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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만리장성의허구

설레임의 하루 2014. 3. 18. 18:36

*출처:헌정회 역사 강좌(2)  글쓴이-成憲植 (사)高句麗역사문화보전회 사무국장 高句麗역사저널 편집인

        http://www.rokps.or.kr/files/dtpboard/201403_100.pdf

 

 

 

동북공정의 개요와 허구
원인과 내용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한족이 주도하는 민국정부가 들어서자 그들은 한족만의 역사를 중국사라

했다가, 지금은 이민족인 요·금·원·청나라의 역사까지 중국사로 편입시켰다. 한족들이 사는 땅이 56개소수민족 땅의 절반에 불과하고,

그들이 자치독립을 원해 정치적인 통합에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자 1949년 간도와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아무리 역사왜곡을 하려해도 그 뿌리가 되는 고구려와 발해(대진)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지 않고서는 자신들이

가공한 역사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기에동북공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동북공정의 주 내용은 첫째중국사는 한족만이 아닌 중화족의 역사이고, 둘째 고구려와발해는 중국 지방정권이고, 셋째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것이다.

 

목적

중국은 무력으로 점령한 간도를 자국영토로 확고하게 굳히고, 북한에서 정변이 발생할 경우 역시 무력으로 개입해 북한을 중국의

동북4성으로 편입시키려는데 있다.

중국은 이에 대비해 국경지역에 군대를 상시 주둔시키고 있으며,여차하면 간도와 티베트를 점령했듯이 북한으로 밀고 들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려면 국제적으로 뭔가 확실한 대의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 명분이란 바로 한사군과 고구려 땅이었던 북한 땅이 중국의 옛땅이

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미리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패권주의에 입각하는것으로 한마디로 동북공정은 땅 따먹기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북한이 무너지면 북한 땅은 당연히 우리 땅으로 될 것이라는 핑크빛 환상에 젖어있으나,

냉엄한 국제법상 북한 땅은 국제분쟁지역이 될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이다.

현상 이렇듯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음에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분노만 느낄 뿐 이론적으로

아무런대응책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는 국사교과서의 한사군 내용이 중국과 같기 때문이며, 동북공정에 대해 반박할 자료와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무역과 외교문제로 수수방관하고 있으며,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역사재단은동북공정에 오히려

협조하고 있으며, 기업과 국민들은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는이유로 역사에 무관심해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중국이우리역사를 빼앗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스스로가 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허구성 비판

① 현 독일과 프랑스 땅을 점령한 적이 있는 로마제국의 역사는 독일이나프랑스의 역사가 아니라 당연히 이태리의 역사이다.

 역사의 흐름이란 역사 주체의 혈통이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고구려와 삼국이 현 중국 땅의 대부분을 지배했었다고 해서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②‘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사료적 근거는 <한서지리지>에 기록된유주(幽州)의 현토군에 고구려(高句驪)현이

 속해있다는 것인데, 그 驪(가라말 려)는 우리 조상의 나라 高句麗의 麗자와는 다르다.

 麗를 나라이름으로 할 때는‘리’로 발음한다고 한자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高句麗를 나라‘고구리’로 발음하지 않고, 지명‘고구려’라고

 발음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인정하는 위험한행위인 것이다.
③ 발해는 당나라가 대조영이 세운 나라를일방적으로 부른 국명이다.

 당나라 때 발해는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는 큰 내륙호수인 발해 부근의 지명이나, 지금은 중국의 내해로지명이 이동되어 있고

 발해라는 나라는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동만주로 이동되어 있다.

 대조영의 나라는 발해가 아닌 대진(大震)으로 불러야 마땅하며, 그래야 동북공정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④ 고구리와 대진국은 자체연호를 쓴 천자국이다.

 만약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면 중국의 연호를 썼을 것이다.

 발해가 자체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신당서>와 <태백일사>에 있으며, 고구리의 자체연호 사용은 <태백일사>, <고구리사초략>, 

<요천제>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중 몇 개는 출토유물의 명문에서 명확히 입증되고 있다.

