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티베트·티베트 문화권

설레임의 하루 2011. 7. 24. 14:18

티베트·티베트 문화권

우리는 앞에서 정치사적 서술을 통해 중국인에게 티베트가 갖는 의미를 중국 근대 민족주의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당시의 대체적인 시대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티베트 문화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13년 심라회의에서 티베트측은 티베트 문화권을 영토로 주장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었다. 만약 섬서성 난주(蘭州)와 사천성 성도(成都)가 서부 변경도시가 된다고 상상하면 어떠한가?

물론 신강성과 몽골이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파급효과를 생각한다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달라이 라마 정권은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했던 것일까?

 

1) 티베트의 어의와 그 지리적 개념

우리는 지금 ‘티베트(Tibet)’라는 단어를 지역의 이름인 동시에 민족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라는 말은 서구에서 사용되기 시작해서 전세계로 보급되었을 뿐, 정작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들을 ‘봇드(bod)’라고 부른다. 티베트의 어원에 대해서는 ‘척발(拓拔)’이 와전되어 전해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나 명확하지는 않다.

현재 티베트 계통의 민족이 분포하는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의 남록·네팔 서부·시킴·부탄·중앙 티베트 고원·청해성·사천 서부·운남 북부·감숙성 남부와 감숙·청해성 교계지역 등에 걸쳐 있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티베트 즉, 중앙 티베트 고원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지역에 이른다.

따라서 만약 티베트 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을 ‘티베트’라고 한다면, 이것은 중앙 티베트 고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는 서장(西藏)은 서장장족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를 의미하므로 광범한 의미의 티베트와는 다른 개념이지만, 민족명인 장족의 경우는 중국 영내에 거주하는 티베트 민족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비슷한 개념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거주지를 암도(a-mdo: 감숙·청해·사천의 장족 지역), 캄(khams: 티베트 고원의 동남부), 위(dbus: 라사 일대), 짱(gtsang: 시가체 일대), 아리(mngav-ris: 티베트 고원 서부) 등으로 구분해서 불러왔다. 비록 티베트 민족은 같은 문자를 사용하지만, 지역에 따라 그 읽는 방법에 차이가 있으며, 각각 독자적인 방어권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환경도 차이가 커서 유목에 적합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캄에서는 포도나 차도 생산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토번(吐藩) 왕국의 후예’라는 것과 모두 ‘달라이 라마의 신도’라는 사실이다.

 

2) 토번 왕국과 티베트 민족의 형성

7세기 초 티베트에 거주하던 장족의 조상들이 세운 정권을 우리는 토번이라고 하며, 토번의 시조로 불리는 냐디첸포(gnya’-khri btsan-po, 쉈?贊普)는 기원전 4세기 중엽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티베트 고대사를 기록한 문헌들 중 《왕통세계명감(王統世系明鑑)》에서는 당시 티베트 일대에 ‘44개의 소왕(小王)’ ‘12개의 소방(小邦)’ 등이 존재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당시 티베트의 조상들이 냐디첸포의 아륭(雅隆)부락을 중심으로 한 독립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티베트에는 아륭 이외에도 양원(羊園, 象雄)·소비(蘇毘)·백란(白蘭)·당항(黨項)·부도(附圖)·토곡혼(吐谷渾) 등의 정치세력이 있었다. 7세기 송첸감포(srong-btsan sgam-po, 松贊干布, 617년∼650년)가 티베트 고원과 그 주변의 제민족을 통합하고 토번 왕국을 세움으로써 이 지역에 처음으로 통합된 정치 세력이 출현하였다. 당시 네팔과 당나라에서 각각 공주를 보내 화친을 맺은 것도 토번의 이러한 실력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송첸감포의 시대는 사실상 토번과 당이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평화적 관계를 유지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650년 이후 송첸감포의 어린 손자가 등극하면서 토번의 정치는 갈이(?爾)ㆍ녹동찬(祿東贊)의 섭정기를 맞게 되는데, 이 시기 토번은 하서(河西)와 서역(西域)을 장악하면서 그 전성기를 누렸다. 이러한 토번 팽창의 역사는 약 2세기 가량 지속되며, 당과 대등한 실력을 갖고 서역4진(鎭)을 경영하는 데 참여하였다.

