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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

설레임의 하루 2009. 5. 1. 04:57

 *출처:다음카페-허둥허둥   글쓴이-허둥허둥  http://blog.daum.net/acaus/15080107

 

 

 

 

중국 고대의 왕조(BC1600~BC 1046).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한다. 하(夏)·은·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은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서,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 할 수 있다. 은나라 전기는 기원전 1600년부터

1300년까지이고, 도읍을 은으로 바꾼 은나라 후기는 1300년부터 1046년까지이다.

 

은허

중국 허난성[河南省(하남성)] 안양현[安陽縣(안양현)] 샤오툰[小屯(소둔)] 부락 부근에 있는 고대

은(殷)나라 왕조 도읍의 유적. 이 유적에서 출토된 귀갑(龜甲)과 소뼈가 용골(龍骨;말라리아 열병에

쓰이는 약)로 베이징[北京(북경)]에 있는 약방에서 팔리고 있었는데, 1899년 이것을 사들인 유악이

이 뼈에 고대문자(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때부터 고대사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뤄전위[羅振玉(나진옥)]·왕궈웨이[王國維(왕국유)] 등의 연구로, 갑골문자는 은왕조의 점쟁이가

왕가를 위하여 점친 복점(卜占), 즉 점괘임이 밝혀졌다.

뤄전위는 1915년 직접 갑골문자가 출토된 샤오툰부락을 방문하여, 갑골문자 외에 청동기와 옥기

(玉器)를 발굴하였다. 1928년에는 중화민국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가 둥쭤빈[董作賓(동작빈)]

과 리지[李濟(이제)]를 중심으로 은허의 발굴을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1937년까지 15회에 걸친

대발굴 작업이 계속되었다.

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에 의하여 1950년부터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은허 가운데 주거유적은 주로 샤오툰부락 북쪽 위안허강[洹河(원하)]에 접해 있는 대지(臺地)에서

나타났다. 토단(土壇)을 쌓아 올린 위에 궁전 초석이 놓여 있고 토단 주위에는 수많은 구덩식 

[竪穴式(수혈식)] 주거유적이 있다. 신을 모신 종묘(宗廟)와 제왕·왕족의 주거는 땅 위에 있었으나,

일반 백성은 지하의 구덩에서 거처했다. 샤오툰 교외에서는 또 도기(陶器)·골기(骨器)·동기(銅器)

등을 만드는 장인의 공장·주거지가 많이 발견되었다. 한편 위안허강 북쪽의 허우쟈좡[侯家莊 

(후가장)]과다쓰쿵촌[大司空村(대사공촌)]에서는 은나라 왕조의 왕릉으로 보이는 수많은 거대한

무덤이 지하 10m 이상 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왕과 왕족들의 널[棺(관)]은 많은 시종과 비첩의

딸려묻음[殉葬(순장)]에 둘러싸여 있다. 널방[墓室(묘실)]에는 청동기·옥기 등 보물이 들어 있었는데, 호사스러움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떤 곳에는 말·원숭이·코끼리 등 동물만 있는 갱(坑)이

있는데, 생전에 기르던 짐승들까지 묻은 것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은나라 후기의 청동기는 창과 같은 무기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제사드리기 위한 주기(酒器)·식기·

악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조상을 상징하는 이상한 괴수(怪獸) 무늬가 빈틈없이 새겨져 있는데, 그 정교한 솜씨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왕과 귀족들은 4두마차를 타고 다녔으며, 전쟁은 전차전이었다.

무관촌(武官村)의 큰 무덤에는 말뼈와 함께 마차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궁전 곁에 있는 구덩에서는

대량의 귀갑과 소뼈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은나라 점쟁이가 왕조의 조상에 대한 제사 의식을 점친

점괘가 새겨져 있다. 이 갑골문자의 해독과 왕릉의 유물에서 왕후나 귀족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뒤에는 샤오툰촌 북부의 궁전터보다 오히려 주변지역 조사에 중점을 두어 백성들의

주거지와 동기·뼈연장의 제조공장에 대한 유적 및 수많은 중·소 분묘를 발굴하였다.

이 가운데에서도 1976년 궁전유적 남서쪽의 은허5호분의 발견은 학계에 큰 충격을 준 대사건이었다. 

 

 전에 발굴된 무덤들은 거의 전부가 도굴당한 데에 반하여 이 5호분은 완전한 원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아름답고 정교함의 극치를 이룬 468개의

청동기와 755개의 옥기를 비롯한 풍부한 유물들이 있었는데, 특히 청동기 가운데에는 부호(婦好)라는 

사람이 제조하였다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것이 많이 발견되었다.

부호는 갑골문에 의하여 은허 제1기 무정왕(武丁王)의 왕비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제작 연대가

분명해지고 유물연구에 기준이 되었다.

이와 함께 1971년에는 샤오툰촌의 남부에서 4800여 편의 갑골문자가 출토되었다.

 

여기에는 제4기의 무을왕(武乙王)의 갑골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대의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뒤에는 중국 전지역에 걸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각처에서 은나라 때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은나라 중기의 허난성 정저우[鄭州(정주)]의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유물 가운데에는 안양의 왕릉에서 출토된 것보다 원시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어서, 청동기의

발달 경로를 밝히게 되었다.

은허유적은 그 규모와 출토된 청동기의 호화로움 등 미술품으로서도 우수하여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의

신전과 함께 고대문화 보고의 하나로 꼽힌다.

