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도불원인
1장, 세계를 뒤흔든 한 장의 지도- 천하전여총도
1. 천하전여총도 뒤지기 시작했다. 이틀 전 ‘세계일보’가 예고한 단신 기사에 의하면 세계역사를 새로 써야할지도 모를 놀라운 고지도 한 장이 그날 영국 런던에서 공개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세계지도의 지형윤곽이 거의 담겨 있음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국은 ‘짝퉁’과 ‘가짜’의 이미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데다, 이번 지도의 공개가 한 해 전인 2005년 중국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유명한 정화鄭和 제독의 첫 항해 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또 지난 3년간의 필자의 연구내용을 떠올리며 일말의 흥분을 숨길 수 없었다. 더욱이 문제의 지도가 다름 아닌 세계적 권위의 ‘이코노미스트(Economist)誌’에 의해 공개된다는 데에 있어 더욱 그랬다. 그런 ‘이코노미스트誌’가 합당한 분석과 검토 없이 자사의 전통과 권위를 실추시킬 행위를 간단히 할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인터넷을 검색하던 필자는 ‘한국일보’와 BBC의 사이트에서 문제의 지도사진을 접하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충격과 경이감에 젖어야 했다.
‘천하전여총도天下全與總圖’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세계지형의 윤곽이 거의 다 드러나 있다. 天下諸番識貢圖란 원본지도를 필사한 것이란 내용이 들어있다. 것이었다. 그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이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로의 항해와, 그것을 단초로 전개된 지리상의 대항해가 서양사회에 부여하기 시작했던 온갖 ‘최초’란 영광의 타이틀을 반납해야 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하여 중세 동양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이해, 나아가 그동안 가려지고 숨겨져 온 서양사의 비밀들을 하나씩 드러내는 단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개된 산업혁명, 나아가 근대제국주의의 등장이 낳은 저들의 오만과 독선, 폭력은 그 저변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상징되는 역사상 ‘최초’라는 우월주의 관념이 깊이 도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술렁거림으로 몰아넣는 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 지도가 우리 역사와 놀라운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필자가 확신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여행의 첫걸음은 위 천하전여총도와 함께 시작될 터이니, 독자들은 여행 내내 위 지도에서 눈을 떼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나 필자로선 그것이 천하전여총도 제작자의 주장일 뿐이라는 BBC의 시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엔 BBC의 평가는 어딘가 서툴고 서두른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분석결과는 후술하겠지만, 공개 당시 BBC는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것이란 점에 대해선 부정적 입장을 보이진 않았다. 천하전여총도가 제작된 1763년이란 시기와 지도상의 내용을 비교해보자. 1763년의 지도에 남극대륙이라니 말이다. 이끄는 러시아 해군탐험대가 최초로 대륙의 일부를, 다시 3일 뒤인 1월 30일 영국해군의 브랜스필드(Edward Bransfield 1785~1852) 가 이끄는 탐험대가 오늘날의 남극반도를 목격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브랜스필드 분지 등은 이 때의 영국 탐험대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알려주기도 한다. 가짜 또는 위작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피리 레이스(Piri Reis, 1465~1555, 오스만터키)의 지도(1513년),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Oronteus Finaeus, 1494~1555, 프랑스)의 지도(1532년), 하지 아메드(Hadji Ahmed, 오스만터키)의 지도(1559년), 제라더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 1512~1594, 네덜란드)의 지도(1569년), 필립 부아슈(프랑스)의 지도(1737년) 등이 대표적인 지도인데, 현재까지 지도학상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이들 지도들이 남극대륙이 발견된 1820년 이전의 지도들이라는 점에 있다. 평가되고 있다. 그러기에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유명한 게라더스 메르카토르 외의 나머지 인물들은 그 지도로 인해 유명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정설. 그리고 그것과 배치되는 위 지도들의 존재. 이 주제를 다뤄 유명해진 인물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신의 지문’의 작가 그레이엄 헨콕(Graham Hancock)이다. 헨콕의 ‘신의 지문’은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이러한 지도들의 미스터리에서 시작되는데, 그가 내린 주장과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 인류가 그런 수준의 지도를 제작할 능력에 도달한 때는 존 해리슨에 의해 경도측정 기구인 크로노미터가 발명된 18C 이후부터이다. … 또한 그 지도들이 보다 이른 시기의 다른 지도들로부터 필사 혹은 참조되었다는 지금까지의 정황 증거들을 통해 볼 때 지도의 기원은 현 인류의 기억에서 단절된 오랜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미지 문명의 산물이다.’ 그런데 헨콕의 초고대문명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가 논리의 전제로 내세운 남극대륙의 지도들이 그의 주장대로 이전의 어떤 지도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더하여 그 점이야말로 필자와 헨콕의 유일한 일치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커다란 수수께끼에 봉착한다. 그러나 여기선 일단 수수께끼로 남겨두기로 하자. 그러나 그 지도들은 이 장의 주제가 아니기에 여기서 다시 천하전여총도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가짜 또는 위작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 있기에 말이다. 독자들의 눈에 유럽의 지형이 어딘가 허전해 보일 것이다. 그렇다, 단번에 영국본토인 브리턴 섬과 아일랜드 섬이 없음을 깨달을 것이고, 나아가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가 위치한 스칸디나비아 반도마저 볼 수 없음을 알아챌 것이다. 생각이 들지 않는가? 위작은 남에게 최대한 그럴듯하게, 아니, 진짜보다 더 진짜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무리할 만큼의 남극대륙을 그려 넣는 과감성에다, 그와 너무나 대조적인 유럽지형에서의 소심함은 위작이라고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필자는 지도상의 남극대륙의 존재야말로 역설적으로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것이라는 증거의 하나로 간주한다. 그 의문들은 뒤에서 하나씩 다룰 것이니, 미련 없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캘리포니아 섬’
오늘날의 워싱턴, 오리건, 캘리포니아 주州 일대의 미국 서안이 본토로부터 분리되어, 하나의 섬으로 그려진 것이 주의를 끌 것이다. 서술상의 편의를 위해 이 섬을 ‘캘리포니아 섬’이라 일컫기로 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자. 독자들은 천하전여총도가 제작된 1763년이란 년도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 상의 ‘캘리포니아 섬’은 결코 상상이나, 가공, 또 우연의 결과가 아닌 것이 된다. 또한 실제로 1763년에 지도가 제작되었음을 알리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 근거로 ‘캘리포니아 섬’이 앞서 언급한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조선의 두 지도와, 또 중세 유럽의 상당수 지도에서도 나타남을 들 수 있다.
