 그럴만한 정벌동기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고사기는 중애왕이 신의 예언을 거부한 바로 그날 밤 가야금을 타던 도중 죽었다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그는 젊고 아릿다운 아내 뱃속에 있는 아기가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되리란 예언에 온통 불안해진 상태였다.

어떤 예언을 듣고 놀라서 죽게되는 일은 중애왕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노인과의 결혼생활과 종속적인 처지를 지겨워하던 신공이 약을 탄 술같은 것으로 중애왕을 죽이고

무내숙미에게 이 일을 수습토록 했으리란 게 보다 타당한 추측이다.
  
  고대사 기록에 따르면 이들 두 사람은 중애왕의 죽음을 공포해도 괜찮을 때까지 상당기간 최대한의 노력으로

비밀에 부쳐놓았었다.

1년후 이들은 규슈에 중애왕의 능을 조성했으나 애초에 어디에다 그를 매장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침략이 마무리된 뒤에야 중애왕은 고귀하게 추존되었다.
  
  
아리나래 강(압록강)을 두고 한 맹세
  
  중애왕을 처치한 신공왕후와 무내숙미는 일을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고령을 수도로 한 대가야 일대에서 일본을 정벌할 군을 징발했다.

또한 백제왕에게 사신을 보내 바다건너 왜땅을 정벌하여 백제의 속국으로 삼는다는 신공의 계획을 백제가 지원토록

하고 가야연합의 영토 또한 지배하에 둔다는 협의를 이끌어 냈다.
  
  720년에 쓰여진 일본서기는 신공이 이끄는 정벌군이 처음 고령(대구)에서 발진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가야연합의 여러 도시를 지나칠때 저항하는 일단을 동해안지역으로 밀어부쳤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진군은 타당한 행로를 따라간 것이었으며 군사상으로도 성공적인 것이었다.
  

 

압록강. 일본서기를 영역한 애스톤은 신공왕후 항목에 나오는 아리나래강을 조선의 압록강으로 해석했다. 이는 신공왕후가 한반도 북방에 뿌리박은 조상을 두었음을 암시한다. ⓒ연합뉴스

 


  그러나 신공을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일본 역사가들은 신공이 처음에 규슈에서 출발해 고령으로 갔다가

거기서 되돌아 다시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일본사가들은 처음에 신공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한반도 남쪽에서 위로 전진해 올라갔다가 코스를

뒤집어 전투를 벌이며 되돌아 내려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신라와 백제 양국이 모두 가야영토를 차지하는 전쟁을 벌인 끝에

궁극적으로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사실이다.

8세기 일본 역사가들이 언급한 '신라'는 지리적 개념의 가야를 일컬은 것이다.
  
  4세기의 가야가 후일 신라에 병합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역사책에 나오는 신공왕후의 원정로가

근거를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소위 '미마나 정복' 이라는 일본역사가의 주장을 신공이 고령으로부터 남쪽으로

진격하여 백제군사와 합류한 것으로 풀이하면 이치에 닿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공의 조상이 광대한 압록강 넘어 북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암시가 일본서기에 들어있다는

사실이다.(일본의 역사가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인가?).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공이 ‘신라왕’을 굴복시키자 신라왕은 ‘아리나래강이 거꾸로 흐를 때까지’ 신공에게 복속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일본서기를 영역한 애스톤(W.G.Aston)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도모할 아무 이유가 없던 입장에서 이 아리나래강을

현재 북한 국경의 서쪽 절반을 가로질러 흐르는 압록강으로 간주했다.
  
  신공이 만일 정말로 일본 태생이었다면 아리나래라는 강 이름을 들어보기나 했겠는가?

무엇 때문에 신공은 다른 것을 놔두고 먼데 떨어진 이 북방의 강을 걸고 신라왕이 맹세를 하게 했던 것일까?

신라왕’은 동부여에서 가야로 남하한 부여족의 이야기에서 아리나래라는 강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맹세는 후일 8세기에 이르러 ‘신라’로 이름 붙여진 나라의 왕과 신공이 공동의 전통을 누리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압록강의 용왕’을 두고 했다는 이 맹세는 가장 강력한 것으로 압록강 용왕은 다른 어떤 강의 용왕에 비할 바 없이

강한 수신이었음을 말해준다.

4세기 중엽 동북아시아에서는 샤머니즘이 지위고하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종교였다.
  
  원문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Japan's Hidden History(1984 Hollym)
  위대한 부여족의 재출발 2 월간자유 1984년 6월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3>

신공과 무내숙미-바다건너 왜로.


일본정벌
  
  용감한 늙은 곰 무내숙미 공을 최고 군사고문으로 거느리고 백제로부터는 군사적 지원과 함께 장도에 대한 기대까지
 받고 신라로부터도 도움을 받음으로써 바다건너 땅 일본을 정벌하려는 신공의 계획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8세기의 두 일본 역사서에 따르면 “신라는 금과 은을 가득 실은 80척의 조공배를 보냈다”고 한다.

이는 전적으로 수사적 과장에 불과한 기록이다. 많은 군사가 새로운 땅에 처음 상륙하는 거사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배가 소요됐다.

이들 선단은 신점을 받고 무녀왕녀인 신공왕후의 앞으로 태어날 아들이 지배할 땅을 정벌하러 가는 특별한

무적함대였다.

가야의 남자들은 뱃일에 능한 사람들이어서 신공왕후의 원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모든 배들이(현대의 가라노 배 칫수에 기준하여) 말 20마리와 군사 40명, 대마도에서 물을 보충하더라도
원정기간

내내 필요한 물자를 한꺼번에 실을 만치 큰 규모였다. 對馬島라는 한자어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절반 가량의 배를 도중에 폭풍우로 잃었거나 대마도에서부터는 배가 묶였다고 가정하더라도 기마 전술에
무지한

일본 본토를 침입하는 정벌군에게는 아직도 많은 말과 군사가 있었다.

배는 상인들이나 소수의 바다 건너온 정착자들도 쓰던 것이었다.

신공왕후의 군사가 일본열도 상당부분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기마군사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는 지상과제가 있었다.
  
  토기에 나타난 이 당시의 배는 2차대전 때 사용된 해군의 상륙용 주정처럼 앞부분이 낮게 만들어졌다.

그리로 해서 말들이 배에 올라서면 뱃전 양옆으로 말을 몰아넣었다.

항해중에는 무장해제로 모두들 팔과 머리만 바다에 노출해 놓고 있었을 것이다.
  
  보병은 뱃전에 그들의 방패를 세워 철벽같은 방어막을 만든 뒤 그들 자신은 방패 뒤에 몸을 가린 채 육지의

방어군을 향해 힘껏 당긴 활시위로 불붙인 화살을 날려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다.
  
  기수를 태운 말은 마치 네발 달린 전차처럼 무장하고 있는 셈이므로 비무장의 보병이 막아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말 탄 군사에게 대항하는 지상의 보병은 머리위로 칼을 휘두르기 위해 가슴 전체를 드러냄으로서 공격에 취약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두 궁중사서는 신공과 군대가 거의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 규슈에 도착했다고 쓰고 있다.

거기서 신공은 신이 예언한 대로 바다건너 땅 일본을 지배할 운명을 타고 난 사내아기, 후일의 오진천황으로 알려진

아기를 낳았다.
  
  
가지가 5백개 있는 자작나무와 애스턴이 말하는 한국신의 현현
  
  무녀왕후 신공이 중애왕의 아이를 뱄노라고 했을 때 그녀가 내세운 왕권계승의 땅은 가야가 아닌 ‘정복해 가질

새 땅’이었다.

신공이 아이를 출산한 것은 9개월이 훨씬 넘어서였다. 일본서기는 신공이 임신 10개월이 지나서야 분만했다고 적고

있다.

그녀는 자궁을 돌로 막아 출산을 늦추었다고 한다(오랜 세월 이어져온 부여족의 돌에 대한 숭배를 나타내는 항목이다). 그러나 좀더 사실적인 이유들을 생각해보면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중애왕이 죽고나서 한달 뒤 신공은 신의 뜻을 묻는 의식을 베풀어 그녀로 하여금 ‘정벌에 나서라’는 점괘를 받아냈다.

가지가 5백개 달린 자작나무(사까기나무)의 혼이 무까쓰여신으로 나타나 그녀에게 ‘바다건너 새땅’을 통치할 것을

명했다.
  
  이 점괘 예언을 받는 굿은 7일 낮밤을 지속되었으며 신공을 대동해 여기 참가한 것은 오직 용감한 큰곰 무내숙미

최고무당대신과 의례의 집전자(나까도미 또는 이까쓰노 오오미) 뿐이었다.
  
  5백이라는 숫자는 시베리아의 무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터키와 시베리아의 신화에는 5백개의 가지마다 20개씩의 잎이 달려 1만개의 잎사귀를 가졌다는 생명의 나무가

등장한다. 가 잎사귀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다.

일본 신또신앙에서 신성시되는 사까끼 나무가 5백개의 가지를 가졌다는 것은 신공왕후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일본역사에서 신공왕후가 무적의 여걸로 취급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 시대는 샤머니즘이 지배하던 때였다.
  
  애스턴이 일본서기를 영역하면서 붙인 주석을 보면 신공에게 나타난 신은 자신의 정체를 일본이 아닌 한국의

신으로 밝히고 있다. 신공의 굿에 나타난 또다른 신은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신이며 세 번째로 나타나는

신은 한국과 규슈 사이의 해협을 다스리는 신이었다고 한다.
  
  높은 벼슬의 무내숙미는 중애왕의 죽음 이후 신공과 단둘이만 있게된 기회가 잦았으며 달리 이들을 지켜본

사람들도 없었던 만큼 아기의 진짜 아버지는 중애왕이 아닌 무내숙미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신공의 바다건너 정벌 계획을 실제로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애왕이 제거된 이후에도 무내숙미가 정권을 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 그는 왕권 계승서열에서 너무 멀리

비껴선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대신 비록 중애왕의 친아들로 위장돼 있긴 해도 사실은 그의 아들인 오진이 은밀하게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기록은 다같이 신공왕후가 ‘젊고’ ‘믿을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으며’ ‘능란한 무녀’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무내숙미는 여러 처첩에게서 아들을 낳아 후대에 6개 가문으로 분가했다. 신공은 무내숙미에게 여러번 특별한

기용의 기회를 제공했다.
  
  신공은 분명히 외강한 여성이었던 것같다.

임신 4개월 때, ‘몸에 날개가 돋았다’고 알려져 나는 능력을 지닌 남자무당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무당은 신공의 명령을 거역하고 백성을 약탈했으므로 신공은 그를 죽여버렸다.

일본서기에는 신공이 임신한 지 열달하고도 열나흘째에 오진왕을 낳았다고 적혀있다.

중애왕은 그녀가 임신한 지 한달 닷새째 되던 날 죽었다. 이 사실은 일본서기 아홉달, 여드렛날 조에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여왕이 해산할 시간이 다가왔다. 자궁을 막느라 끼웠던 돌을 빼내며 다음과 같이 빌었다.

‘일을 다 끝내고 오는 날 이 땅에서 출산을 할지어다’
  
  '돌’은 달걀모양의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 오진은 한국땅이 아닌 일본 현지에서 출생해야만

했던 것이다!
  
  
전투와 배신
  
  중애왕의 두 장성한 아들 또한 왜로 건너왔다. 이들은 이즈모의 신라인 거주지로 가려는 중이었을 것이다.

규슈에 상륙한 지 3개월후 신공의 군대는 두 왕자의 군대와 맞붙게 되었다.

신공의 함대는 지금의 오사까 근방에 닿아서 무내숙미의 통솔 아래 두 왕자의 군사와 싸우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갔다. 신공이 낳은 아이는 무내숙미의 보호 아래 있었다.
  
  초반에는 두 왕자 측이 우세했다. 그래서 신공의 군사들은 꾀를 내었다.

군사들은 머리속에 여분의 활시위를 감추고 나무칼을 차고서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싸움터로 나아갔다.

무내숙미는 왕자를 보고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싸울 이유가 없다. 원컨대 우리 모두 활시위를 끊고 칼을 풀어 던져버린 뒤 화목을 도모하자”
  
  무내숙미가 군사를 호령하여 활줄을 끊고 칼을 강물에 던져버리자 이를 믿은 왕자의 군대도 똑같이 했다.

그러자 무내숙미는 다시 감추어둔 활시위를 메게 하고 진짜 칼을 꺼내 무장했다.

일본서기는 이들이 어디다 진짜 칼을 숨겨왔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무내숙미가 이끈 신공의

군사가 승리했다. 적군은 모두 사망했다.
  
  
백제로 부터의 선사품 칠지도
  
  백제왕실이 신공에게 보낸 선사품에 대한 고대 기록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七支刀라 불리우는 특이한 칼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물건과

함께 한 칠자경일면(七子鏡一面)이다. 흥미진진한 것은 이들 두가지 물건이 아직 일본에 전해져 내려온다는 사실이다.

모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초기 역사에 기술된 대로의 모양과 연대가 분명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선사품은 서기 372년 일본에 전해졌다.

신공의 일본 정벌을 지원했던 백제 근초고왕은 몇 년뒤 375년 사망했다.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대로 백제가 신공에게 보낸 선물 칠지도(왼쪽). 7개의 날이 달린 이 칼은 369년 백제 금속공예술의 수준을 보여준다. 길이 74.5cm, 일본 이소노가미신궁(석상신궁; 부여족 바위신사)소장. 몸체에 백제 왕세자가 하사한 것임을 말하는 한문글자가 금상감 되어있다. 부여박물관에 모조품이 있다. ⓒ프레시안


  일본을 통털어 칼신에 7개의 날이 붙은 칠지도는 현재 이소노가미 (石上)신궁에 소장돼 있는 이 칠지도 하나뿐이다.(역자주: 백제 군수리 사지 탑에서 또다른 칠지도가 발굴된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의 ‘칠지’는 무속 상징의 七天세계를 나타낸다. 당시 백제의 왕이나 일본의 신공이나 모두 무속신앙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7이라는 숫자는 많은 부족이 믿고 있던 7천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가 5세기 경주고분에서 출토되는 금관의 대부분에서 볼 수 있는 ‘칠지’이다.

(후일 한국과 일본은 모두 불교로 개종하면서 사람들은 한때 그렇게도 강한 이같은 무속상징을 잊었다)
  
  여기서 지적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신공은 백제왕이 그녀의 장도를 축수하며 내린 선물인 이 칼을 실제로 지니고 정벌에 나섰던가?

