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수수께끼의 나라- 선우·중산

설레임의 하루 2009. 4. 7. 04:46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心濟

 

 

 

 

 

 

수수께끼의 나라- 선우·중산

역시 후반부로 가니 이형구 교수도 사대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晉이 조선을 치기위해 중산에게 길을 비켜달라하고 肥를 쳤다고 하는데 선우는 고조선의 제후국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합니다.

이사람도 고조선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주나라가 오랑캐의 칩입을 피해 낙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내용 ,天子가 주나라 라는 내용들이 중국사서의 기록에 충실한서술인데

이사람이 한국의 고기등을 보고 비교하였다면 이런 소리를 하지 않았을것입니다. 

춘추시대동안에 고조선도 전쟁의 분위기에서 국가를 무장했겠지만 燕나라가 고조선에 덤벼들길 수차례였지만 고조선병력에 수도가

초토화된 기록과 칠웅에 속한 제나라가 고조선에게 화해를 청하는 기록을 무시한 결과이고 匈奴,山戎,東胡 전부 고조선을 칭하는 

것으로 엄연히 단군이 군사를 지휘하여 이들을 패퇴시킨 기록이 있으니,고조선의 절대적 지배력,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면서

서로 물고 뜯는 난타전이 300년 동안 벌어진 시대가 바로 춘추 전국시대 입니다.(운영자 주)    

 

전국7웅’은 왜 작은나라 ‘중산’을 왕따시켰나.
1974년 11월,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 싼지셴(三汲縣). 수리공사가 한창이던 이곳에서 놀라운 발굴이 이뤄진다.

춘추전국시대 신비의 나라였던 중산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1974년 중산국의 실체를 드러낸 허베이성 핑산 싼지셴 유적.

이곳에서 중산국의 전성기에 해당되는 중산왕 착(錯)의 무덤을 비롯, 3기의 왕릉이 확인됐다. 정(鼎·예기로 쓰인 솥)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중산국이 조나라와 연나라 등 강대국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이형구 교수 촬영

 “중산왕인 착(錯·조 라고도 읽음)의 왕릉을 비롯, 3기의 왕릉이 확인되었고, 왕릉에서 출토된 정(鼎) 등 각종 예기에서 전국시대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어요.”
이제 일찍이 ‘전국시대의 중산국사략(대만대 학술지 ‘사원(史原)’ 11호, 1981)을 집필한 바 있는 이형구 교수(선문대)와 더불어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춘추전국시대, 그 약육강식의 혼란기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던 소국, 그러나 비록 작지만 강했던 나라,

바로 ’선우(鮮虞) 중산(中山)국‘의 신비를 풀어보자는 이야기였다.

왜 하필 이 조그만 나라를 주목하느냐. 바로 이 나라가 바로 동이의 나라요, 기자(箕子)의 후예가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주변 강대국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불꽃처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다 사라진….

■ 전국시대의 개막

이제부터 그 ‘선우중산국을 만나기 위해’ 춘추전국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보자.

BC 1046년 무렵. 동이의 나라 은(상)을 멸하고 나서 들어선 한족의 (서)주는 BC 770년 오랑캐의 침입을 피해 낙읍(洛邑·지금의 뤄양)

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른바 (동)주시대의 개막이다.(자세한 내막은 4월12일자 경향신문 23면 참조)

천자의 추상 같은 권위가 무뎌지고 170여개국의 나라가 난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이 모든나라들이 제후국이라는 이름으로 주나라를 천자로 인정했다.

다만 제후국 가운데 특히 강한 나라의 제후(覇)가 천하를 쥐락펴락했으니 그것이 바로 ‘춘추5패’이다.

춘추시대라는 말은 (동)주 시대의 전반부 즉 BC 770~BC 475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공자가 쓴 춘추(春秋)는 엄밀하게 말해 노(魯)나라 은공(BC 722년)~애공(BC 481년)의 242년 역사를 기록한것이다.


 

그 뒤를 이은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일반적으로 주나라 위열왕 23년(BC 403년)부터 진(秦)시황의 천하통일(BC 221년)까지를

일컫는다. 사연을 들춰보면 이렇다.

