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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제국 4한국 중- 차카타이 한국의 분열

설레임의 하루 2009. 3. 23. 20:38

*출처:   http://cafe.daum.net/shogun/1Db/2760    글쓴이: sak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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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가타이 칸국>

               출처는 독일어 위키피디아..이긴 한데, 좀 과하게 크다.

 

 칭기즈칸의 미칠듯한 정복이 끝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유라시아는 칭기즈칸의 자손들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중국은 칭기즈칸의 4남인 톨루이의 후예들에게, 러시아 평원은 장남 조치의 후손들에게, 이란 지역도 역시 톨루이의 아들인 훌라구

가문에게, 그리고 중앙아시아는 칸의 차남인 차가타이의 자손들이 다스리게 되었다. 

 

 각각의 칸국은 모두 번영하던 경제적 중심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원의 경우는 중국이라는 후덜덜한 본좌국가를 하나 꿰차서 앉은 상태였고, 훌라구 가문이 다스리던 일 칸국은 이란과 이라크를,

좀 없어보이는 킵차크 칸국도 북방 국가들의 무역권을 손에 쥐고 앉아있었으며, 차가타이 칸국은 트란스옥시아나의 부유한 도시들

(대표적으로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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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의 주요 도시와 지명>

                                              사진 출처 - http://www.grifterrec.com/coins/maps/m_centralasia.html

 

그러나 차가타이 칸국은 자신들이 가진 보물을 대하는데 소홀히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계층은 도시를 [다스린다]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들은 초원에서 말을 타고 젖과 고기를 먹으며 살면 되니 도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딱히 알 필요야 없었겠지만, 그동안 도시에서

살아온 수십만의 정주민들에게 있어 이렇게 무관심한 통치자가 다스리게 되었다는건 앞으로의 삶이 매우 피곤해질거라는걸 의미했고, 차가타이 칸국의 군주들은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거리상으로 중국, 몽골초원과 가깝다보니 차가타이 칸국은 그 독립성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차가타이 사후 칸 위에 오른 카라 훌레구, 이수 뭉케는 대칸의 입맛대로 자리에 올랐다 쫓겨났다 목이 떨어졌다. 하곤 했다.

후에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싸움을 틈타 당시 차가타이 칸국의 칸이었던 알루구는 어느정도 독립하는데 성공했다......

 

 ...처럼 보였는데 중국에서 또 한번 문제가 터지고야 말았다.

쿠빌라이의 재위에 반대하는 카이두가 킵차크 칸국와 연합하고 가운데에 끼어있는 차가타이 칸국을 맹공하고, 당시 칸 바라크는

패해서 냅다 내빼고 말았다.

 

 자,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라크 칸은 자신의 군대를 재무장하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스위스 은행이 아직 없었던지라 수중에는

돈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바라크는 어떻게 해서 자신의 군대를 재무장시켰을까?

 

 그는 자신의 영역이었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털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정말 이 주민들의 삶은 피곤할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바라크는 군대를 일으킬 수 있었지만, 카이두가 동투르키스탄(위의 지도의 모굴리스탄  근처 지역)을 가지고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해주는 조건에서 평화를 제시하자 바라크는 수락했다.

(1267) 이왕 일으킨 군대는 어딘가에 써먹어야만 했다. 이에 카이두는 페르시아의 일 칸국을 공격하게 만든다.

 

 원래 일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은 딱히 원한관계라고 할게 없었다.

그러나 카이두는 일 칸국의 훌라구가가 쿠빌라이를 지지했기에 원한관계가 있었다.

사소한 문제라면 그 원한을 왜 자신이 직접 풀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아무튼 바라크는 일 칸국을 공격하지만 대패(1270)하고, 얼마 뒤 사망하기에 이른다.