(칠지도에 쓰인 연대는 서기 369년이다) 또한 칠지도가 372년에 일본에 왔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정확한

것인가? 틀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 칼은 신공이 성공적으로 일본을 정벌한 이후에 이를 인정하는 증표로 보내어진 것인가?
  
  천관우의 해석에 따르면 칠지도 명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이 칠지도는 마력을 지닌 것으로 이를 가진 자는 칼의 날카로운 타격을 피할수 있다.

이를 우리 속국의 지도자에게 보낸다(속국을 위한 선물로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백제의 왕세자가 왜의 지배자를 위해 이 칼을 만들었다.’
  
  칠지도가 어째서 백제왕이 아닌 왕세자에 의해 만들어져서 신공에게 내려졌는지는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당시의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전장에 나가 있었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온 고구려군을 퇴각시켰으며 평양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살해했다.

(역자 주: 근초고왕을 대신해 후일의 근구수왕인 아들 왕세자가 전장에 나가 고구려 왕을 죽였다는 국내 학자의

기록을 보았다).

4세기 후반의 백제는 가장 강성하던 시기였다. 신공이 통치하는 왜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일본학자들은 칼의 명문을 왜곡해 백제가 신공에 의해 통치되던 속국이었다고 해석하려든다.

신공과 무내숙미(다께치우치)는 일본땅의 한복판을 정벌하는 순간부터 논쟁소지를 지니게 된 것이다.
  
  백제로부터의 七子鏡一面
  

 

 

 

 

가마쿠라 핫치만 신사에 소장된 일본 국보 131호 銅鏡 칠자경일면. 일본의 건국신화를 말해주는 여러 장면이 새겨져 있다. ⓒ프레시안

 

 


  지름 20센티의 이 동경은 일본국보 131호로 지정되어 현재 와카야마현 핫치만(隅田八幡) 신사에 보관돼 있다.

거울 뒷면에는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천조대신과 폭풍신 스사노오노 미꼬도의 관계를 말해주는 몇 장면이

새겨져있다.
  
  이 거울이 바로 백제왕실에서 신공에게 보낸 그 거울인 것일까?

신공이 낳은 아들 오진왕이 나중에 이곳 핫치만신사에 군신으로 신격화되어 있다는 사실로 핫치만 동경의 존재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이 동경은 단순히 칠자경일면의 고대 복제품인가?
  
  ‘양의 해’로 나와있는 명문의 한 귀절은 서기 383년, 443년, 또는 503년에 해당하는 년도이다.

이중 가장 이른 시기인 383년은 신공의 섭정시기가 일단락되면서 아들 오진왕이 지배자로 즉위하려던 시기이다.
  
  동경에 새겨진 48자의 명문은 모호한 구석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의 해, 대왕의 재위기간, 남쪽에 있는 형제왕에게, 그가 이시사가궁에서 긴 수명을 생각하며 머물고 있을 때.

그가 두 사람에게 백동 200조로 이 동경을 만들게 했다.’
  
  동경에 새겨진 신화적 장면들
  
  폭풍신 스사노오노가 저지른 나쁜 짓이 여기 새겨져 있다.

그는 얼룩망아지를 타고 누이동생 천조대신의 전답을 가로질러가고 있다.

다른 장면에는 천조대신이 숨어있는 동굴로부터 그녀를 불러내려는 바깥의 유혹을 받고있다.

다음은 가슴을 드러낸 채 우스운 춤을 추어서 마침내 천조대신을 동굴 밖으로 불러내는 장난끼 많은 신이 그려져 있다. 춤추는 신이 긴 실에 꿰어논 곡옥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또다른 장면은 聖天橋의 입구에서 가슴을 드러낸 또다른 여성이 다리를 지키고 있는 남자를 놀래켜서 손에 든

삼지창을 떨어뜨리게 한다. 다음 장면은 중앙갈대평원에 강림하는 왕손 니니기가 그려져 있다.

스사노오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추방당하는 장면도 있다.

공간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동경의 안쪽 선에 새겨진 장면은 5개 혹은 7개로 나뉘는 것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만세일계의 신화적 배경을 이루는 고대설화가 여기 동경에 확실하게 새겨져 있다.

일본의 왕권을 상징하는 三種 神器의 하나, 천조대신의 성스런 거울이란 것도 이 동경과 같은 것인가?

핫치만 신사의 이 동경은 1872년 닌도쿠왕의 무덤이 무너졌을 때 나온 동경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현재 보스턴 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고대 일본의 동경은 이때 출토된 것이라 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본의 고대신화가 한국에서 비롯된 것인가?
  
  
원문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Japan's Hidden History(1984 Hollym)
  위대한 부여족의 재출발 2 월간자유 1984년 6월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4>

응신과 백제의 우정


신공의 아들 오진, 권력을 통합하다
  
  정력적이고 뛰어난 지도자의 자질을 지닌 신공왕후는 그 아들 오진왕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섭정으로 군림하다가

1백살에 죽었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섭정기간은 20년 정도에 한했고 아들 오진은 20세가 되자 즉위했다.
  
  신공의 정부(應神의 생부?)이던 다께치우치(무내숙미)는 더 큰 영광을 누렸다.

그는 이후 5대왕에 걸친 고문으로 거의 3백년을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로는 그의 자손들이 같은 이름인 다께치우치로 세습화된 신하의 직위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용감한 곰 다께치우치는 일본조정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한 여러 가문 - 소가(蘇我), 기(紀), 고세(巨勢), 헤구리

(平群), 가쓰라기(葛城)의 시조가 되었다.
  
  부여-가야계의 한국인들은 수세기 동안 다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오진왕은 이로써 4세기 후반부터 서기 510년에 이르기까지 기마족의 피를 이어받은 10명의 일본왕 계보를 연 첫번째

인물이었다.

그 이후에는 중도파의 인물이 일왕자리를 승계했다.

그 후손은 기마족의 피가 절반이고 나머지 반은 야요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신또를 숭상한 한국인의

피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초기의 부여기마족 후예 일왕들은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곳에서의 해상무역에서 얻은 부를
누렸다.

정치적인 유대는 신라보다는 백제와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일본 고분에서 출토된 이 토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듯 물방울 무늬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있다. 높이 41cm. 왕관은 현재 서울 호암미술관 소장의 가야금관과 비슷한 형태이며 얼굴 역시 일본인이라기보다 한국인에 가깝다. 일본의 초기 천황들이 혈통상 한국인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무내숙미의 재판
  
  규슈에 남은 군사들은 얼마동안 바쁘게 돌아갔다.

용감한 늙은 곰 다께치우치가 이들 군사들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모함을 바로 그의 친동생으로부터 받았다.

처음에 오진왕은 다께치우치를 사형하려다가 재판에 넘겼다.

중세유럽에서 그런 것처럼 끓는 물에 손을 넣어 시험하는 방식이 이때도 행해져서 다께치우치는 이를 이겨내야 했다.
  
  두 당사자가 모두 끓는 물에 팔을 넣었다. 그중 옳은 자는 신의 가호를 받아 무사할 것이었다.

이때도 다게치우치의 무당 능력이 그를 비방한 친동생보다 더 우월하게 나타났다.

불을 관장하는 힘은 무당들의 보편적 능력에 속하는 것이다. 외견상으로 오진왕에게는 그의 출생비밀이 전혀 알려졌던 것 같지 않다.
  
  
오진왕에게 보낸 백제의 여러 선물
  
  백제가 왜의 새로운 통치자를 일종의 원격조종하는 속국의 왕으로 인정했던 것은 분명해서 이 섬나라와의 유대를

돈독히 하기 위해 각종 물건이며 인재들을 실어보냈다.

중국, 한국, 일본의 역사가들은 하나같이 국가간에 교환된 모든 것을 상대국의 2차적 입장을 적용해 ‘조공’을 바쳤다고 말하고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더 유별났다.

그러나 이러한 ‘조공물품’이란 사실상 국제무역의 형태를 띄고 있었던 것이며 반드시 국가간의 열등한 입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진의 재위동안에 백제로부터 여러 씨성(氏姓)이 도래하여 일본에 정착했으며 재봉사들도 왔다.

일본서기에 이르기를 ‘ 백제의 왕이 아직기에게 말 두마리를 갖춰 보내왔다’고 했다.
  
  오진왕은 말을 통솔해온 아직기가 한문을 많이 알고있음을 보고 백제로부터 한문을 가르쳐줄 스승을 천거하도록

했다.

시간의 운행을 살피기 위해선 책력이 필요하다. 백제로부터 역박사(易博士)가 왔다.

정략결혼으로 비빈들이 양국간에 오가기 시작해 역대왕 대의 관습이 되었다.

또한 양국 모두 상대국 왕의 어린 동생이나 사촌 등을 인질로 와있게 하는 제도를 썼다.
  
  405년 백제에서 왕인이 도착했다. 그는 일본의 사관(史官)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일본왕실이 대륙문물을 익히게 된 시초는 한문자가 그 처음 발단은 아니었으나 이 연대는 가장 중대한 일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왕인이 일본 왕자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에게 오래된 문명과 그역시 중국의 문물을 적용해온 백제의

지식을 주입시켰다고 쓰고있다.
  
  이 시기에는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직항로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간의 직접적인 교류는 불가능했다.

일본서기는 중국으로부터 두명의 재봉사를 구해오는 일의 어려움을 기술하고 있다.

일본은 두 한국인을 배편으로 고구려에 보내 이 일을 도와줄 것을 요청해야 했다.

고구려왕은 백제인에게 두명의 안내자를 붙여 중국으로 가도록 조치했다.

일본서기는 이들이 항로로 갔는지 아니면 육로로 갔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에서 직접 온 것이든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온 것이든, 한국으로부터 일본에 건너온 장인에 대해서는 거듭

거듭 기록에 나타난다. 기마족의 일본 조정은 한반도에 대단히 의존적이었다.

무엇보다 옷감짜는 직조공인들이 와서 기술을 가르쳐 줄 것이 요구되었다.
  
  이 시대 왕실에서는 지금의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정략결혼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예를 들면 백제왕은 그의 누이동생을 오진왕의 비로 보냈다.

여자들은 마치 가축마냥 이리 저리 거래되긴 했지만 무기력한 노예같은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신공왕후도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다.
  
  일개국의 왕녀가 다른 나라 왕한테 시집가게 되면 그녀에게 부속된 대규모의 인원이 수행동반했다.

이들은 실제 정보집단으로 움직였다. 이들의 매력적 자태는 궁정의 비밀스런 일을 알아내는 데 유용하게 활용됐다.

그렇게 빼낸 정보는 자신들이 받드는 비가 다른 경쟁자들과의 권력다툼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왕의 총애를 받게 되면 권력을 누리게 되고 후계자를 탄생시킬 수도 있었다.
  
  
오진, 일본 신또(神道)의 군신(軍神)으로 신격화되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여기마족 피를 지닌 첫번째 일본왕인 오진은 핫치만(隅田八幡) 신궁에서 모시는 군신이 되었다.

이는 부여기마족이 대화 왜를 정벌한 것과 연관되는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신성시되는 핫치만 신사의 입구는 무섭고 용맹해 보이는 두마리의 특별한 개 조각이 지키고
있다. 

이들은 고마 이누, 또는 고구려 개라 불린다. 이 이름에는 혼돈될 여지가 있다.

한반도 북부에서는 개를 늑대와 교배시켜 나온 용맹한 종자를 경비견으로 썼다.
  

 

 

 

오진천황을 받드는 핫치만신사를 지키는 고마이누. 즉 고구려 개. 부여기마족들은 늑대와 개를 교배시킨 이런 개들을 일본에 들여가 신사를 지키는 문지기로 썼다. ⓒ프레시안

 

 

 


  그중 몇 마리가 신공의 선단 구성원에 섞여 일본땅으로 건너왔다.

나중에 이들 종자는 멸종되었지만 핫치만신사를 지키는 조각으로 남아 전하게 되었다.

후세에 일본의 장수들은 싸움터에 임하기 앞서 이곳 핫치만 신사에 와 기도하는 참배를 했다.

(일본 중세 역사에는 특히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이곳 핫치만 신사의 음덕을 요청했다 한다.)
  
  기마족 출신 지배자들이 일본왕으로 통치해온 백년여의 세월동안 무속은 이들이 전적으로 신봉한 종교였다.

인간이 죽으면 이승에서와 별다를 것 없는 저승 생활을 지속하리란 것은 일반적인 믿음이었으므로 무덤에는

저승에서 쓸 물품을 껴묻었다.

당연히 고귀한 신분일수록 무덤은 가능한 크게 구축되어 시신과 함께 다양한 부장품들이 묻혔다.
  
  이들 통치자의 영혼이 먹고 마시고 놀고 사랑하고 사냥하고 낚시질할 것을 대비해 음식과 술이 차려졌다.

북방의 기마족들은 순장 풍습이 있어서 왕이 죽으면 비빈이나 말, 음식 및 여타 신분을 상징하는 것들을 모두 산

채로 무덤에 같이 묻었다.

알타이와 한국은 전통적으로 모두 무덤내부에 왕이 살아생전 누렸던 생활모습을 그림그린 외에도 저승에서 앞으로

요구될 것까지도 그림그렸다. 사방벽은 사신도를 그려 방위를 표시하고 수호했다.

왕권을 상징하는 부장품으로는 칼, 활과 화살, 의례용 신발(역자주;

저승가는 먼길에 신고 갈 신발)도 들어있었다. 금과 은이 풍부했던 한국은 사자를 위한 치장을 금은으로 했다.

동시대 일본은 이런 귀금속이 아주 귀했으므로 금동으로 대신했다.
  
  제물은 받침대 달린 토기에 담았다.

가야 도공은 전투에 앞서 제사 지낼때나 무덤의 부장품으로 꼭 필요한 토기제작을 위해 부여기마족과 함께 일본에

들어왔다.

기마족들은 또 들어앉아 술마시기를 즐겼으므로 부장품에는 술잔용 토기들이 반드시 포함되었다.
  
  언젠가부터는 죽은 자를 장사하는 데 산 말과 인간을 순장하는 대신 토용을 부장했다.

열쇠구멍 모양의 전방후원분은 통치자의 능 축조형식으로 추측되지만 규슈의 최고부족들도 대형의 전방후원분을

축조했다.

