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단군이란 말을 쓰지 말자.

설레임의 하루 2012. 3. 7. 03:10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유완 2010.10.08.  http://cafe.daum.net/dobulwonin/HCF2/348 

 

 

 

 

단군이란 말을 쓰지 말자

1. 단군

우리는 전해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군”이란 말을 아무 거리낌이 없이 사용하여 왔다.

그런데 우리역사기록에서는 단군이라는 말의 연원을 찾기 어렵다. 다만 규원사화 단군기에서 몇줄 언급한 것이 전부다.

이를 발췌해보면:

“단군이란 밝달임금을 번역한 것이다.

환웅(밝달나라 왕칭)과 환검(고조선 전기의 왕칭)이 모두 밝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단(檀)으로서 나라이름으로 삼는

것이다. 곧 단군이란 단국의 임금이다.

우리말로 단(檀)을 밝달이라 하고 임금을 임검이라 한다.

그런데 후세에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들이 (밝달임금을)단군으로 번역하였는데 후세에는 단군이란 글자만 기록하고 단군이

밝달임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때문에 한자의 공과 죄가 반반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나 환웅(단군)의 나라가 밝달나라 였는데 환검(고조선 임금)은 나라를 새로 개국하였으니 환웅의 나라와

똑같은 “밝달나라”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원래의 단군이란 밝달나라의 18대 임금들인 환웅들을 지칭하는 중국식 용어다.

즉 환웅의 밝달나라를 “밝달나무 단(檀)”자를 써서 “단국”이라고 번역했고 옛날에는 중국에서 임금을 “군(君)”이라고 했으므로

환웅을 중국 한문식으로 “단군”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한웅시대는 이미 환웅이란 왕칭이 있고 또 왕검과 직접적인 연관이 않되므로 단군이야기는 한웅왕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는 밝달나라(단국) 14대 치우한웅이 중국동부를 개척하여 만주에 있던 밝달나라의 수도를 산동반도로 옮기고 국호를

청구국으로 하니 만주의 여러나라는 자동적으로 체후국가들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 지금의 길림성 일대가 옛 밝달나라의

터전이었으므로 나라이름이 그대로 밝달나라 즉 단국이란 제후국이 있었다.

이 제후국의 대읍을 맡아보다 나중에 단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이 “단국임금”은 한웅의 제후인 왕검이다.

단군이나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 해당된다.

단국임금을 후세의 한문으로 단군이라고 번역 했어도 단군은 한웅의 제후왕칭이다.

그런데 단군이란 제후왕칭을 속칭고조선이란 대국을 개국한 시조의 왕칭으로 쓰고 있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국의 임금을 단군이라고도 하고 왕검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단군과 왕검은 한웅의 제후왕칭으로서 같은 말이다.

이 밝달나라 임금 즉 “단국임금”을 후세에 단군왕검이라고 잘못 전한 것이며 “단군왕검”은 “단군”도 제후국의 임금이고 “왕검”도

제후국의 임금이니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용어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무조건 사용하여 왔다.

왕검이 이름이 아니라 제후국의 왕칭이라는 것이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나타난다.

“웅녀군(熊女君: 한웅의 황후친족 나라의 왕)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처음으로 단허(檀墟: 옛 밝달나라 의 땅)에 책봉

받아서 왕검(王儉: 제후 왕)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왕검들이 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귀화하는 자가 천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지나 신인왕검(神人王儉)이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裨王: 웅씨왕의 후계자 후보)이 되어 섭정한지 24년만에

웅씨왕(熊氏王: 웅족왕)이 전쟁중에 붕어하니 왕위를 이어받아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 되었다.”

위에서 치우한웅이 산동반도 청구에 도읍을 옮긴 이후에는 한웅의 옛 밝날나라는 자동적으로 제후국이 되었는데 이 단허 즉 옛

한웅의 밝달나라 터전인 단국의 임금이 왕검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왕검은 한웅의 제후왕의 칭호이고 단국의 임금인 단군도 제후왕의 칭호이다.

왕검과 단군은 같은 제후왕의 칭호이다. 여기서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후세에 잘못 기록한 것이다.

