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칠지도의 명문 왜곡

설레임의 하루 2009. 5. 22. 00:08

*출처:다음블로그-할 말하는 대한민국   글쓴이-용화산인    http://blog.daum.net/kone1/10676092

 

 

 

 

일본의 나라현에 있는 석상신궁에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낸 칠지도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명문 중 일부가 예리한

도구에 의하여 글자가 손상되어 있다.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 )?百兵宜(復)供侯王( )( )( )( )作先世以

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태화 4년(A.D 230년) 5월 16일 정오에 여러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여러 병란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후왕에게 주어 후왕이 편안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중략..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에게 진기한 칼이 생겼기에, 성음께서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까지 전하여 보여라.」

 [註 ( ) 안의 한자는 후에 학자들이 보충한 것이다.]

 

칠지도에 관한 내용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에 나온다.

 

「신공황후 52년 가을 9월 정묘삭 병자(10일)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왔다.

칠지도 1구, 칠자경 1면 등 각종의 중보를 바쳤다.

이어 말하여 "신의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습니다. 수원은 곡나의 철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먼 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그 물을 마시고 그 산에서 제철하여 길이 성조에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 "지금 내가 통하고 있는 귀국은 하늘이 열어주신 바이다.

이로써 천은을 내리시고, 해서를 떼어서 나에게 주셨다. 이 때문에 국기가 영원히 단단하다.

너도 마땅히 화호를 거두고, 토산물을 모아서 봉헌하기를 끊이지 않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매년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 久?等從千熊長彦詣之 則獻七枝刀一口 七子鏡一面 及種種重寶 仍

啓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飮是水 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渭

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 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

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雖死何恨 自是後 每年相續朝貢焉」

 [註 "그리고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 이전 문구는 일부 왜곡한 것이고, 이후 문구는 후에 가필한 것이다.]

 

칠지도의 명문 중 일부가 왜 손상되어 있는지 알기 위하여 앞에 나온 칠지도 명문을 나누어 살펴본다.

 

泰( ) 四年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연도가 신공황후 52년으로 적혀 있고, 칠지도 명문에는 칠지도

제작년도가 泰( )四年으로 적혀 있다.

삼국지 위지와 일본서기를 대비하면 비미호와 신공황후는 동일인물이다.

(정확히는 신공황후는 가공인물이고 일본서기 저자는 위지의 비미호에 관한 기사 등 여러 자료를 이용하여 신공황후기를

가공해 낸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지에 의하면 비미호는 A.D 247년에 죽었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269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칠지도의 명문을 훼손한 인물로 추정되는 석상신궁의 대궁사 관정우는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에 맞추어 칠지도

제작연도를 泰始 四年(A.D 268년)으로, 제작월을 九月로 읽었다.

그는 "'泰始 四年'은 漢土의 연호로써 晋의 '泰始 四年'은 6월11일, 8월 12일, 9월 13일 어느 것이나 병오이며..중략..이 해는

우리 신공황후 섭정 68년 무자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보면 관정우는 칠지도의 제작연월을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 문구와 연결시키기 위하여 칠지도 제작년월을 훼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에는 "손자 침류왕 운운" 문구가 나온다.

침류왕의 조부는 근초고왕이므로, 이 경우 신공황후는 4세기 후반 인물이 되고, 신공황후가 칠지도를 받은 시기는 4세기

후반이 된다.

따라서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운운.." 문구와 泰始 四年(A.D 268년)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를 보면 관정우가 칠지도 명문을 훼손하기 전에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를 보았을 때는 "손자 침류왕.. 운운.." 문구는

없었고, 그 문구가 가필된 시기는 관정우가 일본서기를 본 이후이다.

 

일부 사학자는 칠지도에 적혀 있는 "泰( )四年"을 동진의 "太和 四年(A.D 369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분은 칠지도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신공황후기 52조에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라는 문구가 나오고, 침류왕의 조부가

근초고왕인 것에 근거하여, 백제가 신공황후에게 칠지도를 준 때는 근초고왕 치세 때이고, 근초고왕은 A.D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泰( )四年"은 동진의 "태화 4년(A.D 369년)"이라고 주장하였다.