한국에도 공주이남 부산에 이르기까지 이런 열쇠구멍모양의 전방후원분 고분이 있는데 이들중 다수는 논밭으로

변용되었다.


  
  새로운 왕가의 첫 임금인 오진의 능은 그의 권위와 나라의 불멸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장대하게 축조되었다.

그의 통치기간은 대체로 평화로왔다.

왜국의 부족 지도자들은 한국에 뿌리를 둔 한인계 사람들로, 이들은 임금에게 협력하는 대가로 영지를 얻고 통치권을 유지했다.
  
  오진왕능으로 알려진 고분은 길이 419m, 봉분높이 35.8m에 이른다. 해자까지 포함하면 길이 500m가 넘는다.

처음에는 해자가 3겹으로 둘러있었을 것이다. 무덤축조에 필요한 인력으로 엄청난 강제노역을 동원했거나

전쟁포로를 부렸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중기에 와서 천황능들은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메이지 천황때 신또가 부활하면서 능들도 재정비되었다.

현대에는 신또제관들이 해마다 제일(祭日)에 아스카 지역의 능을 찾아 산과 바다에서 나는 산물을 제물로 바친다.

제일은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날짜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 신또의 제관들로서 이들 능이 ‘도래인 임금’의 무덤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비록 방계로 멀어지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 오진의 임금혈통은 상당히 오랜 기간 이어졌다.
  
  원문: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Japan's Hidden History(1984 Hollym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5>

부여바위왕자 신무 그리고 오진


한국과 중국 사료에 신라가 일본에 정복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가지 가능한 해석은 8세기 초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되기 200년전 가야는 이미 신라에 통합되어 신라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측 자료에 따르면 신공왕후는 야심에 찬 인물이었으며 다케우찌노 스꼬네(무내숙미)가 항상 그녀의 강력한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추측하는 바는 신공왕후가 낳은 아이는 분명코 중애왕의 아이가 아니고

무내숙미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용감한 큰 곰 무내숙미는 동부여의 후손으로 아마 고령가야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손꼽히는 장군이었을 것이다.
  
  신공이 신의 뜻을 전한다면서 자신이 중애의 아이를 가졌으며 그 아이가 장차 신공 자신이 정복할 나라를
다스릴

인물이 될 것임을 예언하고 6개월 후 그녀는 원정날짜를 택일하는 제의를 벌이게 된다.
  
  일본을 무력정복한 이 역사적인 사건에서 ‘신의 뜻’을 앞세운 샤머니즘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역사 초기에는 한국이나 일본이나를 막론하고 징조라든지 무속적인 강신술 같은 것이 모든 중요한 일의 방향을

결정했다.
  
  무내숙미와 신공은 일본정복의 계획을 세운 뒤 백제에게 그들과 합세하여 신라에 대항할 것을 종용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신공은 자신의 칭호를 가야의 여왕 또는 왜왕으로 고쳐 백제에 종속되었음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내숙미와 신공이 단둘이만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날로부터 정확하게 9개월 11일이 지나 호무다(譽田)

왕자가 태어나게 된다.

두사람은 제사후 16일 동안 그 장소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생물학적으로 보아 이 기간에 ‘용감한 늙은 곰’ 무내숙미와 ‘위대한 왕후’ 신공이 그 ‘성스러운’ 아기를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여족의 일파 고구려 기마인들 ⓒ프레시안

 

 

 


  그 아기가 자라서 오늘날 일본이 진무(神武)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인물이 되며 또한 만세일계를 자랑하려

꾸며낸 천황 족보상 15번째를 차지하는 오진 천황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 가운데 일본 내륙으로 진격해가는 신무의 동정(東征) 부분에 가서는 이와레(磐余彦)황자,

즉 부여바위왕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껏 한국사람들은 어린애 이름에 바위를 흔하게 붙여 부른다. 이것은 고조선 부여 이래 전통의 한 면모다.
  
  일본 국가형성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역사가들은 역사 이전에 살았던 몇사람을 합성하여 진무천황이라는 이름으로 한 위대한 신화적 존재의 탄생을 보았다.

사실 神武(하늘로부터 받은 용기를 지닌 왕의 뜻)라는 이름은 古事記 日本書紀가 편찬된 8세기를 훨씬 지나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의 실정을 보면 고구려를 통해 내려온 부여족이 남이(南夷)라고 불리던 마한을 정복한 다음 백제지역에서

결속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후 부여족의 일부, 즉 346년 북부여가 멸망한 뒤 백제의 사촌들과 합류한 무리가 낙동강 하류,

즉 김해 및 부산지방을 향해 더욱 남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규슈로 건너가고 다시 일본 내륙 나라(奈良)를 향해 동쪽으로 옮겨간 부여족과 그들이 탄 말의 이동이 일본

역사에는 ‘신성한 야마도(大和) 정권의 이와레 황자(皇子)에 의한 기나이(畿內)지방의 정복’으로 탈바꿈되었다.

다급한 경우를 당하면 신공은 어린 왕자를 용감한 늙은 곰에게 맡기기도 했는데 여하튼 이 아이는 씩씩한 이와레

왕자로 자라나 어머니의 원정길을 돕게 된다.
  
  이 이와레 왕자는 나중에 진무천황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지만 진무(神武)라는 이름보다는 이와레(磐余)라는

이름이 그의 근본을 보다 잘 나타내 준다.

이와라는 말은 아직도 일본에서 바위를 뜻하는 말로 쓰이며 부여 정복자들이 일본을 정복한 후 바위, 또는 돌을

상징하는 인명 및 지명을 많이 만들어낸 사실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레’라고 발음하는 이 이름의 두 번째 글자인 余는 씨족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말이며 바로 夫餘의 두 번째 글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진무(神武)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옛 이야기에 남아있는 이같은 흔적을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다.

바위라는 뜻이 들어있는 옛날 이름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이 사람이름이건 지명이나 사건이름이건 우리는 부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일본이 말하는 신공황후의 ‘한국정복’이 한국에 의한 일본 정복의 역사적 사실을 뒤집은 것이며 부여 바위왕자의

이름이 수많은 지명에 나타나고 있는 점을 염두에 두면 비로소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묘사된 군사의 이동경로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세밀한 부분에 이르면 서로 다른 점이 나타나지만 적어도 부여바위왕자가 당면했던 몇가지

문제에서는 일치된 설명을 하고 있다.

지도를 보면 그는 먼저 규슈에 상륙한 다음 다시 내해를 따라 천천히 나라(奈良)평원을 향해 진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400km가 넘는 거리였다. 이보다 빠른 길은 시고꾸(四國) 남쪽의 바다로 가는 것이었으나 그때는 배가 그럴만큼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내륙의 수로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한가운데 몽고말 장식이 붙어있는 일본 고대의 금동관. ⓒ프레시안

 

 

 


  다른 정착민들(야요이 혹은 왜)의 저항에 부딪친 부여바위왕자는 내해를 지나는데 4년을 소요했다는 것이 일본서기의 주장이고 고사기에 따르면 무려 16년이 걸렸다고도 한다.

마침내 그가 이끄는 군사는 요도강(淀川) 연안 현재 오사카(大阪) 라고 부르는 지점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먼저 도착해 있던 정착민들의 반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고사기(古事記)는 오사카에서의 패전에 뒤이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즉 싸움에 패한 이와레 왕자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까지는 태양을 향해 진격해서 태양의 여신을 노엽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에는 기병(騎兵)을 실은 배들이 기이(紀伊)반도를 돌아 서쪽에서 태양을 등지고 야마도(大和) 평원을

향해 나가면 되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큰 폭풍이 몰아쳐 부여바위왕자의 손위 형 두 사람이 바다에 빠져 숨졌다고 한다.
  
  이때 여러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로 결정하고 흙으로 빚은 토기 가득 제물로 바칠 음식을 채웠다.

이 토기가 바로 기마족들이 가야를 떠나올 당시 만들어지던 것과 비슷한 받침대가 달린 잿빛 토기였다.

부여바위왕자도 토기를 직접 만들었다. 그가 만든 것과 비슷한 토기가 현재 부산대학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그런데 또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시 시작한 싸움에서도 이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왕자의 활에 마치 매 모양의 황금빛 깃털이 달린 연이

내려와 앉아 적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 것이었다. 결국 적은 패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훗날 일본군대에서 가장 높은 훈장이 바로 황금빛 연(鳶)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은 바로 ‘제1대 천황’과 연관된

이같은 신화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매사냥이 400년경 한국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수긍하는 일인데 이 연대가 바로 이 원정과 대강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대항하여 싸웠던 일본내 두 개의 집단이 결국 알고보니 비슷한 무기를

가졌으며 멀기는 하지만 분명히 어떤 관계가 있는 사이였음을 깨닫게 되었으리라는 점이다.
  
  먼저 정착해 있었던 무리는 백제지역으로부터 건너갔을 것으로 보이는데 야마도 평원에 자리잡은 이들이 후일

부여 기마족이 세운 정권 및 6세기에 이를 계승하는 왜왕 통치 아래 군부를 관장한 모노노베(物部) 가문을 이루었음이 암시되어 있다.

초기의 기마인들은 먼저 정착해 살고 있었던 씨족들을 봉건영주로 고용해서 다스렸다고 하는데 모노노베 경우가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8세기 일본의 사관들이 이처럼 중애왕의 두 아들을 물리친 무내숙미가 신공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천황자리를 아무에게도 내어주지 않은 채 오랫동안 신공에게 섭정의 권리를 맡겼다고 서술한 것은 분명 왕조의

교체를 숨기기 위한 은폐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부여족에 의한 일본정복을 언급하지 않고 애매하게 흐려버린 채 그 연대까지 ‘신화시대’인 서기전 660년으로 끌어올려 놓았지만 무내숙미, 즉 다께우찌 가문만은 결코 생략해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부여족이 일본 중심지역의 세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다께우찌 가문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사기를 읽어보면 조상, 또는 혈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일본의 봉건주의에서 우지(氏), 즉 신분이 높은

귀족가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그들은 심지어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상을 찾았고 중요한 가문일수록 부여바위왕자와 함께 한국에서

건너온 조상을 떠받들었다.
  
  원문: 위대한 부여족의 재출발 2 월간 자유 1984년 6월호  (주; 이 글은 1984년 코리아타임스기자 권승철이

번역했다.

긴 글 중에서 오진과 진무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는 부분, 진무의 東征 부분만을 추려 2004년 김유경이 편집했다.)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6>

 닌도쿠왕


  
  아시아 전역에서 여러 기마족들은 권력세습에 엄격한 장자상속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왕이 죽으면 경쟁이 일어났다. 강력한 지도자 한둘이 자기 세력을 거느리고 서로 상대방의 영토를 노린

혈투로 힘을 소진했다.

왜땅에 새로 들어선 부여기마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이 바뀔 때마다 싸움이 벌어졌다.
  
  일본서기는 오진왕이 큰아들 작은아들 구별않고 왕위 경쟁을 시켰다고 한다.

맏아들 닌도쿠(仁德)는 아버지가 동생을 더 총애하는 것을 알았다. 서로 상대방의 영역을 인정하기로 했지만, 이것은

속임수였다.

닌도쿠는 나니와(지금의 오사카)에, 동생은 우지에 자리잡았다.

결국 동생은 자살하고 닌도쿠가 왕위에 올랐다.  이 경우는 그래도 괜찮은 것이다.
  
  사가들은 닌도쿠왕에게 좋은 소리들을 역사책에다 기록했다.

예를 들면 그가 3년동안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든가, 대궐 지붕이 새는데도 고치지 않았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은 중국사서에 이미 나와 있는 것이며 이는 단순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천마총의 천마도(사진 왼쪽)는 경주 신라의 흰말에 대한 의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마인물형 토기(사진 오른쪽) 또한 말에 대한 신라의 의례를 나타낸다. 일본에도 흰말에 대한 의례를 행하던 신또(神道)사당이 많다. ⓒ프레시안

 


  궁전 건축과 바위공주
  
  통치자의 궁전이라 해도 신또사당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둘다 일반인의 집보다 컸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환상적이거나 광대한 저택은 아니었다.

기둥을 땅에 바로 박아 세운, 통나무집 비슷한 긴 네모꼴의 집을 지었다.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는 고급기술은 6세기 말 백제의 사찰건축이 왜에 도입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긴 덩굴로 기둥과 서까래, 들보를 엮고 문틀도 했다.
  
  이렇게 지은 집은 너무 약해서 20년도 못갔다. 이세 신궁은 지금도 20년마다 재건축된다.

오래전 관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왕이 죽어 장사지낸 뒤의 대궐은 오염됐다고 여겨졌다. 새로 즉위한 왕은 조금 떨어진 장소에 새 대궐을 지어 살았다.
  
  기마족은 말잔등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공들여 집짓는 일은 무의미했고, 그보다는 사후의 영원한 거처를 더 믿었다.

진고왕후와 오진왕의 후손이 일본 중앙과 서부를 통치하던 때 오사카 부근 아스카 계곡에는 기마족 왕, 그 배우자,

고위관리의 무덤 수십여기가 들어섰다. 그중 다수가 지금까지 보전돼왔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규슈의 고위계급자들 무덤은 발굴하면서도 아스카 왕족들 능은 발굴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고구려고분 벽화에 그려진 매를 든 사람. ⓒ프레시안

 

 

 


  닌도쿠왕은 교역을 중시했던 듯, 그는 내해의 나니와 항구로 서울을 옮겼다.

닌도쿠는 한반도 가야의 명문 葛城가문의 조상, 가쓰라기 소쓰의 딸 이와노히메(磐之媛),

즉 바위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일본서기에는 도처에 바위와 관련된 기적들이 많이 기록돼 있다. 천조대신의 후손은 바위로 만든 배를 타고 강림했다. 바위를 깎아 배를 만들 수 없는 노릇이지만 바위의 마력이 드러나 보인다.
  
  바위공주는 질투로 유명하다.

그녀는 닌도쿠왕이 눈을 두리번거리는 것조차 못하게 하려고 해서 왕이 후궁을 들였을 때는 아예 왕을 떠나버렸다.

바위공주는 배를 타고 궁밖으로 나가 33년동안, 즉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그녀의 손녀 하에는 23대 겐소(顯宗; 재위 485-487)왕과 24대 닌켄(仁賢; 재위 488-498) 왕의 어머니였다.
  
