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더사이언스 작성자-서영표 동아사이언스 기자 sypyo@donga.com
21일 2시 56분 20초 “人間 달에 섰다”
신문으로 바라본 1969년의 여름 2009년 08월 10일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정복은 지역과 인종, 이념을 떠나 전 세계를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대사건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일반 대중들이 달 탐사에 보였던 관심과 환호는 언론이 얼마나 이를 비중 있게 다뤘는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1969년 6월 18일부터 8월 18일까지 동아일보에 보도된 아폴로 11호 관련 기사를 근거로 ‘백투더(Back to the) 1969’ 시리즈를 마련했다.
그 색시의/ 한 발톱에 턱도 대 보고/ 입술 부르르 떨고 내려오는/ 미스터 ‘앨드린’ 부러웁군달아/ 너는/ 그저/ 그 색시의 한 개
발톱이었던 것을/ 이쁜 때도 삼삼히 끼인/ 그 색시의 한 개 발톱이었던 것을…(하략)
잔디밭 옆에서’. 최초로 달을 밟았던 닐 암스트롱이 아니라, 두 번째로 발을 디딘 우주비행사 에드윈 앨드린이 주인공인 게 흥미롭다. 이 시(詩)가 동아일보 1면에 소개된 날은 1969년 7월 25일, 아폴로 11호가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지구 귀환에 성공한 날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닐 암스트롱만을 기억하지만, 당시 언론은 아폴로 11호의 세 우주비행사 모두를 대체로 동등한 비중으로 다뤘다.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던 1969년 7월 16일의 동아일보 1면 ‘아폴로 11 발사, 역사적 달 여정에‘라는 제목의 기사.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6일 1면
동아일보도 이에 맞춰 11일부터 본격적으로 지면 곳곳을 달 탐사 보도로 채우면서 분위기를 띄워 나갔다. 채웠다.
이는 국내의 평범한 독자에게도 아폴로 11호 뉴스는 먼 이국에서 벌어지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매일매일 신문으로 접하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서막과 같았다. 이 기사에서 닐 암스트롱이 ‘달 착륙선이 달을 떠날 수 없게 된다면 당신들은 며칠동안 생존할 수 있냐’는 질문에 “이틀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한국도 달 정복 TV 방영’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텔레비전을 통해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달 착륙 실황을 볼 수 있게 된다” 는 소식이었다. 방송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 같은 당시에 과연 어떻게 위성 생중계가 가능했을까. 기사는 이에 대해 “일본의 NHK가 인공위성을 통해 영상을 받아 우리나라 부산시외전화국으로 보내면, 서울중앙방송국 KBS가 이를 받아 방영하게 된다”면서 “음향은 미국 우주개발기지인 ‘케이프케네디’에 주재하고 있는 KBS 특파원이 ‘미국의 소리’ 방송과 국제전신전화국을 거쳐 방송한다”고 설명했다. 우주비행사 에드윈 앨드린이 달 표면을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2일 1면
12일자 1면에는 에드윈 앨드린이 달 위를 걷는 연습을 하는 사진과 함께 ‘세 우주인 신검 OK’ 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우주비행사들은 성조기와 달 착륙 기념패, 그리고 외국 원수들의 메시지가 든 마이크로필름을 달에 놓고 돌아온다”며 “유엔 및 유엔산하기관 가입국들의 국기를 달에 가지고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달에 들고 갈 국기 중에는 우리나라의 태극기도 포함됐다.