"왕검은 감군이며 관경의 우두머리다"(신시본기)

이상에서 왕검이 이름이 아니고 왕칭임이 밝혀졌

 

삼국유사 왕검조선 이야기는 중국의 위서를 인용하고 있다.

중국의 시조부터 기록한 사마천의 중국역사에는 단군이란 용어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후세의 AD200년대(AD.250-316)에 쓴 중국 삼국지 집해서30 위서 동이전 38에 고조선의 시조가 “단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 고조선 당시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군“이란 용어가 중국이 강성해지면서 만주와 한반도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자 등장하게 되었을까?

한국의 역사책들은 발해 말과 고려시대에 쓰여 졌으니 위서보다 최소 600년 이상 뒤에 쓰여 졌으므로 모두 중국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썼다. 그러므로 “단군”이란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인용된 것이다.

단군세기에서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다”라는 대목은 왕검의 혈통이 한웅의 직계자손임을 주장하기

위한 조작으로 생각된다. 이는 마치 난생설화를 빌려 시조들을 신격화 한 것과 마찬가지다.

단웅 즉 한웅의 아들이면 국가와 왕위를 그대로 계승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나라를 새로 개국하는가?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고조선편의 단군이야기는 중간쯤에 한인으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은 밝달나라 시조 한웅이야기에 “한웅과

웅녀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바로 단군왕검이다”고 했는데  첫머리에서는 “위서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에 단군왕검이 계셨는데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는데 이때는 중국의

고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한다”

 

이 두가지 문장에서

한웅시대는 지금부터 약 5900년전이고 고조선개국은 4300년전이다.

그런데 5900년전에 태어난 단군왕검이 4300년 전의 고조선의 개국시조로 되어있다.

한웅시대 1565년을 완전히 삭제시킨 것이다. 한웅시대가 삭제되면 그 앞의 환인시대 3301년도 없어지게 된다.

결국 4900년간의 우리역사를 고조선 시조가 “단군‘이다 고 한 것 하나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중국측에서 중국보다 오래된 우리역사를 잘라내기 위하여 중국의 힘이 만주와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위나라 때 단군을

고조선의 임금으로 기록했는데 우리역사서를 망실하고 후세의 고려와 이씨조선에서는 극심한 사대주의에 의하여 중국의 기록이

옳다고 보고 역사를 저술하였으니 중국의 술수에 놀아나고 말았다. 그 핵심이 바로 “단군”이란 용어이다.


1.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은 적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조작이라고 본다.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 아니다. 단군이 한웅의 아들이면 나라를 그대로 계승하면 되는데 나라이름을 바꾸고 수도를 옮기고 왕칭까지

다른 전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필요가 없다.

2. 밝달나라 환웅의 아들이 단군이라면 “단군” 이란 왕자나 황태자라는 칭호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왕칭으로 사용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 초대환웅의 아들 단군과 고한국(속칭 고조선 전기)의 초대임금인 단군과는 무려 1565년이란 시간차이가 있다.

초대환웅의 아들인 단군이 어떻게 1565년 뒤의 고한국(속칭고조선 전기) 임금이 될 수 있는가?

4. 밝달나라 환웅시대의 제후들의 칭호가 “왕검”이다. “단군”도 제후국의 왕칭이다.    

따라서 “단군” “왕검” “단군왕검” 등의 용어는 이름이 아니라 모두 제후왕칭이다.

제후왕칭인 단군이나 단군왕검을 대국인 고한국(속칭 고조선 전기)의 왕칭으로 쓸수 없다.

   우리상고사에서 특이한 것은 환국(桓國: 밝나라), 밝달국, 고한국(속칭 고조선 전기) 3왕조의 시조들의 실제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인씨, 환웅씨, 단군씨, 왕검씨 등으로 기록되어 왔다.

   한인시대의 시조를 "안파견"이라고 하는데 안파견은 "조상" 또는 "아버지"라는 존호이지 실제이름이 아니다.