‘하백원의 만국전도’는, 16C 후반과 17C 초에 걸쳐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이탈리아)와 기울리오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9, 이탈리아)가 각각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1602년)와 ‘만국전도 萬國全圖’(1623년)에서 영향을 받은 지도인데 이들 두 지도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와 거의 비슷한 또 하나의 지도가 존재하는데 조선의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1770년대)가 그것이다. 이들 지도를 편의상 ‘4지도’라 칭하자. 자리할 공간이 남반구를 가득 채운 미지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4지도’가 앞서의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지도들에 비해 훨씬 후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반구에 대한 내용만은 분명 뒤쳐짐을 알 수 있다. 앞서의 ‘4지도’는 하나의 타원형에 연속성을 담고 있는 데에 비해, 곤여전도는 세계를 두 개의 원에 양분한 양반구형兩半球形지도이다. 모른다는 가정 하에 검증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수 있을 것이다. 즉 남반구를 둘러싼 선형이 지도상의 여백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곤여전도는 호주대륙이 나타남은 물론 남극대륙과 함께 그 선형(線形)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분명 지형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다, 나아가 나란히 놓인 양 대륙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은 이 장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세 번째 차이는 시선을 곤여전도의 남반구 영역에서 벗어나, (곤여전도하下의) 북아메리카의 서부 해안 일대로 향하면서 나타난다. 그곳의 한 섬이 독자들의 눈에 들어왔을 때, 독자들의 머릿속은 어느 새 앞서 천하전여총도에서 본 ‘캘리포니아 섬’을 떠올릴 것이다. (주의: 캐나다 중앙부에 보이는 세로방향의 직사각형은 바다를 나타내는 만灣이 아니라, 글귀가 씌어진 공간임)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州와 달리 그곳은 엄연한 멕시코의 영토이다. 사실 캘리포니아란 말 자체가 스페인에서 유래된 것으로, 현재의 미국령領 캘리포니아 주州 역시 이전엔 멕시코 영토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다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멕시코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 19C 중반의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미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이다. 당시 멕시코가 상실한 지역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콜로라도, 그리고 와이오밍 주의 일부인데 현재의 멕시코 영토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엄청난 면적이다. 북아메리카 진출 백인들에게 있어서 캘리포니아 일대는 섬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었다. 실제로는 캘리포니아 연안으로의 탐험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16C만 해도 1542년 포르투갈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인 후안 카브리요(Juan Rodriguez Cabrillo, ?~1543?)를 필두로 하여, 유명한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1596)와 토머스 캐번디시(Thomas Cavendish, 1555~1592)가 그 뒤를 이었다. 그때까지 ‘캘리포니아 섬’은 하나의 정설이었다. 몰려들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캘리포니아 섬’을 일주한 선원이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1746년이 되기까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유럽에서는 여전히 ‘캘리포니아 섬’을 묘사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독자들은 이제 당시 유럽의 ‘캘리포니아 섬’ 지도와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천하전여총도 및 곤여전도와의 상관성에 대해 유추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두 지도상上의 ‘캘리포니아 섬’이 남극대륙과 더불어 유럽 지도들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단정할 것이다. 다만 천하전여총도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원본 지도로서의 (1418년의) 천하제번식공도에 대한 내용은 한마디로 완전 거짓이며, 원본지도는 존재한 적이 없게 된다. 더불어 필자는 지금까지 별것 아닌 지도를 가지고 쓸데없이 시간과 지면을 낭비한 셈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란 말이 스페인어에서 유래했음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매우 분명하다. 탐험가 후안 카브리요가 떠오를 것이다. 그가 바로 아즈텍 제국의 정복자이자, 스페인령領 멕시코 총독을 역임 했던 유명한 헤르난 코르테즈(Hernan Cortes, 1485~1547, 스페인)이다. 조사하곤 그곳이 섬이 아니라, 반도라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한다. 그렇다면 캘리포니아 반도가 확인된 1539년부터이거나, 최소한 그가 스페인으로 최종 귀환한 해인 1541년부터 ‘캘리포니아 섬’은 수정되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위 17C의 지도들에서 보듯이 캘리포니아 일대는 지도상에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 섬으로 남아 있게 된다. 즉 코르테즈의 탐사 이전부터 지도상엔 ‘캘리포니아 섬’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통해 그곳에 존재하는 ‘캘리포니아 섬’을 가정하고 탐험에 나섰다는 얘기이다. 출간된 G. R 몬탈보(Garci Rodrigues de Montalvo)의 소설 ‘에스플랜디안의 모험’에서 유래하여 당시 유행어가 되어 있었다. 즉 코르테즈나, 카브리요가 탐험에 나설 당시 스페인에서는 이미 그곳이 캘리포니아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 섬을 찾아 탐험에 나섰다는 뜻이다. 물론 탐험 결과를 반영한 지도도 존재했다. 아래 지도는 17C의 ‘캘리포니아 섬’들의 지도와 달리 이미 16C에 실제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후 2백여 년 가까이나 ‘캘리포니아 섬’이 대세를 이뤘다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까지 더욱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어쩌면 ‘캘리포니아 섬’ 지도의 기원이 콜럼버스 시대 이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당시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접어든 유럽사회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탐험가들을 다룬 전기 작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에 의하면 당시 유럽사회는 지리지식에 대한 갈망이 폭발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답은 남극대륙에 이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겨두자. 