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일본사, 종이위에 존재하는 허구

설레임의 하루 2009. 5. 22. 00:14

*출처:다음블로그-할 말하는 대한민국   글쓴이-용화산인   http://blog.daum.net/kone1/9296765   

 

 

 

 

여섯번 째 역사를 왜곡하면서 보통 1000 년쯤 앞세워서 기술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고지키(古事記), 니혼쇼키(日本書紀) 뜯어 고치기가 있다. 얼마나 뜯어 고쳤으면,

일본학자들도 日本書紀가 반쯤 조작된 역사책 이라고 인정한다.

역사책이 반쯤 조작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 아닌가.

그 지경이면 역사 연구가 아니라 日本書紀 연구이다.

이노우에 미쓰시다는 “日本書紀가 韓國이나 中國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중국 역사책도 베꼈다면, 중국(?)의 일식기록도 베껴야 했다.

한 곳에 집중 되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일식기록도 베껴야 했다.

그런데 일본의 일식기록은 시대마다 강한 집중성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일식기록에서는 베낄 수가 없는 것이다.

일식기록은 모조리 우리나라 것을 베끼고, 나머지 역사기록은 중국 역사책 에서도 베꼈다?

결국 “日本書紀가 한국 외에 중국의 역사서도 기초로 만들어졌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日本書紀나 일본의 역사책은 오로지 우리나라 역사책만을 보고 썼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대부분 중국의 역사책으로 할당하다 보니까, “日本書紀가 한국

이나 중국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진” 셈이 되었던 것이다.

日本은 18 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날조 역사책을 참고서로 삼았다.

중국 역사로 할당된 것에 맞춰 중국의 영향도 받았다고 고친 것이다.

이노우에 미쓰시다는 또 日本書紀가 참고한 百濟紀는 연대를 干支로 기록 했는데, 日本書紀 편찬자가

그 기사를 이용할 때 두 바퀴 즉 120 년을 거슬러 올려 썼다고 했다.

그러나 日本書紀 편찬자가 연대를 올린 것이 아니고 18 세기에 역사왜곡학이 발흥 하면서 올린 것이

다. 일본의 일식기록이 허위 일식기록을 일률적으로 40~50 % 씩 섞였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역사왜곡은 역대 역사책 편찬자들이 한 것이 아니고, 후대에 한꺼번에 했던 것이다.

‘干支 두 바퀴를 거슬러 올려 썼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18 세기에 古事記, 日本書紀를 왜곡 하면서

120 년씩 끌어 올렸기 때문에 실제 연대를 파악 하려면 다시 120 년을 끌어 내려야 한다는 얘기다.

일례로 日本書紀에는 應神이 270 년에서 310 년까지 왕위에 있었다고 나와 있는데, 실제로는 390년에

서 430 년 전후로 왕위에 있었다는 소리다.

그뿐이 아니다.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는 日本神話と古代國家(講談社 學術文庫, 1990)에서

이렇게 반박하고 있다.

◀ 상의만 입었던 왜노들의 현재의 유습

천황의 기원을 가능한 한 오랜 옛날로 늘려 잡기

위해 있지도 않았던 천황 이름을 조작하여 추가

시켰다.

또한 참위설(讖緯說)(천지이변이나 은어에 의하

여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설)에 입각

해서 스이코(推古) 천황 9년(601) 부터 1260년

전(B.C. 660)을 진무(神武) 천황의 즉위년으로

만들었다.

이 제1대 진무 천황의 이야기도 천황가의 기원을

설명 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사실로 볼 수 없다.


列島에 출현한 최초의 통일국가(이때에도 이름

만 통일국가 였을 뿐, 百濟系 天智, 新羅系 天武

왕조로 나누어져 있었다)를 기준으로 하면,

기원전 660 년 으로 날조하고 있으니까 1300 년

이상 앞당겼고, 百濟系 최초의 왕을 기준으로

해도 기원전 660년 진무(神武)가 아니라, 4세기

말 應神 이니까 1000년 이상 앞당겼다,

日本史는 이처럼 엉터리다.

우리나라 三國의 초기 역사가 날조라 우긴 것도 日本史 초기 천년이 날조라서 정반대로 우긴 것이다.

하여튼 倭奴民族은 절대 창작할 줄 모르는 민족이다. 그러니 모방능력이 일취월장할 수밖에.



