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백제, 벌거벗은 일본의 옷을 입혀 주다!

설레임의 하루 2009. 5. 22. 00:19

*출처:다음블로그-할 말하는 대한민국  글쓴이-용화산      http://blog.daum.net/kone1/9097373

 

 

 

  

 

 

백제, 벌거벗은 일본의 옷을 입혀 주다!

日本書紀에는 오우진(應神) 14년, 百濟王이 재봉사 진모진(眞毛津)을 보내 주었는데, 의봉(衣縫)의 시조라고 했다.

재봉사를 보내준 것은 百濟 皇帝가 아니고, 韓半島를 다스린 百濟侯王이다.

제 조상들이 옷도 없이 벌거벗고 살았는데도, 역사날조하면서 百濟王이 재봉사를 ‘받쳤다’고 뜯어고쳤다.

百濟 식민지 지배자의 복식담당 관리를 오복조(吳服造)라 불렀는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보면,“吳服造는 백제인 아누사

(阿漏史)다.”라고 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옷조차 스스로 만들 수 없었다.

韓半島를 침공한 新羅를 격퇴하기 위해 급히 만든 군사 植民地였기 때문이다.

  

어느 결혼식장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출처:블로그 Great Asian)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살았던 토우테이칸(藤貞幹 : 1732~1797)은 쇼오꼬오하쯔(衝口發 : 1781년 성립)에서 일본결척(日本決尺)을

인용해서 제 조상이 나체였다고 밝혔다.


응신(應神)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 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 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여름의 어느 농부의 옷차림

 

天皇 이라는 소리는 18세기 이후 역사책을 날조 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내용은 확인도 않고 侯王, 王이라는 단어만 찾아, 모조리 天皇이라고 고치는 왜(倭)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日本 列島에는 4세기 말까지도 옷이란 게 없었다.

應神이 列島에 최초의 식민지를 세운 4세기 말 까지만 해도 저 땅의 인간들은 아담과 이브처럼 발가벗고 살았다.


짐승의 가죽이라도 뒤집어쓰지? 列島에는 짐승조차 귀했다.

列島에 사는 변변찮은 동물 몇 종조차 2천 3백만 년 전, 列島가 韓大陸(東아시아)과 붙어 있었을 당시, 韓大陸에서 건너간

것이다. 또한 百濟와 新羅가 식민지를 경영할 때, 우리나라에서 온갖 동물들을 보내 주었다.

壬辰倭亂 때에는 倭奴들이 우리나라 文化材를 강탈 하면서 동물들 까지 마구 포획해 갔다.

말은 4세기 말(실제로는 5세기 초)에야 阿直岐가 갖다 주었고 매는 구경조차 못했다.


닌토쿠(仁德)는 생전 처음 보는 새를 보고 百濟 王族으로 알려진 주군(酒君, 나중에 일본어가 생겼을 때부터

사케노키미라고 불렀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새요?”

그러자 酒君이 “百濟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 옵니다.”

이때 매(鷹)가 韓半島에서 처음으로 列島에 날아간 것이다.

이 매를 길들이게 하고 실제로 매가 수많은 꿩을 잡은 날, 비로소 응감부(鷹甘部)라는 부서를 설치 했다고 日本書紀에도

나온다. 한 마디로 짐승조차 가기를 거부한 땅이 列島였다.


신무(神武)가 기원전 660년에 즉위 했다고?

그 가공인물 神武는 즉위식 당일에도 벌거벗고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결척(日本決尺)에서는 그밖에도 오우진(應神) 천황 이래로 백제인들이 倭나라에 건너 옴으로써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과, 왕실에 비단옷이며 각종 의상이 보관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한복을 입은 그림까지 직접 그려서 제시하고, 이 옷이 오오사카 동부(河內國 : 카와치) 산속 옛무덤에서 파낸

것이라고 했다.