백제가 동진에 조공한 시기는 A.D 372년부터 이므로, 백제가 동진과 교류하기도 전에 동진의 연호를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 )月十六日丙午正陽

 

학자들은 ( )월을 5월로 보고 있다.

이는 漢, 魏, 晋 때 주조한 검 등의 명문에 "五月丙午正陽"이라는 길상구가 상용되었기 때문이다. 정양은 한낮을 가리킨다.

일본인 관정우는 위 "五月丙午正陽"을 길상구로 보지 않고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 9월조에 신공황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내용에 맞추어 "九月丙午正陽"이라고 주장하였다.

 

造百鍊철七支刀

 

위 造는 동사로 사용되었고, 百은 100이라는 뜻보다 모든, 아주 많은, 여러번이라는 뜻이며, 百鍊은 칼의 주조와 관련된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위 문구는 여러 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   )?百兵

위 ?는 물리칠수 있다는 뜻이다.

兵은 앞의 길상구와 관련하여 이 문구도 길상구로 보면 병란이라는 뜻이 된다.

위 문구는 칠지도가 모든 병란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다.

 

宜(復)供侯王

 

위 宜를 동사로 보아 ∼함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괄호 안의 글자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많은데 대체로 供 또는 復 자로 보고 있다.

위 문구에 쓰인 復의 의미는 안정, 편안의 뜻이고, 供은 주다는 뜻이며, 侯王은 주로 고위관리나 신분이 높은 사람의 刀이나

鏡의 명문에 사용되었다.

위 문구의 의미는 칠지도를 후왕인 왜왕에게 주어 왜왕을 편안케 함이 마땅하다는 뜻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백제로부터 칠지도, 칠자경 등 각종 중보를 받았다.

일본서기 신대에는 신보로 백동경, 십악검, 구악검, 팔악검, 팔지경, 초치검 등이 나오고, 수인천황기에는 신라왕자 천일창이

가져온 소도, 일경 등을 신보로 보관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며, 중애천황기에는 "꿇어 앉아 천자의 劍鏡(검경)의 璽符(새부)를

올리고 재배하였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즉 고대 왜국에서는 왕의 상징이 검경이었다.

 

백제가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를 왜왕에게 준 것은 그 명문 내용으로 보아 백제의 후왕인 왜왕을 위한 것이므로,

백제로부터 석상신궁에 있는 칠지도를 받은 왜왕은 백제계 왜왕이 아닌 신공황후가 아니라 백제계 왜왕인 응신천황이나

인현천황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신공황후가 받은 칠지도는 현재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가 아닐 것이다.

 

( )( )( )( )作

사학자들은 훼손된 글자를 만든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괄호 안의 글자가 만든 사람의 이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4자나 연속하여 훼손한 것으로 보아 그 글자가 알려지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방해가 되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先世以來未有此刀

 

위 문구는 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다는 뜻이다.

 

百濟王世(子)奇生

 

백제는 곡나에 철광산을 가지고 있는 온조백제이고, "왕세(자)"는 온조백제 왕세자이다.

그리고 奇生은 진귀한 것이 생겼다는 뜻이다(奇生謂生奇質也. 마융의 장적부 주).

위 문구는 온조백제 왕세자에게 (칠지도 모양과 유사한) 진기한 칼이 생겼다는 뜻이다.

 

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위 성음의 聖은 극존칭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音도 고대에 높임에 사용되었는 글자이므로, 성음은 구태백제왕을 가리킨다.

그리고 고위왜왕은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라는 뜻이고, 지조는(성음의) 뜻으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전시후세는

후세까지 전하여 보여라는 뜻이다.

위 문구는 성음(구태백제왕)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까지 전하여 보여라는 뜻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 의하면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왜왕은 신공황후이므로, 일본서기 문구에 의할 경우 현재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를 받은 사람은 신공황후이다.

그러나 신공황후는 백제계 왜왕이 아니므로, 백제로부터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를 받은 왜왕은 백제계 왜왕인

응신천황이나 인현천황로 보인다.

