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의 땅, 5세기의 일본열도
*출처:다음블로그-할 말하는 대한민국 글쓴이-용화산인 http://blog.daum.net/kone1/9306046
아담과 이브의 땅, 5세기의 왜(倭) 열도
日本書紀에는 오우진(應神) 14년, 百濟王이 재봉사 진모진(眞毛津)을 보내 주었는데, 의봉(衣縫)의 시조라고 했다
(應神十四年春二月百濟王貢縫衣工女曰眞毛津是今來自衣縫之始祖也).
재봉사를 보내준 것은 百濟 皇帝가 아니고, 韓半島를 다스린 百濟侯王이다.
제 조상들이 옷도 없이 벌거벗고 살았는데도, 역사날조하면서 百濟王이 재봉사를 ‘받쳤다’고 뜯어고쳤다.
百濟 식민지 지배자의 복식담당 관리를 오복조(吳服造)라 불렀는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보면, “吳服造는 백제인 아누사
(阿漏史)다.”라고 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옷조차 스스로 만들 수 없었다.
韓半島를 침공한 新羅를 격퇴하기 위해 급히 만든 군사 植民地였기 때문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살았던 토우테이칸(藤貞幹 : 1732~1797)은 쇼오꼬오하쯔(衝口發 : 1781년 성립)에서 일본결척(日本決尺)을
인용해서 제 조상이 나체였다고 밝혔다.
응신(應神)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 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 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조차 왜곡 日本史를 진실 이라고 그대로 수용한다.
그래서 百濟人 阿知使主(阿直岐)는 後漢 영제(靈帝)의 후손이라 철썩 같이 믿는다.
“686년 이후로는 新羅人도 상당수 끼어 있는데, .......이 당시 移民者들의 후손은 4∼5세기와 달리 대체로 日本 貴族의 씨성(氏姓)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날조한 新撰姓氏錄 등을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726년, 나가야오우를 비롯한 일본의 조신들이 신라 사신 김주훈(金奏勳 : 金造近이라고도 한다)을 위해 한시까지 지었다(續日本紀).
이때 지은 한시가 116편이 수록된 회풍조(懷風藻 : かいふうそう 751년)에 10편이나 실려 있다. 百濟가 멸망하자 新羅의 식민지를
자청하고 新羅系 왕조(天武 金多遂)를 지지한 일본이다. 新羅 使臣을 영접한 日本貴族 또한 新羅系였을 것이다.
新羅人의 이주는 新羅가 列島에 식민지를 건설한, 三國 당시부터 있었다.
물론 이들은 왜(倭)열도의 지배층이 되었다.
다만 新羅 植民地는 없었다고 우기는 日本이 이들을 中國과 高句麗人으로 둔갑시켰을 뿐이다.
中奴는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한 8세기 이전에는 倭 列島는 물론이고 日本列島로 바뀌어서도 전혀 가지 않았고, 高句麗人들도 전혀
가지 않았다.
百濟고, 新羅고 간에 列島에 간 사람들의 姓은 그후 모두 이어지지 못했다.
中國倭의 이주로 日本이 이른바 ‘母系社會’로 미화된 성적문란(性的紊亂) 사회로 돌변했기 때문에 父의 姓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의 이름은 모두 母가 지었다고 古事記에도 나와 있다.
단, 자식의 이름은 모두 母가 지었던 것은 律令時代가 아니고, 日本으로 이주한 中國倭가 기모노섹스, 混浴, 요바이(よばい)를 대유행
시키자 父를 알 수 없게 된 헤이안(平安) 중기부터다.
中國倭의 이주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古事記에 실었던 것이다.
“異性關係가 국민생활의 중요한 관심사였으며 남녀간의 교제가 조금도 부끄럽고 숨길 일이 없는 것이었던 것도 家係 繼承에
있어서도 血統에 구애되지 않고 타성(他姓)의 養子로도 계승할 수 있다는 의사(擬似)血統도 허용되고, 一夫多妻制가 부정되었고
서로의 貞節을 요구하지도 않았”던 것도 律令時代가 아니라 中國倭를 받아들인 9세기 부터이다.
“人生의 意義와 이상으로 한 것이 異性과의 性關係, 즉 사랑에 전념하는 것”이 된 것도 中國倭가 이주하면서 퍼뜨린 文化이다.