당시의 역사는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현자희연(賢者喜宴)》 등 한(漢)·장문(藏文) 사서에도 전해지지만, 이들은 모두 이후에 저술된 것인 데 반해, 돈황(敦煌) 장문(藏文) 문서는 당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자료들은 7∼9세기 이 지역이 토번의 주요 활동 무대였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당시 토번의 언어·문학, 특히 산스크리트와 한문의 번역문학·마니교·경교·불교·티베트 원시종교인 본교(Bon Po) 경전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9세기 초, 토번 왕국은 와해되었다. 이로써 송첸감포에서 시작된 티베트의 통일세력 토번 왕국은 약 2세기에 걸친 번영의 시간을 뒤로한 채 분열기를 맞게 된다. 토번 왕국의 자취는 점차 사라져갔지만, 이를 바탕으로 티베트에는 장족의 모체가 되는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토번의 후예를 중심으로 새로이 정치세력화하는 움직임이 티베트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불교가 가세함으로써 오늘날의 티베트 문화권에 더욱 근접해 갔다.

 

3) 티베트 불교교단의 정치세력화와 5세 달라이 라마 정권의 출현

티베트 각지에서 과거 왕실과 그 신하의 후예들에 의해 소규모의 정권들이 탄생했다. 이 시기는 티베트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티베트 불교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중국 학자들은 10세기를 전후해 각지에서 등장한 정치세력을 농노주(農奴主) 정권이라고 하며, 1959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완전히 해방시킴으로써 티베트에서 농노주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고 본다.

이러한 농노주 정권은 전근대 봉건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형태이지만, 티베트의 경우는 이 봉건 정치세력들이 불교교단과 밀접한 관계를 갖거나, 불교교단 자체가 봉건 정치세력으로서 군림하였다는 사실이다. 티베트 불교의 역사는 토번(吐藩)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송첸감포 시대 불교의 전파는 다른 지역의 불교 전파가 모두 그렇듯이 왕실을 중심으로 지배층 내부에서 진행되었다. 그 전파 경로도 다양해서 인도·네팔·서역의 우전(于?), 동방의 당(唐) 등에서 파견된 승려들이 라사 등 티베트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랑다르마(朗達瑪)의 억불정책으로 티베트 중심부인 위짱 지역에서 축출된 승려들은 그 주변부인 서부의 아리, 그리고 동부 암도 지역으로 그 활동 무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흔히 티베트 불교의 역사를 논할 때, 전홍기(前弘期), 후홍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앞에서 언급한 송찬간포 시대의 불교 수입 시기를 전홍기라고 하고, 랑다르마 억불정책 이후 새로이 불교가 부흥하는 시기를 후홍기라고 한다. 진정한 불교의 발전은 후홍기에 가서야 가능했다. 세속 정치세력이 분열되어 티베트 전체를 정치적으로 주도할 만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각 지역에서는 대소 종파가 성립 발전하였다. 티베트 서부 아리 지역은 토번 왕조의 후예가 분할 통치하고 있었으나, 위짱 지역에서는 토번 왕조와 귀족 후예들의 통치가 쇠퇴해 가는 형세였다.

오히려 명망 있는 고승이 이끄는 교파를 중심으로 작은 세속 정치세력들이 모여드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토지와 인민·가축·재물을 교단에 시주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사원은 사속장원(寺屬莊園, 香火莊)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사원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각 사원의 고승들은 자신의 친속(親屬)과 외생질자(外甥姪子) 등을 이용하였으며, 이들은 자연히 귀족 관원층을 형성하였다. 그 아래에 장원의 속민을 관리하는 하급관원을 두었는데, 특히 이들 관리의 일부는 승려가 담당하였다. 이로써 종교 수장과 지방관원의 직능이 결합된 행정기구와 유사한 조직이 출현하였다.

실력 있는 주요 교파는 각 지방에 모사(母寺)와 연계된 지사(支寺) 조직을 가지면서 그 세력을 확대해 갔다. 당시의 주요한 사원 조직으로 지공파(止貢巴)·살가파(薩迦巴)·파목죽파(?木竹巴)·채파(蔡巴)·아상파(雅桑巴)·달륭파(達隆巴)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본거지는 주로 위짱 지역에 위치하였으나, 동부 암도나 서부 아리 지역에도 지사를 두어 그 세력은 전 티베트 지역에 미치고 있었다.

