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까기 2012.05.12. 00:48 http://cafe.daum.net/mookto/IMPU/113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4)훙산인의 성지 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41721411&code=210000 우리의 孝와 닮은 꼴…훙산인의 여신 숭배 중국 학계는 아예 훙산인을 중국인의 ‘공동’ 조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훙산인은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중국 학계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니 뉴허량은 ‘동이족의 신전이자 성지’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도 비상한 곳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도 여신이…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여신상 같은 소조상은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함북 청진시 농포동과 웅기군 서포항 유적에서도 소조인물상이 나왔다. “특히 1956년 출토된 농포동 인물상은 허리를 잘록하게 좁힌 다음 그 아래는 다시 퍼지게 만드는 등 ‘여신’의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둥산쭈이(東山嘴)의 임산부상을 연상시킵니다. 서포항 것은 가슴을 희화적으로 표현한 게 매우 인상적이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랴오둥 반도 궈자춘(郭家村)에서 나온 소조상의 치켜진 눈과 광대뼈는 뉴허량 여신상 및 츠펑 시수이취안(西水泉)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 여인상과 일맥상통한다. 옌볜 자치주 샤오잉쯔춘(小營子村)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인물상도 치켜올라간 눈매와 광대뼈 등 뉴허량 여신상과 비교할 수 있겠다.
과연 5500~5000년 전 여신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뉴허량의 여신묘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숭배의 대상은? 콕 집어 단정을 내릴 수 없다. 뉴허량의 여신 조각상을 보자.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것은 인간을 신화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격화한 신(神)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학계는 이 사실적인 인물 조상이 조상 숭배의 우상이라고 해석했다. 또 하나 뉴허량 여신묘에서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 등 ‘최소한’ 세 명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정리됐다. 여신의 지위가 최소한 3등급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호위하고 있는 형태라고 봐요. 이것은 조상 숭배의 대상도 굉장히 고차원적인 단계로 넘어갔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죠.”
하지만 조상 숭배만이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뉴허량 유적군은 이른바 제단·신전·무덤 등 이른바 단(壇)·묘(廟)·총(塚) 등이 3위 일체로 구성됐다. 제단과 무덤이 한꺼번에 조성된 적석총(제2지점)에서뿐 아니라 그곳에서 900m 떨어진 여신묘에서도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있어요. 여신묘에서는 여러 씨족의 공동 조상 한 분을 모셨을 수 있죠.”(이교수) 특성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모신에 대한 신앙이다. 제사유적인 둥산쭈이에서 나온 잉부(孕婦)상과 뉴허량 여신 모두 여성임을 잊지 말자. 이것은 농경 및 정착생활로 접어든 신석기인들로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웅녀(熊女)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웅녀는 바로 훙산인들이 모셨던 지모신의 원형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다. 장광즈(張光直)의 말을 들어보자. 쑤빙치(蘇秉琦)도 “뉴허량 유적군의 단·묘·총의 결합으로 볼 때 고대의 제왕들이 거행했던 교(郊:야외에서 지내는 제사)·료(燎·하늘신에게 제사), 그리고 체(조상신에게 제사)가 함께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궈다순(郭大順)은 “여신묘의 총 면적이 10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좁은 면적에 비해 너무도 풍부하고 방대한 유물의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있지 않을까.
(絶地天通)’는 기록이 있다. 그전까지는 누구나 하늘과의 통로로 왕래했는데, 황제 때 치우가 통로를 통해 황제에게 도전했다는 것. 그러자 황제의 후계자 전욱이 신과 인간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지었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는 바로 이런 고사(故事)가 뉴허량 여신묘와 훙산문화 영역에서 쏟아지는 다량의 옥기와 부합되는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끊어진 하늘과 땅의 통로는 누가 잇는가. 그것은 바로 천지를 농단한 전욱과 같은 왕의 고유권한이라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같다는 뜻이다. 인간이 살았던 주거지와 사당(신묘)의 구조가 같다는 것은 인간이 살았던 곳이, 바로 ‘신이 살았던 곳(神居之所)’이라는 뜻이다. 주실이 있고 측실이 있고 전후실이 있는 등 나름대로는 주부(主副) 관계가 뚜렷하고, 좌우 대칭, 전후 호응의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일반 주거지와는 다른 후대의 전당(殿堂)과 종묘 배치의 물꼬를 튼 것으로 본거지.” 뉴허량의 여신묘 구조와 부합된다. 종묘(宗廟)는 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부계 씨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시작되었으리라. 기자는 여신묘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기면 벗길수록 점점 빠져들었다. 이형구 교수가 한가지 수수께끼를 냈다.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사의 중심지였다는 것. 이는 한 씨족과 부락 단위를 넘어선 단계라는 것. 즉 이 뉴허량은 훙산문화 공동체가 더불어 사용했으며, 그들이 함께 숭배한 선조들의 성지였다는 것이다.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게 쑤빙치의 견해이고 보면, 뉴허량은 곧 훙산인들의 성도(聖都)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은 훙산인의 여자 조상이며,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이다.”(중국문물보·1989년 5월12일자) 기자가 만난 쉬쯔펑(徐子峰) 츠펑대 교수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 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 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상징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형구 교수의 한 마디.
이 훙산문화는 사방으로 퍼져 발해문명을 꽃피웠고, 남으로는 중원의 황허문명과 만나 드디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것이 훗날 상나라가 되는 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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