  백제에서 오사카로 들어온 매사냥
  
  일본서기에는 왜를 무시하던 백제왕자 주(酒君)가 사슬에 묶인 채 왜사신들에게 넘겨졌는데, 왕자는 탈출해서

숨어있다가 사면되었다고 써있다. 아마도 백제에서 일어난 반란에 관련된 왕자가 바다건너 일본으로 탈출해 온 것을

그런 식으로 은폐해 기록한 것이거나 왕실의 볼모에 대한 반감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백제의 왕자였다. 그는 일본 왕실에 매사냥을 처음 가르쳐주었다.
  
  한 사냥꾼이 그물에 걸린 기이한 새를 왕에게 바쳤다.

무슨 새인지 왜인들은 아무도 몰랐으므로 백제왕자 주에게 물으니 그는 새를 잘 알아보았다. 그 새는 매였다.

주왕자는 즉시 매를 사냥용으로 길들여서 팔목에 앉히는 가죽끈을 매고 꼬리에 방울을 달아 닌도쿠왕에게 되돌려보냈다.

이후 왜는 백제로부터 응매를 수입했다.

닌도쿠는 응매를 데리고 꿩사냥을 해서 수십마리를 잡고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사냥매를 관리하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주왕자가 그 대장이 된 것은 물론이다.
  
  
쓰노다 류사쿠 교수가 본 닌도쿠왕릉 내부
  
  기마부족의 무덤은 그 크기가 대단하거니와 그중에서도 닌도쿠왕능은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이들 통치자 무덤중에도
 가장 규모가 크다.

이미 코카서스 지역에서는 백여년전부터 석실에 관을 안치하고 그 위를 잔돌로 채우는 석실무덤이 축조되고 시베리아를 건너 퍼졌다.

오늘날 한반도에도 봉분을 높이 쌓아올린 고분군을 많이 볼수 있으나 살아생전 무덤을 축조했다는 닌도쿠왕릉만큼

크지는 않다.
  
  그 왕릉은 오사카에서 좀 더 들어간 곳에 있는데, 길이가 475m에 세겹의 해자가 둘려 있다.

그후 임금에 대한 존경심이 별로 없어지면서 해자 두개는 농부들이 살금살금 논밭으로 만들고 지금은 한겹만 남았다.

능 내부는 2만6천개의 돌을 쌓고 그위에 흙을 덮었는데 원래 능역은 이집트 피라밋의 절반정도라 한다.
  
  능주변에는 호위용으로 제작한 진흙 토용이 몇겹이나 둘러져 있었다고 한다. 진흙토용은 잘 부서져 해자 물로 빠져

버리곤 했다.

그 중 몇 개가 다른 데로 치워졌다가 천황보다 장군이 더 막강하던 몇백년 동안을 견뎌내고 남았다.

일본서기에는 만개의 토용이 왕릉에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제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닌도쿠 능의 토용인지 다른 무덤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이들 하니와 토용은 그당시

부여기마족 임금과 그 백성들이 살았던 삶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냥용 매를 든 하니와 인형. 백제 왕자가 닌도쿠왕실에 매사냥을 가르쳤다. ⓒ프레시안

 

 


  일본당국은 ‘무덤속 임금의 뼈를 귀찮게 해드리면 안된다’는 이유로 능의 고고학적 발굴을 엄금하고 있다.

석기시대의 신화적 발상으로 천황 무덤까지 성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도 규슈의 대학 발굴단은 왕보다는 못한 귀족계층의 무덤을 발굴할 수 있었다.

나라ㆍ오사카 지역에 걸쳐 있는 수백년된 고분군은 천황 세력이 미약해지고 장군막부의 세력이 그를 능가하는

공포와 외경의 대상으로 지배하던 시대의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집트 나일강가 왕들의 계곡처럼 일본의 대형고분은 오직 나라- 오사카- 아스카를 잇는 지역에만 특징적으로 축조되었다.
  
  컬럼비아대학의 쓰노다 류사쿠(須田龍作) 일본사 교수는 1872년 태풍으로 닌도쿠왕릉이 일부 무너졌을 때 능이

보수되는 동안 내부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안에는 너무도 많은 대륙적 솜씨의 부장품이 있어 놀라웠다.

4세기에 살았던 이 임금은 한반도 한국과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부정할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 고 말했다.
  
  경주의 천마와 신또사당의 마굿간
  
  5세기 경주신라의 고분발굴을 이미 보고난 뒤라 닌도쿠왕능의 부장품 역시 그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보다 이른

시기의 원초적 물건들일 것으로 보인다.

일본으로 간 기마족들은 신라경주의 임금들만큼 정교한 솜씨의 장인을 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모든 대형 고분에서 공통적으로 볼수 있는 것이 부여의 천마 그림이다.
  
  여덟 개의 다리를 그린 천마도는 알타이에서 경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나타난다.

그림모양은 다르지만 어느 천마나 길게 빼어문 혀와 위로 솟구친 꼬리로 질주하는 속도를 표현하고 있어 샤먼지배자를 위한 천마로서 임무 수행중임을 말하고 있다.

천마는 임금을 태우고 마지막 안식처인 그의 사후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중인 것이다.
  
  일본에 산재한 많은 신또사당에 흰말에 대한 의례를 치르는 부속시설이 딸려있다.

칸막이를 한 곳에 검은 갈기와 꼬리를 단 실물크기의 석고나 시멘트 말상을 안치해 놓고, 금줄을 쳐서 부정타면

안되는 성역임을 표시해 놓았다. 말머리 앞에는 나무로 된 젯상도 놓여있다.

그 앞에서 읽는 축문내용은 무엇인가.
  
  이 시기의 기마족 출신 임금들은 문맹이었다. 405년 백제에서 왜로 보낸 왕인 박사가 비로소 일본에 학문의 직능을

전파했다.

일정 기간 한반도로부터 끊임없이 왜국으로 들어온 인적자원이 상황을 변화시켰다.

이들은 지식과 고급기술의 전수자들로 귀족지위와 신분을 부여받았다.
  
  기마족 왕실에 비단 짜는 직조기술을 가르쳐준 하따(秦)가문은 일종의 재무장관으로, 조정의 지출 관리를 하여

신뢰를 받았다.

또다른 한인 가문 소가(蘇我)는 모든 창고를 관리했다.

점차로 한반도 대륙에서 온,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지식인이 많아지고 이들 귀족층 다수는 한국이름을 그대로

지녔다. 815년의 인구조사에서는 일본 귀족의 30%가 일본인 아닌 외국인 조상을 둔 가계였다.
  
  495년 처음으로 곡수연(曲水宴)이 열렸다. 좋은 날 삼월 삼짇날에 열리는 것이었다.

초대받아 참석한 공경과 여인들은 굽어지며 흐르는 물길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물에 술잔이 띄워지고 그 술잔을 집어올리는 사람은 시를 지었다.

주목할 것은 신라에서도 포석정에서 이와같은 연회가 있었고 그 자리는 지금도 경주에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명의 세례는 기마족의 거친 면모를 부드럽게 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원문: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Japan's Hidden History(1984 한림출판사)
  위대한 부여족의 재출발 3 1984.9 월간 자유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7>

부여족의 이소노가미 신궁


후기의 기마족 지배자들
  
  기마부족 출신 닌도쿠왕이 죽자 두 아들이 왕위 계승을 위한 권력투쟁에 나섰다.

승자는 리츄(履中)왕이 되어 400-405년간 재위하며 일본 천황가계의 공식적 17번째 왕이 되었다.

왜에 온 기마족들은 서서히 유목민적 본성을 잃어갔지만 술 잘마시는 것은 여전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자 리츄가 술이 취해 일어나지 못했다.

옆에서 서너명이 부축하여 그를 말등에 태워서 도망하게 했다.’
  
  왕권경쟁이 일어나자 리츄의 동생은 궁에 불을 질러 경쟁자인 형을 죽이려 했다.

살해의 위협에서 도망나오고 술도 깬 리츄는 이소노가미(石上) 신사에 기거했다고 일본서기는 쓰고 있다.
  
  이소노가미 신사는 부여 조상 바위의 신사로서 이곳은 도피성역이었다.

리츄와 그 일당은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무기를 가다듬고 재정비했다.

리츄는 또다른 동생과 공모해 자객을 시켜 도전자인 동생을 죽일 계획을 짰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모역한 왕자가 집에 올 때를 기다려 칼로 찔러 죽였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가야금관과 비슷한 관을 쓴 일본의 하니와 인형 ⓒ프레시안

 

 

 


  이로서 리츄왕자는 도피성역에서 나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바위공주(이와노히메)가 낳은 아들이었고 다케우치의 두 후손 헤구리(平群)와 소가(蘇我) 두 가문 사람들을

조정의 중신으로 삼았다. 모든 것이 기마족의 지배아래 있었다.
  
  위기일발에서 헤어나온 리츄는 부여 바위(石上)신사의 음덕을 잊지 않고 신사 근처 이와레에 대궐집을 지었다.

이와레는 부여를 의미하는 ‘바위의 자손들’, ‘바위가문’, ‘로클링’의 뜻이다.

일본의 건국자로 알려진 전설적인 진무왕 이름에도 이와레가 들어있는데. 그는 초기 기마족 임금의 혈통을 이은 수

세대 후손으로 보인다.
  
  즉위하고 3년 뒤 리츄왕은 이소노가미(石上) 신사의 용도에 쓸 새 우물을 팠다. 왕은 그후 이런 말을 들었다.

“신기한 바람이 불더니 그 속에서 큰소리로 ’그대는 칼의 후계자이로다’하는 말이 들렸다”.
  
  이 공식 칭호는 중국계 한국인 하따가문 출신 왕비의 죽음을 귀신이 왕에게 알릴 때도 사용되었다.

이 당시 귀신에 대한 믿음은 지대한 것이어서 앞으로의 행동 혹은 과거의 행위를 판단케 하는 기적이자 에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당시 한국의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이미 받아들인 뒤였지만 신라와 야마도 왜왕은 아직 샤먼의 왕으로 통치했다.
  
  기마족의 6대 왕은 안코(安康; 20대 천황), 즉 평화의 왕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 5세기 초에는 평화아닌 다른 조짐이 있었다.

안코왕은 대궐을 도피성역인 부여 석상신궁 부근으로 옮겼다. 그의 일생은 격렬한 것이었다.

안코는 그의 형을 죽이고 형수를 빼았았다.

그가 무장을 풀고 더운물에 목욕중일 때 죽은 형의 7살난 아들이 아버지 대신 복수하여 그를 죽였다.
  
  바위는 부여의 정통성을 표시
  

 

 

 

나라현 天理에 있는 부여바위신사(石上신궁) ⓒ프레시안

 

 

 


  유리야꾸(雄略; 21대천황), 기마족의 7대왕은 일본서기에 기록된바 피묻은 손,

백성들이 사악한 임금으로 여겼던 왕이었다.

그는 즉위하자 모든 경쟁자의 일가 구족을 다 죽였는데 그 와중에 두 조카가 석상신궁으로 도피했다.

이들은 신궁 근처에서 농부로 자랐다. 어느날 왕의 사자가 와서 두 왕자에게 춤을 추어보라고 했다.

한 왕자는 더 이상 숨어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 다음의 시를 지었다.

일본서기에는 이렇게 기록됐다.
  
  석상신궁의 삼나무 줄기는 시달리고 가지는 모두 꺾였네
  이치노베궁에서 하늘아래 모든 것을 다스리던 자,
  조정의 오시하의 무수한 하늘, 무수한 땅, 8월의 아이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이 시는 두 초동(후일의 겐소(顯宗)왕과 닌켄(仁賢)왕)이 부여가계의 마지막 두 후손임을 알려준다.
  
  일본서기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유리야꾸왕 치세때 구니미라고 하는 왕실 목욕탕관리자가 왕실의 여성과 정사를 가졌다고 혐의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잘못을 고치게 하는 뜻으로 아들을 죽였다. 그리고 나서 왕실의 공주가 수치심으로 목매어 죽은 것을

알았다.

그 아버지가 공주의 배를 갈라보니 자궁에는 돌이 들어있었다.

관리시종의 아버지는 아들도 공주도 모두 무고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왜냐하면 부여기마족의 바위가계가 생겨난 바위돌은 바로 부여왕실의 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여석상신궁의 중요성이 감소되다
  
  결국 석상신궁의 두 고아 중 한사람은 498년 닌켄(仁賢)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젊은 날의 생명을 구해준 석상신궁에 대한 감사로 그곳을 대궐로 삼았다.

석상신궁 세력이 있고 그 이름을 받은 왕자도 있었지만 이제 기마족출신 지배자는 여타 귀족층들을 더 이상

통솔하지 못했다.

진고황후와 다께우치가 세웠던 부여기마족 가문의 혈통은 이때부터 힘을 잃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얼마 뒤 석상신궁의 관리권은 기마부족 지배자의 경쟁가문으로 후일 부여족의 마지막 직계손인

소가 가문을 거하는 데 힘쓴 모노노베(物部)가문으로 넘어갔다.
  
  
미친 무레쯔 ; 문학적 사실일 뿐?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다 나오는 무레쯔(武烈)왕은 정말 미쳤었나 보다.

아니면 이는 중국 역사가 늘 써먹던 대로 왕조가 바뀌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인가?

고사기에는 이 임금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고 일본서기를 명료한 영문으로 번역한 애스턴은 이 부분을 라틴어로

남겨놓았다.

이러한 수법은 중국역사에서 왕조역사를 바꿀 때 취하는 것으로 일본서기는 1권에서 2권으로 권을 바꿨다.
  
  무레쯔왕은 서양의 사드 후작을 연상시키는 행동을 했다던 사람으로 나무에 올라가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이고

뱃속의 태아를 확인한다며 여자들 배를 갈랐다. 그는 여성을 말과 교미하도록 했다.

그러한 황음은 왕조가 바뀔 것을 예고하는 것이며 그 뒤를 이은 게이타이(繼体)왕은 타협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왜족-일본의 피와 부여 기마족의 피를 반반씩 나눠가졌다. 실제로 먼저 후보자는 왕위에 접근했다가

달아나서 숨어버렸다. 임금이 된다는 것은 때로 오래 살고봐야 되는 일이기도 하다.
  