춘추시대 가운데 중국 중원에서 강대국을 형성했던 제후국인 진(晉)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이 강대국의 권력이 차츰 왕(제후)이 아니라 6경(卿·대부)으로 넘어간다.

지(知)·한(韓)·위(魏)·조(趙)·범(范)·중항(中行)씨였다. 6대부는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인다.

마침내 한·위·조씨가 연합, 범·중항씨에 이어 지씨마저 몰락시켰다.(BC 453년)

그러자 명목상의 천자에 불과했던 주 위열왕은 한·위·조씨를 제후로 봉한다.

(BC 403년) 역사는 이를 두고 삼가분진(三家分晉),즉 세 집안이 진나라를 분할했다고 기록한다.


이때부터 원래의 진(晉)나라는 물론 천자국 주나라의 권위까지 완전히 상실됐고, 둘 다 한낱 소국으로 전락한다.

천하는 본격적으로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미증유의 전쟁시대, 즉 전국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춘추시대부터 살아남은 4국, 진(秦)·초(楚)·연(燕)·제(齊·제나라는 姜씨에서 田씨로 왕통이 바뀌었다.)와 진(晉)나라에서

분열된 신흥강국 한·위·조 등 3국을 합해 바로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한다.

이 전국시대는 약육강식 시대의 절정, 그 자체였다.

역시 예약이 무너지고 전쟁의시대가 도래했다는 춘추시대엔 그나마 천자인 주나라의 눈치를 보는 측면이 강했다.

누구도 감히 천자를 칭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단 하루라도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 “중산국을 왕따 시켜라!”

자 이제, 이런 배경을 알고 선우·중산국 이야기를 풀자.

먼저 전국책(서한시대 유향이 전국시대 유세객들의 책략을 모은 책)을 보자.

착왕 묘에서 확인된 솥. 다리는 철제(鐵)로 만들었고, 몸통은 청동이다.

 

“중산이 연·조나라와 함께 왕이 되자 제나라는 국경의 관문을 닫고 중산(中山)의 사신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우리(제나라)는 만승지국(萬乘之國)이고 중산은 천승지국(千乘之國)에 불과한데, 어찌 우리와 함께 왕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가?’ 했다.”(전국책 ‘중산책’) 이는 BC 323년 다섯나라,

즉 제·위·조·연과 함께 중산국이 왕을 칭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동방의 강대국인 제나라로서는 소국인 중산국과 어찌 같이 놀 수 있느냐는 뜻이었다.

참고로 당시엔 황제(皇帝)의 개념은 없었다. 천자를 뜻하는 황제라는 말은 훗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서 황제(皇帝)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왕(王)은 곧 천자를 뜻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진 전국시대엔 저마다 천자를 칭한 것이다.

또 하나 만승이니 천승이니 개념에 대해 보자면, 만승지국은 전쟁이 났을 때 전차 1만승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 즉 천자국을,

천승지국은 제후국을 뜻하는 말이다.

제나라 왕은 ‘천승의 나라’에 불과한 중산국이 왕을 칭한 것이 못견디도록 아니꼬왔나보다.

조·위나라는 물론 연나라에 뇌물까지 주어 “(주제 넘게 왕을 칭한) 중산국을 함께 치자”고 했으니 말이다.

‘왕따’의 전형이다. 당시 중산국왕이 유세가 장등(張登)을 불러 했다는 얘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할까 두렵소이다. 왕호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대가 아니면 구해줄 자가 없소이다.

”(전국책 ‘중산책’)그러나 다행히 장등이 나서 세치 혀로 외교전을 펼쳐 당사국들을 설득시키면서 왕의

칭호를 보전할 수 있었다. 당대 중산국이 전국 7웅 가운데, 제·위·조·연이라는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슬픈 이야기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그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국 12웅(전국 7웅+宋·魯·衛·越·中山)의 하나로 꼽혔으며, 급기야 다른강대국과 함께

왕호를 칭할 수 있을 만큼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 끝내 식민지가 된 중산

이 중산국은 앞선 춘추시대에는 선우(鮮虞)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사기색은’(索隱·당나라 사마정이 사기를 주석한 책)은“중산은 옛 선우국”이라 했다.

