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아시아 최강이었던 고구리 철갑기병 (1~4부)

설레임의 하루 2012. 6. 12. 07:43

*출처:고구려 역사저널
아시아 최강이었던 고구리 철갑기병 (1/4부)
 
편집부 기사입력  2012/05/30 [11:22]
신라와 백제 못신 신라와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금동못신. 그동안 왕의 상징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었다.

그 비밀을 풀어준 것이 고구려 고분벽화다. 달려드는 적군을 내리치는 데 쓰인 고구려기병의 무기였던 것이다.

어쩌면 백제와 신라의 군대는 이 못신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동안 신라고분에서 발굴된 못신은 금으로 만들어진 아주 얇고 가벼운 신발이었습니다.

사람이 신고 다닐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장식용 정도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고구려 병사들은 신발 밑창에 촘촘히 못을 박은 이 신을 신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 신발은 장식품이 아니라 기병의 무기였던 겁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십니까? 이것은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가 알려준 사실들입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고구려의 고분은 2만여기에 달합니다.

수도가 있었던 압록강 부근 집안과 평양 부근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는데, 대부분이 도굴범들에 의해 훼손당해 유적이나 유물들은

거의 남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무덤 내부 벽면 가득 그려 넣은 벽화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고분들 중에 벽화를 남긴 것은 90여개 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무기와 무사가 등장하는 고분은 28개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주목해보기로 했습니다.

고구려군은 어떻게 무장하고 어떤 무기를 들고 전장터로 나갔는지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5세기 초 대제국을 일군 고구려 힘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우선 가장 많은 무사들이 등장하는 안학3호분으로 가 보겠습니다.

안악3호분이 발굴된 것은 1949년. 평양에서 120km 떨어진 황해도 안악군 류설리에 위치해있다.

이 고분은 외부는 흙으로 덮고 내부는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고분의 벽화는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 것인가.

이 안악3호분은 무덤 주인을 놓고 두 가지 의견이 맞서고 있다.

서쪽 측실에 남아있는 묵서명에 4세기 중반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귀화인 동수의 이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름까지 분명히 적어놓았으니 무덤 주인은 동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악3호분의 주인은 고구려 왕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덤 가운데 가장 크게 그려놓은 이 사람이 곧 무덤 주인이다.

그런데, 당시 왕이 사용한 귀면부채. 왕의 상징으로 알려진 모자, 즉 백라관을 쓰고 있다.

이 때문에 무덤 주인은 고구려왕이라는 것이다. 고분 안쪽 전실로 들어서면 동쪽 회랑에서 대형 벽화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대행렬도다.

이 대행렬도는 지금껏 알려진 벽화중에서 가장 크고, 등장인물 또한 가장 많은 250여명에 이른다.

선두엔 여러 악기를 든 고취악대가 행렬을 이끌고 중반부분 부터는 군사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행렬에 참가한 병사들의 무기가 다양하다. 도끼를 든 이가 있는가하면 창을 든 이도 있고 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의 모습도 보인다.

4세기 중엽 고구려 군의 실체를 알기 위해선 행렬도에 담긴 병사들의 무기와 무장상태를 점검해야했다.

우선 전체모습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작업은 무장상태와 들고 있는 무기 종류에 따라 병사 한 명씩을 확대해 선과 색의 상태를 정리하고 실제 행렬처럼 복원시킬 것이다.

이중 벽화속의 색을 확실하게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의 자문을 구했다.

행렬도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색은 빨간색. 그리고 초록색과 갈색등 사용된 색은 모두 다섯 가지다.

모두 자연에서 추출한 천연안료다.

형태를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선은 검은 색으로 처리했다.

병사들이 입은 옷과 얼굴은 대부분 색이 바래졌기 때문에 원래 색을 살리는데 주력했다. 이제 병사들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났다.

말을 탄 기병중엔 온 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가 있다. 병사가 탄 말 역시 갑옷으로 무장했다.