외에 또 하나가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 지도 또한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이자, 남극 대륙이 나타나는 지도로서 앞서 말한 조선의 두 지도 중 나머지 하나가 그것이다. 그 지도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다른 서양선교사 페르디난드 베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3~1688, 벨기에)에 의해 1674년 북경에서 판각된 북경판이고, 2번째는 그로부터 2백여 년이 지난 1856년의 광동판, 다음 3번째는 광동판이 나온 불과 4년 뒤 1860년 조선에서 판각된 조선판이다. 위에서 살펴본 곤여전도는 조선판으로, 조선판은 현재 각자 3개 본이 전해져오는데, 서울대 규장각(보물 제882호)과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이 그것이다. 모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는 (1929년에 발견된 피리 레이스 지도를 제외하곤) 20C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라는 사실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학문의 보편화에다, 학문세계의 확장, 대중매체의 발전 등에 힘입었을 것이다. 여타 정보들을 죄다 모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가정할 땐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만약 위작자가 곤여전도(구형지도)를 모본으로 삼았다면 당시의 뛰어난 지도제작 수준을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천하전여총도에 1763년이란 제작년도를 정하기 위해 18C 여타 지도들의 제작수준도 확인해 봤을 것이다. 어쩌면 마테오리치나 알레니의 곤여만국전도와 만국전도(모두 평면지도)를 접했을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작자가 1418년의 지도를 필사했다고 밝힌 만큼 그럴 듯 하게 하기 위해 15C 초 수준을 감안하여 제작했을 경우이다. 4. 지구전후도 것인지의 진위여부를 살펴보았다. 하나의 조선지도에서도 나타남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또 하나의 조선지도인 ‘지구전후도’를 통해 천하전여총도의 진실에 다가가 보자. 각각 ‘지구전도’와 ‘지구후도’로 불려지는 이 지도는 현존하는 목판본 세계지도로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자,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동양의 지도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위 지구전후도는 앞서본 곤여전도와 거의 흡사하다.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이라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특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지 않은가? 지구전후도엔 24절기와 남북회귀선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 정도이다. 즉 앞서의 곤여전도 광동판(1856년)과 조선판(1860년)보다 이른 시기의 것이란 점이다. 아래는 지구전후도에 대한 서울대 규장각의 설명문이다.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설명문에 보이는 장정부의 지구도에 남극대륙이 나타난다면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장정부의 지구도엔 남극대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전후도가 비록 장정부의 지구도에서 영향을 받긴 했지만, 남극대륙의 묘사는 그와 무관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남극대륙의 존재를 볼 때 그곳이 탐험된 이후에 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역시 쉬이 믿을 수 없었다. 남극대륙의 존재가 확인된 지 불과 14년 이후의 조선의 지도가 아닌가? 당시 동서양의 정보전달 속도가 그렇게 빠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당시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광동지방은 서양정보의 집산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시 유럽사회는 막 근대로 접어들던 만큼 여전히 절대적 비중의 문맹률을 보이고 있었고, 신정보의 교류는 엘리트․ 지배세력 중심의 소수 지성사회에 한정되어 있었다. 당시 동서양간의 교통수준을 감안할 때 유럽 대중사회에 보편화된 정보가 아닌 이상, 그것도 한두 국가에 의해 확보된 정보가 불과 14년 만에 동아시아에까지 전해졌다고 보기엔 상당히 무리가 따른다.
게다가 그 14년이란 기간은 중국의 신정보가 조선에 전달되기까지의 최소 2~3년의 시간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 남극대륙은 가상으로 그려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쩌면 서양의 남극탐험대가 귀로에 광동에 들렀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을 좋아하는 필자에겐 아무래도 ‘무리가 따른다’는 표현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들린다. 그러기 위해서 2가지 준거가 세워진다. 하나는, 당시 지도제작상의 시대적 기풍, 또 하나는, 제작자의 다른 제작물과의 비교를 통한 제작자의 세계관에 대한 고찰이다. 그 흐름은 17C 초를 기점으로 이전과 크게 양분할 수 있는데 바로 고증학적 경향의 등장이다. 17C 초는 시대적으로 서양사회와의 접촉시기이며, 정치적으로 명.청 왕조의 교체기이다. 시기였다. 직방세계란 한마디로 문명화된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바로 중국 중심의 천하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은 지도제작에서 중국을 과대.과장하게 나타내는 대신에 주변지역은 생략 또는 소략小略하게 취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변환을 가져온 시기이다. 이른바 중국판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고증학의 대大개화 시기이다. 고증학이란 엄격한 증거에 의거하여 실증적으로 논하는, 실사구시 정신으로 표현되는 근대과학의 기풍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이 유독 남극대륙만 상상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을까? 왜 우리가 그의 ‘대동여지도’를 조선 지도제작의 결정판이라 일컫고 있는가?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그의 실사구시 정신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철저한 현실세계의 반영, 실제성과 정확성에 있음이 아닌가? 가공, 가상의 산물일 수가 없다고 단정한다. 그런데 이 역시 필자가 확인한 결과는 두 탐험대 모두 아시아에 들른 적이 없었다. 더하여 두 탐험대에 이어 각각 1821년과 1823년에 남극대륙을 찾은 미국의 존 데이비스(John Davis)나, 영국의 포경업자 제임스 웨들(James Weddle)의 항해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이외의 남극탐험대는 ‘지구전후도’의 제작시기인 1834년과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위 지구전후도에서 볼 수 있는 남극대륙의 해안선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보다시피 구형지도로서 고도의 수학적 방법이 투영되어 당시 조선의 과학적 수준과 세계에 대한 인식범위를 가늠할 수 있는 점에다, 무엇보다도 남극대륙의 존재와 ‘캘리포니아 섬’에 대한 의문에서였다. 아래 니콜라스 샌슨(Nicolas Sanson, 1600~1607 프랑스)의 지도에 보이는 ‘캘리포니아 섬’을 지구전후도와 천하전여총도, 그리고 오늘날 지도상의 그것과 비교해 보자.
