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금문에 나타난 천군(天君)과 고죽국의 부정(父丁)/고죽국 위치

설레임의 하루 2011. 10. 14. 06:12

*출처:天山歷史硏究院   http://kr.blog.yahoo.com/sppopsj/1363017

 

 

 

금문에 나타난 천군(天君)과 고죽국의 부정(父丁)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왼쪽으로 읽으면,

丙午天君鄕(饗)稷0酉(酒)才(在)斤天君賞厥征人斤貝用乍(作)父丁樽彙天0

=>병오(일,년?)에 천군이 근이라는 땅에서 술로 지신(地神,稷神?)에게 제를 올리고
잔치를 열었으며, 천군이 그 정벌한 자인 근에게

재물을 상으로 주어, 부정(父丁)으로 하여금 술통을 만들게 하다!

여기서 부정은 근이라는 사람의 아들이거나 신하가 될 것이다. 

중국인들은 부정을 고죽국의 왕이라 한다.

근이라는 땅은 산동에 있다고도 하는데, 고죽국이 근 땅을 정벌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천군이 축하하는 제사를 지내고 근땅에

봉해진 근(斤)에게 상을 주어,부정을 시켜 술통을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 된다.

부정은 실제로 술통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그 방증으로 父丁 孤竹 亞微라 새겨진 청동 술그릇(樽)이 제작되었다는 것!

이것을 보면 부정은 아미와 더불어 고죽국의 왕이었음이 거의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근(斤)이라는 사람이 부정(父丁)의 아버지인 고죽국 왕이었던 것인지?

중국인들은 부정은 묵태죽유(墨胎竹猷)라 하며, 아미(亞微)는 부정(父丁)의 아들로 묵태초(墨胎初)라 한다.

아미의 아들은 아빙(亞憑) 또는 묵태풍(墨胎馮)이라 한다.

고죽국은 은나라의 제후국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천군(天君)의

나라로 추정되는데, 위 천군이 고죽국의 왕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고죽국은 천군의 나라임이 드러나는 것이고 근은 신하로서 근땅을

정벌한 자가 되고 부정은 근의 아들이거나 신하가 될 것이다.

한편, 천군이 고죽국의 왕이 아니라 고죽국의 상왕(上王)인 번한(番韓)이나 단군천왕 등 다른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근이

고죽국의 왕일 가능성이 많으며, 부정은 근의 아들로서 나중에 고죽국의 왕이 된 자가 될 것이다.

원래 고죽국은 지금의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한 나라이며, 기자국은 고죽국의

서편에 있어 태항산 서쪽 넘어에 자리잡은 나라로서, 서기전664년경부터 서기전651년에 걸친 제나라 환공의 침공으로 서기전

650년경에 모두 망한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 본국인 동으로 이주하여 번조선에 자리잡은 것이 되며, 이때 왕족이 기후방정과 고죽

준(술통)을 가지고 이주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기자의 일부 후손은 원래의 기자국에서 남하하여 선우중산국을 세웠고, 고죽국의 일부 후손은 산동지역의 제나라 땅에 즉묵,

절묵이라는 이름을 남긴 것이 된다.

고죽국의 역사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참고 : 고죽국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C%A3%BD%EA%B5%AD

 

 

고죽국의 위치=하북 노룡 남쪽? 산융(단군조선 일부)의 제후국!!!

 

고죽국은 하북성 노룡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아니라,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

附录 부록
也谈“即墨”地名之来由 세담"즉묵"지명의 유래
——兼与刘尚南先生商榷
即墨市史志办公室    孙鹏

   今年3月13日《半岛都市报》曾刊载刘尚南先生|《即墨溯古》一文,最近《即墨教育》由予以转载。该文对“即墨”地名之由来提出了新的见解。认为“被大多史志工作者认同的主流之说”即“战国时朱毛故城因临近墨水河而得名……缺乏相应的史料依据”。因而对上述说法予以否定,并提出自己的见解:“即墨”一名的由来是因孤竹国君“墨台氏(简称墨氏)在其前加了封国之名,成为节墨氏……后世演为即墨。”笔者认为,这种否定传统说法的新提法,更是缺乏可靠的史料依据。特撰此文,与之商榷,以正视听。
刘先生提出新说法的主要依据是即墨是因孤竹国君墨台氏而得名,同时提出了“节方又曰孤竹,其旧地自海阳至于不其。”同时解释曰:“不其者,乃今日即墨南部和原崂山县的旧称。”这样就把孤竹国和即墨捏合在一起了。 
诚然,商周时期却有孤竹国,其国君为墨台氏。然而,这个孤竹国却不在山东半岛,和即墨一点也沾不上边儿。孤竹国在哪里呢?
《辞海》“孤竹”条下释曰:“故国名,相传为姜姓,其君墨台氏。在今河北卢龙东南,存在于商、西周、春秋。伯夷叔齐即商末周初孤竹君的两子。”《水经注》云:“元水西南经孤竹古城北,孤竹国也。”“元水即今直隶卢龙之白沟河。”《括地志》载“孤竹古城在卢龙县南十二里,殷时诸侯孤竹国也。” <생략>

