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마한의 해상세력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대백제와 월주 신라방
아시아 해상제국 대백제의 기반을 다진 근초고대왕의 꿈
마한을 병합함으로써 마한연맹체에 속했던 가야.왜(구주)을 백제로 복속하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요서를 차지하여 지나진출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아시아 해상제국 대백제의 토대를 마련한 근초고대왕의 꿈을 이해해야 비로소 백제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해민족의 신앙인 천신(하나님)을 섬기고 제사지낸 왕이였으며,흉년이 들면 전쟁하지 않고 백성을 돌보았던 홍익인간 성군이였다. 민심을 상실하면 권력과 나라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왕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근초고대왕의 꿈이라고 할 때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회복이라는 다물(담로)정신의 실현을 통하여 해민족 모두가 단군조선시대처럼 하나님공동체로 오손도손 공존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꿈꾸는 비젼이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대동강이남 지역에 속했지만 단군3조선 중 마조선 영역의 실질적인 중심국가가 되자, 단군3조선 중 번조선에 속하는 요서지역으로 진출하여 아들 근구수대왕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동이족 거주지에 속하는 지나 동남부 해안지역의 번조선유민세력과 연합하여 절강성 지역까지 백제의 영역으로 삼음으로써 단군3조선 중 번조선을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군3조선 중 진조선에 속하는 요하 동쪽의 만주지역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방땅을 차지하면서 남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킴으로써 고구려의 기세를 꺾었던 것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만주까지 회복하면 백제는 그야말로 단군조선의 옛땅을 모두 회복한 셈이니 그야말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적통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고추모의 다물정신을 국시로 정하고 단군조선의 고토회복에 국력을 쏟았으니 백제를 완전히 굴복시킨 광개토태왕 때 비로소 그 꿈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그래서 라이벌 관계였고, 신라나 가야는 약소국들이였던 것이다. 국가의 정신과 비젼은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초고대왕의 명성에 가려 있는 근구수대왕 시기에 백제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니 백제가 지나 동남부 해안지역을 차지하고 담로를 설치한 공은 근구수대왕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각 청동검,환두대검.청동거울 등을 증표로 주면서 가족과 친척들을 제후로 임명하고 제후국들의 자치를 인정해 주는 대신에 세금을 바치게 하는 단군조선의 통치구조나 백제의 통치구조가 비슷한 점은 모두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세력이기 때문이다.
마한의 해상세력없이 대백제와 월주 신라방은 존재할 수 없다!
식민사관이 가르쳐 온 백제영역-과연 그럴까?
백제(온조.비류세력을 통합한 부여의 구태세력)또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지나세력에게 상실한 단군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고구려의 다물(다무로=담로=담)정신을 실현하겠다는 민족적 사명의식으로 고토회복전쟁에 나서게 되는 배경이 된다.고구려와 백제가 다투던 지나지역의 동남부해안지역은 단군3조선 중 번조선지역에 해당한다.
다물=담로=탐라=담아=대마=대만...'담'의 지명들을 찾는다면 그 곳은 고대 해상제국 백제세력이 거주했거나 활동했던 지역으로 보면 된다. 백제의 황성은 서울=>웅진=>부여로 천도되었으며,고마(곰=고마=구마=굼=검=거미)성이라 불리였다.
"동이강국(대백제)이 되었다"는 지나문헌의 주인공은 동명(부여 고두막)의 후예인 부여왕 구태가 백제의 실질적인 개국시조다. 백제를 한반도로 규정하려는 식민사관의 대부격인 이병도의 제자들이나, 고고학 사료보다는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문헌해석에 치중하여 지나지역에서 백제를 개국했다는 재야사학 모두 잘못된 백제사를 기술하고 있다. 대백제가 지나지역과 일본열도에 이르는 광대한 22담로지역을 통치하려면 지정학적으로도 백제황성이 있는 지역은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해머리땅이여야 한다. 해머리땅은 서해와 남해를 모두 장악할 수 있는 최적의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그리고 고고학적으로도 해머리땅과 일본열도에서 백제의 유적유물들이 대거 출토되고 있다.