행렬의 맨 뒷부분엔 갑옷을 입지 않은 기병도 있다. 기병들은 이렇게 무장상태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눠져 있었음이 확인된다.

말을 타지 않은 병사의 경우 가장 앞 부분에 창수들이 포진해있다. 창수의 경우 여러 형태로 그려놓은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칼을 든 병사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이 지닌 칼은 모두 칼 몸의 한쪽에만 날이 있는 외날칼이다.

다음은 도끼를 든 병사. 다른 병사들과 달리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행렬 가운데엔 어깨에 활을 메고 허리엔 화살통을 찬 궁수들도 있다.

50여명의 병사들이 호위한 군사 대행렬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1500년 전 고구려 군대는 어떤 무기를 보유했고, 군사들은 어떻게 배치됐는지, 막강 군사력을 보유했던 고구려 군대의 위용이 벽화

속에서 이렇게 살아나고 있다.

▲ 고구려 철갑기병이 그려진 벽화     © 편집부


안학3호분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이 대행렬도는 높이 2미터, 길이 6미터의 커다란 한 장의 판석에 빈틈없이 그려놓았다고 합니다.

규모도 물론 최고지만.....잠깐 여기 이 모습들을 봐 주십시오. 표정 하나 하나가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군요.

게다가 하나도 같은 표정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낸 벽화입니다. 이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 병사입니다.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갑옷의 형태가 특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십 개의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들었는데요.....이런 갑옷을 찰갑이라고 부르지요.

게다가 이 병사는 말까지도 온 몸에 갑옷을 둘렀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군대엔 이런 기병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요.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병들, 그들의 무장상태가 과연 이 벽화와 같은 모습이었는지 확인해보겠습니다.

지난 1998년 발굴에 성공한 서울 아차산 고구려 유적지.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무기와 무장상태를 알려주는 유물이 다량 발굴되었다.

출토유물 중 무기류로는 화살촉이 가장 많고, 도끼와 창도 있다. 유적지 곳곳엔 병사들이 구축한 진지의 흔적들도 남아있다.

그렇다면 철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병의 존재를 확인시켜줄 유물은 없을까.

아차산에서 발굴된 유물 중 투구는 단 하나. 발굴 당시엔 머리에 쓰는 둥그런 형태만 남았다고 여겼으나 함께 나온 여러 개의 철편

조각들을 조사한 결과 이 투구는 철 조각들을 이어 만든 투구였다. 유물을 토대로 복원한 고구려 철갑기병의 투구는 이런 모습이다.

그렇다면 크기가 일정한 이 철편들은 어디에 사용된 것들일까. 발굴팀은 이것이 갑옷을 만드는 재료, 즉 찰갑의 재료임을 밝혀냈다.

이것으로 벽화 속 기병의 무장상태를 확인했다. 기병들의 무장은 찰갑으로 이뤄져있다.

그런데 그동안 발굴된 갑옷은 판갑과 가장 우수하다는 가야의 판갑이었다. 고구려의 찰갑과 전혀 다른 형태다.

백여 개의 철편을 3분의 1씩 겹쳐지게 가죽끈으로 이어 만든 찰갑은 판갑에 비해 가볍고 튼튼하다.

고구려의 찰갑이 한단계 앞서는 우수한 갑옷인 것이다.

전호태 교수 인터뷰
현대적으로 봐서는 아주 고급소재로 만든 21세기형 전투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가볍고 그러면서도 외부의 충격을 잘 흡수하고 쉽게 뚫리지도 않고 그런 면에서 아주 뛰어나고 신흥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가 철 제련기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벽화 속에도 남아있다.

압록강 부근 집안지역에서 발굴된 오회분 4호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제철신이 그것이다.

쇠를 부젓가락으로 집어 모루위에 올려놓고 마치로 두드리는 제철신의 모습이 벽화 천장에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찰갑을 말에도 입혔을까.

현재 고구려 유적은 출토된 것이 없기 때문에 가야유적을 통해 말 갑옷의 형태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현재까지 발굴된 말갑옷 중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이 갑옷은 분명 찰갑이다.