《史记•齐世家》载“二十三年,山戎伐燕,燕告急于齐,齐桓公救燕,遂伐山戎,至于孤竹而还。”这里说的是一次历史上的战事,山戎国攻击燕国,燕国向盟国齐国求救,齐桓公派军队讨伐山戎,攻击到孤竹国境内便收兵而还。当时的山戎在今之辽宁省西部,而孤竹国商朝时是山戎的属国,在今河北省的卢龙,与山戎接壤。这次战争发生在周惠王(公元前663年),当时即墨已属齐国。齐国要赴辽西北伐山戎,再笨的军事家也不会不从临淄直接北上而绕道即墨,且从即墨班师。所以孤竹国不在山东半岛之即墨,而应在燕国与山戎之间的河北省东部。当代中国历史地理学家谭其骧教授编着的《中国历史地图集》,在《商时期全图》中标示之孤竹国的位置,在渤海的西岸,滦河入海口的北岸,即今河北唐山市和秦皇岛市之间。同时标注孤竹国春秋时属北燕,战国时属燕。上述种种文献足以证明商、周时之孤竹国不在即墨。而在今之河北卢龙。由此,即墨因墨台氏而得名则难以成立了。

<사기;제세가>에 "23년, 산융이 연나라를 치니, 연나라는 급히 제나라에 고하였고, 제환공은 연을 구하여 드디어 산융을 정벌하여

고죽에 이르러 돌아왔다."라 한다.

"이것이 역사상 1차 전쟁이며, 산융국이 연나라를 공격하고, 연나라는 맹주국이던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였으며, 제환공은 군대를

파견하여 산융을 토벌, 공격하여 고죽국 경내에 이르렀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당시의 산융은 지금의 요령성 서부에 있었고, 

고죽국은 상나라 왕조 시대에 산융의 속국이며, 지금의 하북성 노룡에 있어 산융과 땅을 접하였다.

이 전쟁은 주혜왕 <서기전663년>에 발생하였으며, 당시 즉묵은 이미 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제나라는 요서의 북쪽으로 가 산융을 정벌하였고, 군사들은 임치를 따라 직접 북상하지 못하고 즉묵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죽국은 산동반도의 즉묵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연히 연나라와 산융의 사이 하북성 동부에 있었던 것이다.

당대 중국역사지리학자 담00교수가 펴낸 <중국역사지도집>은 <상대기전도> 중에 고죽국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는데, 발해의

서안에 난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의 북안에 있으며, 즉 지금의 하북 당산시와 진황도시의 사이가 된다.

동시에 고죽국은 춘추시대에 북연에 속하고 전국시대에는 연에 속한다고 주를 달고 있다. 

이상에서 기술한 문헌은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에 고죽국은 즉묵에 있지 않았고 지금의 하북성 노룡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데

족하다.

이로써 즉묵은 묵태씨로 인하여 이름이 생긴 것이다라는 것은 성립되기 어렵다.

*제환공23년은 서기전663년이 된다. 사기 제세가의 기록은 제나라 역사를 적은 것이므로 환공23년이 된다.
*주혜왕23년은 서기전654년이 된다.
*위와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단군세기에 36대 매륵단군 때인 무진년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이 군사를 보내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치니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을 알리고 이에 재나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며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 복병에 걸려

싸우지도 못하고 화해하고 물러갔다라고 적고 있다.
*역사의 진실이 어느 것인지는 기록만으로는 가리기가 어렵게 되는데, 고대중국의 연대기는 부정확하므로 서기전663년경에

대대적인 전쟁이 있었다면 단군세기나 번한세가 등에 기록이 있을 법한데, 서기전653년 기록과 흡사하므로 주혜왕23년

기록이거나 제환공33년의 기록이 아닐까?


*고죽국이 은나라 때 산융의 속국이라고 밝힌 것에서 곧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임을

밝힌 것이며, 당시 산융을 요령성 서부라 하여 고죽국의 북쪽에 위치한 구려국을 가리킨 것임을

자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고죽국을 더이상 은이나 상나라의 제후국이라 망발을 하면 안 될 것이다.