춘추좌씨전 정공 4년조에는 “중산선우”라고 표현했고, 또 청나라 때 왕선겸(王先謙)이 작성한

‘중산국사표강역도(中山國事表彊域圖)’에는 “중산은 춘추시대에는 선우인데 중산으로 바뀌었다”고 나와있다.
선우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온 것은 BC 530년이다. 그런데 첫 기록부터가 전쟁 기록이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껴서 고난의역사를 쓸 수밖에 없는 숙명이런가. 

“6월, 진(晉)나라 순오가 회합을 가장하여 선우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해서(假道於朝鮮) 비(肥)나라를 쳤다.

10월에는 진나라가~비나라의 일을 이유로 선우를 정벌했다.”(춘추좌전)
‘가도(假道)라’. 임진왜란 때의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칠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간계가

떠오른다. 진나라 역시 ‘가도’의 구실삼아 선우를 친 것이다.

역사란 돌고 도는 것이다.이때부터 시작된 진나라와 선우의 싸움은 BC 489년까지 41년 동안 무려 8차례나 벌어진다.

물론 대부분은 진나라가 도발했지만 BC 507~BC 489년 사이에 벌어진 4차례 전쟁에서는 선우가 3승1패의 우위를 보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하지만 춘추말 전국초에는 선우가 중산국으로 바뀐다.

선우와 중산이라는 이름들이 춘추좌전이나 죽서기년(竹書紀年) 등 사서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기록상 중산의 건국연대는 상당히 늦다.

사기 ‘조세가’는 “BC 414년 중산 무공(武公)이 초립(初立)했다”고 기록했다.

세본(世本)은 “중산 무공은 고(顧)에 거주했고, 환공(桓公)이 영수(靈壽)로 천도했다”고 했다.

어쨌든 중산의 역사 역시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선우 시절엔 진(晉)이 괴롭히더니 전국시대에 돌입하자 신흥강국이 된 위(魏)가 ‘중산 왕따 작전’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위나라 초대왕 문후는 BC 408년부터 3년간이나 중산을 친다.
당시 중산을 친 이는 위나라 장수 악양(樂羊)이었는데, 마침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었다.

다급해진 중산국은 악양의 아들을 삶아 그 국물을 보냈지만 악양은 눈하나 꿈쩍 하지 않고 그 국을 마신 중산국을 친다.

중산국은 결국 멸망하고(BC 406년) 위나라의 식민지가 된다.

하지만 위나라 왕(문후)은 아들을 삶은 국을 마신 악양이 너무 잔인하다 하여 크게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신하 중 한사람이 그랬다지.

“(악양이) 그 아들의 살까지 먹었는데 누구의 살(임금을 지칭)은 먹지 못하겠습니까?”(전국책 ‘위책’)

어쨌든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중산은 남녀가 밤낮으로 껴앉고 비벼대며, 슬픈 노래를 좋아하고 질탕하며 그것이 나쁜지도 몰랐는데,

그것은 망국의 풍습”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는 망국의 역사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진부한 레퍼토리가 아닌가.

조그만 나라가 3년이나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견딜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 전국 12웅으로 뜨다

그러나 중산국은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한다.

“사기 ‘악의열전’에는 ‘중산이 위나라에 멸망 당했지만 제사는 끊어지지 않았고 후에 나라를 회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패륜의 풍습을 지닌 나라였다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없었겠지.”(이형구 교수)
어쨌든 중산국은 20여년 만인 BC 380년을 전후로 다시 복국(復國)했다.

중산 환공이라는 인물이 이때 도읍을 영수(靈壽·지금의 핑산·平山)로 옮겨 증흥의 기틀을 다졌을 것이다.

중흥군주(환공)의 치세에서 중산국은 욱일승천한다.
BC 296년 조나라 무령왕에게 최후 멸망을 당할 때까지 80여년간 남부럽지 않은 전성기를 이룬다.

복국(復國) 이후 ‘중산국 왕따작전’의 계보는 조나라로 바뀐다. 정말 지긋지긋한 ‘집단 괴롭힘’이다.