판갑이 대부분이었던 가야지역에서 왜 찰갑이 발견된 것일까.

함안 가야유적과 벽화속의 말 갑옷형태를 비교해보자. 말 얼굴 가리개의 형태가 거의 동일하다. 말갑옷도 마찬가지다.

5세기 가야의 유적이 4세기 중엽 안악3호분의 벽화와 완벽하게 닮아있다.

5세기라면 광개토대왕의 5만 대군이 가야지역에 내려와 전투를 벌인 직후다. 그 영향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지난 1995년 북한은 강원도의 철령지역에서 말의 무장에 관한 중요한 발굴에 성공했다.

땅속에서 흙으로 만든 수십 개의 말 인형을 찾아냈는데, 몸통과 얼굴에 갑옷을 두른 무장한 말 인형들이었다.

 

고구리 철갑기병은 아시아 최강 (2/4부)

 
편집부 기사입력  2012/05/30 [11:27]
(편집자 주)
동영상에 나오는 고구리의 지도는 현 강단사학계의 이론인 반도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고구리는 중국 대륙 한가운데인 산서성에 그 중심을 두고 아시아 전체를 호령했었다.
광개토태왕 때의 후연은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던 나라였으며, 거란족의 근거지였던 요택도 황하북부 하남성 황하와 심수 사이에 있었다.

3, 4세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이 발굴로 고구려는 가야보다 최소한 백여년 앞서 말에도 무장시켰음이 확인된다.

이렇듯 완벽한 무장을 갖춘 말과 병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적을 위협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철갑기병의 위력은 마치 6.25때 탱크와 같다.

그러나 병사와 말이 온통 철갑으로 두른 이런 상태에서 과연 적과 제대로 싸울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은 삼실총 공성도 벽화가 해결해준다.

철갑기병의 몸놀림이 매우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정도라면 실전에서도 큰 몫을 맡았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철갑기병의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철갑기병은 우선 자기 키의 2배나 되는 긴 창을 갖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삼실총 벽화는 못신을 소개한다. 말을 탄 철갑기병과 말에서 내린 2명의 병사 모두 못신을 신고 있다.

달려드는 적군을 말 위에서 내려칠 때 사용하는 무기였다.

신라와 백제에서 이 못신을 왕의 부장품으로 남겼다는 사실은 당시 못신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케 한다.

4세기부터 벽화에 등장하기 시작한 고구려의 신병기, 철갑기병. 그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 철갑기병에 관한 기록은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국사기는 동천왕 때에 이미 철갑기병을 보유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던 그 모습이 이제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대행렬도를 보면 이 철갑기병의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세어보겠습니다.

하나 둘 셋 넷....모두 8명이군요. 이 벽화만 보면 철갑기병이 전체 고구려군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철갑기병이 등장하는 또 다른 벽화를 찾아봤습니다.

이것은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덕흥리 고분의 행렬도입니다.

고분의 행렬은 안학3호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철갑기병만큼은 크게 그렸고, 행렬을 사방에서 호위하고 있습니다. 그 수도 11명이나 됩니다.

참가인원이 적은 것이 비하면 아주 많은 수입니다. 벽화가 그려지던 때, 철갑기병이 무척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안학3호분이 만들어진 것은 357년.덕흥리 고분은 408년에 만들어졌으니까 두 고분 사이엔 대략 5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벽화는 그 50년 동안 철갑기병의 역할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때 고구려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안학3호분이 만들어지던 4세기 중엽의 상황은 이랬다.

남으로 중국 한나라의 세력권에 있던 낙랑 대방군을 몰아낼 정도로 세력을 키운 고구려는 요동 진출을 시도한다.

당시 요동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모용선비족의 극성을 공격한 것이다.

인터뷰-여호규 박사
요동지역을 어느 세력이 확보하느냐에 따라서 만주지역 전체에 대한 판도가 바뀌게 됩니다.