 
성립과 계보】

 전설에 따르면 하왕조는 중국 전토를 휩쓸었던 대홍수를 잘 다스렸고, 전국을 9개 주(州)로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완성한 우(禹)의 자손을 왕으로 섬겼다.

그로부터 17대째가 되는 걸왕(桀王)은 전제정치로 인하여 중국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은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天乙)은 백성의 요망에 따라 걸왕을 쳐서 멸하고 은왕조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이 탕왕으로부터 29대의 왕이 잇달아 중국을 통치하였다.

이 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에 사마천(司馬遷)이 고대의 계보에 따라 《사기(史記)》
 

〈은보기(殷本紀)〉속에 기술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 

[小屯村]의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갑골문자는 은왕조의 점술사가 은나라  

선조의 제사를 점쳤던 것이었으며,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는 《사기》에 

전하는 은왕조의 계보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1. 문화
은왕조는 개조인 탕왕 이래로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으나 20대의 왕 반경(盤庚)이 은허로 옮긴 이후

31대의 주왕(紂王:帝辛)이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은허에 정주하였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각지에서 은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는 전기 ·중기 ·

후기로 구분한다.

전기의 유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허난성 얼리터우[二里頭]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이보다 앞선 허난성 신석기시대 룽산문화[龍山文化]의 영향을 받아, 은대의 최전기 

(最前期)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이 유적들은 허난성 중부에서 산시성[陝西省]에 이르는 황허강 

[黃河] 연변의 황토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중기의 유적 분포지역은 이보다 확대되어 있으며 그 대표는 허난성 정저우[鄭州]의 유적이다.

후기에 이르면 서쪽은 산시성 치산현[岐山縣]에서 동쪽은 산둥성[山東省]의 지난[濟南], 북쪽은

허베이성[河北省] ·산시성[山西省]에서 화이허강[淮河] 유역에 걸치는 화북평원의 거의 전부와

양쯔강[揚子江] 중류에까지 확대되었다.

요컨대 은허시대의 은문화는 이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은왕조는 약 1,700 m의 토벽으로 둘러싸인 정저우를 중심으로 하여 대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문 밖에서는 청동기 ·도기(陶器) ·골기(骨器)를 만드는 장인의 공장과 주거가 발굴되었다.

반경이 은허로 천도한 이후, 귀갑과 우골에 새겨진 점복문(占卜文), 즉 갑골문자의 기사(記事)와 궁전 ·

묘능의 유적과 유물에 의하여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은의 여러 왕은 타이항산맥[太行山脈]에서 동방으로 흘러가는 위안허강[洹河]의 굴곡진 지점에,

하안(河岸)의 단애(斷崖)를 북 ·동쪽으로 업고, 서쪽으로는 도랑을 파서 북서의 유목민에 대비하는

견고한 성을 쌓았다. 샤오툰촌 북쪽의 대지 중앙에는 토단(土壇)을 쌓아 올려, 위에 종묘(宗廟) · 

궁전을 건축하였다.

제왕이 죽으면 그 시체는 위안허강의 북안 허우자좡[侯家莊]의 지하 13 m에 200 m2 이상의 큰 널방
 

[墓室]을 만들고,생전에 애용했던 거대하고 정교한 청동기를 비롯하여, 옥기(玉器) ·석기 등을

껴묻거리[副葬品]로 함께 매장하였다.

호화로운 청동기는 고대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예술품이지만, 그보다도 이

널방의 안팎으로 산재해 있는 다수의 인골군(人骨群)이 고고학자를 놀라게 하였다.

이들은 소수의 시종(侍從) ·시녀는 있지만 대부분은 병사(兵士)로서, 왕에게 순사(殉死)한 것이며,

그 수는 한 왕묘에 500명에서 1,000명에 달하였다.

은의 왕은 점복(占卜)으로 신의(神意)를 받아서 백성을 통치하는 종교적인 원수(元首)였다.

또한 이민족을 정복하여, 그들을 노예나 병사로 삼았던 것 같다. 이민족 가운데 북서의 고방(苦方) ·

토방(土方)이라 불렸던 유목민이, 은허로 옮긴 당초의 무정왕시대(武丁王時代)의 강적이었다.

그리고 서경(西境)의 산시성에 있던 주(周)민족은 제후(諸侯)로서 은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2. 멸망
은왕조도 말기의 무을(武乙) ·주왕의 시대에 이르자, 신의 은총을 받은 나머지 방자해져서 자신이

신과 똑같은 절대자라고 믿고 혹독한 전제군주로서 제후 ·백관 ·인민들에 대하여 잔혹한 압정을

가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하여, 화이허강 유역의 인방(人方)이라고 하는 동이민족 

(東夷民族)의 국가를 정복하였다.

 

 

 
주왕이 전쟁에 국력을 다 써버린 틈을 타서 서방의 산시성에서 실력을 길러, 이 지방 제후의 인망을

얻고 있던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동진하여 화북평원으로 내려왔다.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더욱 동진하여 은나라 주왕의 대군을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무찌르고 은의 수도에 입성하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대신하여 주왕조를 일으켰다.

무왕은 은의 왕족인 무경(武庚)을 위(衛)에 봉하여 뒤를 잇도록 하였으나, 무왕이 죽은 뒤 반란을

일으켜 성왕에게 멸망당하였다.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인 은왕조는 주술(呪術)이 문화의

기조를 이루었으며, 그 결과로 죽은 왕에게 1,000명의 군인을 희생시키는 등 불합리한 체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은의 문화를 받으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주민족에게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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