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영상복원 - 무용총 고구려가 살아난다
적막과 어둠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최초로 문이 열렸을 때 사라졌던 역사가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거기에 고구려인이 묻혀있었다.
역사스페셜 그 첫 시간입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3차원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가상세트 입니다. 앞으로 역사스페셜에서는 이런 최첨단 영상을 이용해서 고려, 삼국은 물론 시공을 초월해 우리 민족의 원류를 밝히는 작업까지, 감춰지고 사라져간 역사를 복원하고, 실체를 추적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폭을 넓혀가 보겠습니다. 그 첫 작업으로 오늘 우리가 다룰 얘기는 고구려 벽화, 무용총에 대한 것입니다. 자체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에서 벽화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문화를 일궜고, 무엇을 꿈꿨는지 알 수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입니다. 과연 무용총안에 어떤 벽화가 그려져 있는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기는 실물크기로 재현해 놓은 무용총 안입니다. 이 무덤은 대략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이렇게 관대가 놓여있고, 그 관대를 둘러싸고 삼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그 유명한 수렵도가 여기에 그려져 있었고, 그 다음에 접객도, 그리고 이 무덤을 무용총이라고 부르게 한 춤 그림, 바로 무용도가 이쪽 벽면에 그려져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벽화가 많이 훼손돼 있죠.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보더라도 당시 이 벽화가 대단히 아름답고 화려했으리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오백년전에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이런 벽화를 제작할 수 있었을까요? 훼손돼 사라져가는 무용총 벽화를 우리가 3차원 최첨단 영상으로 재현해 보겠습니다.
이 압록강의 줄기를 따라 광활하게 펼쳐졌던 고구려의 옛 영토. 거기에는 아직도 그 시대가 얼마나 영화로웠는지를 알리는 흔적들이 산재하다. 고구려의 도읍지가 있던 집안지역 일대에는 약 1만2천여기에 달하는 무덤들이 거대한 고분군을 형성하고 있다. 그 고분들 속에 쌍둥이 무덤이라고 알려진 각저총과 무용총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무용총은 1935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굴 조사된 후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5번, 외부에 공개됐다. 그러나 공개 후에 보존 조치가 뒤따르지 않아 무용총 벽화의 훼손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화면에 담긴 벽화 모습은 이처럼 색이 바랜데다, 그 나마 군데군데 벽면이 떨어져 나가 그 원형을 알아보기 조차 힘들다. 특히 중국 측이 벽화를 보존한다며, 화학안료막을 입혀 벽화는 지금 내부에서부터 부식돼 가는 중이라고 한다. 제작팀은 KBS 특수영상제작실과 함께 무용총 복원에 들어갔다. 첫 난관은 이렇게 훼손된 상태에서 벽화 본래의 모습과 색을 어떻게 알아내는가 하는 점이었다. 제작팀은 가급적 오래된 사진 도록을 참조하기로 했다. 하지만 1960년대의 사진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부분이 많았고, 윤곽이 제대로 남아있는 30년대 도록은 그 색이 분명치 않았다.
제작팀은 색채 전문가의 협조를 받아 도록에 나오는 사진 하나하나를 색 대조표를 가지고 확인해봤다. 색채 전문가인 최미영씨는 무용총 안에 이 대조표를 가지고 들어가 직접 실제 그림과 맞춰봤다고 한다.
최미영 색체연구가 인터뷰
“고구려 고분 벽화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에서 채취한 천연석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주 색이 선명하게 잘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적갈색이 주조색인데 거기서 5가지 정도의 색이 더 나오고 있습니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옷 색깔부터 컴퓨터로 복원해봤다. 흰색은 실제로는 약간 노스름한 빛을 띠었고, 붉은색은 도록에 찍힌 사진보다 더 짙었다고 한다. 도록에는 단색으로 처리된 경우가 많은데, 실제 벽화 모습은 다르다고 한다. 도록에 이 인물은 검은 단색 옷으로 입은 것처럼 나와 있지만, 최미영씨의 주장에 따르면 옷깃과 소매깃은 붉은색으로 강조돼 있었다고 한다. 그 말에 따라 색을 보정해봤다. 완성된 모습은 전통 한복과 아주 흡사했다.