독자들은 위 지도뿐만 아니라, 지구전후도와 앞서 확인한 ‘캘리포니아 섬’ 지도들 모두를 상호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섬과 반도가 각자 차지한 면적의 비율이 서로 어울리지 않다는 점을 말이다. 오늘날 지도상의 실제의 캘리포니아 반도는 북아메리카 서해안의 하단부분만을 차지하는 데에 비해, ‘캘리포니아 섬’이 나타나는 모든 지도엔 섬의 크기가 캐나다의 밴쿠버 부근에서 하단까지, 즉 오늘날의 미국 서해안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는 ‘캘리포니아 섬’ 지도들이 각기 동일한 종류의 지도(혹은 지도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증거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 캘리포니아 섬’ 지도의 최초 제작자가 실제 그곳을 탐사하면서 그곳을 섬이라고 오인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아래의 지도를 살펴보자.
위 지도에서 독자들은 앞서 말한 필자의 결론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아래는 필자의 견해이다. 어귀를 확인한다. 그런 뒤 반도의 바깥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여 오늘날의 밴쿠버 해안에 이르러 그곳의 (오늘날의 미국본토와 캐나다의 서쪽 국경해안에 걸쳐 있는) 해협을 발견한다. 그는 그 해협이 앞서 확인한 캘리포니아 반도의 내해內海와 이어지는 것이라고 오인하곤 지도상에 그곳을 거대한 섬으로 묘사한다. 것이다. 궁금증을 말이다. 과연 누가 지도상에 최초로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을 그려 넣었는가? ‘캘리포니아 섬’ 등의 문제에 있어선 동양의 독자적 기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라는 가설을 지녀왔다. 현재 대부분의 백과사전에 의하면 호주대륙이 최초로 알려진 것은 1606년 네덜란드의 W. 잰츠(Willem Janszoon, 1570~1630)가 이끄는 탐험선 두이프켄 호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론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이나 수隋나라의 역사서인 수서隋書 등에 캥거루가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백과사전의 정보는 어디까지나 서양의 관점이란 사실을 말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지구전후도’의 독자적 기원은 결코 허무맹랑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필자는 바로 천하전여총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현재까진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것임을 부정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만약 이 지도가 실제 1418년 제작의 천하제번식공도를 모본으로 하여 필사된 것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모든 지도들 중에서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이 나타나는 가장 앞선 시기의 지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틀림이 없다. 나아가 그들에 의해 수집된 지리상의 정보가 유럽으로 전해진것이 분명하며,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중세 지도학상의 모든 수수께끼가 해명된다.’ 이러한 결론에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여전히 천하전여총도의 위작에 대해 의심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
5. 세계의 중심, 한반도
이 장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문제의 천하전여총도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또 그만큼 지도의 분석결과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이다.
한편으로 독자들 중 상당수는 지도의 진위여부에 앞서, 도대체 그 지도가 우리 역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에 더 관심을 느낄 것이다.
더욱이 ‘바다의 한국사’란 제하의 이 글의 첫 장에 내세운 주제이기에 말이다.
이 장에서는 그러한 의문을 놓고 논의를 시작하자.
문제의 천하전여총도는 2006년 1월의 공개 직후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학계에 미친 파장은 물론이고 세계 유수의 방송에 의해 비상한 관심사로 취급되어왔는데, 특히 미국과 동남아시아는 지도의
진위논쟁에 있어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유독 한국에선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문제의 지도가 중세 중국의 지도이기에,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며, 더구나 이른바 ‘동북공정’에
심기가 불편한 우리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행여 지도가 더해줄 중국역사의 영광과 그에 대비되는 우리역사의 상대적 빈곤 탓일 것이다.
어쨌든 문제의 천하전여총도는 공개와 동시에 뉴질랜드의 와이카토 대학에 분석이 의뢰되었다.
분석결과는 뒤에서 살피기로 하고, 여기선 일단 다음의 내용으로 논의를 시작하자.
이제까지 보았듯이 독자들은 천하전여총도(1763년)에 나타나는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이란 특징이 공교롭게도 조선의 두 지도,
지구전후도(1834년)와 곤여전도(1860년)에도 나타남을 알았을 것이다.
만약 천하전여총도가 실제로 1763년의 것이라 밝혀진다면, 이 지도들 중에서 시간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의 지도이자, 두 특징이
담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지도가 된다.
그렇다면 이 지도들을 그보다 앞선 시기의 지도들과 비교해 보자. 아래는 앞장에서 다룬 4지도 중의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
(1602년)와 기울리오 알레니의 만국전도(1623년)이다.
▲ 1602년 제작된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 [자료사진 - 서현우] | ||
알다시피 위 지도들은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들이다.
그런데 위 지도들엔 (당연하게도) 남극대륙 및 호주대륙이 미지의 영역으로 나타난 반면, 캘리포니아 반도의 실제 정보가 담겨 있다.
즉 캘리포니아 일대의 실제 정보가 (당시 유럽의 일반적인 지도보다도 더) 이른 시기부터 동양에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이다.
더하여 4지도의 나머지 지도들인 조선의 지도, 천하도지도(1770년)와 ‘하백원의 만국전도’(1821년)는 이 지도들의 복사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 내용이 흡사하다.
그러므로 이들 4지도가 17C 이후의 동양의 일반적인 세계지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천하전여총도가 후대의 위작이라고 간주해 보자. 위작자는 당연히 위 지도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작자는 왜 위 지도에서 부정된 ‘캘리포니아 섬’을 차용했으며, 나아가 콜럼버스 시대 이전인 1418년의 원본 지도
(천하제번식공도)를 운운했을까? 그것은 스스로 위작임을 드러내는 꼴이 아닌가?
더하여 원본지도에다, 조정에 바쳤음을 의미하는 공도貢圖란 이름을 붙여서 말이다.