달나라에서의 식사’라는 기사는 “그들은 식사를 할 때면 먹고싶은 음식에 물을 넣어 연하게 만든 뒤 마치 치약처럼 만들어진 튜브를 통해 입안에 짜 넣게 된다”고 설명해 흥미를 자아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 항공우주국(NASA) 토마스 패인 국장은 “1990년 중반에는 달로 가는 관광여행이 1인당 왕복 1만 달러, 지구궤도에 설치된 우주비행장까지의 여행비는 2000달러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미국 휴스턴 유인우주선센터. 이곳에 몰려든 전세계 취재기자는 모두 3000여 명. 당시 한국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취재진까지 포함해 모두 10명 안팎의 언론인을 파견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2일 4면
이 시기 미국 휴스턴 유인우주선센터로 몰려든 전세계의 취재기자는 모두 3000여 명으로 117명을 파견한 일본 기자단의 규모가 가장 컸다. 한국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취재진까지 포함해 모두 10명 안팎이었다. 당시 이곳에서 취재하던 진철주 동아일보 특파원은 ‘고조된 분위기, 거리낌없이 공개’라는 기사를 통해 기자회견장의 풍경을 아래와 같이 자세히 묘사하기도 했다.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쾅쾅 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고, 우주비행사나 NASA 직원의 가족인지 10살 전후의 어린이들도 기자들 틈에 끼어있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다. 계획 단계에서 실제 비행까지 모든 것을 전세계에 털어놓고 있는 미국우주계획의 철저한 공개주의의 소산일까. (중략) 연단 아래 기자석까지의 거리는 15m. 비행사들 등 뒤에서 바람이 계속 앞으로 나오도록 돼 있었다. 혹시 감기라도 옮을까해서 취하는 당연한 예방조치였으나 기이한 기자회견임에는 틀림없었다.” 진 특파원은 “달 표면에 첫 발을 내디딜 것을 상상만해도 어마어마한 그 순간, 월인(月人) 암스트롱은 무엇을 생각하고 지상의 우리들은 무엇을 느낄 것인가”라고 운을 떼며 “기자회견에서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내려선 첫 순간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하면서 굳은 표정이었다”고 보도했다. 발사대 주변에 몰려들고 있다고 보도하며 절정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 기사는 “기지 근처 코코아비치 시와 주변 촌락에는 그날의 장관을 보기위한 관광객들의 자동차 35만대가 밀어닥쳐 호텔들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며 “미 항공우주국 당국은 국회의원 300여 명과 외교사절단 등 정부의 초청을 받은 5000명, 기자단 5000명이 기지로 몰려들 것이라고 말했는데 직접 관람객은 무려 1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좌)아폴로 11호 달 착륙시 달에 두고 올 기념 현판 (우)달에 남겨질 마이크로필름. 여기에는 교황 바오로 6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닉슨 대통령, 대만의 장개석 총통,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 등 73개국 정상의 메시지를 담았다. 출처 동아일보
같은 면 ‘떠날 차비 다 됐다’라는 기사는 전날 있은 마지막 기자회견 내용을 실었다. 회견은 기자들과 60km나 떨어진 곳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원격으로 이뤄졌다.
세 우주인은 이날 대통령과의 만찬도 취소할 만큼 출발 직전의 세균 오염을 염려했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비행사들은 아폴로 11호가 사명을 완수할 확률이 80%라는 예측에 동의한다면서도 ‘무사히 돌아오리라는 확률은 더 높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때 기자들은 또 한 번 암스트롱에게 “달을 밟은 순간 무엇이라고 감격을 토로할 것인지 첫 마디를 준비했는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암스트롱은 “아무 준비도 없다”며 “사실 달 탐사 준비에 너무 정신이 팔려 왔다”고 대답해 또 한번 기자들의 김을 뺐다. 