옷의 생김새는 도포로서 깃을 왼쪽으로 여미며 소매 끝이 좁은데, 이 옷을 입던 시대는 텐치 왕조(天智王朝, 661~671)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텐치 천황은 ''백제대궁''을 짓고 살았던 백제인 죠메이(舒明) 천황의 차남[天智(텐치)는 百濟 義慈帝의 3남이다.

죠메이(舒明)의 차남은 倭奴民族이 날조한 것이다]이다.

그러므로 도포로 보이는 이런 한복이 7세기까지 줄곧 이어져 온 것을 잘 알 수 있다.

 한복 그림 옆에는 ''재봉은 한복임을 알 수 있다''는 토우테이칸(藤貞幹)의 설명이 있다.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홍윤기)


토우테이칸(藤貞幹)은 18세기 사람이다. 韓服이라 함은 李氏朝鮮의 옷을 두고 한 말이다.

 양자강揚子江 이남을 明에게 주고 高麗의 복식(服飾)도 양보한 李成桂는 百濟의 복식을 베꼈다.

결국 百濟옷 이라는 것이다.

百濟侯王이 재봉사를 보내 주면서 百濟皇帝의 옷을 만들어 입게 할 수는 없다.

倭 侯王이 侯王의 복식이 아니라 皇帝의 服飾을 입을 수는 없다.

李氏朝鮮도 明의 속국을 자처하고 나섰다.

李氏朝鮮王이나 日本王이 입고 있는 옷은 百濟 侯王의 복식이다.


재봉사만 있다고, 옷을 만들 수 있는가. 옷감은 그 후로도 百濟가 보내 주었다.

당시 百濟는 韓半島를 침공한 新羅를 격퇴 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倭의 피지배계급은 그후로도 벌거벗고 계속 살아야 했다.


▲ 일본열도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에 보면, “비단인 ''견(絹)''은 4세기 초 츄우아이(仲哀) 天皇 9년에 新羅로 부터 전해 왔다고 한다.

중애(仲哀, 츄우아이) 천황은 百濟人 오우진(應神) 천황의 부왕이다”고 써 있다.

그러나 ‘같은 책 맨 앞 페이지에서 ‘應神(오우진)과 그 아들 仁德(닌토쿠)이 百濟系 최초의 정복왕이다’라는 얘기로

시작하고 있다.

應神이 列島를 정복한 것이 4세기 후반 내지 4세기 말 이라면서 어떻게 應神의 父 仲哀(츄우아이)가 4세기 초가 될 수

있는가.


날조 日本書紀에 보면, 仲哀는 9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14대 仲哀는 192~200 년까지, 15대 應神은270~310 년(여기에 +

120년을 해야 한다)까지 왕위에 있었다.

다시 말해 200년에서 270년까지 日本의 王位는 공백 상태라는 것이다.

獨逸(신성로마제국)에도 皇帝가 없던 대공위 시대(大空位時代 : 1254~1273)가 있긴 했지만, 20년에불과했고, 皇帝는

없어도 諸侯는 있었다.


應神이 왕이 되기 70년 전에 죽은 仲哀를 應神의 父라고 우기는 건 仲哀가 사망할 당시, 應神은 母(神功)의 뱃속에

있었다는 얘기다. 태어나서 70 년간을 왕이 되지 못하고 허송세월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神功은 167 년경에 仲哀를 죽이고 섭정(攝政)을 했다고 하니까, 이 당시 應神이 神功의 뱃속에 있었다고 하면,

103살 먹은 늙은이가 王位에 올라, 143살까지 왕노릇하다가 죽었다는 얘기다.

뱃속에 있는 제 자식의 父를 죽이다니, 神功은 엄청 악독한 여자였나 보다.

그런데 神功은 韓半島를 정복하고 나서 應神을 낳았다고 하니까, 369년 이후에야 應神이 태어난 셈이다.

神功이 제 남편을 죽인 건 167 년이고 제 자식이 태어난 건 2 백년 뒤인 369 년 이후니까, 날조 日本史 속에서도 應神은

仲哀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神功은 대체 누굴 섭정(攝政) 했던가. 攝政은 王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王도 없이 攝政만 있을 수 있는가.