초대 한인과 초대 한웅을 "거발환"이라고 하는데 거발은 우리말 "커밝"을 한문으로 번역한 말로서 지금말로는 "광명" 또는 "부처"라는

뜻의 존호이지 실제이름이 아니다. 석가모니를 "부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민족종교가들 그리고 민족정신 운동가들 중에는 환인천제, 환웅천왕, 단군왕검이란 말을 일상으로

쓰고 있다. 환인, 환웅, 단군은 왕칭이지 이름이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 왕칭인 천제, 천왕, 왕검을 덧붙여서 쓰니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민족은 천제나 천왕 그리고 천자 같은 용어를 사용 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환인천제, 환웅천왕, 치우천왕, 치우천자, 단군왕검”이란 용어를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5. 단군이란 밝달나라 임금을 후세에 한문으로 뜻이 통하는 “밝달나무 단(檀)”자와 중국에서 임금을 “군(君)”이라고 했으므로

단군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했는데 중국에서 고한국(속칭 고조선전기)의 시조로 잘못 기록한 것을 후세에 2000년 동안 중국을

사대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쓰게 된 용어로 보인다.

6. 어떤 사람들은 단군은 제사장이고 왕검은 임금이란 뜻이라고 해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옛날의 제사장은 곧 임금이고

임금은 곧 제사장으로서 제정일치의 군장이니 제사장과 임금을 구분할 필요도 없었고 구분하지도 않았던 시대이니 이러한 해석은

틀린 것이다.

7. 또 어떤 사람들은 몽고의 “텡그리”가 우리말 “당굴레”가 되고 이것이 “단군”으로 되었다고 하는데 단군은 참도인이다.

참도인과 무당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따라서 참도인이 무당의 용어를 왕칭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8. 중국의 위서를 인용한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본다면 후세에 중국을 사대하고 또 중국의 압력과 조종에 의해서 중국보다 오래된

우리역사를 잘라내기 위해 환웅 즉 단군을 고조선의 시조로 삼으니 고조선 이전의 역사(4900년)는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된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세조, 예종, 성종은 고사서를 수거하여 모두 불태운 기록이 있다.

   태종은 중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유학서적이 아닌 모든 서적을 불태웠고,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3년(1457년) 5월 26일,

                  예종 1년         9월 18일,

                  성종원년        12월  9일에 각각 고사서들의 수거령을 내렸는데 “고조선 비사, 대변설, 조대기, 지공기, 삼성밀기,

표훈천사, 삼성비기,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 도증기, 동천록, 지화록 --- ”등의 고대사서들을 나라에 바치면 상을 주고 감추면

참형에 처한다는 강력한 교서를 내리고 수거하여 불태웠다.

   중국의 압력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고 동시에 왕위를 지키기 위해 중국에 아부하며 민족의 역사를 말살한 이조시대의

참상을 알 수 있다.

9. 중국은 이미 2100년 전에 사마천이 요제(堯帝), 순제(舜帝)와 같이 제왕으로 기록하여 사용 했는데 한국은 제후의 칭호인 “단군”

칭호를 지금까지 사용하니 자동적으로 중국의 제후가 된다.

따라서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상고시대도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면 반박할 수 없다.

10. 만약 환웅시대(1565년)와 한검시대(2096년)를 모두 단군 시대로 본다면 약3700년간을 모두 단군시대로 보아야 하니 왕조를

구분할 수 없다.

11. 우리식 칭호를 없애고 중국식(한문식) 칭호를 사용하니 중국의 연호를 쓰는 것보다 더 못하다.


2. 조선건국기록

고조선 건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위서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에 단군왕검이 계셨는데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는데 이 때는 중국의 고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한다”고 되어있고 단군세기에는

“ 무진년 제요도당 때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에 이르르니 온 나라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 잡았다.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했다” 

 

위의 세 문장에서

①중국의 위서에 있던 단군왕검이란 용어가 한국의 역사기록에 그대로 나타났고

②조선을 세우기 전에 “단국”과 “구한”이란 나라이름이 나온다.

③중국의 기록대로 단군왕검이 세운나라이름이 “조선”이라고 나온다.

이 세 가지에서 단군왕검이란 용어는 우리역사를 망실하고 600년 이상 후에 우리역사를 복원하면서 중국의 역사기록을 참고하여

썼는데 중국기록을 그대로 받아썼다는 것이다.