교황 바오로 6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닉슨 대통령,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물론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도 메시지를 남겼다. 특히 그리스의 파파로폴로스 군정 지도자(1967년 쿠테타로 집권)는 “우주선 이름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라는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며 “아폴로 신은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고 말했다. 달 탐사 방영을 위해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출처 동아일보
이 기사는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릴 39A 발사대에서는 기사(엔지니어)들이 로케트에 바테리를 장진함으로써 총점검을 끝냈다”면서 “아폴로계획 책임자인 조지 헤이지는 ‘발사를 목표로 준비가 착착 완료돼 간다’고 말했으며, 발사 책임자인 로코 피트론도 ‘카운트다운이 아주 순조로운데다가 일기도 쾌청으로 예상돼 거리낄 것이 조금도 없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세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인 마이클 콜린즈의 부인은 마당에 물을 뿌리면서 “너무 덥군요. 지독히 정말 너무너무 더워요”라고 운을 떼며 “(별로 들뜨지 않은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곧 마음이 울렁거리겠죠”라고 애써 미소를 띄웠다고.3면에서는 ‘달 정복 한국 방영도 카운트다운’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소식을 흥미롭게 알렸다. 텔레비존이 놓인 안방에서 달까지는 머나먼 38만km.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한국의 집집에선 다시 한번 텔레비존 손질이 한창이며,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엔 주한미군 공보원이 마련한 36평방미터의 대형 스크린이 가설되어 달 정복의 장관을 그대로 비쳐줄 채비를 마쳤다. (중략) 닿는 달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기대에 사람들의 가슴은 부풀대로 부풀었다.” 1969년 7월 16일 오후 10시 32분(한국시간) 케이프케네디 기지를 떠나는 아폴로 11호.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7일 1면
17일자 1면 톱 ‘달 항로 쾌주’라는 제목의 기사는 “우주개척의 신기원을 이룰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은 대지를 박차고 대망의 달 여행을 시작했다”며 “하늘로 치솟아 11분 30초 만에 190km 상공의 지구 궤도에 진입했으며, 2시간 15분이 지나자 지구 궤도를 이탈, 시속 2만 4200 마일로 달 세계로 향했다”고 전했다. 또 이들이 찍은 지구의 모습은 전 세계 컬러 TV로 생중계됐다. 이 내용을 담은 기사는 “발사 20시간 후 지구에서 6만 마일 떨어진 달 항로상에서 15분 동안 첫 칼라 텔레비존 방송을 실시해 태평양 및 북미 대륙, 남미 대륙 북부, 태평안 연안을 천연색으로 보여주었다”고 보도했다. 1969년 당시 동아일보 만평을 담당한 김성환 화백의 삽화. 아폴로 11호 발사부터 지구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재미있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15일 4면 이날 4면에는 우주인들이 달에서 귀환한 이후의 상황을 미리 짚어보는 ‘달 검역작전 이상없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당시 일부 과학자들은 달에서 번식하는 세균이 세 우주비행사를 매개로 지구에 도달해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기사는 “우주비행사가 달 표면에서 활동하는 사이 낯선 세균을 묻혀 오고, 인류는 이들 세균에 저항력이 없어 콜레라 등과는 비교가 안될 유행병에 멸종할 수 있다”는 일부 시각을 전했다.
미국 공중위생국과 NASA 등 관련 전문기관들은 800만 달러를 들여 세 우주비행사와 우주선, 달에서 가져온 암석, 흙 등을 철저히 조사하는 연구소를 세웠다. 실제 25일 세 우주비행사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 악수나 포옹은 물론 열광적인 환영 행사는 없었다. 태평양 바다에 착수(着水)하자마자 이들은 곧바로 특수제작된 검역실로 옮겨져 8월 11일까지 각종 검사를 받으며 감금 생활을 했었다.