제작팀은 이런 과정을 거쳐 벽화의 색을 일일이 재현했다. 그런데 무용도에는 다리밖에 남아있지 않은 인물이 그려져 있다. 사진 도록에도 없고, 실제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우리는 최초의 고분 보고서에서 그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케 하는 단서를 하나 발견했다. 거기에는 완함 연주자로 기록돼 있었다. 그러면 완함은 어떤 악기였을까? 그 모습은 조선시대 월금과 아주 흡사하다고 한다. 다행히 감신총 벽화에 완함 연주자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자료에 근거해 완함 연주자를 완성시켰다.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완성된 춤 그림, 무용도다. 기록에 따르면 완함 연주자 옆에 있는 사람은 영무로 전체를 지휘하는 사람이고, 아래 7명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 5사람은 영무에 지휘에 따라 춤을 추는 춤꾼들이다. 과연 이들은 어떤 춤을 추었을까? 고구려 춤의 원형을 연구 중인 이애주 교수는 무용도에 나오는 5사람의 모습에 기초해 최근 고구려 춤을 복원시키고 있다. 두팔을 완전히 뒤로 제낀 벽화의 기묘한 춤동작은 추정해보건데, 두 팔을 앞으로 한 바로 이런 모습일 거라고 한다. 또 손놀림이라든가, 발 추임 동작도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멋이 우리의 전통 춤과 많이 닮아 있다고 한다.
이애주 교수 인터뷰
“그 춤 무덤에 다섯 사람 춤을 보면 거기에 우리 춤에 원형이 잘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팔을 들고 한 발을 이렇게 진중하게 내딛었는데 바로 우리의 가장 합리적인 자세인 춤사위의 구도가 이렇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다섯의 춤꾼들은 당시에 벽화에 그려진 대로 이렇게 일렬로 서서 추었을까?
“그런데 그것을 다시 한 번 이렇게 5사람을 보면 입체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명 두명이 그 입체적으로 서 있으면서 그 입체적인 것이 역동적으로 되살아나서 우리 춤의 원형이 고구려 춤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힘차면서도 담백하고, 끊어질 듯하면서 이어지는 고구려의 춤, 춤처럼, 고구려인들이 이룬 문화도 강하면서 섬세한 면을 고루 갖추고 있다. 벽화 우리가 5명의 춤꾼에서 고구려의 춤을 재현했듯이 자세히 보고 느낌을 넓혀간다면, 고구려는 되살릴 수 있다. 벽화는 그런 점에서 과거로 들어가는 열쇠다.
무용총이 만들어진 5세기초는 광개토왕에서 장수왕으로 이어지던 고구려의 전성기땝니다. 북으로는 거란과 동부여를 정벌해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 가야에 까지도 그 세력을 뻗쳐가던 그 무렵입니다. 이 무용총은 바로 이 고구려의 중심지에, 국내성 부근 통구지방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지에 이렇게 화려한 벽화를 남긴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을까요?
무용총 안을 들어가면 우선 널길과 만난다. 널길의 양 옆에는 앞방이 있다. 앞방은 아주 작아 폭이 1미터를 넘지 않는다. 앞방을 지나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관이 놓여있는 널방이 나타난다. 널방 안에는 관대만 놓여있을 뿐 무덤 주인의 신분을 알 수 있을 만한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손님을 접대하는 그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 접객도에는 무용총의 주인으로 보여지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바로 이 사람이다. 무덤을 벽화로 치장한 것으로 봐서 주인공의 장례식도 대단히 호화로웠을 것이다.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고구려인들은 결혼하면 곧 수의를 만들고 금은 재물을 장례에 쓴다'는 기록이 있다.
서길수 교수 인터뷰
“고구려 사람들은 죽어서도 사람은 ‘영원히 산다’하는 사상 때문에 크게 무덤을 만들고 또 벽화에다가 그런 것들을 실제 생활처럼 그림을 그리고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훼손이 심한 이 그림으로는 무덤 주인의 신분을 유추하기는 힘들다. 영상으로 복원된 접객도다. 접객도는 음식이 올려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손님과 주인공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주인공의 신분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음식을 올리는 시종위에 주인공은 당시 귀족들의 머리장식으로 알려진 백라관을 쓰고 앉아 있다. 주인공 뒤에도 두명의 시종이 서있고, 그림 맨 아래에는 여덟명의 시녀들이 늘어서 있어 그림만 봐도 주인공의 신분이 꽤 높으리라고 추측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추정은 불가능하다. 다른 고분과 비교해봤다. 무용총과 이웃한 각저총은 외형상 크기가 거의 비슷하다. 무용총은 널방의 너비나 높이가 3.5미터 정도다.