 

한사군의 허구 한사군전쟁은 한무제가 참패한 전쟁이나 북부여의 일부인 번조선의 반역자들 때문에 오군이 설치된 적이 있으나 곧

멸되고,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리가 없앤 낙랑국을 점령해 군현을 설치한 적이 있으나 그 수명은 11년에 불과했다.

이것이 한나라의 400년식민지 낙랑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한사군전쟁의 주 무대인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강임에도, 현재 한반도청천강으로 이동·왜곡되어 있다.

이는 유주의 요서군의 상징인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서남단에서 하북성 동단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이동되었기 때문이다.

 

※ 덕흥리고분이 주는 역사적 사실은 광개토태왕의 통치강역인 유주에 속한 요동과 요서, 낙랑과 현토, 발해군 등이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라는 사실이다.

 

진시황 만리장성의 허구
2012년 6월 중국은 만리장성이 동쪽으로는 만주를 관통하고, 서쪽으로는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우루무치까지 이른다고발표했다.

그러나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중국의 만리장성 주장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진시황의 장성 진시황은 39세인 B.C 221년 중국의 전국시대를 통일해 황제가 되었으며,11년간 재위하다 B.C 210년 49세로

사망했다.
진시황이 장성을 쌓기 시작한 때는 B.C 214년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떠났던 노생이 돌아와“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는 호(胡)입니다”

고 아뢰자, 진시황은 이 호를 북쪽 흉노로 알고 장성의 보강을 명령한다.

이에 B.C 214년부터 몽념장군이 장성을 쌓다가, 4년 후 진시황이 죽자 차남 호해가 형을 죽이고 황제로 등극하여 장성축조가

중단된다.

사연이 이와 같은데 4년 만에 동쪽으로 산해관까지 만리나 되는 장성을 과연 쌓을 수 있었을까?

진장성의 위치 <사기 몽염열전>에“진시황이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 장군과 30만으로 하여금 북쪽 융적을 몰아내고 하남을 빼앗아

성을 쌓았다.

서쪽 임조에서 일어나 동쪽은 요동까지이다. 길이가 만 여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하남(河南)은 황하의 남쪽

아니라 바로 황하북부 하남성을 의미하는것이다.

 

진장성의 서쪽 임조와 동쪽 요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서쪽 임조의 위치: <중국백과사전>에서의 임조에 대한 역사연혁에“진나라 때 적도현을 설치해 롱서군의 치소로 했다.

서진 말기에 적도군의 치소로 했다. 당나라 때는 적도군 임주,송나라 때는 희주, 균이 적도군의 치소였다.

나라 건륭제 때 주를 바꿨다. 민국 초기에 적도현으로 했고, 후에 임조로 바꿨다. 적도라고 한이유는 이 땅에 적인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1929년 적도현을 임조현으로 바꿨는데, 그 땅의 임조하에서 이름을 얻었다.”라고 하여 롱서군=적도군(현)=임조현임을알 수 있다.

진장성의 서쪽인 롱서에 대해서는 <사기정의 조대가주 유통부>에 전하길,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은 롱서의 머리에 있다”와“

롱서 수양현으로 지금의 롱서에 수양산이 있다”라는 기록과, <사기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기를“수양산은 하동 포판의 화산북쪽에

있고, 황하가 꺾이는 곳에 있다”라는기록이 있다.

이 중 <사기집해>의 기록은‘대청광여도’등 고지도에 산서성 서남단 황하굴곡지점에 수양산과 백이·숙제의 무덤이 그려져 있는데,

2008년 그곳에서 백이·숙제의 실제무덤이 발견됨으로써 그 기록이유물적 증거로 명확히 입증되었다.

 

(2) 진장성의 동단 맹강녀곡장성: <사기 몽염열전>에 기록된 진장성의 동쪽 끝인 요동은 바로 중국 4대민화의 하나인 맹강녀(孟姜女)

다음과같은설화가있는곳이다.“ 맹강녀가 결혼한 첫날밤에 난데없이 병사들이 들어와 남편을 장성 축조장으로 끌고 간다.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끊기자 궁금해진 맹강녀는 장성 축조장으로 남편을 직접 찾아간다.