아폴로 11호가 16일 지구로 TV 생중계한 지구의 모습. 출처 동아일보
18일자 1면 톱은 ‘달 첫발 21일 정오에-완벽한 항진 계속’으로 아폴로 11호에 쏠린 흥분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3면에는 텔레비전 생방송에 관한 국내 소식을 실었다. ‘TV 생방에 모두 환호’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한국에선 비록 천연색이 아닌 흑백으로 비쳐지는 영상이지만 우주의 경이를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발사 때의 흥분을 되새기며 긴장 속에 환호성을 질렀다”고 보도했다. 32만 1868km를 돌파, 시속 3218km로 달과의 운명적 랑데부를 위해 돌진중”이라고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있고 그 위로는 길게 그늘이 져 있다”며 우주선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나는 우주선 한가운데에 떠 있어 우주선의 모든 창문을 손으로 만질 수 있소”라며 우주선 속에서의 상황을 실감나게 전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월요일인 21일. 신문을 받아든 독자들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갈 흥분된 소식이 전해진다. “人間 달에 섰다”. 인류 최초로 달 위에 선 1969년 7월 21일 동아일보 1면. 사진은 착륙선 안에 있던 에드윈 앨드린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닐 암스트롱을 촬영한 장면.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1일 1면 “人間 달에 섰다” “암스트롱 1969년 7월 21일 11시 56분 20초” “제1성(聲), 인류 위한 도약의 첫 발” 인류 최초로 달 위에 선 역사적인 날은 이렇게 다가왔다.
21일자 1면은 큰 사진 한 장이 지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격적인 편집이었다. 이 사진은 닐 암스트롱이 달 착륙선의 해치를 연 뒤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달 표면에 첫 발을 딛는 장면. 8줄짜리의 간략한 기사는 아래와 같이 전했다. 암스트롱은 ‘인간을 위한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를 위해선 거대한 도약의 한 걸음’ 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발밑에 깔린 달의 작은 모래알들 속에 박힌 자기의 발자국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에드윈 앨드린 역시 낮 12시 16분 달 표면을 밟았다. 암스트롱은 달 표면의 흙을 파서 그의 우주복 주머니에 넣었다. 이로써 드디어 억겁의 신비와 베일 속에 감추어졌던 달은 인류에 의해 정복되는 역사의 신기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21일 낮 12시 16분(한국시간) 닐 암스트롱에 이어 두번째로 달을 밟은 에드윈 앨드린. 출처 동아일보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달에 도착한 우주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이날 2면에는 닉슨 대통령이 “이 전화는 가장 역사적인 전화입니다. (중략) 그대들이 이룩한 일로 하늘은 인간 세계의 일부가 됐소. (중략) 인류의 역사에 있어 이 위대한 순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됐소”라며 축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닐 암스트롱은 “고맙습니다. 우리가 미국뿐만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전 인류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커다란 명예요 특전으로 생각합니다”라고 화답했다. 안 빠져’ ‘도착시 맥박수 평시의 2배’ ‘착륙선 고요의 바다에 안착’ ‘산과 분화구 투성이 바위도 가지각색’ 등의 제목으로 관련 소식들이 채워졌다. 이 기사들이 전하는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돌입했다. 이들 두 우주인은 착륙선 안의 기압이 문을 열 수 있도록 떨어지는 것을 10분 이상 기다린 후 지상관제소에 ‘이제 해치가 열리고 있다’ 고 보고했다. 착륙선 문이 열린 뒤 암스트롱은 달 표면 산책을 위한 모든 기기를 갖춘 채 착륙선에서 달 표면에 내려져있는 사다리를 뒷걸음질로 서서히 밟으며 달 표면에 근접해갔다. (중략) 암스트롱은 달 표면 산책 첫 대목에서 ‘움직이는데 곤란이 없는 것 같다. 걸어다는데도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리는 대체로 대단히 평탄한 장소에 서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69년 7월 19일자에 소개된 달 착륙선 모형도 출처 동아일보 이 착륙 광경을 담은 텔레비존 영상은 휴스턴 우주센터로 보내져 다시 세계의 청취자들에게 중계됐다. 암스트롱이 내려설 때 지구는 바로 그의 머리 위에 보였다. 그는 ‘사물을 똑똑하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달의 표면을 잔모래알이라고 표현했다. (중략) 한편 모선에 남아있는 마이클 콜린즈는 달로부터 69마일 떨어진 궤도를 계속 돌고 있다.” “암스트롱은 달 착륙선의 발 받침대가 달 표면의 먼지 낀 흙 속으로 한두 인치 밖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그의 발은 8분의 1인치 밖에 빠지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중략) 암스트롱은 ‘마치 미국의 서부 사막지대 같다’고 말했다. (중략) 암스트롱은 달 표면의 흙을 파면서 ‘재미있다. 아주 부드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표면의 흙을 팔 때 대단히 끈적끈적한 물건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세한 입자 위에 내 구두의 발자국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세 우주인의 가족들이 환호하는 사진과 함께 간략한 소감들도 실었다. 인구가 환호와 감격에 사로잡혀 온통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었다”며 “2억의 미국 전 국민은 가정에서 바에서 나이트클럽에서 감옥에서 또는 공원 광장 공항 등에 설치된 특설 TV 스크린을 통해 감격과 흥분 속에 달 착륙선의 착륙광경을 구경했으며, 뉴욕 시에서 는 특히 수천 명의 시민들이 달을 기념하기 위해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센트럴파크에 모여 달 착륙 광경을 구경해 이채를 띠었다”고 보도했다.