전호태 교수 인터뷰
“시신이 안치되는 그 널방의 경우엔 너비가 3.5m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3.4m에서 3.5m 정도이고 천정 높이도 3.5m에서 조금 더 넘어서는 정도인데 6C에 보다 규모가 큰 석실분의 경우에는 너비가 4m고 높이고 4m에 육박합니다.”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은 무용총과 같은 5세기초에 축조된 고분이다. 천여개의 장대석들로 지어진 장군총은 규모도 거대해, 널방의 너비가 32미터, 높이도 지금의 7층 아파트 높이에 해당된다. 무용총보다 1세기 후에 만들어진 강서대묘도 고구려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널방의 높이만 8미터로 규모도 거대할 뿐더러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황룡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네 벽에는 고구려 벽화의 걸작으로 알려진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무용총은 이런 왕들의 고분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황해도에 있는 안악3호분은 무용총과 같은 5세기 초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은 고구려에 귀화한 '동수'라는 중국인 무장이다. 그는 고구려에서 높은 신분의 귀족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밖으로 행차할 때면 풍악대와 장송대가 도열하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종들이 그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표현돼 있다. 무용도에도 비슷한 행차모습이 담겨있는데, 말탄 주인공을 따르는 시종은 한 명뿐이다.
전호태 교수 인터뷰
“전체적인 규모를 설치화 해서 분류를 하면 무용총의 경우는 2급 귀족 정도의 무덤으로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벽화의 내용으로 보면 대규모 석실분에 나오는 행렬도라든가 그런 전생에서의 위세 즉 살아있을 때의 위세를 과시하는 그런 거대한 어떤 행렬도의 종류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벽화의 내용으로 보아서도 왕실의 왕족에 해당되는 무덤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이 무용총은 고구려 귀족의 무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4-5세기경 고구려 고분중에는 이 무용총처럼 생활풍속을 그린 벽화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이나 풍요로웠던 생활의 그 모습을 무덤에 남김으로써, 내세에도 그러한 삶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이 벽화를 보면, 이 무용총의 주인은 가무와 함께 사냥도 꽤나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무덤의 한 쪽 벽면을 꽉 채운 이 수렵도는 발견당시부터 매우 힘차고 정교한 사실묘사로 벽화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힙니다. 그렇다면 1500년전 이 벽화를 그릴 당시로 돌아가 보죠. 이 무덤은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벽면이 대단히 거칠었을 것입니다. 그런 벽면에 어떻게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또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그 제작 과정을 재현해봤습니다.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 벽화의 조각이다. 쌍영총 벽화의 것인데, 쌍영총은 무용총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졌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인들이 벽화를 어떻게 제작했는지, 그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귀중한 재료다. 제작팀은 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의 도움을 얻어 쌍영총 조각의 단면 조사를 실시 해봤다. 벽화를 그린 물감의 성분은 무엇일까, 붉은색과 검은색의 안료가 주로 나타났다.
안병찬씨 인터뷰
“적색인 경우에는 수은과 황의 농도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황화수은이라고 하는 그런 진사로 알려져 있는 것인데 황화수은을 안료로 하는 그런 것을 적색으로 사용을 했고 흑색은 탄소계 즉 먹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고...... ”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벽화에 사용되는 안료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 대학에서는 전통 안료를 직접 만들어서 고구려의 벽화를 제작하는 수업을 하고 있다. 고구려 벽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한 색은 적갈색인데, 대부분의 벽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색이다. 이 적갈색을 당시 고구려인들은 자연에서 얻었다고 한다.
이종상 교수 인터뷰
“우리나라 고구려 벽화의 인상하면 갈색계통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예가 소위 괴테석 우리나라의 많이 산재돼 있는 황토흙이라고 보통 얘기하는 이런 산화철계통의 흙이 자연산 흙이 가열을 함으로써 다시 적색을 나타내는 이런 적철광색을 나타납니다. 그런 것들을 사용해서 약간의 붉은 색을 얻었다든지 그 외에 또 산화납 계통, 크롬 계통, 이런 산화물들을 천연재료로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검은색은 먹으로, 적갈색은 황토를 원료로 한 것처럼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질을 산화시켜 만들었다. 벽화에 쓰인 안료는 이렇게 물에 녹지 않는 천연광물성 재료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광물성 안료를 어떻게 돌로 만들어진 벽에 부착시킬 수 있었을까? 쌍영총 조각 단면을 분석해봤다. 아래 흰색은 석회부분다. 그런데 검은색 안료는 석회에 잘 붙어있는 반면 붉은색 안료는 엉성하게 떠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안병찬 인터뷰
“석회와 안료가 함께 화학적으로 탄산칼슘으로 변화하는 프레스코적인 부분과 또 그렇지 않는 부분 두 가지로 대비가 되는데......”