그래서 神功이 부랴부랴 女王을 자처했나 보다.

그렇다면 日本書紀 倭奴 天皇 年代表 상에서 神功이 70년을 차지했어야 하지 않는가.

왜곡 日本史는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리뿐이다.


이 밖에도 日本書紀 연대표에는 초기에 몇 년씩 王位가 비어 있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데도 라이프 2차 대전에는 무엇이라 써 있냐하면,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124 대 天皇이 되었다.

이런 皇統은 진무(神武)까지 꽤 정확하게 더듬어 올라갈 수 있다.”


百濟가 列島에 식민지 倭를 세운 해가 395 년이다.

군사 식민지로 韓半島를 침공한 新羅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列島 최초의 국가였다.

그 전까지는 아이누族과 기원전 3세기 부터 개별적으로 列島로 이주한 韓半島人들만이 살고 있었다.

초대 侯王으로 應神을 파견했다. 395년 以前史는 中國倭史로 일본이 18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대대로 보관해온

우리나라 역사책에 언급된 기록을 베껴 쓴 것이다.


日本列島 에서는 언제부터 옷감을 만들었을까.

阿直岐(日本書紀에는 阿直伎로 기록되어 있다)가 織女 둘을 데려왔을 때다.


아지사주(阿知使主)가 구레(吳)에 가서 직녀인 한직녀(漢織女), 오직녀(吳職女)를 데리고 와서 베틀로 직조기술을 펴게

되었다.

[阿智使主......青と博徳は呉に渡り、漢織・呉織・衣縫を連れ帰ったと出ている. 오사카부(大阪府)의 역사]


완전 中國人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中國에서 전수 받았다고 하면, 아담과 이브의 자존심이 좀 회복되는가?


阿知使主는 阿直岐를 말한다. 모르고서야 누가 阿知使主를 阿直岐라 할 것인가.

阿直岐는 4세기 末이 아니라, 5세기 初에 列島로 갔다. 그러므로 阿直岐의 활동시기는 5세기다.


吳나라는 중국에 세 번 있었다. 기원전 473 년에 越나라 구천(勾踐)에게 망한 나라, 222 년에서 280년까지 존속한 나라,

902 년에서 937 년까지 있던 나라다.


漢나라는 기원전 202 년에서 기원후 220 년까지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간에 8 년에서 22 년까지 왕망(王莽)의 新나라에 의해 끊겼었다.

그런데 또 다른 漢나라가 있었다. 아, 살았다 싶었겠지?


흉노족(匈奴族) 족장 유연(劉淵)이 304 년에 서진(西晉)의 통치에서 이탈해 세운 漢이다.

유요(劉曜) 때, 국호를 趙라고 고쳤는데, 匈奴인 石氏가 세운 조(後趙)와 구별하기 위해 전조(前趙)라고 부른다.

5胡 16國의 하나로 304 년에서 329 년까지 존속했다.

또 947 년에서 950 년까지 존속한 後漢이 있었다. 後漢이라니까, 前漢도 있겠지 싶냐?

劉邦의 漢나라와 구분하고자 後漢이라 불렀다.


딱하게도 漢나라든, 吳나라든 阿直岐가 織女를 데리고 온 시기와 일치하는 나라는 없다.

日本民族은 날조를 해도 역사는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는 종족이다.

그래도 메국(米國)의 日本史 전공자들은 이날 이때까지 부득부득 實證史學에 부합하며 객관적 증거라고 우긴다.


百濟人 阿直岐가 무엇이 아쉬워 중국(이 당시 中土는 티벳고원 북부였다.

中奴들은 明 초까지도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고

있었다)이나 高句麗에서 織女를 데려올 것인가.

阿直岐는 百濟 그것도 韓半島에서 織女를 데려왔다.

어떻게든 日本이 百濟 植民地로 출발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高句麗와 中國을 끌어들인 것이다.


원래는 百濟를 高句麗로 고쳤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韓半島 북부에 高句麗가 있었다고 날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지 日本語로 高句麗와 음이 같은 吳나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상선약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