한편으로 지구전후도의 제작자인 최한기, 김정호와, 곤여전도의 중간重刊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왜 그들은 당시 신정보이자, 이미 일반화된 정보를 외면한 채 굳이 그들의 지도상에 ‘캘리포니아 섬’을 택했을까?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당대 실학의 거두이자, 부호였던 최한기의 서고, 태연재泰然齋와 기화당氣和堂엔 중국, 일본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각종 진귀한 물건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위 지도들 이외의 여타 동서양의 신 지도들도 접했을 것이다.
위의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필자가 가질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리는, 천하전여총도가 스스로 알리고 있듯이, 실제 그 지도가 1418년
제작의 천하제번식공도의 모사본이란 것이다.
아울러 최한기와 김정호가 천하전여총도와 그 기원을 같이하는 모종의 지도를 입수하여 그것을 더 신뢰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판 곤여전도의 모본이라 알려진 1856년 광동판 곤여전도 역시 같은 경우일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논리이자, 가설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몫이다.
자, 이제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논의의 마지막으로, 필자가 이제까지 언급을 미뤄온 지도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 보자.
이 특징이야말로 필자가 이 지도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이유의 핵심이 된다.
이제 독자들은 눈길을 아래의 천하전여총도로 향하여, 지도의 중앙에 남북으로 그어진 수직선이 어디를 지나는지 확인해 보길 바란다.
▲ 2006년 1월 17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의해 런던에서 공개된 1763년 제작의 세계전도 '천하전여총도'. 한반도가 중심에 놓여있고 지도상엔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를 필사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
||
순간 독자들의 눈이 커질 것이다. 놀랍게도 중앙 수직선이 한반도를 관통하고 있음이 아닌가?
앞서의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나, 알레니의 만국전도를 보라.
그 지도들의 중심 경선은 그저 태평양 가운데를 지나, 각자 베링해 양안의 육지로 이어질 뿐이다.
중심 경선과 한반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천하전여총도의 중앙에 한반도가 놓여져 있다니?
한반도를 지나는 그 수직선의 위아래로 눈길을 따라가 보라.
그 선은 접었던 흔적이라 보기엔 선의 굵기가 어울리지 않게 가늘다.
독자들 중의 일부는, 그렇다고 해서 이 선이 한반도가 지도상의 중심임을 나타낸다고 보기엔 무리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처음 생각도 그랬다.
그러나 이 지도가 1418년 지도의 모사본이라고 밝혀진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최종 판단이다.
이 수직선을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1418년 당시의 중국적 사유방식이나, 가치관, 세계관에 의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지도가
되고 만다.
독자들은 뒷장에서 (이 글의 다른 주제에서 다룰) 대명혼일도 같은 지도를 통해, 당시 명나라 지도의 특징들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인데, 앞서 언급한 직방세계관으로 볼 때 당연 지도의 중심은 중국, 그것도 당시의 명나라 도읍지인 오늘날의 남경이나, 새
도읍지로 한창 건설공사 중이던 오늘날의 북경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이 수직선은 한반도가 중심임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어진 선이다.
즉 한반도자오선을 강조하는 일종의 지도상의 경선인 것이다.
독자들의 판단은 어떠한가?
보다시피 이 지도는 두 개의 큰 원을 일부 겹친 형태로 하여 그 안에 세계를 담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의 수직선이, 두개의 원이 맞닿는 아래위의 ∨와 ∧, 두 모서리를 잇는 가상의 수직선에서 약간 어긋남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놓고 필자는 한반도 상上의 수직선에 대해 두 가지 경우를 추론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 수직선이 지도의 모본인 1418년의 천하제번식공도에 실제 그어져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만약 그렇지 않다면 1763년
모사본의 제작과정에서 제작자의 눈에 한반도의 위치가 모본과 달리 지도의 중앙에서 약간 비켜나는 것처럼 보이자, 제작자가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특별히 그은 선이라고 말이다.
필자로선 그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만약 독자들마저 필자와 의견이 같다면, 우리는 위 수직선을 지도상의 한반도자오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지도의 진위여부에 따라 두 가지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즉 1418년 모본 지도의 존재가 진실이라면 대체 그 지도제작자가 누구인가라는 것과, 이와 달리 이 지도가 후대의 위작이라면 대체
그 위작자는 무슨 의도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우리로 하여금 위작의 심증을 더 하게 하는 것인가를 말이다.
자, 이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분석을 마치기로 하고, 이제 그것을 둘러싼 국제적 논쟁과, 뉴질랜드 와이카토
대학의 분석결과에 대해 알아보자.
분석결과가 나오기 이전까지 논쟁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1763년이란 제작연대에 있었다.
즉 지도가 실제 1763년의 것임이 확인된다면 당연히 1418년의 원본지도는 인정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경우의 비유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만약 한국인의 누군가가 현재까지 확실치 않은 화성이나, 여타 태양계 행성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합하여 최대치의
추정지도를 작성한다고 하자.
그는 어떤 엇갈리는 정보를 판단하는데 있어 더 오래된 정보를 취하는가 하면, 어떤 부분에선 일반이 쉽게 알 수 없거나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과감히 취하여 마침내 지도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 한국인은 엉뚱하게도 지도상에다, 이 지도가 (인류가 지구 밖의 행성 탐사에 나서기 전인) 20C 초의 어떤 시점에 작성된
지도의 모사본이라고 써놓는다.
그의 실제 의도는 후세에 이르러 한국인이 최초의 행성탐사에 나섰다는 증거조작을 위해서이다."
"실제로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오래전에 제작되어 아주 낡아버린 지도가 한 장 있는데 아무개는 그 지도가 보관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지도를 정성들여 모사한 뒤 모사한 지도에 그 유래를 밝힌다."
독자들은 위에 예에서 어느 쪽이 현실적이라 생각하는가? 불문가지, 두 번째일 것이다.
더하여 첫 번째의 예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그런 한국인이 있다면 그는 사기꾼이기 이전에, 거의 정신병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논쟁의 초점은 1763년에 맞춰져 있었다.