선우 시절엔 진(晉)나라가 괴롭히더니 중산국 시절엔 위나라 때문에 끝내 멸망했고, 20여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회복했더니

이번엔 조나라가 앞길을 막고 있지 않은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우리 역사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이형구 교수)

그러나 복국 이후 영수로 천도한 중산국은 예전의 중산이 아니었다. BC 369년 조나라와의 국경선에 장성(長城)을 쌓아 조나라

내습에 대비한다.

이후 70여년간은 도리어 중산국이 조나라와 연나라에 반격을 가하는 반전의 시대가 도래한다.

중산국을소국으로 여기는 조나라로서는 치욕의 나날이었다.

전쟁 뿐 아니라 문화도 찬란했던 ‘강소국’

BC 307년, 조나라 무령왕(재위 BC 325~BC 299년)이 신료들을 부른다.

“…지금 중산국이 우리나라 한가운데 버티고 있고(我腹心)…

사직이 망하게 생겼으나 나는 호복(胡服)으로 갈아 입고서라도 그들을 치고자 합니다.”

(사기 조세가) 벌집을 쑤셔놓은 발언이었다. 호복이라니. 주나라의 제후국인 조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고 뭘 어찌하겠다는 건가?

대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아우성친다. 그러자 무령왕이 설득에 나선다.

■ 중산국을 타도하라!

“백성들에게 호복의 착용과 말 타고 활 쏘는 법(호복기사·胡服騎射)을 가르치려 하는데 무슨 잔말이 많소?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우임금은 옷을 벗고 나국(裸國)에 들어갔었소.

그분들은 덕정을 선양하기 위해 그러셨소. 설사 세상의 비웃음을 받더라도 난 반드시 오랑캐 땅, 중산을 반드시 차지할 것이오.

”(雖驅世以笑我,胡地中山吾必有之)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조 무령왕이 중산을 오랑캐(이족)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설하고 무령왕은 기어코 호복을 입었으나 왕족들까지도 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무령왕은 숙부인 공자 성(成)을 직접 찾아가 ‘호복기사’ 정책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

“숙부님, ~과거에 중산국이 제나라의 강병을 등에 업고 우리 땅을 침입해 짓밟았으며, 백성들을 약탈하고 물을 끌어내 호 ()성을

포위했습니다.

(引水圍) 사직의 신령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호성(城)을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선왕께서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아직 복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호복을 입고 기병과 사수(射手)로 방비하면 나라를 지킬 수 있으며 ~중산국의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조카의 간곡한 설명에 감화를 받은 공자 성은 이튿날 스스로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의 전말이다.

조나라가 예법을 찾는다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다녔던 구태에서 벗어나 간편한 옷(바지 형태)을 입고 말을 타서 활을 쏘는 이른바

기병작전을 펼친 것이다.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으로 전국7웅 가운데 선두주자로

나선다. 그런데 기록에서 나타났듯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 배경에 중산국이 있었다. 전국시대 때 세치 혀로 6국의 재상이

된 소진(蘇秦)의 발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지난날 중산국은 나라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서 연나라와 조나라를 맞아 남쪽 장자(長子·산시성 진양·晋陽) 땅에서는 조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으로는 연나라를 패배시켜 그 장수를 죽였습니다.

중산국은 겨우 천승(千乘)의 나라였는데, 두 만승(萬乘)의 나라(조나라와 연나라를 지칭)를 이겼습니다.~

”(전국책 ‘제책·齊策’) 하지만 조나라는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을 시행한 뒤(BC 307년)부터 BC 296년까지 해마다 중산국을

정벌한다.

선우국이던 춘추시대 때는 진(晉)의 침략으로 고난의 나날을 걸었고,그 후 위나라의 침략에 급기야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됐으며

(BC 406년) 20여년 만에 나라를 회복한(BC 380년쯤) 중산국. 그 중산국은 다시 조나라의 내침을 받아 끝내 멸망하고 만다.

(BC 296년)

■ 집단 따돌림 극복한 강소국

중산국은 이렇게 춘추시대부터 강대국들의 ‘집단 따돌림’을 받고 결국 두 번이나 멸망했지만 대책 없는 약소국은 아니었다.