「북사」와 「수서」를 인용하면, “동명(북부여 고두막한)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탁이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 '대방 옛 땅'이란 해머리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서』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수서』 :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
『한원』 : "백제는 구태에게 제사하면서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구태:〈삼국사기〉에는 백제 시조가 온조(溫祚)라고 전한다. 그러나,김부식이 역사를 잘 몰라서 온조로 기록한 것이고, 당시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객관적 사실을 담고 있을 지나측 기록인 〈주서 周書〉 백제전에는 "백제는 그 조상이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란 이가 있어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나라를 시작했다"고 하며, 또 "매년 4번 시조 구태의 묘(廟)에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수서 隋書〉에는 이를 좀 자세히 부연하고 있다. 이를 〈삼국사기〉에 전하는 또 다른 건국설화인 비류(沸流)의 어버이인 우태(優台)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구태세력이 온조나라 '십제'를 복속한 시기는 초고왕 시기라고 보며,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 234~285 재위)때 강력한 법치를 실현하여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백제사를 인식할 때는 반드시 현재 백제왕 계보에 모두 들어가 있는 온조.비류.구태세력의 이주사를 전제로 문헌기록을 분석하여 이해해야 하는것이다. 따라서 온조.비류이주사로만 인식해서는 절대로 지나국과 한국과 일본의 문헌기록들이 짝을 맞출 수가 없다.
소위, 민족사를 운운하고 역사를 운운하는 자들이 연구를 할 때는 고정적인 관점으로 분석해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이동하고 정착하고 또 이주하고 정착하던 고대사는 수시로 변하는 당시의 국제정세상황을 세밀히 비교분석하여 유기체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백제는 절대로 해머리땅에서 개국될 수 없다는 폐쇄적인 사고를 가진 자들은 절대로 역사연구해서는 안 된다. 또한 지나지역으로 백제가 진출하지 못했을거라는 고정된 관점을 가진 자들 또한 역사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 고대 마한인들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이전부터 해양루트를 다 알고 항해를 했던 사람들이다.
월주지역 신라방은 마한세력이였던 사로국 석탈해 세력의 진출로부터 시작된다 할 수 있다
특히 3면이 바다인 해머리땅 사람들 자체가 해양족이다. 고인돌들이 유럽.지중해 해안지역에서 발견된 이유자체가 모두 한반도와 연결된 해양루트때문이다. 고대부터 세계인들은 해양을 통하여 교류했다는 반증이다.따라서 서해를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는 주관적 관념론자들이 백제사를 논할 때 스스로가 협소해지고 마는 것이다. 백제이전에 이미 해머리땅의 마한사람들이 해양활동을 했다. 양자강 지역(월주)에서 고인돌들이 분포되어 있는 이유도 봄에 해류가 한반도 서남해에서 월주로 흘러가고 가을에는 월주에서 한반도로 흘러가기 때문이다.그래서 [삼국사기]기록에 월주지역으로 가고자하는 신라인들이 봄에 한반도를 떠났다가 가을에 다시 돌아 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월주지역에 신라인들의 지명과 유적이 많은 이유는 한반도지역의 신라인들이 해류를 따라서 월주지역까지 와서 살았다는 반증이다. 동해로 이주하여 사로국의 탈해왕조를 세운 석탈해세력자체가 본래 서해지역의 마한세력이다. 즉 바다를 잘 알고 있었던 해양족이였다는 의미다. 신라인들의 월주이주는 탈해왕조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바다를 모르는 초원세력들은 이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환단고기-고구려본기]에 보면 고구려 문자태왕때 백제의 정변이 일어나 지나지역의 친동성왕계 백제세력이 약해지자 고구려가 복속하고 월주지역의 신라인들을 천주(홍콩)지역으로 이주시킨 배경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해머리땅을 무시하는 4국사의 기술은 무의미하다 할 것이다.
