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중국사서에 있는 동이족의 역사는 왜 한국사가 되지 못하는가?

설레임의 하루 2009. 4. 28. 02:40

 *출처:다음카페-산수유골에서 만난사람들 글쓴이: 如水如風    http://cafe.daum.net/baeksa./So8r/326

     

     

     

     

     

    1. 중국인들은 동이족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지나족(중국인)들은 예부터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고 불렀다.

    우리민족에게 "동이(東夷)"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14세 치우천황 때부터라 할 수 있다.

    치우 천황때 황제 헌원과 탁록을 두고 동이족과 화하족(지나족)이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중국의 <사기>와 우리나라의 <신시본기>에 나와 있는치우천황이 법력이 너무도 고강하여 큰 안개를 잘 짓고 큰

    활을 잘 쏘므로 중국인들이 두려워 하였고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을 夷(大와 弓의 合子)라고 불렀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쓸 때 이(夷)를 융(戎)적(狄)과 함께 써서 오랑캐로 알고 있으나 (우리나라 옥편에는 모두 '오랑캐 이'

    라고 되어 있음) 공자 자신도 동이가 군자(君子)의 대국(大國) 임을 언급하고 자신도 그 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기 왕제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동방을 夷라 한다.

    夷를 뿌리라 한다. 뿌리는 어질어서 생명을 사랑하여 만물이 사는 땅을 근본으로 산출됨을 의미한다.

    그러한 연고로 夷(단군조선족)는 천성이 유순하고 道로써 다스리기 쉬우며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도 있다. 따라서 공자가 9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이(九夷)의 지역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

    * 「전한서」: "조선의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남만, 북적, 서융과 다르다.

    그러므로 공자가 도가 펴지지 않음을 한탄하여 바다를 건너서 구이(九夷)나라에 살고자 하였다.

    공자가 도(道)가 펴지지 않는 노나라를 버리고 뗏목을 타고 동이 나라에 가고자 함은 이 나라에는  어진 교화가 있어서 가히

    도를 펼 수 있는 까닭이다."

    * 「산해경」 : "동이는 군자나라요, 오래 살아 안죽는 사람들이 아울러 동방에 있다."

    * 진(晋)의 시인 곽박 : "동방 어진 나라에 군자훈화가 있으니 예절로 늘 사양하기를 좋아하며 예는 이치로써 따진다."

    * 후한의 학자 허신 「설문」: "오직 동이는 대(大)를 좇으니 대인이다. 동이의 풍속이 어지니 어진 이는 오래 산다.

    군자가 죽지않는 나라가 있다하니 공자와 같은 성인도 뗏목을 타고 가고 싶어 했다."

    * 한무제 때 동방삭의 「신이경(神異經)」:"태연하게 앉아 서로 범하지 않고 서로 기리고 헐뜯지 않았다.

    사람에게 근심이 있으면 서로 구해줘 선인(善人)이라 이름했다"

    * 「이아(爾雅)」: "구이(九夷)는 동방에 있는데 태평의 사람이라 칭한다. 그들은 인(仁)하여 인간을 사랑한다.

    그런데 인간을 사랑하는 인(仁)은 지기(地氣)에서 나왔다."

    한(漢)나라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夷는 동방사람인데 大와 弓의 두 글자로 된 글자다"라고 되어 있고 <설문통훈정

    >에는 "仁은 夷의 옛글자"라고 하였으니 "夷"字에는 용기와 어짐의 두 뜻을아울러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시전에 보면 동이(東夷)의 이(夷)자를 '떳떳하다, 편안하다' 라고 풀이하였고, 사기에는 '상하다, 죽이다' 등으로

    쓰였다.

    하늘이 열린 이래 장구한 세월을 동이족의 지배를 받아 온 중화족은 동이를 대인으로 우러러 보면서도 계속되는 정복 정치에

    시달려, 나중에는 동이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자연히 동이족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 동이의 뜻을 오랑캐로 바꾸어 해석하더니, 나중에는 도둑의 뜻으로까지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이 차츰 우리민족의 힘이 약해져 사대주의로 치닫다 보니 '오랑캐 이'로 굳어져 버린 것인데 아직도 우리는 스스로를

    "오랑캐"라고 부르고 있는 셈이다.

     

    2. 중국의 삼황오제국은 환웅시대와 단군시대 우리나라의 제후국 

    「제왕세기」 : 태호복희가 동방(震) 출신이되 왕위를 취한 바 없을 때의 벼슬(位)은 동방에 있다.