또 조선을 세우기 전에 “단군”은 단국의 임금 즉 왕검이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또 조선을 세우기 전에 한웅의 제후국들을 구한(九桓)이란 총칭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웅의 밝달나라를 일명 “환나라”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3. 중국기록

중국의 역사기록은 “조선”시대부터 나온다.

그 이전의 기록에는 중국 오제기(五帝紀)에 치우를 “구려의 군주다”(九黎君號蚩尤也)고 하여 “구려”라는 나라이름이 나오고 순임금

 때는 “동방군장(東方君長: 사기권1 본기 17)”이라고 하여 우리나라를 “동방나라”라고 하였고 임금을 “군장”이라고만 하였다.

그리고 훨씬 후세인 주나라 때에 와서 “조선”이란 국호가 나온다. 

그러므로 중국 주나라 이전에는 국호가 “조선‘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는데 신하가 아니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사기권 38세가 8, 후한서 권 85)

이것이 BC.100년경에 사마천이 쓴 중국기록의 시초다.

그런데 조선이란 용어가 좀더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은 삼국지 집해권 30 위서 동이전 38이다.

“한서(漢書) 조선전에는 기록이 빠졌는데 정겸이 말하기를: 조선의 역사는 대대로 전하였는데, 그 나라는 단군으로부터 시작되어

1048년간 전해오다 주나라 초에 이르러 기자가 대신 일어나서 40세를 전해오다가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그 땅을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漢朝鮮傳之缺 丁謙曰 朝鮮史相傳其國肇自檀君傳一千四十八年至周初箕子代興傳四十世爲燕人衛滿襲據其地)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는 서진(西晋: 256-316년)때 진수가 쓰고 청나라 때 교간된 것이다.

한국기록들은 역사를 망실하고 AD.900년 전후의 발해말의 “단기고사”와 그 이후의 고려시대에 쓴 것이므로 중국의 기록보다 약 6

00년 이상 후세에 쓰여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내용들을 중국의 기록을 옮긴 것이다.

 그런데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던가 기자가 조선을 이어 40세를 전했다는 것은 중국이 우리나라를 사실상 통치했다고 주장하기 위한

허위날조 기록이다.

또 조선이란 나라이름은 색부루가 혁명을 일으켜 제위에 오른 BC.1285년에 삼한을 삼조선으로 개명하면서부터 사용하게 된 나라

이름이다. 그 이전은 조선이 아니다.

그런데 주나라는 BC.1121년에 개국하였으니 조선보다 무려 164년이나 늦게 개국 하여 주나라시대에는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기록이 “조선”으로만 나오게 된 것이다.

한국의 모든 기록들은 이러한 영향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나라이름과 “단군” 또는 “단군왕검”이라는 왕칭이 모두

틀린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검증없이 단순히 전해온다는 것만으로 조선 이나 단군왕검을 무책임하게 사용하여 왔다.


4. BC.2333년에 건국한 나라이름은 조선이 아니라  “한국”이다.

앞에서 한웅의 밝달나라의 통칭이 “구환(구한)‘이라는 것을 알았다.

옛날에는 ”밝은 나라“ ”밝은 임금“을 ”환“이라고 번역했는데 한국을 개국한 후세에는 ”한“으로 그 발음이 변했으므로 옛날의 발음

”환(桓)“을 ”한(韓)“으로 발음하여도 무방하다.

한검세기(단군세기) 1세 한검(단군) 93년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 64족을 포함하였다”고 하였고 마한세가 상에서도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며

마한세가 하에서는 색부루 왕검이 제위에 오른 원년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였다. 조선이란 관경을 말한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이전의 나라이름이 “한나라(韓國)”이었음이 나타난다.

그런데 역사서가 아닌 세계적인 대 문호이며 2500년 전의 인물인 공자의 시경(詩經) 한혁편에 “한후(韓侯: 한나라 제후)”가

나오는데

“韓侯受命”

“한후가 (주나라 왕)의 명을 받는데”


“纘戎祖考 無廢朕命 夙夜匪解 虔共爾位 朕命不易

榦不庭方 以佐戎辟”

“그대 조상들의 공을 이어서

짐의 저버림이 없이

밤낮없이 부지런히 애쓰며

그 자리를 삼가 지키어 나가면

나의 명은 바뀌지 않으리라“

내조하지 않는 나라를 다스리어

그대 임금을 보좌하시오“


“王錫韓侯”

“주왕이 한후에게 하사품을 하사하다.”