 

 바라크가 죽어도 카이두는 살아있었고,

그는 차가타이 칸국의 칸을 마음대로 바꾸었다 쫓아냈다를 반복하고는 했으며, 이 와중에 죽어나는건 일칸국의 침공의 직격탄을 받은

부하라의 주민들이었다.(1273) 카이두는 결국 두와(Duwa)를 차가타이의 칸에 세우는데(1274) 나중에 보겠지만 이 사람은 호랑이

새끼였다.

처음에 두와 칸은 카이두의 명에 따라 하라는 궂은 짓은 모두 성심성의껏 수행했다.

그는 원조와의 싸움에서 카이두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나, 카이두의 사후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카이두의 아들 차파르를 속여(한번 두와가 차파르에게 지자 평화를 맺자고 꼬신 후, 군대를 해산하자 마자 공격해버렸다.)

결국 차파르의 영지인 동투르키스탄 지역을 재정복하고, 차가타이 칸국의 통일을 완수한다.(1306)

 

 상황이 어느정도 괜찮아진 차가타이 칸국은 이제 본격적으로 확장을 시작한다.

(여담이지만, 당시 원조와 일칸국은 서서히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남들 잘나갈때는 찌질거리다,

남들이 찌질거릴때 조금 뜨기 시작한 셈이다) 당시의 칸인 케벡과 에센 부카의 지휘 하에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는 먼저 가장 만만한

카불, 가즈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점령했고, 주기적으로 인도를 공격, 인도의 노예왕조(갤리선에서 노젓는 노예 생각하면 곤란하다)

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이렇게 잘 나가는것도 정말 잠시였다. (두와 칸이 1306년에 죽고, 케벡 칸이 1326년에 사망하니 20년)

케벡 카의 동생인 타르마시린(Tarmashirin)은 차가타이 칸국의 칸들중 처음으로 이슬람으로 개종, 이슬람이름(Sultan Ala ud din)으로

개명했다.

 이에 전통적인 몽골 부족은 대대적으로 반발했다.

특히 모굴리스탄 지역에서 아직 초원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몽골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타르마시린 칸 제위 시기에 이븐 바투타는 이곳을 여행했는데, 그는 타르마시린이 칭기즈칸의 야삭(율법)을 어겼기에 몽골인의

울루스에서 쫓겨났고, 결국 폐위(1333)당하기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러한 전통토착 지배계층, 또는 전통토착세력과 몽골 지배계층의 대립은 당시 몽골 제국 강역에서 전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두와 칸 즉위 시에 서서히 하한가를 치던 일 칸국은 1320년대 와서는 그야말로 디시 力갤(이름이 같은 어느 갤러리하고는 딱히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달라)이 좋아보일정도로 막장으로 치달았고, 비슷한 시기 원 왕조에서도 황제의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을

틈타 한족의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킵차크 칸국의 경우, 러시아의 대공들의 힘이 칸에게 댐비기에는 너무 약했으며, 러시아의  대공들도 그정도까지로 미치지는

않았으므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100여년 이후부터는  러시아의 지배계층과 몽골 지배계층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빚어지게 된다.

 

 이왕 타르마시린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니 잠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전파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자.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전파는 옛날 옛날 8세기에 압바스 왕조의 군대가 이란을 넘어 진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널리 믿어지게 된건 그로부터 시간이 좀 지난 후였으며, 몽골 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건 수피(Sufi)

들의 힘이 컸다.

 

 수피들이란 일종의 신비주의 수행자들로, 복잡한 율법이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명상과 무아지경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이루어내려는 종교인들이었다.

자신들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몽골인들에게, 이들  수피가 말하는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슬람(나중에 보겠지만, 수피

야르사드 웃 딘은 모굴의 칸인 투글룩 테무르에게 손이나 좀 씻고 신앙고백 하면 너는 무슬림 ㄳ로 꼬심으로서 그를 개종시킨다)은

몽골인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다.

 

 처음 몽골인들에게 영향력을 가진 수피 교단(tariqa)는 쿠브라비(Kubravi) 교단이었다.