우리는 전문가에게 의뢰해 프레스코 기법으로 벽화를 제작해봤다. 고구려 벽화는 안료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벽면에 두껍게 석회를 입혔다. 석회도 한번 바른 것이 아니라 3번에 걸쳐서 바르고, 특히 마지막에는 아주 고운 입자의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벽화의 바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릴 때, 프레스코 기법이 사용되는데, 젖은 석회에다 광물성 안료로 채색을 해서 석회 안으로 스며들게 한다는 것이다.
진영선 교수 인터뷰
“젖은 석회 위에다가 천연 안료를 써서 자연안료로 접착제 없이 그려가지고 벽이 마르면서 석회가 마르면서 그 벽 전체가 마르면서 그 안료가 석회 틈 사이로 스며들어가서 석회와 같이 마르는 것을 그런 총 작업을 이제 프레스코 벽화라 부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돌을 쌓고 그 위 굵은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1차벽을 바르고, 그 다음에는 중간 굵기의 돌가루와 석회, 마지막에는 고운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세번 가량 회벽을 발랐다. 화가는 그 위에 석회가 마르기전, 젖은 상태일 때 그림을 그렸다. 그래야만 안료과 석회와 함께 굳어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프레스코 기법은 젖은 상태에서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용총 벽화의 경우, 그 많은 그림을 회벽이 마르기 전에 전부 그리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두번째, 프레스코가 아닌 방법이 쓰여진 것 같다. 석회와 안료가 밀착된 검은색 부분이 프레스코 기법이라면, 이 엉성하게 떠있는 붉은색 부분은 분명 다른 기법이다. 왜 안료와 석회가 잘 붙지 않은 것일까?
안병찬 교수 인터뷰
“그 이유는 무엇을 뜻하는가? 안료를 사용해서 그릴 때, 어떤 매개물 예를 들어서 아교 같은 것을 섞어서 그렸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프레스코와 다른 기법은, 석회가 마른 후에 안료에 아교를 섞어 그림을 그린 것이다. 결국 무용총 벽화는 젖은 상태의 회벽에다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과 부분적으로 다 마른 상태에서 아교를 섞어 그림을 그리는 두 가지 방법이 병행된 것으로 보인다. 바로 기법에 보존의 비밀도 담겨있다.
프레스코 기법의 경우, 젖은 상태에서 안료와 석회가 함께 굳기 때문에, 마치 종유석처럼 단단해져 안료가 떨어져나가는 박락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오랜 시간이 흐리면서 습기나 빗물이 무덤 안으로 스며들어와 석회수가 되면서 벽화에 일종의 코팅이 이뤄지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가 천오백년 가까이 그 모습을 간직한 보존의 비밀이 바로 이 프레스코기법에 들어있다.
이것이 첨단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된 무용총 내부의 벽화입니다. 먼저 무용도, 그리고 접객도, 마지막으로 수렵도의 모습입니다. 이 벽화가 그려졌을 당시 모습도 아마 대단히 화려했을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호방한 그들의 숨결이 느껴지십니까. 그런데 이 벽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몸을 완전히 돌려 앉은 기마 자세나 또는 이 화살의 모양이 매우 특이합니다. 사냥꾼들도 저마다 머리장식이 다릅니다. 이 화살촉을 보면, 마치 석류처럼 생긴 것이 이런 화살을 가지고 어떻게 사냥을 할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벽화는 기록보다 더 정확한 역사입니다. 거기에는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감춰져있습니다. 그 의문들을 풀어봤습니다.
보통 화살은 끝이 뽀족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에게 꽂혀 일격을 가할 수 있는데, 수렵도에는 명적이라고 부르는 둥근 화살만 그려져 있다. 명적은 소리를 내는 화살로 신라, 가야는 물론 흉노족 출토 유물에서도 발견된다.