특히 고구려는 중국 현토군 세력과 대결과정을 통해서 국가를 건설하고 현토군 세력을 계속 몰아내면서 국가적인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세력과 대결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요동지역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학 3호분이 만들어진 지 30년 뒤인 385년. 삼국사기는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과 밀고 밀리는 접전상황을 전해준다.

고구려의 본격적인 요동정벌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0년 뒤인 395년. 광개토대왕은 비려, 즉 거란을 정벌하고 후연의 국경지대를 거쳐 돌아왔다.

이것은 광개토대왕 대에 이르러 요동을 확고하게 점령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성공은 고구려 군대에 일대 변화를 예고한다.

요동에 진출한 고구려 군대는 이곳 무순지방을 손에 넣는다. 무순은 오늘날에도 철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무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산엔 지금도 만주일대에서 가장 큰 제철소가 자리 잡고 있다.

안산이라면 고구려 사람들이 철을 캐내갔다는 바로 그 지역이다.

1500년 전에도 이처럼 철이 나고, 제철 기술이 발달한 지역을 광개토대왕이 손에 넣은 것이다.

402년 광개토대왕의 군대는 요하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한다.

그리고 2년 뒤 연군, 지금의 북경까지 진출한다. 407년 광개토대왕의 군대는 후연과의 오랜 전쟁에 쐐기를 박았다.

북위와 더불어 중국 일대의 패자였던 후연을 완전히 점령한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의 비문은 후연공격으로 갑옷 만여필을 노획했다고 전한다.

갑옷 만여필이 전리품이라면 실제 후연의 군대는 갑옷으로 중무장했을 것이다.

이런 군대를 고구려가 섬멸한 것이다.

안악3호분이 만들어지고 50년이 흐르는 사이, 광개토대왕의 주력부대로 자리 잡은 철갑기병을 발판으로 고구려 대제국 건설은

완성되어갔다.

요동지방의 패권을 장악한 고구려는 그 대가로 확보한 다량의 철을 실위(대흑한령산맥과 몽골 사이에 위치해 있던 유목민족국가)에

수출합니다.

귀한 철을 받은 실위가 가만있을 순 없지요. 이번엔 튼튼한 말을 고구려로 보냅니다.

그러자 그 말들은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전쟁에서 중요하게 쓰여 집니다.

이 모두가 5세기, 철갑기병을 주축으로 군사력을 보강한 뒤 얻게 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군대엔 철갑기병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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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의 무기 또한 최고 수준에 있어야 진정 무적 군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무기 상황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 역시 대행렬도입니다.

칼을 들고 있는 병사입니다. 이런 칼은 둥근 모양의 고리가 달려있다고 해서 환도라고 부르는데, 고구려 병사들은 주로 내리치는 데

효과적인 칼을 갖고 있습니다. 기병들의 주무기였던 창을 든 보병도 있습니다.

기병들이 든 창은 긴 것이었지만 보병들은 사용하는 데 편리하도록 짧은 창을 들고 있습니다.

달려드는 적을 찌르기엔 그만인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 창은 모양이 좀 다르게 생겼습니다.

창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돼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안된 형태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도끼를 든 병사들은 부월수라고 부릅니다.

도끼나 낫 같은 기구들은 예나 지금이나 농사일에 주로 사용되는 것인데, 전쟁에서 부월수가 할 일은 창수가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면 달려가 내려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활을 든 궁수들입니다.

보병과 기병 모두가 사용했던 고구려 최대의 무기가 바로 이 활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이 가진 활은 아주 특이하군요. 활 시위를 풀어놓고 있는데, 활이 거꾸로 완전히 구부러져 있습니다.

활이 실제 이렇게 구부러진다면 그건 대단한 탄력성일텐데요. 이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징기스칸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성능 좋은 활 때문이었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고대 전투에서 활은 가장 중요한

무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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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의 고구리 철갑기병 (3/4부)
동아시아를 정복한 고구려 활의 비밀
 
편집부 기사입력  2012/05/30 [11:51]
 
벽화 속에 활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고구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긴 무기도 역시 이 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활. 그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 지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 활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 비밀을 풀기 위해 대대로 우리 활을 만들어온 궁시장 보유자 김박영씨를 찾았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대나무와 물소뿔, 소 힘줄이다. 이것은 탄력성을 높이기 위한 가장 좋은 재료다.