논쟁의 양상을 들여다보자.
세계 언론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도 지도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주로 미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졌다.
특이하게도 필자에겐 미국을 제외한 유럽과 호주 등의 서방사회가 논쟁의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볼 뿐, 진위 논쟁에 적극적이지
않는 것처럼 비쳐졌다.
필자의 생각에 서양의 이러한 반응은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어쨌든 진위논쟁에서 대표적 인물은 미국 워싱턴 주 타운샌드 소재 신대륙발견연구소의 구나 톰슨(Gunnar Thompson) 박사와
싱가포르국립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게오프 와데(Geoff Wade) 박사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지도가 진실이라는 입장의, 후자는
위작이라는 입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위 톰슨은 인류학자이자, 고지도연구가로서 신대륙 항해에 대한 수수께끼를 다룬 여러 저서를 출간한 인물인데, 그는 최근에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는 명나라 초기 정화 함대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세계주항의 가능성을 뛰어넘어, 이미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시대에
몽골 함대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런 만큼 그는 천하전여총도를 중세 유럽지도 및 원나라 지도와 비교해 가며 천하전여총도야말로 중세 유럽지도의 기원이었음을
주장했다.
반면 와데는 천하전여총도가 지난 5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이수한 누군가에 의한 위조품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두 개의 원에 세계를 묘사함은 유럽의 전통이며, 또한 ‘캘리포니아 섬’은 17C 유럽의 것이다.
또 중국을 중앙에 둔 (그의 표현) 세계지도는 17C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도에서 나타남을 볼 때, 이 지도는 예수회
지도를 텍스트로 하여 17C 유럽지도를 베낀 것이다.
2. 명나라 시기의 여타의 지도 어디에도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반영하지 못했다.
3. 실제 구형의 지구를 평면에 묘사하려면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데, 당시 중국엔 그런 지식이 없었다.
4. 지도엔 해안선만이 아니라, 내륙의 하천이나 산맥이 그려져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5. 중국이 볼품(원문엔 Poor)없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의 중국인 지도제작자가 왜 자신의 나라를 그렇게 초라하게 묘사했는가?
위의 양 입장은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이다.
한쪽은 유럽의 지도가 그것(천하전여총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유럽지도의 모사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필자가 확인한 바, 양측 어느 쪽의 주장에도, 또 그 내용에도 지도의 중심으로서의 한반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지도가 위조된 것이라 주장하며 위 와데가 내세운 근거는 필자가 보기엔 동양에 대한 무지의 발현일 뿐이다.
싱가포르 국립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서 말이다.
필자는 다음 장에서 그의 저급한 동양에 대한 인식수준을 15C 조선의 관점에서 규명해 보일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논쟁의 과정에서 2006년 3월 하순, 뉴질랜드 와이카토 대학의 분석결과가 세상에 알려졌다.
방사선 탄소 연대측정 및 질량스펙트럼 분석 방법을 통해 나온 결과는 지도 제작에 사용된 종이와 잉크가 실제 17~18C의 것이란
내용이었다.
(종이는 이미 지도의 공개 당시부터 대나무로 만든 종이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연대가 밝혀진 셈이다.)
이러한 결과는 필자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겐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다양한 해석이 요구되는 문헌학으로서의 역사학이 내린 결과가 아니라, 자연과학이 실증해준 엄연한 과학적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제 천하전여총도는 250여년의 세월을 넘어 역사학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둘러싼 비밀의 껍질을 누군가가 하나씩 벗겨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지도의 중심, 한반도. 한반도자오선.
과연 누가 무슨 의도로 한반도를 세계의 중심에 세웠을까? 그리고 그의 정체는, 대체 그는 누구일까?
6. 천하전여총도와 정화 선단
우리는 앞장에서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문제의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결과, 지도제작에 사용된 종이와 잉크가 실제 17~18C의 것이며, 또 세계전도로서의
지도의 중심이 바로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래는 지도상의 세계의 중심, 한반도를 재확인하기 위해 그 부분을 확대해본 것이다.
▲ 천하전여총도 중심부. [자료사진 - 서현우] | ||
▲ 천하전여총도 아시아 중심부. [자료사진 - 서현우] | ||
한반도 상上에 ‘고려高麗’란 두 문자가 뚜렷한 가운데, 지도상의 중심을 나타내는 수직선이 지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고려高麗’란 두 문자는 한반도의 한 가운데에 씌어져 사각형의 테두리로 둘러져 있는데, 수직선은 그것의
세로방향과 정확히 평행하여 그어져 있다.
이로서 우리는 ‘고려高麗’가 먼저 씌어지고 난 뒤에, 수직선이 그것과 겹치지 않도록 주의하여 그어졌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지도를 제작할 땐 지도에 담을 내용을 정한 후, 우선적으로 지도의 중심을 결정한다.
그 다음에 지도의 전체 내용과 지면의 크기에 따른 비율을 가늠할 것이다.
보다시피 천하전여총도에 나타난 중심은 한반도이다. 게다가 그곳이 중심임을 강조하는 수직선까지 나타나 있다.
분명 수직선은 그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1418년의 원본지도에 나타났는지, 아니면 1763년 모사 당시에 원본지도 상의 중심을 재차 강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것은 또한 다분히 의도적이자,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을 전제로 우리는 원본지도제작자의 정체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원본지도제작자에게 있어 한반도는 그의 정신적 근원이자, 모태란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체성이 지도상의 ‘고려高麗’에 있다는 말이다.
천하전여총도의 원본지도인 1418년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는 ‘공도貢圖’란 이름이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까지의
항해결과에 대한, 보고 형식의 지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본지도제작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바다 및 항해와 관련 있는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곤 그가 어떻게 원본지도에 나타난 내용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겠는가?
나아가 그가 항해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런데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는 명나라 3대 황제인 성조成祖 대에 조정에 바친 지도이다.
