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광개토대왕비 碑文변조

설레임의 하루 2009. 9. 10. 01:27
  *출처:다음블로그-솟대  글쓴이-소도지기  http://blog.daum.net/choimg21/6622441

 

 

 

 

 

 

 

 

 

광개토대왕비 碑文변조


 

광개토대왕비 碑文변조”



일본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의 중요한 근거로 삼는 광개토대왕비 신묘년 기사 일부가 분명히 변조된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후반 왜가 한반도 남부에 진출해 백제와 신라, 가야를 지배했으며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었다는

주장으로 일부 일본 역사교과서는 정설로 기술하고 있다.


서예학을 전공한 김병기(51)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최근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낸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대왕비의 진실’에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일본이 해석하는 광개토대왕비문

의 ‘渡海破’가 실은 ‘入貢于’의 변조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신묘년 기사를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신라에 조공하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지난해 4월 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같은 주장을 펴 1차 논란이 됐었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을 둘러싼 한일 논쟁의 핵심에 있는 문제의 신묘년 기사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은 확인 불가능).

김 교수는 1970년대 초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씨가 처음 주장해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던 ‘渡海破’가 서예학적인 안목으로 분석했을

때 틀림없이 조작된 글자라는 것이다.


그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이 다량으로 만든 석회본(비석 표면에 석회를 발라 면을 고르게 한 뒤 뜬 탁본) 중 하나로 추정되는

동아대학교 소장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비 글자체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획이 거의 직선으로 된 것인데, 이 탁본 신묘년 기사의 ‘渡’자 마지막

두획은 오늘날 흔히 쓰는 해서체에서처럼 중간 부분이 아래쪽으로 상당히 굽어 있는 파도 모양이다.


국내 학계에서도 변조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海’자의 경우도 광개토대왕비 서체는 모든 자형이 기본적으로 정사각형 혹은 세로가

약간 긴 직사각형인데 유독 신묘년 기사만 ‘母’ 부분의 세로 획이 모두 왼쪽 방향으로 기울었다.


신묘년 기사의 ‘破’자도 ‘石’의 두 번째 획이 직선 획을 사용하는 광개토대왕비 서체에 어긋나는 해서체이고, ‘石’자와 ‘皮’자의 높이가

비문의 다른 ‘破’자와 다르다. 김 교수는 서체 분석으로 볼 때 ‘이 작은 차이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渡海破’의 원형을 신묘년 기사 중 ‘속민’과 ‘신민’이라는 언뜻 보기에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로 쓴 용어에 착안해서

찾아나간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같은 민족이면서 예로부터 조공을 해온 나라이기 때문에 속민이라는 전용 명사로 나타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혈족 관계로 보나 조공 관계로 보나 복속의 정도가 강한 속민인 백제나 신라를 복속의 정도가 낮은 신민이라는

일반 명사로 나타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는 ‘백제나 신라를 이미 속민이라는 칭호로 불렀으니 다시 신민일 수는 없다’며 광개토대왕비에서 유일하게 신묘년 기사에만

등장하는 ‘신민은 왜를 가리키는 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맥락에 따라 그는 ‘渡海破’는 ‘入貢于’에서 변조됐을 가능성이 크고, 그 과정에서 변조탁본의 대표격인 사코 카게노부의

쌍구가묵본(종이를 대고 글자모양을 그린 뒤 여백에 검은 붓칠을 하는 탁본)에서처럼 ‘渡海破’의 줄이 심하게 틀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역사조작사례  광개토대왕비문과 삼국유사


 

 

조작의 천재~! 日本 광개토왕비문 조작과정 밝혀지다


일본의 조작기술은 정말 대단하군요 고대사 그전의 구석기 문명 조작부터해서 조작하지 않은 역사가 과연있는지 의문스럽군요


아래 변조과정을 잘 보시면 일본인의 역사왜곡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수있습니다 .


 

 

광개토 대왕비문의 변조과정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우리 상고사를 말살시키는데는 한 글자를 고침으로 충분했다


 

 

『삼국유사』「정덕본」과 「동경제대 영인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치고 동경제대 영인본으로

출판


광개토대왕비문을 조작하여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임마일본부설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면 우리 상고사를 왜곡하는데 있어서는

 

삼국유사의 단 한글자 조작으로 충분했다


"삼국유사" 정덕본의 "고조선기"에는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석유환국)"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초기의 원동중씨가 쓴 "삼성기 하편"에는 환국은 시베리아의 중앙고원(파내류산=천산=파미르고원)과 바이칼호를 포함한

 

시베리아 전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의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환국의 지도자의 관직명은 환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환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고, 신화속 인물로서의 환인만 알고 있다.

이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이것은 일제시대에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금서용)가 이 환국의 "국"를 "인"자로 변조하여, 환국이란 나라의 존재를 없애고

환인을 신화의 인물로 변조 시켰기 때문이다(환국뿐 아니라 뒤에서 설명할 배달국의 환웅, 고조선의 단군도 모두 신화의 인물로

왜곡시켜 한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없앴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무력정치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여 문화정치라는 미명하에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얼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는 시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고대 역사서를 뒤져내어 없애버리고, 유일한 역사기록으로 남겨놓은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나오는 환국의

건국사실 마저도 고쳐 버렸다.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바꾼 것이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란 말을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로 고쳐 버린 것이다.

"환국"이란 나라를 "환인"이란 사람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가 54년이나 되었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으면 무엇하는가?

아직도 한국사람 대부분은 환인, 환웅, 단군을 신화의 인물로만 알고 있고 제 올바른 역사를 모르고 있으니 일제의 한국인

뿌리말살작전은 진정 성공한 것이 아닌가?


환국과 배달국의 존재 등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한 자료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조시대 왕조실록 등에 엄연히 존재하며,

일제에 의해 없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 황실문고에 대량으로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환단고기의 내용을 인정하고 국사교과서에 사료로서 반영하고 일본에 건너간 다른 사서들을 다시 찾아와서 우리의 진실된

왜곡되지 않은 고대사를 배울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