  중도파 게이타이왕은 대궐을 이와레(록클링)에 세웠다. 이곳은 진고왕후, 리츄, 세이네이(淸寧) 왕이 거처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 사실은 새로운 혈통의 지배자라 해도 기마족혈통의 정통성 한부분만은 흔들지 못했음을 알게 한다.

30대 비다츠(敏達)왕대에는 구다라(백제)에 대궐을 지어 옮겼는데 그 후대에는 도로 이와레로 옮겨갔다.
  
  새로운 활동중심지는 한국에서 온 첫 기마부족 임금능이 있는 우네비산에서 4km 떨어진 아스카가 되었다.

552년 불교유입은 용감한 큰 곰 다케우치에서 비롯된 기마족의 또다른 후예, 소가가문 여러 인물의 권력독점으로

이어졌다.

예술과 종교정치의 강력한 후원자, 646년 소가가문의 종말을 고할때까지 6-7세기 일본의 전통확립에 지울수 없는

자취를 남긴 사람이 소가였다.
  
  원문: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Japan's Hidden History(1984 한림출판사)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8>

천왕가계의 한국산신과 삼종신기


일본천황 계보에 따라붙는 한국 산신-고황산령신
  
  오진왕의 아버지, 다시 말하면 진무왕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규슈의 한 산꼭대기에 내려온 ‘천조대신의 손자’였다는

설화는 즉 바위, 혹은 산을 숭상한 원시신앙을 뒷받침해주는 이야기다.

일본서기는 그를 니니기노 미꼬도(瓊瓊梧尊)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니니기는 ‘위대한 산신의 딸’을 만나고 그로 인해 ‘산신의 딸’이 아기(역자주; 니니기를 말한다.

코벨은 이 부분에서 니니기의 아버지, 즉 천조대신의 아들을 니니기로 혼동한 것 같다.

산신의 딸과 결합한 것은 니니기의 아버지다)를 갖게 됐다고 했다.
  
  이 또한 단군설화와 비슷한 이야기다.

따라서 일본왕가의 계보에는 천조대신등 자연현상이 인격화된 여러 신들 가운데 산신(山神)도 분명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화와 전설이 뒤섞인 이 고지식하고 천진난만한 역사가 후일 충성심을 가진 백성이라면 누구도 겉으로는

의심할 수 없는 신또의 ‘종교적 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 절에 많이 걸려있는 산신도. 한국의 산과 호랑이를 배경으로 한 산신은 일본에서 고황산령신이라는 천황가계의 한국산신으로도 나타난다. ⓒ프레시안

 

 

 


  역자주; 니니기의 외할아버지가 된 고황산령신(이 글에 산신으로 나와있는)에 대해서 최태영저 ‘인간 단군을 찾아서’

의 ‘다카모토(高本政俊)의 가야지명과 高木神(高皇産靈神; 다카미 무쓰비노 미코도 혹은 고마노 가미)’ 항목 및

‘환국과 단군과 조선’ 을 참조하기 바란다.
  
  천조대신의 아들과 고황산령신의 딸이 결합하여 일본 왕가의 첫 조상 니니기를 출생시킨 이야기에서 고황산령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다카모토의 일본 고대지명 연구가 소개되어 있다. 고황산령신은 결국 고령가야의 한국인이었다.
  
  코벨은 일본왕가의 최고조상이 한국산신임을 밝혔고 최태영은 고황산령신의 존재를 문헌연구로 밝혀냄으로서

일본왕가의 최고조상이 한국 가야에서 간 사람(산신으로 받들어지는)임을 분명히 했다. 중요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코벨의 윗글 두 번째 문단에는 천조대신의 손자 니니기가 천조대신의 아들로 잘못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왕실의 ‘삼종 신기(三種 神器)‘ 라는 거울, 칼, 곡옥은 어떻게 그리고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
  
  
1. 거울
  
  옛날 야요이인들은 중국에서 수입한 청동거울을 부장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나라때 중국에서 거울을 일종의 주술도구로 사용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인데 거울과 그 속에 비치는 영상이 두 개의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태양숭배사상에 관련된 것이다.

햇빛 없이는 곡식이 자랄 수 없는 까닭에 전세계를 통하여 고대 농경시대에는 태양숭배가 널리 퍼져있었다.

거울에는 또한 사람의 얼굴도 비쳤으므로 거울이 영혼을 나타낸다 하여 죽은 사람의 가슴에 올려놓고 묻었다.
  

 

 

 

동경은 삼종신기의 하나이다. 백제가 일본에 동경을 선물로 보냈다. 오진왕을 받드는 가마쿠라 핫치만신사에 소장된 이 거울이 그 거울인가? ⓒ프레시안

 

 

 


  기마인이 도착할 무렵에는 일본에서도 스스로 청동거울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 초기단계라 어떤 것은

중국것을 본따 만들기도 하고 어떤 것은 비교적 새로운 모습을 한 것도 있었다.

기마인의 정복과 함께 소개된 발달된 금속기술이 일본으로 하여금 점차 대륙으로부터의 수입을 줄일 수 있게 해준

것으로 짐작되는 현상이다.
  
  경주에서 출토되는 5-6세기 신라의 신관통치자,

즉 무당왕들이 썼던 금관에는 금으로 만든 조그맣고 둥근 금판이 많이 달려 있다.

그 위에 비쳐 반사되는 빛은 태양을 연상케 한다. 한국의 샤머니즘도 시베리아와 마찬가지로 태양숭배 요소를 갖고

있었다.

추운 북방지역에서는 태양이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므로 북방의 고대인들은 대부분 태양을 숭배대상으로 삼았다.
  
  일본의 태양숭배는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라는 태양의 여신으로 의인화 되었으며 천조대신은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태양 숭배는 부여족이 일본에 당도하면서 더욱 열기를 띠고 보다 발달된 형태의 주술 신앙으로 바뀐다.
  
  일본서기가 편찬된 8세기에 이르면 태양숭배는 다른 모든 주술신앙을 누르고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의 통치가문에게 만세일계의 훌륭한 혈통을 만들어 주려면 태양의 여신에게까지 족보를 연결지을

수밖에 없었다.

삼종신기 가운데 거울은 태양숭배사상이 인격화된 천조대신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13-16세기 콜럼비아 인디오 샤먼남자의 금관은 신라금관 비슷한 형태이며 콜럼비아 무이스카부족왕의 즉위식을 기록한 조각에도 왕의 금관에 둥근 원판의 금환이 달려있다. ⓒ세계장신구박물관


  2. 칼
  
  칼은 야요이시대 이즈모(出雲)에 세력을 구축한 초기 한국이주민들을 상징한다.

칼은 무력의 상징으로 경주지역 5세기 한국왕들의 무덤에도 함께 묻었던 물건이다.

미추왕능으로 알려진 경주고분 출토의 칼은 스키타이적 배경을 말해준다.

이것은 역대 왕에서 칼의 후계자인 다음 왕권자에게로 전래되던 보물이었을 것이다.
  

 

 

 

미추왕릉으로 알려진 경주고분 출토 스키타이 양식의 칼. 코벨은 이 칼이 신라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리라고 말한다. ⓒ프레시안

 

 

 


  일본에서 천황의 신기로 받드는 칼은 옛 문헌에도 나와있는 폭풍 신,

또는 성급한 남신으로 불리는 스사노오(須佐之男 또는 素잔鳴尊)의 소유였다.

스사노오는 신라에서 건너온 실존 인물로 그의 아들은 신라에서 옷감을 취급하던 상인이었음이 일본서기에

암시되어 있다.

오늘날 이즈모대신사는 바로 이 스사노오를 받드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신사이다.

그는 머리가 여덟개 달린 용에게 여덟통의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그 용을 죽이고 기적적으로 이 칼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그는 이 칼을 여동생인 태양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에게 주어 보관토록 하였다는데 문헌에서는

오로시노 가라스끼, 즉 ‘한국의 용검’ 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2세기 일본에서는 다이라(平)와 미나모토(源) 두 무인가문이 적이 되어 세력쟁탈을 벌였다.

1185년 5백척의 다이라 가 함대가 7백척에 이르는 미나모토 가의 함대를 만나 싸우게 되었다.

이들은 노를 저어가는 조그만 배를 타고 싸웠는데 배에는 아무런 무기도 부착되어 있지 않았으며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활로 쏘고 가까이 접근하면 칼로 치는 싸움이었다.

당시의 해상전략이란 바람부는 방향에 활을 맞추고 화살을 갈아 끼우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다이라 편의 한 무사가 이탈하면서 전세가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당시 싸움에서는 이기는 쪽을 찾아 이탈하는 이같은 행위가 빈번히 일어났다.

다이라는 패배하고 6살된 안덕천황이 타고 있던 배마저도 포위되었다.
  
  그러나 미나모토편 무사가 배에 올라타기 전에 다이라 기요모리의 미망인이자 안덕천황의 외할머니가 어린 천황을

품에 안고 바다 속에 뛰어들었다.

천황의 어머니와 친할머니인 태후도 뒤를 따랐다. 그때 그녀의 손에는 삼종신기가 들려있었다.
  
  태후는 즉시 구출되었고 삼종신기 중 동경(거울)과 곡옥은 건져내었으나 성급한 폭풍의 신 스사노오가 여덟 개의

머리를 가진 용에게서 뽑아내었다는 한국의 용검은 끝내 건지지 못했다.
  
  3. 곡옥
  

 

 

 

황남대총 북분 출토 신라 금관. 곡옥은 한국의 백제와 신라 왕들의 고분에서 너무나 많이 출토되는 장신구이다. 금관에도 곡옥이 수십개씩 달려있고 왕의 가슴을 장식하는 목걸이 귀걸이 허리띠 어디에나 한국특유의 곡옥이 장식돼 있다. 둥근 원판의 금환은 태양을 상징한다. ⓒ프레시안

 

 

 


  삼종신기 중 세 번째는 구부러진 모양의 곡옥을 꿰어만든 목걸이로서 일본인들이 이것만은 그들 고유의 물건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곡옥은 일본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는 경옥(硬玉)으로서 한반도 북부나 투르키스탄에서만 나는 보석이다.

곡옥으로 만든 이 신표는 태고로부터 특별한 주술 능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져 한때 이것을 소유한 자가 합법적인

천황으로 간주되었다. 1920-1930년대에 걸쳐 초군국주의가 휩쓸 무렵 일본인들은 그들이 마가따나라고 부르는 이

물건이 일본 고유의 유물임을 특히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고고학자들은 곡옥을 일본보다는 한국에서 더 많이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곡옥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양식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이 구부러진 모양의 구슬을 곡옥이라고 부르며 백제, 경주의 왕릉에서 출토되는 목걸이, 금관 등을

장식하고 있어 흔히 보는 물건이다.

여하튼 곡옥은 왕권, 혹은 지배계급의 세력을 나타내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이 곡옥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며 구부러진 모양도 조금씩은 다르다.

올챙이 같기도 한, 아주 어린 태아의 모습이기도 한 것을 보면 이것은 다산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물고기같이도 보이는데 물고기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다산과 풍요를 뜻했다.

일본에서는 잉어가 지금도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음식으로 쓰인다.

어떤 사람들은 곡옥을 두 개 마주보도록 놓으면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부여족의 정벌 이후 일본은 시베리아 양식의 샤머니즘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으므로 동물을 상징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곡옥은 곰의 발톱으로도 보인다. 그렇다면 단군의 어머니가 곰토템의 웅녀였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더 나아가 일본의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은 오늘날까지도 곰을 신으로 섬기고 있다.
  
  369년 북부여의 유민을 이끌고 일본원정길에 오른 신공왕후의 측근 다께우찌의 별명이 용감한 큰 곰이었다는

사실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 남아있는 샤머니즘, 즉 무속신앙에서는 호랑이가 악귀를 쫓아주는 수호신이다.

그리고 보면 곡옥이 악귀로부터 무덤주인을 보호해 주는 ‘호랑이 발톱’ 일 수도 있다.

샤머니즘의 주변에는 항상 악귀라는 존재가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산 또는 바위를 숭배하는 관습은 한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무속신앙을 나타내주는 민화에서는 호랑이가 항상 산신의 옆에 있다.

또한 바람신 스사노오가 태양의 여신인 아마데라스의 곡옥을 씹어 삼킨 후 여러 신을 낳았다는 일본의 신화도 있으니 이 많은 이유들로 하여 곡옥은 신성시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삼종신기가 모두 고대 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무력으로 구체화되는 초자연적 능력을 상징하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이같은 삼종신기가 짝을 이룬 것은 부여기마족이 통치하던 시대의 일이었다.

후대에 가서 많은 천황들이 어떤 것은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조품을 만들기도 하여 세월따라 우여곡절을 겪었다.
  
  1930년대 초군국주의가 일본을 휩쓸 즈음에는 심지어 ‘성스러운 천황’만이 이들을 볼 권한을 가졌다며 다른 사람이

보면 충격을 받아 눈이 멀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세대신궁에서 이들을 다루는 관리인들은 흰장갑을 끼고 붕대같은 것으로 눈을 가리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에는 이‘신성한 천황의 신기‘들이 험하게 막 다뤄지기도 했다.

따라서 5세기 삼종신기의 원본은 이미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는지도 모른다.
  
  역자주; 일본서기 중애왕 8년 춘정월 4일 조에 이런 구절이 있다. ‘

천황이 축자(후꾸오카)로 갔다. 그때 강현주의 선조 웅악(熊鰐)은 천황의 거가가 왔다는 것을 듣고, 미리 5백지의

현목을 뿌리채 뽑아 구심(九尋)의 뱃머리에 세우고, 상지(上枝)에는 백동경을 걸고, 중지에는 십악검(十握劒)을

걸고, 하지에는 팔척경(八尺瓊)을 걸고서 주방의 사마의 포구에 마중나왔다.’

 전용신의 일본서기에서 옮김.
  
  이처럼 세가지 특정한 물건을 지정하여 이들이 왕가에 초자연적 능력과 함께 그 합법성을 부여해 준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함은 곧

지역에 따라 산만한 집합체를 이루었던 다양한 형태의 원시신앙이 보다 통일된 모습의 종교로 변천하였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같은 사실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부여라는 한 씨족이 통일된 지배체제를 이루고 다른 씨족들을 일종의

봉건적 신하로 받아들였으리라는 점이다.
  
  
원문: 위대한 부여족의 재출발 3 월간자유 1984. 9    이주 한국인 후손들의 천년성 월간자유 1985. 3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29>

부여족의 변신


지배가문들이 보다 뛰어나기 위해서는 항상 적절한 ‘조절정책’을 써야 하는 법이다.