그리고 조금씩 불에 달궈 재료를 유연하게 만든 다음 활 전체를 180도 이상으로 뒤집어 활시위를 건다.

최고의 활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가 사용한 재료 중에 최고로 손꼽는 것이 바로 이 물소뿔이다.

이 물소뿔이 고구려 활에 쓰였다면 오늘날의 전통활은 고구려에서 완성된 것이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하는 이 재료를 과연 고구려 사람들이 구할 수 있었을까.

인터뷰-윤명철 교수
당시 고구려엔 주변 국가들 교역을 했다. 광개토대왕 말년에 남연과 교역한 사실이 나온다. 남연은 오늘날의 산둥지방에 있다.

교역품목 중 중요한 것이 수우. 물소. 광개토대왕은 당시 남연에게 천리말 생웅피 등등 보내자 남연의 모용총이 수우와 앵무새 보내.

수우는 물소뿔 의미. 이렇게 많은 규모의 수우가 왔을 경우에 교역을 통해 물소뿔 확보했을 가능성 크다.

재료는 밝혀졌다. 그러나 활 유적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형태는 벽화를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고구려 활이다.

길이가 짧아 기병들도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어진 단궁이다. 수렵도엔 그 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타나있다.

사냥감을 발견한 젊은이가 활 시위를 당겼다. 벽화는 이 화살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관통했음을 알려준다.

활의 성능을 좌우하는 또 다른 변수는 화살촉이다. 화살촉의 강도에 따라 관통력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의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의 상태를 점검해보기로 했다.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구의동에선 무려 3천여 점에 달하는 화살촉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 이 화살촉들은 더 이상의 부식을 막기 위해 보존처리 중에 있다. 육안으로 보더라도 천오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날카로움이

간직돼있다. 모양은 관통력을 높이기 위해 가늘고 뾰족한 송곳형으로 돼있다.

▲ 수렵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활     ©



인터뷰 최종택
진짜 놀라게 된 것은 화살촉이 3천점 가량. 대부분이 원형 그대로 유지. 일부 날이나 몸통 철심이 그대로 보이는 양호한 상태.

1500년 동안 형태를 유지한 이 화살촉의 성분이 궁금했다.

최근 완료된 성분분석 결과, 불순물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순도 높은 강철로 나타났다.

게다가 탄소량이 평균 0.51%로 오늘날 사용하는 특수강과 맞먹는 강도였다.

결국 이 화살촉은 쇳물을 녹이고 탄소를 줄이는 과정을 거친 초강을 반복해서 두들겨 강도를 높이는 단조법으로 제작됐음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 화살촉의 성능은 어느 정도였을까. 실제 화살을 만들어 실험해보기로 했다.

성분 분석 결과 밝혀진대로 철의 두 세배 강도를 지닌 초강을 이용해 단조법으로 만들 것을 의뢰했다.

초강을 불에 달군 뒤 단조가 시작됐다. 화살머리의 형태는 구의동 유물과 같게 만들었고 길이 역시 유물과 같은 25cm로 정했다.

화살촉이 완성된 다음엔 화살을 만들어 끼워야한다. 벽화에 그려진 대로 화살 양쪽엔 깃털을 달았다.

깃털은 비행 방향을 일정하게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화살이 완성됐다.

화살의 길이는 보통 활의 길이에 따라 달라지는데, 벽화에서 보여진 대로 사람 키의 절반쯤 되는 90cm로 설정했다.

이 화살은 과연 어느 정도의 관통력을 갖고 있는 지 첫 번째 실험은 2mm 함석판 3장을 붙였다. 말을 타고 달리다 과녁 4,5m 전방에서 쏜 화살은 정확히 함석판을 관통했다. 이번엔 함석판 5장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두 번째 실험에서도 화살은 함석판을 관통했다. 그렇다면 실제 전투에서 상대 적군의 갑옷을 뚫을 수 있을 것인가.