捺造日本史를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도 三國史記는 날조다, 三國의 초기 역사는 없었다고 우기겠지?
그러나 초기 역사를 날조한 것은 日本이다.
日本의 최초 왕(神武는 倭奴도 다 인정하는 假空人物이다.)은 기원전 660년이 아니라, 기원 후 4세기말(應神)에 등장한다.
日本의 통일국가는 4세기 초가 아니라, 669년에 나타난다. 그나마 百濟, 新羅王朝(天智, 天武)로 갈라져 있었다.
그 뿐인가. 628년 이후 1599년까지의 천문기록도 우리나라 것이다.
(1189~1326년의 日蝕은 高麗 天文官, 1601~ 1811년의 일식은 朝鮮通信使로 간 李氏朝鮮의 天文官이 관측했다) 요컨대 19세기 까지
全日本史가 날조다.
現 日本史(그래봐야 韓國 노예사에서 中國 奴隸史로 바꾼 것이지만)가 사실이면, 日本이 미쳤다고 李氏朝鮮을 병탄했을 때, 韓國史
말살을 자행 했겠나. 韓國의 植民地이고, 현 日本史가 날조에 엉터리라서 韓國史를 말살한 것이다.
아무리 倭史를 당당한 역사로 고쳐봐야 우리나라 역사책에 ‘日本史는 奴隸史다’ 라고 적혀 있으면, 역사날조 사실이 알려질 것
아닌가. 奴隸國 日本이 당당한 나라로 행세 하려면, 주인나라 역사를 말살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당연한 것이다.
마치 中奴들의 역사날조 처럼,,
漢織女, 吳織女라고 후대에 만든 像은 또 어떤가. 깃 달린 옷하며, 완전 현대판으로 만든 날조다.
무릇 吳織女 뿐만 아니라 高句麗, 高句麗 사람[倭 列島에 문물을 전수해준 것은 高句麗가 아니고 百濟이다]을 거의 모두 吳나라로
바꾸어 놓았다.
베틀만 있고 베 짜는 방법만 알면 다 된 것인가? 아직도 옷감의 원료를 구해야 한다.
양잠기술은 5세기 말이나 되어서야 新羅人 眞氏 일족이 건너가서 가르쳐준다.
농사는 나무로 만든 괭이나 삽으로 밭을 갈았다. 벼가 익으면 손이나 돌로 만든 칼로 벼이삭을 땄다.
(고대국가와 천황, 타무라 엔쵸 : 田村圓澄)
5 세기 말까지 日本列島에는 농기구조차 없어서 나무 괭이로 황무지를 일구고 손으로 벼이삭을 쥐어 뜯어 수확했던 것이다.
기원전 3 세기부터 韓半島人들이 이주하면서 철기 농기구를 가져가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철기 농기구라 해서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서지고 마모되면 그때 부터는 원시생활로 되돌아 가야 했던 것이다. 5세기 말이나 되어서야, 新羅人 眞氏 일족이 건너가서
철제농기구 제작법이며 관개농업을 가르쳤다.
610년 3월에는 고구려로부터 담징(曇徵), 법정(法定) 두 스님이 왔다.
담징은 물맷돌을 만들었다. 맷돌은 둥근 형의 돌로 만든 것이며, 탈곡, 제분 등 곡물의 정제 가공에 사용되었다.
담징의 물맷돌은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큰 역할을 했다.
(聖德太子, 다무라 엔쵸 : 田村圓澄)
日本民族은 610 년에 列島로 간 曇徵이 맷돌 제작법을 가르쳐주기 전에는 벼이삭도 분리하지 못하고껍질째 밥을해서 먹었을 민족이다.
고작해야 왕이 먹을 밥이나 길가에 구르는 돌로 찧어서 간신히 껍질을 벗겼을 민족이다.
住居는 어떠했는가. 의(衣), 식(食) 보다도 더 끔찍했다.
타무라 엔쵸(田村圓澄)가 6세기의 광경을 기술했다.
(538 년) 당시 대부분의 일반인은 땅을 판 구덩이의 움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의 복원 이라면서 日本이 북규슈(北九州) 사가현(佐賀縣)에 만들어둔 것을 보라.