이 교단의 우두머리였던 세이흐 사이프 웃 딘 부하리는 이미 이슬람으로 개종한 킵차크의 칸 베르케의 존경을 받았으며, 톨루이의

과부인 소르칵타니에게 선물까지 받을 정도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의 손자인 세이흐 아흐야는 부하라 근처 파다바드에 자기 가문의 성묘를 세우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11개의 농촌을 사들인다.

이러한 일은 두가지를 보여준다.

 

 1. 수피(Sufi-양모. 원래 이들 수행자들은 양모 누더기를 입고 다녀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돈이 많았다는것.

 2. 몽골군의 파괴는 시간이 지나면 이미 어느정도 복구가 이루어졌다는것. 당시 트란스옥시아나의 경제력이 살아나고 있었기에 수피

     교단도 번영을 누리는게 가능해졌다.

 

 쿠브라비 교단은 후에 낙쉬반디(Nakshibandi)교단 등에게 밀려나지만, 그러나 교단을 떠나서 19세기

까지에도 수피들은 현지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다.

 

 다시 몽골 왕공들의 피가 튀고 살이 춤추는 이야기로 돌아오면, 타르마쉬린 칸의 개종으로 차가타이 칸국은 결국에는 양분되기에

이른다. 서부의 트란스옥시아나에는 명목상의 차가타이 칸국의 군주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투르크

귀족들과 군벌들이 자기들끼리 신나게 쌈박질하기에 이르렀다.

동부의 모굴리스탄 지역에서는 몽골 부족인 두글라트(Dughlat) 부족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부의 개판 오분전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별 힘 들이지 않고 정복할수 있겠다 여겨, 부족의  우두머리인 불라지(Bulaji)는

차가타이가이 후손인 투글룩 테무르(Tughluq Temur)를 칸위에 세웠다.(1347) 

 

 칸위에 오른 투글룩 테무르는 위에서 말한 야르사드 웃 딘이라는 수피수행자의 말에 따라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다.

이 야르사드 웃 딘의 후손은 카타키계(야르사드 웃 딘의 아버지 이름이 자말 웃 딘 카타키),  또는 우와이시(Uways-특정 교단에

속하지 않은 수피들을 일컫는 말)라고 불리게 되며, 모굴리스탄 지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위에서도 보이듯이 투글룩 테무르는 자기 잘나서 칸의 자리에 오른게 아니었다.

멍청하게 굴다가는 서부의 차가타이 칸들처럼 실력자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위험이 컸기에, 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무엇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이슬람(게다가 피크니, 이즈타히드니, 이스티슬라니 따위의 복잡한건 하나도 없는!)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례는 군주의 권위와 부족장의 권위가 충돌하는 중앙아시아에서 자주

보인다.

또한 서부의 트란스옥시아나를 공격하는데 있어 이슬람의 성전(피크니 이즈타히드니 이스티슬라같은 복잡한건 몰라도, 이런건 잘만

받아들인다.

이건 요즘 원리주의자들도 별로 다를바가 없는듯)의 이념이 얼마나 짭짤한 방패막이 되겠는가.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투글룩 테무르는 1360년까지는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1360년, 트란스옥시아나가 한 힘 한다고 설쳐대는 투르크 군벌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지자 그는 본격적으로 침공을 시작한다.

그는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바를라스 부족의 수장 핫지 바를라스등 투르크 군벌들을 닥치는대로 처부수고, 이 와중에 저 무시무시한

티무르가 등장하게 된다.

그는 재빨리 가장 강력한 투글룩 테무르에게 복속하고, 투글룩 테무르가 자신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Ilyas Khoja)를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티무르를 그 부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모굴리스탄으로 돌아간다.

카이두가 두와 칸을 키웠다가 그의 가문이 초토화가 되었듯이, 투글룩 테무르의 이 인사도 결국 차가타이 칸국의 영속적인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