역사스폐셜 팀이 복원한 가야 판갑을 과녁에 올렸다. 화살은 정확히 판갑을 관통했다. 고구려 군이 보유한 화살의 위력이 확인됐다.

이것은 현대의 특수강 수준에 이르는 강도 높은 철 제련기술을 보유한 결과였다.

재료는 밝혀졌다. 그러나 활 유적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형태는 벽화를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고구려 활이다.

길이가 짧아 기병들도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어진 단궁이다. 수렵도엔 그 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타나있다.

사냥감을 발견한 젊은이가 활 시위를 당겼다. 벽화는 이 화살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관통했음을 알려준다.

활의 성능을 좌우하는 또 다른 변수는 화살촉이다. 화살촉의 강도에 따라 관통력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의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의 상태를 점검해보기로 했다.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구의동에선 무려 3천여 점에 달하는 화살촉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 이 화살촉들은 더 이상의 부식을 막기 위해 보존처리 중에 있다.

육안으로 보더라도 천오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날카로움이 간직돼있다.

모양은 관통력을 높이기 위해 가늘고 뾰족한 송곳형으로 돼있다.

무려 1500년 전에 만들어진 화살촉이 오늘날 사용하는 강철과 같은 재료라니, 쉽게 믿기지 않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구의동 고구려 유적지에서 발굴된 도끼는 화살촉보다 더 단단한... 요즘 우리가 쓰는 공구들과 같은 수준임이 밝혀졌습니다.

도끼와 화살촉의 사용 용도에 따라 철의 강도를 달리한 것입니다.

이 정도라면 철의 기본적인 성분을 알고 필요에 따라 제련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인데요.

그건 강력한 신병기, 철갑기병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대결을 벌였던 중국 역시 갑옷 입은 병사들을 보유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갑옷을 뚫을 수 있는 무기, 강력한 활을 갖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최신무기를 보유한 뒤에 남는 문제는 전술입니다.

특별히 여러 민족과 전쟁을 치러야했던 고구려로서는 다양한 전술개발이 절실히 필요했을 겁니다.

그 전술의 한 단면이 이 삼실총 벽화에 남아있습니다. 이쪽이 성입니다. 성벽위쪽에선 보병들의 육박전이 한창입니다.

그리고 이쪽을 보십시오. 성 밖에서 긴 창으로 무장한 철갑기병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벽화를 보면 전투 중에 보병과 기병의 역할이 나눠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합동전술시스템입니다.

고구려를 최강의 무적군대로 만들었던 이 전술은 실전에서 어떻게 구사됐는지 그 내막을 알아보겠습니다.

보병과 기병의 합동전술을 펼치려면 먼저 병사들의 구성을 파악해야한다. 고구려군의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대행렬도에 나타난 무장병사중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대략 3대 1 정도. 이 행렬이 실제 전투상황은 아니라해도 당시 고구려 군이

이런 비율에 따라 구성됐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전투상황은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대행렬도에 나타난 무기체계를 통해 예측할 뿐이다.

먼저 평원전의 경우. 공격부대의 맨 앞줄은 완전무장한 철갑기병이 맡는다.

그 뒤를 기동력이 있으면서 가볍에 무장한 경마기병이 서고, 다음은 창수들이 포진한다.

검수와 부월수보다 긴 창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를 칼을 든 검수와 부월수가 따르고 공격부대의 맨 뒤에는 궁수들이 배치된다.

가장 멀리 나가는 무기인 활을 들었기 때문이다. 출정대열은 이렇게 구성되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됐다. 장수의 명령이 떨어지면 먼저 궁수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적군과 아군의 화살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병사가 철갑기병이다.

아직은 전투 초반, 철갑기병들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여야 할 때다.