    「후한서」<동이열전> : "東方曰夷(동방을 일컬어 夷라 한다)"

    「사기」<정의> :"배송지가 평하기를 3황 5제를 天子라 칭한 본기는 제후로서의 世家라야 한다"

    「초사」: "東皇太一(동방의 황제가 최상 최고의 임금이다)"

    이상에서 중국에는 황제국이 없었으며 제후국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대 교수 전해종은 중국에서 帝 또는 天의 관념을 사용할 수 있는 제국으로서의 기록은 은(殷)나라 말기부터라고 한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환인천제의 桓國 때부터 天帝칭호를 사용했다.

    중국학자 원가는 3황 5제 중 요임금이 부사년 등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동이족의 전설적 天帝로 인정하고 있는 '제준'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내용을 그의 저서 <중국 고대신화>에 적고 있다.

    <태평어람><산해경>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순임금 또한 제후에 불과했다. 『서경』 「순전」에 나오는 "東巡望秩 肆覲東后(동순망질 사근동후)"

    즉 동쪽으로 순행해서 망 제사를 지내고, 드디어 동방의 임금님을 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뵙는다는 것’은 아랫사람이 높은 사람을 만날 때 쓰며, ‘근(覲)’ 자를 쓴다.

    ’ 따라서 이 구절은 순임금이 동방의 임금 즉 단군을 찾아 뵈었다는 것이다.

    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 .... 遂見東方君長(수견동방군장)"이라 하여 (순임금이 요임금으로부터 통치권의 법통을

    계승한 첫 2월에) 동방의 군장께 인사드리러 왔음을 다른 정사의 기록과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요, 순임금 모두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3. 동이족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중국을 높이고 외국을 깎아 내린다는 춘추필법에 의한 중국의 사서에서도 숱하게 등장하는 동이족의 역사가 왜

    우리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대부분의 식민사학자들이 동이족을 우리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동이족의 한 지류에 불과한 예맥족을 우리 민족의

    정통적인 선조족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어떻게 해서든 일본의 역사 상한 역대인

    700년 경의 신무왕(실제 연대와 수 백년의 차이가 나는 조작된 연대의 일본 초대 천황)연대보다 낮추려고 획책한 일본

    식민사관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인것이다.

     

    <후한서 동이전>, <삼국지 동이전>은 물론 <수서(隨書)> <구당서(舊唐書)><통전> 등 대부분의 중국 역사서들도 우리

    민족을 동이족으로 보고 있지 예맥족으로 보고 있지 않다.

    특히 <동이전>이 아니라 조선전에서 우리 역사를 다룬 반고의 한서(漢書)도 조선족을 동이족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사기 한서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고조선의 제후국인 예맥국의 군장 남녀를 동이족으로 기록했다.

    중국의 역사학자 문숭일도 그의 논문 <예맥문화급기사료(濊貊文化及其史料)>에서 "예맥은 동이민족의 한 갈래로서

    소호금천씨의 민(民)에 속하며, 순, 은과 더불어 혈통상 관계가 매우 깊다"고 적고 있을 정도이다.

    순임금이나 은나라가 소호금천의 후예이며 동이족의 일원이라는 것은 중국역사학계의 통설이기도 하다.

    또한 1975년 4월에 자유중국의 희늑격씨는 자신이 저술한 <중국사승중미상제국고증(권7)>

    군자국 고증에서 고대중국역사에 기록한 군자국은 어느 나라인지 미상이었다.

    그런데 중국 <천문지>와 <상서우공(尙書禹貢)> 등 문헌을 고찰하면 그 군자국은 바로 한국이다라고하였다.

    <상서우공(尙書禹貢)>은 4천년 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중국인이 4천여년 전에 한국을 군자국이라 칭한 사실을 알 수 있다.

     

    4. 결론


     

    몇해전, 조선일보에서 미국의 지방지 편집장인 재미교포 2세와 인터뷰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에게 주어진 질문은 "당신은 한국과 한국의 역사.문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였었다.  

    그 지식인의 대답은 "중국 문화역사의 곁가지 문명에 불과한데, 한국의 문화와 역사라고 말할 게 뭐 있는가?" 였다.

    국조단군과 단군조선의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 시대를 신화의 시대로 낙인찍어, 우리역사에서 제외해 버리면 우리한테

    남는 것은 결국 치욕적인 수난의 역사, 배신의 역사, 외세의 힘에 의해 움직였던 작은 나라의 역사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일제가 그렇게 기를 쓰고 단군과 단군조선을 신화로 만들려 애썼던 까닭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이 원했던 바대로, 한국인의 반 이상은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을 "꾸며낸 옛날 이야기 속의 인물 정도"로

    알고 있으며, 한국은 수난의 역사만 간직한 답답하고 못난 나라의 모습만 남아 있다.

