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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친일형사의 마지막|, 신철과 최인

설레임의 하루 2012. 3. 1. 11:22
*출처:다음카페-역사스폐셜  글쓴이  을파소  2007.03.01

 

 

 

어느 친일형사의 마지막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많은 매국노들도 나타났다.

그 중에는 이완용이나 송변준처럼 고위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 있는 가하면 헌병이나 경찰이 되어 현장에서 일제를 위해

봉사하던 자들도 있었다.

형사로 일하던 신철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신철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대단히 악명이 높은 친일경찰이었다.

하지만 악명이 높으려면 독립투사들을 탐색하고 잡는 실력이 뛰어나야 가능하다.

그래서였는 지 1919년 2월, 그는 대단히 큰 건수를 감지한다. 서울시 안국동에 있는 보성사에사 무언가 큰 건이 있었다.

보성사는 천도교 계열의 인쇄소로, 그 때 신철이 찾은 것은 한참 인쇄중인 기미독립선언서였다.

3.1운동이 단숨에 무산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보성사 사장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종일은 이 사실을 즉시 최린에게 알린다.

최린은 신철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당시로서는 거액인 5천원을 주면서 며칠만 입을 다물어달라고 부탁한다.

신철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적당한 핑계로 만주로 출장을 떠난다.

최린이 제시한 돈은 일본 기록에서는 받았다고 하고, 우리 기록에서는 안 받았다고 한다.

일단 신철의 입은 막았지만 한번 경찰에 노출되었기에 거사는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에서 앞당겨 3월 1일에 치뤄진다.

신철은 나중에 정보를 입수하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경성헌병대에 체포당하였다가 옥중에서 자살하였다.

신철이 돈을 받고 입을 다물었더라도 악질 친일형사가 식민지 시대 최대의 독립투쟁의 순간을 막지 않았다는 것은 극적인 사실이다.

악질 친일파에서 마지막으로 애국을 한 형사, 그런 그를 회유한 최린이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적인 변절자라는 사실 또한 기묘하다.

 

 

*출처:산하의 썸데이서울 1919.3.1   http://nasanha.egloos.com/

신철과 최인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은 일제 시대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게 벌어진 항일 투쟁이었다.

조선의 치안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일본 관헌들은 이 날 두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 하지만 거사가 들통 날 위기는 여러 번 있었다.

그 이름도 참람한 이완용 이하 전직 고관들에게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 것은 그 중의 하나다.

이완용은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라”면서 완곡히 거절했으나 끝내 일제에 알리지는 않았다.
또 한 번의 절대절명의 위기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던 악명높은 고등계 형사 신철에게 독립선언서가

포착되었을 때 왔다. 최린은 다짜고짜 그를 끌고 가서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고 묻고는 제발 며칠간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때 신철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입에 달린 일이라면 걱정 말고 일을 진행하라”고 한 후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핑계를 대어 만주로 출장을 떠났고 일이 터진 후 체포되자 자살했다. 최후의 양심이었을까.
그런데 신철에게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를 묻던 최린은 완전히 변절하여 일제 말기에는 내선일체의 선봉장으로서 너희들은

일본 사람이라고 조선 청년들을 윽박지르게 된다.

 

그 변절의 도가 자심했지만 해방 후 반민특위에 나와서 그는 3.1 운동을 뼈아프게 회상하며 자신의 죄상을 고백한다,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재판을 받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소에 묶고 능지처참해 달라.”

그때 그의 눈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고등계 형사 신철이 묵묵히 일어나 큰절을 하고 나가던 뒷모습이 밟히지 않았을까.

고등계 형사가 죽음으로 지켰던 민족적 양심을 자신은 끝내 내버렸던 사실이 못내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기미년 3월 1일은 그렇게 밝았고 아직도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