성조의 연호인 영락永樂16년이란 지도상의 설명이 그것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위 지도제작자는 당시 명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영락제 시기의 유명한 정화鄭和 제독의 남해 대원정이다.
정화의 원정은 1405년에서부터 근 30여 년에 걸친,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대규모 선단에 의한 7차례의 대항해를 말한다.
지금까지의 역사의 정설은 이 항해의 무대가 인도양 전역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남아시아 연안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여,
동아프리카 해역에까지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서 이 항해가 세계적인 관심사로 대두되었는데, 그 이유의 핵심은 정화 선단의 항해 범위가 기존의 인도양
연안만이 아니라,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 각지와 남극 대륙 등에까지 이른 전지구적 차원의 항해였다는 주장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들은 필자가 보기엔 무시할 수 없는 정황․증거들을 토대로 한 것으로, 만약 사실로 입증된다면 가히 세계역사를 새로 써야
되는 차원의 문제이다.
그것은 정화 선단의 업적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바스코다 가마, 페르니난도 마젤란 등의 시기보다, 단지 앞선다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상 서양 지리상의 항해가 동양의 성과에 기인한 것이란 결론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천하전여총도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이 지도가 정화 선단의 세계 항해를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하여 필자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관심은 위 지도제작자와 정화 선단의 관계이다.
한마디로 그는 정화 선단에서 어떤 존재였나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항해의 성과를 담은 지도의 작성을 맡았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 글 전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앞질러 결론을 내리자면 당시 정화 선단의 항해는 비록 명 조정의 대외정책에
기이한 것이지만, 실제 그러한 항해를 가능케 한 항해술과 조선술 등 항해의 절대적 기반은 위 지도제작자와 같이 당시까지 ‘한반도
정체성’을 지녀온 해상집단이란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의 전반에 걸쳐 그 사실의 논증은 물론이거니와, 이들 해상세력의 기원에서부터 명멸하기까지의 활동무대를, 또 이들이
서양 지리상의 항해에 미친 자취들을 하나씩 밝힐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사의 해부는 불가피할 것이며, 오늘날 동북공정의 역사적 연원도 접할 것이다.
다시 정화 선단의 항해로 돌아가 보자.
정화 선단의 항해가 최근 세계적 관심사로 부상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계기는 영국의 연구자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멘지스는 2001년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심포지엄과 그 이듬해 출판하여 일약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명나라 영락제 시기의 정화 선단이 유럽에 훨씬 앞선 시기에 세계 곳곳을 항해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 무려 14년이란 시간동안 세계 각지의 200여 도서관과 박물관, 또 정화 선단이 발길이 닿았을 곳곳의 현장을
탐방했다.
사실 정화 선단의 세계주항에 대한 주장은 비단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학계 일각에선 1970년대부터 제기된 문제로, 다만 서양의 주류학계에서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멘지스의 주장이 세계적인 조명을 받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그의 특이한 경력 때문이다. 그는 비록 주류학자가 아닌 일개 연구자에 불과하지만, 어느 학자보다 설득력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즉 그는 영국 해군의 잠수함 함장 출신으로, 세계 곳곳의 바다를 직접 항해한 경험에다, 전 바다에 걸쳐서 계절에 따른 해류의 흐름과
바람의 특성은 물론, 과거의 천문항법, 지도 및 해도의 제작 능력까지 지식을 겸비한 항해에 관한 가히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란 점이다.
그런 그는 중세 유럽의 지도가 정화 선단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각 지도들을 예로 들어, 어느 계절의 어느 시간에 어느 방향으로
항해하여 지도를 작성한 것인지, 또 당시 바다의 상태는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런 배경과 설득력 있는 논리로 인해 그의 주장은 세계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세계 곳곳에서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왔고, ‘내셔널지오그래픽’과 ‘디스커버리’ 등의 TV 채널 등이 앞
다투어 관련 프로를 방영한데다, 할리우드에선 그의 저작물에 대한 영화제작권을 사들이기까지 했다.
필자가 볼 때 멘지스의 저작은 그 내용의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서양인이 그렇듯이 동양과 중국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동양의 성과물은 죄다 중국의 성과로 인식하는 서양 일반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지스가 정화 선단 이전의 동양 지리지식을 설명하면서 지적한 중요한 근거의 하나가 조선의 지도라는 점이다.
그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란 이름의, 1402년 조선의 개국공신인 이회와 이무, 김사형에 의해 제작되고,
권근의 발문이 씌어진 지도인데 흔히 혼일강리도라 불리고 있다.
아래 지도를 보자.
▲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흔히 혼일강리도라 불린다.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모사본 4본이 일본에 남아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엔 4본 중의 일본 교토, 류코쿠 대학 소장본의 모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
||
위 지도는 당시 중국의 직방세계관이 잘 표현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을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시킨 데에 비해, 아프리카나 유럽 등의 상대적 크기가 터무니없이 작다.
또한 인도 반도(대륙)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가 지닌 놀라운 점은 멘지스가 주목했듯이 아프리카 대륙의 동서해안과 유럽 일대가 나타나는 지도란 점이다.
지도상의 아프리카를 보라.
비록 위경선의 비율이 어긋나지만 동서해안의 윤곽이 매우 사실적이다.
더하여 지도상엔 아프리카 지명이 35여 곳, 유럽 지명이 100여 곳이나 나타나기까지 한다.
조선 개국 10년 만에 그려진 지도에 아프리카와 유럽에 대한 정보가 이 정도라면 우리로선 당시 조선의 세계인식에 대한 놀라움이자,
중상주의를 표방했던 해양국가 고려를 인식하는 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지도는 1992년 콜럼버스의 첫 항해 500주년 기념행사에서 각광을 받은 지도이며, 멘지스의 저서에서 아프리카가 묘사된 세계
최초의 지도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멘지스가 말한 ‘세계 최초’는 사실이 아니다.
일전에 멘지스의 연구팀에서 필자에게 혼일강리도에 대해 문의 해 올 때까지도 멘지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래는 중국 명나라 초기의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1389년)이다.