(좌) 달 표면에 선 착륙선과 우주인 (우) 달 표면의 ‘고요의 바다‘에 찍힌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앨드린의 발자국 출처 동아일보
22일자 1면에는 ‘달 착륙선 지구 귀환길에’, 3면에는 ‘신비 풀 자주색 돌 발견’ ‘코코아 빛 먼지 덮혀… 미 서부처럼 아름다워’ 등의 기사가 실렸다. 중간 진로 수정과 15분간의 TV 생방송을 거쳐 시속 9100km로 지구의 품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기사는 대기권 돌입 단계가 최종 고비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 착수지 변경을 알리는 내용도 있다. 기사는 “태평양 상의 아폴로 11호 착수 예정지의 기상조건이 악화되어 착수 목표지점이 바뀌었다”며 “착수 예정지에서 북쪽으로 398km 떨어진 곳에 착수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아폴로 11호의 세 우주인은 총 153만 3215km에 달하는 긴 우주여행을 마치고 25일 새벽 1시 50분(한국시간) 동트는 태평양 상에 착수, 무사히 지구의 품으로 돌아왔다. 좌측 상단에 있는 사진은 닐 암스트롱이 헬리콥터에 의해 인양되는 장면이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5일 4면
1시 50분 동트는 태평양 상에 착수, 무사히 지구의 품으로 돌아왔다. 악천후를 피하여 착수 지점이 변경되고 우주선의 착수 자세가 상하로 뒤집혀 끝까지 긴장이 계속됐으나 우주인을 실은 헬리콥터가 항공모함 ‘호네트’ 호에 내리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닉슨 대통령은 박수로 그들을 환영했고 육상은 환성으로 회오리쳤다.” 하에 종래처럼 동료들과 곧 어울리지 못하고 함상에 대기 중이던 이동 검역실로 곧장 들어갔다”며 “앞으로 이들은 18일 동안 이 검역실에서 엄격한 검사를 받게 된다”고 보도했다.
이동 검역실 창문 너머의 세 우주인. 이들은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달에서 감염된 세균이 있는지 검사하기 위해 곧장 이동 검역실로 들어갔다. 그 뒤 18일 동안 이곳에 격리된 채 엄격한 검사를 받았다.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6일 2면
같은 면 ‘땀 쥔 순간 거꾸로 내렸다-악수없이 안타까운 격리’라는 기사는 우주인 귀환 뒤의 장면을 스케치했다. 나타나 또 다시 현실세계가 아니라 과학소설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착수 직전 닉슨 대통령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 벙글거리며 옆에 선 NASA의 토마스 패인 국장과 대화를 나누었으나 착수 예정시간이 지나고도 우주선 모습이 한참동안 보이지 않고 또 그 위치도 확인이 되지 않자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중략) 암스트롱, 앨드린, 콜린즈가 줄을 타고 헬리콥터에 오르는 모습이 텔레비존에 비칠 무렵 선상에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선상에 헬리콥터가 내리자 닉슨 대통령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손을 흔들어 환영을 표시했다. (중략) 우주비행사들은 헬리콥터에 앉은 채 바퀴 없는 대형 버스처럼 생긴 이동 격리실 가까이 가서 불과 열 발자국 거리를 걸어 격리실 안으로 사라졌다. 세기적인 달 여행에서 돌아온 영웅들을 대접하는 절차로서는 몹시나 매정스럽고 섭섭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 악수도 축사도 없었다.”