*당시 고죽국의 영역은 대략적으로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번한과 접하고 동북은 낙랑과 접하며, 북쪽은 구려와

접하고 서쪽은 기자망명지 서화와 접하고, 서북은 선비와 접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남쪽은 연나라와 동남쪽은 제나라와 접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원래 주나라 이전의 은나라 시대에는 고죽국의 동남쪽에 청구가 있었고 청구의 남쪽에 남국이 있었으며, 남쪽에 은나라가 접한

것이 된다.
*춘추시대에는 고죽국이 북연에 속하고 전국시대에는 연나라에 속한다고 하고 있는데, 서기전653년에 엄연히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으며, 서기전651년에 제환공이 재침하여 고죽국과 영지국을 정벌하고 산융을 정벌하였다고 하는 바, 이때 고죽국이

망하여 북경을 중심으로 한 땅이 연나라 땅이 된 것으로 된다.  

그리하여 연나라와 단군조선의 경계는 북경 부근을 흐르는 영정하가 되는 것이며, 연나라는 요서에 있고 번조선과 낙랑은 요동에

있는 것이 된다.

난하가 그당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선이 아니었으며, 난하는 우리측에서 서기전365년경부터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보고 있다.


另外,刘文还举出即墨刀币之铭文“節墨之法化”,印证即墨和墨台氏有关。其实,这也是牵强附会。汉许慎《说文解字》中称:“即,

食也,从皂,即声。”又云:“節,竹约也,从竹,即声,字结切。”这就说即、節可以相互注音。清代小学家毕沅、阮元在《山左金石志》

中对这枚齐刀币铭文的解释是:“右刀文曰‘節墨之法化’,節即古字通用,齐即墨正当作節墨,今作即,省文耳。”现在从字形和字义上解

释,即、節二字并不通用,古代也是这样。其相通之处在于可以相互注音,在某些场合可以交替使用。由此可见“節墨之法化”实则“

即墨之法化”。 至于墨氏作为姓氏出现在夏代,“即墨”是否和墨氏有关,尚需进一步考证。但即墨因临近墨水河而得名之说,目前为史志

界所共认。故即墨城于隋朝从平度古砚迁来今址后,人们便千方百计命名了一条新墨水河。方有“古即墨以水名城,今即墨以城名水”

之说。(摘自《即墨教育》2006年10月30日第四版•文艺副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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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살펴보면, 지금까지 필자의 판단이 옳았음이 나타난다.

즉,
1.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번한관경에 속하고 왕족 성씨는 묵태씨이다.
2. 고죽국은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한 나라로서 발해만이 동해가 되고, 북에는
구려, 서에는 서화, 동에는 번한, 동북에는 낙랑,

    남에는 연, 동남에는 제나라가 위치한다.
3. 고죽국의 임금 묵태는 서기전1766년 번한이 은탕의 즉위를 축하하러 보낸
사자였다.<번한세가 참조>
4. 고죽국과 은나라 망명자 기자의 후손 수유족과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5. 고죽국의 임금은 일반 제후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봉한 군(君)이다.
천군(天君)이 됨>*고대중국 왕은 자작이 되는 천자(天子)임.
6. 고죽국은 서기전651년경까지 존속하였으며, 서기전651년에 제나라의 침공을
받았고, 이때 제나라와 연나라에 완전히 망하여

    중심지인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은 연나라 땅이 되었던 것이 된다.

한편, 즉묵, 절묵은 고죽국의 후예로서 고죽국이 망한 후 제나라 땅에 정착한
것으로 강력히 추정된다. 거의 틀림없다고 본다.

아니면, 고죽국의 후손들이 제나라 땅의 일부를 차지하여 지내다가 고죽국이 망하자 제나라에 병합된 것이 된다.

그러나, "절묵지법화"가 제나라의 화폐가 아니라 절묵의 자체 화폐라면, 이 법화가나타난 시기에는 아직도 제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엄연한 독립국이 될 것이다.

즉 즉묵, 절묵은 고죽국의 분국으로서 제나라 땅을 차지하여 정착한 것이 되는 것이다. 

산동반도 지역에는 내륙8이 중, 래이, 개이, 양이, 우이 등이 제나라와는 별도로 존속하였는데, 고죽국의 분국이라 할 수 있는

즉묵도 마찬가지가 된다.

내륙8이 중 남이는 단군조선 초기에 봉해져 주나라 초기까지 존속하다가 제나라나 노나라에 병합된 것이 되고, 엄이, 회이, 서이는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에서

따로 봉한 제후국으로서, 엄이는 지금의 태산을 중심으로, 회이는 회수부근, 서이는 태산과 회수 사이에 봉해진 나라이다. 

엄이는 서기전700년경 일찌기 주나라의 노나라 또는 제나라에 합해진 것이 되고, 회이는 서기전222년경 진시황 시대까지 

존속하였으며, 서이는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 문왕에게 패하여 서산으로 옮겼다가 제나라에 속하였으며 이후 서서히

독립하다가 서기전512년에 오나라 합려왕에게 완전히 망한 나라이다.

제나라가 산동지역의 래이, 개이, 양이, 우이  등을 평정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즉묵의 나라가 산동반도 남쪽의 청도부근에

있었다고 볼 가능성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