日語 구다라=큰나라.대百濟,잊 혀 진 땅 ㅡ 백 제 의 22 담 로
[지나국 문헌자료]이 증언하는 백제의 국제적 위상과 백제영토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에는 강병 100만이 넘었으며 북으로는 유, 연, 제, 노 등지를 소란하게 하였고 남으로는 오, 월을 침략하였다."[삼국사기<최치원>]
위의 유, 연, 제, 노, 오, 월은 지나지역의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에 이르는 바꾸어 말하면 지나 동남부해안지역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이들 지역을 공격한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지나지역에 진출했다는 명백한 증거사료다.
"백제는 후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 나라를 병합했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동진)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도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을 점거 소유하였다." [송서, 양서-<백제전>]
"원래 <百家濟海>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 두 군을 영유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통전-<백제전>]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양자강 연안)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 .[구당서-<백제전>]
"(346년) 부여가 처음에 녹산에 웅거하고 있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하여 서쪽 전연 가까이로 도읍을 옮겼다."[자치통감]
"월(춘추전국시대 양자강에 있던 국가)나라의 왕 구천의 옛 도읍지를 둘러싼 수 천리가 다 백제의 땅이었다." [문헌비고]
"금주, 의주, 애훈(지나 동해안 지역) 등지가 다 백제이 영역이다."[만주원류고]
백제 수도 부여-[삼국사기 백제 편]에 보면 "(본국)백제가 전성(全盛)했을 때는 호수가 15만 2,300이나 되었다."(호당 5명으로 계산하면 76만1500명)
위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비문은 4면 모두에는 당시 나당연합군 총사령관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 수도 부여를 정벌한 후에 왜 백제를 당나라가 정벌했는지에 대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상세히 새겨져 있으며, 당시 당나라 낙주 하남 사람 권희소에게 쓰게 하였으며, 당나라 헌종 5년 8월15일에 완성하였다. 비문내용은 백제31대 의자왕,왕자 부여융,부여효 등 왕족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 이하 700여명을 당나라로 압송하였고 당나라는 후에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고, 당시 본국백제 영토에는 24만호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백가제해의 축약어다. 즉, 바다를 지배한 나라라는 의미다. 백가제해의 주역은 고구려에서 나온 온조백제(마한54국의 하나)가 아니고, 부여(동명의 후손=부여 고두막 단군의 후손)세력인 구태세력이다. 부여의 정통성을 놓고 만주지역부터 고구려와 치열하게 싸워 온 구태세력이 후연과 연합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를 후미에서 치기위해 황해도(대방땅)지역에서 백제를 개국하게 되고, 이후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나주를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하고 있던 서남해 마한인들(왜)을 복속하여 고구려공격에 지원세력으로 삼는다.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된 <왜>의 실체가 바로 한반도서남해 지역과 일본열도에 거주하고 있던 마한세력을 의미한다.그리고 광개토태왕비문에 2개의 백제세력이 기록되어 있는데, 백잔은 한강지역의 십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잔은 웅진지역의 구태백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 한강변의 온조'십제'를 통합하고 고리왕 때 강력한 법치국가를 실현한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내몽골에 위치했던 고리는 해모수.고두막.고추모 등 부여(고씨세력)의 선조의 나라다. 그래서 고리로 왕의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본다. 백제 고이왕을 의미한다.
일본열도의 대형 백제계 천황들의 전방후원분들은 한반도 서남해지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일본왕릉인 전방후원분과 한강변의 전방후원분 무덤들은 모두 구태세력의 활동과 정착의 흔적들이다. 초기형 전방후원분은 전라도 서남해 지역에 집중 분포하는데, 이건 마한의 해상세력의 무덤들이며, 서남해 해상세력들과 통합한 구태세력들의 무덤들이기도 하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이잔(구태백제)과 왜를 동일시하는 배경이다. 제도권 백제사학자들이 구태백제에 대한 조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나문헌에도 백제시조는 구태이며 중심지는 고마성(웅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태왕이 한성백제와 서남해지역의 구태세력의 해상활동의 근거지(웅진)을 공격하여 궤멸시키면서 서남해지역의 구태세력과 마한세력(왜)이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지금의 일본왕실의 기반이 되는 백제계 왕조인 야마토왜를 열게 되고, 서남해지역은 서울에서 수도를 이전한 백제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서남해 지역의 구태세력과 마한세력은 대방땅을 공격하려다가 고구려에게 크게 패한 후에 일본열도로 거의 이주하여 지금의 일본국가를 형성하였다.