이때 가장 효과적인 공격방법은 적의 전열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측면기습 공격. 철갑기병이 적을 향해 돌진하는 사이, 경마기병들은

기동성을 최대한 살려 적의 후방을 기습하게 된다

아시아를 정복한 고구리 철갑기병 (4/4부)
막강한 전투력으로 주변국들을 통합하는 고구리
 
편집부 기사입력  2012/05/30 [11:56]
 
기습공격은 기병의 기본전술이다. 기병들의 기습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 이제는 보병들 차례다.

하지만 여기서도 적 진영을 돌파하는 것은 철갑기병의 몫이다.

인터뷰 여호규박사
“말이 완전히 갑옷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적의 정돈된 진영을 교란시키고 돌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약수리 고분벽화를 보면 철갑기병이 큰 편대를 이루고 있는데 적진으로 들어가는 돌파력은 엄청났다......

잘 알려진 사례로는 관창이 백제의 오천 결사대를 돌파했다고 하는데 기마병을 타고 돌파했다고 나온다.

중장기병은 돌파력이 매우 강함을 보여주고 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면 치열한 육박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때는 기병들 보다 근접전에 유리한 창수와 검수, 부월수들이 전면에 나선다.

그러나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 퇴각하는 적을 쫓는 역할은 기병들의 몫이다.

고대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는 시점이 바로 이 때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완전 쐐기를 박는 셈이다.

그러나 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투는 이와 양상이 달라진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그들의 점령지에 수많은 성을 쌓았다.

당시 중국의 성이 대부분 한 줄로 늘어선 일자형인데 반해 고구려의 성들은 촘촘히 여러 겹으로 세워져있다.

특히 교전이 끊이지 않았던 요동지방의 경우 육지방어선과 비사성을 중심으로 한 해안 방어선을 같이 구축해놓았다.

그리고 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인터뷰 윤명철교수
“몇 개의 중심성 내지는 큰 성이 있습니다. 신성,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해양방어용인 비사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6내지 7개의 큰 성을 중심으로 해서 실질적인 관련체제를 맺고 있죠.

한성이 침략당하거나 또는 포위당했을 경우에는 그 주변성들이 유기적으로 함께 공격을 하면서 방어를 구축하게 됩니다.”

645년 당나라 태종이 이끄는 50만의 대병력이 거점성인 안시성에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두 달이 넘도록 계속된 공격에도 성을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당나라 군은 식량부족을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고 만다.

인터뷰 김용만 박사
“당태종 군은 요동성에서 60만석의 식량을 빼앗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한 이유는 식량문제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기병대에 의해서 적의 보급로가 끊겼기 때문에 당군이 어쩔 수 없이 패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당군은 요하 중류지역을 통해서 고구려를 쳐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후퇴할 때는 요하하구의 갯벌지대를 통과하므로 막대한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은 고구려 군대가 요하중상류지역에서 당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북쪽을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기......

고구려 군은 성에서 보병들을 중심으로 해서...... 기병들을 이용해서 보급로를 끊는 작전을 사용합니다.”

공격받는 성에서는 보병들이 지켜내고, 다른 성의 기병들이 적의 보급로를 차단시키는 고구려 군의 전술은 이렇게 진행됐다.

고구려가 당나라 태종이 이끄는 50만 친위부대를 불과 수만의 병력으로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곧 보기합동전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보기합동전술을 구사할 때 가장 중요한 사항은 보병과 기병의 투입시기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철갑기병이 나서야 할 때라든가 궁수들이 활을 쏘아야 할 상황을 제 때 판단하지 않으면 이 합동전술은 쓸모없는 전술이 되고 맙니다.

그러자니 자연 교육받고 훈련된 장수가 필요합니다. 또한 전술을 소화해낼 훈련된 병사도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끝까지 싸워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끈질김이 있어야 합니다.

안시성에서 두 달이 넘도록 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끈질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이 용맹함, 투쟁정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전쟁에 나가 굽히지 않고 각자가 맡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낸 그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고구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늘 무예를 연습했다는 증거는 벽화 속에 남아있다.