야마타이국(邪馬台國)’으로 추정되고 있는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에는 높이 12미터의망루대와 촌락이 재현되어 야마타이국
(邪馬台國)이란 3 세기에 존재 했다고 日本이 주장하는 나라다. 원래 중국 대륙에 있었다.
中國倭史를 日本史에 덧붙였던 것이다. 中國倭가 이주하지 않았다면 日本史에 덧붙일 수도 없다.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은 百濟의 군사기지였다.
이곳에서 기원전 3 세기 부터 건너간 韓半島人과 아이누族을 훈련시켜 韓半島를 침공한 新羅를 격퇴하기 위한 兵舍로 활용했다.
5 세기 초까지 옷도 없어 벗고 다녔고, 5세기 말까지 농기구도 없어서 손으로 벼이삭을 쥐어뜯던 미개인들이 4세기에 韓半島를
침략해서 3천 년의 철기문명을 계승한 新羅와 百濟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4세기 말이나 되어서야 최초의 국가가 등장한다.
6세기에도 땅 구덩이에서 살았던 미개인들이369 년에 韓半島 남부를 정복하고 562 년까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아니 任那倭府를
설치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인가.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가 맨손으로 鐵器 文明의 韓半島를 정복 했다는 말인가.
왜곡 日本史 교과서나, 그것을 배운 日本民族의 주장은 하나같이 가관이다.
百濟人 應神이 처음으로 列島를 정복한 시기가 4세기 후반 혹은 말 이라면서 4 세기에 무슨 “각지의 왕이 야마토(大和) 지방의 왕을
맹주로 하여 정치적 연합체를 형성했“을 것이며, 야마토 정권이 탄생하였다는 말인가.
應神도 4 세기 말에 갔는데, 그 전에 무슨 豪族이 있으며, 그 ”호족들이 연합하여 강력한 정권을 만들“ 것인가.
무슨 여러 나라가 있어서 ”나라 빼앗기 경쟁“이 있을 것이며, 승자가될 인간은 어디 있고 패자가 될 인간은 어디 있는가.
또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은 어디 있으며 장악하고 연합할 소국들은 어디 있는가.
마츠모토 세이초(松本淸張 : 1909~1988)도 “7세기의 아스카(飛鳥) 시대라는 것은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성립하려고 했던
시기였다”고 했다.(도쿄신문, 1972. 4. 1)
( http://www.imoonhak.co.kr/category/?fn=view&cid=21040100&no=3018&pg=1&ky=&kw= 참조)
문자를 다루는 일은 장기간에 걸쳐 歸化人(倭나라에 건너간 韓國人) 씨족들이 도맡아서 전문적으로 처리해 오고 있었다.
6 세기 중엽이 되면 일본인(先住民)들 중에서도 조금씩이나마 문자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생겼을 법 한데도, 정치 관계 문서 등의
기록을 작성 하거나 재물의 출납, 조세의 징수 또는 외교 문서의 취급과 같은 실무에 있어서는 역시 귀화계의 사람들, 즉 후히토(史,
한국인 고등 행정관리)들만의 독무대였다.(귀화인, 세키 아키라 : 關晃)
왜그런가? 先住民은 農奴였다. 농노라 부르지는 않아도 꼭 그와 같은 처지였다.
百濟人과 新羅人들이 先住民(繩文人 포함)을 노예로 삼고 지배한 것이다.
그러니 6 세기 중엽에 先住民이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日本書紀’ 텐치기(天智紀)에 百濟 멸망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古事記에서 옮긴 기사다.
9월 7일 백제의 주류성이 처음으로 당에 항복 하였다.
이때 국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주류성이 떨어졌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조상의 묘소에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母國 百濟가 亡하자, 돌아갈 고향을 잃었다고 통곡하는 대목이다.
唐에 항복해? 인육이나 먹는 야만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고작 티벳고원 북부에 살던 미개인들이. 唐軍은 新羅의 지원군이었다. 新羅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日本書紀도 아니고, 원래 古事記에는 “百濟의 周留城이 처음으로 新羅에 항복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것을 歷史歪曲學이 발흥한 후 日本書紀로 옮기면서 唐에 항복했다로 바꾼 것이다.
唐이 百濟를 멸망 시켰다는 것부터가 왜곡이다.
百濟 역시 高句麗와 마찬가지로 내분이 심각 했었는데도 唐이 百濟를 침공 하면서 벌인 작전은 다 실패했다.