김성태 인터뷰
“아마 구조나 모양으로 봐서 수렵이나 아니면 전투 시에 신호용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또 실질적으로 날 부분이 예리하게 돼 있는 것들이 고고학적 유적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봐서 실질적으로 사냥 시 짐승에게 타격을 가하는 실질적인 기능도 있었지 않았나 보여집니다.”
직접 명적을 제작해봤다. 유영기 옹은 20년 동안 화살만을 줄곧 만들어온 전문가다. 석류모양의 화살촉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다고 한다. 뼈나 뿔에 구멍을 파서 화살촉에 끼우는 명적은 고구려가 만든 대표적인 화살중의 하나다. 명적들 명적은 동물을 죽이기보다 소리로 기절시키거나, 생포하는데 더 적합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명적을 수렵도에 그렸을까?
노태돈 교수 인터뷰
“그것은 정치적 군사적의미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군사들을 풀어서 산에서 사냥함을 통해 그것은 일종의 군사훈련이고 또한 동시에 그런 사냥을 통해서 사냥 터 주변에 있던 지역 세력들을 규합하는 정치적인 단합행위이기도 합니다. 사냥을 통해서 얻어진 단결력과 또 사냥물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므로 서로간의 어떤 결속력을 다지는 그런 행위였습니다.”
수렵도 수렵도에는 사냥하는 그림과 함께 나무를 사이에 두고 소 수레가 그려져 있다. 사냥에 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수레는 당시 귀족들이 타고 다니던 일반적인 교통수단이다. 사냥은 모든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오락이면서 생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언제든 기동성 있게 대처할 수 있었다. 무사들의 활쏘는 자세도 예사롭지 않다. 자세히 보면 말 위에서 완전히 몸을 뒤로 제긴 채 활을 쏘고 있다. 그런 자세는 지금도 따라 하기가 쉽지 않다. 고구려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최고로 여겼다. 신기에 가까운 기마자세가 생겨난 것도 거기에 원인이 있다. 또 하나, 이런 자세가 가능했던 것은 활에도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김성태 인터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러 개의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그 마디 중에는 뒤에 덧 땐 부분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덧 땐 부분은 뼈를 갈아서 만들어서 나무 뒤에 붙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가져다가 기록에서는 각궁이라 합니다. 이러한 각궁은 다른 나무로만 만든 활에 비해서 탄력성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에 말 위에서 화살을 쏘는데 가장 적합한 것 같았습니다.”
각궁은 활 길이가 짧아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쏠 수 있고, 화살도 멀리 나간다. 조선시대에도 이 각궁을 썼는데 그 모습은 벽화에 나타난 각궁과 똑같다. 우리 활의 원형이 이미 4-5세기 고구려 때 완성된 것이다.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자기들의 중심 무대를 계속 넓혀나갔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광대했는가는 의외의 곳에서도 발견된다. 말탄 주인공은 점무늬 바지를 입었다. 부엌을 나오는 여자들의 옷에도 점무늬가 보인다. 요즘 말로 땡땡이 무늬라고 부르는 이 옷들은 다섯 명의 춤꾼들의 의복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민길자 교수 인터뷰
“요사이 말하면 방염직 물이다. 어떤 한 부분에 염색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무늬에만 이렇게 염색물감이 들어가게 하는 염색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을 힐염이라고 하고 세계적으로는 사라사 염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라사 염법은 일찍이 인도에서 기원해가지고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이미 동남아시아를 거쳐서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고 또 중앙아시아를 거쳐가지고 북쪽으로도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이미 고구려에 궁중이나 상류계급 사람들은 그 사라사 기법에 옷감으로 옷을 해 입었다는 그런 증거가 되는 거죠.”
가장 오래된 점무늬 옷감으로 알려진 사라사 공법의 이 인도 직물은 벽화의 옷 무늬와 비슷하다. 고구려는 이 인도의 '부분 염색법'을 사용해서 복식에 변화를 줬다. 당시 고구려 사회는 멀리 서역과 문화를 교류 할 만큼 활동무대를 넓히고 있었고, 그것이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옷을 통해 막연하게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이 무용총에는 벽에 뿐만 아니라 천장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천장 벽화는 네 벽에 그려진 그림과 확연히 다르면서 그야말로 찬란하고 다양한 하늘세계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무덤안의 천장은 계단식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돔 양식으로 돼있습니다. 사학자들은 벽면의 벽화가 살아생전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면 위 천정 부분은 극락왕생을 비는 영혼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 천장벽화를 그린 고구려인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그림들을 그렸을까요?