이 때문에 부여 통치자들은 일본 안의 다른 씨족뿐 아니라 가야의 葛城(갈성; 가쓰라기) 가문 딸들과도 혼인하였다.

이러한 조절정책은 1세기 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가야호족 갈성가문의 딸 바위공주는 닌도쿠왕에게 시집갔고 하에는 겐소와 닌켄 두 왕의 생모였다.

이러한 갈성집안은 그 시조가 신화와 연결되어 있을 만큼 명문귀족이었다.

그들은 기마족 통치자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으며 가문의 여자들을 왕비로 들여보내 미래의 통치자들을

낳도록 했다.
  
  그러나 부여족은 호사스러운 대궐 생활로 나약해지면서 점점 초기의 호전적 성향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권력계승에 따르는 충돌과 도전이 끊임없었다.

6세기에 와서는 마침내 갈성가문 출신의 비와 갈성 아닌 다른 씨족 비에게서 낳은 이복형제들간에 싸움이 일어나게

됐다.

이런 사건만으로도 분명 혈통의 단절을 나타내준 것이지만 후대 사가들은 오직 만세일계의 천황혈통을 주장하기

위해 이를 사실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유라쿠왕대
  
  유라쿠왕(雄略천황)이 가쓰라기산 정상에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일본서기에 분명히 나와

있다. 유라쿠왕은 갈성 가문이 아닌 다른 가문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자기와 꼭같이 닮은 상대방에 감탄하여 차고 있던 칼과 활과 화살을 모두 벗어 갈성산이 의인화된 듯한 이

인물에게 바쳤다고 한다.
  
  일본서기 기록자들은 두명의 통치자가 양립해 있던 당시 상황을 말하는데 이처럼 애매하기 짝이 없는 서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통치자인 천황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하여는 왕의 혈통을 만세일계라고 밀고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유라쿠왕 시대에 있던 또하나의 독특한 이야기는 왕의 보관에 얽힌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만약 그 당시 일본이 신라처럼 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 경주고분에서 출토되는

5세기 신라금관과 같은 것을 만들었으리란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출토된 관은 모두 금관이 아닌 금동관 들이다.

그 중 아주 흥미로운 양식의 관 하나는 살찐 몽고말이 걸어가는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이 시대에는 왕후가 직접 누에를 키웠으며 하따가문의 양잠기술자 조직을 재정비하기도 했다.

유라쿠는 또 백제왕에게 전문기술인을 보내달라고 요청, 백제로부터 도공들이 왔다.

이들이 만든 도자기는 유약을 입히고 아주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으로 왕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깨끗한 그릇’

으로 불리었다.
  
  이 시대 일본의 왕은 ‘성스런 은둔자’로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왕은 여럿과 어울려 사냥하고 향연을 베풀고 여러 행사에서 사람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도전은 끊이지 않았다. 507년에 왕조의 교체가 있었다는 징후가 확실하다.
  
  부여계 통치가문과 중국기록에 왜(倭)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토착세력간에는 이미 수많은 혼인관계가

성립되었지만, 부여기마족이 쇠락하면서 왕권경쟁은 내란 상태로까지 돌입했다.

중국역사에 ‘倭 5王’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만세일계의 지배가문 개념에 맞는 족보를 꾸며야 했던 8세기 일본 사가들은 이 부분에서도 많은 모순을

남겨놓았다.
  
  
새로운 국면- 게이타이 왕
  
  507-531년의 재위를 누린 게이타이왕(繼体천황)은 일본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토착세력인 倭의 왕 게이타이가 시작한 새출발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527년 규슈 북부에서 이와이(岩井)의 반란이

일어났다.

규슈의 강력한 세력권자이던 부여기마인들이 왕조교체에 반발한 것이다.
  
  그들의 저항은 일년 넘게 지속됐다. 그러나 가야에 부여족들의 근거지는 이미 쓸모가 없어진 뒤였다.

백제가 먼저 가야 일부를 점령했고 뒤이어 신라가 가야를 완전히 함락해 버린 것이다.

가야 북부지방이 망한 것은 532년이고 562년에는 남부지방까지 함락되었다.
  
  따라서 일본에 가있는 부여기마족의 왕권은 본토로부터 아무런 후원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패기와 혈통만은 그대로 남아있어 오래지 않아 일본을 보다 빠른 개화의 물결로 몰고

들어가면서 최초의 강력한 정부형태를 만들게 되었다.
  
  
일본사에 변혁을 일으킨 부여족 후손들
  
  부여족들은 그러나 결코 오랫동안을 그늘에 묻혀 지내지는 않았다.

몇십년 지나지 않아 부여족은 국정을 총괄하는 신하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倭의 토착혈통을 가진 왕실에 딸들을

시집보냈다.

부여족들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사실상의 통치자로서 권력을 행사하여 불교를 육성하고 일본 역사에 또하나의

거대한 변혁을 불러 일으켰다.
  
  6세기 후반에는 우지(氏)라는 많은 귀족가문 사이에 끊임없는 투쟁이 일어났다.

우지제도는 이후 1500년에 걸쳐 일본을 지배하게 되므로 여기서 분명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일종의 봉건제도로, 그 기원은 부여기마족이 휘하에 많은 씨족들로 된 귀족세력을 거느리고 마치 대가족의

가장처럼 이들을 모두 만족시켜주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던 방편이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중요한 우지들의 조상을 신화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밝혀주고 있다.

즉 중요한 귀족가문은 이와레 왕자나 천조대신의 손자 니니기 등을 수행한 ‘거룩한 신’들을 조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각 가문의 우두머리는 갈라져 나간 고우지(小氏)의 모든 일족을 다스렸다.
  
  한편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계통도 성립되었다. 모든 왕명은 국정을 총괄하는 大臣 또는 大連을 통해 하달됐다.

우지 아래에는 농민과 기술자들이 종속되어 노역을 했다. 이들은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들 중에는 죄를 지어 노예가 되었거나 규슈남부의 구마소(熊襲) 전쟁포로들도 포함돼 있었다.

(필자의 견해로는 구마소는 남양으로부터 들어온 이주민의 일부였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종족이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지금도 규슈 남부 농민중에는 다른 일본인과 약간 다른 용모를 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먼 옛날 이들 남방혈통이 섞여 들어왔다 해도 그 수효는 한국에서 건너간 정착민에 비하면 극소수였다).
  
  이즈음 외국, 특히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전문기술인 집단 베(部)를 형성했다.

그중에는 중국 진(晋)나라 망명인들로 구성된 집단도 있었다.

비단 짜는 일이나 옷 만드는 것 같은 특수한 기술을 지닌 외국 도래인들은 일본에서 대환영을 받았다.

마침내 수입된 외래기술을 전문으로 맡아하는 部의 수효가 7백을 넘게 되었다.

이들도 우지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 반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처럼 실질적인 일은 모두 우지가 맡아 했으므로 군주는 사실상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6세기의 왕들은 모두 있는지 없는지 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백성을 대신해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일은 그들이 의무로 남아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반(半)종교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샤먼통치자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수십년에 걸쳐 천황에게 허위로 씌워진 것 같은 ‘신성한’ 후광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어 최소한의

권위는 남아있었다.

사실상 천황을 완전히 뒷전으로 몰아낸 것은 후지와라 가문의 신하들이 시작한 일이었으므로 그때까지는 나중의

후지와라 시대 천황들처럼 시나 쓰고 정원에서 빈둥거리다가 제사지내는 일로 소일할 만큼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았다.
  
  어느 시대 어느 가문을 막론하고 실권을 잡은 사람들은 정략결혼이라는 권력유지의 방편을 애용했는데 피가

섞이고 묽어지면서 본래의 유전인자는 더 찾아내기 어려워졌다.
  
  일본은 그들이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석기시대 이후 남방인이든 기마부여족이든 바다를 타고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수천년을 두고 혼혈을 이루어

왔다.

오늘날 버스나 기차 속에 앉아 둘러보면 남방의 구리빛 피부를 가진 사람부터 북방 코카시안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일본에 살고 있음을 느낄수 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말하면 귀족계급은 한국인처럼 높은 코를 가진 반면에 농민들 코는 콧잔등이 낮고 콧구멍이

옆으로 퍼져 한국인의 코로는 보이지 않는다.
  
  ‘천황가족’은 항상 귀족형의 얼굴을 가진 것을 자랑으로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땅히 말과 선진무기를 배에 싣고 와 일본땅에 지울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부여기마족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원문; 위대한 부여족의 재출발 3 월간자유 1984. 9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30>

한국의 무속과 신또 액막이



이번 회부터는 한국에서 일본에 전해진 무속, 불교 등에 관한 글을 20회 가량 연재할 계획이다. 필자
  
  한국이 신흥종교 많기로 세계제일이라지만, 일본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한국의 신흥종교는 기독교적 요인들이 끼어들고, 일본의 신흥종교에는 무속 신또신앙이 끼어든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불교 선(禪)에 관한 강의차 1981년초 며칠 일본에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음력 정월초하루 설날이 들었다.

종교가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는 참으로 흥미롭다.
  
  교토 외곽 아야베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맞은 제야의 밤 행사는 일본의 신흥종교로서 신또의 이름으로 가려진

무속의 흔적이 역력했다.

매우 추운 제야의 밤 새벽 2시반, 3만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모였다. 추워서 모두 떨고는 있었지만 진지했다.

오오모토라는 이름의 신식 신또행사였다. 액막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갖가지 의식은 무속 그 자체였다.
  
  2천년전 야요이족이 후진 생활조건에 있을 때 한국인들이 부산(그때는 이런 이름이 아니었겠지만)에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오면서 액막이하는 의례도 따라 들어왔다.
  
  초기 무속의 중요한 핵심은 모든 자연에 신이 깃들여 있으며 인간의 행ㆍ불행은 이들이 좌우하지만 액막이를 통해

미리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액막이에 쓰이는 방법은 불로 태우거나 물로 씻어내는 두가지 정화방식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수많은 춤과 지팡이 흔드는 행위가 따른다.
  

 

고도의 금속기술과 황금을 써서 만들어진 5세기 경주의 아름다운 무속 예술품 왕의 허리장식띠. 금관총에서 나온 이 허리띠에도 물고기와 곡옥, 칼 등 무속적 왕권을 상징하는 많은 물건이 달려있다. ⓒ프레시안


  오오모토라는 신흥 신또종교도 설 전 음력 그믐날의 물로 씻는 액막이행사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한밤인 2시 반, 오래된 옛날 악기 고토, 1천년전 한반도 가야의 가야금에서 유래된 악기의 음악에 맞춰 줄을 지어서

소리없이 걷고 있는 사람들은 흡사 유령들 같아 보였다.

일본의 고토는 한국의 가야금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나 약간 변형되어 있는 악기다.
  
  고토의 느리면서 폐부를 찌르는 듯한 현의 소리에다가 행렬 앞에서 인도하는 횃불빛에 어른대는 그림자들이 칠흑같은 밤을 수놓았다.

이런 일을 하는 주목적은 여기 참석한 사람들에게 지난 한 해의 묵은 찌꺼기는 다 쓸어버리고 깨끗하고 밝은 새해를

맞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대 신또무속의 액막이 물씻기가 일본의 천년 고도 교토에서 몇리 안 떨어진 이곳 아야베의 다리위에서

그대로 행해졌다.

신기한 것은 한국에서 문선명의 통일교에 서양인들이 많듯 오오모토 교도중에는 일본인 아닌 서양인도 많다는

것이었다.
  
  고토음악과 불밝힌 횃불속에서 액막이의 핵심행사인 히토가야 무속의례가 치러졌다.

일종의 막대인형이 여기 나온다.

종이로 사람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기모노 인형옷을 씌우고 먹글씨로 자기 이름과 나이 주소를 썼다.
  
  오오모토교를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안 믿는 사람도 히토가야를 해두는 것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해 저마다 인형을

자기 분신으로 지녔다. 30만명의 신자들이 이 신흥 신또인 오오모토교도라 한다.

나는 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 여기 참석했을 뿐이다.
  
  새벽 2시 반의 그 기이한 행진에 앞서 사람이름 등을 쓴 이들 인형은 이 행사의 정신적 지도자가 지팡이를 휘둘러

신통을 부림으로서 ‘액막이’를 마쳤다. 수많은 히토가야 인형은 한데 모아서 큰 질그릇 항아리 속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새벽 2시 반 정각에 항아리를 깨뜨리고 그 안에 든 것을 교토외곽을 흐르는 강물 속에 모두

던져버렸다. 유라강을 건너지른 다리 너머로 30만개의 종이인형이 떠내려갔다.
  
  이것은 기독교의 침례도 아니고 불교의식도 아닌, 신흥 무속신또라 하는, 오늘날(1981년 현재) 일본에서 성하는

신흥종교다.

신도로서가 아니라 나처럼 그 뿌리를 간파해 내려고 참가한 존재는 이 ‘신흥’ 종교에겐 별로 달가운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오오모토교의 지도자와 부지도자 모두를 아는데 아마 이 글이 나간 뒤에는 그들이 나하고 말을 안하게 될지

모른다.
  

 

 

 

방울 달린 모자를 쓰고 칼을 찬 일본 5세기 무당형상. 선사시대 한국과 일본에서 남자무당이 입었던 차림새를 연상할수 있다. ⓒ프레시안

 

 

 


  어째서 일본은 그들이 한국문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그토록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러한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다.
  
  다리 위에서 죄를 물에 떠내려 보내는 섣달그믐 새벽의 액막이에 이어 교토 외곽 이나리신사에서는 요즈음 보기

힘든 불에 소각하는 액막이도 보았기에 여기 쓴다.

이 행사에는 수천명의 일인들이 모였는데 백인은 나하고 아들 알란 코벨 두사람 뿐이었다.
  
  송판으로 짠 관이 네군데 놓여있었다. 막대기-젓가락짝에 먹글씨로 자기 이름을 써서 관속에 넣도록 돼있었다.

이 방식은 한밤중에 횃불을 들고 움직이는 오오모토 정화식보다 확실히 비용이 덜들고 간단하다.

물이 아닌 불로 정화재계를 하는데 액막이라는 근본은 같다.
  
