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도 참람한 이완용 이하 전직 고관들에게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 것은 그 중의 하나다.
이완용은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라”면서 완곡히 거절했으나 끝내 일제에 알리지는 않았다.
또 한 번의 절대절명의 위기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던 악명높은 고등계 형사 신철에게 독립선언서가
포착되었을 때 왔다. 최린은 다짜고짜 그를 끌고 가서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고 묻고는 제발 며칠간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때 신철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입에 달린 일이라면 걱정 말고 일을 진행하라”고 한 후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핑계를 대어 만주로 출장을 떠났고 일이 터진 후 체포되자 자살했다. 최후의 양심이었을까.
그런데 신철에게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를 묻던 최린은 완전히 변절하여 일제 말기에는 내선일체의 선봉장으로서 너희들은
일본 사람이라고 조선 청년들을 윽박지르게 된다.
그 변절의 도가 자심했지만 해방 후 반민특위에 나와서 그는 3.1 운동을 뼈아프게 회상하며 자신의 죄상을 고백한다,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재판을 받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소에 묶고 능지처참해 달라.”
그때 그의 눈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고등계 형사 신철이 묵묵히 일어나 큰절을 하고 나가던 뒷모습이 밟히지 않았을까.
고등계 형사가 죽음으로 지켰던 민족적 양심을 자신은 끝내 내버렸던 사실이 못내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기미년 3월 1일은 그렇게 밝았고 아직도 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