웅진으로의 천도이후 일본열도에서 건너와 백제왕이 되는 동성왕 때 중원지역을 놓고 벌인 지나지역의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북경지역뿐만 아니라 지나지역의 동남부 해안지역과 동남아까지 완전히 백제천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동성왕이 친무녕왕계 호족세력에게 시해된 후에 지나지역의 친동성왕계 백제세력은 무력화되고 고구려에 투항하거나 돌궐로 통합하게 되었으며,고구려에게 지배권을 넘겨 주게 된다.남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지역을 회복하는 등 백제성왕의 국면전환에도 불구하고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고구려와 야합하여 한강지역을 강탈한 신라에 대한 배신감에서 나오는 적대적인 반격으로 승승장구했던 의자왕의 오만과 방심으로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정벌당하여 의자왕을 비롯한 부여융 등 많은 왕족이 당나라로 끌려 가게 되고, 나머지 백제왕족과 유민들은 대거 일본열도로 망명하여 한반도와 인연을 끓고 지금의 일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지나문헌[통전]은 지나지역의 백제세력에 대해 "본국(한반도) 백제가 멸망하자,백제세력은 돌궐이나 말갈(=고구려)로 흩어 졌다.부여씨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소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나국 동남부 해안지역에는 현재도 '백제허'라는 지명과 마한계통의 백제 유적과 유물들이 존재한다. 전라도지역의 맷돌과 방아를 사용하는 백제허 사람들은 산동지역에서 전쟁을 피하여 왔다고 말한다.그들은 백제를 '대박제(대백제)'로 부르고 있다. 백제금동향로는 당시 백제가 해머리땅의 주인이였던 마한을 계승한 나라라는 국제적 위상과 함께 해상무역의 활동영역를 잘 보여주는 고고학적 근거자료이기도 하다.
해민족사에서 대륙을 지배하며 위대한 대륙사를 기록한 나라가 고구려라면, 고인돌문명을 세계에 전차한 마한의 개방적인 교류협력의 해양문화을 계승하여 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며 위대한 해양사를 기록한 나라가 백제다.
"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바다(서해)를 건너 월주(양자강 연안)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구당서]-<백제전>의 기록이다. 당시 백제는 한반도에 국한된 작은 나라가 아니라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를 통하여 건설된 큰 나라(쿤나라=>쿠나라=>구다라/일본말)였던 것이다.
지금도 지나대륙 동남부지역에는 백제가 지명으로 살아 있다. 백제허 사람들은 아직도 전라도 방아를 사용하며 살고 있다. 지나국 화교들 또한 서남아까지 해상무역을 했던 백제유민들의 후예다. 한반도출신(전남 해남) 주원장이 개국한 명나라 시대에 해상활동금지가 해제되면서 화교들은 백제사찰을 짓고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들 화교와의 역사.경제교류는 다시 환서해백제시대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나대륙과 일본열도를 중앙에서 통제관리하려면 본국백제는 명백히 한반도일 수 밖에 없다.
해양.농경족이였던 마한인들의 개방성과 진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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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상징이며 대백제의 상징이였던 해머리땅 마한의 봉황 |
부여족인 온조.비류.구태세력의 이주와 통합을 전제로 건설된 대백제사는 바다와 해류를 잘 알았던 서남해 지역의 마한세력이 아니였다면 존재할 수가 없다! 백제가 대향로 꼭대기에 마한의 상징인 봉황(마한의 긴 꼬리닭)을 우뚝 세운 진짜 이유가 될 것이다.