이리저리 둘러 보다가 장성 안쪽에서 남편의 시신을 발견하고는대성통곡을 하고 만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진시황이 그녀의 통곡소리를 듣게 되어 그곳에 왔다가 맹강녀를 보고 그 미모에 반해 청혼을하게 되고, 맹강녀는

진시황에게 탈상을 마칠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탈상이 끝나자 맹강녀는 높은 바위에 올라가 진시황의 폭정을성토하고는 떨어져 죽는다.

이후 맹강녀는 절개를 지킨 열녀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는내용의 민화이다.
그 장성이 바로 진장성의 동쪽 끝인 맹강녀 곡장성(孟姜女哭長城)이며, 그 장성이 있는 곳이 바로 황하북부 하남성 위휘현인 것이다.

<중국백과사전>의 자료에“맹강녀가 위휘지산 단장성까지 남편을 찾아가자 천지가 감동해 장성이 무너져 남편의 시신이 노출되자

통곡했다.

지금의 위휘지 산향왜뇌촌 일대에서 아직도 전해지는 고사이다.

산 위에 가면 맹강녀가 곡을 하고 장성이 무너진 누적석을 볼 수있다. 하남성 신향시에는 맹강녀하와 맹강녀
길와 맹강녀다리 등의 명칭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원래 하남성 위휘현에 있던 맹강녀 관련 유적을 하북성 동단 진황도시에 만들어놓고 그곳에 있는 장성을 진시황 때 쌓은

장성이라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강녀의 남편이 첫날밤 집(하남성 위휘현)에서 끌려가 수천 리 밖에 있는 하북성 동단 산해관에 있는 장성축조에 동원되었다는

이야기가 상식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지? 또 그곳까지 여자 혼자서 남편을 찾아갔다는 말이 과연 가능한지?

만리장성은 허구 지금까지 중국역사 최고의 자부심으로 치부되던 만리장성(동쪽 산해관에서 북경을 지나 서쪽 감숙성 자위관까지

가는장성)은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아님이 명백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성을 누가 언제 쌓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산해관 현판의 방향과 각산 장성의 봉화대 위치, 치양식, 화살구 방향 등으로 볼 때

이 장성은 서쪽에 있는 한족을 방어하기 위해 동이족이 쌓은 장성임이 확실하다.

즉 진시황이 쌓은 장성은 산서성 서남단황하변에 있는 수양산에서 시작되어 고대의갈석산인 현 중조산의 북쪽 기슭을 따라 축성되었

며, 동쪽으로 북부 하남성 위휘시까지 이어지는 약 천리의 장성으로 당시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국경선이었다.

진장성의북쪽은 고구리의 전신인 북부여의 해모수단군이 통치하던 강역이었던 것이다. 그 이전배달국과 조선의 강역이기도 하다.

이러한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 중국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자행했고, 동북공정까지 하는 것이다.했다는 기록은

<신당서>와 <태백일사>에 있으며, 고구리의 자체연호 사용은 <태백일사>, <고구리사초략>, <요천제>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중 몇 개는 출토유물의 명문에서 명확히 입증되고 있다.

한사군의 허구 한사군전쟁은 한무제가 참패한 전쟁이나 북부여의 일부인 번조선의 반역자들 때문에 오군이 설치된 적이 있으나

멸되고,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리가 없앤 낙랑국을 점령해 군현을 설치한 적이 있으나 그 수명은 11년에 불과했다.

이것이 한나라의 400년식민지 낙랑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한사군전쟁의 주 무대인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강임에도, 현재 한반도청천강으로 이동·왜곡되어 있다.

이는 유주의요서군의 상징인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서남단에서 하북성 동단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이동되었기 때문이다.

 

※ 덕흥리고분이 주는 역사적 사실은 광개토태왕의 통치강역인 유주에 속한 요동과 요서, 낙랑과 현토, 발해군 등이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라는 사실이다.

 

진시황 만리장성의 허구
2012년 6월 중국은 만리장성이 동쪽으로는 만주를 관통하고, 서쪽으로는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우루무치까지 이른다고발표했다.

그러나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중국의 만리장성 주장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