군기 빠진 병사들을 당나라 군대라고 부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唐의 군대가 잘 할 수 있는 것이라곤 人肉먹기 뿐이었다.
옷가지, 식기, 숟가락에서 주춧돌, 佛像, 寺刹까지 8 세기 까지도 우리민족이 다 만들고 보내 주었거늘, 日本이 韓半島를 지배해?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墓制까지 한국식을 그대로 따랐거늘, 저 倭奴民族은 자신들이 韓國式 古墳을 만들었다고 우기고 있다.
이런 背恩亡德한 것들이 있나!
“한반도에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것은 ‘한여름 밤의 잠꼬대’에 불과한 얘기다.”
“왜 없다고 단정 하느냐. 한국학계를 고무시켜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소위 歷史學者라는 것들이 아무리 날조하고 왜곡했다 하더라도 제 나라 역사조차 모르겠는가.
倭史가 미개하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잘 알면서도 연극을 하는 철면피들이다. 저 倭奴民族은 미개 日本史가 부끄러운 나머지, 倭奴民族 끼리도 모르는 척 서로 서로가
시침을 뚝 뗀다.
백제라는 나라는 일본에다 혁명적으로 문화를 전해준 스승의 나라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백제라는 지명이나 명칭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메이지(明治)가 대대적으로 韓國式 명칭을 없앴음에도 남은 것이 그 정도다.
저 글은 오카베 이츠코(罔部伊都子)의 ‘불상을 생각한다’에 나오는 글이다.
오카베 이츠코는 수필가다. 그런데 역사학자라는 것들이 제 나라 역사를 모른다구?
百濟는 불상과 미술, 공예, 학문, 기예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고, 倭列島 자체가 百濟와 新羅의 植民地이다.
倭列島의 문화 자체를 百濟와 新羅가 만들었다.
우리나라 歷史學者의 단점이 무엇인가 하면, 實證史學 운운하며 고작 자구 해석에나 죽자 사자 매달린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日本史, 아니 倭史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저 미개민족이 5 세기가 넘도록 벌거벗고 列島를 활보 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5 세기 말 까지도 농기구가 없어서 벼이삭을 맨손으로 쥐어뜯어 수확하고, 曇徵이 맷돌을 만들어준 610 년 이전까지 벼껍질도
못 벗기고 밥해먹은 미개민족이다.
6 세기만 해도 倭奴民族에게는 흙구덩이가 집이었다는 사실만 알아도 任那日本府라는 허튼 수작에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日本 列島에는 4세기 말까지도 옷이란 게 없었다.
짐승의 가죽이라도 뒤집어쓰지? 列島에는 짐승조차 귀했다.
列島에 사는 변변찮은 동물 몇 종조차 2천 3백만 년 전, 列島가 韓大陸(東아시아)과 붙어 있었을 당시,韓大陸에서 건너간 것이다.
또한 百濟와 新羅가 식민지를 경영할 때, 우리나라에서 온갖 동물들을 보내 주었다.
壬辰倭亂 때에는 倭奴들이 우리나라 文化材를 강탈 하면서 동물들 까지 마구 포획해 갔다.
말은 4세기 말(실제로는 5세기 초)에야 阿直岐가 갖다 주었고 매는 구경조차 못했다.
닌토쿠(仁德)는 생전 처음 보는 새를 보고 百濟 王族으로 알려진 주군(酒君, 나중에 일본어가 생겼을 때부터 사케노키미라고 불렀다)
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새요?” 그러자 酒君이 “百濟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 옵니다.”
이때 매(鷹)가 韓半島에서 처음으로 列島에 날아간 것이다.
이 매를 길들이게 하고 실제로 매가 수많은 꿩을 잡은 날, 비로소 응감부(鷹甘部)라는 부서를 설치 했다고 日本書紀에도 나온다.
한 마디로 짐승조차 가기를 거부한 땅이 列島였다.
신무(神武)가 기원전 660년에 즉위 했다고?
그 가공인물 神武는 즉위식 당일에도 벌거벗고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결척(日本決尺)에서는 그밖에도 오우진(應神) 천황 이래로 백제인들이 倭나라에 건너 옴으로써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과,
왕실에 비단옷이며 각종 의상이 보관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한복을 입은 그림까지 직접 그려서 제시하고, 이 옷이 오오사카 동부(河內國 : 카와치)산속 옛무덤에서 파낸 것이라고
했다.