천장 벽화는 계단식으로 좁아지는 그 단위에 촘촘히 그려져 있다. 고구려인들은 이렇게 좁아지는 계단에 그림을 남기기 위해 그들 나름의 건축 방법을 갖고 있었다.
김성태 인터뷰
“벽면 위에 팔단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삼단까지는 평행으로 하여가지고 들여쌓기를 하였고 사단부터 팔단까지는 팔단팔각으로 각을 죽여가면서 점점 들여쌓기를 했습니다. 밑에서 보면 팔각에 천정이 5개가 위로 점점 안으로 좁혀져가면서 천정꼭대기까지 들어가는 이런 모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장을 쌓을 때 세 계단까지는 네 벽과 평행하는 사각형을 쌓았고, 그 위의 다섯 계단은 네개의 삼각고임을 써서 8면으로 쌓아 나갔다. 각 계단은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게 쌓아 벽화를 그릴 자리를 남겼고, 마지막에 큰 돌로 천장 입구를 막았다. 천장벽화도 그 제작기법은 네 벽과 같다. 회벽을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사실적인 그림들로 채워진 네 벽과는 달리 천장은 상징적인 그림으로 고구려인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살아생전의 모습을 담은 벽면 그림 위에는 빙둘러서 16개의 세모꼴 염화문이 그려져 있다. 이 염화문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선이라고 한다.
두 번째 단에는 연꽃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죽어서 연꽃으로 환생한다는 불교적 의미가 강하다. 세번째 단에는 주인공을 신선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상서로운 동물, 백호와 청룡 그리고 주작이 사면에 그려져 있다. 즉 신선들은 주인공이 죽어 나쁜 곳으로 가지 말고 신선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부정을 막는 수호신인 셈이다. 이처럼 고구려인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현세에 누렸던 삶이 내세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전호태 교수 인터뷰
“거문고 타는 신선이나 글을 쓴다든가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 신선들은 기본적으로 연꽃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연꽃이라는 것은 불교의 개념에서는 내세 정토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천정부의 하단부는 연꽃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장 훑고 저승세계가 한층 깊어진 4단부터는 연꽃은 줄고 신선과 사신을 형상화한 그림들이 주류를 이룬다. 봉황과, 사람의 얼굴을 한 하늘나라의 새, 그리고 그 새와 노니는 신선들. 윗단의 벽화는 주인공이 신선이 돼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하늘나라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전호태 교수 인터뷰
“무용총 벽화는 불교적 내세관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것은 5C 고구려의 불교가 유행하면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 불교적 내세관 외에 사신 신앙과 관련한 표현도 있고 신선신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그런 모습도 무용총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무용총에서 고구려 내세관이 몇 단계 변해가는 축약과정을 우리가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죽음은 단지 육신의 소멸일 뿐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 움직인다고 여겼다. 그래서 무덤은 산자와 죽은 자가 헤어지는 곳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가 신선으로 다시 환생하도록 이어주는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고구려 고분 중에서 무덤 속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분은 모두 95기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스물두개의 고분에는 천장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무용총 천장벽화에도, 자세히 보면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그림들 속에 별자리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용총에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그리고 동쌈성과 서쌈성 등 총 26수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구려는 자체 천문대가 있어 일본에 전해 줄 만큼 천문지식이 뛰어났고, 그 천문체계도 서역이나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독창성의 싹이 바로 이 무용총 별자리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합니다.
언뜻 봐서는 어느 것이 별자리인지 찾아내기가 힘들다. 꼬리로 이어지는 둥근 원들이 사실은 별자리다. 동서남북을 나타내는 별자리는 대개 백호나 청룡과 같은 사신과 함께 그려져 있다. 붉은 빛 해 속에 검은빛의 가마귀는 해신을 뜻한다. 흰빛 달 속에 엎드려 있는 두꺼비는 달신이라고 한다. 무용총에는 북두칠성, 남두육성과 같은 별자리와 청룡, 백호 등의 사신과 해, 달이 늘 함께 나타난다. 이것이 고구려 천문도의 특징이다.