아폴로 11호 귀환을 기뻐하는 세 우주인 가족들의 사진과 반응. 출처 동아일보 1969년 7월 25일 3면
이날 3면 ‘뜬 눈의 한국 시청 - 안착에 축하 환성’이라는 기사는 국내 반응을 담았다. 이 기사는 “세 우주인이 지구에 돌아오는 시간 우리나라에서도 TV와 라디오를 통해 그들의 귀환 모습을 시청하기 위해 시민들은 초저녁부터 특집 해설 프로에 귀를 기울이면서 예정된 귀환 시간인 25일 새벽 1시 50분을 눈 앞에 두고 초조한 마음으로 밤샘을 했다”며 “이윽고 ‘두 우주인 무사히 지구귀환’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눈과 귀를 모으던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수 갈채, 달나라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며 밤 가는 줄 몰랐다”는 반응을 전했다. 않아 몹시 섭섭해하는 모습도 보였다”는 웃지 못할 소식도 전하며, 그만큼 아폴로 11호에 대한 당시 일반인들의 관심이 대단했음을 보여줬다. 가족들의 사진과 반응들이 실렸다. 4면에는 귀환 당시의 갖가지 사진들로 지면을 채웠다. 달에서 찍은 자료 사진과 갖가지 뒷이야기를 담은 화보들도 하나씩 공개됐다. 아폴로 11호에 관한 보도 열기가 가라앉을 무렵인 30일부터는 미국 마리너 6호와 7호의 화성 탐사에 관한 기사를 연일 보도하면서 우주과학으로 들뜬 한여름의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11일 검역에서 풀려난 닐 암스트롱이 휴스턴의 유인우주인센터로 출근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30일자 2면과 3면에는 화성으로부터 123만 3600km 떨어진 거리에서 마리너 6호가 찍은 최초의 화성 사진이 TV 방송으로 공개됐다. 8월 1일자 2면에서는 ‘화성에 구름, 운하 - 생명체는 없는 듯’이란 제목으로 마리너 2호가 지구에 두 번째로 보낸 사진을 공개했다. 화성탐색위성 마리너 7호는 1일 밤 마리너 6호에 뒤따라 화성 상공 160만km 지점에서 화성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한 사진 촬영을 개시했다” 며 “마리너 7호의 화성 근접 사진은 화성에서의 생물체 생존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할 것”이라는 소식을 알렸다. 마리너 7호가 보낸 화성의 모습은 6일자 2면에도 이어졌다. 달 세균에 오염됐을 것을 염려한 세 우주인이 21일 간의 검역을 마치고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기사였다. ‘세 우주인 검역 해방’ ‘NASA 발표, 달 세균 감염 없다’라는 제목들을 단 이 기사는 아래와 같이 소식을 전했다. “휴스턴 우주본부의 달 물질 연구소(LRL) 방역실에 갇혀 21일 동안 격리 생활을 해왔던 세 우주인이 11일 오전 11시경(한국시간) 건강한 모습으로 검역실을 나와 처음으로 신선한 대기를 들이마셨다. 세 우주인은 검역실을 나온 즉시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들의 품에 안겼으며, 의사들은 세 우주인이 달 먼지에 전혀 오염되지 않았고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최종진단결과를 발표했다.”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 왼쪽부터 닐 암스트롱, 에드윈 앨드린, 마이클 콜린즈 출처 동아일보 서영표 동아사이언스 기자 sypyo@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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