제 나라 역사를 1000 년, 1400 년씩 앞당겨 왜곡하는 나라가 일본 말고 또 어디 있단 말인가.

先史時代도 아니고. 하기야 일본의 역사는 5 세기 까지는 선사시대였다.

문자가 없었다는 얘기다.

王仁이 한자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서양 각국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일 때도 제 이름 하나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잉카는 문자 없이도 찬란한 고대 문명을 이루었다지만, 일본은 韓民族에 의지하지 않고는 물건 하나

만들 줄 몰라서 기원후 5 세기 까지도 생활필수품을 한반도에서 다 실어 날랐다.

 

임진왜란 당시 明과 李氏朝鮮 간의 편지내용을 보면 平秀吉이니 平行長이니 하는 말을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의 왜국에는 姓氏가 없었다는 말이다.

母系社會인 일본은 성씨없이 이름만 있었고, 父系社會인 이씨조선은 성씨를 중히 여길 수 밖에 없었기

에 이름앞에 平이라는 칭호를 쓸 수 밖에 없었다.

豊臣秀吉이니 小西行長 이라는 성씨의 창설도 후대의 역사왜곡학의 산물이다.



일부 倭奴學者는 아예 日本書紀가 百濟에서 만들어 졌다고 엉뚱한 주장을 하면서 책임을 우리나라에

전가하기도 한다.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은 百濟 植民地史에 관한 역사책은 古事記이다.

日本書紀는 新羅의 植民地史를 쓴 책이다.

단적인 증거로 日本書紀의 일식기록 부터 新羅의 일식기록이다.

百濟는 504 년에 중국 대륙 남부를 高句麗한테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므로 日本書紀가 百濟紀를 참고 했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百濟紀를 참고한 古事記의 내용을 日本書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百濟 멸망 후 列島에 온 百濟人들이 古事記를 쓴 것은 명백히 本國史와 植民地史를 구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그냥 百濟가 축소되어 列島로 옮겨 왔다고 써도 될 것을 굳이 古事記를 썼다

는 것은 本國과 植民地가 다르고 列島를 본국의 연장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식 때문이다.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自國史를 폄하해서 植民地史를 높였을까.

歷史歪曲은 國學 발흥 후에 진행 되었다.

18세기 이후 소위 국학자들 이란 인간들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저마다 조작 하면서 점점 더 허구

쪽으로 나아가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고작 하는 짓거리가 자신들이 한 역사왜곡에서 면탈하기 위해 먼 조상에게 책임을 떠 넘긴단 말인가.


백제계인 안마려(安磨呂)가 쓴 고지키(古事記)는 백제 편중의 역사서였다.

이에 신라계가 반발하자 다시 니혼쇼키(日本書紀)를 내놓은 것이다. 이 책들은 편술 당시에는 삼한,

삼국인들의 족적을 충실히 수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일본의 역사는 없다.)

古事記, 日本書紀 편찬자는 일본 역사를 쓰려 했던 것이 아니라, 百濟와 新羅의 植民地史를 쓰려고

했다. 고작 식민지사를 기록하면서 자국의 역사를 폄하할 것인가.

에도 시대 중기의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부나가(本居宣長)가 30 여년에 걸쳐 저술(?)한 고지키(古事記)

全, 보증고지키全 등에서 고대 한국과의 관련 역사를 왜곡시켜 놓더니, 한국병탄을 호시탐탐 노리던

군국주의 체제하의 메이지 시대는 더욱 난도질 당했다. 그 후에도 어용학자들이 총동원 되어 한국침략

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계속 변조 되었다(일본의 역사는 없다)

원래 古事記와 日本書紀에는 한국의 식민지라는 기록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다 뜯어고친 다음 “古事記와 日本書紀를 읽고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을 찾아냈다”고

철면피들이 주장했다. 정말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이 있었다면, 18 세기에 와서야 겨우 찾아낼 수

있는가. 5 세기 까지 벌거벗고, 6 세기 까지 흙구덩이에서 뒹군 것이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인가.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은 오로지 종이 위에서만 존재하는 허구다.

李成桂가 韓半島에 우리나라를 모두 집어넣고, 淸이 中國倭의 기록을 삭제해 버리자, 中國倭도 덩달아

종이 위에서 韓半島로 이주한 셈이 되었다.

그것을 두고 日本倭의 韓半島 진출을 창작해낸 다음,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이라 불러온 것이다.

상선약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