 

 

“70~80년간, 즉 위나라로부터 해방된 때(BC 380년)부터 최종 조나라에 멸망(BC 296년)할 때까지 강대국 조나라와 연나라를

괴롭히면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강소국’이었지.

오죽했으면 조 무령왕이 이를 갈며 오랑캐의 옷까지 입고 ‘타도 중산국!’의 기치를 올렸을까.

”(이형구 교수) 1974년 허베이성(河北省) 핑안(平安) 싼지셴(三汲縣)에서 확인된 중산국 유적(왕릉+성터)의 위용은 우리의 역사를

빼닮은 ‘강소국’ 중산의 찬란한 문화를 대변해준다.

이 유적에서는 3기의 왕릉을 포함, 30여기의 무덤과 1만9000여점의 유물들이 쏟아졌다.

가장 중요한 유물들이 바로 중산왕 착(錯)의 무덤에서 확인된 철족대정(鐵足大鼎·다리는 쇠, 몸통은 청동으로 만든 예기) 및 방호

(方壺·사각 항아리형의 예기)에 새겨진 명문이다.

‘강소국’ 중산의 역사를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먼저 방호의 명문을 살펴보면 “14년, 중산왕 착(錯)이 재상인 사마주(司馬주)에게 명을 내려 ‘연(燕)나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

(구리)으로 제기를 만들라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무려 469자(77행)가 새겨진 철족대정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옛날에 연나라 왕 쾌(쾌·재위 BC 321~BC 316년)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위를 내줘 나라를 잃고 그 스스로도 목숨을 잃었다.

~이에 어린 왕을 보좌한 (중산국) 재상 사마주가 삼군지중(三軍之衆), 즉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토벌, 500리 땅과 성 10곳

빼앗았다.”

명문은 기존 역사서를 보충하고 오류를 잡는 데 결정적인 몫을 해낸다.

이 명문 내용과 기존의 사서를 토대로 당대의 역사를 복원해보자.

 

중산국이 만든 방호(사각항아리 형태의 예기).

 

“(당시) 연왕 쾌는 재상 자지를 너무도 신임한 나머지 300석 이상의 봉록을 받는 고관의 임용권을 자지에게 주었다.

권력을 손에 쥔 자지는 마침내 국왕의 직권을 행사한다.

자지가 왕권을 차지한 지 3년이 되는 해(BC 314년) 태자와 신하들이 변란을 일으켰고, 연나라는 수개월간 혼란에 빠진다.

이때 맹자가 제나라 왕에게 ‘연나라를 빨리 치라’고 간언한다.”(사기 연소공세가)
제나라 선왕(宣王·재위 BC 320~BC 301년)은 즉시 5도의 군사와 북지지중(北地之衆·북방의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

대승을 거둔다. 이때 연왕 쾌와 만 2년간 왕위에 올랐던 자지가 죽는다.


“바로 사기에 기록된 ‘북지지중’, 즉 북방의 군사라는 표현이 중산국의 군사일 것입니다.

중산왕릉 명문에 나온 삼군지중과 사기의 북지지중이 일맥상통합니다.”

(이형구 교수) 이 교수는 “중산국의 연나라·조나라 정벌은 아마도 제나라와 연합으로 이뤄졌으며 연과 조는 이때 거의 멸망의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명문제기들은 연나라를 격파하고 의기양양해진 중산왕 착(錯)이 “연나라에서 빼앗은 구리(銅)를 택해 제기

(대정)를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산왕릉 출토품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 예기엔 강대국 연나라를 치고, 의기양양해서 연나라의 구리를 택해 제기를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2300년 된 술, 개목걸이 장식까지

“왕릉 3기는 착왕(錯王)과 그의 아버지 성왕(成王), 할아버지 무공(武公)의 것으로 이뤄졌어요.

그런데 착왕의 묘에서는 천자를뜻하는 구정(九鼎), 즉 정(鼎)이 아홉개나 나왔지.