    과연 그런가?

    단군 47대 성조들의 역사기록을 보면 이 때는 동아 대륙을 위풍당당하게 통치하던 전성기로서 요,순, 하, 은, 주나라, 기자

    조선 등에서 사절을 보내고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쳐온 사실(史實)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순임금 동방의 임금을 찾아 뵈었던 것이다.(史記, 書經) 환웅천황으로부터 배달의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의 건국은

    단군왕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왕침의 「위서」에 적혀 있으며「국조실록」「산해경」「관자」「회남자」「성경통지

    (盛京統志)」같은 중외고금의 문서 역사에 밝혀져 있다.

    이러한 여러 문서에서 단군과 조선의 이름이 나오고 있음은 물론이고 「한서(漢書)」에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

    (殷道衰 箕子走之朝鮮)"고 했으니 이것은 은이 망하기 이전부터 조선국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 환단고기에는 왕검성이 창려(昌黎)라고 했고, 「명일통지(明一統志)」에도 "조선성이 영평부 북평(북경)경내에 있다.

    (朝鮮城在永平府境內)"고 했으며, 현재의 중국지도에도 조선성이 북평북쪽에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중국의 사서를 통해서도 단군조선의 실존이 증명되어지지 않는가?

    중국사서에서 찾아 뵈었다는 동방 임금도 없었던 인물이라 하고, 중국의 史書에 숱하게 등장하는 동이족의 나라도 사라지고

    없고, 공자가 중국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며 "바다 건너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그 동이국도 역사에서

    사라지고 없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의 나라 역사를 깎아 내리는 춘추필법으로 역사를 기록한 중국인의 기록에서도 우리 민족의 찬란했던 흔적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강단 사학자들은 중국의 정사『25사(二十五史)』조차도 무시하고 우리나라에는 사료가

    없다며, 고고학 타령만 하고 있는 것이다.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강단 사학자들 중 중국의 정사『25사(二十五史)』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자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혹시 사실은 아닐까?

    물론 『환단고기』나 『규원사화』『단기고사』등이 100% 사실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 시대에 직접 살아서 그 사건의 전말을 전부 목격했다면 모를까, 남의 손에 의해 기록된 글을 100%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몇몇 기록들은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상의 그런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그 책 전체를

    부정하고, 그 책에서 기록한 모든 역사를 허위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사마천의 『사기』나 우리 나라의『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왕조실록』등이 전부 100% 진실 그대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각각의 역사서에는 사실도 있을 것이나 기록한 사람의 사관 그리고 여기에 어느 정도의 가필도 섞여있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적 여건에 따라 진실이 은폐되고 사실과 다르게 왜곡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만 하더라도 앞서 언급했듯이 왜곡이 심하지 않은가?

    그러나 참고할 부분은 참고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역사의 본모습이지만 지금 눈앞에 과거가 있지 않기에 우리는 현재 확인할  있는 유물과 역사서에서 과거의 진면목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사서를 못믿겠다면 중국사서라도 연구해서 우리 역사를 조금이라도 밝혀낼 생각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환단고기나 단기고사 규원사화와 같은 우리민족의 사서들을 중국사서와 비교해서 거기서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은 주로

    재야사학자들의 몫이 되어 있고 강단의 사학자들은 환단고기같은 것은 이러저러해서 위서니까 못믿겠고 그러니까

    단군조선의 역사도 못믿겠다고 한다.

    이들이 얼마나 못미더우면 그렇게 많은 재야사학자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

    해방 직후 서울대 사학과는 정원미달이어서 전부 실력없는 사람들만 들어갔고 그들이 현재 강단 주류학파의 거두들이라는

    재야사학자들의 비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런 자들과 기독교의 맹신도들이 결합하여 우리 역사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서문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이다.’ 나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몸뚱아리와 같고, 역사는 인간의 혼과 같다는 말이다.

    즉, 역사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혼이 빠진 민족과 같은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 단군은 신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많아졌다고 한다.

    기독교인들과 식민사관의 주구(走狗)들은 단군을 신화라 외칠 것이고, 일반국민들은 무관심할 것이니 이런 현상은 더욱 더

    심해질 것이다. 오호 통재라.

     

    펌: 네이버 블로그 Network of Corean History 조의선인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