  사람들은 행사가 시작하기 1시간 반전부터 모여들어 관주변 땅위에 자리잡고 먹물과 붓을 받아 젓가락에 이름을

썼다. 그리고는 주머니사정에 맞춰(또는 죄의식 정도에 맞춰?) 얼마간의 돈을 신사에 바쳤다.
  
  이날 행사장에 와서 그런 위패를 쓰지 않은 사람은 나하고 아들 알란 둘뿐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아주 싼값으로 죄의식과 치욕감을 씻어내려는 방법이긴 했지만, 우리 둘은 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미국인으로서는 이름을 쓴 막대기가 사람을 대신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신또 신이 영어이름을 읽을 수 있을라나? 나는 학자 한 분이 지어준 일본이름도 있지만 억지에 가까웠다.

불교이름도 있지만 그 이름을 신또행사에 내놓기도 적당치 않아보였다.
  
  이나리 신사는 쌀의 여신만이 아니라 그 전령인 여우 이나리도 받들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무속에서 산신령의 심부름을 하는 호랑이와 비슷한 존재로 보였다.
  
  일본 어디를 가나 논 한가운데 두 개의 돌기둥을 세운 조그만 신사가 있고 여우가 문을 지키고 있다.

한국에 산신각이 있는 것보다 더 많아 보인다. 산신각은 아무데나 있지 않고 반드시 절 안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떠밀어 맨 앞줄에 세웠다.

일본인들은 지난 한해의 악을 다 불태워 없애고 새해를 맞는 오래된 행사에 외국인이 와있다는 사실이 기쁜 듯했다.
  
  흰옷을 차려입은 궁사가 옛날 소라껍질을 불었다.

그 소리는 주변 소나무숲에 울려퍼지면서 자리에 앉아 식이 진행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오싹한 느낌으로

와닿았다.
  
  10여명의 궁사들이 나와서 4개의 관짝이 놓인 방향으로 각각 걸어갔다.

관에는 이름을 쓴 젓가락짝이 잔뜩 들어있고 늦게온 사람들이 계속 그 위에다 자기 젓가락을 던졌다. 팔을 흔들며

이런 저런 의식이 지속되다가 원초적 방식으로 마침내 불이 댕겨졌다.

일본인들이 ‘火木’이라고 부르는 것을 마주쳐 불꽃을 일으키고 불을 지피는 것이었다.
  
  어떤 신사에서는 이 원시적 화목을 일부러 기르기까지 한다.

그리고 주술 지팡이를 만드는 성목나무도 가꾼다. 승려들은 이 나무에 종이를 모양대로 접어 매달아 두는 데 쓴다.
  
  종이는 오랜 동안 신또에서 성스런 물건으로 취급돼 왔다. 화목으로 쓰는 나무는 히노끼라고 하고 성목은

사사끼나무이다.

일본의 무속신화에 따르면 사사끼 나무에는 500개의 곡옥이 달려있었다.

경주고분에서 수없이 많이 출토되는 그 곡옥말이다.
  
  신사의 새해맞이 행사에는 으례 빨갛고 파란 색종이를 물고기나 벚나무처럼 오린 장식품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옛날 동전, 물고기 같은 것들을 기념품으로 판다. 물고기는 고대에서 풍요의 상징이었다.
  
  경주고분에서 나온 아름다운 금제허리장식에 매달린 그 아름다운 물고기를 떠올려보라.

그로부터 1500여년이 지나 일본 신또에서 파는 플라스틱 물고기막대는 그 옛날 신라의 솜씨 뛰어난 장인들이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 만들었던 그 허리띠 물고기의 후신이라 할 만하다.
  
  나는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무속은 옛날에 어땠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 원형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한국무속은 서기 5세기까지 수백년동안 일본으로 흘러들었고 거기서 신또로 정형화되며 번성했다.
  
  일본에 아직도 전해 내려오는 신또의식과 상징을 자세히 고찰하면 한국무속에 관한 것을 꽤 많이 알 수 있다.

그렇다. 일본인들은 거의 이 사실을 모르지만 한국문화는 일본 곳곳에 뿌리박고 퍼져나가 전래됐다.
  
  말하자면 한국무속에서 중요한 자작나무는 일본에서 사사끼 나무로 변했다. 5세기의 그처럼 아름다운 신라금관에

금으로 형상화된 우주수목은 바로 샤머니즘에서 받드는 자작나무였다.

세상은 그렇게 넓지 않은 것이다.
  
  내 아들 알란 코벨은 한국사를 연구하는 중인데 한국이 초기 일본역사에 미친 확고한 영향의 여러 가지 내용을

증명해낼 작정이다. 그가 힘을 내서 이일에 정진하기를 바란다.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1981년 현재) 한국의 학자들은 그렇게 겁을 먹고 움추려 있는 것인가?

지금의 나이든 학자들은 과거 일본사람 밑에서 공부했기에 그들에 대한 무슨 의리나 의무같은 게 있어 그러는 것인가?
  
  아직 서른이 안된 젊은 학도들은 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을 테니까 이들은 박차고 일어나 진실을 밝혀서 켸켸묵은

주장들을 일소해 버렸으면 한다.
  
  원문: 2:30 a.m. Lunar New Years's 'Purification' 1981. 2. 15 코리아타임스
           Midnight 'Purification' By Fire (Shinto-Shaman)1981. 2. 18 코리아타임스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31>

서울서 산 한국의 고대동경



나는 지금 1960년대 말 덕수궁을 찾아가다 길을 잃고 우연히 들렀던 골동품집에서 산 두 개의 고대 청동거울을

꺼내보고 있다.

그 가게는 지금 없어졌다. 주인은 고령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그는 그때 ‘고려시대 것’이라는 동경 두 개를 내보였다.

그것은 고대 중국 동경이나 일본 동경보다 얇았다. 주인은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금속합금을 했어요.

니켈을 더 넣었거든요'라고 말했었다.
  
  어찌됐든 동경 두 개는 모양이 각각 달랐다.

하나는 연잎모양 팔각형의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듬성듬성 이가 빠졌다.

고려때는 불교가 성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가 된다.

그 안쪽에 원이 둘러져 있어 8개 연꽃 화판을 지탱하는 듯하고 그 외 희미한 꽃무늬 혹은 잎새무늬가 있다.
  
  동경 두 개 모두 아주 얇고 지름은 7센티 가량 된다.

그렇지만 전혀 고려시대 동경 같지 않다.

오히려 중국 한나라 동경에 더 가깝지만 그러기엔 이들 동경은 너무 얇고 무늬도 너무 단순하다.

한나라때 동경은 대부분 네 방위를 나타내는 사신도나 12지의 동물, 혹은 도교의 상징으로 서방세계를 지배하며

유명한 천도 복숭아밭을 갖고 젊음과 사랑, 장수를 상징하는 서왕모를 흔하게 새겨 넣었다.

이런 서왕모상은 지금도 한국의 절 명부전에 지장보살과 함께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영원한 젊음과 사랑의 상징인 그녀의 존재는 명부전의 세 벽면에 꽉 들어차 똑같이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는 10명의

저승 심판관 시왕들로 인한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 경쾌하게 해주는 듯 하다.

(이 말을 직접 확인하고 싶거든 당장 신촌 연세대 북쪽에 있는 봉원사에 가서 고인들의 명부세계를 모시는 명부전

건물에서 그 그림을 볼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이런 동경은 모두 죽은 자를 위한 부장품으로, 고인의 가슴 위에 얹어 함께 장례 지냈다.

중국 한나라(서기전 220-서기 216년)시대 동경은 상당수가 발굴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중국제를 모방한 동경이 더러

나왔다.

한국의 동경은 이들에 비해 더 희소하다. 그렇다면 이 골동상이 내게 보여준 동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가짜 모조품인가? 둘다 가짜인가 아니면 모나지 않은 둥근테 동경 하나만 가짜인가?
  
  나는 이전에 동경을 사본 적은 없지만 내가 북경에 체류하던 1930년대에 동경은 지금 1960년대 한국 서울의

골동상이 부르는 값보다

훨씬 더 고가였다. 내가 서울에서 하나에 5달러씩 주고 산 이 동경은 둘 다, 아니면 하나는 요즘 만든 것처럼 보였다.

고려시대 동경이 두 개가 10달러란 건 너무 헐값이니 말이다.

교토에 가서 나는 고대 유물을 많이 소장한 교토대 박물관의 관장에게 이들을 보여주었다.
  
  언젠가 내가 이 박물관의 4백여 소장품을 조사했는데, 관장이 ‘이중 1백여개는 한국유물, 또 1백여개는

일본유물이고 나머지는 어느 나라건지 모른다’고 했다.

그때 나는 369년의 부여기마족이 왜국에 들어온 사실을 알기 전이었고 따라서 5기 일본의 도자기가 부여가야

기마족과 함께 왜로 건너간 한국도공들로부터 얼마나 큰 수혜를 받았는지도 까마득히 몰랐다.
  
  어쨌든, 고고학자인 관장은 내가 보여준 두 개의 한국 동경을 보고 흥분했다.

그는 둥근테 동경에 새겨진 새의 머리부분과 활짝 편 양날개를 가리켜 보였다.

아래쪽 발부분은 지난 2천년 동안 닳아버려서 보이지 않았다.

일본인 학자는 내가 산 그 ‘가짜’ 동경은 아주 귀한 진품이며, 그것은 고대 한국의 동경으로 시기는 서기전 1세기에서

서기 2세기 사이의 물건일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바로 무속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둥근테 동경에 새겨진 해의 숭배, 한국설화에 따르면 아버지를 독수리로 하고 어머니를 인간으로 해서 태어난 첫

번째 무당인 것이다.
  
  일본학자는 더 설명을 했다.

이런 류의 동경은 지금까지(1983년) 전세계에 단 3개만이 있을 뿐인데 그중 하나는 중국미술에 관한 여러권의

저서를 쓴 스웨덴 오스카 시렌(Oscar Siren)의 개인 소장품이라 한다.

시렌의 책에 바로 이런 새무늬 동경이 소개되어 관장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나의 ‘가짜’같은 진짜 동경은 호놀룰루 은행 금고에 안전하게 보존돼 있다.

미국에 한국미술만 다루는 박물관이 선다면 나는 2천년전 한국 땅에 퍼져있던 신앙형태를 밝혀주는 이 동경을

기증하겠다.

이들 동경이 그 머나먼 옛적부터 오늘날 호놀룰루 내게로까지 전해 올 수 있었음은 분명히 기적이다.
  
원문: The 'Forgery' I bough in Seoul 1983.6.25 코리아헤럴드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32>

일본 신또신사를 지키는 고구려개 고마이누


인도에서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간 4명의 천왕(天王)은 지금도 일본의 절을 지킨다.

(한국 절도 사천왕이 지킨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모든 신사는 예외없이 두 마리 개 고마이누, 즉 고구려개가 지킨다.

고마라는 말은 일본에서 한국, 삼국 중에서도 특히 한반도 북부의 고구려를 지칭할 때 흔히 쓰인다.

고구려는 수백년 동안 한반도 삼국 가운데 가장 강한 나라였지만 신라가 불러들인 당나라 연합군에게 668년 망했다.
  
  오늘날의 일본은 2천년에 걸친 한일간의 애증관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물건들의 박물관 같다.

고마이누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그 기원은 분명히 고구려에서 비롯됐다.

그렇지만 1천5백년 세월이 흐르면서 일본인들은 일본 고유라고 생각하는 신사를 지키는 것이 이들 고구려개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한국과 관련된 일에 일본인들이 동시적으로 지니는 애증의 교차는 부부가 싸우면서‘너와는 못살겠다'면서 동시에

’너 없이는 못살겠다‘

 말하는 것이나 같다. 일본의 신또종교는 거의 한국에서 들어온 것이고 불교문화도 거의 전부 한국에서 받아들였다.

불교예술품은 거의 모두 한국 것이고 수백년 동안 일본의 귀족계급중 삼분의 일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오진왕을 군신으로 받드는 가마쿠라 핫치만 신사를 지키는 고구려개 고마이누. 고마이누는 보통 지금의 캐나다늑대보다 몸집이 크며 시베리아 북극 늑대에 가까운 자태이다. ⓒ프레시안

 

 

 


  그런데 1868년 신또가 다시 정책적으로 되살아나면서 일본이 전통적으로 한국에 대해 품어온 사랑과 존경, 모방의

념은 증오와 능멸로 바뀌었다. 고구려개는 이런 애증의 단면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1936년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가 한참일 때 도쿄박물관의 학예사가 책을 한권 펴냈다.

지금같으면 너무나 국수적이라서 체포될지 모른다.

그 학예사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지만 그때 나는 한국, 더욱이 한국예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도통 없어 판단할

여지가 없었다.

누군들 그때 한국예술을 알 수 있었겠는가? 1935년 나는 한국에 왔었으나 빈곤한 현실만을 보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뒤 1983년 나는 일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구려개를 칼럼으로 설명하게 됐다.
  
  우선 아키야마 아사부로가 쓴 책의 구절을 인용하겠다. 그는 일종의 문인화가, 일본말로 ‘낭가’였다.
  
  인용 1. 진고왕후가 200년 한국을 정복하니 한국인들은 앞으로 영원히 개처럼 충실하게 일본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하고 80척의 배와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 고구려개 조각상은 영원한 복속의 표시다.
  
  인용 2. 진고와 그의 군사가 한국땅에 닿았을 때 개가 한 마리 나타나 안내자처럼 진고의 군사를 인도해 승리하도록

 도왔다. 그러므로 개조각은 이때의 안내견을 나타낸다.
  
  인용 3. 신화에서 호소세리와 그의 군사가 그의 동생 호소데미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며 개처럼 충성하겠다 하고

대궐문을 영원히 지킬 것을 약속했다.
  
  인용 4. 개는 충성스럽고 정직하고 후각이 예민한 고로 집과 신사를 밤낮으로 지킨다.
  
  인용 5. 초기의(8세기를 말하는 것이겠지) 역사서에 따르면 대궐에서는 사자 모양과 개 모양의 상으로 대나무나

비단막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데 사용했다.
  
  도쿄박물관의 그 학예사는 ‘확실히 아는 건 아니지만’ 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개의 연원은 인도나 중국 조각에 있지

않을까?’ 했다. 이 일본인은 역사가도 아니니 개가 고구려와 관련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문인화가일 뿐 개를 구조적으로 분석해보지도 못했다. 그가 아는 한일관계는 매우 피상적인 것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열 개가 넘는 고마이누 사진을 찾았다.