옷의 생김새는 도포로서 깃을 왼쪽으로 여미며 소매 끝이 좁은데, 이 옷을 입던 시대는 텐치왕조(天智王朝, 661~671)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텐치 천황은 ''백제대궁''을 짓고 살았던 백제인 죠메이(舒明) 천황의 차남[天智(텐치)는 百濟 義慈帝의 3남이다.
죠메이(舒明)의 차남은 倭奴民族이 날조한 것이다]이다.
그러므로 도포로 보이는 이런 한복이 7세기까지 줄곧 이어져 온 것을 잘 알 수 있다.
한복 그림 옆에는 ''재봉은 한복임을 알 수 있다''는 토우테이칸(藤貞幹)의 설명이 있다.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홍윤기)
토우테이칸(藤貞幹)은 18세기 사람이다. 韓服이라 함은 李氏朝鮮의 옷을 두고 한 말이다.
揚子江 이남을 明에게 주고 高麗의 복식(服飾)도 양보한 李成桂는 百濟의 복식을 베꼈다.
결국 百濟옷 이라는 것이다. 百濟侯王이 재봉사를 보내 주면서 百濟皇帝의 옷을 만들어 입게 할 수는 없다.
倭 侯王이 侯王의 복식이 아니라 皇帝의 服飾을 입을 수는 없다.
李氏朝鮮도 明의 속국을 자처하고 나섰다.
李氏朝鮮王이나 日本王이 입고 있는 옷은 百濟 侯王의 복식이다.
재봉사만 있다고, 옷을 만들 수 있는가. 옷감은 그 후로도 百濟가 보내 주었다.
당시 百濟는 韓半島를 침공한 新羅를 격퇴 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倭의 피지배계급은 그후로도 벌거벗고 계속 살아야 했다.

▲ 일본열도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에 보면, “비단인 ''견(絹)''은 4세기 초 츄우아이(仲哀) 天皇 9년에 新羅로부터 전해 왔다고 한다.
중애(仲哀, 츄우아이) 천황은 百濟人 오우진(應神) 천황의 부왕이다”고 써 있다.
그러나 ‘같은 책 맨 앞 페이지에서 ‘應神(오우진)과 그 아들 仁德(닌토쿠)이 百濟系 최초의 정복왕이다’라는 얘기로 시작하고 있다.
應神이 列島를 정복한 것이 4세기 후반 내지 4세기 말 이라면서 어떻게 應神의 父 仲哀(츄우아이)가 4세기 초가 될 수 있는가.
날조 日本書紀에 보면, 仲哀는 9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14대 仲哀는 192~200 년까지, 15대 應神은270~310 년(여기에 +120년을
해야 한다)까지 왕위에 있었다.
다시 말해 200년에서 270년까지 日本의 王位는 공백 상태라는 것이다. 獨逸(신성로마제국)에도 皇帝가 없던 대공위 시대(大空位時代 : 1254~1273)가 있긴 했지만, 20년에 불과했고, 皇帝는 없어도 諸侯는 있었다.
應神이 왕이 되기 70년 전에 죽은 仲哀를 應神의 父라고 우기는 건 仲哀가 사망할 당시, 應神은 母(神功)의 뱃속에 있었다는 얘기다.
태어나서 70 년간을 왕이 되지 못하고 허송세월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神功은 167 년경에 仲哀를 죽이고 섭정(攝政)을 했다고 하니까, 이 당시 應神이 神功의 뱃속에 있었다고 하면, 103살 먹은
늙은이가 王位에 올라, 143살까지 왕노릇하다가 죽었다는 얘기다.
뱃속에 있는 제 자식의 父를 죽이다니, 神功은 엄청 악독한 여자였나 보다.그런데 神功은 韓半島를 정복하고 나서 應神을 낳았다고
하니까, 369년 이후에야 應神이 태어난 셈이다.
神功이 제 남편을 죽인 건 167 년이고 제 자식이 태어난 건 2 백년 뒤인 369 년 이후니까, 날조 日本史 속에서도 應神은 仲哀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神功은 대체 누굴 섭정(攝政) 했던가. 攝政은 王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王도 없이 攝政만 있을 수 있는가. 그래서 神功이 부랴부랴 女王을 자처했나 보다.