김일권 인터뷰
“고구려의 천문 사상에 가장 큰 특징이라면 삼중천문방위체제라는데 있습니다. 해와 달 그리고 사신도 또한 사방위를 뜻하는 별자리 그림 이러한 세 가지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천문사상을 표현하는데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방위별자리라는 것은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 아주 고구려적인 전통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용총의 별자리는 덕화리 2호분에 가서 네 방위 체계가 보다, 더 정확하고 정교해진다. 약 100년 동안 고구려인들의 천문체계가 그만큼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고구려의 천문체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별자리가 남아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
고구려 천문도의 흔적이 다시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천년 후 조선 초 태종 4년에 만들어진 이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적도, 황도, 그리고 북극원과 경도선까지 그려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다. 이 천문도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유는 기록 때문에 알 수 있다. 권근은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될 때 강물에 빠진 천문도의 탁본을 토대로 일부 달라진 별자리만 보완해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일권 인터뷰
“이러한 내용은 조선시대 천문도가 고구려의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고구려 시대의 천문학 수준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고구려와의 연계성도 짐작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이 완성시킨 천문도의 모습은 어디에 남아있을까? 얼마 전 일본에서, 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토라 고분의 천문도가 공개됐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계 최초의 천문도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기토라 천문도는 당시 일본의 천문지식으로 봐서 독자적으로 그렸다고는 보기는 힘들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가지고 있는 최초의 천문도는 17C에 그려진 것이다. 그래서 기토라 고분은 세계 최초의 천분도로 알려진 중국의 순우 천문도나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원본이랄 수 있는 고구려 천문도를 본 따 그렸을 확률이 높다. 박창범 교수는 기토라 고분의 별자리를 가지고 관측지점을 알아냈다.
박창범 교수 인터뷰
“그래서 계산을 해보면 관측자의 위치가 ‘위도 39도에서 40도 사이에 있다’하는 내용을 우리가 알아낼 수 있죠. 그런데 그런 위도 상에 있는 나라는 바로 당시에 고구려에 해당됩니다.”
북위 39도의 유력한 관측지점은 한반도의 평양이다. 평양은 당시 고구려 수도다. 그리고 중국은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과는 거리가 먼 만리장성이 있는 유타이산이라는 곳으로 나타났다. 수도 아닌 그것도 변방지역에서 별자리를 관측했다고 보긴 힘들다. 기토라 고분의 네 벽에 고구려 벽화의 특징이랄 수 있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이것도 기토라 고분이 고구려 벽화 영향을 받아 축조됐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이 밖에도 7세기 초에 만들어진 기토라 천문도는 천상열차지도에 원본이 됐던 사라진 고구려 천문도. 그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쌍삼성이 그려진 기토라 고분의 별자리 모양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권 인터뷰
“북두칠성, 남두육성, 동쌈성, 서쌈성이라는 사방위 별자리 구조는 현재까지 중국에서는 거의 확인하기 힘든 형태입니다. 중국과 다른 별자리가 그려졌다는 사실들은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문지식을 구축하는데 많은 심혈을 기울인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무용총 별자리는 이런 고구려의 독창성이 싹트는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별자리가 독창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고구려가 자기 나름에 독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무용총이 축조된 그 시기, 광개토왕이 영토를 넓혀가던 그때 고구려는 자기중심의 천하관을 완성해 갔다. 광개토왕비에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 추모왕을 하늘이 낸 자손이라고 본 것이나, 모두루 묘지에서 고구려의 연원을 하늘과 일월이라고 표현한 등이 바로 중국과는 별개로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봤다는 증거다.
노태돈 교수
“이런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은 고구려인들의 대외인식에 있어서 독자성과 아울러 개방성을 함께 동반하였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고구려 문화에서 보이고 있는 독창성과 아울러 풍부한 국제성이 바로 이러한 고구려인들의 천하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고구려의 이런 이야기들이 이 무용총 벽화 속에 담겨져 있다.
'세계의 중심은 고구려다'
'자신들은 하늘의 자손이다'
이렇게, 당시 고구려인들은 선민의식이 유달리 강했고, 호방한 기질과 어우러져 드디어 5세기 말에는 주변국들을 정벌해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고구려인들의 이야기가 사실은 이 무덤 안에 벽화의 모습으로 살아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에게 고구려가 잊혀져가면서, 살아있어야 할 역사마저도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그 화려한 모습을 다시 눈여겨보죠. 그리고 벽화를 남긴 1500백 년 전의 고구려인들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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