각저총과 장천1호분 벽화에 씨름이 등장하고, 무용총에는 오늘날 택견과 태권도로 발전한 수박희의 모습이 보인다.

안악3호분의 수박희 역시 두 사람이 대련하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주변에 도끼를 든 시종들이 줄줄이 서 있는 것으로 봐서 여러 사람 앞에서 겨루기를 했던 모양이다.

무예를 익히고 겨루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각저총 벽화에 그려진 씨름하는 모습     ©


고구려 사람들의 그런 모습은 중국 기록에도 언급돼있다.

중국 후한서에 고구려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연습한다는 대목이나 걷는 것이 달리는 것과 같다고 적어놓은 것으로 봐서

고구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무예를 연습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나라 전체가 무예훈련을 중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교육기관 경당에서 신분에 구별 없이 모든 젊은이들에게 글만이 아니라 활쏘기까지 가르쳤다.

인터뷰 윤명철 교수
고구려는 성립시기 자체부터 멸망할 때까지 중국과의 싸움 계속.

초기엔 중국 식민지 세력 몰아내는 데 주력했고, 그러다보니 처음부터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됐다.

고구려가 이 상무정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는 주몽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조 주몽은 바로 말 잘 타고 활 잘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시조로 삼을 정도로 상무정신은 고구려 정신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 전호태 교수
“광개토대왕이 등장한 시점엔 한쪽으론 주몽신앙을 전파.

주몽신화의 경우 주몽사당을 요지에 다 세워. 요동성 등지... 주몽이라는 존재에 대한 신앙이 실제로 고구려 역사이후에도 오늘날

만주지역에서 일어난 민족이 그와 유사한 시조 전설을 차용할 정도로 그 지역에 끼친 영향이 컸다.”

고구려 사람들의 상무정신은 덕흥리 고분 벽화 마사희에도 잘 나타나있다.

젊은이들이 장대에 표적을 꽂아놓고 말을 달려 쏘아 맞추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이들 옆에 점수를 매기는 사람까지 있다. 오락시간조차도 무예 연습으로 채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구당서엔 고구려가 30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6세기 고구려 인구가 대략 350만 명. 따라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성인남자는 20% 정도인 70만 명 선이었다.

그런데 30만 명을 동원했다면 성인남자의 반수가 전쟁에 나간 것이다.

인터뷰 여호규 박사
고구려는 사회적으로 다른 모든 요소보다 군사력 측면 강했다.

한 군현 세력 몰아내면서 국가적 성장 이룩. 발전과정에서도 북방족과의 대결과정에서 영토 확장하면서 성장.

전쟁은 고구려 발전과정 가장 중요한 요소. 군사력 측면 사회 전체적으로 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고구려의 군사력이 크게 성장한 4,5세기. 고분벽화의 문지기 모습이 달라졌다.

관리나 시녀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강한 힘을 표현한 역사가 등장한다.

심지어 찰갑으로 중무장한 병사의 모습까지 나타났다. 고구려가 얼마나 힘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숱한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1500년 전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성장은 이렇듯 튼실한 상무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이 행렬도속엔 고구려 사람들의 그 처절한 고민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말에 갑옷을 입히고 세계 최초로 기병들에게 못신까지 신겨야겠다고 고안해낸 사람들. 무기별로 편제된 보병을 통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해낸 것이 고구려입니다. 이 군사력이 5세기 초 광개토대왕의 대원정을 가능케 했습니다.

고대국가에서 그 나라가 강대국이냐 약소국이냐를 가르는 기준은 바로 이 군사력입니다.

따라서 온 나라의 기술과 자원을 총동원해 무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이런 노력은 결국 나라 전체로 보면 기술과 자원개발을 서두르게 하는 힘이 됩니다.

막강한 군사력이 경제력을 키우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 역시 그런 과정을 밟았습니다.

고구려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을 통합하고 고구려적 전통와 세계관으로 융화시켜 나갑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일대에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대제국 고구려는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