바다를 통하여 해머리땅에서 전파된 세계 고인돌 지역(노란색)-고인돌문명의 주역인 고대 마한인들이 이주하여 만든 것들이라고 봐야 한다. 고대 해머리땅(한반도)에 고인돌들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이유는 1만5천년전의 볍씨(충북 청원)가 출토될 정도로 오래 전부터 농사짓기에 땅이 비옥했고 그 만큼 인구가 많았다는 것을 증명한다.농경문화과 해양문화를 동시에 가지고 있던 해머리땅의 마한인들은 해류를 타고 끊임없이 세계와 교류하고 협력했으며 이주하여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지역에 이르는 고인돌 문명을 건설했다 할 것이다. 마한인들, 특히 해양활동의 주역이였던 서남해 마한인들의 개방적이고 진취성을 엿볼 수가 있는 고고학적 사료가 바로 고인돌이라 할 것이다.
영국 아일랜드에 있는 고인돌 (한반도 북방식)
네델란드에 있는 고인돌(한반도 남방식)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고인돌(한반도 남방식)
위 사진들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유럽지역 고인돌 양식은 한반도 고인돌 양식에서 온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들을 건설했던 해머리땅의 서남해 마한인들은 해양교류를 통하여 고인돌 문명을 유럽까지 전해줄 수 있었다. 고대 고인돌문명이야말로 또 하나의 한류였던 셈이다. 해민족이 우주민족이며 해민족이 어디에서 이 땅으로 왔는지에 대해 그 비밀을 말해 주고 있는 고인돌은 서남해 마고문화의 흔적이다. 고인돌에는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다. 해민족에게 북두칠성은 자미원에 계시는 옥황상제가 있는 별자리다. 그리고 해민족이 이 땅에 오기 전에 살았던 별자리가 북두칠성으로 해민족의 칠성신앙이 강한 배경이다. 해민족이 본래 북두칠성에서 왔기 때문에 조상이 살았던 북두칠성을 기억하고 북두칠성을 신성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인돌에 새겨 후손들에게 기억되게 했던 것이다./윤복현
백제사에 스며있는 매 사냥 흔적
■ 역사스페셜-떳다! 해동청 보라매(KBS1 오후 10시)
최근 백제 금동관이 복원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금동의 장식이 비상하는 새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제의 또 다른 이름인 '응준(鷹隼)'의 감춰진 의미에
전문가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매의 나라'로 불리던
백제가 금동관 장식으로 매를 선택한 것은
매를 숭상하고 신성시 했던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
지난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매사냥,
현재 전 세계 단 두명만이 매사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수천년전 백제인들은 매사냥에 심취해 있었다.
쿠빌라이 칸 등 중국의 황제들이 탐낼 정도로 영리하고
사냥실력이 뛰어났던 매 해동청(海東靑) 등
역사에 스며있는 매사냥의 흔적을 추적한다.
하늘의 지배자, 다시 비상하다
▲ 비행하는 매의 모습
지난 해 11월, 매사냥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몽골, 아랍, 영국, 프랑스, 체코 등 동서양 11개국이 함께
지정되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수렵기술 중 하나인
매사냥은 한반도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현재 단 두 명만이 매사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의 사람들은 매사냥에 심취해 있었다.
이번 유네스코 등재를 계기로 우리의 매가 다시
한반도의 하늘을 누비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정부는 해머리땅의 해동청 보라매를
전국적으로 보급하여 전통성을 살려야 한다.
해동청 보라매는 방송내용대로
고대 지나국이나 초원세력이 욕심내고 극찬했던만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매이기 때문입니다.
초원세력의 조상이 만주와 한반도의 수렵족인 숙신족이기 떄문에
초원세력의 매 사냥도 따지고 보면 해머리땅에서 출발했다고 보아야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고인돌이 세계최다로 밀집된
서남해 마한지역(백제)이 매의 고향임이 증명되었으니 말입니다.
초원세력의 언어도 따지고 보면 한반도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니
초원세력의 풍습 또한
해머리땅의 마한풍습을 계승했다고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