돌로 된 것, 자기로 된 것, 나무로 된 것 등, 이들은 모두 일본 국보로 지정된 고구려개 조각이다.

그중 몇은 머리에 뿔이 하나 나있는데 한쌍 두 마리가 다같이 머리에 뿔이 돋은 것도 있고 둘중 아마도 숫컷인 듯한

것만 뿔을 달고 있기도 하다. 두 마리 모두 뿔이 없는 고구려개 상도 있다.
  
  뿔은 권력의 상징처럼 보인다. 중세 기독교미술에 나오는 신비의 외뿔짐승 유니콘도 마력이 있었다.

그보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수나라군, 당나라 군을 물리치던 고구려의 강맹한 힘을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고구려의 그런 강강한 국력이 떨칠 때 왜는 전적으로 한국문화를 받아들여 의존하던 시기였다.
  
  나의 아들 알란 코벨은 말과 개를 다루는 법과 그들의 혈통과 해부학에 나보다 정통하다.

그에 따르면 고마이누, 즉 고구려개는 시베리아 늑대와 개의 혼혈이다.

고구려의 두뇌들이 그런 새 육종을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늑대를 개의 종족으로 길들여 그처럼 인간이 통제할 수

있으면서도 사나운 수비견으로 키워낸 것이다.

이들은 몸무게가 50kg에 가깝고 늑대의 큰 코를 그대로 지녔다.

길고 털이 무성한 꼬리, 몸체의 긴털과 갈기는 개보다 늑대에 가깝다.
  
  진돗개와 비교해보자. 진돗개의 꼬리는 위쪽을 향해 말려있다.

그러나 고마이누의 상을 보면 고추 서 있을 때 말고는 늑대처럼 꼬리를 끌고 있다.

북극의 늑대는 목의 털을 갈지 않는다. 아마 목을 계속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일본에 남아있는 고구려개 상은 머리와 목의 갈기가 마치 사자갈기 같지만, 얼굴을 들여다보면 늑대같은 요소들이

분명하게 보인다.

어떤 고구려개는 입이 아주 크다. 늑대의 포효가 어떠한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캄차카 늑대는 몸무게가 80kg까지 나가며, 50kg은 보통이다.

북극이나 툰드라늑대(Tarukhan)의 털은 검은색부터 은회색, 회색에 걸쳐있다. 헤엄은 치지 못한다.

무당왕녀 진고가 369년 왜를 정복하러 올 때 고구려개를 배에 싣고 왔다면 이 늑대개들은 꽁꽁 묶여있다가 와서

경비견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진고왕녀는 권력이 대단한 무녀였고 오진천황, 닌또쿠천황 등 거의 1백년에 걸쳐 왜왕이 된 그녀의 후손들은 지금

경주 대릉원에서 보는 것처럼 무속양식의 거대한 능묘에 장사되었다.

일본에서 거대고분, 미사사기라고 부르는 매장형태이다.

이들이 가져온 고구려개가 신사의 지킴이가 된 것은 논리상 하자가 없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무늬는 일본 불교조각에 그대로 나타나고 이들은 일본의 국보로 취급된다.

고구려의 늑대개가 일본 신사의 지킴이가 된 것도 자연스럽다. 이들 다수가 일본의 국보지정을 받았다.
  
  
원문: Korean Dogs Protect Shinto Shrines 1983.10.8 코리아헤럴드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33>

한국원산 벚나무와 워싱턴


1986년 4월 진해 벚꽃축제는 한일간의 가까워진 관계를 말해준다.

천리포 수목원의 주인이며 이곳을 한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식물원으로 발전시킨 칼 훼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씨는 오늘날 일본 원산으로 알려져 세계에 널리 유통되는 '요시노 벚나무'가 사실은 제주도의 벚나무를 한국의

어느 모험가가 배를 타고 그 옛날 일본에 가져다 심어 퍼뜨린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제주도는 서부 규슈와 같은 위도 상에 있어 제주도 토착 식물과 나무가 상당수 일본땅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밀러는 현재 워싱턴 潮水연못(Tidal Basin)에 만발하는 벚나무는 한국원산 벚나무의 변종이며 결코 일본원산

벚나무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지난 세기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 한 예로, 진해 해군기지가 있는 곳에 길게 늘어선 5만그루의 벚나무는 재일본 한국교포들이 일본 벚나무

원종이라고 선사해서 심어진 것이다. 진해 장복산에 심어진 4만그루 벚나무도 마찬가지다.
  
  진해는 이순신 장군이 그의 유명한 거북선을 가지고 1598년 일본군을 대패시킨 해전을 치른 곳이며, 진해축제에는

청소년들이 이순신으로 분장하고 가마행진을 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후 진해 시민들은 이곳 벚나무가 일본 요시노 벚나무라는 사실이 싫어 특히 해군기지주변에 있는

벚나무들을 베어버리기도 했다.

이곳은 원래 조선 해군기지였다가 식민통치때 일본 해군기지로 변환되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끝난 1948년 한국

해군기지로 되돌아 왔다.

일본 당국은 이곳에 1만여 그루의 벚나무를 심어놓았다고 한다.
  
  이제 와서 제주도 원산 왕벚나무(밀러에 따르면)의 몇대 후손인 벚나무를 선물받은 사실이 진해시민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일본의 ‘벚나무 선물’은 1912년 당시 도쿄시장이 도쿄 아라가와 강변의 벚나무를 워싱턴에 선물로 보낸 것이

처음이었다. 이 나무들은 벌레가 먹어서 다 죽었다. 몇 년후 일본은 새 품종 벚나무를 다시 선물했다.

이때의 벚나무는 제주도에서 캐온 것으로, 미국풍토에 보다 강하게 살아남을 것으로 생각했다.
  

 

4월에 피는 한국의 벚나무. ⓒ연합뉴스

 


  이야기가 복잡해지지만 사실이 그렇다.

벚나무가 이리 저리 왔다갔다하며 섞여버린 것처럼, 한국인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70만 한국인(1986년 현재)중에는 일본인과 결혼한 사람도 있고 한국땅에도 일본피가 혼혈된

한국인들이 산다.
  
  이같은 인간과 나무의 가장 격심했던 혼합은 1천5백여년전 부여 백제 가야인들로 이루어진 기마족 지배계층이

말을 대동해 일본 땅으로 가서 그곳 원주민들을 제압했던 때다.

나는 일본사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초기 일황 25대의 혈통을 추적하여 그들이 순수한 한국혈통의 한국인들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현 124대 히로히도 천황에 이르는 백명 가까운 일본왕의 혈통연구는 ‘요시노 일본 벚나무’의 원래 혈통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복잡한 일이다.
  
  부여족 순수혈통이 무너진 뒤 나온 타협안으로 왕위에 오른 새 천황의 혈통은 일부 부여기마족이고 일부는

부여기마족들이 369년 서부일본을 점령하기 훨씬 전인 2천년 전부터 일본에 이주해와서 살던 교역자, 어부, 뱃사람

등 무속신앙을 받들던 옛 한국인들의 혈통을 받은 화족이었다.

이 두 혈통의 한국인들은 서로 경쟁관계가 되었지만 근본을 캐고 보면 다같은 한국인이다.
  
  밀러씨가 한국원산 벚나무를 말하는 것보다 더 수월하게 나는 히로히도 천황의 혈통을 캐어낼 수 있다.

전쟁과 식민시대의 고통도 끝났다. 수천 수만명이 진해 벚꽃을 구경하러 모여든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과거의 증오를 씻어냈는지?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은 워싱턴 디씨의 벚나무 이름을 한국원산 벚나무로 고쳐줄 것을 미국정부에 요청했었다.
  
  워싱턴 디씨 제퍼슨 기념관 潮水연못의 ‘일본 벚나무’로 알려진 벚나무는 한국의 제주도에서 건너온 한국 벚나무로

바로잡혀야 한다.

1990년 윌리엄 모로우 출판사에서 나온 칼 안토니 지음 ‘1798-1961년 사이 미국 대통령 부인들과 그들의 역할‘

책에는 하워드 타프트 대통령 부인 넬리 타프트가 이 나무를 수입해오던 당시의 정황이 잘 묘사돼 있다.

제주도 왕벚나무는 CSPAN 텔레비전에서 브라니언 램이 진행하는 워싱턴 디씨의 주간 서평프로그램 북노트(Booknotes)에서도 다뤄졌다.

나는 1987년 한국을 떠나기 직전 이를 알았는데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점령군 손에 나무 정신대처럼 타국으로 떠나버린, 자기 주장을 못하고 있는 한국인의 잃어버린 이름이 이 벚나무다.

벚나무는 자신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한마디도 밝히지 못한 채 침묵 속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서있을 뿐이다.

딱한 일이다.
  
  원문: Korean Cherry Trees 1986. 4.11 코리아헤럴드

 

 


존 코벨의 한국문화탐구 <34>

1980년 오사카의 한국출토 유물비교전


두 주일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안 가보고 무슨 전시회를 말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국제문화협회의 요청으로 내가 못 가본 전시회를 소개하는 글을 썼었다.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이 특별한 전시회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출토유물 비교전시회이다. 이제 그 전시회도 보고

왔으니 좀더 자세하게 쓸 수 있겠다.
  
  1980년 4월 교토에 가있던 어느 비오는 날 딸과 함께 오사카성내 오사카시립박물관으로 그 전시회를 보러갔다.

안내원 말로는 평일 유료입장객은 7백명 가량(입장료는 어른 한사람이 3달러. 일본 물가는 정말 비싸다)이고 주말엔

그보다 더 많다고 했다.
  
  전시된 물건은 정말 한일 양국 것이 비슷했다. 형제랄까 사촌이랄까 뭐 그런 것 같았다.

물건마다 붙여진 꼬리표의 색깔을 구분해보지 않거나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은 어느게 한국것인지 일본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설명문에는 영어가 한마디도 없었음은 물론이고 어이없게도 한국내 출토지 지명까지도 일본어로 적혀있었다.
  
  한번 둘러 보고난 뒤 내가 딸한테 한 얘기는 ‘내가 저걸 한국 경주박물관에서 직접 봤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모를 뻔했다.’ 는 정도였다. 그외 내가 알아보지 못한 것들은 일본 출토품인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도로 단순하지 않았다.
  
  일본 출토품은 바닥에 베이지색 비단을 깔고 그 위에 물건을 받쳐놓았고, 한국출토품은 회색 비단을 바닥에 깔았다.

다시 한번 더 천천히 장내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먼저번보다 충격이 더 심하게 왔다.

출토품에는 아주 일반적인 연대정도가 표기돼 있었다. 그런 연대를 가지고는 전시물건의 디자인이나 양식이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고나서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는가를 알기 어려웠다.
  
  전시된 물건들은 거의 모두 한반도 남부, 대마도와 규슈에서 출토된 것이고 더러는 나라 출토품인데 동경 일대에서

출토된 물품은 전혀 없었다.

생각컨대 이 시대의 동경에서는 센다이 일대, 일본 북부지역에는 에부시족이나 아이누족(눈이 푸르고 털이 많다),

또는 아이누와 왜족(화족)의 혼혈들이 야생상태로 거주하고 있었다.
  
  콜럼비아대학 개리 레저드교수에 따르면 부여기마족은 365년 백제를 정복하고 내쳐 가야를 정복한 뒤 부산에 가서

전쟁포로들에게 배를 건조하게 했다. 부여기마족 귀족계층은 이 배를 타고 규슈로 침입했다.

발달된 무기와 금속기술, 전투용 말의 위력과 거대한 무덤축조, 이런 부여족의 자취는 규슈에서 내해(세또 나이가이)

를 지나 일본 본토로 진격해 갔음을 추적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부여족들은 야마토의 왜족을 제압하고 369년부터 505년까지 왜국의 통치자가 되어 지배했다.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를 정벌했다고 하는 말은 이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뒤집어 날조한 것이라고 개리 레저드는

말한다.

가야토기가 일본에 가서 스에끼토기가 된 것이라든가 닌도쿠왕릉과 여타 다른 천황들의 거대한 왕릉은 역사를 해설해주는 증거품이다.
  
  진무(神武)왕이 규슈에서 일본본토로 동정(東征)했다고 쓴 일본서기의 내용은 사실은 4세기 부여족들이 규슈에서

일본 본토로 정복해 들어간 노선을 말하는 것이다.

개리 레저드는 이들 부여족은 500년경 내분으로 인해 약화되었으며 부여족과 왜족(화족)의 피가 섞인 귀족층이

늘어나면서 6세기에는 급기야 왜족 혈통에 더 가까운 자들이 부여족을 밀어내고 왜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고 했다.
  
  일본에는 신라처럼 풍요한 금광도 없었던 터라 일본에서 출토되는 마구나 금관은 미숙한 솜씨로 주조된 것들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일본출토 최대 금관은 무속의 상징 우주수목을 이상하게 음수인 두 줄로 만들어 총 5개 가지를

지닌 것이다.

그런데 여기 전시회에는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중에서 우주수목의 가지가 3, 4개 달린 금관만이 전시되었다.

일본금관은 5개 가지의 우주수목 달린 것을 전시하고, 한국금관은 3, 4개 가지의 우주수목이 장식된 덜 훌륭한 금관이 선택적으로 전시된 것이다.
  
  나는 무속에서 취급하는 하늘과 땅, 바다 밑의 3개 세계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나는 지금 두 줄로 난 5개의 가지가 뻗친 우주수목에 적잖이 당황스럽다. 일본에서 출토되었다는 금관에 왜 5개

가지가 뻗친 금관이 있을까, 한국에서 건너온 무속은 신또로 정착하기까지 수많은 변화과정을 걸쳐 적응된 것이

확실하다.
  
  앞으로 후쿠오카와 규슈, 그리고 또 한군데로 순회 전시될 이번 오사카시립박물관의 전시회를 보고 내가 가진

의문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서양인 미술사가인 본인으로서는 이번 전시회가 하루 7백명씩의 일본인들에게 과연

어떤 의문을 일으킬려나? 하는 데 흥미가 간다.

일본 외무부가 의도한 대로 꾸며진 일본고대사에 대해 일본인들이 많은 의문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인 것이다.
  
  원문: Korea, Japan Side-by-Side Provoke Thoughs 1980.6.11 코리아타임스  

최태영/법학자ㆍ한국고대사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