“韓侯取妻 汾王之甥 跪父之子“

“한후 장가가니 우리 왕의 생질이 되 시고 궤보의 따님 되시는 분이네“


“爲韓姞相攸 莫如韓樂”

“궤보가 딸 시집보내 살게 한 곳을 찾아가보니

한(韓)나라 보다 좋은 곳이 없더라네“


“溥彼韓城 燕師所完“

“높고 거창한 한나라 성은

연(燕) 의 백성이 쌓아 올리네“


“因時百蠻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수많은 오랑캐의 주인 되니

왕께서 한후에게 추족, 맥족까지 다스리게 하였네

이에 북쪽나라들을 모두 맡아 그곳의 제후가 되었도다“


마치 주나라 왕이 한국 제후에게 추족, 맥족까지 다스리게 한 것처럼 주나라 본위로 왜곡했지만 한국제후가

나라를 방문하고 주나라 왕의 조카와 혼인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때의 주나라 왕은 11대 선왕(BC,827- 782)이다.

단군세기에서는 33세 감물왕검 2년(BC.819년)에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고 하여 주나와 왕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시경은 은나라 말기부터 주나라 중기인 공자시대까지 (약 3200년 전부터 2500년 전경 까지) 민간에 전해오던 민요와 신에게 제사

드릴 때 부른 송가들을 모은 것으로서 공자가 가장 즐겨 읽고 가장 아끼던 책으로 전해져 온다.

그런데 후한시대의 대문호인 왕부(王符)의 “잠부론 씨성편”에

“시경속 한후는 동쪽에 있는 나라의 임금이다.”(천년의 금서 P.316)

"한후는 연나라 부근에 있었다“(천년의 금서 P.320)고 하여 여기의 한후가 중국의 동부이며 요하 서쪽에 있었던 삼한중의 하나인

‘밝한”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2500년전에 쓰여진 세계적인 고전에도 우리나라 이름이 처음부터 “조선” 이 아니라 처음에는 “한국”이었고

한국건국으로부터 1048년 후에 색부루가 개명하여 “조선”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조선의 왕칭

앞에서 “단군”, “왕검”, “단군왕검”이란 말이 이름이 아니고 왕칭인데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규원사화 단군기에

“고시씨와 여러 사람들이 천부인 세 개를 받들고 그 아들 환검신인을 군장으로 삼으니 이분이 바로 임금이시다”고 하여 “환검”이란

용어가 나온다.

앞에서 조선이전의 나라 즉 한웅의 밝달나라 통칭이자 별명이 “구환”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한나라”의 임금이 곧 “환검‘이다. 그런데 국호를 "환국"이 아니라 ”한국“으로 하였으므로  ”한검’으로 발음해야 한다.

 “한검”은 여러 “한(제후)”들의 우두머리이다. 즉 대왕이나 황제와 같은 권위와 뜻을 가졌다.

동시에 옛날에는 임금을 “인검” 또는 “임검”이라고 하였으니 “한나라(韓國)”의 임금이란 뜻이다.

후세에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으니 “조선‘에서는 왕칭을 ”한검“으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조선시대의 왕칭은 한 단계 낮은

“왕검”이다.

중국은 군- 후- 왕- 황제 로서 위로 한 단계씩 격상되는 칭호를 썼고 우리나라는 “한인(한님)- 한웅- 한검- 왕검으로 점점 한 단계씩

낮은 왕칭을 썼다.

그러므로 환인천제, 환웅천왕 등으로 부르는 역사용어는 대단히 잘 못된 것이다.

환인, 환웅, 단군은 임금이란 칭호인데 거기에 또 천제나 천왕, 왕검이란 임금칭호를 덧붙여서 쓰는 것이다.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쓰고 있는 것이다.(유완기 저  되물한국사에서) 

(참고문헌: 중국사기, 시경, 규원사화, 삼국유사, 신시본기, 태백일사, 단군세기)


한밝회(한국상고사 연구회) 회장   유완기  010-5306-1375

http://cafe.daum.net/hanbark33  

e-mail    hanbark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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