주례(周禮)의 규정에 따르면 천자는 9정, 제후는 7정, 대부는 5정, 사(士)는 3정을 갖도록 규정해놓았거든.

이를 ‘열정(列鼎)’제도라고 하는데, BC 323년 중산국이 조·위·한·연과 더불어 왕(천자)을 칭했음을 방증해주는 결정적인 자료지.

또 다리는 철제로, 몸통은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놀라운 주조기법도 특기할 만해요.

”(이형구교수) 또하나 착왕의 철족대정 속을 분석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양, 돼지, 개 등의 고기를 삶은 결정체가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아마도 제사용 고기를 삶은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또 있다.

출토품 가운데 밀폐된 술병들이 다수 나왔고, 그 안에서는 액체가 출렁거렸다.

그런데 두 개의 병을 열자 야릇한 술냄새가 나지 않은가.

성분 분석을 해보니 2개의 병에는 알코올 성분이 있었는데, 곡주(穀酒)일 가능성이 많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2300년 된 술이 처음 발견된 것이어서 흥미를 끌었다. 

 

 

특히 ‘중산주(中山酒)’는 “한번 마시면 3년 동안 죽은 듯 무덤에 묻혀 있다가 깨어날 정도이며, 3년 후 깨어난 사람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술냄새에 3개월간이나 취할 정도”라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사냥에 동원된 마차가 2~3대 확인됐다는 점.

그런데 금·은으로 만든 목걸이를 찬 목에 찬 개 2마리의 뼈가 완전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아마도 착왕은 애견가였겠지. 문헌에 따르면 중산에서는 북견(北犬)을 생산했고, 중원에서도 중산의 북견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2300년 된 중산주(中山酒)를 담은 술병.

 

출토된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도 예약제도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전국 12웅에 들 만큼 강국이었고 조와 연나라를 떨게 했던 중산국이었던 만큼 그에 걸맞은 무기들이 쏟아졌다.

청동검과 청동도끼, 청동꺾창, 노기(弩機·화살을 연발로 쏘는 장치), 철촉은 물론 천승의 나라에 걸맞은 전차가 8량, 그리고 24필의

말이 부장됐다.

“이렇듯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무엇보다 철과 동을 접합하는 기술, 그리고 다양한 방법의 주조·용접·금은상감기법 등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작품들이 즐비해요. 전국시대 최고의 예술과 주조기술을 갖춘 강국입니다. ”(이형구 교수)

■ 아홉구멍에 넣은 옥(玉)

특히나 금은으로 상감하는 솜씨를 보면 중산국의 찬란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4마리 용과 4마리 봉황을 금은으로 상감한 책상(金銀象嵌龍鳳方案)과 잔 15개를 차례로 장식한 촛대

(十五連盞燭臺),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격인 중산국의 창우(倡優)를 표현한 촛대, 그리고 사슴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표현한 병풍꽂이 등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한 솜씨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중산국의 사냥개. 목에 금·은 목걸이를 찬 상태로 발굴됐다.

 

“옥석(玉石)제품은 또 어떻고. 옥으로 만든 구슬과 옥결(귀고리), 황(璜·반원형의 패옥) 등을 합쳐 3000여점이나 쏟아졌어요.

옥은 예로부터 불멸의 상징이잖아요. 옥제품도 인물·용·봉황·뱀·거북이·호랑이·누에·달팽이 등 얼마나 다양한지….”(이교수)
그런데 이 옥장식품들은 장식으로서의 기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포박자(抱朴子·신선방약과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서적)에 따르면 “금옥(金玉)이 9개 구멍에 있으면 죽은 자는 썩지 않는다”

고 했다.

중산 왕릉과 그 배장묘에 출토된 옥기의경우 ‘시신의 구멍(규·竅)’, 즉 눈(2)·귀(2)·코(2)·입(1) 음양(2) 등에 집어넣어 죽은 자의

기운을 보호했다.


한데….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중산국과 그 문화가 아무리 휘황찬란하다 한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부터 중산국과 그 문화, 그리고 우리 역사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더듬어보자.

30여 년 전, 타이완 유학 시절(국립타이완대) 이형구 교수가 풀기 시작했던 중산국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