 

일본서기 왜곡과 칠지도 훼손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의 지배층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라 이름을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고 일본의 전통을 강조하기

위하여 백제 유민 안만려에게 일본서기를 짓게 하였는데, 안만려가 일본서기를 지으면서 가장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 왜와 백제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일본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일본열도왜가 백제의 후국이었는 사실을 감추고 거꾸로 일본열도왜가

백제의 종주국이었는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다.

일본서기 저자가 다음으로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왜와 신라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를 만들 당시 일본의 지배세력은 백제유민들이었고, 이들은 신라에 대한 패배감과 반감이 아주 강하였다.

그 때문에 백제 유민이고 일본서기 저자인 안만려는 일본열도왜가 신라를 정벌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여

마음으로나마 백제유민들의 한을 달래고 패배감을 극복하려 하였다.

일본서기 중 왜곡이 가장 심한 신공황후기를 보면 섭정전년도조에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이어서 고구려왕과 백제왕으로

터도 복속을 맹세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 내용은 김부식님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위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한반도에 있었는 나라가 아니고 대마도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고대에 한반도에서 대마도나 일본열도로 이주한 무리는 이주한 곳에 소국을 세우고 나라 이름으로 근국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에 있는 신라계, 백제계, 고구려계 소국을 정벌한 사실을 이용하여 그 사실에다 한반도의

신라 역사를 적은 신라기에서 왜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는 사실을 발췌하여 이를 신공황후기에 가필해 넣음으로써 신공황후가

마치 한반도의 신라, 백제, 고구려를 정벌한 것처럼 신공황후기를 왜곡하였다.

 

위와 같이 신공황후기에는 왜곡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후에 일본인 누군가가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 명문을 보니 칠지도를 만든 연도가 적혀 있었는데,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았다는 연도와 서로 달랐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신공황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 칠자경 등을 받았다고 적혀 있으므로, 신공황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 등을 받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칠지도는 현재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 누군가는 현재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가 마치 신공황후가 백제로부터 받은 칠지도인 것처럼

가장하기 위하여 칠지도 명문과 일본서기를 대조할 수 없게 칠지도 명문의 제작년도 등을 훼손해 버렸다.

 

[참고 :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의 명문을 훼손한 사람은 A.D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석상신궁의 대궁사를 지낸

관정우로 추정된다.

관정우는 대궁사로 재직할 때 칠지도의 녹을 닦아내고 칠지도의 명문을 읽은 동기에 대하여"아주 시커멓게 녹슬었는데 금색이

조금 보이는데 있어 의심이 나서 그 위의 녹을 조심스레 제거하다 보니 비로소 문자가 나타났다..

중략..이것은 내가 이 신궁에 재직할 때의 일이다"라고 적었다.

 

칠지도의 명문을 훼손한 사람을 관정우로 추정하는 것은 그가 대궁사로 재직할 때 칠지도의 녹을 닦아 내었고, 칠지도 명문

부분의 "泰( )四年( )月十( )日丙午正陽" 문구의 "泰( ) 四年"을 "泰始 四年"으로, "(  )月"을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에

맞추어 "九月"로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泰始 四年은 漢土의 연호로써 晋의 泰始 四年은 6월11일, 8월 12일, 9월 13일 어느 것이나 병오이며..중략..이 해는

우리 신공황후 섭정 68년 무자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관정우는 칠지도의 명문 문구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 문구를 서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칠지도 제작년도를 훼손하여

"泰始 四年(A.D 268년)"으로 읽고, 제작월을 훼손하여 "九月"로 읽었다.

그런데 관정우가 주장하는 칠지도 제작연도가 "泰始 四年(A.D 268년)"이라면 이 해는 신공황후가 죽은지 21년 후이다.

관정우는 자기 딴에는 칠지도 문구를 훼손하여 칠지도 문구와 일본서기 문구를 맞추어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신빙성을

높이려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삼국사기, 중국의 사서 어느 것과도 맞지 않아 아무 소득없이 귀중한

칠지도만 훼손한 결과가 되었다.]

 

칠지도 앞뒤면

출처:한민족 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