그렇다면 日本書紀 倭奴 天皇 年代表 상에서 神功이 70년을 차지했어야 하지 않는가.
왜곡 日本史는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리뿐이다.
이 밖에도 日本書紀 연대표에는 초기에 몇 년씩 王位가 비어 있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데도 라이프 2차 대전에는 무엇이라 써 있냐하면,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124 대 天皇이 되었다.
이런 皇統은 진무(神武)까지 꽤 정확하게 더듬어 올라갈 수 있다.”
百濟가 列島에 식민지 倭를 세운 해가 395 년이다.
군사 식민지로 韓半島를 침공한 新羅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列島 최초의 국가였다.
그 전까지는 아이누族과 기원전 3세기 부터 개별적으로 列島로 이주한 韓半島人들만이 살고 있었다.
초대 侯王으로 應神을 파견했다. 395년 以前史는 中國倭史로 일본이 18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대대로 보관해온 우리나라
역사책에 언급된 기록을 베껴 쓴 것이다.
日本列島 에서는 언제부터 옷감을 만들었을까.
阿直岐(日本書紀에는 阿直伎로 기록되어 있다)가 織女 둘을 데려왔을 때다.
아지사주(阿知使主)가 구레(吳)에 가서 직녀인 한직녀(漢織女), 오직녀(吳職女)를 데리고 와서 베틀로 직조기술을 펴게
되었다.
[阿智使主......青と博徳は呉に渡り、漢織・呉織・衣縫を連れ帰ったと出ている. 오사카부(大阪府)의 역사]
완전 中國人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中國에서 전수 받았다고 하면, 아담과 이브의 자존심이 좀 회복되는가?
阿知使主는 阿直岐를 말한다. 모르고서야 누가 阿知使主를 阿直岐라 할 것인가.
阿直岐는 4세기 末이 아니라, 5세기 初에 列島로 갔다. 그러므로 阿直岐의 활동시기는 5세기다.
吳나라는 중국에 세 번 있었다. 기원전 473 년에 越나라 구천(勾踐)에게 망한 나라, 222 년에서 280년까지 존속한 나라,
902 년에서 937 년까지 있던 나라다.
漢나라는 기원전 202 년에서 기원후 220 년까지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간에 8 년에서 22 년까지 왕망(王莽)의 新나라에 의해 끊겼었다.
그런데 또 다른 漢나라가 있었다. 아, 살았다 싶었겠지?
흉노족(匈奴族) 족장 유연(劉淵)이 304 년에 서진(西晉)의 통치에서 이탈해 세운 漢이다.
유요(劉曜)때, 국호를 趙라고 고쳤는데, 匈奴인 石氏가 세운 조(後趙)와 구별하기 위해 전조(前趙)라고 부른다.
5胡 16國의 하나로 304 년에서 329 년까지 존속했다. 또 947 년에서 950 년까지 존속한 後漢이 있었다.
後漢이라니까, 前漢도 있겠지 싶냐? 劉邦의 漢나라와 구분하고자 後漢이라 불렀다.
딱하게도 漢나라든, 吳나라든 阿直岐가 織女를 데리고 온 시기와 일치하는 나라는 없다.
日本民族은 날조를 해도 역사는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는 종족이다.
그래도 메국(米國)의 日本史 전공자들은 이날 이때까지 부득부득 實證史學에 부합하며 객관적 증거라고 우긴다.
百濟人 阿直岐가 무엇이 아쉬워 중국[이 당시 中土는 티벳고원 북부였다.
中奴들은 明 초까지도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고 있었다.]이나 高句麗에서 織女를 데려올 것인가.
阿直岐는 百濟 그것도 韓半島에서 織女를 데려왔다.
어떻게든 日本이 百濟 植民地로 출발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高句麗와 中國을 끌어들인 것이다.
원래는 百濟를 高句麗로 고쳤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韓半島 북부에 高句麗가 있었다고 날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지 日本語로 高句麗와 음이 같은 吳나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상선약수 지음
天皇 이라는 소리는 18세기 이후 역사책을 날조 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내용은 확인도 않고 侯王, 王이라는 단어만 찾아, 모조리 天皇이라고 고치는 왜(倭)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