▲ 1389년의 대명혼일도, 세계 최초로 아프리카가 나타나는 지도이다. [자료사진 - 서현우] |
||
▲ 1389년의 대명혼일도, 세계 최초로 아프리카가 나타나는 지도이다. |
||
위 지도는 얼른 보기엔 앞서의 혼일강리도와 매우 흡사한 것으로, 혼일강리도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지도제작상의 기풍인 직방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상대적 크기 등 세부적으로 볼 땐 혼일강리도완 분명 다른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필자가 굳이 혼일강리도와 대명혼일도를 한꺼번에 소개한 이유는 이들 지도의 관계 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알리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혼일강리도에 대한 학계 대부분의 설명은 혼일강리도가 대명혼일도를 참조로 제작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혼일강리도에 씌어진 권근의 발문과,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엔 원나라 이택민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1330년?)와
승려 청준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1328~1392년)를 참조하여, 조선과 일본 부분을 보강하여 작성한 것이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외 어디에도 대명혼일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럼에도 대명혼일도를 참조했다고 하는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 두 지도의 유사성 때문이라 생각된다.
아쉽게도 위 원나라의 성교광피도와 역대제왕혼일강리도는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의 추정으론, 조선의 혼일강리도와 대명혼일도의 유사성으로 볼 때 아마 위 원나라의 두 지도 및 대명혼일도 모두에
영향을 준 모본이 따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혼일강리도엔 고려 중기의 문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언급된 ‘만국삼라와 우리나라가 함께 그려진 화이도華夷圖’,
그리고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 말 나흥유의 ‘고려와 중국이 그려진 지도’ 등에 나타난 축적된 지식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 글의 다른 장에서 거듭 다루어 나가겠지만, 필자는 위 가상의 원나라 모본지도라던가, 고려의 지도들 모두가 실제 천하전여총도의
제작자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집단의 산물이란 것임을 확신한다.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이외의 그러한 지도를 작성할 해상집단은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위의 인도 대륙 부분이 누락된 혼일강리도와 대명혼일도의 모본지도를 가정한다면 애초에 누군가가 중국지도에다, 아프리카
부분이 따로 그려진 지도를 인도로 오인하곤 두 지도를 함께 이어 작성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장으로 천하전여총도를 주제로 한 1장이 마감된다.
다음 장엔 놀라운 우리 해양사의 자취들을 살펴보겠는데, 이 장에서 고지도 한 종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 지도는 ‘천하도’란 이름의 지도인데 같은 종류의 지도가 국내외에 아마 백여 본이 넘게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들 지도는 거의 태반이 조선의 것으로,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 대유행한 우리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 우리의
지도라 할 수 있다.
▲ 천하도1. [자료사진 - 서현우] | ||
▲ 천하도2. [자료사진 - 서현우] | ||
위 지도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가 중심에 놓인 가운데 그 외곽을 하나로 이어진 대륙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중세의 세계관이 반영된 지도임을 알 수 있는데 문제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선 지도에 나타난 외곽의 대륙을 상상의 산물로
보아왔지만, 최근 서양 일각에선 동양이 일찍이 태평양이나 대서양 너머의 대륙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종류의 천하도 하나가 2005년 5월 챨로테 리즈(Charlotte H. Ree's, 女)란 이름의 미국인에 의해 미국의회도서관에
소개되어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다.
강연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그대로이다.
중세 동양이 서양에 앞서 세계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말이다.
리즈가 소개한 지도는 지금은 고인이 된 그녀의 아버지 헨던 해리스(Hendon M. Harris) 박사가 1972년 서울의 한 골동품 상점에서
구입한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현 우리나라의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하도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지도에서 보듯이 우리의 조상들이 일찍부터 아프리카 대륙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고, 또 어떤 근거로 대양 너머의 대륙을
가정하여 지도상에 그려놓았는가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이제 이 장의 마지막으로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현재의 상황을 알아보고, 앞장에서 살핀 위작론자인 와데 박사의 15C 동양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드러내어 보자.
천하전여총도에 대해선, 2006년 3월 뉴질랜드 와이카토 대학의 분석결과 공개 이후, 일각에서 1418년의 원본지도의 존재여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논쟁은 가라앉은 상태이다.
그리고 와데가 말한, 원본지도의 제작 당시에 중국의 어떤 지도에서도 지구가 구형이란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며, 구형을 표현할 수
있는 수학적 능력이 없었다는 지적에 대해 당시 조선의 관점에서 논박해 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엔, 오늘날 세계에서 당대 최고수준의 수학자이자, 이론천문학자로 평가받는 이순지가 당시 도성인 한양의
위도를 ‘북위 38도 강强’이라고 세종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강强은 거의 근접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서울의 위도가 북위 37.34도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관측 및 계산능력의 한계로 인해 현재의 계산 값과 오차를 보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가 남긴 저서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의 분석을 통해 그 차이가 결코 오차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칠정산내편은 천구를 365.25도로 나눠 방위를 365.25도, 1도를 100분율로 정한데 비해, 아라비아 과학을 흡수한
칠정산외편은 오늘날과 같이 천구를 360도로 나눠 방위를 360도, 1도를 60분율로 정한 것임을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서울의 위도 값인 37.34도를 365.25도에 적용하여 얻은 계산 값은 37.91이 된다.
바로 이순지가 말한 38도 강强에 이르는 것이다.
또 그는 천구의 주기를 오늘날의 그것에 소수점 이하 6째 자리까지 정확히 일치하는 계산 값을 남기기도 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조선의 과학수준은 서양에 비해 백여 년 이상이나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그런 지도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의 동양과학을 평가절하 할 순 없는 것이다.
필자는 천하전여총도야말로 그에 대한 지도학 상上의 증거라고 확신한다.
'최초의 나라 한(환)국 > 지도- 천하전여총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0) | 2011.12.21 |
---|---|
고대 세계지도 (0) | 2011.12.13 |