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 철갑기병은 아시아 최강 (2/4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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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동영상에 나오는 고구리의 지도는 현 강단사학계의 이론인 반도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고구리는 중국 대륙 한가운데인 산서성에 그 중심을 두고 아시아 전체를 호령했었다. 광개토태왕 때의 후연은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던 나라였으며, 거란족의 근거지였던 요택도 황하북부 하남성 황하와 심수 사이에 있었다. 3, 4세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이 발굴로 고구려는 가야보다 최소한 백여년 앞서 말에도 무장시켰음이 확인된다. 이렇듯 완벽한 무장을 갖춘 말과 병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적을 위협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철갑기병의 위력은 마치 6.25때 탱크와 같다. 그러나 병사와 말이 온통 철갑으로 두른 이런 상태에서 과연 적과 제대로 싸울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은 삼실총 공성도 벽화가 해결해준다. 철갑기병의 몸놀림이 매우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정도라면 실전에서도 큰 몫을 맡았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철갑기병의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철갑기병은 우선 자기 키의 2배나 되는 긴 창을 갖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삼실총 벽화는 못신을 소개한다. 말을 탄 철갑기병과 말에서 내린 2명의 병사 모두 못신을 신고 있다. 달려드는 적군을 말 위에서 내려칠 때 사용하는 무기였다. 신라와 백제에서 이 못신을 왕의 부장품으로 남겼다는 사실은 당시 못신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케 한다. 4세기부터 벽화에 등장하기 시작한 고구려의 신병기, 철갑기병. 그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던 그 모습이 이제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대행렬도를 보면 이 철갑기병의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세어보겠습니다. 하나 둘 셋 넷....모두 8명이군요. 이 벽화만 보면 철갑기병이 전체 고구려군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철갑기병이 등장하는 또 다른 벽화를 찾아봤습니다. 고분의 행렬은 안학3호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철갑기병만큼은 크게 그렸고, 행렬을 사방에서 호위하고 있습니다. 그 수도 11명이나 됩니다. 참가인원이 적은 것이 비하면 아주 많은 수입니다. 벽화가 그려지던 때, 철갑기병이 무척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벽화는 그 50년 동안 철갑기병의 역할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때 고구려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안학3호분이 만들어지던 4세기 중엽의 상황은 이랬다. 남으로 중국 한나라의 세력권에 있던 낙랑 대방군을 몰아낼 정도로 세력을 키운 고구려는 요동 진출을 시도한다. 당시 요동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모용선비족의 극성을 공격한 것이다. 특히 고구려는 중국 현토군 세력과 대결과정을 통해서 국가를 건설하고 현토군 세력을 계속 몰아내면서 국가적인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세력과 대결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요동지역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본격적인 요동정벌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0년 뒤인 395년. 광개토대왕은 비려, 즉 거란을 정벌하고 후연의 국경지대를 거쳐 돌아왔다. 이것은 광개토대왕 대에 이르러 요동을 확고하게 점령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성공은 고구려 군대에 일대 변화를 예고한다. 요동에 진출한 고구려 군대는 이곳 무순지방을 손에 넣는다. 무순은 오늘날에도 철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안산이라면 고구려 사람들이 철을 캐내갔다는 바로 그 지역이다. 1500년 전에도 이처럼 철이 나고, 제철 기술이 발달한 지역을 광개토대왕이 손에 넣은 것이다. 402년 광개토대왕의 군대는 요하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한다. 북위와 더불어 중국 일대의 패자였던 후연을 완전히 점령한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의 비문은 후연공격으로 갑옷 만여필을 노획했다고 전한다. 갑옷 만여필이 전리품이라면 실제 후연의 군대는 갑옷으로 중무장했을 것이다. 이런 군대를 고구려가 섬멸한 것이다. 안악3호분이 만들어지고 50년이 흐르는 사이, 광개토대왕의 주력부대로 자리 잡은 철갑기병을 발판으로 고구려 대제국 건설은 완성되어갔다. 수출합니다. 귀한 철을 받은 실위가 가만있을 순 없지요. 이번엔 튼튼한 말을 고구려로 보냅니다. 그러자 그 말들은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전쟁에서 중요하게 쓰여 집니다. 이 모두가 5세기, 철갑기병을 주축으로 군사력을 보강한 뒤 얻게 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군대엔 철갑기병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무기 상황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 역시 대행렬도입니다. 칼을 들고 있는 병사입니다. 이런 칼은 둥근 모양의 고리가 달려있다고 해서 환도라고 부르는데, 고구려 병사들은 주로 내리치는 데 효과적인 칼을 갖고 있습니다. 기병들의 주무기였던 창을 든 보병도 있습니다. 기병들이 든 창은 긴 것이었지만 보병들은 사용하는 데 편리하도록 짧은 창을 들고 있습니다. 달려드는 적을 찌르기엔 그만인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 창은 모양이 좀 다르게 생겼습니다. 창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돼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안된 형태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도끼를 든 병사들은 부월수라고 부릅니다. 도끼나 낫 같은 기구들은 예나 지금이나 농사일에 주로 사용되는 것인데, 전쟁에서 부월수가 할 일은 창수가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면 달려가 내려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활을 든 궁수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이 가진 활은 아주 특이하군요. 활 시위를 풀어놓고 있는데, 활이 거꾸로 완전히 구부러져 있습니다. 활이 실제 이렇게 구부러진다면 그건 대단한 탄력성일텐데요. 이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징기스칸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성능 좋은 활 때문이었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고대 전투에서 활은 가장 중요한 무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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