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성훈(헌식) 2013.09.02. 15:43 http://cafe.daum.net/mookto/GUJC/5035
개국 후 억불숭유정책을 펼치며 유교를 국시로 삼자 공자의 나라를 동경하는 사대모화주의가 만연해져 소중화가 되어버린 500년 조선왕조는 중화를 위해 스스로 조상들의 역사를 축소·왜곡했다. 이천년 단군조선의 반을 잘라내 가공의 기자조선으로 대체했으며, 각종 <지리지>를 편찬해 반도사관을 확고하게 굳히게 된다. 또한 명나라 멸망 후 겉으로는 청나라의 속국임을 표방했으나, 사대부들은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는 문구를 묘비에 쓰면서까지 정신적으로는 오랑캐(?)인 청나라에 대항했다. 침략했다.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겨룬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제의 야망이 실현되는 듯 했으나, 명성황후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이러한 일제의 움직임을 저지하려하자 일본정부는 미우라 공사를 행동대장으로 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고종 임금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친일파를 척결하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자주독립의 길을 걷는다. 확고하게 공인받게 된다. 그 조약의 주 내용은 “일제는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식민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제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용인한다.” 는 것이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에는 경술국치까지 당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효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백성들을 말 잘 듣는 우매한 백성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위대하고 찬란했던 역사를 모르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조선왕조가 500년 동안 수거해 감금했던 우리의 고대사서를 불 지르고, 핵심 서적들은 모두 일본궁내청으로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1919년 3.1민중혁명으로 사임한 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의 뒤를 이어 부임한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그는 “조선인들이 자신의 일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한 뒤 조상과 선인들의 무능·무위·악행을 들추어내고 또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부정하고 경시·경멸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조선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문화·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일 것이다.”라고 말했고, 1921년 12월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를 발령하여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우리 역사를 본격적으로 말살했다. 공포하여 위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회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 조선인은 이완용·박영효·권중현과 일본인은 쿠로이 타·핫도리·나이토가 선임되었고, 위원에 이마니시·오다·이능화·어윤적 등이, 수사관에 이나바·홍희·후지타 등 3명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병도·신석호 등이 수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최남선도 1928년 12월 촉탁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선왕조가 강조했던 기자조선보다는 위만조선을 강력하게 조명하게 된다. “옛 조선은 이민족인 위만과 한사군의 지배로부터 시작되는 식민지배의 역사이므로, 지금의 조선이 이민족인 일본의 지배를 받는 건 당연하다”는 것이 핵심논리였다. 요·금·청의 역사뿐만 아니라 발해사도 우리 역사에서 빠지게 되며, 고구리·백제·신라의 초기 기록들이 모두 변조되기에 이른다. 아울러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가두는 반도사관이 확실하게 이론적으로 정착되는 것이다.
반영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사 편찬사업은 한국인들로부터 자기 역사연구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것으로서, 서술의 중심은 한국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서술하기보다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며 사대주의로 일관했다거나 중국과 일본보다 역사와 문화가 뒤떨어져 있다는데 두어졌다. 즉 일본의 한국 침략과 강점의 합법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료의 취사선택과 왜곡을 자행했으며,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목적에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룡강군에서 점제현신사비를 조작했고, 북경 유학 후 1926년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그는 고구려와 발해를 한국사에서 분리하여 금나라와 청나라로 이어지는 별도의 만주사로 보는 사관을 지녔으며,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에 근거하여 고대 한반도 남부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근대의 조선병탄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1923년~1932년까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위원을 지내며 우리 역사를 난도질한 인물이다. 그의 심복 겸 수제자가 바로 식민사학자로 유명한 이병도이다.
힘입어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이마니시 류(今西龍)에게 배운 식민사학을 강의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 그 후학들이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승이 전해준 식민사학을 아직도 철옹성 같이 굳건히 고수하고 있다. 자신들의 이론에 반하는 학설에 대해서는 학위는 물론 강의할 자리도 주지 않고 있다. 대학교수들뿐만 아니라 역사관련기관들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돈인데, 국익하고는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우리의 민족혼과 정신을 파괴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자국의 위대하고 찬란했던 진짜역사를 되찾아 복원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을 도와주고 있는데, 문제는 그들의 매국민족반역행위에 대해 단 한 번도 정부가 나서서 응징한 적이 없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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