카담파(bkav-gdams-pa, ?當派)는 수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나, 정치세력과의 연계에 주력하지 않은 결과, 이후 정치세력화하지는 못했다. 원대(元代)의 사캬파(sa-skya-pa, 薩迦派), 원말명대(元末明代)의 카르마카규파(karma-bkav-brgyud, ?瑪?擧派)의 뒤를 이어 달라이 라마의 겔룩파(dge-lugs-pa, 格魯派)가 티베트의 최대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달라이 라마 정권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티베트 문화권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모든 교파가 그렇듯이 겔룩파 또한 성립 초기에 전 티베트 불교계의 존경을 받는 조사(祖師)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쫑카 지역 출신의 쫑카파 즉 나상찰파(羅桑?巴, tsong-kha-pa, 1357∼1419년)이다. 우리는 쫑카파라는 이름에 익숙해 있는데, 이는 곧 ‘쫑카 사람’이라는 뜻이다. 쫑카파는 살가(薩迦)·택당(澤當)·납정(拉頂)·내당(納塘) 등 여러 교파의 주요 사원을 돌면서 현밀교(顯密敎) 경전을 착실히 수학했다. 그의 종교계의 권위를 바탕으로 1409년 라사 기원대법회가 창립되었는데, 이는 파죽(?竹)정권을 비롯한 티베트 승속 각계의 후원 아래 거행되는 티베트 최대 규모의 법회였다.

이후 철방(哲蚌)·색납(色拉)·감단(甘丹)·찰십륜포(?什倫布) 등 겔룩파의 4대 사찰이 건립됨으로써 겔룩파가 그 발전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비록 승려로서 쫑카파의 명성은 당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정권으로서 겔룩파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점차 겔룩파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기존의 교파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것을 흔히 역사서에서 ‘홍황(紅黃)의 대립’이라고 하는데, 기존 교파를 대표하는 카르마카규파와 신흥의 겔룩파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파죽정권이 약화되자 티베트는 혼란에 휩싸였고, 표면적으로는 홍황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3세 달라이 라마가 청해·사천·몽골 등지로 전교를 위해 떠났던 것도 이러한 티베트 내부의 상황, 특히 겔룩파의 위기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4세 달라이 라마(1589∼1616)가 몽골에서 전세(傳世)한 것은 당시 겔룩파와 몽골 사이에 상호협조를 위한 유대관계가 무르익어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겔룩파가 티베트의 통치 정권으로서 등장한 것은 1642년 5세 달라이 라마(1617∼1682) 때였다. 소수의 신흥 교단이었던 겔룩파는 쫑카파의 명성과 3세 달라이 라마(1543∼1588)의 포교 활동에 힘입어 마침내 몽골의 투머트부(部)·할하 투셰트부(部)·오이라트 호쇼트부(部)·준가르부(部) 등을 그의 열렬한 시주(施主)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 중 오이라트 몽골의 일파였던 호쇼트부는 부족 전체가 청해로 이주하여 청해를 거점으로 겔룩파에 그 군사력을 제공함으로써 반겔룩파 세력은 겔룩파의 티베트 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티베트 전역에 겔룩파 사원이 급속히 증가하였고, 달라이 라마는 전체 티베트 문화권뿐만 아니라 몽골, 만주 등지에도 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를 두고 티베트 인들은 달라이 라마 정권이 토번의 정치체제를 계승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티베트 민족의 정권으로서의 양자의 계승관계를 분명히 하였다. 그렇다면 5세 달라이 라마 시기 성립된 티베트의 겔룩파 정권은 200여 년 후 독립을 시도했던 20세기 초 티베트 인들에게는 독립의 역사적 근거가 되었을까? 그렇다면 중국은 왜 원대(元代) 이래 티베트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물론 정치적인 문제이지만 일부 역사적 진실을 그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속>

출처 : 앙마
글쓴이 : 백제 대제국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